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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소설 50년 여름 제3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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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강산
댓글 1건 조회 10,791회 작성일 20-02-04 1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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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장

 

6월 24일 아침의 서울.

《쌀 사이소, 물고기 사이소.》 성량좋게 웨쳐대는 머리 푸수수한 싸구려장사들이 골목을 누비고 신문배달의 종소리에 눈을 흡뜨며 달려나가 받아쥔 신문 1면란에서 예수의 강림처럼 어마어마하게 보이는 덜레스나 맥아더의 하품소리라도 찾아볼가 하고 급급히 살펴보는 초췌한 선비님들이 《륙본장교구락부 파티》가 열리니 미남미녀들을 널리 환영하여 맞아들인다고 한 자그마한 활자들을 보며 정세가 풀리는가부다 하고 안도의 숨을 쉴 때 계동의 고 몽양 려운형의 뒤집에서 전이 노래진 파나마모를 쓰고 단장을 짚은 60대의 로인이 밖으로 나섰다. 쑥 빠진 키에 넓은 이마가 훤칠하여 의젓한 풍채였으나 가까이서 보면 반백이 된 머리가 리발조차 제때에 못하여 귀바퀴를 덮고 우수와 시름에 싸인 눈은 해빛을 두려워하는양 땅만을 좇고있다. 멀리 이름난 학자인 성삼문의 후손으로 고고학과 력사는 물론 현대철학에까지 론적이 없을정도로 박식하건만 정치의 물결이 엇갈리는속에서 좌도 우도 아닌 제나름의 소로길을 걸어가는것으로 우사 김규식의 말로 하면 《무해무익의 초인》이라 불리우는 성송암이였다. 허나 사람들은 그 어떤 우주인처럼 《이 세상의 손님》을 표방하는 그를 존경하였고 따뜻한 미소로 맞아주었다.

인문과학의 내노라 하는 저명인사들도 성송암과의 교분을 명함처럼 휘두르는가 하면 정계의 모모한 사람들도 《배일애국자》요, 《대학자》요 하며 송암에게 아부하기도 했으나 송암은 려운형이 총에 맞아 비명횡사한 다음부터는 그 어디에도 머리를 내밀지 않아 이제는 점점 그 어르신네들의 기억속에서 사라져가고있었다.

송암은 옆구리에 자그마한 곽을 끼고있었다. 《보당의원》간판을 단 집을 에돌다가 자전거에 부딪친 송암은 피한다는것이 도랑에 뛰여들어 넘어졌다.

넘어지면서도 곽은 떨구지 않고있다. 자전거 임자가 내려서서 사과의 말을 할 때 그는 들은둥만둥 얼굴 한번 찌프리지 않고 다시 걸음을 옮겼다.

외진 골목에서 큰길로 나서는데 가냘픈 목소리가 마중하였다.

《아버지 아니세요?》

로인의 앞에 흰 치마저고리를 입은 30대의 녀인이 미끄러지듯 달려와 선다. 갸름한 얼굴이 희다 못해 창백한데다가 눈가에 푸르무레한 그늘이 비껴 어딘가 쓸쓸한 음영을 풍기는 녀인이였다.

《계화냐.》

로인은 기뻐하는것도 또 싫어하는것도 아닌 소리로 대답하고는 녀인의 티하나 없이 산뜻한 옷차림과 기름을 발라 쪽진 머리에서 은은히 풍기는 이국산 향수내에 골살을 찌프리였다.

《어델 이리 급히 떠났어요.》

《골동품점엘… 어제 김규식씨가 알아봤다만 수가 없구나. 서장녀석한테 돈을 찌르는게 낫다고들 하길래 할수없이 고려 선운도사의 금불상을 팔려가는길이다.》

녀인은 아버지가 일생을 바쳐 모았고 그로 하여 제 생명보다 귀히 여기던 불상을 팔겠다고 나선 놀라운 결심앞에 비참한 형색으로 보다가 로인의 손을 잡았다.

《아버지, 이젠 련화는 경찰에서 취급하지 않아요. 그 앤 륙군형무소에 넘어갔어요.》

《게 무슨 소리냐?》

《그렇게 됐어요. 하지만 차라리 잘된 셈이야요. 오늘 당장 련화를 빼내겠다고 나선 사람이 있는걸요.》

《건 누군데-》

로인의 흐릿하던 눈이 번쩍하고 커졌다. 방금전까지만도 딸을 마치 이방지대의 외인처럼 바라보던 그의 눈에 따뜻한 빛이 갈마들었다.

《백정식이라고… 저 채병덕참모총장의 처남되는 사람인데 이번에 미국류학을 하고 와서 지금 리<대통령>의 경호장교로 림시있다고 해요. 그 사람이…》

《으음…》

성송암은 앓음소리를 치며 눈을 감았다. 그는 추악한 환영을 쫓듯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고는 어색한 낯빛으로 헛기침을 했다.

《그래 그 사람은 어떻게 알고… 구한다더냐?》

《어제밤 주인과 함께 집에 왔더군요. 그때 그가 련화에 대해 물어보길래 말했더니 자기가 구해낸다는것이예요. 그런데는…》

이 대목에서 계화의 량볼이 보라빛으로 물들었다.

《그런데란 뭣이냐?》

《자기는 련화 없이는 못살겠는데 찬성을 해달라는거예요.》

《그래서-》

《저는 그가 도미류학도 하고 남자로서 그만하면 빠진데 없다고 봤어요. 저의 의사를 듣더니 아버지를 만나고싶대요.》

《으음-》

송암은 또 한번 신음을 터치며 단장에 몸을 싣듯하며 고개를 떨구었다. 그의 머리속에는 괴롭고 어지러운 상념들이 풍우같이 들이닥쳐 갈갬을 했다.

둘째딸이자 막내딸인 성련화의 운명은 지금 바람앞의 등불처럼 위태한 지경에 빠져들었다. 북에서 발표한 《평화통일호소문》을 가지고 선전한 《죄》로 체포된 련화는 《빨갱이》로 인정되여 엄중취급을 당하는판이다. 련화와 같이 체포된 청년들속에서 남자들 몇은 벌써 홍제원화장터에서 쥐도 새도 모르게 총살당했다는 말까지 떠돌고있다. 성송암이한테는 유일한 희망이자 그의 사랑을 송두리채 걷어안고있는 련화였다. 그 딸을 구하고저 이때껏 굽히지 않던 기개며 자존심마저 다 버리고 동분서주하게 된것이다. 심지어는 사돈이라고 하지만 개닭보듯하던 《정부》의 《장관》이랍시는 리윤병이한테까지 찾아갔다. 얻어진것이란 안됐다는 귀떨어진 동정 몇마디에 딸교양을 잘못했다는 구질구질한 책망이였다. 그래도 맏딸 계화가 한발 건너의 사돈보다 나았다. 며칠전부터 대구에서 올라와 시집에서 사는 계화는 시아버지앞에서는 아무 말도 않고 꿀먹은 벙어리처럼 있다가 오늘 이렇게 찾아와 억이 막힌 방법이나마 한가지 구원책을 내놓는것이다.

그러나 그 구원책이라는것이 인륜도덕의 계률같은것은 싹 집어던진 상태에서 움직이라는것이다.

《어떻게 하겠어요. 아버지, 다른 수가 없잖아요. 혹시 아버진 월북한 림운학이란 사람을 생각하는것 안야요?》

계화가 무심결에 하는 말인듯 물었다.

《언제 만나기로 했니?》

《10시경에 저희집에 오겠다고 했어요. 주인과 하는 말을 들으니 며칠안으로 감옥과 류치장들을 정리한대요. 빨갱이들을 싹 숙청해치운다고 해요. 련화도 그 대상이라는거예요.》

《너의 주인은 언제 서울에 올라왔느냐?》

대구주둔 3사단의 미수석고문통역인 계화의 남편은 얼마전부터 38선에 이동되였다고 했다. 계화도 그래서 대구에서 살다가 시집에 올라와 기거하고있지만.

계화는 아버지의 말에 주변을 기이는 눈치로 조심스레 둘러보고는 귀속말하듯 말하였다.

《엊저녁에 올라왔어요. 고문관의 처가 오늘래일로 미국의 고향집에 간대요. 그편에 산삼과 몇가지 선물을 보낸대요. 그리고 말이예요.》

계화는 수심어린 빛으로 송암이를 보며 뭔가 말할듯말듯 눈을 깜박이다가 수삽한 웃음을 지었다.

《오늘아침 술을 찾더니… 한다는 말이 〈쌈터지기 전에 너의 그 빨갱이를 꺼내야지 그러찮으면 천당에서나 만나.〉하는거죠뭐.》

송암은 가볍게 몸을 떨었다. 요즈음 쉬쉬하며 들리느니 전쟁소리라 이미 인박힌 말이였으나 딸의 말을 들으니 사태의 절박성이 더욱 새삼스럽게 느껴져 련화의 신상에 대한 불안감이 가슴을 옥죄였다.

《내 그 사람을 만나겠다.》

한발자국 뒤져 걷는 송암의 낯빛은 비장하다 못해 처량했다.

그는 안동국에 있는 리윤병의 집에 갈 때까지 말 한마디 하지 않았다.

집은 적산건물중에서 리승만이 하사한 로대가 달린 2층목조건물이였다. 계화는 젊은 시어머니가 제 동무들과 한담을 하는 맞은켠방을 흘끔흘끔 살피며 2층응접실로 아버지를 안내했다.

응접실은 서양식으로 꾸려져있었다. 벽을 따라 안락의자와 쏘파를 놓고 드문드문 화분을 세웠다. 계화가 권하는 의자에 앉은 송암은 머리를 쳐들다가 징그러운 구렝이나 만난듯 황급히 외면하였다. 물에 불궜다나온듯 팅팅 부은 몰골의 리승만과 어깨를 맞춰 찍은 뾰족한 턱에 나비수염을 한 리윤병이 웃고서있는 사진이였다. 조만식의 한쪽팔로 북선기독교의 교주격이던 리윤병이 46년 2월에 월남하여왔을 때 같은 리왕조의 혈통이라는것, 미국과 기독교를 다같이 하늘처럼 받들어모신다는 그 일치성에 서로 감격하며 찍은 사진이다.

《얘, 네 방에 가자.》

송암은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계화의 방은 복도의 맨끝에 있었다. 방에는 예수의 고행을 보여주는 눅거리 모사품들이 어지럽게 걸려있었다.

방을 둘러본 송암은 허허 웃고는 계화가 내미는 방석은 보지도 않은채 장판바닥에 꿇어앉았다.

《수녀원이구나.》

송암이 갓난 예수를 그러안고있는 성모 마리아상을 유심히 쳐다보며 하는 말에 계화는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숙였다.

《차를 가져올래요.》

계화가 소리없이 문을 여닫고 나가자 송암은 나직이 한숨을 지었다. 세상은 장관의 며느리, 세도가 당당한 미수석고문관의 통역의 안해라는것으로 계화의 처지를 혹 부러워할는지 몰라도 이 수도원과 같은 을씨년한 방에서 찬송가의 구절을 부르며 하루하루 젊음을 죽여가는 딸이, 그나마 아이를 못낳는다고 시부모의 천대까지 받는 딸이 과연 행복하다고 하기에는 송암의 량심과 눈이 너무나 밝았다.

송암이로 볼 때 계화는 이 집에 이식된 하나의 어설픈 꽃에 불과했다. 리윤병이 만들어놓고 그 아들이 굳건히 지키는 문안에서 순종과 자비의 너울을 쓰고 희망도 정열도 없이 살아가는 고독하고 불쌍한 존재였다.

계화는 오직 예수밖에 몰랐다. 리화녀전시절부터 그러긴 했으나 리윤병의 며느리로 된 이후부터는 더욱 극성이였다. 그의 모든 행동과 말은 예수로부터 시작되고 예수로 끝났다. 그에게서 아버지와 동생은 《선량한 이웃》의 하나로만 되였다. 련화가 빨갱이인 운학이를 따른다 하여 또 송암이가 그것을 두둔한다 하여 계화는 울며불며 야단을 했고 시부의 엄명이 있어서인지 집으로 다니는것도 삼가했다. 그래도 아직은 인간의 얼과 인정이라는 살뜰한것이 다 마멸되지 않아 련화의 이번 불행에 접하여 언니로서 가슴을 태우고있는것만은 사실이다.

《아버지, 차를 드세요.》

계화가 사기쟁반에 노란 차 두고뿌를 가져다바친다. 송암은 김이 물물 나는 차고뿌를 들었다가 그만 놓고말았다,

《왜 안드세요?》

《별로 생각이 없구나.》

송암은 련화생각에 가슴이 욱 저려들었던것이다.

《너무 걱정 말으세요.》

《…》

《그리고 이제부턴 련화를 꼭 붙잡으세요.》

《그건 무슨 소리냐?》

《그 앤 그저 사내들처럼 분주스럽지요. 정말이지 그 앤 먼저 믿음을 갖는것이 첫째야요.》

《그건 너의 시부 말이겠구나.》

송암이 허구픈 웃음을 웃자 계화는 낯이 빨개졌다. 계화가 말하는 《믿음》이란 자기처럼 예수를 믿던가 하라는것이다. 송암은 그것이 자기자신에 대한 반발로도 느껴졌다. 불쑥 마음이 비꼬여나갔다.

《련화도 믿음이 있지 않니. 그 앤 공산주의란걸 믿는단다.》

《안예요. 그 앤 공산주의를 믿는것도 안예요. 그저 그 림운학이라는 사람 따랐을뿐이지.》

《그래, 너처럼 예수를 믿게 하면 되겠느냐?》

그 말에 계화는 웃음을 머금었다. 송암도 빙긋이 웃었으나 그것은 자신에 대한 회오와 비난의 웃음이였다. 서로 다른 두 길을 걷는 계화와 련화의 운명, 그것은 자기가 빚어만든 기형의 열매가 아닐가.

이 땅은 예나 오늘이나 사상과 넋의 동토대라고 개탄하며 일찌기 두 딸들에게 정신령역에서의 자유를 선포한것이 그리고 자기의 무사상, 무정견의 허무주의가 오늘의 결과를 빚어냈는지 모른다. 오래인 정신적방황끝에 그가 얻어낸 진리란 이 땅에서 정의를 찾는다는것은 불가능하다는것이였다. 그는 모든 주의와 주의를 읊조리는 《영걸》들을 회의와 랭소속에 보았다. 이렇게 되여 끝끝내 정신적믿음을 찾지 못한 그는 딸들에게 《너희 뜻대로 살아보라.》는 아량과 호의를 베풀었다. 계화가 이 집에 오게 된것도, 련화가 쇠고랑을 차게 된것도 결국 그 《아량과 호의》때문이다.

그가 리윤병이를 알게 된것은 1944년 서대문감옥에서였다. 송암은 그 몇년전에 혜초가 간 길을 따라 중국과 인도를 편답하던 과정에 상해림정의 인물들과 만난것이 사달이 되여 령어의 몸이 되였던것이다. 그가 옥살이를 하는 방에 하루는 명태꼬치같은 몸에 장삼같은 죄수복을 입은 리윤병이가 들어섰다. 그는 들어서기 바쁘게 창살밖으로 가래침을 내뱉으며 쪽바리 왜놈이 어쩌고저쩌고 욕을 퍼붓더니 점심밥으로 들어온 목궤밥을 간수에게 쥐여뿌리며 《이놈들, 이따위걸 먹을줄 아느냐. 이제 하느님의 사도들한테 천벌을 받지 않나 두고봐라.》하며 법석을 떨었다. 그통에 도로 끌려나간 리윤병은 온몸에 구렝이를 감고 들어와 며칠을 앓았다. 그때 윤병이를 곁에서 간호한것이 성송암이와 《반일무장단》관계자 림천이였다.

윤병은 당나귀기침을 하며 근 열흘을 누워있더니 일어난 다음부터는 일체 욕질을 삼가하고 아침저녁 벽을 마주하고 예수를 부르며 줄곧 성경을 외워대였다.

방안의 모든 사람들이 그 예수광을 비웃었으나 성송암과 림천만은 그렇지 않았다. 오히려 림천은(사람들은 그를 공산주의자라고 했으나 송암은 그것을 믿지 않았다.) 《일본이 망하라고 하느님께 비는 모양인데 옥고를 이겨내는 하나의 좋은 방편일지 모르지요.》 하고 윤병이를 책하는 사람들을 눅잦히기도 하였다. 대신 송암은 기독교의 허무함을 두고 윤병이와 이른바 학구적인 토론을 끝없이 벌리기도 하였다. 이런 과정에 친교라면 친교라고 할것이 생겼다. 그런데 운명의 묘한 작회라고 하겠는지, 면회일에 계화와 련화가 법전에 다닌다는 윤병의 아들 리영준과 림천의 아들이라는 림운학이와 거의 동시에 나타났다.

그때 송암은 아버지를 닮아 매우 준수하고 기골차게 생긴 운학이가 퍽 맘에 끌렸다. 그래서 감방에 돌아온 다음 노는 말삼아 림천에게 《아들을 사위삼고싶다.》고 했다. 림씨가 웃으면서 《까치는 까치끼린데… 우리는 짝이 안되지요.》라고 몸을 사리는데 윤병이가 괭이상에 웃음을 짓고 송암에게 달라붙었다.

《거 큰딸이 리화녀전이라지요. 게선 착실한 신도들이 많이 나옵네다. 난 아까 그를 보고 성모 마리아가 강림했는가 깜짝 놀랐습네다.》

미국선교사들과의 오랜 교우관계로 말을 외국사람들식으로 더듬는 윤병은 송암의 손까지 잡고 간청하는것이였다.

《거 큰딸을 우리 아들에게 주지 않겠습네까. 아무리 봐야 천생연분의 배필일것 같소이다.》

송암은 윤병을 갑갑한 감방에서는 말벗으로 삼았어도 사돈으로 삼을 생각은 꼬물만치도 없었다. 그런데다 네모테안경을 코에 건 말상의 아들이라는 사람 역시 마음싸지 않았으나 그가 필생에 명심하리라고 한 좌우명대로 말하였다.

《난 자식들에게 지시를 하는 사람이 아니웨다. 각자는 제 눈이 있고 제 생각이 있을테니 그 애 마음이 정할탓이지요.》

윤병은 다된 혼사런듯 기뻐했다. 그런데 윤병은 몇번 형무소장실에 불려나갔다오더니 감옥에 들어온지 한달도 채 못된 어느날 《병보석》으로 나갔다. 그는 나가는중에도 《송암선생, 약속을 잊지 마소.》 하고 다짐을 두는것을 잊지 않았다. 나가서는 인차 평양으로 떠났고 면회일이면 그대신 아들이 계화와 함께 나타나선 음식가지며 속옷따위들을 한아름씩 들이밀었다. 하는 케가 수상쩍어 계화에게 물으니 대답인즉 《사람이 좋아요. 아버지도 승낙했다죠.》 하고 말을 얼버무렸다. 이런중에 페결핵 3기인 안해가 덜컥 쓰러졌다. 윤병의 아들이 돈을 내여 입원을 시킨다, 약을 지어 쓴다 하며 얻어쓴 돈이 수백원을 넘는다는것이였다. 허나 그 성의에도 안해가 종시 살지 못하고 눈을 감자 리윤병이 와서 장사를 치러주고 면회일도 아닌 때에 아들과 계화를 데리고와서 《아예 살립시다.》 하고 들이대는것이였다. 송암은 낚시에 걸린 가오리신세가 되여 하자는대로 끌릴수밖에 없었다. 눈치를 보니 예수에 미친 딸은 리윤병이가 마치 예수가 보낸 성인이나 되는듯 떠받드는 꼴이였다. 송암은 감방귀신으로 썩을지도 모를 자기의 처지에서 이러쿵저러쿵 할 형편이 못되여 《마음대로 해라!》하고말았다.

이에 대해서 림천은 몹시 유감스러워했다.

《잘한 처사 같지 않습니다. 나도 그 사람을 좀 아는데… 하느님한테 너무 팔려 지조가 없지요. 그나마 배일감정이 있는것으로 눈감았는데 지금은 그 감정마저 헌신짝처럼 집어던지지 않았습니까.》

그때 송암은 림천의 말이 옳이 여겨졌으나 겉으로는 수긍하려들지 않았다.

《설마 그럴수야 있겠습니까? 보석으로 나간것이 좀 별랗긴 합니다만 그렇다 해서 나삐 볼수야 없지 않습니까.》

송암은 해방이 되여 감옥에서 풀려나온후에야 림천이 얼마나 사람을 정확히 봤는가를 알았다.

북선기독교회의 거두이고 대지주인 리윤병이 석방을 위해 비행기헌납금을 바치고 보석으로 나오자바람으로 평양에 가서 벌린 선도회에서 조선사람은 일본을 위해 살기도 하고 죽기도 하는것이 하느님의 뜻이라고 력설했다는것을 들었다.

돌아가는 소문이라 반신반의하는중에 리윤병이 38선을 넘어 월남해와서는 《적색 마귀를 물리치자.》고 게거품을 물고 돌아치더니 리승만의 수하졸개가 되였다. 그것까지는 사상과 주의에 초월하려는 송암이의 눈에 융화될수 있었다. 그러나 《서북청년단》이라는 테로단을 뒤에서 조종하는 인물의 하나가 되여 마지막에는 감옥동료였던 림천이 서울시인민위원회조직관계자라는것으로 배척하던끝에 미군정에 쏠아 검거하게 한것을 알았을 때 송암은 뜬눈으로 밤을 새우며 뼈저린 통탄을 하였다.

그때로부터 송암은 리윤병과 절교를 하였고 계화에게 다니는것도 그만두고말았다. 계화는 처음엔 울기도 하고 그러지 말라고 애원도 하였으나 시간이 흐름에 따라 아버지나 련화에 대하여 점점 멀어져갔다. 송암은 그것이 서글펐으나 돌이켜세울 희망이 없었다. 결국 그는 《너희들 뜻대로 살아보라.》고 한 자기의 처사가 무책임, 무관심으로 기울어진 실책임을 자인하지 않을수 없었다. 그는 이 실책을 두번다시 되풀이하지 않기 위하여 련화에 대해서는 은연중 신경을 썼다. 《어떻게 하라!》는 조언은 못주었으나 《…하지 말라》는 의견은 강하게 내세웠다.

림천의 아들인 림운학에 대해서 인간적으로는 호감을 두고 귀히 여겼으나 《북조선공산주의》에 끼워있다는것으로 련화와의 접근을 극력 막아나섰다. 이렇게 그는 자기가 표방한 《정신령역에서의 자유》와 모순되는 립장을 취했다.

《아버지, 왔어요.》

송암이 눈을 감은 때에 살며시 방을 나갔던 계화가 문을 열고 기쁜빛으로 소곤거렸다.

송암은 흠칫 하고 몸을 떨었다.

(그자를 만나?!)

백정식이를 처음으로 알게 된 광경이 눈에 선히 밟혀왔다.

…《두상, 림운학이를 감췄지.》

《여, 빠따방맹이를 멕일가?》

우그그 몰려든 서청패의 어중이떠중이들, 한놈이 야구방망이로 송암의 어깨를 때렸다. 《어이구》 하고 송암이 쓰러질 때 웃방에서 운학이와 함께 있던 련화가 달려나왔다.

《이게 무슨짓들이예요.》

련화가 송암의 온몸을 감싸듯 마주서 소리치자 놈팽이들뒤에 서있던 딱 바라진 몸매에 거무스레한 얼굴, 뽀마도로 재운 머리가 기름단지처럼 번들거리는자가 한걸음 나서며 머리를 가볍게 숙였다.

《아, 이거 성련화양이 아닙니까.》

대리석조각같이 굳어진 련화의 얼굴을 쳐다보는 눈에는 비굴한 아첨과 음심이 깃을 폈다. 그는 능글맞게 웃으며

《제 련화씨 형부되는 리영준씨의 동창입니다. 미안하게 됐습니다. 이거 집을 헛갈렸구만-》하면서 머리를 긁는 시늉을 하고는 제 패거리들에게 휙 돌아섰다.

《잘못 들어왔다. 이 집은 대학자 성송암선생님댁이시다. 돌아가자.》

…성송암은 선뜻 일어서기가 두려웠다.

《그자는 악당이예요. 서청패의 악질로 사람잡이에 이골이 났어요. 얼마전에 우리 학교 녀동무들 여럿이 미군들에게 끌려가 몸을 망치게 된것도 저놈이 끄나불이 되여 안내했다는거예요.

그때 운학씨가 없었다면 저도 잘못됐을거예요.》

언젠가 련화가 하던 말이 귀가를 쟁쟁히 울린다. 허나 그는 끝내 일어섰다.

(이 모퉁이에 와서 내 주제에 뭘 망설인단말이냐. 련화의 목숨이 경각에 이르지 않았는가.)

응접실에 들어서자 대위의 계급장을 단 카키색모직군복을 입은 백정식이 온 얼굴이 웃음으로 차 거수경례를 하였다.

《선생님, 그간 편안하셨습니까?》

백정식의 눈에는 알릴듯말듯한 미소가 스쳐지나갔다.

《아버님, 전 성련화씨를 제 목숨처럼 사랑합니다.

자기 감정을 이런 정황에서 이렇게 드러내는것이 교양없는짓인줄을 알면서도 렴체불고 말씀드립니다. 련화씨는 오늘 빼내지 못하면 위험합니다. 련화씨만 아니라 륙군형무소의 전부가 그렇게 될것입니다. 왜서인가는 묻지 마십시오. 전 이것을 저의 명예를 걸고 말합니다. 련화씨가 공산주의자들의 동정자라는것을 저도 알고있습니다. 그러나 전 사상은 관계 않습니다. 사랑이면 되지요. 사랑이면… 전 아버님이 사상과 주의를 초월하여 계시니만치 저의 이 심정을 충분히 리해하리라 믿습니다.》

《어떻게 하면 그 애를 구원할수 있소?》

송암은 미국에 가서 몇가지 얻어들은 엉터리철학으로 인생관에 옷을 입힌 이 백정식이같은 천치와 마주 상대하고있다는데 심한 불쾌감을 느꼈으나 할수 없었다.

백정식은 여느때 자기를 거들떠보지도 않던 송암이 이쯤 나오자 완전히 사기가 올랐다.

《전 모험을 하렵니다. 물론 군직에서 파면될것을 각오한것입니다. 저는 매부의 인장으로 석방서를 만들렵니다. 그렇게 해서 빼내면 조만간 탄로가 나 검색이 있을수 있습니다. 그 기간만은 련화씨를 제가 알선한 거처라든가 이 집에 은신시켰으면 합니다.》

송암은 괴롭게 낯을 찌프리고있다가 계화에게 얼굴을 돌렸다.

《련화가 일루 오는걸 사돈님이 알면 야단맞지 않겠니.》

계화는 도리머리를 저었다.

《시아버지껜 알리지 않겠어요. 주인이 안들어오니 나와 함께 있던가 빈방들이 여럿이니 적당히 숨겨두겠어요. 아니 주인의 서재가 유축져서 안전해요.》

《그러면 여기 데려오지.》

백정식은 빙그레 웃으며 계화에게 묻는 눈길을 던졌다. 계화는 실내화를 신은 자기의 조그마한 흰발을 내려다보고있었다.

송암은 손수건을 꺼내여 이마를 문지르고 일어났다. 그는 계화가 점심을 먹고 가라는것을 뿌리치고 밖으로 나왔다.

대문을 나서 총총히 걷다가 나무에 부딪칠번하고 걸음을 멈추었다. 그는 나무기둥에 털벌레가 옴질옴질 기여가는것에 한참이나 시선을 박고있다가 넋없이 중얼거렸다.

《막바지로다.》

송암은 단장끝으로 그 벌레를 문질러버리고 자기의 얼뜬 행동이 싱거워나 주위를 살폈다. 멀리 북한산장의 푸른 등허리가 안겨왔다. 송암의 머리에 불쑥 가슴 답답할 때마다 뇌이군한 시구절이 떠올랐다.

 

만국도성이 개미둑같고

천하호걸이 초벌레같네

 

옛날 서산대사의 입에서 나와 글로 남은 시구를 격하게 뇌이며 터벌터벌 걷던 송암은 옆으로 꺾어진 골목으로 낡은 시보레차가 역한 가스내를 풍기며 지나가는것에 고개를 돌렸다.

차가 들어가는 집을 바라보던 송암은 《아!》 하고 환성비슷한 소리를 질렀다. 거의 뛰듯이 그 집으로 갔다. 대문앞에 이른 송암은 원기를 돋구듯 큰소리로 웨쳤다.

《이리 오너라.》

그러나 인차 문이 열리며 열대여섯의 소년이 얼굴을 내밀었다.

《누구신지요?》

《계동의 성송암이 주인께 문안 여쭈러 왔다고 알려라.》

《네, 기다리십시오.》

소년이 도로 대문을 닫는데 찰찰 고무신 끄는 소리가 들리고 부드러운 저음의 목소리가 반겼다.

《송암이 어찌된 일이요?》

대문을 활 열어젖히며 약간 빠른 하관에 영민한 눈이 반짝거리는 안재홍이 얼굴을 내밀었다.

《민세, 그간 안녕하시오?》

《어서 들어오시오.》

안재홍은 언제나없이 삽삽하다. 그는 후원의 살구나무밑으로 송암이를 이끌었다. 돗자리까지 펴놓은것이 더위를 피하기에는 안성맞춤이였다.

《왜 얼굴이 그리 축갔소.》

《민세도 내 한가지구려.》

송암은 자기의 몰골이 너무 초췌한것 같아 대활한 태도로 웃었다. 안재홍이 역시 맞받아웃는데 몹시 서글픈 기색이였다.

《이렇게 찾아오니 참으로 반갑소. 이젠 옛날의 지우라던 사람들도 다 나를 역신 대하듯 피한단말이요. 남북협상회에는 아니갔지. 리승만과 미국사람들한테 딱 붙어 영리만 꾀하지 하고 공론들이 자자한데… 이젠 아이들의 돌팔매에 투서까지 날아드는판이요. 송암이! 송암이야 나를 알겠지.》

송암은 제 사정을 터놓으러 왔다가 뜻밖에 섧은 하소를 듣고나니 제 말만 말이라고 터놓을수 없었다.

《글쎄 송암이도 한때 내가 미국사람이 주는 민정장관의 감투를 쓰니 나더러 양놈의 시녀노릇한다고 비웃었지만 그것이 내 의사로 된것은 아니지 않겠나. 지금도 그렇지. 형무소신세라도 졌으면 젊은 사람들한테서 귀먹은 욕이라도 안듣지 않겠나. 나 하나 외토릴세. 몽양이 백범이 다 넘어지고…

그래 난들 그들처럼 넘어져야 하나. 그러자면 무슨 시위에라도 나가야지. 그래 그런데라도 나가라나. 아니면 국회의원 감투를 벗어팽개치고 리승만타도를 부르짖어야겠나. 자네도 언젠가 말했지. 정치란 늪에 일단 빠져버리면 거기서 빠져나오려고 하면 할수록 더 빠져든다고… 하긴 제 못난탓이지.》

《민세. 소리를 낮추시오. 아무리 국회의원이라도 그런 소릴 남들으면 무사할가?》

《될대로 되라지. 다 깨진 독인걸. 내 지금 리승만을 만나러 갔다가 허탕을 치고 오는길일세.》

《그건 왜?》

《흥, 자넨 귀머거린가? 지금 미국사람들의 부추김밑에 북과 일대 전쟁을 하자고 이제나저제나 하는판일세.》

《그래 리승만을 만나자는건.》

《깨우쳐줘야지. 망녕이 들었습니다고, 동족끼리 피를 흘리면 남들이 웃습니다 하고… 한데 리승만이는 어제부터 우리따위와는 일체 만날념을 않네. 직원들한테서 돌아가는 말인즉은 대통령이 래일은 비원에 가서 낚시질을 한다는거네. 그 정치의 곡예사가 무슨 연극을 하려는지… 내 그래서 오후에 신국방(신성모국방 장관의 략칭)한테 질의하려 가려네.》

《정말 전쟁을 할가. 작년 김석원이때부터 계속 북벌을 떠들었지만 거저 위협뿐이지 않았나.》

《아니, 지금은 위협타령으로 넘어갈 계제가 아니네.

송암이는 정세에 깜깜이군. 지금 동경에 미국의 브랫들리, 죤슨, 덜레스, 맥아더가 모여있네. 일본주둔 미군부대들이 모두 전투준비태세에 들어가고 우리 국방군들이 대거 38선에 밀려가네.》

《그래 신국방을 만나면 어쩔셈이요?》

《말려야지.》

《민정장관 3년을 헛했군. 그것이 신성모의 결심에서 되고 안될 대산가?》

《하긴 그렇네만… 하여튼 실상여부라도 알자는걸세. 아, 이제 쌈이 일면 이 재홍이도 천고의 역적으로 몰릴테니… 자네가 부러우이. 속세의 갑론을박을 피해 처염히 사는-》

《민세, 그 처염에 불똥이 떨어졌네. 사실 민세를 만나러 온것도 내 작은 딸때문이요. 그 애가 북에서 날린 6. 7호소문을 지지선동한 죄로 륙군형무소에 잡혀들어갔소.》

《뭣이?》

재홍은 이마전에 심줄이 올롱하여 웨쳤다. 그도 6. 7호소문을 지지한 관계로 리승만에게 불려가 되게 닥달을 받은데다가 출처미상인곳에서 협박전화까지 받았던것이다.

《그래 어쩌겠나? 국회의원의 말은 허수로 듣지 않을테니 한번 힘써주게나.》

송암이 간청하자 재홍은 기막힌 상으로 한숨만 쉬다가 쾌히 승낙하였다.

《가보세. 내 힘이 있어야 벼루지보다는 나을가마는.》

송암은 재홍이 눌러잡는바람에 점심 한술을 얻어먹고 그의 차에 올라 륙군형무소로 내달았다. 차는 형무소정문에 이르기도전에 정지당했다. 노란 기발을 든 헌병이 길가운데 우뚝 서서 도사리고있는것이였다.

《접수를 해야 됩니더.》

위병장교인듯한 소위가 마주나왔다. 그는 안재홍이 내미는 국회의원신분증을 보자 차렷을 하며 경례를 하였으나 안재홍이라는 이름을 보고는 입가에 알릴듯말듯한 비양조의 웃음을 지었다. 정계의 파상에 예민한 후각을 가진 이런 족속들은 국회의원중에도 경의를 표해야 할 대상과 그렇게 하지 않아도 될 대상으로 갈라놓고있었는데 안재홍은 후자에 속하는 인물이였던것이다.

《무슨 용무이십니까?》

《헌병사령관 송요찬씨를 만나러 왔다. 오늘 예와서 군무를 본다고 했다.》

《유감스럽지만 각하를 만날수 없습니다. 오늘은 일체 외인들의 출입을 엄단할데 대한 지시가 있었습니다.》

《그럼 누구를 만날수 있느냐?》

《누구도 만날수 없습니다. 다만… 직분을 고려하여 당직장교님을 찾아드리겠습니다.》

그놈은 히죽이 웃으며 정문초소막에 들어가 전화를 걸었다. 잠시후 중령의 계급장을 단자가 종졸 하나를 데리고 나타났다. 오달진 몸매의 중령은 두 늙은이를 의심쩍게 보다가 안재홍에게 시선을 멈췄다.

《무슨 일로 왔습니까?》

《불법감금에 대해서 당신의 상관에게 항의하러 왔소.》

안재홍이 침착히 말했다.

《무슨 불법감금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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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산님의 댓글

강산 작성일

(위에서 계속)

놈은 메밀눈을 한채 싸늘히 웃었다. 안재홍은 낯이 파랗게 질렸으나 헤덤비지 않고 강단있게 말하였다.

《나는 국회의원으로서 당신네 헌병의 월권행위에 대해 엄중항의하오. 헌병의 임무와 권한은 륙해공군의 군기유지와 군법에 관한 수사와 경계지 민간인의 범죄나 정치법에 관해서는 관할 안하는것이 국가법에 부합되는것이요.》

《어느 범인을 념두에 두십니까?》

《당신네는 지금 리화녀대학생 성련화양을 이 형무소에 감금하고있지 않소.》

《그렇습니다. 그 녀학생은 빨갱이로서 선전뿐아니라 백범선생의 암살을 당국과 군부의 모모 요인들의 작간으로 비난했습니다. 그래 놓아달라는 말씀인가요? 그건 안됩니다. 지금 군비상 계엄령이 실시되는 때라는걸 모르시는가요. 비상계엄령하에서는 국회의원도 필요하면 잡아넣는것이 헌병이라는걸 알고 거동하시는게 좋겠습니다.》

《뭣이 이 고현놈!》

안재홍이 크게 소리치자 헌병중령은 씽글씽글 웃었다.

《각하, 그 발언은 헌병 모독죄로 될수 있습니다.》

《민세, 그만하슈.》

송암이 안재홍이를 떠밀다싶이 차에로 이끌어갔다. 재홍은 끄는대로 차에 실려앉았다. 송암이 차에 오를념을 않자 재홍은 피기가신 얼굴을 바닥에 떨군채 나직이 물었다.

《어쩌겠나?》

《김규식댁에 가보려오.》

《그도 같지, 아니 요즘 그는 감시까지 받지 않나.》

《아니… 그 문제가 아니라 모레 백범의 제사일이라 한번 모이자고 하더군. 그래서.》

《그럼 나도 일즉 거기 들릴테네.》

안재홍이는 쓸쓸한 미소를 남기고 뿌연 연기를 토하는 차와 함께 사라졌다. 성송암이 돈의동의 김규식집에 이르렀을 때 한줄금 비가 쏟아져내렸다. 이 집의 출입객들을 감시하던 사복형사들이 비를 피하여 맞은편 가게방으로 뛰여가는 서슬에 송암은 유유히 그집에 들어섰다.

대청마루에 앉아있던 규식의 호위원이 버쩍 긴장하여 일어났다가 이 집의 단골손님인 송암이를 알아보고 안에다 뭐라 소리치자 머리에 수건을 동인 김규식이 미닫이문을 열고 나왔다. 5. 30사건으로 며칠간 옥고를 치른끝에 제 말로 심화병에 신경통이 겹쳐 신고하는판이다.

송암이 인사를 나누고 방에 들어가니 바둑판을 벌려놓고 최동오가 앉아있었다. 바둑판옆에는 되돌이 술병이 놓인 다담상이 있었다.

《이거 성선생이 오래간만입니다. 그간 무고하셨소?》

최동오가 눈부터 먼저 웃으며 인사를 하고는 버릇대로 삼각수염을 내리쓸었다. 송암이 맞절을 하고 보료를 깐 옆의 맨바닥에 앉자 규식은 돗방석을 내밀며 물었다.

《따님의 일이 어떻게 되였습니까?》

《죄가 더 커진가봅디다. 뭐 그 애가 백범선생의 살해장본이 리승만이라고 찍어 말한모양인데… 그 언치로 지금은 륙군형무소에 갇혀있답니다.》

송암은 낯이 불깃해 대답했다.

《말세지, 말세야. 그래 백범의 암살이야 리승만이 조작한걸 장안이 다 아는데… 새삼스레 그 말을 왜 꺼내서 그 화를 당한단말이요.》

최동오는 바둑판을 와락 밀어젖히고는 다담상을 끄당겼다.

《성선생, 술이나 마시며 속을 좀 끄시오.》

송암은 인정이 무르고 결곡한 최동오임을 아는지라 그의 진정으로 하는 위안에 가슴이 저리여 부어주는 종지를 그대로 주욱 들이켰다. 최동오는 밥사발에 술을 부어 단번에 들이마셨다.

《그러고보니 그놈의 정치는 은거선비도 아랑곳않는군. 큰딸은 세도대신의 며느리요, 작은딸은 공산당이라. 성선생 신조는 과연 어찌될가.》

《의산 취했구려.》

김규식이 최동오를 나무랬다. 최동오는 그 말에 고개를 들며 싱긋이 웃었다.

《취하는것이 얼마나 좋습니까. 내 지금 생각이 많소.

성선생! 이제 짚고선 두 섬에서 아니 두 배에서 어느쪽으로 가겠소? 리윤병이한테 가는가 막낭딸 공산당한테 가는가 시간문제지만 결국에는 어느 한 배에 타고 노를 저을거 아니겠소.》

《그래 의산은 무슨 배를 탔소? 의산의 정치는 그래 어떤 배에 실렸소?》

성송암은 조용히 말한다는것이 어조가 급격히 높아졌다.

《15년전 의산은 상해에서 나를 만났을 때 무슨 단심줄소리를 하셨지요. 참사상 참주의를 가진 인걸에 뭉치는것이 조선과 민족의 활로라구요. 그때 난 이 땅에서 사상과 주의란 모두 빌려온 장식품이요, 남을 누르기 위한 도구요, 그걸 휘두르며 하는 사색 당쟁이 우리 력사고 래일이다고 했지요. 선생은 날 비웃고 꾸짖었습니다. 왜 참사상이 없겠느냐. 간도의 김일성장군을 보라, 내 있던 의숙의 학생이라서가 아니라 참사상을 가진 인걸이여서 말한다. 그를 기둥삼아 뭉치면 우리도 해빛을 볼거 아니냐고 기염을 뽑았지요. 그렇다면 해방이 되여 북에 김장군이 오셨을 때 따라가서 받드는것이 정치가로 인간으로서의 신념이고 도의가 아니였겠소? 나같은것은 별로 기대도 안가고 또 축에 못가 불리우지도 않아 안갔지만 선생이야 그 뜨르르한 독립운동자의 관록과 김장군의 옛선생이라는 선성을 갖고 남북협상에도 갔댔지요. 난 그때 령감들 다시 못보는가부다 했소. 선생이 참새제비가 아닌즉 대붕의 큰뜻을 좇아 거기 있으리라고… 그런데 돌아왔더군요. 거기에도 부조리가 있었겠지요. 그래 와서 무엇을 했는가. 국회의원감투를 얻는 싸움에 진출하셨소. 결국엔 그 싸움에서 패하고 류치장살이까지 하고 지금은 소생과 술을 마시고… 그래 여기서 무슨 정치가의 신념을 찾겠소. 무슨 정치가의 륜리를 보겠소. 이 땅에서는 어쩔수 없는 일, 나는 그래서 령감뿐아니라 모든 정치인들을 웃고있습니다.》

《송암, 고맙소. 당신은 나에게 불을 지펴주는구려. 송암의 말은 백번 지당하오. 인정하면서도 의혹을 갖고 따르면서도 동요하고 받들려면서도 자조한… 이것이 최동오올시다. 당쟁의 세습이 인 찍혀진 비루한 습성, 무지의 소산이지요. 내 전전년에 김장군님 뵈옵고 한생을 회오속에 돌이키면서도 게 눌러앉지 못한것은 그래도 나라를 근심하여 살아왔다는 주제에 공없이 있기에는 체면이 허하지 않아 왔소. 결국 예 와서도 밥버러지로 소일하고있소만… 내 신념이 없는것만은 아니웨다.》

어지간히 취한 최동오의 눈에는 한방울 눈물이 맺히였다.

송암은 씁쓸한 기색으로 말했다.

《령감이 부럽소.》

《그건 무슨 말이요?》

《기대를 가지는 사람은 행복자요. 령감은 희망을 찾았으니말이요.》

《송암이도 나와 같아질 때가 올것이요.》

《천만에!》

그때까지 한마디 말없이 창밖을 바라보던 김규식은 성송암의 말에 그 리지적인 얼굴에 한줄기 웃음을 띄웠다.

《성선생, 선생도 김장군을 가 보일것을 그랬소. 보시오. 그 철석같던 백범선생도 일생의 리념을 뒤집고 련공의 길에 나서지 않았습니까?》

《허허… 그러나 그 기치의 엇갈림으로 얼마나 많은 죽음이 생깁니까. 난 그것이 괴롭소이다.》

송암은 통탄하듯 말하였다. 김규식과 최동오는 침묵을 지켰다. 송암은 자기가 이 령감들의 체신을 도무지 봐주지 않고 마구 떠들었음을 느끼고 입을 다문채 방안을 두루 살폈다.

창문앞 탁자에 백범선생의 힁사 한돐에 즈음하여 쓴 추모의 글이 주렴처럼 펼쳐져있었다.

송암은 규식이에게 눈을 주고 조용히 물었다.

《김구선생의 제를 크게 열것 같습니까. 계엄령하에서는 일체 모임을 못가진다고 백성욱이 담화를 발표했다는것 같습니다.》

그 물음에 김규식은 득의의 미소를 띄웠다.

《그건 내가 해결했습니다. 오늘아침 백성욱내무를 만나 우리의 취지를 알리니 자기가 책임지고 한돐제를 지내게끔 하겠노라고 하더군요.》

《난 그게 수상스럽습니다. 어떤 제기에 대해서도 〈국부〉께 밀어버리는 그 맹물단지가 군비상계엄령하에서 자기가 다 책임진다는것이 흰소리 아닙니까.》

최동오가 머리를 기웃거린다.

《뭐 대답은 해놓은것이니 우리야 하면 되겠지요.》

김규식이 최동오에게 말하는데 자동차소리가 나고 뒤미처 문이 열리며 안재홍이 들어섰다.

《령감들!》

그는 방에 들어서 한마디 소리치고는 입술을 부들부들 떨다가 신음하듯 뇌였다.

《군대는 북진을 시작합니다.》

창졸간에 던진 그 말은 뢰성처럼 울렸다. 방안의 세사람은 요즈음 장안에서 쉬쉬하며 돌아가는 그 소리에 다 인백힌 상태였으나 여느 사람 아닌 안재홍의 그 말에 아연하였다. 김규식은 넋이 나간 사람처럼 벙벙해서 안재홍이를 보다가 왕청같은 소리를 꺼냈다.

《어저께 〈성조기〉(미군대신문) 한장을 얻어봤는데 웨더마이어가 개인명의로 한국에 미-8형장갑차 12대를 기증한다는 뉴스가 실렸더군.》

《망했습니다.》

안재홍이 흐느꼈다.

최동오는 입술을 악물고 수염만 밸밸 꼬았다. 그러다가 흔들린 사람처럼 껄껄 웃었다.

《버러지지, 버러지. 우리의 힘, 우리의 정의란게 무슨 쓸데가 있어?》

송암은 처절한 눈길로 이들을 둘러보았다.

한생을 제딴으로 배달의 땅, 배달민족을 위해 바친 이 사람들의 비통한 얼굴에서 그는 정치와 외면하려는 자기앞에도 숙고하지 않으면 안될 큰 문제가 제기되였다는것을 깨달았다. 그것은 딸의 문제면서 또 자기의 문제며 민족의 문제였다.

속세의 싸움에 벗어져 산다고 자부한 그였으나 이 싸움에서 자기는 어데 가 서야 하는가. 똘스또이의 타애를 그중 가깝게 받아들인 그의 심령으로 볼 때 막막하다. 한편 무언가 지글지글 타오르는 분격이 주체할길없이 그의 마음을 휘저었고 그를 떠박질렀다.

《령감님들, 내 정치를 웃습니다. 이 나라에서 정치객이란 주의주장의 싸움군들입니다. 불쌍한것은 백성이지요.

그러고보면 인생이란 그저 조물주의 잘못을 탓하며 그럭저럭 끌려가는 걸음이지.》

송암은 그동안의 모든 설음과 격정이 눈물로 북받쳐올라 꺼이꺼이 울음을 터뜨렸다.

 

폭스트로트와 당고의 광란, 비비꼬며 돌아가는 다리들, 도발적인 향수내와 알콜내… 미군사고문단의 후방요원들, 륙본사무처의 녀서기들, 후방보급계의 장교들… 고관의 처첩들과 1류극단의 배우들이 저마끔 껴안고 빙빙 돌아가고있었다. 어설픈 각본에 어설픈 연출로 후날의 조소를 받은 《륙본장교구락부락성식》딴스홀의 악사석옆, 모든 시선이 쉽게 가닿는 식탁앞에는 중량 120키로라는 조선사람으로는 쉽지 않은 거구의 몸집을 가진 장성이 몽롱한 취안으로 춤추는 다리들을 내다본다. 때로 기자나부랭이들이나 외국인들의 눈길이 와닿을라치면 호걸남아의 위풍어린 웃음을 보이며 위스키병을 샴팡잔에 기울이고 그 잔을 단숨에 마셔버린다. 그 액체가 위스키가 아니라 소다수라는것은 오직 부관만이 아는 비밀이다.

이전 일본군대의 병기소좌였으며 오늘은 《국군》륙본참모총장으로 있는 채병덕은 《대의》를 위해 지금 연극의 한 장면을 연출하고있다. 여러쌍의 눈길이 그를 지키고있다. 맞은편 탁에서 평양태생의 헤랄드노불1등서기관이 로흉스런 눈길로 그를 보고있다. 노불은 무쵸대사의 지시를 리행하면서 동시에 미중앙정보부의 의사를 대변하고있다. 그옆에는 륙본(륙군본부)담당지투수적고문관 죤 피 리스대위와 군사담당고문 하우즈만대위가 채병덕의 행동을 주시하고있다.

채병덕은 그 눈길과 신호들에 비육이 심한 체격으로는 놀랄만치 민감하다. 아마 그덕에 수다한 경쟁자를 물리치고 참모총장이라는 높은 덕대에 오른 수탉이 되였는지 모른다. 지금 그의 내심에서는 《내 결코 너희 인형만으로는 있지 않으리라》는 야심이 도도히 굽이치고있다. 오래도록 준비하고 갈망해온 거사가 바로 그의 이 야심까지 성사시켜줄것이다. 다만 그 거사가 성공될 때까지만 이 눈길과 손에 아부해야 되고 웃어줘야 한다.

채병덕은 허영심이 비상히 강한 군인이였다. 그의 허영심은 아버지의 돈과 권력이 어릴적부터 심어준 습벽이였고 중학시절에는 유도와 격검에 미쳐 돌아가며 특이한 완력으로 망나니들의 대장질을 하며 굳어졌다. 일본륙군사관학교에서 그 삐여진 자존심과 애비의 끊임없는 돈의 덕으로 우수성적으로 졸업하여 조선사람으로는 바라보기 힘든 소좌의 계급까지 바라올라갔다. 그 과정에 내지인 행세를 하였으나 때로는 자기 몸에 흐르는 반도인의 피로하여 진짜 야마도다마시족들한테 천대를 받을 때도 있었으니 이럴 때는 미친듯이 괴로왔다. 그럴수록 그는 이를 사려물고 높이 올라가야 한다, 높이 올라가 리왕족들이 얻는 일본귀족의 작위라도 받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일본이 망하자 그는 일본인들한테 업수임을 받던 순간순간의 일을 재생확대시켜 그때의 모욕감을 《반일감정》으로 환원시켜 독립만세를 웨치며 눈물을 뿌렸고 친일의 력사에 《종지부》를 찍고 《건국》에 나섰다. 서툰 일본식 영어발음을 미국식으로 며칠간에 해결하여 미국인들앞에서 《한국산미국인》으로 행동하였다. 하여 그는 김석원이같은 선배를 밀어제끼고 먼저 장성을 어깨에 얹었고 참모총장의 권좌에 올랐다. 그러나 참모총장이라는 자리는 미군대위의 비준밑에서만 위세가 펼쳐지는 권좌였다. 이로하여 그는 마음 한구석에 늘 추를 매단것처럼 묵직했다. 그러나 그 감정을 드러내지 않았다. 장군이란 사사로운 감정에 아녀자처럼 가슴을 앓아서는 안된다고 생각한데도 있지만 보다는 그 감정표현이 곧 자기의 원대한 꿈을 사막의 신기루처럼 허물어지게 하는 원인으로 될수 있다는것을 간파했기때문이였다.

그러나 이제 벌어질 거사가 성공하면 그는 영웅이 될것이며 하잘것없는 대위의 손아귀에서 벗어나 맥아더와도 동격으로 이야기를 나눌수 있게 될것이라고 몽상하였다. 이렇게 현란하고 화려한 몽상에 도취할 때면 장내가 떠나가게 뭔가 웨치고싶은 환희가 솟는가 하면 반대로 실제적인 사업을 생각하면 초조와 불안이 옥죄이기도 하였다. 그 주요한 원인의 하나는 미군사고문단장 로버트준장의 미국행이였다. 로버트는 많은 외국기자들을 초빙한 송별회에서 임기를 마치고 떠나게 되는 섭섭함을 자못 강조하여 말하고 떠나간것이다. 이제 벌어질 전쟁의 매개 세부를 계획하고 작성한 당자의 하나인 로버트가 떠나가는것이 필요한 연극의 하나로 되겠지만 떠나기전에 그가 한 한마디 말은 그때까지 생각 못했던 또하나의 새로운 불안을 잠깨웠던것이다.

《미스터 채, 모든것은 당신의 의사대로 잘되고있습니다. 이 커다란 책임에서 성공이 있기를 바랍니다.》

모든 작전을 저들이 했건만 마치 그것이 전적으로 채병덕의 구상처럼 떠민다. 그 말은 만약 실패하는 경우에 모든 책임을 채병덕에게 전가시켜버리겠다는것이다. 채병덕은 늙은 도죠가 전범자로 교수형을 받던 시보영화의 화면을 생생히 기억하고있었다.

사실 지금의 작전계획은 자기의 눈으로 볼 때도 빈틈이 있었다. 그러나 맥아더사령부가 전일본군 고급참모일군들과 함께 작성한것이고 백악관이 비준했다는데서 이의없이 집행하는 길밖에 없는것이다. 금년 2월 리승만과 함께 맥아더를 만났을 때 그 유명짜한 5성원수는 너그럽게 웃으며 용기를 돋궈주었다.

《전쟁이란 자기 법칙이 있소. 그 승리의 궤도로 내닫게 하는 법칙은 우리의 의지와 힘속에 있소. 이번 전쟁은 당신네의 전쟁이자 나의 전쟁이요.》

며칠전에 왔던 덜레스도 신성모와 무쵸, 로버트준장, 라이트대좌(미군사고문단참모장)가 있는 자리에서 그와 같은 뜻의 말을 하며 개전즉시 대승할것이라고 했다. 일본의 이등박문과 같은 이 늙은 외교관의 말을 채병덕은 진실그대로 믿고싶었다.

《참모총장각하, 떠나보지 않겠습니까?》

담당고문 하우즈만대위가 채병덕앞에 와섰다.

채병덕은 그자의 눈길에 거만한 눈찌로 응수하고 천천히 손목시계를 보았다. 11시30분, 무쵸와 약속한 시간이였다.

(미국인들이 내 부관녀석보다 정확하군.)

장내를 둘러보니 떠벌이 외국인들은 하나도 보이지 않는다. 마음나는 계집들을 차고 더블침대로 기여들었을것이다. 다만 12시까지라고 명령을 받은 위관령관급장교들이 저마끔 껴안은 계집들과 시시닥거리며 돌아가고있다. 악대석의 녀자가수와 지분거리던 부관이 채병덕이가 일어서는것을 보고 시계를 내려다보며 황황히 입구로 나간다.

채병덕이 문을 나서는데 뒤에서 아양어린 목소리가 울렸다.

《대위님, 절 오늘밤 재워주지요?》

《안돼. 오늘밤 우린 무조건 병영에 가있어야 돼.》

《아이 장교님도. 저기 나가신 참모총장님의 이름으로 오늘 오후부터 외출외박이 선포되지 않았나요?》

《이런 바보… 그건 그래본거지. 세상을 속이는거란말이야.》

채병덕은 걸음을 멈추었다. 그는 정문입구에 서있는 헌병중위를 손짓으로 찾았다.

《저뒤 노란치마를 안고도는 장교와 계집을 24시간 입창(영창에 넣으라는것)시켜!》

채병덕이 나가자 운전수가 부관더러 물었다.

《어데로 가잡니까?》

《집으로.》

《어느 집으로 갈가유?》

채병덕이 들으라는 소리다. 채병덕은 화가 불끈 돋았으나 부관 역시 자기를 보는 바람에 치받치는 욕설을 삼켜버렸다.

부관은 채병덕의 엄엄한 기색을 보고는 운전수에게 《본집으로.》 하고 속삭였다. 채병덕은 차가 떠나자 자기가 하마트면 위신을 떨굴번했다고 안도의 숨을 쉬였다. 그러고보면 자기가 지금 신경이 과민되여있는것이다. 요즈음은 늘 본처의 집이 아니라 호적등본에 오르지 않은 팔판동의 애첩의 집에 가 자군하였기때문에 운전수가 그렇게 물은것이라고 생각하였다. 그가 어찌 언감생심 장성을 우롱하려고 그렇게 물었으랴.

채병덕이 집으로 들어가자 처는 그때까지 자지 않고있었다. 오늘밤은 집에 꼭 들릴거라는 부관의 선통을 받은 녀편네는 다 늙어빠진 쥐상에 희고 붉은것을 잔뜩 쥐여바르고 코트를 벗긴다 실내화를 가져와 신겨준다 하고 법석을 피우며 칭칭 감겨돌아갔다. 그것도 채병덕이 젊을적에 좋아하던 차림인 앞가슴이 헤쳐지는 까만 기모노를 입고 머리도 왜식으로 틀어올렸다. 채병덕은 이젠 다 스러져버린 녀편네의 뾰족한 얼굴을 쓸쓸히 보다가 사무실 겸 서재로 쓰는 2층방으로 갔다. 쇠를 열려던 그는 봉인딱지가 떨어진것을 한눈에 알아보았다.

《누가 오지 않았어?》

채병덕은 뒤쫓아오는 처에게 눈알을 부라렸다. 녀편네는 기모노앞섶을 가리며 얌전스레 대꾸했다.

《정식이가 왔다갔어요.》

《이 방을 열지는 않았어?》

《그 애가 뭣때메?》

《봉인이 떨어졌단말이야.》

《절로 그럴 때도 있어요. 청소부애가 혹시 소제를 하다가… 》

채병덕은 채 듣지 않고 문을 열었다.

묵직한 밤빛 비로도카텐을 창문마다 드리운 이 방은 마치 물속처럼 고요하고 침침하다. 그는 문밖에서 기웃거리는 처에게 손짓으로 물러가게 하고는 방문을 잠그었다. 그리고는 벽시계와 손목시계를 대조해본후 책상에 앉아 씨가를 한대 꺼내물었다. 그는 처칠이 려송연을 좋아한다는 말을 들은후부터 늘 이것을 피웠다. 그때문인지 어떤 친구들은 채병덕을 《처칠경》이라고 부른다.

채병덕은 담배연기를 천천히 뿜다간 시계가 5분전 12시를 가리키자 수화기를 들고 륙군본부작전상황실을 찾았다. 면바로 작전국장이 나왔다. 특별히 제기된 일이 없는가를 묻고 수화기를 놓는데 옆에 놓인 하얀 전화기에서 매미소리같은것이 울렸다. 수화기를 들자 쉬여빠진 코맹맹이 늙은 목소리가 나왔다.

《채병덕이냐?》

《예, 대통령각하 채병덕이 전화받습니다.》

《별고 없겠지?》

《네, 대통령각하, 만전을 기하고있습니다.》

《그럼 난 맘놓고 자겠다. 그래 군의 용기는 여전하겠지?》

채병덕은 씩 웃었다. 아침은 해주, 점심은 평양이라는 그 호기로운 맹약들에 대한 질문인것이다. 채병덕은 될수록 공손한 말투를 찾아 대답하였다.

《각하, 념려마십시오. 미국어른들이 어떨지, 군은 의기충천합니다. 옥체를 보중하시여 숙면하십시오.》

《고맙다. 용전하길 바란다.》

덜컥 하는 소리를 듣고 채병덕은 쓴웃음을 지었다. 그리고 수화기를 놓는데 마치 그 동작이 신호종을 누른것처럼 전화가 울어댔다. 채병덕은 《아차!》 하고 혀를 차며 재차 그 수화기를 집어들었다. 무쵸도 12시, 리승만과도 12시라고 전화약속을 한것이 잘못되였다는 뒤늦은 후회가 머리를 쳤다. 분명 무쵸가 리승만과 전화를 하는 2~3분간 신경질적으로 전화손잡이를 돌렸을것이다. 아니 이 전화선이 미대사관과 대통령실과 직결된것이니 무쵸가 도청했을수도 있다. 채병덕은 리승만과의 전화에서 《미국어른들》이라고 할 때 비양조로 말했음을 뉘우치며 정중하게 제함자를 대였다.

《참모총장 채병덕입니다.》

《다른 일은 없습니까?》

랭랭한 목소리다. 채병덕은 두손으로 전화기를 싸쥔채 잔뜩 긴장하여졌다.

《일은 잘되고있습니다. 일선상태도-》

《그건 나도 알아봤습니다. 다만 나는 약속을 지켜드린다는것을 귀관에게 알리고자 전화를 걸었습니다.》

《각하, 감사합니다. 저희를 믿고 주무십시오.》

채병덕은 전화기를 놓고나서 허구픈 미소를 지었다.

《저희를 믿으라》는것은 너무나 빤드름한 아첨에 불과한 말이다. 무쵸역시 이것을 잘 알고있다. 명령을 되받아넘기는 전달자에 불과한 자기가 아닌가. 그러나 얻어질 때는 매우 큰것을 얻을수 있는 싸움. 그는 이 싸움이 단순히 북조선만이 아니라 적색세력을 중국과 씨비리에서까지 완전히 구축하려는 어마어마한 싸움임을 잘 알고있는것이다. 이제 다섯시간을 어떻게 보낼가.

잠은 들수가 없다. 그러면 한잔 할가. 무쵸나 리승만이 다같이 파티에 가서 술을 마시지 말라고 당부했지만 여기 집에서 마시는것이야 저들이 알가. 일어나서 문을 열었다. 그런데 문앞에는 처가 무릎을 꿇고 얌전히 앉아있었다. 일본구주의 포병시절, 신혼의 얼마동안 흉내를 내다가 집어던진 일본식 옥상의 연기다. 순간 그의 눈은 기모노깃사이로 가닿았다. 벌써 몇년전부터 소박당하듯하며 별로 손이 가보지 않은것이다. 부지중 녀편네가 측은해졌다. 전쟁의 만약 경우를 생각해서 일본에 금을 빼돌리면서도 이 녀자의 몫으로는 조금도 넣지 않고 다 팔판동의 애첩에게 맡겼다. 너무 잔혹한 처사가 아닐가. 그때 또다시 전화벨이 귀찮게 울어댔다.

채병덕은 약속되지 않은 전화라 당황해서 되돌아섰다. 수화기를 들자 헌병사령관 송요찬의 쩡쩡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각하가 엄중단속하라고 한 성련화라는 녀자를 귀 처남되는 사람이 데려갔습니다. 석방서엔 각하의 인장이 찍혀졌다고 하는데 사실을 확인하려-》

《처남이?… 음…》

채병덕은 골살을 찌프렸다. 리승만경호장교라고 우쭐렁거리며 돌아가는 백정식, 나라가 뭣이고 사상이 뭣이냐 죽으면 단데 하고 위험스런 발언을 망탕 하는가 하면 어떤 때는 자기도 놀랄 정도로 흥분하여 이북을 쳐 쑥밭을 만들자고 웨쳐대는 덜렁뱅이 처남이라는 녀석이 감히 나라무력의 통수자의 인장을 훔쳐 쓰다니?

채병덕은 뻗쳐오르는 울기를 간신히 참고 태연히 말했다.

《찍은 일이 있소. 김규식이요 안재홍이요 너무 들싸대서… 그런데 도로 잡아넣어야겠소. 좋기는 조용히 없애던가 그렇지 못하면 오늘내로 서대문류치소의 제주도 빨갱이패들속에 밀어넣소.알겠소?… 도로 잡아넣으란말이요.》

채병덕은 전화기를 놓고 이마를 쓸었다.

《쳐죽일녀석!》

좋지 못한 징조였다. 그러나 자기의 처리는 괜찮은것 같다. 만약 참모총장이 제 인장을 처남이 마구 다루게 뒀다는것을 엉큼한 송요찬이 알면 무슨 망신이랴. 채병덕은 눈을 감고 잠시 서있다가 벽상에 있는 철함에 다가갔다. 철함에는 일본도가 걸려있었다. 그는 칼을 벗겨들고 칼날을 뽑아 불빛에 비쳐보다가 책상에다가 정중히 올려놓았다. 그리고는 전축을 틀었다. 이것저것 판을 고르던 그는 베토벤의 교향곡중 《영웅》을 뽑아들었다. 그 판을 맞추고 바늘을 올려놓은 그는 매우 엄숙한 표정을 하고 군도가 놓인 책상에 마주 가 앉았다. 그리고는 두손을 십자로 포개여 칼우에 얹고 거기에 머리를 박았다. 베토벤이 그려낸 영웅과는 엄청나게 다른 제나름의 영웅을 꿈꾸며 그는 칼에 정신적구조를 기원했다. 차거운 칼날에 이마가 선뜻선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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