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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소설 조선의 힘 제2편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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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강산
댓글 0건 조회 4,402회 작성일 19-12-25 19: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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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2 편

 

1

 

리성조의 도착을 제일 기뻐한것은 서병호국장이였다. 청높은 목소리가 수화구의 진동판을 막 찢어놓는듯 했다. 징-징 하는 떨림소리때문에 어떤 말은 잘 알아들을수 없었다.

《여보, 지금 어데서 전화를 하오? 뭐 540호공장에?!… 젠장- 왜 강계로 먼저 오지 않았소. 급히 토론할것들이 많은데… 어쨌든 잘됐소. 우린 동무가 꼭 오리라는걸 알구있었소. 정말이요! 전번엔 좀 가슴아픈 소리도 했지만… 어찌겠소. 전쟁통에 신경이 바늘끝처럼 돼간다니까. 지난일은 다 잊어버리고 손잡고 일해보기요. 아무튼 전쟁을 이기고 볼 일이지. 그렇지 않소?… 음- 그렇게 생각한다니 고맙소. 그럼 그곳에서 먼저 일에 착수하시오. 동무가 도착했다는것을 곧 내각사무국에 보고하겠소. 장군님께서도 소식을 받으시면 대단히 기뻐하실거요. 몹시 걱정하셨는데… 자 그럼 다시 만나기요!》

사람이 판판 달라진것 같았다. 리성조는 놀랐다. 그리고 다음 순간엔 벌써 아프게 할퀴였던 마음속상처가 대뜸 아물어버린듯 느껴졌다. 그가 옳게 말한것 같다. 전쟁이니까…

며칠후 서병호가 전화로 그를 찾았다. 벌써 전날의 감격적인 어조는 사라지고 친밀한 말투 바뀌였다. 공장의 기술장비실태를 묻고는 대뜸 《당장 여기로 오시오. 중요한 회의가 있소. 5시까지는 도착해야 하오!》하고 딱딱하게 말했다. 교통수단이 불비한 조건에서 수백리길을 단숨에 달려간다는것은 불가능한 일이였다. 그러나 서병호는 애당초 그런 조건을 념두에 두지 않았다. 리성조는 시계를 보고나서 어느 농가의 웃방에 들어있는 안해에게도 알리지 못하고 성간역으로 달려갔다. 오늘밤 돌아가지 못할수도 있는데… 하고 리성조는 불안스럽게 생각했다. 안해가 걱정스러웠다. 병자처럼 해쓱하니 여윈 그 녀자의 커다란 두눈을 상기하기가 겁났다. 거기엔 쓰라린 애수와 병든 원한이 비껴있었는데 늘 말 한마디 없이 쳐다보기만 했다. 남의 집 웃방, 춥고 한산하고 먹는것도 변변치 않다. 거기에 설분을 토할 주인마저 없고보면… 외롭고 기가 죽은 모습으로 어둑컴컴한 방구석에 까딱하지 않고 쪼그려 앉아있을것이다.

적기들이 날아와 작은 산간역주변을 온통 뒤어버렸다. 리성조가 역에 이르렀을 때까지 철도복구대원들은 아직 선로를 복구하지 못했었다. 원방신호기가 서있는쪽에서 웃도리를 벗어제낀 사람들이 뛰여다니고있었다. 목도채가 휘도록 흙을 담아 나르고있다.

리성조는 토막숨을 헉헉 내뿜으며 멎어섰다. 산기슭의 인입선에 여러개의 화차를 단 기차가 서있는것이 보였다.

(됐구나!…)

열어제친 코트앞자락으로 얼굴을 마구 문질렀다. 목구멍에서는 아직도 겨불내가 났고 두다리마저 비청거렸다. 당장 그자리에 주저앉고싶었다. 그러나 숱한 사람들이 뛰여다니는데 퍼더버리고 앉아있을수도 없어 그는 천천히 기관차쪽으로 걸어갔다.

그을음냄새가 코를 찔렀다. 류황이 타는 냄새, 기름에 은 침목들이 피식피식 연기를 뿜으며 지독한 냄새를 피웠다. 엿가락처럼 휘여든 레루장들이 여기저기 널려있었다. 선로복구장에서는 도끼질소리와 레루못을 박는 함마소리가 소란스러웠다. 기름도 먹이지 못한 침목을 깎느라고 하얀 도끼밥을 날리고있었다. 왼팔에 완장을 두른 늙은이가 째지는듯 호각을 불었다. 리성조는 멈춰섰다. 그더러 물러서라는 요구인것 같아 그는 작업에 지장이 없도록 멀찌기 에돌았다. 또 호각소리, 그 늙은이는 벌써 사람들을 지휘하기에 여념이 없었다.

《여기로 가져와, 이녀석!… 아지미곁에서 자구난 녀석같이 얼뜬해서…》

《됐수다. 괜히 떠들면서…》

호각소리,

《임자 귀구멍이 막혔어? 그것두 여기 쏟으라구!》

호각소리,

몸집이 실한 중년녀인이 늙은이쪽으로 머리를 홱 돌렸다.

《아주바니! 전에 통검을 했나봅니다레?!》

《그건 무슨 새빠진 소린가?》

《그러게 호각을 그리 잘 불지. 귀청이 찢어지겠수다레!》

떠들썩한 웃음소리, 누군가 목청을 돋구었다.

《그 아주머니 입심두 세다. 우리 선로반장아바이쯤은 노긋노긋하게 주물러대겠군그래. 단번에 떡반죽을 만들거야!》

대철레루를 목고해가던 장년의 남자들이 흐하흐하 웃어댔다.

또 호각소리, 걸찍한 욕설, 그래도 웃음은 그치지 않았다. 리성조는 저도모르게 그자리에 멈춰서서 일하는 사람들을 하나하나 살펴보았다. 방금 폭격이 있은 이 페허에서 그칠줄 모르는 웃음소리를 놀랍게 듣고있었다. 별안간 가슴이 뭉클해졌다.

(힘겨운 때인데도 사람들은 이렇게 웃고 떠들고있다. 전쟁이라고 해서 웃음까지도 다 잊고 살라는 법은 없다. 그리고 웃음을 잃지 않는 한 우리는 만난을 이겨낼것이다. 그래… 리숙이도 어데선가 저 사람들처럼 웃으면서 힘든 고비들을 넘길것이다. 그런데 그 사람만은… 내 처만은… 온몸이 식어버렸다. 마음까지도…)

리성조는 이렇게 생각하며 걸음을 옮기였다.

얼마후 그는 《미가하 63》이라고 새긴 기관차자호를 눈여겨보며 멈춰섰다. 운전실에서 철도복을 입은 늙수그레한 사람이 그를 내려다보고있었다.

《아바이가 기관삽니까?》 리성조는 머리를 젖히고 물었다.

《보면 모르겠소?》 퉁명스러운 대답이였다.

《다음역까지만 좀 타고 갑시다. 급한 회의가 있어서…》

《저기 뒤에 달린 차장차에 가서 부탁해보오.》

리성조는 금시 기관차가 떠날것 같아 맨 마지막 방통쪽으로 황황히 달려갔다.

차장차에서는 광대뼈가 나온 처녀차장이 리성조의 다급한 설명을 무심히 듣고있다가 말없이 승강대에서 비켜섰다. 리성조는 승강대우로 올라갔다. 긴 숨을 후- 내뿜고나서 주변을 둘러보았다. 원방신호기가 있는 그쪽에서는 아직도 복구작업이 한창이였다.

차장차를 문 기차는 얼마후에야 떠났다. 여전히 리성조는 차장차 널벽에 기대고있었고 처녀차장은 승강대발판우에 있었다. 차츰 기차는 속도를 높였다. 역사건물들이 뒤로 지나갔다. 그때 처녀차장이 호각을 길게 불더니 누군가를 향해 손짓했다. 리성조는 전철기쪽에서 웬 젊은이가 마주 손저어주는것을 보았다. 허우대가 크고 억센 젊은이였다. 순박하고 친절한 미소가 어린 젊은이의 얼굴이 처녀차장의 어깨너머로 언뜻 지나갔다. 처녀도 하얀 이를 드러내며 방긋 웃었다. 리성조는 좀 못생긴편인 처녀차장의 옆모습을 물끄러미 지켜보았다. 그리고 그 순간 늘 얄궂게 생트집을 일삼는 다른 한쌍의 눈을 상기하였다. 날씬한 몸매, 어여쁜 얼굴에 짙은 사색의 흔적이 비낀 그 녀자-군수공장의 반토굴식 합숙방 한간, 다음엔 가까운 부락 어느 농가의 웃방에서 하루종일 머리를 싸쥐고 말 한마디 없는 장영실… 리성조는 은연중 한숨을 내쉬였다.

처녀차장은 기차가 산굽이를 멀리 에돌아가자 몸을 돌렸다. 그때에야 지금껏 리성조가 자기를 지켜보고있었다는것을 깨달은듯싶었다. 처음엔 무척 놀란듯 하더니 얼굴을 붉히며 차장칸으로 들어가버렸다. 리성조는 마음이 어수선해졌다. 어데를 둘러봐도 페허뿐이지만 그곳에서 사는 저 사람들의 얼굴에는 희망의 빛이 어려있다. 그런데 내 마음속 한구석은 왜 이렇게 어둡기만 할가. 또다시 안해의 시름짙은 얼굴이 눈앞에 떠올랐다.

돌연 캄캄해졌다. 기차가 굴속에 들어선것이다. 레루이음짬을 넘는 차륜의 덜커덩소리가 소란스러워졌다. 굴간벽이 쿵쿵 울렸다. 연통에서 쓸어나온 연기로 숨이 막힐 지경이였다. 그러나 그는 기차가 굴밖을 나설 때까지 까딱하지 않고있었다.

산기슭, 날카로운 메부리들사이의 벼랑턱으로 기차는 달리고있었다. 비탈면엔 유난히도 붉은 붉나무들이 오손도손 둘러앉아 불길처럼 타고있었고 바위벼랑우에는 흰옷을 팽팽히 조여입은 숲속의 아가씨, 봇나무 두그루가 슬픈 명상에 잠긴듯 서로 의지해 서있었다.

그는 눈을 감아버렸다. 또다시 마음이 쓸쓸해지고 이름할수 없는 애수가 그림자처럼 가슴 한구석에 드리우는것을 느꼈다. 그에게는 지금 그가 의지할 굳건한 사랑이 없다. 나날이 우울해지고 시들어가는 안해가 있을뿐이다. 이제는 빈정거리지도 않고 고약하게 쏘아붙이지도 않으면서 다만 꺼지는듯 한 숨만 내뿜는 안해, 온 공장이 떨쳐나서는 돌격작업도, 공기함마의 드세찬 메질소리도, 시험사격의 총소리도 지긋지긋해 하면서 몸을 옹송그리고 고뇌에 잠겨있는 안해… 하지만 그들이 서로 알게 된 그때, 사랑과 희망에 도취되여있던 그 나날의 장영실은 얼마나 산뜻하고 경쾌하고 충동적인것이였던가!…

맨처음 장영실을 알게 된것은 해방전 서울로 가산을 정리해 이주해간 아버지의 신식벽돌양옥집에서였다. 《소림광업주식회사》의 주권을 사면서부터 《시국은 기업의 터전을 마련할 현명한 인간을 요구한다.》는 좌우명을 가지기 시작한 아버지에게는 새로운 친지들이 많이 생겨났다. 그중 한사람이 유명한 외과의사 《장도칼》이였다.

청등, 홍등이 꿈을 불러오고 틀어놓은 전축에서 잠에 취한 색스폰소리가 아마릴리스청자화분이 놓인 창가를 배회하던 부친의 생일연회, 진솔바지저고리에 호박물부리를 정중히 문 아버지를 둘러싼 사람들이 마쯔오까일본외상의 독일방문과 뒤이은 쓰딸린회견뉴스로 자기들의 선견지명을 시위하고있을 때 리성조는 《장도칼》이 데리고 온 산뜻하고 매력있는 장영실과 마주앉아있었다.

《저분들은 가는 곳마다 그 얘기뿐이예요.》 장영실의 부드럽고 애잔한 목소리에 리성조는 취해있었다. 《마쯔오까외상이 베를린에 갔을 때 환영의 오케스트라가 최고조에 달했다느니 베를린 전시가가 일본국기로 뒤덮여있었다느니 돌아올 때엔 모스크바에서 몰로또브와 비밀교섭을 했다느니 쓰딸린자신이 역에 나와 바랬다느니… 온통 정치문제예요. 과연 일본이 쏘련과 싸우자고 할가요? 성조씨 생각엔 어떠세요?》

《괜한 수고입니다. 내게서 정치적예언이 나오리라고는 아예 기대하지 마십시오.》

《좋아요. 그럼 미술은 어떠세요? 례하면 저 벽에 걸린 치찌안의 <원죄>는 누가 골랐어요? 성조씨의 취미겠죠?》

《아니요. 우리 아버지가 사들인겁니다. 말하자면 신식기업가의 정신적너울이지요.》

《어머- 감히 아버지조차 비웃으시네요. 하지만 제 보기에 성조씨 아버진 놀라운 수완가에요. 땅을 팔아 기업을 시작했거든요. 그 나이에…》

《그런것쯤이야 뭐…》

《아니예요! 목표가 뚜렷한 사람만이 성공하는 법이예요.》

장영실은 고운 두눈을 내려깔고 조용히 시를 읊었다.

 

나는 산으로 오르련다

거기엔 부잇한 옛성터가

아침해발을 받으며 서있어라

깎아지른듯 한 벼랑우에

 

리성조는 깊고도 따스한 그 목소리를 손에 들고있던 포도주잔과 더불어 단숨에 들여마셨다. 꿈결같은 운률이 머리속에서 춤추듯 들레였다.

《하이네지요?… 참 취미도 이만저만이 아니군요. 그런데 난… 전기밖에 모르는…》

《전기란 밝은 빛이 아닌가요. 그러니 성조씨의 장래는 그 빛처럼 휘황할거예요.》

그때 창턱에서는 《장도칼》이 리성조의 아버지를 구슬리고있었다.

《격강이 천리라더니 이제사 만났구먼요.》

《무슨 의미로 하는 소린지…》

《원, 사장의 눈엔 쇠돌밖엔 안보이는 모양이군. 저 보시오. 우리 딸이 그 집 기술자와 어울리는걸… 영낙없는 천상배필이군요.》

《그래도 저앤 나이가 좀…》

《우리 영실이도 처녀는 아닌걸요. 글쎄 하루아침에 청상과부가 되길래 비운이 차례지나 했더니 저렇듯 의젓한 사람을 만나고자 했었단말이지요.》

잠시후 백회색세루지양복을 입은 《장도칼》이 리성조의 아버지를 이끌고 그들의 식탁으로 다가왔다. 느닷없이 축하의 인사말이 있었다. 처음엔 리성조나 장영실도 어안이 벙벙해있었다.

먼저 장영실이 사태를 알아차리고 발그레하게 얼굴을 붉혔다.

《고마와요…》

그리고나서 상긋 웃으며 리성조를 건너다보았다. 만약 그때 그 녀자의 고운 눈매에서 흐르던 미소가 리성조의 《휘황한 장래》를 향해 보내진것이라는것을 미리 알았더라면 모든것은 달리 되였을런지도 모른다.

리성조는 머리를 흔들었다. 차칸에서 처녀차장이 문을 열고 나왔다. 어느덧 기차는 그가 내릴 간이역에 들어서고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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