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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소설 번영의 시대 제 55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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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강산
댓글 0건 조회 4,486회 작성일 19-11-23 2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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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1 장

7

 

간편한 등산복차림에 푸른 보자기를 한손에 든 젊은 녀인이 자물쇠가 걸려있는 수풍발전소 지배인실앞에서 서성거리고있었다. 얼굴살갗이 맑고 눈매가 고운 30대초의 예쁘장한 녀인이였다.

지배인실앞에서 발볌거리던 그는 기다리기가 무료한듯 가는 한숨을 내쉬더니 복도 한끝으로 걸어가 창문밖을 내다보았다. 거기서는 처마를 맞대고 촘촘히 들어앉은 발전소주택들이며 넓고 푸른 수풍호 그리고 성벽같은 긴 언제우에서 분주히 뛰여다니며 작업하고있는 사람들이 내다보이였다.

주택마을 확성기에서 울리는 방송원의 목소리가 사무실복도에까지 들려왔다. 지금 수풍에서는 언제에프론개건공사에 총력량을 집중하고있었다. 반시간 좋이 지나서 사무실복도로 아침출근을 하는 직원들이 들어서기 시작하였다.

누구라없이 작업복을 입은것으로 보아 부서아침모임이나 하고는 작업현장으로 나가려는 모양이였다.

얼마후 거쿨진 체구의 건장한 사나이가 총총히 복도문으로 들어서더니 곧장 지배인실을 향해 걸어갔다. 그는 문가에 서있는 녀인을 띠여보고 《날 만나러 왔소?》 하고 물었다.

《지배인동지십니까?》

그 녀자는 한걸음 나서며 반문하였다.

《난 우리 발전소 동문줄 알았는데 어디 외지에서 온 모양이군. 엊그제 지배인으로 소환돼오다보니 제 사람하구 외지사람을 구별하지 못하오, 허허허.》

지배인은 소탈하게 웃고나서 어디서 왔는가고 물었다.

《평양곡산공장에서 왔습니다. 리은실이라고 합니다.》

그렇다, 그는 곡산공장 업무부 통계원 리은실이였다. 지배인이 눈섭을 구핏하였다.

《리은실? 며칠전에 곡산공장당위원장한테서 전화가 왔댔소. 여기 언제에프론공사가 끝날 때까지 수풍에 와서 일하겠다고 했다면서요? 그 자세한 내막은 본인한테 물어보라고 했습니다. 자, 방으로 들어갑시다.》

지배인은 둥근 자물쇠에 손가락같이 툭한 열쇠를 꽂았다. 그 사람의 손은 여느 사람의 손보다 갑절은 더 커보이였다.

최재하는 며칠전에 수풍으로 왔었다. 그는 자기가 수풍발전소 지배인이 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었다.

리은실은 그를 따라 조심스레 방안으로 들어섰다. 별로 크지 않은 방인데 안정감이 없고 휑뎅그렁해보이였다. 지배인방이 거의 한달동안 비여있었으니 그럴법도 했다.

김일성장군님의 초상화를 모신 정면벽 한쪽옆에 《수풍발전소는 우리 나라 산업의 명맥이며 보배입니다.》라고 정자체로 쓴 붓글을 은빛액틀에 넣어 정성스레 걸어놓았다. 1946년 10월 10일 김일성장군님께서 수풍발전소를 현지지도하시면서 이곳 로동계급에게 하신 교시였다.

최재하는 출입문결에 놓인 긴 나무의자를 가리키며 서글서글한 웃음을 지었다.

《어서 앉으시오. 평양에서 여기까지 오는것도 꽤 멀지요. 어제밤 어디서 주무셨게 이렇게 이른아침에 찾아왔는가요?》

《면려관에서 잤습니다. 바쁘시겠지만 제 좀 긴 이야기를 해야 될것 같습니다.》

최재하는 구내전화로 기사장을 부르더니 사정이 있어 좀 늦어서 현장으로 나가겠다고 하였다.

《사업에 방해를 끼쳐 정말 미안합니다. … 먼저 약소하지만 저의 성의인데 이걸 받아주세요.》

리은실은 푸른 보자기를 풀었다. 그안에는 에프론개건공사에 동원된 수풍로동계급에게 기부하는 현금 3만원이 들어있었다. 그것은 그가 지금까지 한푼두푼 저금해두었던 돈이였다.

《원, 이렇게 많은 돈을…》

최재하는 몹시 놀라는 표정이였다. 사실 개인이 이만한 돈을 마련한다는것은 헐치 않은 일이였다. 최재하는 이 녀인에게 무슨 깊은 사연이 있다는것을 감촉한듯 이야기를 기다리며 묵묵히 앉아있었다.

《약소한 돈입니다. 진심으로 부탁하는데 제가 돈을 냈다고 누구에게도 말하지 말고 조용히 보태써주셨으면 합니다. 저는 부끄러운 인간이고 죄많은 녀자예요.》

리은실은 손수건을 꺼내여 눈물을 닦았다. 그는 지배인의 바쁜 시간을 생각하고 서둘러 자기 이야기를 시작하였다.

평양가무학교를 졸업한 후 소녀시절부터 해방되는 날까지 노래와 웃음을 팔며 청춘을 짓밟혀온 그 10여년동안의 슬픈 기녀생활과 해방후 3년동안에 있은 일들을 낱낱이 이야기하고 그는 이렇게 덧붙이였다.

《김춘선은 미국놈들이 길러낸 큰 간첩이였습니다. 반성하는 유서를 쓰고 자결했지만 나쁜짓을 많이 했습니다. 그것도 모르고… 그 너절하고 치욕스러운 죄를 무엇으로 씻어낼수 있겠어요. 당은 저를 용서해줬지만 저는 부끄럽고 괴로워 못살겠어요. 제가 왜 그런 길에 빠져들어갔을가요? 결코 우연한 인생실책이 아니였습니다.》

리은실은 낡은 사회의 탁류에 오염된 자기가 오랜세월 쩌들어밴 너절한 때를 씻어낼 생각을 하지 않고 물우에 뜬 기름처럼 로동계급의 집단과 유리된 생활을 하다보니 그런 돌이킬수 없는 범죄를 저질렀다고 하였다. 그것은 또한 개별적인 한 인간에 대한 환상이 빚어낸 인생과오이기도 하였다.

《저는 부끄러워 곡산공장사람들을 볼수가 없습니다. 더우기 김일성장군님의 배려로 종합대학에 다니는 동생을 생각할 때마다… 그래 고민하던 끝에 지금 나라에서 제일 걱정하고있는 수풍에 와서 일하기로 결심했습니다.

지배인동지, 여기서 뼈가 녹아나도록 일해보고싶습니다. 제 몸을 혹사하고싶습니다. 이건 솔직한 심정입니다.》

최재하는 고개를 끄덕이며 일어섰다. 그는 한동안 깊은 생각에 잠겨 창밖을 내다보았다.

《은실동무의 이야기를 들으니 나도 지난날이 생각됩니다. 은실동문 열다섯살때 돈에 팔려 기녀생활을 하게 됐는데 나는 아홉살때 돈에 팔려 미국놈의 아이보개로 갖은 구박을 받았습니다.》

그는 소, 돼지처럼 천대를 받으면서 험한 로동판을 굴러다닌 슬픈 과거사를 이야기하였다.

《은실동무, 우리모두는 장군님의 품에 안겨 비로소 나라의 주인되여 사람답게 살고있소. 은혜를 입으면 죽어서도 잊지 말아야 한다는 말이 있지요. … 은실동무, 우린 한평생 이걸 잊지 맙시다. 은실동무문젠 당위원회에 제기해서 토론하겠소.

오늘은 작업장에 나가서 우리 동무들이 하는 일을 구경이나 하시오. 자, 갑시다.》

지배인은 리은실을 데리고 나가려다가 문득 탁상우에 놓여있는 돈주머니를 돌아보았다.

《은실동무의 저 뜨거운 지성금을 어떻게 써야 값이 있을가? 장군님의 은덕으루 수풍발전소에 탁아소, 유치원도 생겼는데 거기다 주는게 어떻소?》

《지배인동지… 마음대로…》

리은실은 목이 메여 말을 잇지 못하였다.

최재하는 돈주머니를 보자기에 싸가지고 마당으로 나왔다.

《난 먼저 탁아소로 가겠으니 은실동문 보고싶은걸 다 돌아다니며 보시오. 내가 합숙식당에 말해놓겠으니 점심부턴 거기서 식살 하오.

곡산공장만은 못하겠지만 우리 발전소합숙 식사질도 괜찮소, 허허허.》

최재하는 사람좋게 웃으며 손을 흔들어보이고 집마을쪽으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얼마후 에프론공사장에 이른 리은실은 저도 모르게 《야!》 하고 탄성을 올리였다.

긴 언제기슭에 치마자락처럼 퍼진 넓은 에프론콩크리트바닥이 기계와 사람들로 꽉 들어차있었다.

번쩍번쩍 번개치는 용접의 불꽃들, 우뢰울듯 으르렁거리는 기계의 장엄한 동음… 기중기가 긴 팔을 휘저으며 짐들을 들어올리고 권양기가 윙윙 돌아가며 쇠바줄을 끌어당긴다. 질통을 지고 달리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고무옷을 입고 물에 뛰여드는이들도 있다. 측량기렌즈에 눈을 대고 손을 흔들며 고함을 지르는 사나이, 흰 위생복에 적십자표가방을 메고 뛰여다니는 녀인, 참으로 작업장은 부글부글 끓고있었다. 5~6메터 간격으로는 여러 형태의 속보판과 구호판이 세워져있었다.

《수풍의 전기는 1분 1초도 멈출수 없다!》

《온 나라가 수풍을 지켜본다》

《…세멘트공장 운전사 강덕모동무! 고강도세멘트 30톤 운반! 그는 말했다. 〈이것은 수풍의 전기로 생산한 세멘트다. 고강도세멘트는 얼마든지 있으니 념려말라!〉》

《오복남동무, 용접계획 500%!》

《고영훈기업가 현금 10만원 기부!》

리은실은 히죽이 웃음을 지은 중로인의 초상까지 그려받친 대형속보판앞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중요건설장마다에 큰 돈을 기부하군 하는 고영훈기업가를 은실이도 물론 잘 알고있었다.

(남들은 10만원을 기부하는데 나는 어찌다 한번 바치는 돈이 고작 3만원?)

은실은 얼굴이 뜨거웠다.

다음속보판에서 그는 더욱 놀라게 되였다.

《일제시기 에프론공사장에서 치명상을 입었던 강치만동무! 튼튼한 몸으로 문맹도 퇴치하고 오늘의 에프론공사장에 다시 나타났다.

명심하자, 우리의 공사장에선 1건의 로동재해도 있어서는 안된다!》

리은실이 온포료양소에서 알게 된 강치만이였다.

문득 김춘선의 심부름으로 경성희망사진관으로 찾아갔던 치욕스러운 추억이 갈마들어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어찌 내가 용서받을수 있단 말인가?)

리은실은 머리를 숙이고 걸어갔다. 사람들앞에서 낯을 들기가 어려웠다. 그러나 련이어 보이는 이채로운 속보판들이 다시 머리를 쳐들게 하였다.

《홍명희부수상 로동자들과 함께 질통을 지고…》, 《백남운교육상, 리극로무임소상 몰탈작업을…》

(야, 국가요인들도 여기 와서 일을 하셨구나!)

희한한 속보판들을 감동깊게 읽어보며 걸음을 옮겨가던 리은실은 눈이 둥그래지며 우뚝 멎어섰다.

《평양곡산공장 업무부 통계원 리은실동무! 3만원 기부!…》

어느새 내 이름이 여기에 나와 붙었는가?

《리은실》이라는 주먹같은 글자가 해빛에 번쩍거리였다.

죄많은 녀자의 치욕스러운 이름을 이렇게 크게 내다니? 지배인동지도 참, 그만큼 비밀에 붙여달라고 했는데…

리은실은 속보발간의 그 신속성, 기동성에 놀라지 않을수 없었다. 지배인이 전화로 얼굴생김새까지 알려주었는지 등산복을 입은 자기의 얼굴을 한껏 예쁘게 그려놓았다.

자기를 소개한 속보판앞에 서있는것은 열적은 일이였다. 그러나 은실은 자기를 잃은채 하염없이 속보판에 그려진 그림을 들여다보았다.

근로녀성의 옷차림을 하고 서있는 저 얼굴이 정말 내 얼굴이란 말인가?

은실은 이제 비로소 자기가 서야 할 곳에 찾아왔다는 안도감과 긍지감으로 가슴이 뿌듯해졌다.

어떤 길을 걸어 내가 여기까지 왔는가?

왜놈들과 부자놈들은 나의 가장 소중한것을 짓밝고 지나갔지. 그것을 짓밟히우면서도 밝게 웃어야 했다. 그것이 바로 지난날의 나였다. 나의 이러한 생활은 이 땅에 생겨난 민주제도와 더불어 끝장이 났으나 탁류에 오염된 지난날의 생활타성으로 하여 너무도 먼길을 에돌아서야 여기까지 온 자기였다.

리은실은 손으로 얼굴을 싸쥐였다. 샘처럼 솟아나는 깨끗한 눈물이 인생의 때국을 씻어내듯 자꾸만 흘러내렸다.

손수건을 꺼내여 눈굽을 훔치고 주변을 둘러보던 리은실은 《수풍언제 에프론은 왜 파손되였는가?》라는 기술해설문판이 세워져있는것을 보고 그쪽으로 걸어갔다.

거기에는 이렇게 씌여있었다.

《수풍발전소언제에프론의 파손원인은 자연재해에 있지 않았다. 설계에 잘못이 있었다. 즉 에프론의 경사도와 곡률의 수치를 수력학적으로 정확히 계산하지 못하였다. 일본기술자들은 에프론곡률계산을 잘못하였다. 시공도 어설프게 하였다. 일제의 기술을 디디고 올라서서 그들의 낡은 설계를 전면개조한 우리의 에프론설계도는 가장 정확하다는것을 국가와 법앞에, 우리의 영명하신 김일성장군님앞에 확언하는바이다.

이제 남은것은 정확한 시공이다.

건설자들이여! 건국사상총동원운동의 기발을 높이 들고 에프론을 새조선의 모습으로 전면개조하자! 민주조선의 주인답게 시공에서의 정밀도, 정결도를 보장하자! 그러면 우리 시대 에프론은 백년이 가도 파손되지 않을것이며 먼 후날 우리의 후손들이 여기서 우리들의 얼굴을 뜨거운 마음으로 비쳐보게 될것이다.》

리은실은 기술해설문을 세번이나 곱씹어 읽었다. 그 녀자는 에프론에 대한 기술해설문이 마치도 자기를 위해 쓴 교양해설문처럼 생각됐다.

《일제의 낡은 유물인 수풍에프론을 전면개조하듯이 너의 인생관, 너의 낡은 생활습성을 전면개조하라!》

은실은 단순한 기술해설문을 자기 인생에 비추어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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