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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소설 전선의 아침 제14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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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강산
댓글 1건 조회 4,480회 작성일 20-01-25 0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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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jpg


제  7  장

 

박정덕장령은 휴양소뒤골짜기 합수천을 따라 나즈막하게 솟은 작은 언덕의 풀밭에 앉아 풀대를 잘근잘근 씹었다.

싱그러운 풀향기가 코밑을 상긋하게 간지럽히나 입안에서는 그것이 저으기 씁스무레한 맛으로 느껴진다.

그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전시라는것을 잊을만큼 사방은 고요하다. 내가 량켠으로 솟아오른 숲이 무성한 천마산의 련봉들의 중낮인데도 커다란 산그림자를 어벌크게 던져 온천물이 솟구치는 휴양각과 그 앞도로마저 벌써 삼켜버렸다.

전선 먼곳이라는 안정감이 불시에 온몸의 맥을 뽑아내리는것이 이상했다.

실개천건너의 오솔길을 따라 베적삼바람의 사내애가 손에 든 버들가지로 풀숲을 싱겁스레 후려치면서 걸어온다. 그 녀석의 뒤로 하릅송아지 한마리가 아장아장 따라온다.

박정덕은 풀밭에 비스듬히 몸을 기댄채 그 목가적인 광경을 지켜보았다.

어디선가 취할듯한 진한 향기가 풍겨왔다. 이 고장에 많이 자라는 황목련의 달크무레한 냄새다.

박정덕은 어쩐지 마음속이 따뜻해지였다.

별안간 눈시울이 떨리며 아득히 먼곳으로만 여겨왔던 고향마을의 풍경이 생생하게 그려지였다.

석하리, 옛 석기시대의 돌무덤들이 여기저기 흩어져있는 쑥이 무성한 들판, 배나무가 많은 고장, 석하사립학교에 다닐 때는 백마강줄기를 따라 하얀 찔레꽃이 만발하군 했다.

마을 할아버지들은 다 옛 독립군들이였다.

신의주에서 신문배달을 할 때도 가끔 고향길에 들어서군 했다. 조국광복회 지하조직망에 속해 신의주경내의 파출소를 습격한 후 체포되여 대련감옥에 갇혀있을 때만 해도 자주 고향의 돌고분과 백마강물결을 추억했다. 탈옥하는 길로 석달이나 산속을 헤매다 고향을 찾았다. 그것이 1941년 봄이였다.

어머니는 아들이 집문턱을 넘어서자 대뜸 붙잡아세우고 이젠 장가를 들어야겠다고 사정사정하였다. 어머니는 벌써 점찍은 녀자의 집을 다녀온 뒤였다.

박정덕은 그때 펄쩍 뛰여 뒤전으로 물러나 앉았다.

《어머니, 난 조선이 해방되기 전엔 장가 안가요.》

어머니가 봉당에 주저앉아 푸념을 늘어놓았다.

《어이구 이 녀석아, 네 말대로 나라를 찾자구 해두 장가를 가야 한다. 네 할아버지도 화승총을 들고 의병대를 따라다니다 객사하지 않았느냐. 그리고 너같은 아들을 두었기에 또 네 아버지가 촌순사를 두들겨주고도 맘놓고 떠살이를 했지. 나라찾는게 하루이틀에 되냐?…》

박정덕은 그 말에는 그만 가을뻐꾸기가 되고말았다.

낫놓고 기윽자도 모르는 어머니의 말에 일리가 있었던것이다.

박정덕은 밤새 앉은뱅이책상을 마주하고 애꿎은 담배만 태우며 생각을 굴리였다.

(혼사말이 있다는 곳이 산간오지인데 무슨 녀자다운 인물이 있겠는가?… 하긴 혁명에 몸바치려는 내가 그런걸 생각할 때가 아니다. 어머니소원을 풀어드리자. 못생겨도 못살아도 일없어… 그저 병약한 어머니를 곁에서 착실히 돌봐줄 며느리면 되지…)

이렇게 생각하니 마음이 편해왔다. 그는 정지방에 누운 어머니에게 소리질렀다.

《어머니, 처녀가 마음은 무던하대요?》

별안간 야밤삼경에 방안을 흔드는 아들의 목소리가 나자 두루두루 생각이 번잡해 선잠에 들었던 어머니가 와닥닥 일어나 앉았다.

《녀석두 맘뿐이겠니? 내레 한번 봤는데 꽃같은 아가다.…》

《허허 참, 촌녀자가 꽃은 무슨… 호박꽃이겠지요.…》

피현군의 소작농의 딸, 같은 1918년생. 며칠후 룡계리 산골의 오막살이에 들어서서 그 녀자를 보는 순간 박정덕은 놀랐다. 신의주며 간도며 도회지들을 돌아다니느라 숱한 녀성들을 보았으나 머리칼이 칠흑같고 눈에 애수가 깃든것 같은 아련하고 곱게 생긴 이런 처녀는 처음 보는것 같았다.

박정덕은 가슴이 후두둑 뛰였다.…

그 녀자에게는 이름이 없었다. 집에서는 그저 《아래칸녀》, 혹은 《칠월가매》라고 불렀다 한다. 그 녀자는 시집와서도 그냥 이름이 없다가 첫 아들을 보고서야 이름 석자를 가졌다. 남편인 박정덕이 아들과 안해의 이름을 한날한시에 달아주었던것이다.

한해후 박정덕은 다시 고향을 떠났다. 그들이 정식으로 새살림을 시작한것이 그가 련대장으로 임명된 1949년 말이였다. 7년만에 그는 영채도는 눈을 가진 사내애와 세련된 모색의 젊은 부인을 태우고 온 군용차앞에서 어쩔바를 몰라했다.

박정덕의 신혼생활은 사실 이때부터였다고 할수 있다. 그러나 그것도 몇달뿐이였다.

그때부터 그는 다시 고향에 가보지 못하였다.

이듬해 딸애가 태여났다. 딸애는 태여나기 전부터 이름을 가졌다. 박영임… 전쟁이 일기 열흘전이였다.…

실개천아래켠에서 통신군관 김인정이 불쑥 나타나 빨래를 시작한다.

박정덕을 보지 못한 그냥 저혼자 방글거리며 제법 빨래방치를 토닥토닥 두드려댄다. 때이르게 저무는듯 높은 벼랑에 걸린 해가 금빛해살을 뿌릴 때마다 김인정의 숱많은 검갈색머리칼에서 은구슬같은것이 반짝인다.

백마강기슭에서 헌 토스레옷들을 너럭돌우에 올려놓고 희여져라 맑아져라 극성스레 방치를 두드리던 갓 시집왔을적의 안해의 모습과 방불하다.

그래 해방전에야 그 넝마같은 인생이 맑아졌던가, 해들었던가.…

박정덕은 머리를 흔들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일행이래야 김인정이와 함께 온 쌍태머리 교환분대장, 운전사 그리고 젊고 날파람 있는 부관뿐이다.

군단과 그리고 최고사령부와 부단한 련계를 취하기 위해 통신군관과 교환수가 함께 왔던것이다.

박정덕은 천천히 휴양각쪽으로 돌아섰다.

이 고장 온천은 두곳에서 샘솟는데 광물질희박규토샘이다. 다친 상처에는 그저그만이여서 벌써 동퉁이 다 나은셈이다.

방에 이르자 다시 작전지도를 펴놓고 사색에 잠겼다.

자기의 좁은 소견으로 무슨 큰 도움이 되랴만 장군님께서 직접 전선전반을 놓고 그토록 중대한 과업을 맡기셨으니 온 심신을 초불처럼 태워서라도 그 믿음에 보답해야 할것이다.

이제는 전선형편과 적아쌍방의 무력배치, 일반적작전기도, 력량대비, 군종, 병종별특성과 구체적인 군부대들의 배비 및 화력밀도, 후방공급 및 기동상태… 적아방어선의 형성과 특성, 차단물배치, 제2제대와 린접예비대, 지형, 주야계절일기조건에 이르기까지 구체적으로 파악한셈이다.

나아가서 전선사령부관하의 군단들과 그 관하 사단, 련대지휘성원들의 우단점까지 연구하였다. 김일성동지께서 휴양소에 찾아오시여 주시고 간 자료에 기초한것이다.

문득 휴양소에서 김일성동지를 뜻밖에 만나뵈옵던 격동의 그 순간이 가슴을 쩡하게 만들며 돌이켜진다.

숨이 턱에 닿아 먼저 들어온 김명수를 따라 그는 달려가면서 군복을 걸치고 군모를 단정히 썼다.

김일성동지께서는 박정덕의 어깨를 부여안으시며 환하게 웃으시였다.

《그새 몸이 한결 탄력이 생겼구만. 어때?… 총상에는 이 온탕물이 그저 그러하지?》

《아닙니다. 장군님, 효과가 큽니다. 이젠 완전히 나았습니다.》

박정덕은 그립던 아버지품에 안긴듯 속이 편해지는것을 느꼈다.

김일성동지께서는 문건이 든 가방을 넘겨주시였다.

《허허, 정덕동무, 내 동물 시험쳐보려는거요.

거 보안간부훈련소 졸업때가 생각나지? 한번 땀을 빼보우. 하긴 내가 동무의 도움을 받자는거야.》

박정덕은 김일성동지께서 주시는 가방을 조심스레 받아들고 그이를 휴양소로 안내하였다.

한찰나 군단장다운 정황판단과 추리가 번개불처럼 뇌리를 스쳐지나갔다.

그는 자기가 인차 한해동안 정이 든 군단을 떠나게 된다는것을 직감했다. 모든것으로 보아 최고사령부에 소환되여 작전보좌관으로 사업하게 될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그것은 전설적령장의 곁에서 군사를 배우게 되는 삶의 최고절정으로 오르는 인생전환을 의미하였다.

《정덕이, 무슨 생각을 하오?》

《장군님…》

《임무가 대단히 무거워. 하지만 난 박정덕이가 해낼수 있다고 믿소.

전선을 연구하고 전략과 전술을 세우는것도 그래 모든것을 군사적으로만 투시하려 해서는 안되오.

전쟁은 정책의 연장인만큼 혁명발전의 요구의 견지에서 문제를 정치적으로도 분석해야 하오. 적의 기도를 분석평가하는데서도 이 기준을 놓치면 실패를 면할수 없소.

우리 작전가, 군사가들에게 있어서 최대의 목표는 무엇인가. 무조건 이기는 작전, 이기는 전쟁을 해야 한다는거요. 승리한 전쟁에는 총화가 있어도 패한 전쟁에는 그것이… 없습니다.》

김일성동지의 명철한 말씀이 우뢰처럼 드세게 박정덕의 가슴을 뒤흔들었다.

《장군님, 그 말씀을 명심하고 제 장군님의 전략적의도를 실현하기 위하여 힘쓰겠습니다.》

《좋소, 그 각오에다 실력이라는 두자를 더 합하는게 좋겠소.》

김일성동지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시고 휴양각의 1층에 자리잡은 식당으로 리용하는 홀에 들어서시였다.

한창 식사준비를 하던 김인정이 차렷자세를 취하며 인사를 올리였다.

《가만, 이 녀성군관이 누구더라?

오, 김광선의 동생 김인정이라고 했지.》

김인정의 얼굴이 발그레해졌다.

《장군님, 이 인정동무가 이곳에 와서 수고가 많습니다.》

《음, 통신임무가 헐치않소. 전보다 건강해보이누만. 이 온천물이 좋은것 같아. 더 환해졌거든…》

박정덕은 이전에 김인정의 가정래력을 보고드린 일이 있으므로 그이께서 일부러 그 녀자의 마음을 풀어주시려 왼심을 쓰시는줄 모르지 않았다.

어쩐지 아래사람들에 대한 그이의 세심한 관심에 눈시울이 뜨거워지였다.

김일성동지께서는 홀을 둘러보시였다.

《내 인정동무를 보니 기억나는게 있소.

그 〈김싸이〉, 김광선동무말이요. 회령에서 보안서장을 하다가 정찰국에 소환되였는데 아마 그게 49년 봄인것 같아. 우리 집에 와서 점심식사를 한적이 있소.

우리 정숙동무가 〈김싸이〉하면 동생처럼 싸고들었으니까… 가만 누구더라? 오, 인정동무, 동무를 따라다니던 종합대학 축구선수가 있었지? 응, 철학을 전공한다는… 미남자래? 광선동무가 그랬소. 그가 지금 어디 있소?…》

김인정의 얼굴에 어두운 그림자가 지나가며 약간 굳어지는듯싶더니 이윽고 흰 살갗이 서서히 구운 가재처럼 빨갛게 물들어갔다.

박정덕은 문득 종군작가 심봉운의 말이 생각났다.

그렇다면 혹시?…

《저…》

《왜… 무슨 일이 있었나?》

김일성동지께서 안색을 흐리시며 조심스레 물으시자 문득 김인정이 초연히 머리를 들었다.

《장군님, 아닙니다.

그 동문 지금… 정찰국에 소환되여 사업하고있습니다. 금당ㅡ광량만에 기여든 미군 항공륙전대를 소멸하는 전투때… 지휘관의 감사와 처벌을 동시에 받은… 동무가 바로 그 싱거운 축구선수입니다.》

박정덕은 불시에 코허리가 시큰했다.

그 누구에게도 속을 주지 않던 이 김인정이가 솔직하게 장군님께 보고드리는것이 얼마나 사랑스럽고 대견한가.

김일성동지께서는 박정덕에게서 사연을 들으신 기억이 나시여 볼우물을 보이시며 눈가에 해같은 환한 미소를 지으시였다.

《음… 그때의 그 석다산대대장이란 말이지? 그 전무성의 고향이 어디요?》

《평북 룡천군 하장리라는것 같습니다.》

김인정이 난처해하며 눈길을 솔곳이 내리깔았다.

김일성동지께서는 청청하게 웃으시였다.

《하하하… 그래 하장리! 그 장산마을이란 말이지… 하긴 물이야 제곬으로 흘러가기마련이야.… 인정동무, 후에 그 축구선수를 만나면 고향소식을 전하오. 며칠전 장산마을 당원들의 세포회의에 참가해서 정말 큰 힘을 얻었소. 우린 참 좋은 인민을 가지고있소. 이게 얼마나 큰 힘이고 행복인가.

이걸 수천대의 비행기에 대겠는가 원자탄에 대겠는가. 당과 수령, 조국과 혁명을 사랑하는 이 마음이 하나가 될 때 이 전쟁은 이긴거요.》

김일성동지께서는 다시 방안을 거니시다가 식당홀의 벽에 걸어놓은 그림앞에 멈춰서시였다.

오래도록 그림앞에 서시여 유심히 들여다보시였다.

음산한 초원과 낮게 드리운 먼 하늘가에 첨탑이 어렴풋한 이국그림이였다.

박정덕은 별로 눈여겨보지 않았으나 어떤 때 밥을 먹다보면 자기가 조선땅이 아닌 곳에 왔나 하는감을 느끼군 했었다. 평시엔 그저 하나의 자연풍경이겠거니 하고 여겨온터였다.

《정덕동무, 이 그림이 어떻소?》

《전 그림에 그리 취미가 없습니다. 전선사령부 김익군사위원이 왔을 때 걸어놓았다고 합니다.》

김일성동지께서는 엄한 눈빛으로 돌아서시였다.

《왜 하필이면 이 민족적인 색채가 진한 온탕에다 저런 이국풍경화를 걸어놓소?

내 이전에도 어느 병원에 들렸다가 말했지만 우린 조선땅에서 혁명을 하고있소. 흘레브와 워드카가 아니라 밥과 소주를 좋아하오. 정덕동무, 우리 인민에게 발을 붙이고 우리의것을 사랑할줄 아는 사람만이 우리 혁명을 바로 인식하고 이 전쟁에서 승리할수 있소. 반대로 저 로씨야에는 또 자기네대로 제 민족을 내세우는 그런 애국자들이 많소. 쑤워로브나 꾸뚜쪼브도 제 나라 농민출신의 병사들에 의거했소. 대문호 똘스또이 백작은 일생동안 외국문학에 의혹을 품고 뿌슈낀적인 민족문학에 심혈을 바쳐 세계적명작을 써냈거든. 이건 뭘 말해주는가? 로씨야사람들도 제 민족성을 제일로 여기는데 이게 무슨 희비극이요? 여기에 금강산이나 묘향산 겨울풍경이나 백두산설경같은것을 그려붙이면 무엇이 나쁘단 말이요. 난 이게 전혀 리해되지 않는구만. 조선의 흙 한줌, 풀 한포기, 물 한방울을 귀중히 여길줄 모르는 사람은 그가 아무리 맑스주의리론에서 쁠레하노브나 부하린을 릉가한다고 해도 조선혁명을 잘 할수 없고 애국자가 될수도 없소.》

김일성동지께서는 식당의자를 놓고 올라서서 그림을 내리우는 김인정을 한참동안 바라보시였다.

《…》

《우리가 빨찌산을 할 때 조국땅을 밟은 일이 있었소. 그게 아마 39년 5월이였던것 같아.

그때 저 백두산기슭의 삼지연이라는 못가에 이르렀는데 김정숙동무가 쭈그리고 앉아 손수건에 무언가를 담고있지 않겠소. 내가 가까이 다가가보니… 흙 한줌을 정히 싸더란 말이요.… 김정숙이 그 조선의 흙을 내내 가슴에 품고 만주광야를 떠다녔소. 조국에 올 때도 그걸 그냥 가지고 왔소. 그가 운명했을 때 난 붉은색 천쪼박에 싸여있는 그 흙 한줌을 저 모란봉의 묘소에 함께 묻어주었소.… 그가 왜 한생 그 흙 한줌을 품고 다녔겠는가. 그도 꽃을 좋아했는데 조선의 진달래를 사랑했소. 옷을 입어도 조선치마저고리를 제일로 쳤지.…》

박정덕은 얼굴을 푹 숙이고말았다.

김인정이 얼굴을 싸쥐고 흐느끼였다.

김일성동지께서는 처녀군관의 어깨를 다독여주시였다.

《동무들, 조국애라는게 별게 아니요. 제나라것을 사랑하는거야. 이게 조선사람의 본새야. 이걸 잊으면 우린 또다시 망국노가 되오!…》

김일성동지께서 다녀가신날 저녁 식당홀에 들어선 박정덕은 놀라서 뒤로 물러섰다. 씨비리풍경화대신 소박한 솜씨로 아담하게 그린 백두산밀림풍경화가 걸려있는것이였다.

《이게 누구솜씨요?》

애어린 교환분대장이 방긋 미소를 띄웠다.

《김인정군관동지가 종일 그렸습니다. 색감이 모자라서 야단났다고 하더니… 아마 음악학교가 아니라 미술학교에 다닌것 같습니다. 호호…》

박정덕은 오래동안 그 자리에 굳어져 그림을 지켜보았다.

 

×

 

밤중에 박정덕은 꿈을 꾸었다. 안해 정옥희가 아들 영산이와 딸애를 데리고 어디론가 달려가는데 소래기를 지르며 따라갔으나 그들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사라져버린다.

《여보! 서라구! 거긴 지뢰밭이요!》

불쑥 불기둥이 일어서고 지뢰가 쾅쾅 터진다.…

박정덕은 눈을 번쩍 뜨고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벌써 창문밖은 온통 불바다다.

미제침략군의 공습이 시작된것이다.

그는 부리나케 작전문건이 든 가방을 움켜쥐고 2층 창문으로 몸을 날렸다. 아래층에서 녀성들의 다급한 목소리들이 들린다. 그는 주춤 걸음을 멈추었다가 가슴에 안은 작전문건이 생각나 휴양각 뒤언덕으로 나는듯이 달려갔다. 그곳에 벌써 도착한 부관에게 가방을 넘겨주었다. 다시 몸을 돌려 휴양각쪽으로 달리는데 김인정이와 교환분대장이 할딱거리며 문을 빠져나왔다. 그 순간 폭음이 울리면서 2층짜리 휴양각은 거센 화염속에 묻혀버렸다. 불기둥이 하늘을 찌르자 적기의 동음이 서서히 남쪽하늘로 사라져갔다.

박정덕은 실개천언덕에 퍼더버리고 앉아 불타고 무너져버린 휴양각자리를 내려다보았다.

희붐히 동이 터오고있었다.

재가루와 연기가 날리는 페허를 휴양소관리성원들과 위수경무임무를 맡은 전사들이 웅성거리며 파헤치고있다. 도대체 제더미속에서 뭐가 성한게 있겠다고 뒤적이는것인가.

박정덕은 면내의바람이였다. 돌아보니 옆에서 김인정이 불에 탄 장령복을 손질하느라고 입에 연신 실을 물며 콜작거리고있다.

그러니 녀성군인들이 집이 무너지기전에 찾아들고 나온것이 생생한채로 옆에 놓여있는, 통신국동무들이 품들여 안테나를 개조한 출력이 센 《에르베엠》무선기와 저 군복인 모양이다. 가슴이 뭉클 젖어든다.

《인정이, 그냥 둬두오.》

《…》

《부관동무더러 병사복이라도 얻어오라고 했으니까…》

김인정이 눈물범벅이 된 얼굴을 들었다.

《군단장동지, 어쩌면…》

김인정은 오열을 참으며 터지고 타서 엉망이 된 군복을 바느실로 한뜸두뜸 옭매고 스침질하면서 꼼꼼히 기워나간다. 소리없이 흘러내린 눈물방울이 그 녀자의 섬섬옥수에 똑똑 떨어져 주르르 군복섶을 적신다.

박정덕은 못볼것을 본 사람처럼 슬며시 외면했다.

박정덕은 길게 큰 숨을 내쉬였다.

이놈들이 어디를 노리고 덤벼들었는가. 하루만 이르게 공습이 진행되였다면 무슨 변이 터질번 했는가. 무엄한 이놈들이 무엇을, 어디를 노렸는가.

가슴이 서늘해지였다.

《인정동무, 무전을 날렸겠지?》

박정덕은 미타하여 재삼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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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산님의 댓글

강산 작성일

(위에서 계속)

박정덕은 미타하여 재삼 물었다.

《군단장동지, 남일동지가 직접 받고 답전을 보냈습니다. 지시가 있을 때까지 대기하라고 했습니다. 저기 교환분대장이 무전기를 지키고있습니다.》

김인정이 숱진 검갈색머리를 뒤로 제끼며 애처로운 표정을 지었다.

박정덕은 또다시 땅이 꺼지게 긴숨을 내쉬였다.

날이 완전히 밝고 깊은 골짜기에 해살이 퍼질무렵 삭주휴양소로 들어오는 도로입구에 묵중해보이는 군용차 석대가 쏜살같이 들이닥쳤다.

위장망을 치고 방탄장치를 한 두번째차에서 풍채좋은 장령이 조금도 덤비지 않으며 틀지게 내려섰다.

박정덕은 불탄 군복을 면내의우에 대충 걸치다가 눈길이 굳어졌다.

먼발치로도 남일대장의 모색을 일별할수 있었던것이다.

박정덕은 언덕에서 내려 남일을 향하여 급히 달려갔다.

남일대장의 얼굴이 비주름해졌다.

《헛참, 박정덕동무의 꼴이 말이 아니군.》

박정덕은 얼굴이 벌개져서 면내의 웃동의 단추들을 의미없이 매만졌다.

《정말 면목이 없습니다. 총참모장동지, 하지만 작전문건들은 다 건제합니다.》

《허, 그걸 불태우면 누가 박정덕이라고 하겠소. 농사군은 굶어죽어도 종자만은 베고 죽소!》

남일은 다시 엄격한 얼굴로 얼른 뒤를 돌아보았다. 뒤차에서 내린 김익과 허가이가 빠른 걸음으로 다가왔다. 남일은 김익이 들고있는 보꾸레미를 정히 받아들었다.

《정치보위사업을 맡은 동무들도 문제가 있소. 전선 먼 이곳에 적비행기가 날아들도록 뭘했는가 말이요. 이건 분명 테로를 목적한 공습이였소. 정덕동무, 하루전에 장군님께서 오셨댔지?》

《…정말 속이 한줌만 해집니다.》

박정덕은 머리를 숙였다.

김익이 눈살이 꼿꼿해서 발을 탕탕 굴렀다.

《당장 문제를 세워야겠습니다. 테로공습 하루전이면 국가의 중대한 비밀이…》

《군사위원동무!…》

남일이 엄한 눈길을 들었다. 김익이 침묵했다. 분김에 그냥 씩씩거린다.

남일은 보꾸레미를 뜻밖에도 박정덕에게 정중히 내밀었다.

《박정덕동무, 장군님께서 무전보고를 받으시고 급히 마련하여 보내여오신 장령복이요. 받으시오.》

《예?!…》

박정덕은 놀라서 한걸음 물러섰다.

남일은 그냥 군복꾸레미를 들고 서있었다.

박정덕은 취한 사람처럼 약간 비틀거리며 다가갔다.

박정덕은 군복을 받아안고 오열을 터뜨리였다.

남일대장이 그의 등을 두드리다가 외면했다.

《정덕동무, 좀 그만하우. 장군님께서는 이러단 박정덕이마저 잃고말겠다면서 당장 호위소대를 붙여야겠다고 말씀이 계셨소.

박정덕동무, 장군님의 사랑을 잊어선 안되오.》

《총참모장동지!》

남일의 얼굴에 다시 근엄한 빛이 어리였다.

《그리고 군단장동무는 우리와 함께 급히 최고사령부로 가야겠소. 장군님께서 동무를 부르시오.》

… 다음날인 1952년 7월 22일 최고사령관 김일성동지께서는 박정덕을 74군단장에서 소환하여 조선인민군 전선사령부 참모장으로 임명하시였다.

박정덕전선참모장은 8월 12일에 공화국 군사위원회 위원으로 보선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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