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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소설 전선의 아침 제18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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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강산
댓글 1건 조회 9,207회 작성일 20-01-28 2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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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jpg

제  4  장

 

오래간만에 찾아드는 고요였다.

겨끔내기로 울어대던 전화종소리도 부지불식간에 뛰여들던 지휘참모성원들의 발걸음도 끊어졌다.

이따금 쿵쿵 울리는 먼 포성만이 이곳이 전선가까운 곳임을 상기시켜줄뿐이다.

박정덕은 탁우에 편지지를 놓고 꿈을 꾸는듯 한 눈길로 조용히 앉아있었다.

이제 한시간후이면 전선참모장 박정덕은 오매에도 그리운 장군님께로 간다.

모든 작전준비는 완료되였다.

련합사령부적인 작전전투조직도 전부 끝났고 전선사령부와 지원군사령부의 세밀작전전투준비도 결속하였다.

모든것이 장군님 예견 그대로였고 장군님 구상대로, 장군님 의도대로 만전의 태세를 갖추게 되였다.

73군단의 맹렬한 고지탈환전과 기습공격으로 금화지역에 집중될 적의 주력에서 미제침략군 4개 련대를 73군단 코앞에 눌러앉혔다.

클라크는 이에 대해 자기대로 회심의 미소를 지을지 모른다.

전선중부에 대한 자기들의 주타격속심을 간파못한 인민군이 여전히 동부에만 관심한다고 자기의 《지략》에 감탄할수도 있다.

이럴 때면 웃음집이 흔들린다.

하지만 장군님께서 예견하신바 그대로 적의 대무력이 전선중부에 집결된 어마어마한 실태를 생각하면 걱정되는바도 없지 않다. 장군님 가르치심대로 전선사령부의 예비포병대를 지원군쪽에 돌렸지만 그것으로 과연 적의 질풍공격을 반타격할수 있겠는가.

박정덕은 적의 주타격력량을 또 한번 분산시키기 위한 묘계를 생각했다. 그것을 장군님께 보고드릴 작전지도와 문건에 자기만이 알수 있는 부호로 표식하였다.

《박정덕이가 괜찮아.》

장군님께서는 분명 기쁨에 차서 치하를 주실것이다.

그러면 박정덕은 장군님께서 언젠가 항일전쟁의 대부대선회작전때의 몇가지 전투를 말씀하실 때 들려주신 일본군의 시선을 외딴곳으로 돌려버렸다는 그 신묘한 전술에서 묘계를 찾았다고 대답올릴것이다.

실지 박정덕은 양득지, 양용과의 작전토론때 바로 장군님께서 들려주신 그 말씀을 상기하며 방안의 골자를 찾아쥐였던것이다.

 

영산이 어머니 보시오!

 

단 한줄로 써놓은 편지글을 내려다보다가 피식 웃었다.

비록 아들 이름자를 앞에 붙였지만 안해를 두고 어머니소리를 써넣으니 맹랑하기 그지없다.

그렇다고 하여 편지에 《사랑하는 안해여》 하는식으로 쓰는것이야 체신에도 나이에도 어울리지 않는것이 아닌가.

안해의 얼굴을 그려보았다. 그런데 이상스럽게도 전혀 표상이 뚜렷이 안겨들지 않는다.

헤여진지 너무 오래서인가.

만나본지 벌써 몇해째 되였다. 74군단장을 할 때만도 북방에 옮겨간 집을 찾을 기회가 없는것이 아니였으나 일이 바쁘다고 차일피일 뒤로 미룬것이 오늘까지 이어졌다. 그러나 아쉬움은 없다.

모든것을 이 전쟁을 치르고있는 우리의 보통병사들처럼 전승의 그날로 미루자…

눈을 감았다.… 그러자 웃을 때면 연하고 발그레한 홍조가 물드는 볼에 살짝 보조개까지 패이던 안해의 유순한 얼굴이 떠올랐다. 갓 시집왔을 때는 목이 배리배리하고 볼편에 살도 적고 몸도 버들처럼 휘친거려 가냘펐지만 집떠나 수년세월이 흐른 뒤 다시 만났을 때는 보름달처럼 환한 얼굴에 필대로 핀 풍만한 몸매로 그를 놀라게 했다.

시집와서 한해가 가까와오던, 아직은 안해가 《칠월가매》로 불리우던 시절 한번은 박정덕이 읍에 나갔다가 동구길에 들어서니 석하촌기슭의 모래불에 웬 녀인이 쪼그리고 앉아 막대기로 무엇인가를 벅벅 긋고있었다. 인기척에 녀인은 와뜰 놀라 일어섰다. 안해였다. 안해는 그를 보더니 얼굴이 붉어져 어쩔줄 몰라하다가 집쪽으로 뽀르르 달아났다.

호기심이 부쩍 동한 박정덕은 안해가 앉아있던 모래불로 슬금슬금 다가갔다. 하얀 모래바닥을 내려다보는 박정덕의 눈길이 커졌다. 거기에는 비뚤사한 획으로 자신없이 긁적거린 우리 말 자모 몇자가 새겨져있다. 놀랐다. 별안간 눈물이 솟구쳤다. 이름도 없는 그 녀자가 글을 깨치려 안타까와하고있었다.

그것은 먼 추억이였다.…

박정덕은 집 떠날 때까지 안해에게 우리 글을 가르쳤다.

7년이 지났을 때 정옥희는 아들에게 글을 배워주고있었고 새 조선의 신문잡지의 열렬한 구독자로 되였다.…

그것은 지나간 생활의 아름차고 아름다운 화폭이였다. 그것은 그토록 바랐고 지켜야 하는 소중한 행복이였다.

박정덕은 후더운것을 느끼며 편지지우에 또박또박 글을 써나갔다.

《당신의 편지를 받아보고도 곧 회답을 보내지 못하여 퍽 근심했으리라 생각하오.

나는 그동안 약간의 부상으로 치료를 받았는데 지금은 완전히 회복되였소. 또다시 전선으로 나와 미제날강도놈들과 리승만괴뢰도당들과 싸우고있으니 안심하오!

지금은 김일성장군님의 신임으로 전선에서 중책을 감당하고있으니 앞으로 편지는 조선인민군우편함 제512군부대로 써보내주오.

전선에서 싸우는 몸이 되여 당신이 아이들을 데리고 나온다 하여도 딱한 점이 있소. 잘 고려해보오.…

미제공중비적들의 공습을 받는 속에서도 우리 인민들이 생산투쟁에 총궐기하고있으니 영웅적조선인민이라고 부르고있는것도 과언이 아니라고 보오.

모든것이 우리의 수령이신 김일성장군님의 옳바른 령도가 있기때문이라는걸 명심하길 바라오.

영산이와 영임이가 보고싶구만. 그 애들이 참다운 사람이 되도록 학습을 잘 시켜야겠소.

자, 그러면 오늘은 이만하고 다음에 또 소식을 보내겠소.

     박정덕.

             건강할것을 바라며.

                         1952. 10. 11

※ 영산이 보거라.

너의 편지를 받아보고 참으로 반가왔다. 학교에 다니면서 요사이 어머니말도 잘 듣고 공부도 잘한다지. 동무들과 잘 휩쓸리면서 학습에서나 집체생활, 품행 모든데서 모범이 되여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앞으로 아버지는 미제승냥이들을 때려잡던 이야기를 해주지 않겠다.

네 나이또래의 아이들이 적후빨찌산투쟁을 한걸 너도 알지?

너는 이런 동무들을 생각하면서 학습을 더 잘해야 돼.

앞으로 김일성장군님께서 부르시면 인민군대에 나와 미제승냥이놈들과 리승만강도놈들을 격멸소탕해야지! 아버지는 영산이를 믿는다.》

 

펜을 놓았으나 무엇인가 묵직한것이 가슴에 매달려 내려가지 않는다.

박정덕은 펜대를 다시 잡고 끄트머리를 질근질근 씹었다. 한번 열린 추억의 대문은 쉽사리 닫겨지지 않는다.

련대장시절 연분홍 코스모스들이 북방의 바람에 가볍게 날리던 군관사택마을의 담장가, 안해는 희디흰 애리애리한 손가락을 입에 문채 동자 검은 눈으로 낯선 아버지를 바라보는 볼살이 포동포동한 딸애를 들춰안고 생각깊은 얼굴로 오래도록 바라보았지, 아들녀석은 군용차가 먼지를 말아올리며 라남시내를 벗어나는 교외길까지 따라온것을 겨우 얼려 떼놓았어.

《아버지, 나 총 만들어주겠다구 하구선…》

《응, 이담에 꼭 만들어줄게…》

《언제?!…》

《영산이가 최우등을 하면 말이다.》

그는 아들애의 숱이 총총한 더벅머리를 오래도록 쓸어주었다. 벌써 몇년세월이 흘러갔는가.

(얘들아… 너희들의 꿈과 앞날을 지켜 아버지는 전선을 떠날수 없구나. 여보, 우리의 장군님께서는 조국의 운명과 당신도 포함한 우리 인민의 삶을 지켜 이 시각도 작전도앞에 서계시오. 이 불미스러운 전사들이 제구실을 다하지 못하는 그것이 마음에서 내려가지 않는구려…)

박정덕은 불시에 자애로운 김일성동지의 모습이 그려지여 품속에서 조그마한 수첩을 꺼내들었다.

최고사령부에 작전방안을 보고드리기에 앞서 최고사령관동지의 명령들을 다시한번 꼼꼼히 되새겨보고싶었다.

박정덕은 보풀이 인 수첩장들을 한장한장 번져나가기 시작했다.

《박격포를 널리 리용할데 대하여》

(조선인민군 최고사령관 훈령 제00468호 1951년 8월 11일)

《땅크사냥군조 조직과 훈련실시에 대하여》

(조선인민군 최고사령관 명령 제0483호 1951년 8월 24일)

《저격수조를 조직할데 대하여》

(조선인민군 최고사령관 명령 제085호 1951년 11월 2일)

《이동포병중대(박격포포병소대), 독립중기조, 적후파괴조를 조직하며 저격수활동을 강화할데 대하여》

(조선인민군 최고사령관 훈령 제00651호 1951년 12월 20일)

《조성된 정세와 인민군대앞에 나서는 과업》

(조선인민군 군단장회의에서 한 연설 1952년 4월 28일)

 

(장군님께서는 그때 벌써 오늘을 내다보시고 동서해안에 전략적인 방어지대를 형성하시였으며 나에게 전반전선에 대한 연구과제를 주신것이 아닌가.… 얼마나 섬세하고 뜨겁고 큰 심장이신가, 얼마나 비범한 천리혜안의 통찰력이신가.)

 

문 두드리는 소리와 함께 참모부직속 통신군관 김인정중위가 흥분된 얼굴로 방에 들어섰다.

《전선참모장동지, 최고사령관동지께서 전화를 걸어오셨습니다.》

《최고사령관동지께서?》

박정덕은 후두둑 뛰는 심장의 박동을 눅잦힐수 없어 심호흡을 하며 송수화기를 받쳐들었다.

《최고사령관동지, 박정덕이 전화받습니다.》

《음, 목소리를 들으니 반갑소.… 그사이 전선사령부가 큰일을 했소. 47개에 달하는 적 지탱점들을 타고앉았다지, 대단해… 전선참모장동무가 수고했소. 우리가 준 작전방안도 다 세웠다니… 좋습니다. 지금 뭘 하댔소?》

따뜻한 음성이 곁에서 들리는듯 명료했다.

박정덕은 갑자기 목이 컥 막혔다.

《장군님, 떠나기에 앞서 장군님께서 최근 주신 교시들을 새겨보고있었습니다.…》

김일성동지께서는 아무 말씀이 없으시였다.

이윽고 그이께서는 갈리신 음성으로 말씀하시였다.

《사람두… 참, 이것보우, 정덕동무. 조화는 조화요. 나두 방금 작전대앞에서 두루 연구를 좀 하다가 동무생각이 나서 전화를 거는거요. 이거 정말 신비한 인력같은게 작용하는게 아니요? 허허허.

참, 우리 맏이말이요. 정덕동무네 영산이와 같은 소학교에 다니지…

전번에 최고사령부에 와서 한달쯤 있었는데 나의 건강을 걱정해서 일과표까지 만들어 집무실에 붙여놓지 않았겠소. 그리군 김책동무 산소에 올라가 종일 벌초를 하구 와선 영산이 소리를 많이 하더구만.…》

박정덕은 해 비치는 초원에 나선것처럼 마음이 활짝 밝아졌다. 그는 미소를 지었다.

《장군님, 자제분께서는 장군님 인정 그대로이십니다. 전번 여름에 제가 건지리에 갔을 땐 우리 아들녀석의 편지까지 전해주는게 아니겠습니까?

그 편지를 보니 아들녀석은 자제분께서 자기에게 한벌밖에 없는 운동복을 벗어주고 면내의바람으로 체육시간에 참가한다고… 그때 울었다고 썼더군요.…》

《동지를 위한 혁명가들의 정신이 후대들에게 넘겨진다는건 정말 좋은 일이요. 아마 이속에 조선혁명의 앞날과 이 전쟁의 운명이 다 담겨져있는것 같소.》

《?!…》

《참 정덕동무, 요즘 위탈은 좀 어떻소?》

박정덕은 가슴이 뭉클해옴을 느끼며 목메인 어조로 말씀드렸다.

《장군님, 정말 일없습니다. 이젠 다 나았습니다.》

《건강을 잘 돌봐야 해. 보건상동무의 말을 들으니 박정덕동무에게는 우리 나라의 토법치료가 적합해… 참 내 동무네 가족을 며칠전에 여기 건지리로 이사시키도록 과업을 주었소. 우리곁에 두어야 마음이 놓이거든.…》

박정덕은 끝내 눈물이 솟아올라 볼을 타고 흘러내리는것을 어쩔수 없었다.

《장군님, 저때문에 그토록 마음을 쓰시면… 전 그런것도 모르고 방금까지 안해에게 편지를 쓰댔습니다.》

《허허허, 그게 얼마나 좋은가. 내 언젠가 오기섭이한테 크게 격분했던적이 있소. 그가 부친급병때문에 고향에 다녀왔으면 하는 아래사람의 제기를 그 자리에서 묵살해버리고 혁명사업이 바쁜 때 무슨 개인사정인가, 혁명가의 심장엔 혁명에 대한 사랑만이 있어야 한다고 력설했다기에 격해서 말해주었소.

혁명과 조국, 인민과 처자, 동지와 벗에 대한 사랑과 정은 분리되여있는게 아니라 뭉쳐진 하나라고, 그건 맑스주의고전에도 없고 리론문제가 아니라 심장의 철학이라고 말해주었는데 제대로 리해하는것 같지는 않더구만.》

(정말 뜻깊은 사랑의 철학입니다. 심장이 하나이듯이 조국도 하나, 어머니도 하나, 태양도 하나!… 그 모든것이 사랑과 정으로 혈연을 이룬다, 이 말씀이 아니겠습니까.)

《뭘 혼자 중얼거리오, 사람두 참! 정덕동무! 빨리 올라오시오. 지금 더욱 보고싶구만.》

《장군님, 저도 그렇습니다. 이제 20분후에 출발하려고 합니다.》

《그렇게 하시오. 놈들의 새로운 공세가 박두한만큼 시간이 촉박하오. 그리고 올 때 적기를 조심하오. 너무 덤벼치지 말고… 알겠소?》

《명심하겠습니다, 최고사령관동지!》

박정덕이 출발준비를 갖추고 밖을 나서는데 전선사령부마당으로 군용차 한대가 부리나케 들이닥쳤다.

차에서는 매연투성이인 류경수와 최현이 뛰여내리고 사단장 최광이 커다란 보퉁이를 끌어안고 뚱기적거리며 내렸다.

그런데 최현은 한다리를 절고있었다.

최광이 옆에서 부축했다.

《아니 군단장동지들이 어떻게?…》

《한발 늦는줄 알았수다.》

류경수가 벌씬거리며 박정덕의 손을 잡았다.

박정덕은 다리를 절름거리는 최현에게 황급히 다가갔다.

《아니… 군단장동진 왜 다리를 저십니까?》

최현은 찌뿌둥한 얼굴로 우정 박정덕에게 몸을 더 실으며 투덜거렸다.

《말도 마우. 난 류경수가 젊은 전선참모장이 우릴 잊어먹고 내뺄가봐 운전사를 다긋는통에 이꼴이 됐소. 류경수의 아부재기에 운전사가 넋을 잃는 바람에 추지령을 넘다 차가 한바퀴 공중제비를 했는데 발목을 곱질렀소.》

박정덕은 최현의 곱질렀다는 발목을 만져보았다.

《아이쿠우, 나 죽는다.》

최현이 일부러 엄살을 부리는 바람에 선두차옆에 서있던 김인정이 해시시 웃었다.

《저 매끈한 가시네는 누군가?》

최현이 우멍스럽게 눈을 찡긋하며 그쪽을 보자 김인정은 기겁을 해서 차안으로 숨어버렸다.

《군단장동지, 함께 올라가게 되였으면 전화라도 거실걸 그랬습니다.》

최현이 곧바로 섰다.

《전선참모장동무, 무슨 말씀을 하시오. 중대한 작전을 앞두고 전선지휘관이 자릴 뜬다는걸 쟈들이 알아보우. 이 최현이 함께 가면 그런자들도 얼씬 못하우.》

최현은 싱그레 웃고는 한발 떨어져있는 최광에게 눈짓을 보냈다.

그러자 최광은 안고있던 보꾸레미를 보란듯이 내밀었다.

보꾸레미를 일별한 최현은 진중한 태도로 말했다.

《전선참모장동무, 내가 이 긴장한 때 군단지휘부를 뜬건 장군님께 직접 결론받을 문제도 있지만 이걸 평양에 가서 장군님께 올리려고 그러는거요.》

《?!…》

《전번에 장군님께서 우리 군단에 오셨을 때 전선참모장동무도 보지 않았소. 우린 장군님께 동해피조개를 정성껏 마련해드렸지만 전혀 식사를 하시지 못했소. 내가 산에서부터 장군님 식성을 잘 아우. 그래서 우리 법동의 특산고추장을 좀 마련했소. 글쎄 김정숙동무가 담갔던 고추장단지를 그 미국놈들이 깨먹었다니 난사가 아니요. 정덕동무, 난 우리 최고사령관동지께서 남들이 다 소멸되였다고 나앉았을 때 동무네 54사를 기다리느라 며칠씩 끼니를 번지시는 모습을 직접 목격한 사람이요. 이 로병의 말을 믿으라구.

우리 장군님의 건강이 이 전쟁의 승리요. 태양이 없는 이 땅을 생각할수 있소? 우린 그저 자나깨나 죽으나사나 장군님을 잘 모셔야 하오.》

《최현동지, 제 그 깊은 뜻을 명심하겠습니다.》

《그리고 내 이번에 김일동무와 최영환에게도 일러주려고 하오. 우리 장군님을 말로만 잘 받들자고 하면 안되오. 정치보위사업을 맡은 동무들이 일을 잘해야 하오. 요즘 우리 혁명의 수뇌부를 어째보겠다구 쏠라닥거리는 놈들이 좀 있소.

내 전번에 평양에 갔을 때 박성철이한테두 단단히 강조했소. 장군님의 안녕을 지켜야 하우.》

《알았습니다.》

최현이 물러서서 별안간 거수경례를 하였다.

《그럼 전선참모장동무, 난 최광이와 함께 선두차에 타겠습니다. 우리 72군단은 장군님의 명령을 관철할 만단의 준비가 되여습니다.》

《원 군단장동지두- 어서 차에 오르십시오.》

《그러지.》

최현은 류경수의 어깨를 툭 치고는 다리절던게 언젠가싶게 잽싸게 차에 올랐다.

류경수는 벌깃하게 단 얼굴로 박정덕에게로 돌아섰다.

《전선참모장동무, 장군님께서 우리 전선을 두고 걱정마시도록 말씀드려주시오. 적의 공세가 개시될 땐 장군님 말씀대로 우리 73군단 역시 호되게 적을 족치겠다는것두… 하긴 전선참모장이 짜놓은 계획이니 어련하겠소만.》

《알겠습니다. 최근 전과까지 죄다 상세히 보고드리겠습니다.》

《훈장 주십사 하는 소리는 하지 마오.》

《그러지 않아도 김익군사위원의 당부가 있었소. 전사들에게 줄 수훈문제를 꼭 상정시키라고…

그도 요즘 생각이 많은 모양이야.…》

류경수는 빙그레 웃다가 박정덕을 꽉 그러안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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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산님의 댓글

강산 작성일

(위에서 계속)

야전차들은 순갑리 앞도로를 따라 회양쪽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벌써 어스름이 끼고있었다.

중무장을 한 선두차와 최현의 차뒤에 박정덕의 차가 서고 그뒤로 역시 중무장을 한 후발차가 따랐다. 김일성동지께서 전선지휘일군들이 움직일 때 실시하게 하신 운행호위질서였다. 더구나 박정덕에게는 극비에 속하는 전선작전문건이 있기때문이였다.

차들이 회양을 지나 철령어귀에 들어섰을 때까지는 아직 이른밤이여서 적 폭격기떼가 잠잠하다. 차행렬은 전조등을 켜고 쏜살같이 들렸다. 회양에서 철령쪽의 구간은 비교적 경사가 완만하다.

차는 단숨에 철령마루에 올라섰다. 또 몇굽이를 지나자 전조등빛에 골짜기쪽으로 난 좁은 길우에 서있는 군용화물차 한대가 얼핏 자태를 드러냈다.

야전군용 선두호위차가 굽인돌이를 꺾어돌자 그 화물차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박정덕은 이상한 느낌이 들어 그쪽을 주시했다.

그 군용화물차뒤에 풍을 친 차가 바투 다가서는것을 본 느낌이였다.

그 순간 다시 전조등불빛에 그 군용차의 형체가 나타났다. 왼쪽은 골짜기길이고 오른쪽은 천길벼랑이다.

무슨 예감이 들었는지 운전사가 제동을 밟아 속도를 죽이며 조향륜을 약간 비튼다.

순간 총소리가 나고 군용화물차뒤에서 풍을 친 차가 전선참모장이 탄 차를 향하여 아츠러운 발동소리를 지르며 사납게 돌진해왔다.…

 

×

 

《그》는 이상스레 마음이 불안하였다. 골짜기밑에 어둠이 깃들자 제법 차거운 가을바람이 기세를 돋구었다. 《그》는 약속된 장소인 이 령길 옆도로에서 기다리게 되여있었다. 그들이 오게 되면 《그》는 오래동안 품을 들였고 검질기게 추적해온 목표를 제거하고 돌아가게 된다.

물론 합법적인 지원군군표를 가지고있는것만큼 중국대륙을 경유해야 할것이다. 어쩌면 이번 임무수행으로 지겨운 떠돌이생활도 끝장이 날지 모른다.

그것이 좋은것이든 나쁜것이든 종말은 오고야말것이다. 《그》는 사냥군이 만든 교묘한 함정과 덫을 조심스럽게 냄새맡고 에돌줄 아는 늙고 령리한 짐승처럼 발달된 예민한 《후각》을 가지고있었다. 그《후각》이 이번엔 마지막이다. 너는 성공하든가, 실패하든가, 최악의 경우엔 죽든가 살든가 할것이라고 거의 숙명적인 가혹성을 가지고 판결을 내린것이다. 《그》는 이것을 최근 자기의 마음속에서 뜻밖에 일어난 미묘한 변화를 통해서도 자신도 모르게 북받치는 일종의 감상, 영문모르게 젖어드는 눈물에서도 깨달았다. 그렇다. 《그》는 쇠로 빚은 인간으로부터 지푸라기같은 존재로 변화되고있었다. 언젠가 함께 일해온 《그》의 《선배》가 운명을 앞두고 말한적이 있었다.

사람에게는 몸의 피만큼 눈물이란게 있다는것이다. 그걸 일정하게 흘려야 사람의 한생도 끝난다고 했다. 다는 아니라 일정하게다. 사람의 몸에서 피가 다 빠져야 죽는것은 아닌것처럼…

이런 변화, 이런 유언, 이런 숙명에 대한 순종이 《그》로 하여금 이제는 늙어빠진 말처럼 나약해지게 했는지도 모른다.

《그》는 또 군용화물차의 기관실덮개를 열어놓고 그들이 오기를 기다렸다. 그들이란 바로 중국인민지원군의 탈을 쓴 《람의사》출신의 씨아이씨패당들이다. 그들이 《그》에게 운명의 마지막주패장을 가져오게 될것이다. 어떤 경우에도 주패장은 올것이다. 《그》는 그들이 이전처럼 자기를 신임하지 않는다는것도 알았다.

지난 여름 저 북방 삭주에서의 실패가 그 시초를 열었는지도 모른다.

그때는 정말 안주부근에서 차가 고장났었다.

마음속을 깊이 들여다보면 될대로 되라는 자포자기가 있었는지도 모른다. 리성은 움직였으나 웬일인지 감성이 제동을 걸었다는것을 그가 인정하려 하지 않았을뿐이다. 큰 죄악감에 대한 의식과 명령에 대한 불복정신이 저도 모르게 싸운것일수도 있다. 의혹의 불꽃이 량극에서 일었다.

아니, 그것은 이번 작전의 중요성으로부터 그들이 독주가 아니라 중주를 필요로 했을수도 있다.

혹은 그들의 눈에 이제는 자기가 퇴색한 낡은 구두로 보였는지 모른다. 이 두번째 경우가 가장 위험하였다. 주인은 밑창이 난 구두를 버리는 법이다.

그리하여 《그》는 자기자신도 마지막도박을 하기로 결심하였다. 그래 나도 인간이라면 피가 있을진대 눈물도 있을것이다. 짐승이 아니라면 사랑과 증오라는 량기슭의 어느쪽에 설것이고 선악을 나름대로 가르게 될것이며 얼굴과 이름은 없어도 생각과 선택의 자유는 있을것이다.

《그》는 …《그》에게 있어서 생명의 불꽃이고 이제 와서는 숨쉬는 리유이기도 한 그 가냘프고 어진 광야의 초불같은 존재인 딸애소식을 《상부》에 물은것이다. 그것이 결국은 《그》의 생사를 가르는 거점으로 되고말았다. 그들이 정확히 알아온다면 그 결과가 분명하여 아직은 안개속의 과녁같은 두 길중의 하나를 선택할수 있을것이요, 그냥 온다해도 자기에 대한 명백한 무시고 부정이므로 더욱 선택이 헐할것이다. 마구 휘던진 동전은 이미 하늘높이 떠올랐다. 그것은 어디론가 날아갈수도 없고 분명히 땅에 떨어질것이였다. 《그》는 그저 동전을 내려다보며 운명이 자기에게 생사의 어느쪽을 가리켰는가를 확인하면 될뿐이다.

《그》는 군용화물차의 앞바퀴턱에 걸터앉아 담배를 꺼내물었다.

이제 담배 한대가 타는 사이면 그의 지겨운 인생, 가혹한 운명이 결정될것이다.

담배 한대가 타는 시간… 과연 내가 부성애 하나로 살아왔던가. 아버지는 장학량군대에서 하층장교로 있다가 군벌들의 싸움터에서 숨졌다고 한다. 고래싸움에 새우잔등 터진격이다. 시앗다툼에 집안망조 든셈이다.

어머니는 누군지 모른다. 추적하면 알수도 있었다. 그러나 아는것이 두려웠다. 아버지에게 정조를 바치고 때이르게 죽었을 그 녀자, 자기의 비천한 출신과 운명에 대한 자포자기가 외곬으로 치달아 자살에로 이끌었을수도 있다는것을 공포속에 예감했기때문이였다.

그들은 소박하고 평범한 중국사람들이였을것이다.

운명에 순종하여 부르면 응하고 앉으라면 앉고 가라면 가고 지어 죽으라면 죽는 중화민족의 이 수천년세월이 굳혀놓은 노예근성을 그래 어느 누가 깨친단말인가. 황계광의 말을 들어보면 전 중국을 통일하고 새 나라를 일떠세운 저 모주석같은이들이 눈뜬 소경들의 마음을 밝혀 손잡아 이끌지도 모른다.

저 당태종이나 주원장, 건륭황제들도 채 못한 일을 모《황제》가 정말 하겠는지 아직은 알수 없다.

왜냐하면 피와 살이 있는 인간이 귀신처럼 떠받들리울 때는 벌써 해가 서산에 기울기때문이다.

장개석을 보면 그는 분명 《걸출》한 속물이다. 속통이 좁으니 대만이 무덤으로 되고말것이다. 그럼 누구에게 의지하겠는가. 《그》의 눈에는 보이지 않았었다. 그래서 찾은것이 자기식의 인생관 ㅡ 악에는 악으로 맞서라, 불은 불로 끄듯이… 악에 의거하지 않았으면 《그》는 이미 부모의 뒤길을 따른지도 오랬을것이다. 《그》에게 있어 악이란 곧 살기 위해서는 무자비해야 한다는 생리적충동이였고 그것이 곧 자기자신이였던것이다.

골짜기아래에서 어둠을 써는 전조등불빛이 세번 껌벅이더니 풍을 친 차 한대가 불쑥 나타났다.

풍차는 좁은 지선에서도 그의 곁을 재치있게 빠져 군용화물차뒤에 바투 차체를 박았다. 검은 가죽잠바가 느릿느릿 다가왔다. 가죽잠바는 담배를 꺼내더니 그에게서 불을 달았다.

《왕동무, 오늘이 10월 11일이지, 우린 이렇게 한초도 늦는 법이 없소.》

《…》

《궁금할테지?…》

《알아왔소?…》

《우릴 어떻게 아는거야? 국제조직이나 같아. 참 그런데 그 연청이란 계집애가 자네와 무슨 연고지? 자넨 혈혈단신이니 말이야. 정부는 아닌것 같고…》

이제보니 말이 많은 작자다. 중어도 정확하긴 하지만 어쩐지 귀에 거슬린다.

《그》는 쓰거운 미소를 지었다.

《그건 당신이 알바가 아니요.》

《어럅쇼ㅡ… 여, 정<동무>, 그 봉투를 이리 내오우.》

풍차에서 날파람있게 생긴 젊은이가 뛰여나왔다.

《방금 본부에서 무전이 왔수다. 선두차가 아니라 세번째 차에 전선참모장이 탔소. 그가 극비작전문건을 가지고 평양으로 간단말이요. 임무가 확정된셈이요. <리브>가 알려왔소. 우린 어떤 일이 있어도 작전문건을 빼앗아야 하오. 절호의 기회자 마지막기회라오.》

《알겠소. 꿩먹고 알먹고 둥지털어 불을 때야지, 허허, 봉투를 주게!》

가죽잠바가 봉투를 열고 내속을 기관실덮개우에 쏟았다.

몇장의 사진이 뚤렁 떨어졌다. 《그》는 가슴이 섬찍하여 떨리는 손으로 사진을 집어들었다. 반년전과는 머리모양이 달라지고 더 핼쑥해졌으나 딸애가 분명하였다.

가죽잠바는 담배를 뻑뻑 빨았다.

《사진과 구체적인 자료가 어제야 도착했소. 일본을 거쳐서야 오니까. 하지만 우리 씨아이씨는 정확하지. 당신 구좌에 돈도 어김없이 들어간댔소.…

이 연청이라는 처녀애는 지난 5월부터 팽호렬도의 기륭에 있는 미해군기지 창부촌에 있었소. 하지만 지금은 유감스럽게도 중공이 도사린 해남도에 가있다오.》

《?!…》

《해군기지에서 미해병대장교들에게 몸도 채 피지 않은 어린게 매일밤 시달리우다나니 페결핵에 걸렸소. 단마르크병원선에 실렸는데 중공해상경찰에 단속됐다누만. 본인의 요구에 의해 거기에 떨어졌다오. 관심을 가질년이 못돼!》

침묵… 전률… 숨가뿜… 《그》는 머리속이 어질어질해났다.

무엇인가 이상한 예감이 들었는지 가죽잠바는 《그》의 눈치를 흘끔흘끔 살피며 뒤말을 누그러뜨린다.

《그》는 말없이 몇걸음 걸어 축축한 잔디우에 가앉았다.

맥없이 넋을 잃고 눈을 어디다 둘지 몰라 허둥거렸다.

(그러니 그 애는… 제 땅으로 찾아갔구나.…)

《그》는 이를 악물었다. 귀가 멍했다. 갑자기 멀었던 귀가 열리고 이 세상의 온갖 잡음이 귀속으로 흘러드는것 같다. 《그》는 두손으로 귀를 틀어막았다.

(아,아! 그 어질고 연약한 애를 짐승다루듯 하다니… 미군이… 아 계광아, 미군놈들이 중국사람을 모욕하고 더렵혔어. 그앤 당당한 중국사람이였어.…)

《그》는 오래 생각하는 법이 없다. 운명의 패쪽은 《그》에게 전혀 다른, 상상할수도 없었던 제3의면을 열어보였다.

그것은 가슴이 터질것 같은 분노와 절망의 벼랑끝에 비쳐든 한가닥 해빛이였고 한송이 죽어가는 꽃송이였다. 뽑히고 꺾이웠으나 제 땅에 이제는 뿌리를 묻었으니 기대할수 있을가? 희망을 가질순 없을가?

꺾인 줄기가 아물거나 그 뿌리에서 새순이 돋을수는 없을가?

《여 뭘해? 준비! 차가 나타났어. 본때를 보이게!》

《그》는 눈을 번뜩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운전칸에 올랐다.

가죽잠바가 곁에 함께 올랐다. 그자는 히죽히죽 웃으며 권총을 빼들더니 능숙하게 장탄했다.

《만약을 생각해서 엄호하자는거야. 군용차가 나타나면 직선으로 차를 받으며 벼랑으로! 그다음은 작전문건을 찾아내고 함께 뒤차로! 계획은 변동이 없어. 작전문건이 기본이야!》

저 권총에 재워진 총탄은 작전이 끝난 다음 《그》의 잔등을 거쳐 심장에 날아들것이다.

《그》는 그것을 너무나 잘 알고있었다. 딸애소식을 문의한것이 그들로 하여금 그런 결심을 내리게 했을것이다.

령길우에서 전조등불빛이 비쳐오는지 그들의 앞, 날카로운 벼랑건너편의 조락하는 단풍숲이 언뜻언뜻 드러난다. 그것은 한찰나였으나 선명하고 아름다운 단풍숲이였다.

《왕선생, 세번째 차야, 첫차와 다음차는 통과시키우!》

(계광이, 자네 말대로 우린 중국사람이야. 방금전까지 난 아니였어. 지금은 확신있게 말할수 있어, 우리 딸애만은 진짜 중국녀자야. 모주석은 농민편이라고 했지. 나의 어머니도 농민이였어, 내생의 마감에 와서야 이걸 깨닫다니!…)

《발동을 걸라!》

《그》는 덤비면 더 큰 실수가 있으리라 생각했다. 뒤차가 문제였다. 발동을 걸었다.

(이게 마지막 나의 싸움이 되겠구나. 절대로 실수하지 말아야 한다. 저 군용차들이 안전하게 령길을 통과하게 해야 한다. 작전문건… 그게 미제침략자놈들을 칠 폭탄이 아닌가. 이놈들의 손에 작전문건을 빼앗겨서는 안된다. 내 생명을 바쳐서라도… 딸애의 복수를…

서뿔리 움직이면 뒤에 서있는 풍차에서 불길과 수류탄이 날아들것이다.…)

숨가쁜 시간이 흐른다. 《그》는 운전대를 틀어쥔채 까딱도 하지 않고 그냥 앞만 쏘아본다.

선두차가 천천히 지나갔다. 가죽잠바가 정신없이 후면을 쏘아볼 때 《그》는 운전대를 꺾으며 한손으로 그의 정수리를 쳤다. 단련된 전문가의 일격이였다.

가죽잠바는 피를 토하며 옆으로 쓰러졌다.

권총을 잡았다. 그 순간 차문이 열리며 시체가 땅바닥으로 떨어진다. 충돌전에 뛰여내리게 되여있었으므로 문을 걸지 않은것이다. 《그》가 자기의 실수를 깨닫는 찰나 총소리가 울렸다. 눈앞이 번쩍하며 역스러운 화약내가 온 입안에 가득찬다.

《그》는 가물거리는 의식속에 자기옆으로 살같이 내달리는 풍차의 운전칸에 대고 연방 권총을 쏘았다. 명중을 알리는 비명소리, 하지만 정체불명의 차는 약간 비틀하다가 그냥 최대속력으로 달려 인민군의 세번째 군용차를 들이받으며 함께 벼랑으로 굴러떨어졌다.

(그래… 두놈 다 황천객이다.… 하지만 인민군군용차는?… 제발 무사했으면…)

《그》는 눈을 감았다. 점점 눈앞이 어두워온다.

멀리로 황계광과 딸애가 다정히 손을 잡고 달려간다. 이윽고 중국의 젊은이들은 언덕너머로 사라져버린다. 《그》의 환영도 사라졌다.

영원한 어둠이 《그》를 삼켜버린것이다.…

 

×

 

전선사령부 야전병원 원장은 강심제를 놓는 간호원을 내려다보다가 얼이 나간 사람처럼 나직이 중얼거렸다.

《빨리 군복을 벗기시오.》

해쓱한 얼굴로 옆에 서있던 간호원들이 전선참모장의 몸에서 군복을 벗겼다. 차가 벼랑에서 떨어지면서 화재까지 일어 군데군데 불탄 자리가 숭숭한 군복저고리가 잘 벗겨지지 않았다. 게다가 전선참모장이 품에 작전가방을 꼭 껴안고있었기때문에 굳어진 그 팔을 풀기가 여간 조련치 않았다.

작전가방을 받아든 젊은 부관의 얼굴에서 눈물이 비오듯 쏟아진다. 석상처럼 뻗치고 선 최현의 뒤에 웅크리고서있던 김인정은 자기가 달아준 가녁을 파란 실로 수놓은 목달개를 알아보자 그만 참지 못하고 얼굴을 싸쥐였다.

전선참모장의 몸에서 군복을 벗기자 주위에 둘러섰던 사람들의 눈에 놀란 빛이 떠올랐다. 전선참모장은 속에 병사용면내의를 입고있었던것이다.

《어마나…》

강심제를 놓던 단발머리간호원이 부르짖었다.

전무성의 뒤를 따라 류경수군단장이 병실에 뛰여들었다.

침상에 반듯이 누워있는 박정덕을 본 류경수의 몸이 우두둑 떨렸다. 인간의 소리라고 할수 없는 거센 굉음이 그의 입에서 터져나왔다.

《어떤 놈이! 어떤 놈이 이렇게 했는가!》

《삼손이ㅡ》

얼굴이 비참하게 이지러진 최현이 류경수의 손목을 꼭 잡아쥐며 원장을 가리켜보였다.

류경수는 비칠거리며 원장에게 다가갔다.

《원장동무, 살려낼수 있겠지?…응?… 왜 말이 없소.…》

《좀… 아직 심장은 멎지 않았습니다.》

《여보, 제발 살려주오. 내가 비오. 아니, 장군님께서 바라시는것이요. 장군님께서는 방금 전화로 무조건 살려야 한다고 하셨소. 살려야 한다고, 알겠소?》

하지만 류경수는 그의 대답을 들을수 없었다.

나직한 탄성속에 군의와 간호원들이 박정덕을 둘러쌌다.

원장은 잠깬 사람처럼 허둥지둥 박정덕앞에가 허리를 굽혔다.

《정덕이, 나야. 날세, 류경수야.》

류경수군단장이 목메여 소리치자 박정덕의 눈시울이 떨렸다. 입놀림까지 있었다. 그러나 소리는 없었다.

《너무 덤비지들 말라구.》

최현이 점잖게 말하며 쓸쓸한 얼굴로 박정덕을 내려다보았다.

《참모장! 우린 여기서 너무 지체하고있어. 장군님께서 지금 동물 기다리시는데 그게 뭔가, 응? 기운을 내라구.》

김인정은 최현이가 밉살스러웠다. 치명상의 환자를 일떠세우려 하다니… 그런데 뜻밖에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눈동자가 커지며 섬광같은것이 번쩍였다. 웃음까지 보이는듯 싶었다.

《무사…하군요. 한데… 내 가방…》

《여기 있소.》

최현이 그의 작전문건가방을 들어보았다. 그순간 박정덕은 실지로 웃음을 보였다.

그다음 얼굴에 한줄기 경련이 지나갔다.

《캄파!》

원장의 다급한 웨침과 함께 한 간호원이 그의 팔에 주사를 놓았다.

박정덕은 물끄러미 천정을 보는가싶더니 손을 내밀었다.

《정덕이, 다들 여기 있네.》

최현이 다급히 그의 손을 잡자 박정덕은 후ㅡ 하고 숨을 내쉬였다.

또 한번 얼굴에 경련이 일더니 마지막힘을 모아 류경수가 잡은 손에 힘을 주며 최현을 바라보았다.

《최현동지… 고추장은…》

《있다, 있어. 에익!》

최현은 고개를 꺾으며 흑 ㅡ 하는 흐느낌을 터쳤다.

《정덕동무, 정덕동무. 힘을 내오! 힘을!》

류경수역시 오열을 터뜨리며 소리쳤다.

박정덕은 무슨 말을 더 하려는듯 입술을 떨었을뿐 점점 눈빛이 꺼져갔다.

청진기로 그의 가슴속 고동을 엿듣던 의사가 천천히 일어섰다.

자는듯 눈을 감은 박정덕의 얼굴에는 놀랍게도 미소가, 고요한 미소가 어려있었다. 그 미소는 령구에 안치될 때까지 고스란히 그냥 남아있었다.

《?!…》

 

×

 

김일성동지께서는 불탄 자리가 거뭇거뭇한 작전가방을 받아드신채 한동안 내려다보기만 하시였다. 차가 벼랑에서 굴러떨어지며 불이 달렸지만 박정덕이 마지막순간까지 품에서 놓지 않았다는 작전가방이였다. 불타는 차안에서 딩굴면서도 꼭 껴안고있던것으로 팔과 겨드랑사이의 부분만은 본래의 가죽색대로 말끔한 연밤색이였다.

박정덕을 차에서 들어내렸을 때도 그 가방은 그냥 껴안은 상태였는데 최현이며 부관이 그 가방을 빼낼 때는 굳어진 팔을 푸는것이 무척 어려웠다고 했다. 접힌 가녁들이 누렇게 눈 크지 않은 작전지도를 조심스럽게 펼쳐 작전대우에 놓으시였다.

김일성동지께서는 한동안 긴숨을 몰아쉬시다가 작전대에 손을 짚으시였다. 문득 작전탁 모서리밑에 댕그라니 놓여있는 크지않은 오지단지가 눈에 띄우시였다. 김명수, 공정수와 함께 자신께서 박정덕의 위탈을 고쳐주시려고 손수 만드신 검정토끼곰이 저 오지단속에 들어있다. 검정토끼는 최고사령부 뒤산의 토끼사에서 품들여 키우신것이다. 단너삼은 빨찌산군의출신인 림춘추에게 부탁하여 실한것으로 몇뿌리 얻어왔었다.

밤새워 곰을 하느라 공정수가 불을 지펴놓고 손바람질, 입김질을 하며 지키다가 그만 깜빡 졸아 이마에 동전만한 화상까지 입었다. 장명선아바이에게서 김 몇잎을 얻어다 상처자리에 붙여주시며 웃음짓던 일이 생각나시였다.

《박정덕참모장의 위탈을 고쳐주려다 우리 공정수가 얼굴을 뎄다? 야단인데, 덕동녀선생한테 면회갈 때까진 낫겠지…》

지금 그 공정수가 김명수와 함께 저 출입문입구에 숨을 죽이고 서있을것이다. 그들이 터져나오는 오열을 참으려고 입술을 깨물며 몸을 떠는것이 느껴지신다.

부관들이 제일 좋아하고 허물없는게 젊은 장령들인 박정덕과 류경수이다. 박정덕은 그저 오는 일이 없다. 늘 가방에 무엇인가를 꿍져가지고와서는 공정수와 김명수의 주머니에 넣어준다. 하모니카와 수첩, 때로는 탄피로 만든 등잔도 있다. 그게 뭔지 일일이 보시진 못했으나 부관들의 입은 늘 함지가 된다. 장기질군인 공정수는 그를 붙잡고 《못살게》굴군 했다. … 저 토끼곰은 아직도 따끈따끈하련만 그는 어디 가고 이렇게 작전문건만 보내왔단 말인가.

눈이 쓰리시였다. 그 오지단지를 보다못해 다시 불에 그슬려 누렇게 된 작전지도우에 눈길을 떨구시였다. 작전지도의 부호들을 뜯어보시려 했으나 자름자름한 부호들은 그저 뿌옇게 보일뿐이다. 고개를 드실수가 없었다. 조금이라도 몸을 움직이면 자신을 진정하기 어려울것 같으시였다. 그대로 작전지도우에 두손을 짚고 움직일줄 모르시였다.

(전선… 참모장… 동무, 정덕동무, 이게 무슨 청천벽력이요. 우리가 전선사령부를 찾았을 때 그리도 혈기왕성하고 자신심에 넘쳐있던 동무가… 아직도 귀가엔 동무의 그 쇠소리나는 목소리가 그냥 들려오는데… 동무는 도대체 어디로 갔소. 동무의 부인과 어린 자식들이 눈이 까매 저 담박골어귀의 토굴집에서 기다리고있는데…

동무가 키운 저 74군단의 장기명수 리만호전사는 군관학교로 떠나며 옛군단장이 보고싶다고, 졸업하면 동무에게 보내달라고 당부했는데…)

가슴이 미여지는것만 같으시였다.

집무실안에는 시간의 흐름조차 멎어버린듯 숨막힐듯 한 고요가 깃들어있다.…

《최고사령관동지!》

갑자기 급히 들어온 남일이 다가와 무슨 보고를 올렸으나 그이께서는 첫순간 가려듣지 못하시였다. 그러다가 갑자기 소스라쳐 놀라시며 머리를 번쩍 드시였다.

《총참모장동무, 이자 뭐라고 했소?…》

남일이 굳어진 얼굴로 힘들게 입을 연다.

《장군님, 방금 정찰국에서 통보해왔는데 미16군단이 동해안으로 기동하고있습니다. 그리고 오성산 앞계선의 미군무력이 공격출발진지를…》

김일성동지께서는 다시 작전지도에 눈길을 주시였다.

무자비한 시간이 공간을 썰며, 압축하며 다가오고있다. 아니 급하게 지나가고있다.

김일성동지께서는 흐려오는 눈가를 손으로 문지르시고 불에 그슬리고 누른 작전지도를 다시 들여다보시였다.

점점 눈앞이 선명해지고 지도우의 부호들이 크게 부각된다.

적아 쌍방의 무력배치상태와 방어선, 방어축성물들과 예상되는 적의 진출로정… 결전진입계선을 표시한 붉은 점선들, 첨입과 포초, 익측과 린접을 담당한 부대표시들… 작전부호들은 대부분 생략되고 암호화되여있다. …아마도 전선참모장은 자기가 직접 설명하려고 될수록 간략했을것이다. 용의주도한 지휘관인만큼 만약의 경우도 예견했을것이다.

그 《만약의 경우》란?… 또다시 가슴이 터질것 같으시였다.

전선동부의 주요 적지탱점들에 대한 공격방안은 작전지도에 이상한 몇가지 암호기호로만 표시했다. 자신께서 이번 미제침략군의 예상되는 대공세를 결정적으로 파탄시킬 중심고리로 여기고 현지까지 밟아보며 대응책을 제기하셨는데 그 구체적인 작전전투조직내용은 젊은 전선참모장이 머리속에 간직하고 영원히 가버린것이다.

그보다 좀 더 아리숭한 암호표식들이 상감령쪽에 찍혀있다. 썼다는 지우고 다시 희미하게 새긴 흔적들…

아끼고 사랑하고 중히 내세우신 전사가 운명의 마지막순간에 무엇을 생각했을가. 이 부호들은 무엇을 의미하는것일가.

전사가 간직하고 간 중대한 작전안인것으로 하여 그 모든 짐이 자신의 어깨우에 무겁게 실리는것을 의식하였으나 그이께서는 그 중압감이나 전선정황의 긴박감을 현실적으로 느끼지 못하시였다.

그저 찦차 뒤칸에서 싱싱한 풋배추단을 부리우며 싱긋거리던 사랑하는 전사의 모습만이 알수 없는 부호들우로 자꾸만 덧떠오르는것이였다.

(정덕이, 동무가 갔다는것을 과연 정말 믿어야 하나? 저 50년도 늦가을 동무네 사단의 행적을 몰라 안타까이 압록강기슭을 거닐던게 어제같아.

압록강기슭엔 살얼음이 끼던 때였지. 그 살얼음낀 강기슭을 거닐며 며칠밤을 밝혔어. 박헌영이가 와서 54사는 이미 소멸된것같은데 적들이 놀라게 같은 이름으로 새 사단을 조직하자고 간청하는걸 단호히 눌러버렸댔지. 난 끝까지 동물 기다리고싶었소. 박정덕이 그렇게 호락호락 쓰러질 인간이 아니라고 믿었거든. 김책동무가 힘을 주었지. 내 어깨우에 조용히 외투를 씌워주며 그가 하던 말이 생생해.

《장군님, 박정덕이는 돌아옵니다. 54사는 절대로 사라지지 않습니다. 장군님 믿음이면 됩니다.》

박정덕이, 동무는 그 믿음에 보답했소. 놈들을 족치며 건재한 사단을 이끌고 최현의 군단으로 돌아왔지. 철원시가도 동무들이 해방했지. 그런데 과연 그런 동무가 정녕 떠났단 말인가, 아니 아니야. 동문 가지 않았어.)

김일성동지께서는 문득 머리를 흔드시였다.

어떤 사람들은 우리를 그 어떤 고통과 시련도 무조건 이겨낼수 있는 불가사의한 철의 인간으로 여길지도 모른다. 그래, 우리는 그 어떤 아픔이나 좌절, 역경에도 끄떡하지 않을것이다. 하지만 생사운명을 같이하기로 약속한 동지앞에서는 이 심장이 너무도 연하다는것을 다는 모를것이다. 심장이 찢어져 터갈라지는 아픔을 정녕 참기 어렵다는것을!…

하지만 이겨내자. 눈물을 복수로, 동지의 희생을 승리의 함성으로!

그것은 번개불과도 같은 순간의 심리적불꽃이였다.

김일성동지께서는 문득 지도우의 한점을 응시하시였다.

빨간 점선의 기묘한 선회, 인민군 53사의 기발표식이 그 점선을 따라 우익린접의 오성산으로부터 미9군단 측방까지 에돌다가 《×》자로 끊어졌다.

(아, 정덕동무!…)

가슴속 흉벽을 뭔가 쾅쾅 두드린다.

사무치는 애정이 그리고 끌수 없는 아픔이 또다시 가슴속을 에이고 들쑤신다.

(그래, 어쩌면 동무와 나의 생각이 이처럼 맞아 떨어질가.)

김일성동지께서는 누구도 알아낼수 없는 기묘한 점선의 선회와 부호표식들로써 박정덕의 새로운 착안, 자신께서 생각하던 구상을 발견하셨다.

오성산과 금화 동북쪽 상가산에 대한 적의 공격이 지원군방어선을 돌파할수 있는 위험이 조성될 때 그이께서는 인민군 제53사를 기동시켜 오성산 좌측 측방 남쪽의 미9군단 익측을 후려쳐 적의 공격진을 중간에서 허물려고 결심하셨던것이다.

그런데 박정덕이 벌써 그것을 내다보고 누구도 알수 없는 부호로 그 착안을 박아넣은것이다.

김책, 강건… 박정덕은 그들 못지 않은 장래가 촉망되는 군사가였다.

그이께서는 한동안 지그시 입술을 깨무시다가 지도우에 시선을 주시였다. 여러번 지우고 고쳐 기입한 암호부호들을 살피시던 그이께서는 남일대장에게 눈길을 돌리시였다.

《총참모장동무, 우리가 이곳에 예견한 포병무력이 얼마입니까?…》

《장군님, 3개 련대를 배치하기로 되여있습니다.》

《적구만. 이건 내 생각이자 박정덕동무의 우려요. 최사예비포련대 한개를 더 보내줘야겠소.》

김일성동지께서는 지도에 새겨진 박정덕의 작전전투조직과 기도에 대하여 설명하신 다음 자신께서 구상하신 결심을 말씀하시였다.

《내 결심이란 더 다른것이 없소. 박정덕동무가 작성한 방안이 곧 나의 방안이요.》

김일성동지께서는 전선동부의 다섯개 고지를 손으로 짚으시였다.

《총참모장동무, 이 경계선의 적들의 지탱점들에 대한 공격전투준비정형을 알아보았습니까?…》

《방금전… 류경수동무 그리고 71군단장동무와 련계를 가졌습니다. 최고사령관동지께서 명령을 내리시길 기다리고있습니다.》

남일은 경건한 자세로 조용히 보고드리였다.

《그리고 계획대로 최현동무네 72군단이 통천앞바다로 기여드는 미16군단을 견제타격하도록 해야겠소.》

《알았습니다.》

물론 김일성동지께서는 박정덕의 작전전투조직에서 일부 수정보충할 여지를 보시였다. 하지만 그이께서는 그 약점에 대해서는 일체 언급하지 않으시고 포괄적인 작전계획을 구체적세부까지 밝혀 최고사령관명령으로 정식 발표하시였다.

《동무들, 희생된 전우들의 복수를 위하여, 무자비한 섬멸전을 개시합시다! 전 전선에서!…》

김일성동지의 안광에서 푸른 섬광이 번쩍이시였다.

1952년 10월 12일 늦은 아침이였다. 이로부터 미제침략군의 《금화공세》시작까지는 이틀이 남아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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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일성동지께서는 담박골입구의 구락부에 안치한 전선참모장 박정덕의 령구앞에 오래도록 서계시였다. 마지막으로 전사를 다시 보고싶다는 그이의 말씀에 따라 백포를 벗긴 상태였다. 스러져가는 석양빛이 조용히 누워있는 전사의 얼굴을 쓰다듬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박정덕의 얼굴엔 미소가, 고즈넉한 미소가 여전히 비껴있는듯싶었다.

(정덕동무! 우리의 마음은 이토록 아프고 괴로운데 동무는 웃고있구만… 그런데 왜 이리 조용한가? 추도곡소리는 왜 들리지 않는가…)

《정덕동무…》

김일성동지께서는 산사람과 말하듯 나직이 뇌이시며 박정덕의 어깨며 가슴쪽의 군복주름을 펴주시였다. 그러시고는 곁에 선 김일에게 손을 내미시여 훈장곽을 받아드시였다.

자유독립훈장 제1급, 번쩍이는 그 훈장을 박정덕의 가슴팍에 달아주시던 그이께서는 불쑥 쓰라린 아픔을 느끼시였다.

전쟁 첫날부터 련대와 사단, 군단을 이끌어 승리에 승리를 새겨온 이 장령에게 너무나도 훈장이 적은것이 마음에 걸리시였던것이다.

하지만 력사와 인민이 그를 영원히 높이 알것이 아닌가. 그리고 자신께서도.

그이께서 허리를 펴시자 비장한 추도곡이 연주되였다. 수백 수천을 헤아리는 영결식 그때마다 울리던 추도곡.

산에서 싸울 때는 추도가도 없이 전사들과 헤여지실 때도 한두번이 아니였다.

그때마다 찢기는듯 한 아픔과 슬픔이 그이의 가슴을 찌르고 허비였었다.

잠시후 그이께서는 김일, 최현, 남일과 함께 령구를 메고 담박골입구의 야산으로 향하시였다. 단풍이 빨갛게 물든 야산기슭에 가을 들국화가 뒤설레였다. 황금빛을 띤 언덕기슭에 더미를 지어 떨기떨기 연하늘색꽃잎을 떠는 들국화들, 전사는 더운 피를 뿌리고가는데 대지우에는 꽃이 피여나있구나.… 조총소리가 울렸다.… 깃을 찾는 저녁새들이 무리지어 날아올랐다가 다시 내려 앉는다.

집무실로 돌아오시였으나 아무것도 입에 대실수 없으시였다. 밥을 넣으면 모래를 씹는것 같고 국을 들면 소태푼 물같아서 박정덕이 품들여 보내온 작전문건만을 뒤적이셨다. 이미 전선으로, 군단들로 명령서를 띄운 뒤였지만 전사의 충정의 숨결이 배인 그 문건앞에서 눈길을 뗄수가 없으시였다. 쓰다듬고 뒤적이시며 오래도록 추억에 잠겨 아픈 가슴을 억제하시였다.

다음날 점심때 림춘추와 김일이 박정덕의 부인 정옥희녀성이 쓴 편지를 가져왔다. 금방 박정덕의 유가족을 돌봐줄데 대한 내각결정을 내려보내신 뒤였다.

김일성동지께서는 편지를 받아드시였다.

눈물자욱이 력력한 글발들이 눈앞을 스치였다.

눈물이 앞을 가려 힘들게 읽어나가시였다.

《…장군님, 벌써 며칠째 식사를 안하신다니 저희들은 가슴이 졸아듭니다. 저의 남편이 이걸 안다면 땅속에서 자리를 차고 일어날것입니다.

장군님, 식사를 꼭 드십시오. 이건 우리 유가족만이 아니라 싸우는 전선의 전사들과, 가족들 조선인민의 소원입니다.

장군님께서 건강하셔야 우리가 이기지 않습니까…》

그래서 처음으로 식탁앞에 마주 앉으시였다. 박정덕의 최후를 목격한 김인정을 그 식탁에 부르셨다.

박정덕을 생각하시여 또 희생된 김광선을 생각하시여 김인정을 최고사령부에 눌러두기로 하신 김일성동지이시였다.

상에 놓인 고추장이 눈에 띄우시였다. 발그레한 고추장은 찰기가 돌고 군데군데 마늘다짐과 참깨들이 아기자기 박혀있다.

김일성동지께서는 장명선을 쳐다보시였다.

《장아바이가… 끝내 고추장을 마련했군요. 안됐습니다.… 내가 너무 바쁘다나니 함께 만들자던 약속을 어겼구만요.》

장명선의 얼굴이 일그러지고 눈굽이 축축해졌다.

《장군님…이 고추장은… 저 최현동지네가 만들어온 법동물산이올시다. 이 인정이가 가져왔지요.…》

김인정이 눈물을 똑똑 떨구며 사연을 이야기한다.

《장군님… 전선참모장동지는 운명의 시각에도 이 고추장걱정을 했습니다.…》

김일성동지께서는 그만 수저를 드신채 굳어지시였다. 그냥 그 고추장단지를 바라보시였다. 그것이 그저 고추장으로만 보이지 않으셨다. 이게 무슨 고추장인가. 아니! 동지들의 사랑! 최현의 얼굴에 겹쳐 박정덕의 마지막순간이 상상속에 비껴오른다.

사람이 운명의 마지막순간에 하고싶은, 터놓고싶은 말들이 오죽 많으랴. 이런 전사를 잃고…

단 한술도 들수 없으시였다.

… 썩 멀리 세월이 흐른 뒤 새 세기에 들어선 어느날 위대한 령도자 김정일동지께서는 수령님의 슬하에서 혁명가로 자라 영생의 언덕에 오른 혁명전사들의 모습을 담은 기록영화 《위대한 령장을 모시여》를 보고계시였다.

전선참모장 박정덕과 중요초소에서 일하고있는 그의 가족들에 대한 화면이 펼쳐지자 당력사연구소 책임일군이 늘 그러했던것처럼 설명을 시작하였다.

김정일동지께서 문득 한손을 내저으시였다.

《됐습니다. 강동무, 박정덕전선참모장이나 그의 가족에 대하여 알면 동무들이 나보다 더 알겠소. 우린… 소학교와 중학교를 함께 다녔소.》

기록영화가 끝났을 때 그이께서는 다시 보자고 하시였다.…

저녁에 집무실로 최용건보위상이 찾아왔다. 대성 네알을 단 그 좋은 풍채에 베보자기에 싼 그릇을 들고서있는게 이상하여 김일성동지께서는 물으시였다.

《왜 그러고 섰소?》

최용건은 외투안섶에 손을 넣어 검푸릿한 대두병을 꺼내 집무탁우에 놓고 베보자기를 풀었다.

《방금 최고사령부예비대로 장악하고있던 한개포련대를 전선중부로 떠나보냈습니다.

장군님, 낮에도 또 끼니를 번지셨다기에 제 오는 길에 평남도대평쪽에 들려 술을 좀 받아왔습니다.

전에 김책동무가 다니던 고장 술입니다. 따뜻하게 데워서 품고오기는 했지만…》

《!…》

최용건이 잔과 함께 김이 문문 나는 쟁개비를 밀어놓는다. 두부탕이였다.

식사가 끝난 다음 김일성동지께서는 최용건과 함께 밖으로 나서시였다.

차거운 석양빛에 눈이 시우시였다. 계절은 벌써 조락의 시절을 마치고 겨울에로 다가서고있다. 어느새 락엽들이 담박골의 여기저기를 덮었다. 최고사령부뒤의 담바우산도 불타던 단풍이 다 스러지고 푸릿푸릿한 소나무들 사이로 메마른 활엽수지대가 듬성듬성해 좀 한산한 감이 든다.

이 담박골의 지형이 참 기묘하다. 담바우산을 중심으로 바위벼랑들이 담벽처럼 둘러싸였는데 그런 어슷비슷한 산들이 줄줄이 늘어앉아 처음 온 사람은 골짜기들을 구분하기가 힘들다. 하긴 그래서 때로는 이 건지리 오형제골이라 부르는지도 모른다.

김일성동지께서는 최용건의 안내를 받으며 둔덕을 넘어 산탁의 벼랑기슭에 바투 붙여지은 꿩사앞에 멈춰서시였다.

토실토실 살진 꿩들이 한무리 몰켜서있다가 살창곁으로 푸르르 달려든다. 사람의 손에 길들여진 족속들이라 먹이를 주러온줄로 아는 모양이다.

최용건과 김명수가 먹이통에서 콩을 한줌씩 주어들고 마치 닭모이주듯 휘여휘여하며 살창안으로 뿌려던진다.

몸집이 작은 알락달락한 누른 재빛의 까투리 여러놈이 날쌔게 달려들어 콩알을 부리가 부서지게 쫏는다. 저만치 물러서있던 붉은깃에 황금색이 현란한 장끼가 위세있게 지게걸음으로 다가오자 까투리들은 례의를 차리는지 공손히 한옆으로 물러서는척 하다가는 또 부리를 빼들고 함지걸음새로 달려든다.

《보위상동무네가 키운 보람이 있소.… 허, 장끼란 놈이 참 위엄이 있소. 까투리들이 꼼짝 못하누만.》

김일성동지께서 혀를 차시자 최용건의 너부죽한 얼굴에 미소가 피여났다.

《장군님, 저놈이 아주 흉물스럽습니다. 누가 까투리들을 건드리기만 하면 제법 목털을 세우고 덤벼듭니다.》

《그래요?》

먹이가 바닥이 나자 꿩들은 기운이 생겼는지 좁은 우리안을 부리나케 오락가락한다.

《보위상동무, 저놈들이 숲이 그리운 모양이요.》

《예?!…》

김일성동지께서는 짧은 숨을 내그으시였다.

《저것들은 원래 가금이 아니지 않소. 왜 숲과 들이 그립지 않겠소. 비록 불탄 숲이지만… 이젠 저것들을 숲에 놔주는게 어떻소?…》

《좀 아쉽긴 하지만… 제 보금자리로 갈 때가 된것 같습니다.》

최용건이 활달한 어조로 말씀올리자 김일성동지께서는 환하게 웃으시였다.

《그래요? 의견이 없다? 김명수동무… 꿩사문을 여오.》

《알았습니다.》

김명수가 철망으로 된 꿩사문을 활 열어젖히자 꿩들은 오히려 비실비실 안쪽으로 기여들어간다.

《허허…》

김일성동지께서는 허리를 굽히시고 꿩사안으로 들어서시였다.

그이께서는 까투리 한마리와 장끼를 붙안으시고 밖으로 나오시였다.

《산천은 불탔어도 이제 봄이 오면 더 억세게 푸르를게다. 너희들의 깃을 펼 자리도…》

김일성동지께서는 꿩을 날려보내시였다. 장끼가 날으자 나머지 꿩들도 일제히 우리를 빠져나와 들판과 잎마른 야산둔덕으로 푸드득거리며 날아오른다.

김일성동지께서는 하염없는 생각에 잠기시여 그냥 말없이 꿩들이 날아오르는 창공을 바라보고계시였다.

꿩들은 아직 숲과 언덕, 포연내 짙은 자연이 낯설은듯 내릴 곳을 찾지 못하고 불안하게 여기저기 앉았다가는 또 푸드덕거리고 어떤 놈은 다시 꿩사쪽으로 기여오기도 한다.

김일성동지께서는 어쩐지 자꾸 눈물이 솟으시여 꿩들의 움직임도 느끼시지 못하며 겨울빛이 서려오는 담박산 창공만을 바라보고계시였다.

꿩들은 그냥 푸드득거리다가 담박산밑의 헐벗은 숲쪽으로 날아가 앉는다. 불쑥 김일성동지께서는 가슴속으로 짜릿한 아픔이 지나가는것을 느끼시였다. 그 산기슭에는 전선참모장 박정덕의 묘소가 있었던것이다.

어쩐지 꿩들도 자신의 마음을 아는것 같았다.

그이께서는 오래도록 꿩들이 날아간 산기슭에서 눈길을 뗄수 없으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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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선이, 전선이… 몸부림쳤다. 폭풍우가 터졌다. 화산이 솟구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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