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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비아- 핵과 석유, 카다피를 위한 변명 (류경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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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강산
댓글 0건 조회 1,908회 작성일 19-12-16 1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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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비아- 핵과 석유, 카다피를 위한 변명

                                               류경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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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리비아 무아마르 카다피 국가원수

1969년 27살에 혁명으로 집권한 카다피. 아랍 민족주의와 이슬람 사회주의를 표방, 범아프리카합중국을 꿈꾸며 중동과 북아프리카 최고 부국을 이뤘지만, 2003년 미국의 압력에 굴복해 핵개발을 포기한 뒤 저강도 전쟁과 색깔혁명에 이은 2011년 미·나토의 전격 침공으로 살해된다.

42년 카다피의 온실을 벗어난 인구 640만의 리비아는 8년간 7개 정부를 거치며 1,700여 무장그룹이 난립하는 만인대 만인의 싸움터가 되었다. 올해 4월 동부 군벌 칼리파 하프타르의 트리폴리 공격으로 내전 종식의 전기를 맞고 있는 리비아의 어제와 오늘을 미국의 세계전략과 그에 맞선 카다피의 대결을 중심으로 살펴본다.

리비아 역사 개관

고대에 베르베르인으로 기록된 리비아는 카르타고와 로마에 복속되었다가 7세기 후 아랍화된다. 16세기부터 오스만투르크의 지배를 받았고, 1911년 이탈리아 식민지에 이어 2차대전 후 영·불 분할통치에 시달린다. 1951년 12월 리비아연합왕국으로 독립하고, 1959년 석유(매장량 세계 9위)가 발견되었다.

1969년 9월 카다피 대위가 무혈혁명을 일으켜 왕정을 폐지하고 리비아아랍공화국을 선포했다. 석유산업과 은행을 국유화하고 이슬람 교리와 혼합된 리비아식 사회주의를 채택한다. 동서 냉전의 시기 중립을 취해 이슬람 민족주의를 지향하고, PLO를 지원하는 등 미국의 제국주의적 행태에 대항해 이슬람권의 주권 회복과 아프리카 결속을 위한 행보를 계속해왔다.
    
미국의 카다피 악마화와 테러 혐의 날조

카다피는 집권 42년간 미국과 서방 40여 나라에 맞서 탈미·반제국주의 노선을 고수했다. 미국은 테러지원국 지정, 경제봉쇄와 자산 동결, 항공기 운항 금지와 잇따른 공습 등으로 응답했다. 아울러 각종 공작과 음모를 통해 국가 전복과 카다피 암살을 시도했다.

케이시 CIA 국장이 밝힌 대표적 반카다피 공작은 1972년 뮌헨올림픽 기간의 '검은 9월단'에 의한 이스라엘 선수 살해사건, 1986년 서베를린 디스코텍 폭파사건, 1988년 미 팬암기 폭파사건과 1989년 프랑스 민항기 폭파사건 등이 있다. 모두 리비아와의 연관성이 모호한 가운데, 대부분 미국과 이스라엘, 독일 등의 자체공작이거나 사우디 등 중동 타국의 소행임이 드러난 바 있다.

카다피 집권기에 성취한 것들

1969년 혁명으로 아프리카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를 물려받은 카다피는 2011년 리비아를 아프리카에서 1인당 GDP와 평균수명이 가장 높은 나라로 만들었다. 카다피를 '폭군, 독재자, 중동의 미친 개, 테러리스트'로 낙인찍은 서방 제국과 주류언론들이 드러나기를 원치 않는 카다피의 주요 치적들은 다음과 같다. (전국을 소규모 자치공동체로 분산하고, 1,000명으로 구성된 전인민의회를 통해 국민에게 최고결정권을 부여한 리비아식 직접민주주의 정치체제에 대한 평가는 논외로 한다. 2009년 카다피는 뉴욕타임즈를 초대해 2주간 민주주의 시스템을 관찰하도록 했고, NYT는 "모든 사람이 모든 결정에 참여한다"고 인정했다.)

1. 주택 소유는 천부인권 간주 : "집은 개인과 가족의 기본 수요이므로 타인에 의해 소유되어서는 안 된다"고 자신의 정치철학을 담은 그린북에 명시(카다피는 모든 리비아인이 집을 가질 때까지 자신의 부모에게도 이 원칙을 적용한다고 공언했다), 신혼부부의 첫 아파트 구입비 50,000달러 지급 
2. 전액 무상교육, 무상의료 : 중동과 아프리카 최고 수준의 의료 서비스 제공, 더 나은 교육과 치료 접근을 위해 필요시 해외 출국 비용 지급 
3. 세계 최대 규모의 사막 관개 프로젝트 수행 : 3,500km '위대한 인공하천 프로젝트'(세계 8번째 불가사의), 국토의 95%인 사막을 오아시스로 바꾸는 첨단자급농업 미래 제시(2011년 침공으로 파괴)
4. 농업 비즈니스 : 농장 경영을 원하면 집과 농장 토지, 생계 물품, 종자 무료 지급
5. 출산시 장려금 5,000달러 지급
6. 전기 무료, 저렴한 석유 14센트/리터(약 160원, 세계 3번째로 저렴)
7. 충분한 식품, 일일 칼로리 섭취량 3,144Cal, 영양부족율 5% 이하(FAO)
8. 문자해독율 25% → 87%, 46%는 대학 수준 도달
9. 국영은행 보유 : 0% 이자율로 대출, 외환보유 1,500억 달러, 대외부채 0(미국 부채 18조 달러)
10. 실질적인 성평등 실현 : 여성의 교육, 직업, 이혼, 재산 및 소득에 대한 권리 보유, 노동과 복장은 가족 통제 하에 자유 허용, 2011년 대학생의 절반 이상이 여성(아랍 공동체의 민감한 성 역할 고려할 때 커다란 업적으로 평가)
11. 인간개발지수(HDI : 의료, 교육, 소득 통합척도) 세계 163개국 중 53위 : 아랍국 최고 수준, 2009년에 2015년 밀레니엄 개발목표 조기 달성
12. 골드 디나르(금에 연동된 아프리카 금융기구와 단일통화), 아프리카합중국 창설 추진(석유자원, 천연가스와 함께 서구 침공의 직접적 원인이 됨)
13. 전 국민에 석유자원 민영화 프로그램(총 320억불 재원) 2011년 2월 발표, 2011년 최초 1인당 21,000달러 지급 계획 : 부패 일소, 외국기업의 석유 탈취 차단, 권력 분산 목적

네오콘의 세계전쟁

1997년에 설립한 미 보수 싱크탱크 '새로운 미국의 세기를 위한 프로젝트(PNAC)'는 소비에트의 해체로 단극화된 국제사회를 효율적으로 통제·지배하는데 필요한 청사진을 직설적으로 제시한다. 천연자원의 보고인 중동 지역에 대한 미국의 통제권 확대와 달러제국의 유지, 잠재적 경쟁국인 중국에 대한 견제, 기독교 근본주의에 바탕한 침략전쟁의 합리화 등이 그것이다. 새로운 미국의 헌법이었다.

PNAC는 21세기를 미국의 세기로 규정하고, 세계 유일의 제국으로서 미국의 역할을 강조하며 군사적 정복을 위한 로드맵을 설계했다. 여기서 중앙아시아와 중동에 '직접적인 미국 전초기지 수립'이 제안되고, '세계경찰' 기능 수행을 위한 폭격과 특수부대 파견, 비밀작전과 정권교체 등도 포함된다. 이 모든 것들은 '민주화 증진'과 '인도주의적 전쟁'의 이름으로 행해지고 주류언론들이 이 여론전에 봉사했다. 

"2003년 이라크 침공은 석유에 관한 것이었다. 세계 최대 원유기업 핼리버튼의 CEO였던 체니는 1998년 '원유가 있는 곳으로 가야 한다. 정치적인 불안정성은 크게 고려하지 않는다'라고 말했다. 체니는 럼스펠드와 '5년 이내 7개국(이라크, 시리아, 레바논, 리비아, 소말리아, 수단, 이란) 탈취'라는 군사 캠페인을 설계했고, 나토군 총사령관이었던 웨슬리 클라크는 2007년 저서 <현대전의 승리>에서 이 사실을 공개했다. 이들 7개국은 거대한 중동 원유의 중국, EU 및 세계 경제로의 흐름을 통제하기 위한 전략지역이다." <New Eastern Outlook>

불행히도 이들의 기획은 '9.11 테러사건'을 계기로 대부분 현실화되었고 표적이 된 국가는 철저히 '인도주의적으로' 파괴되었다. 부시와 클린턴, 오바마 재임 23년간 이슬람 9개국이 침공당했다. PNAC 주요 인물들 중 볼턴은 현재 군산복합체의 상징으로 자리매김하고 있고, 7~80년대 남미의 콘도르작전으로 악명 높았던 에이브람스는 베네수엘라 담당 특사로 마두로 정권 교체에 동분서주하고 있다. 아미티지는 미·일·한 3각군사동맹 구축 로드맵인 아미티지보고서를 작성한 인물이다.

카다피의 핵개발 시도와 좌절, 무장해제

재미 한호석 박사에 따르면, 미국의 일상적인 제재봉쇄와 공습에 시달리던 카다피는 1990년대말부터 파키스탄 핵의 아버지 칸 박사의 국제 핵거래망을 통해 원심분리기를 수입하기 시작한다. 만일 우라늄농축공장이 미국의 방해를 받지 않고 계획대로 건설되었다면, 해마다 핵탄두 10발씩 만들 수 있는 고농축우라늄을 생산할 수 있었다.(뉴욕타임스 2004년 2월 12일)

하지만 CIA가 고용한 스위스 국적 3부자 스파이(타임지에 따르면 CIA는 이들에게 4년이 넘는 기간 1,000만 달러를 지급했다. 후일 스위스 당국에 체포된 이 스파이는 미국의 압력으로 석방된다)에 의해 이 계획이 노출되면서 2003년 10월 리비아로 가던 독일 선적 화물선이 이탈리아 항구에서 전격 나포되고 원심분리기들이 압수된다. 증거를 확보한 미국의 드센 압박으로 궁지에 몰린 카다피 정권은 핵개발을 포기하는 수밖에 없었다. 결국 2003년 12월 핵무기 의혹시설과 대량살상무기를 자진 폐기하고 국제원자력기구 등 국제기구의 사찰을 수용한다. 파키스탄에서 만든 P-1 원심분리기 1만 개와 우라늄농축공장 설계도, 핵탄두 설계도는 모두 미국 테네시주 오크리지로 반출된다.

미국은 카다피의 무장해제 후 아랍식 사회주의 체제를 인정하고 경제봉쇄 해제와 테러지원국 명단 삭제 조처를 취한다. 또 2006년 5월 15일 미-리비아 공식 수교를 발표하면서 카다피의 "역사적 결단"을 높이 평가했다. 그러나 약속한 경제지원의 이행은 지연되었고, 미국은 2008년 아프리카사령부(AFRICOM)를 창설하며 2011년 중동과 북아프리카를 휩쓰는 '색깔혁명'을 예비한다. 

'리비아 작전'과 석유전쟁 : 아프리카의 신식민지 재분할

미국과 나토 국가들에게 리비아는 여러 면에서 중요했다. 리비아의 확인된 석유 매장량은 465억 배럴로 아프리카에서 가장 많고, 미국의 두 배를 넘는다. 고품질과 저렴한 채굴비용(국제 원유가격이 100달러라면 리비아의 채굴비용은 1달러 정도)의 이점이 있고, 천연가스 매장량도 많다. 프랑스가 눈독을 들인 엄청난 양의 지하 화석 대수층(하얀 황금)도 있다.

침공의 근저에는 유전을 확보하고 국영석유회사(NOC, 세계 25위)를 해체하여 민영화한 뒤 외국에 넘기는 목표가 자리했다. 리비아 석유산업에서 중심적 역할을 수행하던 중국 국영석유회사(CNPC) 축출도 포함되어 있었다. 리비아 금융기관 해체와 해외 재무자산 압류는 추가 전리품이었다.

리비아는 아프리카, 지중해 및 아랍 세계의 전략적 교차점에 위치한다. 나아가 북아프리카에서 중앙 및 서부 아프리카에 이르는 광활한 지역의 중심에 위치한 관문이다. 역사적으로 이 지역은 프랑스와 벨기에 식민지의 일부였으며 1884년 베를린회의에서 일방적으로 찢겨 국경이 확정되었다. 미국의 리비아 개입은 장기적으로 프랑스의 영향력을 약화시키고 지정학적·군사적 통제권을 장악하는 신식민주의적 재분할 과정의 일부였다.

보다 긴급한 당면 문제는 리비아의 해외 투자자본, 특히 아프리카에 자체의 금융기구와 통화를 제공하려는 주권기금이었다. 2011년 침공 직전 미국과 유럽은 리비아 주권기금을 동결·압류하여 전체 프로젝트에 치명적인 타격을 가했다. 미 국무부가 공개한 3천여 통의 힐러리 클린턴 이메일은 전쟁의 진정한 목적이 카다피가 아프리카 연합의 단일 통화기구, 달러와 프랑(구 프랑스 식민지 14개국 통화)을 대체할 아프리카 통화를 만들려는 계획을 저지하고 원유자원을 확보하는 데 있음을 보여주었다. 오바마 대통령에게 "리비아에서의 비밀 작전을 허가하고 반군에게 무기를 공급하는 문서"에 서명하도록 한 것은 클린턴이었다. 후일 카다피 살해 소식을 접한 힐러리는 공개적으로 "왔노라. 보았노라. 그가 죽었노라!"라고 환호한다.
        
미국과 나토, 리비아를 파괴하다

리비아를 무장해제한 미국은 PNAC의 군사 로드맵을 실행한다. 트리폴리 정부에 적대적인 부족들과 이슬람 테러리스트 그룹들에 자금을 조달하고 무장시켰다. 동시에 위장한 카타르 특공대를 포함한 수천 명의 특수부대들이 리비아에 침투했다. 초기에는 미 아프리카사령부를, 그 다음은 미국 지휘 하의 나토를 통해 전체 작전을 미국이 이끌었다.

나토 특수군과 CIA의 지원을 받으며 과거 카다피와 반목했던 알 카에다 등 지하디스트가 지휘하는 이슬람 민병대가 무장폭동의 골격이 되었고, 일방적으로 비행금지구역을 설정한 나토가 공습으로 지원했다. 미영불 특수군이 민간 반군 복장으로 위장하여 정부건물에 대한 공격작전을 배후에서 지원했다. 주권국을 전복하기 위해 정교하게 기획된 작전, 색깔혁명이었다. 2008년 8월 시작된 반카다피 폭동은 2011년 벵가지 시위를 거쳐 본격적인 무장반란으로 확대된다. 미국의 '진보인사'들과 '대안언론'도 아이러니하게 이를 지지했다.

2011년 3월 19일 리비아에 대한 공중-해상 폭격이 시작되었다. 7개월 동안 미·나토 공군은 2만 회 이상의 출격과 7,700회 이상의 공습으로 4만 개가 넘는 폭탄과 미사일을 투하했다. 4월 중순에 이미 대서양동맹의 폭탄은 소진되기 시작했다. '인도주의적' 군사작전의 규모와 강도를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구 식민 종주국 이탈리아는 7개의 군사기지와 군대를 공여하여 참전함으로써 양국 간의 우호, 협력에 관한 조약을 찢어버렸다. 지중해의 아름다운 도시들이 파괴되고 8월 말 리비아는 '해방'되었다. 

미·나토 전쟁으로 리비아는 소멸하고 10월 20일 시르테에서 붙잡힌 카다피도 살해당했다. 높은 수준의 복지와 인간개발지수, 경제성장을 유지하고 있던 나라는 사라졌다. 격차는 있을지라도 리비아인들의 삶의 지표는 다른 아프리카 국가들보다 상당히 높았다. 이것은 2백만이 넘는 이민자, 주로 아프리카인들이 리비아에서 일자리를 찾았다는 사실에 의해 입증된다.

사하라 이남의 아프리카 이민자들도 카다피와의 협력 혐의로 박해를 받아 투옥되거나 도피해야 했다. 내전과 테러의 혼돈 속에 절망한 많은 사람들이 유럽으로 향하다 지중해에서 난파했다. 42년의 카다피 지배와 '혁명'기를 합친 것보다 2011년 이후 훨씬 더 많은 사람들이 죽었다. 목숨을 잃은 사람들은 침략전쟁의 희생자였고, 요행히 살아남은 사람들 앞에는 80~400달러 인신매매와 노예시장이 기다리고 있었다.

카다피 사후 정세(2011~2019)

- 2011년 2월 벵가지 시위, 무장반란, 3월 19일 나토 공습 시작, 8월 트리폴리 함락
- 2011년 9월 유엔총회, 리비아과도국가위원회(NTC) 회원국 지위 인정
- 2011년 10월 20일 시르테에서 카다피 살해
- 2014년까지 민병대 난립, 정규군과 경찰 구성 실패, 두 개의 정부
- 2014년 5월 하프타르 쿠데타 실패 후 토브룩 정착, 두 개 의회, 7월 내전상태 돌입
- 정파·부족·동서부 지역대립, 투아레그 등 분리주의, 이슬람 근본주의, IS 테러 등 난립
- 2016년 1월 통합정부 구성 발표, 내분·평화협상 지속
- 2017년 1월 식민 지배국 이탈리아와 학살 사과, 피해 보상과 지중해 난민 단속 협력 합의
- 2018년 3월 카다피 차남 사이프 알이슬람 카다피(2017년 6년 만에 출소, 45), 대통령 선거 출마 발표
- 2019년 4월 하프타르, 트리폴리 진격...트럼프, 하프타르 지지로 선회
   * 서부 트리폴리 기반 리비아통합정부(GNA)
      : 국제적인 인정, 터키, 카타르 등 친무슬림형제단과 일부 서방 지지
   * 동부 도시 토브룩, 하프타르 주도 리비아국민군(LNA)      : 이집트, 사우디, UAE, 러시아, 프랑스, 이탈리아, 남아공 등 지지

동부 군벌 칼리파 하프타르는 2019년 4월 '2주 만의 해방'을 호언하며 서부 트리폴리에 대한 총공세를 개시했지만 여전히 결정적인 승기를 잡지 못한 채 소모전을 이어가고 있다. 리비아 유전의 80%가 위치한 동부 주요 유전지역을 포함해 국토의 80% 가량을 장악했지만, 일부 지역은 여전히 분리주의자와 이슬람국가의 통제 하에 있다, 남부 접경은 테리리스트의 은신처, 북부 지중해 연안은 유럽향 인신매매 시장이 형성되어 있다.

하프타르는 독특한 이력의 소유자이다. 1943년생(76세)으로 1969년 혁명군 간부로 참여하지만, 1987년 리비아-차드 전쟁에 포로로 잡혔다 석방된 뒤 반카다피 군사조직 리비아국민군을 결성한다. 1990년 미국으로 망명, 버지니아 CIA 본부 근처에서 장기간 체류하며 카다피 전복을 지지했다. 2011년 카다피에 맞선 지상군 사령관으로 귀국, 카다피 축출 후 다시 도미했다. 2014년 재귀국 후 토브룩에 정착하고, 2017년 제2의 도시 벵가지까지 장악했다.

한편 시리아 위기에 대한 결정적인 군사 개입 이후 러시아도 아랍 전역에서 점점 더 영향력을 키우면서 이제는 리비아에 주목하고 있다. 2011년 이전 리비아와 석유 및 가스산업에 100억 달러 규모의 계약을 체결했던 러시아는 내전이 재개된 2014년 이래 하프타르와 협력하면서도 신중한 전략을 취해왔다. 하프타르 정부를 위해 디나르 화폐를 인쇄했으며, 하프타르는 모스크바에 두 차례 방문해 러 최고관리를 만났다. 러시아는 부상당한 LNA 병사들을 치료했고, 유일한 항공모함 쿠즈네초프호가 리비아에 정박해 하프타르를 초대하기도 했다. 또한 동부에 2개의 러시아 군사기지 건설을 허용하는 협정에 서명했다. 최근 GNA측은 러시아 용병이 LNA에 배치돼 있다고 주장했고, 하프타르의 트리폴리 공격과 관련해 모호한 입장을 취해온 폼페오 미 국무장관은 리비아 내전과 관련해 "러시아와 협력하길 희망한다"고 밝혔다. 

7개 정부를 거치며 혼돈을 거듭하고 있는 리비아의 미래는 30년 중동전쟁에서 발을 빼려는 트럼프의 정책과 새로이 개입을 강화하는 푸틴의 중재력, 허약한 GNA를 막바지로 밀어붙이는 하프타르의 향후 재건·정치일정, 카다피의 명예회복에 절치부심하는 차남 사이프 알이슬람 카다피와 8년의 지옥을 경험한 리비아 민심의 향배에 달려있을 것이다. 광대한 자원을 보유하고 지구 최대의 지하 담수층 개발을 통해 첨단농업혁명을 꿈꿨던 리비아는 스스로의 힘으로 행복하게 살아갈 능력과 권리가 있다.

카다피를 위한 변명

오바마는 훗날 리비아 침공이 정당한 이유에 따른 개입이 아니라 사르코지와 카메론이 '개판을 친 것'이라고 변명했다. 자신의 대통령직 수행에서 최악의 실수는 "카다피 전복의 여파에 대한 계획이 부족했던 것"이라고 유감을 표명했지만, 여전히 개입은 "옳은 일"이라고 강변했다. "미국은 유엔의 임무 수행에 노력했고, 리비아가 미국의 핵심 이익은 아니라 장기 군사 개입은 피하려 했다"고 주장하면서. 리비아가 철저히 파괴된 뒤였다.

영국 의회보고서는 리비아의 혼돈에 카메론이 궁극적인 책임이 있다고 발표했다. 나토는 민간인 보호를 위해 개입했다고 주장하지만, 미셸 초서도브스키 교수는 미국과 나토 수반들의 '인도주의적 개입'을 고위급 전쟁범죄로 규정했다.

로동신문은 지난 10월 21일 무기사찰 승인, 핵무기 폐기 등 서방의 요구를 수용했지만 지도자들이 죽음에 이른 이라크와 리비아를 언급하며 "미국의 사탕발린 소리에 현혹된 리비아 지도부는 타협하는 길로 나갔다. 결과는 비참하였다. 주권이 유린당하고 사회적 무질서와 혼란에 빠져들었으며 인민들은 불행과 고통을 겪게 되었다", "당근과 채찍을 번갈아 휘두르며 무릎을 꿇게 하는 것이 제국주의자들의 속심으로, 한걸음의 양보는 열 걸음, 백 걸음의 양보를 가져오고 종당에는 망하게 된다"고 주장했다. 북 외무성은 5월 16일 담화에서 "진정한 국제적 정의를 실현하기 위하여서는 자주성에 기초한 새로운 국제질서를 세워야 한다...국제적 정의는 저절로 이루어지지 않으며 반제자주적 나라들의 힘이 강할 때만 실현될 수 있다"고 밝혔다. 

"세계에 사정사정하려 했던 이라크와 핵을 포기한 리비아에게 일어난 일을 통해 세상은 이런 교훈을 얻어버렸다. 만일 제국의 분노를 피하고 싶다면 빼곡히 중무장을 하라. 일단 스스로 무장 해제해 버리면 그 어떤 이도 자신들을 보호해주지 않는다라고!" _ 케네스 N. 오키프, 미 반전주의자이자 전직 군인

"카다피의 혁명은 확실히 21세기 경제민주주의에서 가장 크게 성공한 실험 중 하나가 되었다. 이와 아주 대조적으로, 서구 지지 하에 이루어진  2011년 반정부 시위는 21세기의 가장 큰 사회적, 군사적 실패 중 하나로 역사에 기록될 것이다. 그것은 리비아의 혁명이 아니라 카다피 제거를 위한 대서양동맹의 거짓 혁명이었다. 리비아는 카다피와 함께 죽어버렸다. 우리는 카다피 당신이 그립다." <Global Research/The African Exponent>

2011년 10월 20일 고향 시르테에서 살해당하기 몇 시간 전 카다피는 죽음을 예견한 듯 가족들에게 짧은 마지막 육성 녹음을 남긴다.
"아빠다. 너희에게 수치가 아닌 긍지를 남긴다. 죽음은 수치보다 낫다. 싸움은 수치보다 낫다. 오늘 시르테의 포위를 뚫을 것이다. 그 과정에 순교할 수도 있다. 슬퍼하거나 울지 마라. 기뻐해라 딸아. 기뻐해라 딸아. 기뻐해라 딸아. 나는 부정의한 40개 나라와 맞선 40년의 전투에서 순교하는 것이다." (계속)

<참조 : 미셸 초서도브스키 ‘Global Research’, 전쟁의 세계화, 코드핑크 ‘이라크 전쟁에 관한 인민법정’, 리처드 베한 ‘사기전쟁’>

류경완 KIPF 공동대표 webmaster@minplus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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