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편소설 전선의 아침 제5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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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5 장
감시소가 자리잡은 엄페부에 들어선 련락병 박원진전사는 그만 어리둥절해버렸다.
위장복을 입은 군단과 사단 지휘관들이 감시구앞에 몰켜서서 수군거리고있었다. 그 중심에 서있는 류경수군단장의 모습이 유표하다.
잠시 머밋거리던 박원진은 옷매무시를 바로하고 키꼴이 후리후리한 류경수군단장앞으로 다가갔다.
《군단장동지, 대대장동지를 만날수 있습니까.》
난데없는 또랑또랑한 목소리에 감시소안은 일순 조용해졌다. 모든 시선이 박원진전사에게로 모아졌다. 그러나 조금도 자세를 흐트리지 않는 전사다.
류경수군단장이 머리를 끄덕이였다.
박원진은 지휘관들뒤에 서있는 대대장의 곁으로 다가가 귀속말로 속삭였다.
《대대장동지, 3중대는 무너진 전호굴설을 끝내고 휴식중에 있습니다. 련락병 박원진.》
녀자처럼 살갗이 맑고 쌍겹진 눈이 곱게 생긴 리만희대대장은 감시소안의 엄숙한 분위기를 순간에 깨버린 박원진을 보며 화가 나는듯 미간을 찌프렸다.
《됐소. 찾을 때까지 분대에 가있소.》
생김새에 비해 목소리는 굵은 저음이다.
박원진이 출입구쪽으로 씽 걸음을 옮기는데 걸걸한 목소리가 등을 때렸다.
《어, 련락병동무! 이리 좀 오우.》
박원진이 흠칫 놀라며 돌아서자 류경수군단장의 기름한 얼굴에 웃음이 비꼈다.
《구면친구로구만 그래, 박원진이라고 했지. 리수복의 시를 잘 읊었댔어.
여기 와서 저아래를 좀 내려다보면서 설명해보오.》
류경수는 당황하여 얼굴이 화끈해진 박원진에게 쌍안경을 넘겨주었다.
《저 골짜기밑 말이요. 대낮인데 적병이 허리를 펴고 태연하게 기신거린단 말이요. 저격수들은 뭘하나?》
박원진은 군모뒤에 손을 가져가며 얼핏 리만희대대장을 훔쳐보았다.
《저… 군단장동지, 지금은… 저놈들이 물을 긷는 시간입니다.》
류경수는 박원진의 대답에 머리를 기웃거렸다.
《그건 무슨 생뚱같은 소리요?》
박원진은 또 뒤머리를 긁적이다가 대대장의 눈치를 살폈다.
리만희는 아예 눈길을 엄페부바닥으로 떨구고있었다.
《군단장동지, 저 골짜기밑에는 사철 마르지 않는 큰 샘우물이 있습니다.
물을 긷자면 우리도 고지뒤릉선을 10리가량 내려가야 하고 저쪽 1참호의 적들도 저 고지옆구리까지 먼길을 에돌아야 합니다. 처음엔 물때문에 전투가 빈번해지군 했는데 지금은 자연히 시간을 나누어 물을 긷고있습니다.》
류경수는 아연해졌다가 그만 웃음을 터뜨렸다.
《이건 무슨 숨박곡질이요. 엇갈라 물을 긷는다?
여보 대대장, 동무네한테 이런 기이한 일이 있었소?》
리만희의 얼굴이 익은 꽈리빛이 되였다.
《저… 우리도 처음엔 강하게 추궁하고 대책을 세웠는데 얼마전부터 말없는 〈합의〉가 저절로 이루어진셈입니다. 〈전사참모부〉에서 표현하는대로 하면 샘우물주변에 〈공동경비구역〉이 생겼습니다.》
리만희는 슬쩍 말꼬리를 돌리며 피씩 웃어버렸다.
류경수는 두팔을 겯고 잠시 생각을 굴리다가 다시 골짜기쪽을 내려다보았다.
《〈공동경비구역〉이라니… 이게 무슨 놀음판인지 모르겠소. 음… 안되겠소.》
눈섭이 짙은 사단장이 엄한 눈길로 대대장을 쏘아보았다.
군단정치부에서 함께 온 중좌가 어성을 높였다.
《군단장동지, 그냥 놔두었다가는 전사들이 평화적기분에 말려들수 있습니다.》
류경수는 난색이 된 대대장과 박원진을 내려다보며 흠흠거렸다.
《그래, 이거 간단찮은 문제구만. 하지만 합의를 보았다면 우리가 먼저 어길수야 없지.》
《?!…》
류경수는 다시 쌍안경을 들고 적진을 살폈다.
장령은 한참동안 앞고지를 살피고나서 혼자소리처럼 중얼거렸다.
《문제는 저 854.1고지요.
우리쪽 진지보다 엄청나게 높고 삐여져 들어왔으니 회양으로 통하는 전략도로를 견제하고있거든.》
《저 854.1고지가 전략적으로 우리 전선을 비집고들어온 요충지인만큼 미제침략군이 방어력량을 강화하고있습니다. 차단물이 겹겹하고 증강된 두개 련대가 틀고앉아있습니다.》
사단장이 심중한 어조로 설명했다.
류경수는 한참 사색에 잠겼다가 얼굴을 돌렸다.
《사단장동무, 우는 소리 하지 말고 저 854.1고지를 무조건 타고앉아야 되겠소. 생각을 짜보오. 지형상으로 우리에게 절실히 필요하오.》
류경수는 쌍안경을 내리고 얼떠름해 서있는 박원진의 어깨에 손을 얹으며 지휘관들을 둘러보았다.
《이 꼬마련락병이 화선오락회때 보니 리수복영웅의 시를 곧잘 읊더란 말이요. 감정이 있소.
명심하라구.
최고사령관동지께서는 바로 동무들과 같은 전사들을 믿고 이 전쟁을 승리에로 이끌고계신단 말이요.》
박원진은 지휘관들이 다시 작전지도를 펴들자 엄페부를 빠져나왔다.
대대장련락병이 전번 전투에서 부상당한 후 박원진은 림시로 그 임무를 대신하고있었다.
박원진은 이 명령을 말없이 받아들였으나 한시도 자기 분대를 잊을수가 없었다.
련락임무짬에도 지나치다가는 분대를 찾군 하는 바람에 더러 대대장의 추궁을 받기도 한다.
계절은 이른봄이라 하지만 아직도 고지에는 백설이 덮여있고 땅은 풀릴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낮에는 해빛과 적의 포사격에 전호가의 눈무지가 녹아내려 질적거릴 때도 있지만 밤새 금강내기바람이 불어치면 강설이 천지를 휘감는다.
하지만 교통호를 따라 걷는 박원진에게는 골짜기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차겁게만 느껴지지 않았다. 무엇인가 부드럽고 싱그러운 기운이 그 사나운 바람결에서 느껴지는 계절이다.
박원진은 주춤 걸음을 멈추었다.
종군작가들이 빈 탄약상자가 쌓여있는 흉장곁에서 얼굴을 맞대고 열변을 토하고있는데 신기철분대장은 한쪽 전호벽에 기대여 가녁이 펄럭이는 종이장을 한손으로 누르고 부지런히 무슨 글을 쓰고있다.
보나마나 또 편지를 쓰는 모양이다.
신기철분대장은 편지쓰기를 좋아한다. 분대에서 생활하던 때는 느끼지 못했는데 요즘은 하루가 멀다하게 그가 쓴 야전우편엽서를 박원진이 날라가야 했다.
박원진은 편지쓰는 일이 퍽 난처하였다.
고향인 구성에서 보내오는 편지를 받는 날은 경사였으나 답장을 보내려고 펜을 들면 손이 딱 굳어져버리고만다. 글귀가 잘 떠오르지 않아 끙끙 앓고나면 이럭저럭 그저 평범하기짝이 없는 문안인사가 되고만다.
사실 그는 구성의 외진 농촌인 길상리에 사는 부모들과 학우들이 깜짝 놀랄 그런 편지를 쓰고싶었다.
하지만 아직 박원진에게는 이렇다 하게 자랑할만 한 공을 세운것이 없었다.
그래도 고향마을린근인 옥호동에서 의사로 일하는 외사촌누이에게는 별로 재지 않고 편지를 쓴다.
박원진은 신기철분대장의 곁에 조심히 다가가 슬쩍 어깨너머로 편지를 들여다보려 하였다.
그 순간 신기철이 머리를 들었다.
《원진인가. 동문 고향에 있을 때 옆마을에 있는 그 유명한 옥호동약수를 뜨러 매일 아침 달려가군 해서 그런지 정말 발에 날개가 달린것 같애. 황천왕동이 한가지야.》
《체, 분대장동지. 황천왕동이가 다 뭡니까.
어제 저녁도 2중대에 갔다왔는데 대대장동지한테 추궁만 받았습니다. 굼벵이라고.》
《하하하, 또 무슨 자유주의를 한 모양이지?…》
신기철은 면도한 자리가 푸릿푸릿한 볼을 쓰다듬으며 벙글거렸다.
분대장이 웃을 때면 적동색에 가까운 얼굴에서 흰 이가 유표하게 드러나 아예 수더분한 아바이가 되고만다.
기실 신기철분대장은 전쟁전 고향의 면당에서 일하다가 입대했는데 지금은 중대당세포위원장이다.
팩팩하는 리만희대대장까지도 그앞에서는 공손해진다.
지금처럼 대대에 자주 내려오는 류경수군단장도 신기철을 만나면 마라초를 함께 태우며 오래동안 무슨 이야기를 나누군 한다.
박원진은 한숨을 푹 쉬고나서 다시 편지지를 끄당기는 신기철을 올려다보았다.
《분대장동지, 제 부탁은 어떻게 되였습니까?》
《응… 생각중이요.
우리 원진동무가 대대장동지의 칭찬을 받을 때를 늘 기다리고있지.》
신기철은 느슨한 미소를 띄운채 군복저고리에서 두툼한 마라초쌈지를 꺼내들었다.
《체, 분대장동진 저더러 봄이 되면 다시 분대로 오게 한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래 원진동무, 벌써 봄인가?》
신기철은 편지지를 집어 수첩짬에 끼우고나서 박원진의 모자를 눈두덩까지 눌러씌웠다.
《조순근부분대장의 말을 못들었어요? 저 골짜기 샘우물주변에 벌써 파랗게 잔디가 돋았습니다!》
갑자기 고지뒤 릉선에서 야크비행기소리가 들리자 박원진은 군복섶에서 련대에 갔다가 《조절》해온 야전우편엽서 한뭉치를 꺼내 신기철에게 덥석 안겨주고는 교통호를 따라 바람같이 달려갔다.
한참만에 교통호쪽에서 우편물자루를 맞든 박원진과 조순근이 씨근거리며 다가왔다.
《분대장동지, 오늘도 분대장동지에게 오는 편지가 제일 많아요.
야, 오늘은 신문과 잡지도 있습니다.》
박원진은 숨을 헐떡거리며 함께 온 조순근을 건너다보았다.
《그래 어디 있소? 빨리 주오.》
박원진은 군복품속에서 끈으로 정성껏 동여맨 편지묶음을 따로 꺼냈다.
그리고는 회색자루를 펼치고 신문퉁구리를 꺼내는 몸이 우둥퉁한 조순근부분대장을 슬쩍 쳐다본다.
조순근부분대장으로 말하면 편지와는 아예 담을 쌓고있는 사람이다.
지난해초까지는 부지런히 고향집에 편지를 쓰군 했으나 한해가까이 답장이 없자 칼로 두부모베듯 싹 끊어버리고말았다.
별로 편지질을 안하던 신기철분대장이 반대로 교대라도 하듯 부지런히 우편엽서들을 찾았다.
(참, 이상하단 말이야.
신기철분대장은 무슨 편지를 그리도 많이 쓰고 받는걸가? 하긴 전쟁전에 당사업을 했다니까 아는 사람이 많을거야.
면당에서 일했다면 사실 큰 간부가 아닌가. 우리 마을에선 앞내울 성미 마른 쌍가매집좌상령감까지 면당위원장아저씨가 나타나면 존대스레 허리를 굽히군 했지. 참, 좋은 아저씨였어. 내가 전선으로 떠날 땐 채순이와 함께 나를 바래주며 주머니에서 애용하던 만년필까지 꺼내주었지.
채순이도 후에 간호원으로 전선에 나왔다고 옥호동 사촌누이가 알려왔지. 참, 고게 벌써 쌍줄배기라니, 내 원 참…)
박원진은 우편엽서들을 성급히 뜯어 읽는 신기철을 바라보며 고개를 살랑살랑 흔들었다.
그 채순이도 가끔 편지를 보내여왔다. 중학교 한해 아래반이였던 채순이는 목이 쑥 빠지고 쌍겹진 눈의 검은 자위가 류달리 큰게 겁이 좀 많아 사내애들의 놀림을 받았었다.
그래서 사내애들에게는 도톰한 입술을 감빨며 여간 새침해하지 않았다.
특히 싱겁게 놀기 좋아하는 박원진이 앞에서는 가끔 새별눈이 도끼눈으로 되여 쏘아보군 했다. 그러던 채순이가 중학교졸업생들이 전선으로 떠날 때는 출발의 역두에 달려나와 각별히 애틋한 눈으로 박원진을 바래주었고 고운 글시로 성의껏 편지를 보내주군 했다.
채순이가 바로 그 푸수한 면당위원장의 사랑을 받는 셋째딸이였다.
전쟁전 봄날의 어느 일요일에는 중학생들이 모여 학교뒤 언덕에 애어린 나무모들을 심었다.
박원진은 채순이와 함께 나무모를 심다가 문득 물바께쯔를 들고 일어섰다.
《채순아, 우리 이 나무모들에 옥호동약수를 떠다줄가?》
《피, 나무모가 뭐 병들었나?》
채순이는 입술을 삐죽이 내밀었다.
박원진은 발끈해서 눈섭을 곤두세웠다.
《야, 선생님이 뭐라고 하셨니? 저 옥호동약수에는 여러가지 약성분과 광물질이 쫙 풀려있다고 했단 말이야. 이게 나무의 성장에 좋으면 좋았지 나쁠게 있어?…》
《그럴가?…》
《우리 어머닌 내가 매일 아침 떠다주는 약수를 마시고 이젠 위탈이 다 나았어.》
식수가 끝난 다음 박원진은 채순이와 나란히 옥호동으로 떠났다. 봄비가 보슬보슬 내렸다. 채순이는 상큼한 목을 움츠렸다가 숱많은 머리채를 흔들어 물방울들을 털어버리고는 까르르 웃으며 뒤따랐다. 도루메약수와 나란히 있는 옥호동약수터는 길상리동네에서 그리 멀지 않지만 사실 구성지경을 벗어난 선천땅이다. 둘은 비에 흠뻑 젖으며 두번이나 약수를 날라다 나무모들에 부었다. 나무들은 무럭무럭 자랐다.…
채순이는 지난해 입대하기 전의 편지에서 그 애어린 나무들이 미제침략군의 폭격에 뿌리채 뽑혀 타버렸다고 썼다.
박원진은 저도 모르게 주먹을 부르쥐였다.
(죽일놈의 새끼들… 그 어린 나무를 태우다니… 승리의 날에 고향에 돌아가면…
그런데 채순이랑 중학동창들이… 지금의 나를 보면 뭐라고 할가?
리학문영웅처럼 전선을 넘나들며 위훈을 세우는 정찰병이 된다고 큰소리치던 내가 아닌가…)
《원진동무, 무슨 생각에 그리 골몰하세요?…》
윤애사의 청맑은 목소리에 박원진은 상념에서 깨여났다.
박원진은 시무룩이 웃으며 전호턱에 서있는 그를 올려다보았다.
《애사동지에게 오는 편지는 없었어요.》
《호호… 아직 편지 올데는 없는걸요. 원진동무, 나 한가지 부탁할가?》
《뭔데요?》
윤애사가 훌쩍 전호바닥으로 뛰여내렸다.
《저 골짜기 밑 샘우물터말이예요. 그곳에 날 한번 데려가주세요.》
《그건 안됩니다. 필요한 성원외엔 어림도 없어요. 요즘 저격수활동이 활발해지면서 단속이 여간 심하지 않거든요. 방금도 군단장동지한테… 리만희대대장이 알았다가는 큰일납니다.》
박원진은 펄쩍 뛰며 뒤로 물러섰다.
《피ㅡ 원진동문 용감한 병사인줄 알았더니…》
윤애사는 실망한듯 입술을 내밀며 고개를 살래살래 흔들었다.
《체ㅡ 이건 용감성과는 다른 문제입니다. 이젠 〈공동경비구역〉도 없어질것 같단 말입니다.》
《그래두…》
박원진은 엄페부에서 장령들과 지휘관들이 나오는 틈을 타서 슬쩍 윤애사한테서 풀려나 부지런히 전호길을 달려갔다.
전호가 꺾이는 모서리에서 얼핏 뒤를 돌아보니 윤애사는 그냥 흉장에 기대고 오도카니 서서 이쪽을 원망스레 바라보고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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