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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소설 조선의 힘 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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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강산
댓글 0건 조회 5,690회 작성일 19-12-24 18: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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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

 

날이 어두워질무렵 최현은 린제군 서화면부근에 이르렀다. 그곳은 38°선이북으로서 남에는 가리봉, 서쪽엔 대암산, 북에는 가칠봉 등 1 200∼1 500여m의 높은 산들이 병풍처럼 둘러선 계곡 분지였다. 사흘전 최현은 동해연선의 주요 주민집결지이며 적들의 보급기지인 양양을 쳤다. 그리고는 방향을 돌려 이곳 북강원도의 산간오지로 쑥 들어선것이다. 여기서 곧추 북으로 외통길을 따라 올라가면 이 지방의 유명한 개고개를 넘어 남강의 상류에 이르게 된다. 남강을 끼고가는 단하나의 이 외통길을 따라 계속 북상하면 드디여 고성으로 빠지게 되는바 이제 최현은 고성과 통천을 또 해방할 생각이였다.

최현은 명당산기슭에서 휴식할것을 명령했다. 동시에 사방 정찰을 파하여 적정을 알아보게 했다.

휴식구령이 내리자 두리에서 병사들이 떠들썩했다. 분주히 식사준비를 하고 숙영준비도 하느라 강기슭을 뛰여다니고 쌀을 일고 마른 나무가지들을 모아 불을 피우며 부산을 피웠다. 그들은 지금 자기네가 38°선을 넘어섰다는것을 알고있었다. 멀고먼 락동강 좌안에서부터 예까지 왔다. 다들 고향집에 들어선듯 한 기분들이였다.

사방에서 화토불이 타올랐다. 적구라 해서 불을 못피울게 뭔가. 최현사단의 병사들은 그 어데서건 뻐젓이 불을 피우고 숙영을 했다. 장군님의 10월 11일 방송연설을 들은 다음부터는 매일 아침검사도 깐깐히 했다.

로지봉도 싸리나무를 한아름 해가지고 소양강의 물굽이로 걸어갔다. 그곳에는 문경고개에서 최현사단장이 대오에 받아들인 사민들도 있었다.

어느 한 화토불가에서는 이쁘장한 녀교원과 박영일이라는 전사가 싸리나무를 꺾으며 저녁을 준비하고있었다. 녀교원은 이제 겨우 스물셋에 난다고 한다. 그렇듯 이쁘고 회초리같은 녀자가 왜 집을 나와 이 전쟁판에 끼여들었는지 로지봉에게는 잘 리해되지 않았다. 그런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 종일 말 한마디 없는 녀인도 있고 지팡막대기를 짚고있는 풍채좋은 사나이도 있다. 그중에서도 종군작가라고 하는 김람인이 유표했다. 동그란 백테안경을 끼고있는데 여가만 있으면 수첩을 펴들고 시를 쓰군 한다.

화토불은 조용히 타오르고있었다. 군용밥통을 주런이 꿰여 짝지발우에 걸었는데 그밑에서 불길이 날름거리고있었다.

로지봉이 다가가자 화토불가의 두사람이 자리를 드텨주었다.

《마침 잘 왔어요.》 녀교원이 말했다. 《여기 좀 앉으세요.》

로지봉은 손에 들고 온 싸리단을 털썩 놓고 그우에 주저앉았다. 그러자 녀교원이 애잔한 미소를 띄우고 그를 바라보았다.

《시를 좋아하세요?》

《시?…》

《예, 이 군대동무가 좋은 시를 많이 알고있는데 같이 들어보자요.》

《?!…》

로지봉은 말없이 박영일을 치떠보았다. 그러자 박영일은 면구스러워했다.

《뭐 내가 쓴건 아니구… 우리랑 같이 가는 정치공작대 있지요? 김람인이라는 안경낀 시인!… 그분이 쓴건데… 수첩을 좀 빌려보군 했지요.》

지봉은 머리를 끄덕거렸다. 주머니에서 담배를 털어 큼직하니 한대 말면서 두루 생각을 더듬었다.

시라는것을 그는 별반 들어보지 못했다. 락동강전선에서 공격을 앞둔 어느 군무자총회끝에 누군가 나서서 시를 읊었는데 크지 않은 목소리로 조용히 흐느끼는듯 시작하다가 나중엔 목이 쉴 지경으로 목청껏 부르짖었다. 너무 웨쳐대지만 않았어도 좋았을것을!… 그는 불찌를 하나 들어 담배에 붙였다. 물씬!- 구수한 담배연기를 한껏 빨았다.

꼬챙이로 불담을 모으고있던 박영일이 생각을 가다듬는듯 했다. 돌격을 앞둔 군무자총회끝에 시를 읊은 전사도 맨처음엔 박영일이 그러듯이 잔뜩 울상을 했었다. 박영일은 목을 쑥 빼들었다. 가느다랗게 두눈을 쪼프리고 마치 꿈을 꾸듯 로지봉쪽을, 아니 그를 넘어 저물어가는 먼 하늘가를 바라보았다.

 

두메산골

비탈진 돌짝 밭머리

북데기 파뒤지며 살았더란다

 

약간 떨리는듯 한 목소리였다. 지봉은 금시 눈굽에 이슬이 떨어질것 같은 그의 얼굴을 놀라서 쳐다보았다.

 

가난에 허리굽고

시름에 쪼들려

눈물속에 한숨속에 살았더란다

 

지봉은 문득 담배를 쥔 손끝이 가늘게 떨리는것을 느꼈다. 어둑스레해지고있는 골안은 허전하고 괴괴했다. 그래서인지 박영일이 읊고있는 그 시의 한마디한마디가 또렷하고 날카롭게 귀전을 울렸다.

 

구름발 감기고

하늘도 좁은 골짜기

 

로지봉의 고향집도 하늘좁은 골안막바지에 있었다. 그역시 비탈진 돌짝 밭머리에서 호미가 모지라지게 일하였다.

그는 두눈을 슴벅거리며 사위를 둘러보았다. 강굽이쪽에서 차거운 안개가 기여들고 등뒤의 소나무숲은 씁쓸한 냄새를 풍겼다. 그저 그뿐이다. 여전히 그는 고향에서 멀리 떨어진 산중의 강기슭에 퍼더버리고 앉아있을뿐 백화산도 돌서덕도, 고향집 뜰안의 배나무도 보이지 않는다.

로지봉은 이발로 손톱을 물어뜯으며 자기의 해진 신발끝과 물이 끓기 시작한 군용밥통을 의아쩍게 바라보았다.

(그러니 이건 누구의 고향얘긴가?… 허름한 배낭을 지고가는 그 시인이라는 량반이 그런 산골에서 북데기를 뒤지며 살았다는 말인가?…)

 

얼음밑에 숨쉬던 개울물이

해방의 봄노래로

산기슭 굽이굽이 씻어흐를제

 

장군님 은덕으로

분여받은 내 땅

더미더미 고랑지어 갈아엎을제

 

울긴 왜

울긴 왜!… 하면서

속으로 운것은, 더 운것은

 

로지봉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눈물이 가랑가랑한 박영일의 모습을 더는 바라볼수 없었고 흐느끼는듯한 목소리를 더이상 앉아 들어낼 힘이 없었다.

 

울긴 왜

울긴 왜!… 하면서

속으로 운것은, 더 운것은

 

가슴이 저릿저릿하고 목구멍이 끓어올랐다. 그는 허척지척 걸어가며 소리없이 흐느꼈다. 구름발 감기고 하늘도 좁은 골짜기가 눈앞으로 달려왔다. 먹으로 로지봉이라고 큼직하게 써놓은 지경패말이며 그것을 어루쓸며 눈물을 뿌리던 머리하얀 어머니의 모습이 눈앞에 삼삼했다. 뻐꾸기 울던 논벌, 지금쯤 안해 순금이 가을걷이로 밤을 새우고있는지 모른다. 아니, 미국놈들이, 미국제땅크들이 분여받은 그 논밭을 짓뭉개고있다면?!…

가고싶었다. 한달음에 달려가 그 땅을, 그 집을, 어머니와 안해를 지켜주고싶었다. 그는 몸을 떨며 걸음을 멈추었다.

문화부중대장 주영섭이 마주오다가 놀랜 소리를 질렀다.

《지봉동무, 왜 그러오?》

《?!…》

지봉은 물고기모양으로 입을 벌리고 서있을뿐이였다. 수염뿌리들이 돋아나온 입언저리로 눈물이 흘러내리고있는줄도 모르고있었다. 주영섭의 눈빛을 보고서야 자기가 소리없이 울고있었다는것을 깨달았다. 황겁히 팔소매로 눈굽을 문지르며 돌아서버렸다. 로지봉은 더 울지 않았다.

그때 주영섭은 한 소년을 데려가고있었다. 겨우 열서너살 났음직한 소년이였는데 숙영지로 기여들다가 보초에게 걸린것이였다.

그런데 나팔주둥이처럼 입이 뚜해져서 누가 물어도 대답을 안했다. 울상이 되여있는것 같기도 하고 잔뜩 골이 나서 밸뚜시를 부려보는것 같기도 했다. 허름한 동복을 걸치고 어데서 얻었는지 군관혁띠까지 띠고있었다.

주영섭이 따져물었어도 대답을 안했다. 이 밤중에 왜 군대들이 있는 산속에 기여들었는가, 누가 시켰는가? 하고 으름장을 놓았어도 여전히 울상을 하고있을뿐이였다. 주영섭은 소년을 지휘부로 데려갔다.

마침 최현이 소년의 출현에 관심을 가졌다. 괘꽝스러운녀석이라는 말을 듣고 직접 만나보기로 했다.

최현이 앉아있는 화토불가로 소년을 데리고 갔다.

《넌 누구냐?》

최현이 물었다. 소년은 불빛에 비쳐진 최현의 성난것 같은 얼굴을 말끄러미 쳐다보았다.

《난 알아요. 최현대장이지요?》

최현은 놀랐다.

《너 나를 어떻게 아니?》

《왜 모르겠나요. 작년, 재작년에도 38°선을 돌아보면서 우리 양지촌에 들려가지 않았나요.》

《그래!?》

《그때 내가 소년단원들을 대표해서 경례를 했지요. 나하구 악수까지 하구선…》

《오- 생각나!》 최현은 소년이 실망할가봐 우정 반갑게 소리쳤다. 《그때 넌 요만했었지.》

최현이 너무 과장해서 키를 낮추었기때문인지 소년은 천천히 머리를 흔들더니 제손으로 귀언저리를 가리켰다.

《그때도 이만짝은 했어요.》

《아 그랬던가!… 어째든 네가 나를 먼저 알아봤구나.》

《그럼요. 여기서야 최현대장을 모르는 사람이 있나요.》

《최현대장!…》 최현은 그 말을 되뇌이며 벙긋 웃었다. 《그래… 그렇게들 불렀지… 지금 난 사단장이다.》

《난 참모장이예요!》

《?!…》

최현은 놀라서 소년을 쳐다보았다. 화토불주위에 있던 사람들이 웃어댔다. 어느새 많은 사람들이 최현과 소년을 둘러싸고있었다. 소년은 웃는 사람들을 마뜩지 않게 둘러보는데 동그스름한 얼굴이 구운 가재처럼 익어있었다.

《난… 꾀꼴새소년빨찌산… 참모장이란 말예요. 왜들 웃어요!?》

《저런! 빨찌산 참모장이라누만!》

누군가 이렇게 말하자 또 다들 웃어댔다. 그들속엔 로지봉도 끼여있었다. 그는 웃지도 않고 가만히 지켜보기만 했다. 최현이 또 소년에게 누가 어떻게 빨찌산을 조직했는지 물었다. 소년의 대답이 먼저 어른들이 장군님의 10월11일방송연설을 듣고 그날로 《금강인민유격대》를 조직하자 그들도 소년단위원장을 비롯한 핵심들로 소년빨찌산을 조직하고 이름은 《꾀꼴새소년빨찌산》이라고 부르기로 했다고 대답했다. 대장, 부대장, 참모장까지 선출했는데 최현의 앞에 서있는 소년이 바로 참모장이였다.

《그래 참모장! 이름이 뭐지?》

《예. 한성일입니다.》

《대원들은 많겠지?》

소년은 우물쭈물했다.

《왜 말을 못해. 둬개 소대쯤 돼? 아니면 둬개 분대?》

《저… 한개 소대면… 몇명 돼야 하나요?》

《소대라면 적어도 한 20명쯤 돼야지.》

소년은 머리를 기웃거렸다.

《그럼 한개 분대는 몇이나 되나요?》

《음, 분대는 대체로 10명미만이다.》

소년은 또 머리를 기우뚱했다. 잘근잘근 입술을 깨무는것이 아주 락심한 표정이였다.

《그러니 두개 분대도 채 안돼?》

《예.》 풀이 죽은 대답이였다. 《우린 모두 9명인데…》

소년이 어찌나 슬프게 말했던지 아무도 웃을념을 못했다. 그 9명중 대장, 부대장, 참모장이 있다 하니 그야말로 철저한 간부빨찌산이다. 그들에 대한 지도는 《금강인민유격대》의 청소년부장이 맡아한다고 한다. 그가 바로 《꾀꼴새소년빨찌산》의 기본임무를 정찰이라고 규정했으므로 소년들은 교대로 한계령, 명당산 등지에서 적정을 감시한다고 했다. 한성일이라고 하는 이 소년빨찌산 참모장도 숙영지의 모닥불들을 보고 정찰하려 들어왔던것이다. 최현은 소년이 아는 한도에서 말해주는것을 듣고도 《금강인민유격대》가 장군님의 방송연설을 듣자바람으로 기세높이 조직되긴 하였지만 지휘성원들이 아무런 경험도 없는데다가 유격활동을 너무 신비화한 나머지 참가인원부터 엄격히 제한하고있다는것을 알게 되였다. 유격대장은 대대장인데 5개 중대가 있었다. 5개면의 면당위원장들로 중대장을 임명했던것이다. 그런데 전체 성원은 60명미만이라고 한다. 군과 면의 당일군들, 내무원들, 민청일군들로 엄선하였기때문이다.

최현은 즉시 그들을 도와주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유격활동의 원칙과 방법은 물론 무기도 넘겨주고 군사훈련도 주어야 한다. 그러자면 서둘러야 했다.

최현은 작전과장을 불러 소년과 같이 갈 사람들을 선발해서 당장 대곡리의 범의 굴 같은데 들여박혀서 머리를 쥐여짜고있는 유격대장을 모셔오라고 명령했다.

그런데 막상 사람들이 떠나려 할 때 소년은 움직이지 않고있었다.

《너 왜 그러니?》

최현이 물었다. 소년은 둘러선 사람들을 경계하는 눈빛이였다.

그러다가 최현의 귀전에 대고 그만이 들을수 있도록 낮은 소리로 말했다.

《나와 같이 가는 저 아저씨한데 명령해주세요. 내가 여기서 붙들렸댔다는 말을 못하게.》

《그건 왜?》

《그럼 웃음가마리가 돼서… 참모장이라는게…》

그렇다. 소년은 어엿한 소년빨찌산 참모장이다. 그런데 참모장이라는게 제편이긴 하지만 정찰을 나갔다가 붙들렸다고 하면 아주 멋적어질것이다. 최현은 자리에서 일어나 소년의 머리를 마구 헝클어놓았다.

《좋아. 그렇게 하자!…》 최현은 이어 소년과 같이 가게 될 련락군관에게 정색해서 말하였다. 《동무, 무슨 부탁인지 알겠지? 비밀을 지켜주라구.》

《알았습니다!》

련락군관이 대답했다.

소년의 얼굴이 발그레해졌다.

《고맙습니다. 최현대장동지!》

《잘 가라구, 참모장!》

소년은 굽석 머리숙여 인사하고 떠나갔다. 그들의 모습은 곧 어둠속으로 사라졌다. 싸늘한 어둠이 드리운 숲너머 검푸른 하늘가에서 쪼각달이 하염없이 헤염치고있었다. 화토불에서 불찌들이 날아올랐다. 별들이 반짝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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