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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소설 조선의 힘 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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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강산
댓글 0건 조회 4,382회 작성일 19-12-24 1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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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

 

그날… 리숙이 류현수의 상처를 수술하였다. 한 간호장에 불과한 처녀가 손에 메스를 들고 달려붙었다. 현수는 처녀가 팔을 부들부들 떨던것을 먼저 기억한다. 눈을 꽉 감고 보지 않으려 했지만 순간순간 몸을 흠칫거리며 눈을 뜨군 했었다. 한두번 칼질을 하면 될것을 열번 스무번도 더 했던것 같다. 리숙의 이마우에 매달려 위태롭게 흔들리던 커다란 땀방울도 기억한다. 간호원 한영순이 손수건으로 닦아주었다. 그러면 인차 커다란 땀방울이 또 데룽데룽 매달리군 했다.

이를 사려물고 신음소리를 씹어삼키며 지독한 아픔과 싸우면서 현수가 본것은 그것이 전부였던것 같다. 끝내 그의 상처를 파헤집고 파편을 끄집어냈다. 겨우 손톱눈만 한것이였다. 그토록 작고 보잘나위없는 쇠붙이가 그리도 큰 아픔과 고통을 주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었다.

그날밤… 현수는 오래도록 잠들지 못했다. 새벽녘에야 깜박 잠들었다가 또 눈을 떴다. 새벽의 등판은 싸늘한 이슬에 푹 젖어들었었다. 현수에게서 열발자국쯤 떨어진 등성이한끝에서 리숙은 짚단을 깔고 앉아 자고있었다. 옆에는 언젠가 현수가 보초를 선다면서 메고가던 보총을 비스듬히 세워놓고 무릎을 감싸안았다. 무릎우에 머리를 얹고 꼼짝도 하지 않고있다. 첫 수술을 하고나서 죽은듯이 자고있다.

고요한 안개가 리숙의 무릎아래를 포근히 덮고있었다. 등뒤의 살맹이나무가 처녀의 머리우에 가지를 드리웠다.

차츰 새벽빛이 넓게 퍼져갔다. 현수는 저 맞은편 짚더미우에 앉은 처녀를 지켜보고있었다. 리숙의 머리우에 뽀야니 내려앉은 이슬이 희끄무레하게 드러났다. 나무가지에 맺힌 이슬이 소리도 없이 떨어져내린다. 하나, 둘, 셋… 계속 규칙적으로 떨어져내리건만 리숙은 여전히 고달픈 꿈결속을 헤매고있는것 같다. 차츰 등판의 풀들이 잎사귀를 펴들기 시작했다. 대기는 선잠을 깨는 숲의 미묘한 음향으로 가득찼다. 그 순간 현수는 리숙이 머리를 드는것을 보았다. 놀란 눈빛으로 주위를 둘러보고있다. 이슬에 젖은 머리를 손으로 쓸어넘기고 모자를 썼다. 이윽고 자리에서 일어나 보총을 들려다가… 갑자기 그 손을 움츠렸다.

《어마!-》

가느다란 부르짖음소리, 잠시 까딱하지 않고 서있다. 현수는 숨을 죽였다. 이윽고 리숙은 나무가지에 기대여 세운 보총에 손을 내밀었다. 무슨 지뢰인발선이라도 다치는듯 조심스럽게 손끝을 놀리고 총창끝을 어루쓸고 또 손끝을 놀리고있다. 그 순간 현수는 그 총창끝에 망울을 터친 한송이 나팔꽃이 달려있는것을 보았다. 밤새 그 어린 줄기가 총창끝을 뱅뱅 돌려감았던것이다. 그 무슨 자연의 속삭임이라도 엮어놓은듯 촘촘히 한벌 두벌 또 한벌 감은것 같다. 리숙이 그것을 풀고있다. 이슬에 젖은 꽃망울, 섬약한 줄기가 끊어질세라 조심스럽게 풀고있다.

뜨거운 아픔이 목구멍으로 가슴속으로 불길처럼 스며들었다. 웬 아픔이냐, 웬 눈물이냐?!… 물어보자. 온밤 나를 지켜봤을 별들아!… 총살선고를 받고있는 나를 지켜준 저 깨끗한 사랑을 나는 왜 진작 몰랐더냐. 어데 가나 나를 보살피고 지켜주는 이 뜨거운 사랑을 나는 왜 아직 다 모르고있었더냐?!…

파르스름하고 희슥희슥한 쑥덤불에서 풀벌레가 씨르륵거렸다. 찔레꽃나무의 엽전잎같은 잎사귀들이 번들거렸다. 풀잎사귀들에서 이슬이 뚝뚝 떨어져내리고있었다.

…그때부터 현수의 상처는 빨리 아물어갔다. 비록 몸은 말라빠지고 시꺼매졌어도 그의 눈빛은 빛나기 시작했다. 소생하기 시작한 기력은 그를 차츰 일행의 맨 앞장에 서도록 했다. 그대신 리숙은 맨 뒤에 섰다. 리숙은 저도 모르는새에 자기가 걸머지였던 무거운 짐을 하나하나 현수에게 넘겨주고있었다.

그러던 어느날이였다. 저녁무렵부터 날이 흐리고 바람이 불었다. 일행은 화전민부락이 내려다보이는 등판에서 소금을 구하러 내려간 한영순을 기다리고있었다. 그런데 돌연 날카로운 총소리가 산아래에서 울렸다. 마을끝에 있는 산막집에까지 이르렀던 한영순이 되돌아 달려오르는것이 보였다. 콩볶듯 하는 총소리가 뛰따랐다. 얼마후에 마을쪽에서 재빛의 작은 점들과 같이 작게 보이는 적들이 쓸어나왔다. 적들은 재빨리 버성긴 산병선을 지으며 추격하기 시작했다. 놈들은 분명 마을에 내려갔던 녀병사 한사람뿐이 아니라는것을 짐작한듯 했다.

다수가 몸을 제대로 운신하지 못하는 부상병들이여서 리숙은 어찌할바를 몰랐다. 마을로 내려갔던 간호원은 무작정 일행이 기다리는 산등성이로 곧추 달려오고있었다. 나무에 가리워 잠시 보이지 않다가는 또 피끗 드러났다. 적들이 쏘아댄 총탄에 나무가지들이 뚝뚝 부러져나갔다. 그것을 바라보면서도 사람들은 망연히 어찌할바를 모르고 서있었다. 돌연 누군가 신음소리처럼 가늘게 부르짖었다. 한영순이 한순간 비틀거린때문이였다. 발치의 바위돌에서 불찌가 튕겨났다. 그러나 다음순간 처녀는 나무가지를 휘여잡으며 뛰쳐올라왔다. 탄환은 여전히 그의 발꿈치 가까이에 팍팍 들이박혔고 머리우에서 날카로운 죽음의 휘파람소리를 질렀다.

《빨리, 빨리!…》

리숙이 부르짖었다. 그옆에서는 낯이 새파래진 박원철이 이를 북북 갈며 끙끙거리고있었다. 아무도 이런 때 어떻게 해야 할지 알지 못했다. 추격하는 적들과 점차 거리가 좁혀지는것을 가슴을 조이며 지켜보고있을뿐이였다. 점차 탄알은 그들 가까이에까지 미쳐왔다.

《영순이, 이쪽으로…》

리숙이 또 부르짖었다. 그리고 피뜩 머리를 돌려 누군가를 찾았다. 류현수를 찾고있는것이다. 오직 그만이 이 위급한 정황에서 제때에 옳은 결심을 내릴수 있다고 생각했던것이다.

현수는 벌써 보총을 겨눠들고있었다. 사계가 좋은 츠렁바위아래에서 탄갑을 옆에 놓고 때마침 리숙을 건너다보았다.

《간호장동무, 빨리 피하오. 다들 데리고 저기… 비탈을 에돌아가오. 계속 산중턱을 가로질러 가야 하오.》

《그럼 동문?…》

《놈들을… 막겠소. 30분이상은 견지할수 있소.》

그때에야 다들 현수쪽으로 머리를 돌렸다. 지금 그가 무엇을 결심하고있는지 비로소 알아차렸다.

《그건 안돼요!》 리숙의 목멘 웨침소리였다. 《우린 다같이… 가야 해요. 그렇게 해선 안돼요!》

《못난소리! 어서 사람들을 데리고 빠지오. 놈들이 우릴 포위하고있소!》

그러자 박원철이, 다음 김상준이 그에게로 다가들었다. 박원철의 떼꾼해진 두눈이 펀뜩이였다.

《나두 남겠어요!》

《섯!》

현수가 웨쳤다. 그리고 박원철의 가슴팍으로 곧추 보총을 겨눠들었다.

《다가서지 마오! 알겠소? 누구든지 가까이 오면… 용서치 않겠소. 내 말을 듣소. 성한 사람들이 다 남으면 부상병들은 어떻게 되겠소. 빨리 피하오. 간호장동무, 구령을 치오. 어서!》

숨이 턱에 닿은 한영순이 눈앞에 나타났다. 휘파람소리같이 가쁜숨을 내뿜으며 풀썩 쓰러졌다. 머리우에로 점발사격의 총성이 메아리치며 울려갔다. 현수는 억제할수 없이 울컥 치솟는 격정을 삼키며 웨쳤다.

《뭣하는거요. 간호장!… 이제 조금만 더 지체했다간 다 끝장이요. 젠장, 빨리 피하오!》

《현수동무!》

눈물에 목멘 처녀의 부르짖음이였다.

《가오. 가라는데!… 난 죽지 않소. 뒤따라갈테요. 리숙!…》

리숙은 한영순을 일으켰다. 정신없이 두릿거리다가 해군소속 포병이였던 중상자를 거들었다.

《날 따라!- 다들 조심해요!》

박원철도 김상준도 어쩌는수가 없었다. 그네들이 남으면 움직이지 못하는 부상병 두사람도 남아야 한다. 다들 자기가 거들던 부상자들과 한덩어리가 되였다. 아츠러운 총소리가 이제는 멀지 않은 곳에서 터졌다. 구령소리도 어렴풋이 들려왔다. 그 순간《땅!-》하는 단발사격이 여무지게 터졌다. 현수가 쏜것이다.

리숙이 걸음을 멈추고 돌아보았다. 검푸른 그 녀자의 두눈이 한순간 굳어져버린듯 했다. 입은 벌려지고 소리없는 웨침이 막 터져나오는듯 했다.

《가오. 리숙! 념려말고 어서!》하고 현수는 마지막으로 한번 더 리숙을 바라보며 속으로 부르짖었다. 《동무를 잊지 않겠소. 리숙, 기운을 내오. 마음을 단단히 먹으라니까. 동무들은 모두 살아야 하오. 나도 꼭… 찾아갈테요!…》

리숙은 목을 비틀며 휘친거렸다. 홀로 남은 현수에게서 눈길을 뗄수 없었다. 발을 옮겨놓을 때마다 무엇엔가 걸채이군 했다. 씰금씰금 눈물에 젖으며 부상병의 람루해진 옷자락을 꽉 붙잡고갔다. 어느덧 그들의 뒤에는 땅거미가 깃든 한산한 숲만이 남았다. 보이지 않는 그쪽 츠렁바위아래에서 탄알을 아껴가는 여무진 총성이 울리군 했다. 무질서한 미식소총의 사격소리도 그치지 않았다. 얼마후엔 그 총소리들이 산너머쪽으로 옮겨진듯 했다. 류현수가 적들을 달고 가는 모양이였다. 리숙이 수술한후 겨우 아물기 시작한 상처가 또 짓이겨질것이다. 아직 누군가의 부축이 없이는 걷기 힘들어하던 류현수이다. 그러한 그가 지금 적들을 달고 산너머로 가고있다. 풀대를 그러쥐고 땅을 허비며 한치 또 한치 기여가는지도 모른다. 질풍같이 터지는 총소리끝에 또 한방 보총사격소리가 울렸다.

《현수동무!-》

리숙은 걸음을 멈췄다. 땀에 젖은 머리칼이 눈섭우에 달라붙어있었다.

리숙은 손등으로 이마의 땀을 훔쳤다. 귀를 강구고 터질것 같은 가슴을 누르며 또 한방의 총성을 기다린다. 그러나 더는 아무 소리도 들려오지 않는것 같다. 이를 악물었다. 목구멍은 뜨거운 경련에 마구 죄여들었다.

《어떻게 된 일이예요. 예? 현수동무!-》

그때 멀리서 울리는 기관총소리가 들렸다. 그러나 물기를 머금은듯 한 그 귀에 익은 여무진 보총소리는 더이상 들려오지 않았다.

모두 서로 엉켜선채 헐썩거리며 귀를 강구고있었다. 그런데 이때 그들이 지나온 뒤쪽에서 웅성거리는 말소리들이 났다. 적들의 한무리가 발자취를 쫓아오는것이 분명했다. 장교인듯 한 놈이 앞선 사병들을 재촉하고있었다.

리숙이와 상병자들은 서로 부축하며 숲속을 가로질러갔다. 소리를 죽여보려고 무진 애를 다 썼으나 천근만근 무거운 발걸음에 삭정이들이 부서져나가군 했다. 그때마다 가슴이 졸아들어 마지막열물까지 짜낼것 같았다.

갑자기 일제사격의 총성이 지척에서 터졌다. 모두 일시에 그자리에 굳어져버렸다. 머리우에서 나무우듬지들이 부러져내렸다. 불과 스무나문발자국뒤에서 놈들이 어둠이 깃든 숲속에 대고 총을 쏘아대고있었다. 시꺼먼 숲의 어둠이 놈들의 발걸음을 멈춰 세운듯 했다. 무어라고 중얼거리는 소리들이 있은후 또 일제사격의 총소리가 울렸다. 리숙의 눈앞에서 한영순의 두눈이 미친듯 흥분에 떨며 불꽃처럼 타고있었다. 리숙이 힘들게 속삭였다.

《앉아요. 다들!…조심해요. 소리내지 말구…》

시꺼멓고 침울한 적막이 그들의 머리우를 꽉 내려누르기 시작했다. 머리속이 웅웅 울리고 이따금 발밑의 땅이 무너져내리는듯 아찔해졌다. 그러는 속에서도 리숙은 보총을 겨눠들고 무섭게 웨치던 류현수를 생각했다. 불시로 가슴속에 들어차는 쓰라린 아픔으로 하여 그는 숨이 막혔다.

머리우의 어둠속에서는 재빛구름이 낮추 스쳐가는듯 했다. 찬기운을 풍기며 밤이 깃들인 숲속에서 썩은 나무잎이며 물기를 머금은 땅의 씁쓸한 냄새가 풍겨왔건만 리숙은 여전히 숨을 죽이고 귀를 기울이고있었다.

오래도록 귀를 강구었지만 아무런 소리도 없었다. 현수는 끝내 따라오지 않았다. 사위는 싸늘한 적막에 잠겨있었다. 희끄무레해지기 시작한 동켠 하늘에서는 별들이 힘없이 깜박이고있었다.

날이 밝자 류현수가 싸우던 츠렁바위아래에까지 그들은 샅샅이 더듬어보았다. 그곳에서 힘들게 기여간 자리가 산등성이너머로 나있었다. 바위모서리에, 나무등걸에 불에 그슬려 꺼멓게 된 천터럭들이 붙어있었다. 이따금 짓이겨진 풀대들에 묻은 피자욱까지 눈에 띄였다. 마지막으로 총을 쏜 곳에서 3개의 탄피를 주었다. 그곳의 풀대들은 온통 짓이겨져있었다. 무수한 발자국들이 그곳에서 맴돈것 같았다. 어지럽게 찍혀진 발자국들우에 점점이 피방울들이 뿌려져있었다. 수술후 경과가 좋다고 몹시 기뻐하던 류현수였다. 수술자리에 감았던 붕대가 풀려나가고 상처가 다시 헤쳐진 모양이였다. 그런데 그 모든 흔적들은 생생하건만 류현수자신은 아무데도 없었다.

리숙은 숲속으로 난 발자취를 쫓아가다가 그만 우뚝 서버렸다. 별안간 무서운 상상이 억센 발톱처럼 가슴을 그러쥐였다. 두눈이 희뿌옇게 흐려지고 목덜미까지 꿋꿋해졌다. 리숙은 어이는듯 한 아픔에 신음하며 누군가를 질질 끌어간것 같이 마구 파헤쳐진 자리를 지켜보았다.

《현수동무!》

불같은 속삭임이였다. 어느덧 리숙은 가슴속 피가 죄다 말라버린것 같았다. 리숙은 손을 들어 얼굴을 싸쥐였다. 온몸이 와들와들 떨리기 시작했다. 그와 알게 된 지난 몇주일간에 있었던 가지가지의 일들이 두서없이 련이어 떠올랐다.

《아- 현수동무, 어찌됐나요. 죽지 않는다고 하더니. 죽지 않는 운명이라고 하더니… 이게 웬일이예요. 이게!…》

소나무가지들사이로 이슬비같은 안개가 흘러오고있었다. 새벽하늘은 아직도 선뜩하니 푸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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