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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소설 50년 여름 제1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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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강산
댓글 1건 조회 10,366회 작성일 20-02-03 17: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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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장

 

조총의 일체사격소리가 울렸다. 38경비려단장 최현장령은 보위성군관의 옆에 서있던 녀인이 흠칫하고 몸을 떠는것을 보며 눈을 내리깔았다. 아들과 마지막 영결을 하는 이 녀인의 모습은 최현의 가슴을 더더욱 쓰리게 만들었다. 이제는 두번다시 볼수 없는 애어린 전사의 얼굴이 녀인의 모습과 덮쳐 삼삼히 서려올랐다.

어제아침 최현은 조회보고를 받다가 폭음을 들었다. 지휘부 뒤산기슭에 갔을 때 그 전사는 이미 숨져있었다. 전사의 손에는 호박꽃이 쥐여져있었고 옷은 갈가리 찢겨져있었다. 솜털이 보르르한 입가에서는 검붉은 피가 흘러내렸다. 손에 쥐인 노란 호박꽃에도 피방울이 튀여 불꽃처럼 번쩍였다. 경비중대 대원인 그 전사는 보초교대를 마치고 자기가 심은 호박포기들을 돌아보다가 불시에 날아온 105미리 포탄파편에 맞은것이였다. 최현은 그길로 전방대대장 감시소로 나가 하루낮 하루밤을 꼬박 밝혔다. 단 한발뿐인 포탄의 수수께끼가 그리고 노란 호박꽃을 쥔채 눈을 감은 전사의 모습이 그에게서 안정을 빼앗고 자제력까지 잃게 했다. 오늘 이 장례식에 오면서 안나카까지 먹었으나 그때의 분함과 슬픔은 가셔지는것이 아니라 점점 더 커갔다. (최현은 리도산 《토벌대》와 백병전을 할 때 받은 타박상의 후유증으로 머리가 아플 때이면 남모르게 안나카를 먹군 했다.)

최현은 얼굴이 거멓게 죽은채 눈길을 돌렸다. 수십개의 묘지들이 안겨왔다. 파아랗게 잔디가 살아오른 봉분들엔 분명 오늘 아침 잔손질이 간듯 아카시아며 산딸기며 가둑나무따위들이 뿌리채 뽑힌 자리가 빨깃한 반점처럼 보였다. 최현은 매 묘비에 적힌 이름과 사망년월일을 보며 낯을 알거나 모르는 그 병사들을 생각하였다.

여기에 첫 광을 파고 시신을 안장할 때 최현은 그것이 처음이자 마지막이기를 바랬었다. 그래서 그때 여기로 자동차길을 내자는것도 반대했다. 그런데 묘는 하나 둘 자꾸만 늘어갔다.

항일혁명전쟁시기에는 조국광복을 위한 싸움에서의 불가피한 희생이라고 체념했지만 해방된 조국땅에서까지 아까운 사람들이 쓰러질줄을 과연 상상이나 했던가. 적들의 무장침습은 해를 따라 더욱 극심해졌다. 최현은 자기를 향해 려단작전참모가 헐썩거리며 달려와 보고하는것도 몰랐다. 거수경례를 한채 꼿꼿이 서있던 참모는 최현이 흐릿한 눈길을 돌리자 한걸음 더 다가서서 속삭이듯 말했다.

《국에서 오늘 오후 다섯시까지 평양에 도착하라는 지시가 왔습니다. 사업내용은 내각에서 조직한것이라고 하며 밝히지 않습니다.》

《내각에서-?》

최현은 말을 되받다가 자기에게 쏠린 시선을 육감으로 느끼며 고개를 돌렸다. 희생된 전사의 형이라고 하는 보위성군관이 자기를 보고있었다.

(참, 저 동무랑 어머니랑 만나야 하지 않는가.)

최현이 이런 생각속에 그를 부르려는데 군관이 제먼저 빠른 걸음으로 다가왔다.

《려단장동지, 총참모부 군관 림운학 만날만 합니까?》

최현은 자기를 마주보는 군관의 크고 어글어글한 눈길에서 록록치 않은 담기를 느끼며 고개를 끄덕였다. 무슨 일일가? 최현은 눈을 쪼프렸다. 몇년 있다가 천장해달라는 부탁일가? 아니면 소지품을 달라는?… 지난 기간 몇번 겪었던 일들이 반사적으로 떠올랐다.

《저의 동생은…》

군관은 소나무밭에서 공포어린 기색으로 보고있는 어머니를 피끗 살피고 흥분을 자제하려 애쓰며 말했다.

《얼마전 편지에… 포대경으로 보면 아버지가 갇혀있는 감옥은 안보이지만 서울의 삼각산은 보인다고, 통일이 되면 자기가 맨 선참 아버지를 만날것이라고 했댔습니다.》

《아버지가 서울에 계시오?》

최현은 또 한번 무근한 진통을 느끼며 담배를 찾아쥐였다. 그러나 피우지 못했다. 운학이라고 하는 군관은 약간 불깃한, 그로 하여 더욱 절절하게 번뜩이는 눈길로 최현을 쳐다보며 말을 이었다.

《저를 동생이 있던 이 려단에 받아주십시오. 전사로라도 좋습니다. 어머니하고는 토론이 있었습니다.》

최현은 그의 어머니를 보았다. 녀인은 최현장령의 시선과 부딪치자 몸이 더 졸아드는듯 한 상태에서 머리를 수그려 절을 했다.

마치 아들의 말이 틀림없으니 제발 소청을 들어줍시사 하는듯 한 태도였다.

최현은 가슴이 뭉클해졌다. 그러나 그는 이 감정이 드러날가보아 눈알을 찌프렸다.

《려단장동지가 총참모장동지한테 부탁하시면 될것입니다.》

군관이 그루박듯 하는 말에 최현은 매눈같은 예리한 눈초리로 운학이를 다시 뜯어보았다. 여느 군관들이라면 시선을 떨구었겠으나 그렇지 않았다. 이것은 최현의 마음에 들었다.

(천성으로의 당돌함일가. 아니면 동생의 죽음으로 인한 비분때문일가?)

볕과 바람을 적게 쐬인듯 한 창백한 얼굴, 너무나 잘 생긴 얼굴이다. 그런 모양은 별로 내키지 않는다. 나무뿌리나 돌에 한번도 긁혀보지 않은 윤기가 반들거리는 장화역시 이 군관에게는 덤불과 돌투성이의 산발보다 총참모부의 너렁청한 건물안에서 문서를 다루는것이 적합할것이라는 생각을 자아내게 한다.

(혈기겠지. 혈기!… 복수라?!… 열이 식으면 오히려 슬픔으로 어깨가 떨어질수 있어. 가지 못할 서울쪽을 보면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으로 애간장이 더 마를것이고…)

최현의 머리속에서는 이런 생각이 굴렀으나 마음 한구석에 차오르는 애정비슷한 감정은 어쩔수 없었다.

《집이 승호리라고 했지?》

《그렇습니다.》

《동문 이제 어떻게 하겠소?》

《오늘 오후차로 올라가겠습니다.》

《어머니는?》

《어머니도 오늘 올라갑니다.》

최현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처가 집에 있다면 이들을 거기 데리고가서 며칠 함께 지내며 마음을 위로받게 해주면 좋겠지만 철호는 지금 정부병원에서 입원치료를 받고있었다.

최현은 음식차리는 일을 돌보고있는 량식과장을 손짓으로 찾은 다음 운학에게로 돌아섰다.

《내 차를 타고가기요.》

30분후 최현은 기차로 가겠다고 한사코 사양하는 운학이와 그의 어머니를 차에 태우고 금천-평양간 도로에 나섰다.

《동문 지금 몇살이요?》

최현은 반쯤 몸을 돌린채 운학에게 물었다.

동생이 묻혀있는 골짜기를 뒤돌아보던 운학은 장령의 찌르는듯한 시선에 부딪치자 고개를 떨구었다.

《스물네살입니다.》

《장가는 갔소?》

《안갔습니다.》

《고향은 서울이요?》

《아닙니다. 평양입니다.》

차는 최고속도로 내닫고있었다. 최현의 성미를 잘 아는 운전수는 려단장의 찌프린 눈섭이 실룩거리고 그 눈길이 지꿎게 앞을 쏴볼 때면 번개와 뢰우가 가슴속에 휘돌아감을 알고있었고 이런 순간에는 질풍같은 속도로 차를 몰아야 려단장의 격해진 기분을 조금이나마 풀어줄수 있다는것을 잘 알고있었다.

《근데 아버진 어떻게 되여 서울에 있소?》

최현이 다시 침묵을 깨뜨렸다. 운학의 눈시울이 떨렸다. 허나 그는 매우 침착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아버진 1944년도에 반일무장단사건련루자로 체포되여 서대문감옥에 끌려갔습니다. 그때 13년형을 언도받았습니다.》

《해방이 되여 올수 있잖았소?》

《그렇게 못되였습니다.》

군관은 어두운 얼굴로 띠염띠염 자기 자서전의 한부분을 이야기하기 시작하였다. 감옥생활을 하는 아버지의 뒤바라지를 위해 누군가 서울로 가야 했다. 어머니는 로환으로 있는 할머니의 시중때문에 뜰수가 없었다. 그래서 운학이가 떠났다. 외가켠의 먼 친척집에 자리잡은 그는 건설판, 화물하역장 등을 떠돌며 품삯으로 받은 돈으로 근근히 차입품을 마련하였다. 그가 공부를 그만둔데 대하여 아버지는 몹시 실망한 기색이였다.

《새 나라가 서면 공부한 사람이 필요할것인데 나때문에 이러면 어찌하느냐?》

아버지의 책망에 충격을 받은 그는 야간전문에 편입하여 고학을 하였다.

해방된 다음날 아버지가 감옥에서 풀려나오자 그 즉시 고향으로 오자고 했다. 그러나 아버지는 감옥동지들과 함께 처음에는 《김일성장군 환영준비위원회》에, 다음에는 시인민위원회의 조직에 관계하여 반동들과의 싸움에 뛰여들었다. 운학이도 자연히 그 운동의 선풍속에 휘말려들었다.

그러나 그 모든 열띤 운동과 희망은 미군정의 개입으로 물거품처럼 되고말았다. 아버지는 인민위원회 간판을 뜯어부시는 미군 엠피의 행동을 저지시키다가 체포되여 《미군가해죄》와 《군정법》위반으로 다시 감옥에 들어갔다.

그때 우익반동테로단과 싸우는 행동대원이였던 운학은 어느날 조선녀학생들을 집단릉욕하려는 미군을 때려눕힌것으로 지명수배를 당하게 되였다. 그 검거를 피해 숨어다니며 아버지를 면회할 방도를 모색하던 어느날 그는 감옥에서 보낸 아버지의 편지를 받았다. 단 두줄의 짧은 편지였다.

《집으로 가거라. 그 길밖에 없다.

어머니와 네 동생에게 나의 인사틀 전해라.》

평양에 들어온 운학은 세멘트공장에서 일하다가 아버지의 친구들의 주선으로 보안간부훈련소에 들어갔다…

최현은 반쯤 눈을 감은채 담배만 세괃게 빨아댔다. 거울에 비친 군관의 창백한 얼굴이 침통하게 이지러지고 불그레한 눈굽에서 눈시울이 떠는것을 괴롭게 보다가 담배갑을 뒤로 내밀었다.

《피우오.》

《전… 못피웁니다.》

울음을 가까스로 참는 그 목소리는 몹시 가슴아피 울렸다.

최현은 어금이를 지그시 깨물고 더는 말을 걸지 않았다. 방목하는 양떼들이 노니는 어느 한 산자드락 숲우에 까마귀들이 기승스레 날아도는것을 보자 최현은 차를 멈추고 뒤좌석에 눕혀둔 기병총을 꺼내여 림운학에게 내밀었다.

《저것들을 쏴보지 않겠어?》

《아니 일없습니다.》

《그래-?!》

최현은 말소리를 길게 끌며 말하고는 별로 겨누지도 않고 날아가는 까마귀를 향해 사격했다. 네방을 연방 갈기자 까마득히 날아오르던 까마귀 한마리가 돌덩이처럼 떨어져내렸다. 최현은 총구의 연기를 훌 불고 안전장치를 한 후 그 총을 운전수에게 내밀고 새 담배대를 꺼내였다. 피발이 선 최현의 눈에는 운학이로서는 리해 못할 시서늘한 분노와 슬픔이 연물처럼 고여 번뜩였다. 최현은 담배연기를 길게 뿜다가 운학의 어머니가 기침을 터뜨리자 바닥에 담배불을 비벼끄고는 낮으나 팩한 어조로 말했다.

《가자!》

차는 사동초입의 외진 길목에서 뜻밖의 행차에 맞다들었다.

 

        알락꿍 달락꿍 새색시

        얼럭꿍 덜럭꿍 새신랑

 

일여덟명의 까까중이들이 좁은 길목을 메우며 뛰쳐나오고 그뒤의 마을쪽에서 칠색주렴을 늘인 꽃가마가 덩지 큰 네 사나이의 어깨에 들려오는데 착 앞에는 자그마한 총각이 나귀에 올라앉아 목을 잔뜩 움츠리고 어쩔줄을 몰라했다. 까까중이들은 나귀의 앞뒤로 뛰여다니며 손짓코짓 놀려주고있었다.

《이놈들 물렀거라. 요 씨벌레같은것들, 경을 쳐봐야겠느냐?》

가마잡이들은 이렇게 을러놓고는 제풀에 흐아흐아 웃음을 터치고 늦모를 내던 농군들이 모춤을 흔들며

《춘향도령 좋다》 하고 법석을 떨었다.

최현은 다가오는 꽃가마를 보다가 차를 길옆에 붙이라고 했다.

운전수는 히죽이 웃고 변수지레대를 옮겨 차를 후진시켰다. 그런데 꽃가마에 반정신을 앗긴바람에 뒤바퀴 하나가 도랑에 빠졌다. 가마군들은 자기들로 하여 군대장관의 차가 빠진것을 알자 가마채를 놓고 도와주려 달려왔다.

최현은 엄한 자세로 그들을 나무랐다.

《빨리 가마를 메고 가시오.》

어딘가 감사나운 인상을 주는 최현의 거머무트룸한 얼굴을 일별한 가마군들은 황송하게 절을 하고 흘끔흘끔 뒤돌아보며 가마를 메고 걸어갔다. 나귀와 가마를 쫓던 까까중이들이 최현이를 신기스럽게 보며 차에 모여들었다. 이 까까중이들과 모를 내던 사람들이 달라붙어 차를 끌어냈다. 최현은 한 30분 걸으면 전차길이 있다는것을 알고 차를 운학이네 집이 있는 승호리쪽으로 가게 했다. 운학이와 그의 어머니가 한사코 사양했으나 최현은 딱 잡아떼였다.

《이래서야 무슨 군대인가?》

그는 머뭇거리는 운학의 잔등을 철썩 갈기며 강다짐으로 차에 떠밀어앉히였다.

《려단장동지, 제 부탁은 어쩌겠습니까?》

림운학이가 황급히 말했다. 최현은 불깃하게 달아오른 운학의 눈시울이 애처롭게 떠는것을 지켜보다가 그의 어머니에게 시선을 돌렸다.

《아주머니 생각은 어떻습니까?》

《대장님, 저 사람 부탁이자 저의 부탁입니다. 원쑤를 갚게 해주십시오.》

녀인의 마지막 말끝은 흐려들며 떨리였다.

최현은 가볍게 헛기침을 하고 가슴을 꽉 찌르는 녀인의 눈길을 피하여 고개를 돌렸다. 신랑신부행렬이 사라진 행길쪽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최현은 운학이를 불렀다.

《약속을 하자구. 총참모장한테는 내가 청을 들여볼테니 동무는…》

최현은 망설이는듯 말중간을 끊었다가 부러 활기를 띠우며 말했다.

《인츰 장가를 들라구. 알겠어? 장가를… 아주머니! 봐둔 며느리감이 있습니까?》

뚝뚝한 장령으로부터 싹싹한 동네어른으로 변한 최현의 태도에 저으기 놀란 운학의 어머니는 허둥이는 눈길을 운학에게 떨구었다.

《려단장동지, 전 조국이 통일된 다음 장가를 가기로 하였습니다.》

운학은 머리를 떨군채 이 말을 하였다.

최현은 머리를 저었고 쪼프린 눈에 힐난하는 웃음을 담았다.

《그건 민청회의때나 하는 소리고… 동문 장가를 가야 해. 색시감이 없다면 내가 중매를 서지. 아주머니 어떻소?》

이야기가 예까지 번져지자 운학의 어머니는 민망스럽게 아들을 보기도 하고 미안스런 기색으로 최현을 살피기도 하다가 결심한듯 입을 열었다.

《군대어른의 성의는 정말 고맙습니다. 그런데 이 우리 집 큰사람은… 좋아하는 처녀가 서울에 있답니다. 무슨 팔자가 사나와서인지…》

《서울에?!…》

최현은 가슴이 답답해왔다. 방금까지 지어냈던 활기도 사라졌다. 차가 떠나 한참토록 최현은 그자리에 못박힌듯 서있다가 무겁게 걸음을 옮겼다. 초가집들이 사라지고 기와집과 뻘건 벽돌집이 나타나는 시내 어귀에 들어서자부터 그는 숱한 사람들의 시선속에 들어 화제의 중심대상이 되고말았다. 허나 최현은 별로 그것을 느끼지 못하였다. 얼마간은 운학이의 일로 또 다르게는 처음보는듯 한 도시의 새로운 인상에 사로잡혀서였다.

확성기에서 울려나오는 건드러진 노래의 선률, 자동차의 경적, 아이들의 웨침소리, 웃음소리… 이 도시의 온갖 소음은 반생을 산에서 살다싶이하고 해방된 지금까지도 산에서 살다싶이하는 그에게는 생소한것이면서도 그만큼 자극적인것이였다. 이따금 평양에 올라올 때면 차창으로 보군 한 그림같은 도시였으나 지금은 눈으로, 귀로, 몸으로 보고 느끼고 부닥치는 현실이였다.

최현은 퇴근하는 사람들로 벅적거리는 전차줄 맨 꽁무니에 있었는데 전차가 오자 《어서 타십시오.》 《이리로 오십시오.》 하는 존경과 호기심어린 시선들의 손길에 끌리우고 밀치우면서 어쩌는새없이 맨 선참 차에 올랐고 앉기바쁘게 붉은넥타이를 맨 소년들의 포위속에 들었다. 아이들을 보자 꽃가마를 따르던 까까중이들의 모습이 떠오르며 절로 웃음이 슴새나왔다. 어제 오늘 겪은 지나친 슬픔과 긴장은 마치 기쁜것을 바라는 인간본능자체의 요구에 지고만듯 안개걷히듯 잊혀진것만 같았다.

《아저씬 경비대지요?》

《이 왕별은 사단장표식이야.》

겨끔내기로 재잘거리는것들의 이마빡에 밤알총을 놓으려 했으나 그 역빠른 소년들이 깜찍스럽게 뛰는바람에 허-하고 웃었을뿐이다. 그리고는 휙휙 지나가는 건물들, 무슨 사진관, 면옥, 팥죽집, 상점, 《청주 팝니다》, 《무용강습합니다》따위의 소개판들을 보며 고개를 끄덕거리기도 하였다. 선교로타리에 이르러 전차가 멎었다가 다시 달릴 때 《어마나》 하는 소리에 고개를 돌린 최현은 해말끔한 도시의 녀자들과 어딘가 구별되는 녀인의 모습에 눈길을 멈추었다.

중키에 까뭇하고 동그스름한 얼굴이 강단이 있어보이면서 무척 귀인성스럽게 생긴 젊은 녀인이 얼굴이 홍시가 되여 의자가름대를 쥐고 어쩔바를 모르는데 그앞 의자에 앉은 나이지긋한 사람이 커다란 보따리에 깔려 《허허.》 하고 웃었다.

《전차를 처음 타는가본데 일없수다.》

나이지긋한 사람이 자세를 바로잡고 보따리를 내밀었으나 녀인은 의자가름대를 놓으면 또 넘어질것 같아서인지 손을 뗄념을 못했다.

《이젠 일없이요. 출발할 때 한번 그렇지. 여기 앉으시라요.》

최현의 옆에 앉은 청년이 자리를 양보하였으나 녀인은 자기가 떨군 짐보따리를 안은 남자에게 무안한 눈길을 떨군채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있었다.

《자, 받으라구요. 이크 든찍한데-》

나이지긋한 사람이 너스레를 부리며 보따리를 내밀자 녀인은 《아슴채이꾸마》 하고 들릴락말락 말하였다. 그 독특한 억양에 사람들은 그 말을 채 못알아들은 축들까지도 요란스런 웃음을 터치여 녀인의 얼굴에 고추물을 끼얹었다.

《아주머니, 앉으시라구요.》

총각이 녀인의 팔소매를 잡아끄는바람에 애어린 녀인은 마치 짐짝처럼 털렁 앉았다가 옆에 앉은 어마어마한 장령을 보자 고개를 푹 수그리고 치마를 감추리며 무릎을 모았다.

청년이 보따리를 앞에 들어다놓을 때 녀인은 마치 외국어를 발음하듯 《고맙습니다.》고 표준어를 쓰는데 그것 역시 사람들의 입가에 미소를 그려놓게 하였다.

최현은 머리를 꽁진것으로 보아 분명 새색시일 이 녀인에게 동정이 갔다.

《어디서 오오?》

최현이 자기에게 익달된 함경도 토배기의 억양으로 묻자 녀인은 수삽한 미소를 풍기며 반기듯 보았다.

《온성에서 옵니다.》

《온성?! 멀리서 떠났꾸마. 그래 어디로 오오?》

전차안의 뭇눈길들은 두사람에게 집중되였다. 녀인은 최현을 대뜸 자기 고향출신의 어른으로 단정해버리고 연연히 타오르고있는 홍조를 채 씻지 않은채 또랑또랑한 애된 목소리로 말했다.

《평천리로 가꼬마.》

《평천리로? 거긴 누가 있는데-》

녀인은 약간 수심낀 낯빛이 되여 입술을 감빨다가 최현의 검실한 눈이 대답을 재촉하며 지켜보고 있음을 깨닫고 한결 낮은 소리로 말했다.

《군대이꼬마. 송기덕이라구… 한줄에 소성 한알.》

《우편함 대호는 있소?》

《예.》

녀인은 몸을 반쯤 돌려 저고리 밑섶을 주무르더니 공책종이에 쓴 주소를 내보였다.

《이건 군관학교구만.》

《그건 작년 그러께 받은거꼬마.》

《음… 그래 평천리가 정확하오?》

《예, 우리께 쌍둥이집아재가 알아보고 왔습니다.》

최현은 평천리에 54사가 있음을 알고있었다. 그런데 이 녀인이 평천리로 꽤 찾아가겠는지 근심이 되였다. 그는 주변을 둘러보며 물었다.

《여기 평천리로 가는 사람이 없소?》

《아까 소비조합차를 얻어타면 되는걸.》하는 소리가 울렸다.

누군가 《정 길을 모르면 내가 대드리지.》 하고 말할 때 전차가 멎었다. 정류소에 이른것이다. 최현은 해방산등성이의 3고중청사지붕을 눈띄여보며 일어섰다. 그러자 녀인은 여간 초조한 기색이 아니였다. 최현은 녀인의 보따리를 쥐였다.

《나를 따라오시오.》

녀인은 차안 전체를 향해 나직이 고개를 숙여 절을 하고는 전차에서 내렸다. 최현은 마침 국립극장쪽으로부터 걸어오는 경무관 한명을 발견하고 손짓으로 찾았다. 거무스름한 얼굴에 짙은 눈섭이 어마어마하게 굵은 장령이 손짓하는바람에 경무관은 바람에 불린 민들레씨처럼 가쁜히 달려와 차렷을 했다.

《나 최현이야. 이 아주머닐 평천54사지휘부에 차태워보내라구. 가는 차들이 있지?》

《차들이 있습니다. 명령대로 이 아주머니를 차태워 보내겠습니다.》

경무관은 경례를 하기 바쁘게 최현의 손에서 짐을 옮겨들었다.

최현은 녀인을 향해 《자, 그럼 랑군일지 오빠일지 가서 잘 만나오.》 하고는 의대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의대뒤 조금 못미처 경비국청사가 있었다. 녀인은 경무관이 《갑시다!》 할 때까지 멍하니 서서 장령의 뒤를 바래였다. 그는 이 최현이라는 이름을 해방전부터 들어 알고있었다. 그리고 이제 찾아갈 약혼자라고 할지 남편이라고 할지, 생판 남이라고 해야 할지 모를 송기덕에게서도 이 유명한 빨찌산투사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던것이다.

경비국에 간 최현은 국직일관실에 나와 기다리고있던 부국장으로부터 장군님께서 최현이 철호를 입원시킬 때 오고는 정세때문에 한번도 안와봤다는것을 아시고 몹시 언짢아하셨다는것이며 그로 하여 국에서 자기를 불렀다는것을 알았다. 최현은 그 길로 돌따서 병원을 찾아갔다. 숲에 둘러싸인 병동에 들어가 남향 골방의 문을 열었을 때 철호는 애의 기저귀를 갈고있었다.

《잘 있었슴둥?》

최현이 빙그시 웃으며 들어서자 철호는 너무도 깜짝이라는듯 눈이 다 둥싯해졌다.

《무슨 일이 생겼어요?》

최현을 훑어보는 철호의 얼굴에는 반가움보다 의아스러운 빛이 더 짙었다. 부부간이라지만 빨찌산때부터 언제한번 사사롭게 자기를 《돌봐주는》 남편이 아니였고 또 그것을 의당한것으로 알고있는 철호였기에 더욱 그랬다. 더구나 최현으로 보면 선전포고없는 전쟁의 일선에서 틈바삐 지내는 사람이 아닌가.

《좀 어떻소?》

최현은 대답대신 이렇게 되묻고나서 철호를 한동안 여겨보다가 그로써는 매우 례외적인 말을 하였다.

《동물 보러 왔소.》

《원 당신답지 않게.》

철호는 평범한 남편으로 환원된 《상관》의 변화된 태도에 놀라움과 기쁨을 금치못하며 얼굴이 다 빨개졌다.

《그러고보니 룡옥의 점이 신통해요. 그애가 당신 온다는게 아니예요.》

《그앤 어데 있소?》

《장군님댁에 갔어요. 무슨 더펄인지 군사놀이를 한다며 늘 장군님댁에 가 붙어살아요.》

《건 날 닮아 그런거야.》

최현은 시물시물 웃으며 침대가에 눕혀놓은 아이에게로 다가갔다. 이제 한돌밖에 안되는 어린것은 최현을 빠금히 보면서 종주먹을 입에 대고 열심히 빨고있었다.

《배고파 이러지 않소?》

《금방 젖을 먹었는걸요. 근데 이 며칠 혼났어요. 애가 열이 나서 글쎄 장군님한테서까지 전화가 오구 의사들이 뛰여오구-》

《동무가 설레발친것 아니요?》

최현은 말은 이렇게 하면서도 더없이 흐뭇한 기색이였다.

《이젠 일없어 보이는걸.》

《감기래요.》

《그런걸 떠들면 어떻게 하오?》

《누가 떠들었나요. 의사들은 장군님한테 알리진 않았다는데-》

《장군님께서 모르시는 일 있는줄 아오.》

최현은 어린애의 보동보동한 볼을 새끼손가락으로 살짝 건드려보고는 수염이 꺼칠꺼칠한 입술을 가져갔다.

《안돼요. 얼굴도 씻지 않고.》

철호가 아이를 돌쳐 안았다.

《허허.》

최현은 면구스럽게 웃고는 강보를 싼 궁둥이 어방을 가볍게 두드려주는것으로 아버지의 애정을 표시하고 돌아서려다가 그만 희다못해 푸른 흰자위에 머루알같이 령롱한 눈동자에 끌려 시선을 뗄수 없었다. 끝없이 맑은 눈, 눈섭 한번 깜박이지 않고 올려다 보다가 배시시 웃는다. 입술이 벌려진 사이로 이도 안난 발깃한 이몸이 드러났다. 최현은 부지중 따라웃으며 《응아, 응아》혀소리를 내다가 그만 성난 얼굴로 허리를 폈다. 방금까지 떠돌던 너누룩하고 애정깊은 아버지의 표정은 가뭇없이 사라지고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웠다.

너무나 다른 엄청난 현실이 그의 앞에 육박해왔다. 조총의 일제사격… 쓰러진 전사의 굳어진 동공… 소리없이 눈물을 뿌리던 녀인… 그러나 여기에는 웃고있는 아이가 있다. 신랑의 나귀와 신부의 꽃가마, 창밖으로 본 도시의 환희롭고 생신한 흐름…

그런데 적의 포탄은 예까지 날아올수도 있지 않은가.

《여보, 당신 왜 그래요?》

철호의 놀란 목소리가 그를 현실로 이끌어왔다.

《아, 아니.》

최현이 혼자소리하듯 뇌이며 침대 한머리에 앉자 철호는 아이를 맞은편 침대에 눕히고 남편과 마주앉았다.

《무슨 일이 있었어요?》

《당신 저 아이가 곱지?》

동문서답이다. 철호는 억이 막힌듯 두눈이 동그래서 남편을 쳐다본다.

《그래 아이가 곱지 않고 밉겠어요.》

《어른이 돼두 지금처럼 고울가?》

《크면 더 그렇겠지요. 제 키운 정까지 합쳐 생각되겠는데…》

철호는 근심스럽게 최현을 보다가 조용히 말했다.

《전방에서 또 무슨 일이 있었군요. 희생이 많았어요?》

《응, 아니… 저 그런데 다 나았다더니 어찌된 일이요?》

《왜요?》

《내가 동무한테 와보지 않는다고 장군님께서 성을 내셨다오.》

《그래요-?!》

철호는 저으기 놀라면서도 눈가에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최현은 눈살을 찌프렸다.

《동무가 무슨 약한 소리를 한게 아니요? 난 동무가 빨찌산때를 다 잊어버린 아낙네가 될가봐 겁나오.》

《제가요?》

철호는 억이 막힌듯 조용히 웃고는 진중한 기색으로 돌아갔다.

《사실 요즈음 여러 동무들이 문병을 왔어요. 지방에서 출장오는 동무들까지 들리군 해요. 장군님께서 가보라고 하신다는거예요. 김정숙동무랑 안길동무랑 잃으신 후부터 장군님께선 우리들중에 조금만 앓아도 몹시 근심하며 걱정해요. 그때문에 난 아직도 퇴원을 못하고있지요. 며칠전엔 장군님께서 첫물딸기며 사과랑 보내주셨어요.》

최현은 눈언저리가 불깃해진 안해의 얼굴을 보며 말먹은 사람처럼 번히 앉아있었다. 빨찌산때 입은 동상으로 늘 까칠하게 타있던 철호의 얼굴에 한결 화색이 돌고 볼언저리가 보얗게 고와진것이 다 장군님께서 세심히 보살펴주신때문이라는 생각이 가슴덥혔다.

최현의 심정을 알아차린 철호는 반쯤 돌아앉아 아이의 가슴을 다독거려주었다.

《그래 잔등이 쏘던것은 어떻소?》

이윽하여 최현이 물었을 때 철호는 웃음띤 얼굴을 쳐들었다.

《다 나았어요.》

《그렇다면 퇴원하는것이 어떻소?》

《저도 그 생각이예요. 한데 병원선생들은 장군님께서 말씀이 계셨다고 하며 놔줄념을 안해요.》

《지금은 너무 편안할 때가 못되오. 뭐이 심상찮소.》

최현은 시름겹게 말하고는 애기의 눈시울이 까풀거리다가 소르르 감기는 모양을 넋없이 바라보았다.

문기척소리에 최현은 얼른 침대에 가앉고 철호는 이미 잠든 아이의 가슴을 또다시 다독이기 시작했다. 《들어오시오.》라는 최현의 목소리가 울리자 문은 조용히 두드리던 때와는 판판 달리 활짝 열렸다.

《최현동무 아닙니까?》

활기찬 기쁜 음성과 함께 중성 네알을 단 해군군관이 뛰여들었다.

《아니 이거 새애기 춘국이 아닌가?》

최현이 팔을 쩍 벌리자 두사람은 얼싸안고 돌아갔다.

《군데 해군부사령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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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산님의 댓글

강산 작성일

(위에서 계속)

《군데 해군부사령관이랍시는 사람이 이 내륙에 와선 뭘하자는거요?》

최현이 먼저 자리에 앉으며 시까슬듯 한마디 하자 철호가 눈을 빨았다.

《어쩌다 만나서 한다는 소리는.》

하면서 입가에 곱게 웃음을 그린채 상두대밑에서 사과를 꺼내 깎기 시작하였다. 최춘국은 최현이와 철호를 씨물씨물 웃으며 보다가 먼저 얼굴부터 붉히며 롱담조의 말을 꺼냈다.

《나도 〈몽골해군〉이지요. 그래서 이걸 벗으려고 재주를 부리고는 있는데 잘 안됩니다.》

《여보, 다시 우리쪽에 지원을 오게나. 괜히 이렇게 신수펀펀한 사람의 병문안입네 하고 소일하지 말고-》

최현이 철호를 눈짓하며 지꿎게 롱담을 들이대자 최춘국은 또 한번 씨익 웃었다.

《한창 정담을 나눌 때 내가 방해를 시켜 안됐습니다.》

《실없는 소리! 이거나 드세요.》

철호가 사과 한알을 반쪽씩 갈라 내밀었다.

《주겠으면 옹근알로 주지.》

최현이 타발하자 철호는 잽싸게 말을 받았다.

《그것도 춘국동무덕에 맛보는줄 알라요. 장군님께서 보내주신 사과여서 한알 남겼던건데-》

《그렇소? 그렇다면 동무가 먹어야지.》

최현은 사과를 상두대우에 슬며시 도로 놓았다.

《허, 원앙새부부도 부러워할판이군요.》

최춘국이 이죽거렸으나 최현은 덤덤히 웃었을뿐 응대하지 않았다. 최춘국은 사과를 조금씩 떼여 음미하듯 천천히 먹고는 벗었던 모자를 눌러쓰며 일어섰다.

《어델 가려고?》

《가야지요. 더 방해를 놀순 없고 오늘 저녁은 우리 집에 와서 쉬여야 합니다.》

《좀 있으라구.》

최현은 그의 옷자락을 잡아 끌어앉히였다. 그리고는 문이 반쯤 열린것을 보고 일어나 닫았다. 최춘국이앞에 원탁을 끌어다놓은 최현은 거기에 두팔을 얹은채 심중한 눈길을 쳐들었다.

《좀 묻자구. 해군부사령관이 이쯤 돌아치는것을 봐서는 특별한것이 없을듯 하네만 내 봐서는 정세가 매우 긴장한것 같은데… 그래 어떤판인가?》

최현의 물음에 최춘국은 별로 놀라는 기색이 아니였다.

《그야 최현동무가 더 잘 알지 않습니까. 모든 문제가 38선에서 시작되고 끝나는것인데-》

《아니 난 정식 묻는거야.》

최현은 초조한 안색이였다. 최춘국은 원탁에 놓인 꽃병을 빙글빙글 돌리다가 왼손으로 머리를 긁었다. 심중한 말을 할 때면 의례하는 버릇이였다.

《내가 보건대 정세는 전쟁접경에 이른것만은 사실입니다. 다만…》

최춘국은 꽃병밑굽에 《경성도자기》라고 쓴 글을 물끄러미 보며 생각을 굴리다가 《다만이 뭔가?》 하고 최현이 재촉해서야 띠염띠염 말을 잇기 시작했다.

《놈들한테 어느 정도의 리성이 남아있는가에 따라 전쟁이 몇년 뒤늦게 일던가 아니면… 정말 안일어날수도 있겠지요. 물론 우리의 진지한 노력과 성의를 전제로 해서입니다만.》

최춘국은 작년도에 있은 적의 《동서해안절단작전계획》까지 비친 후 최근 집계된 정세자료를 말하기 시작하였다. 눈치빠른 철호가 군사비밀론의라고 생각하여 자리를 뜨려 하자 최춘국이 말렸다.

《이건 비밀이 아닙니다. 보위성가족강연회에 나가 한 말을 되풀이하는거니까. 또 철호동무야 예비역군관이 아니요.》

《그러니 놈들의 해안침공기도는 좌절된셈이다 이거겠군?》

《그렇지요, 우리가 해안방비까지 꾸리니까 놈들이 포기한셈이지요.》

《그럼 동무는 건달로 될것 아닌가. 해안방어사령관이라는 이름은 좋네만 임자야 보병에 걸맞지.》

최현의 말에 최춘국은 웃었다.

《나도 그 생각입니다. 이제부터 거기가 꽤 바쁘게 될겁니다.》

《옳아, 놈들이야 땅을 먹자고 하지 바다물을 먹자고 하는건 아닐테니까. 그래 동무생각엔 어떤가, 쌈이 일어날것 같은가?》

《글쎄요. 놈들의 움직임으로 봐서는 꼭 터질것 같기도 합니다.

일부 사람들은 올초에 트루맨과 애치슨이 자기네 방위권에서 남조선을 빼버린다는 선언을 두고 적들이 침공야욕을 단념하지 않았는가고도 생각합니다.》

《여보, 그따위 중의 념불같은 거짓부리엔 귀도 기울이지 말라구. 뭐 트루맨이 그렇게 줴치는 때 맥아더는 어쨌나? 리승만과 채병덕을 만났지. 그로부터 리승만과 채병덕의 북침지랄이 얼마나 더 극심해졌나?》

최현의 눈에서는 불이 일었다.

《어저께 우리한테서 또 한 전사가 죽었어. 105미리 포탄이 날아와 터졌지. 생각해보면 무서운 흉계가 있는 도발이야. 그저 도깨비한테는 방맹이가 제일인데…》

《허, 또 옹진사건때처럼 그러자고 그럽니까? 참으셔야지요.》

최현은 작년도에 옹진쪽에서 쳐들어온 적들이 부녀자들과 소까지 빼앗아가는것을 보다못해 38선을 넘어 쫓아나가려다가 김일성동지로부터 되게 꾸지람을 들은적이 있었다. 최현은 그때 생각이 나는지 얼굴이 확 붉어져올랐다.

《인내성도 한도가 있지. 가만 둬두면 둬둘수록 개지랄이거든. 작년 옹진사건때 내가 내치겠다니까 장군님께서는 비판하시면서도 미친개에겐 몽둥이가 약이라고 하는데는 동의하셨어. 때려야 돼! 때려야!》

최현은 격하게 부르짖으며 원탁을 두들겼다. 그 소리에 잠들었던 애가 깨여나며 앙- 하고 울음을 터뜨렸다.

《에구 당신도-》

이야기를 듣는데 열중해있던 철호가 혀를 차며 일어나 아이를 안고 둥게둥게 얼렸다. 최현은 그것도 아랑곳않고 열이 나 말했다.

《결론은 전쟁이 터질것인즉 불이 일면 단매에 놈들의 혼맹이를 뽑아버릴 잡도릴 하는거지. 세계가 어떻고 정치가 어떻고 하는 문제는 후차야. 지금 동무 말을 들어보니 새애기 춘국이가 정치가로 돼가는구나 하는 생각이 드는군. 좋지. 하지만 우리는 장군님 받드는 군사간부야. 전쟁이 일면 동무나 내가 막아치우겠다는 강심을 먹는게 첫째야!》

《허허, 그래서 난 어떻게 하면 다시 보병으로 갈가 아글타글합니다.》

《건 무슨 소리야?》

《사실 오늘 병원에 온것도 그래서 왔습니다. 39년도에 다친 다리가 지금도 뻘찌인줄 알고 〈사무관〉노릇에 맘붙이란건데… 지금 정세루야 어디 그렇게 도피할수 있습니까. 그래 우선 다리가 성하다는것을 증명시키고 보병에 가는 공작을 하려는것입니다.

오늘 렌트겐을 해보니 파편은 그자리에 있긴 하지만 일없답니다. 글쎄 일없지 않을수 없지요. 그때 철호동무가 갖은 정성을 다해 치료해 나은것인데.》

최춘국은 싱그레 웃으며 철호를 곁눈질했다. 그는 다리의 부상처를 얘기할 때마다 늘 최현의 안해인 철호의 희생적구완을 잊지 않는다. 적 《토벌대》가 싸다니는 산속 바위밑에서 근 20일 철호가 지어주는 죽을 먹고 철호가 찧어주는 풀잎을 다리에 싸붙이고 상처를 고쳤기때문이다. 그래서 철호와 춘국이 사이가 더욱 자별한것이고 그로 하여 최현은 마치 춘국이를 친혈육으로 대하는것이였다.

《그건 그거고.》

최현이 말을 자르고 화제를 다른데로 이끌었다.

《요지음 장군님께서 무슨 구상을 하시는지… 혹 모르나?》

《군대와 관련된것말입니까?》

《물론, 나와 자네는 군인이 아닌가?》

《그야 전들 잘 알겠습니까. 그런데 그저께 강건동무가 38선 중부와 동부를 시찰한다고 떠났습니다.》

《음.》

최현의 눈섭이 꿈틀하며 량미간에 모여들었다.

《이건 사태가 간단치 않다는것이요. 장군님께서는 뭔가 내다보셨어.》

《그런데 장군님께서는 적의 어떤 도발에도 말려들지 말데 대하여 수차 강조하시였습니다.》

최현은 손잔등으로 이마를 문질렀다. 그는 깊은 생각에 잠겨 말했다.

《하긴 그래. 말이 났으니 말이지 장군님께서 나를 38선에 보낼 때 뭐라고 하신줄 아나? 38선을 굳게 지키는것은 전쟁을 막는길이라고 했네. 우리가 강하면 적들이 덤벼 못들것이라고… 옹진사건때에는 나를 비판하시면서 우리 땅에서 우리 인민의 피가 흐르면 어쩌느냐고 하셨소. 그때 나는 속이 띠끔했소.》

최현은 벌떡 일어나 거칠게 숨을 쉬며 오락가락하다가 창가에 머물러섰다. 마당에 승용차 한대가 와 서는것을 보고 최춘국에게 물었다.

《저게 누구 찬가?》

최춘국이 반쯤 몸을 일으켜 내려다보다가 《강동무》 하고 소리쳤다. 그러나 차에서 내린 사람은 못들었는지 그대로 정문으로 들어섰다.

《강부관이구만… 저 사람을 만나야겠어.》

최현이 어깨에 쓴 위생복을 벗는데 최춘국이 그의 손을 잡았다.

《병원에 왔으니 여기 들릴것입니다. 그가 여기 말고 어디 오겠습니까?》

최현이 그럴상싶어 주저하고있는데 아닐세나 문기척소리가 나며 수수한 차림에 역시 사람좋게 수수한 얼굴의 강부관이 들어섰다.

《여기 계셨군요.》

모두걸이로 인사를 하고 최현이와 악수를 나눈 강덕수는 손수건으로 얼굴을 닦은 후 정중한 자세로 말했다.

《최현동지, 장군님께서는 저녁식사를 함께 하자고 최현동지를 부르시였습니다.》

《장군님께서?… 지금 댁에 계시오?》

《아닙니다. 최현동지가 혹시 다른데 갈가봐. 미리 전하라고 하셨습니다.》

《음, 알겠소.》

아이를 둥싯거리던 철호는 최현의 수염이 거밋한 턱을 념려스레 보며 《여보!》 하고 속삭였다. 그러나 그가 주의의 말을 꺼내기전에 최현은 거울앞에 다가가 수염을 쓸어보며 눈을 껌벅거렸다. 그러다가 홱 돌아서서 춘국이의 어깨를 툭 쳤다.

《리발소가 어데 있나?》

여섯시였다.

바로 그 시각 풍을 친 풀색 찦차가 창광산기슭의 보위성청사로 쏜살같이 들이닥쳤다. 날씬한 몸매에 갸름한 얼굴, 유난히 까만 눈섭에 상아빛얼굴이 무척 단아하게 생긴 30대의 장령- 강건참모장이 정문보초의 경례도 받지 못한채 거의 뛰듯이 달려올라갔다. 그런데 3분도 못되여 그가 역시 올라가던 식으로 다급히 달려내려왔고 뒤따라 최용건보위상이 그 장대한 몸집에 비해서는 매우 날파람있다고 할 걸음으로 층계를 내려왔다. 두사람은 쥐빛 뽀베다를 타고 곧추 내각청사로 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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