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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소설 전선의 아침 제2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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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강산
댓글 1건 조회 2,387회 작성일 20-01-14 09: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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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jpg


제  2  장

 

미극동군사령관 릿지웨이대장은 배률도가 높은 쌍안경을 들고 오래동안 《철의 삼각지대》(인민군측의 금화동북쪽으로부터 오성산, 평강 남쪽 상가산까지의 전선)를 살펴보고있었다.

그로하여 이 전방지휘소의 주인인 미9군단장 루빈 젠킨스중장도 미8군사령관 밴플리트대장도 부동의 화석으로 굳어져있다.

미9군단 부사령관 정일권중장 역시 밴플리트대장뒤에 차렷자세를 취하고 서있었으나 속으로는 전혀 긴장감을 느끼지 못하고있었다.

색이 바래고 다소 구겨지기까지 한 릿지웨이의 군복잔등엔 젖은 자리가 얼룩얼룩하다. 일행이 교통호를 따라 전방지휘소로 오를 때 변덕스럽게도 부나비같은 진눈까비가 철떡철떡 쏟아져내렸던것이다. 릿지웨이가 신은 목 긴 군화도 교통호바닥의 진흑이 게발려 말이 아니다. 가끔 대장이 쌍안경을 든채 몸을 기웃거릴 때마다 불교승의 념주처럼 군복가슴에 화선장식용으로 달고다니는 수류탄들이 가볍게 흔들거린다.

정일권의 입가에는 부지중 쓰거운 미소가 떠올랐다.

기실 정일권은 이 릿지웨이대장에 대해서 감정이 그닥 좋지 않았다.

전쟁초기 채병덕의 뒤를 이어 가장 어려운 시기 군 참모총장직을 지냈고 두차례의 미국류학까지 거친 정일권으로서는 몇달전 웨스트포인트를 나오고 귀국했을 때 자못 리상이 높았었다. 그런데 뜻밖에도 리승만《대통령》은 3성장성인 그를 전선중부의 2사단장으로 임관한것이였다.

동년배들인 최덕신이나 원용덕이가 다 군의 야전사령관격의 직책을 지고있는데 이 인사조치는 분명 선후배격차가 엄격한 군례의에 심히 경사지는것이였고 한편 정일권자신의 자존심을 무참히 건드리는것이였다.

순간적으로 얼굴이 벌개진 그를 측은한 눈길로 건너다보며 리승만은 영어로 중얼거렸다.

《정장군, 너무 섭섭해 말게.

옛 병서에도 싸움이 한창인 때는 창을 갈지 말라고 했지. 차츰 군의 요지이 비는걸 기다립세. 릿지웨이장군은 자네가 지난기간 군의 웃도리를 멤돌긴 했지만 야전경험이 없다는거야. 큰 사내들이 보는 눈이 다르다는걸 나도 느꼈어.》

정일권은 울분이 치밀었으나 꾹 참고 현지에 나와 사단을 맡아 재정비한 후 전선지역을 빈틈없이 방어하기 시작했다.

2사단은 미9군단에 배속되여있었다.

가끔 사단에 내려오군 하는 젠킨스중장은 정일권이 미국에서 가져온 스코치 몇잔을 함께 들고는 기분이 좋아 엄지손가락을 흔들군했다.

《정중장이 지성도 있고 기질로 보면 유럽식성격이요.

나는 이 거친 땅에서 정중장같은 호걸을 알게 된것이 기쁘오.》

그후 만 석달만에 정일권은 미9군단 부사령관으로 승격되여 젠킨스중장과 함께 일하게 된것이다.

이것은 정일권을 당황하게 만들었다. 얼치기 다민족국가인 미국에 있어서 이런 인사조치가 새삼스러운것은 아니지만 국적변경이 없이 미군중장의 직위에 오른것은 많은 의미를 안고있었다. 하지만 오늘 아침 도꾜를 떠나 대구에 들려 밴플리트대장을 휘동해가지고 기습적으로 금화지구의 미9군단사령부에 나타난 릿지웨이는 정일권의 인사를 랭담한 눈길로 외면하고 이 전방지휘소로 불쑥 올라옴으로써 또한번 그에게 의혹감을 준것이다.

사실 정일권은 지난해의 두번의 공세실패로 하여 릿지웨이대장이 오래동안 앙앙불락 절치부심한다는것을 모르지 않았다.

정일권은 아직도 쌍안경을 든채 전방을 진지하게 살피는 릿지웨이를 일종의 너그러움을 가지고 쳐다보았다.

(지금 뭘 생각하고있을가?

백악관과 미군부, 정객들속에서는 릿지웨이의 조동설이 나돌고있다. 한때 정전담판개최로 인기를 모았던 릿지웨이에 대한 기대도 오늘에 와서는 한계점에 이른것 같다. 지금 전선은 바늘들어갈 틈사리도 없을만치 팽팽하게 압축되였다.

이런 불리한 정황에서 전국을 변화시킬만 한 비상한 명안이 서지 않는다면 그는 앞날이 없을것이다. 트루맨대통령도 선거를 앞둔 때라 목소리를 높이지 못할게고…)

정일권이 까닭없이 상념을 톺는데 릿지웨이가 불쑥 돌아섰다.

정일권은 흠칫 놀랐다.

표표해보이던 부동의 뒤자세와는 달리 릿지웨이의 침착한 눈가에는 일종의 부드러움이 비낀것이다.

쌍안경을 부관에게 넘겨준 릿지웨이는 젠킨스중장에게 무슨 말을 하려다가 후줄근해 서있는 밴플리트를 바라보았다.

《귀관은 왜 그리 안색이 흐렸소? 혹시 아침을 설친게 아니요?…》

《각하…》

밴플리트는 허탈상태에 빠진 사람처럼 눈을 번뜩거렸다.

릿지웨이는 측은한 눈길로 그를 눈여겨 살피며 한손을 내저었다.

《됐소. 됐소. 밴… 실종된 조카에게서는 아무런 소식도 없소?》

《각하, 하느님은 우리 가문에 등을 돌려댄것 같습니다.》

밴플리트의 저으기 떨리는 목소리에 릿지웨이는 그만 어깨를 떨어뜨리고말았다.

《어찌겠소. 전쟁이 아니요. 우린 아직 희망을 가져야 합니다. 지금 제3국을 통해서도 알아보고있소. 정전담판장에 상정시킬수도 있지만 적측이 그걸 정치적흥정물로 써먹을것 같아 그러우.》

《각하, 그건 저 역시 동의할수 없습니다.》

정일권은 다시 속으로 랭소를 지었다.

(가관이다. 이 전쟁이 유독 8군사령관들에게 운명의 썩은 동아줄을 던지는셈인가. 전 8군사령관 워커는 전사하고 현 8군사령관의 조카는 실종되고… 밴플리트가문의 명줄을 쥔 대재벌의 아들…

비행사였던 헨리 밴플리트가 실종된것이 인민군의 사리원비행장을 폭격할 때였지…

3국은 3국이고 륙군정보국과 지어 특무대까지 떨쳐나서 샅샅이 뒤지고있는 형편이지…)

《밴플리트대장, 예수ㅡ그리스도가 말하지 않았소. 최선을 다하며 천명을 기다리라…》

릿지웨이는 두팔을 벌려보인 후 감시구쪽으로 다가가 젠킨스중장을 돌아보았다.

《저 마주 붙은 두 봉우리가 제인 러쎌고지지?》

《각하, 그렇습니다. 597.9고지와 무명고지입니다. 두 봉우리는 북조선군의 전략적요충지인 오성산의 관문으로 되여있습니다.》

젠킨스의 재빠른 대답에 릿지웨이는 재차 물었다.

《그 앞의것은?》

《537.7고지인데 오성산계선의 우리측 중요 지탱점입니다.》

《그런즉 저 고지는 우리측의 관문인셈이구만.》

《그렇습니다. 오성산으로 진격하자면 상감령을 먹어야 하는데 먼저 저 제인 러쎌고지를 깔고 앉아야 합니다. 하지만 아직껏… 해내지 못하고있습니다. 죄송합니다.》

젠킨스는 눈길을 내리깔았다.

《그 원인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오?》

릿지웨이의 눈가에는 어진 늙은이같은 너그러움이 깃들었다.

젠킨스는 그의 부드러운 음성이 자못 뜻밖인듯 얼굴에 생기가 돌았다.

《각하… 첫째로는 우리의 지휘능력부족인것이고 다음은 적측의 완강한 방어와… 특히는 갱도때문입니다.》

《갱도… 저 상감령은 중공군이 막고있는데 그들도 갱도를 굴설했는가?》

《상감령은 물론 저 앞계선일대의 모든 고지들이 갱도화된 진지로 되여있습니다.

우린 지금 재고량이 부족된 형편에서도 매일 수만발의 포탄과 폭탄을 퍼붓고 나팜탄까지 투하하지만 어느 한 진지도 무너뜨리지 못했습니다.》

릿지웨이는 《갱도》라는 소리가 나올 때부터 얼굴빛이 흐려졌다.

묵묵히 전방고지를 살피던 그는 밴플리트를 향해 시르죽은 웃음을 지어보였다.

《역시 지상돌파는 지겹구만.

하지만 저 〈철의 삼각지대〉가 우릴 계속 애교있게 유혹한단 말이요.》

《각하, 저는 각하가 구상한 새 작전선상에서의 저 〈철의 삼각지대〉타격안을 론의하고싶습니다.

그 한계점을 넘어서면… 우린 또다시 지렘마에 빠질수 있습니다.》

밴플리트는 역시 직업군인이였다. 목소리가 떨리지 않았고 눈이 번쩍이기 시작했다.

《당신 말이 옳소. 이곳에서의 작전은 이미 토론한대로 내미시오. 그걸 변경시키지는 않겠소.》

《알겠습니다. 그런데 화기(무기)보충은 이곳 군단들에도 현재보다 2배이상은 있어야겠습니다.

각하께 이미 말씀드렸지만 인민군 류경수군단은 이곳 9군단의 익측과 미10군단의 전선에 대한 기습작전을 자주 벌리는데 그 여파가 조만간 이곳까지 미칠것 같습니다.》

《그건 좋은거요. 지난해 우리의 공세가 불미스럽게 끝난데 대해 어리석은 제씨들은 전략적과오라고 타매하는데 그것까지는 접수합시다.

하지만 우리는 그 공세가 헛되지 않았다는것을 알아야 되오.》

릿지웨이의 눈길이 정일권에게 멎었다.

정일권은 갑자기 속이 뜨끔했다. 그 타매자들속에 당시 미국류학중이던 자기자신도 끼여있지 않았다고 부언할수 없는것이였다.

그의 이런 생각을 떠본듯 릿지웨이는 다소 엄한 어조로 말했다.

《우린 바로 그 공세로써 인민군으로 하여금 바로 그 산악들에 모든 력량을 집중케 한것이요. 이것이 이번에 우리가 구상한 작전의 전제로 될건 뻔하지 않소. 그 동부산악지대와 이 중부지대에서 적의 발목을 잡아야 하오. 특히 이 〈철의 삼각지대〉가 중요해. 그런데… 당신은 서조선만에 대한 우리의 기습작전에 의문을 표시했다는데 그건 이런 전략적의도를 알고 제기한건가?》

젠킨스를 바라보는 릿지웨이의 눈길은 갑자기 사나운 독수리 눈으로 되여버렸다.

젠킨스중장은 억울한듯 어깨를 으쓱했으나 인차 침착성을 회복하였다.

《각하, 의문이라기보다 저는 우려를 표시했습니다. 지난해 각하의 지도밑에 열린 브라핑에서도 론의했지만 북조선서해안 상륙지점은 압록강하구의 가도부근과 서조선만의 서천지역입니다. 압록강하구는 중공과 린접되여있고 청천강이 막혔으므로 협공에 불리합니다. 이렇게 볼 때 서천지역이 상륙작전에 리상적이라는것을 모두가 인정한것이고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하지만 그때 벌써 인민군측이 그것을 예견하고 방어력량을 집중시키고있다는 정황때문에 단념했었는데 현재는 당시보다 서해안계선에 더 강력한 방어진이 형성되고있다는것입니다.

이건 밴플리트각하가 소집한 8군 지휘관들의 회의에서 종합된 정보로 확인되였습니다.》

《그 종합된 정보라는것은 뭐요?》

릿지웨이는 불쾌한 기색으로 밴플리트를 돌아보았다.

밴플리트의 얼굴이 쓴 오이씹은 형국이 되였다.

《이미 말씀드린것 같은데… 종합된 정보라는것은 서조선만에서만도 진지의 갱도화가 왕성하게 벌어지고 전쟁초기 우리를 놀래운 인민군 땅크부대들도 그곳에 배치되였다는것입니다.

그밖의 또 하나의 정보는 북조선군 최고사령관이 특별히 신임하는 박정덕장령이 그 일대의 방어를 맡고있습니다.》

《박정덕?…》

《저… 50년가을부터 이른바 제2전선을 펼치고 우리를 배후에서 타격할 때 최현장령과 함께 솜씨를 보인 장령입니다.》

《솜씨를 보였다?!… 흠.》

릿지웨이는 담배를 꺼내려는지 주머니를 뒤지다가 손을 휙 내저었다.

《그것을 뒤집어서 생각해보기요. 지난해 북조선군 최고사령관은 우리가 1211고지쪽에 대한 강타를 준비할 때 바로 서해안부대를 찾아갔소.

이런 경험으로 볼 때 박정덕이라는 장령을 그곳에 파견했다는것은 바로 당신들이 지금처럼 생각할수 있다는것을 타산한 기만이라고 봐야 하지 않을가.

여기 오기전에도 말했지만 캐논중좌와 극동군정보국장은 서해방어군단의 병력과 무장장비가 아주 빈약하다고 했소.》

《!…》

릿지웨이의 말에 밴플리트는 음울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였다.

《그렇소. 이것은 우리의 이번 구상의 신축성을 담보해주고있소. 흔들리지 맙시다. 밴, 서조선만의 서천을 목표로 예비작전을 시작해야겠소. 어떤일이 있어도 그곳에 일종의 교두보를 확보해야해. 서천다음은 평양이요. 적 수뇌부란 말이요. 우리가 옛 병서를 상기할 때가 왔소. 장수를 잃으면 전쟁은 끝나는거요. 단순한것 같지만 여기에 무서운 진실이 있소, 진실이! 그때까지 저 〈철의 삼각지대〉를 계속 타격해야겠소. 이곳 전선동부일대를 중시하는 인민군의 판단이 옳다는것을 인정하게.》

《각하의 의도를 알겠습니다.》

정일권에게는 밴플리트의 대답이 어쩐지 풀기가 없이 들렸다.

이때 위스키병이 놓인 쟁반을 받쳐든 허리가 가는 금발머리 녀장교가 새침한 얼굴로 전방지휘소에 들어섰다.

젠킨스중장의 타자수겸 서기인 마거래트 베키 2급준위였다.

《이건 뭐요?》

릿지웨이의 세모눈이 창끝처럼 되여 젠킨스에게 쏠렸다.

정일권은 쓰거운 미소를 지었다. 미군내에서는 이미 하나의 례의로 되여버린 평범한 써비스(봉사)에 왜 저다지도 신경질적인 표정을 짓는가.

(역시 1211고지때문에 속이 궁글어졌다는것이 옳은 말이구나.)

낯가죽이 좀 두터운편인 베키는 그러거나말거나 방안의 분위기에는 아랑곳없이 얼굴을 찌프린 릿지웨이를 향해 상냥한 미소를 지으며 머리를 까딱했다.

《각하, 극동공군사령관이 보낸 장교가 각하를 만나겠다고 합니다.》

《극동공군사령관이? 누군데?》

《죤 아이크2세라고 합니다. 미3사 대대장입니다.》

《죤 아이크2세?!》

릿지웨이의 태도가 대뜸 달라졌다.

《어데 있소? 데려오시오.》

정일권은 어리둥절해졌다.

어마어마한 작전문제가 토의되는 이 자리에 한갖 소좌나부랭이에 불과한 장교를 불러들이다니…

잠시후 베키준위의 뒤를 따라 들어선 소좌는 방금 무도장으로 나갈 사람처럼 말쑥한 군복차림과 얼굴에 기름기까지 반질반질 흐르는 젊은이였다.

《아!》

릿지웨이가 짧은 탄성을 내지르며 소좌의 손을 잡고는 젠킨스와 정일권을 향해 돌아섰다.

《인사들을 나누오. 이 젊은이로 말하면 우리의 존경하는 아이젠하워씨의 아들 죤 아이크2세요. 밴플리트대장과는 구면일거구…》

아이크2세는 젠킨스와 정일권에게 활달한 자세로 머리를 끄덕이고 밴틀리트대장에게 걸어가 친절하게 인사를 나누었다.

《응, 자넨가…》

밴플리트는 젊은 소좌의 등을 쓰다듬듯 두드렸다.

아이크2세는 밴플리트의 애무에 몸을 맡기고있다가 불쑥 돌아서더니 활달한 걸음새로 릿지웨이앞에 다가갔다.

《각하, 용건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저와 인맥이 있는 미중앙정보국 현지반이 국군정보국선을 통하여 대단히 중요한 사실을 확인하였습니다.

최근 대북첩보기관이 힘들게 련계를 회복한 북조선군지역의 한 국군게릴라소부대에 그동안 우리가 실종되였다고 믿고있는 한 미군비행사가 억류되여있다는것입니다.》

《뭐라구?!… 그래 그 비행사의 이름은 확인했소?》

죤 아이크2세는 미소를 지었다.

《각하, 그의 이름은 나의 친구와 이름이 같았습니다. 그 비행사의 이름은 헨리 밴플리트대위였습니다.》

밴플리트대장이 가볍게 전률하는 바람에 정일권이 그를 부축했다.

릿지웨이가 미심쩍어하는 눈길을 들었다.

《믿을수 있는 정보요? 밴플리트란 성이 흔치는 않지만… 또 북조선반탐기관의 함정일수도 있지 않소.》

아이크2세의 얼굴에는 분개하는 표정이 살아났다. 하지만 목소리는 여전히 침착했다.

《각하, 응당한 의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전선가까운 북조선군지역에 전개한 그 게릴라소조는 무전기가 파손되여 지금까지 본부와 련계를 못취했던것입니다. 우리가 파견한 신형무전기를 가진 련락원이야 믿을수 있겠지요? 오늘 아침 나는 그 련락원과 약속된 암호로 교신했습니다.…》

《련락원은 무엇을 요구해왔소?》

《구출작전입니다. 이미 무선교신이 진행되고있는것만큼 시간을 끌면 진짜 북의 반탐선에 로출될수 있습니다. 명령을 내려주십시오.

전선가까운 지대인 관계로 신형직승기만이 헨리를 구원할수 있습니다.》

릿지웨이는 얼핏 밴플리트를 넘겨다보고는 단호한 어조로 말했다.

《좋소… 신형직승기 2대를 주겠소.》 그의 얼굴에는 불쑥 어두운 표정이 지나갔으나 그것은 순간이였다.《하지만 덤비진 말아야 해. 정보에 의하면 까게베가 요즘 최근에 개발한 이 신형직승기를 탐낸다고 하오. 하지만 밴플리트대장을 위해 무엇을 주저하겠소. 그대신 안전을 위해 비행대만이 아니라 극동군분함대의 일부도 동원해야겠소.》

정일권은 릿지웨이가 말하는 안전이 헨리의 생명인지, 신형직스기의 보호인지 알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가지만은 명백하였다. 밴플리트대장의 조카구출작전에 아이젠하워가 관심하고있다는것, 릿지웨이는 이 정치적흥정의 매파가 되려는것이다. 군인이라고 결코 정치적감각이 무딜수는 없다.

《각하, 정말 감사합니다.》

아이크2세가 차렷자세를 취하자 릿지웨이는 히죽이 웃었다.

《그 감사를 헨리의 삼촌이 아니라 자네에게서 받으니 더 의미가 깊구만.》

아이크2세가 무랍없이 두팔을 벌려보였다.

《나의 둘도 없는 친구니까요. 그리고 나의 아버지도 이 소식을 기다리고있습니다.》

릿지웨이는 밝은 표정으로 위스키를 들이킨것처럼 얼굴이 검붉어진 밴플리트를 돌아보았다.

《귀하의 가문에 아직은 하느님이 등을 돌려대지 않은것 같소.》

밴플리트는 목사같은 표정을 지었다.

아이크2세가 활짝 웃었다.

《밴플리트대장각하, 그리고 전 빨리 헨리를 만나 회계할것도 있거든요. 지난해말 크리스마스 전날밤 카지노에서 그는 나에게 빚을 졌답니다.》

정일권은 눈을 쪼프리고 릿지웨이, 밴플리트와 함께 화기애애하게 전방지휘소를 나서는 아이크2세의 늘씬한 뒤모습을 바라보았다.

(아이젠하워는 진짜 사내를 키웠구나. 만약 신형직승기를 리용한 이 새로운 도박이 성공한다면 릿지웨이는 큰덕을 볼것이다.

아이크와 밴은 다 웨스트포인트 동창생들이니 일석이조요, 일석삼조의 신세를 입히는것이 아닌가.)

젠킨스가 출입문가에 버티고서서 담배갑을 꺼내더니 뒤따라선 정일권을 돌아보며 능청스러운 웃음을 지어보였다.

《보시오. 우리 군대의 실용주의적도덕이 어떤가. 우의가 넘치지 않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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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산님의 댓글

강산 작성일

(위에서 계속)

젠킨스는 지휘소앞에서 서성대는 베키양을 손짓해 불렀다.

《베키양, 사령부에 알아보시오. 오찬시간이 되여오누만. 대장들에게 나의 9군단의 의례솜씨를 보여줘야지.》

젠킨스는 정일권의 팔을 끼고 전방감시소앞을 천천히 걸었다.

《정, 오늘 내친김에 한가지 비밀을 말해줄가요?》

《예? 그건 무슨 말씀인지?》

젠킨스의 구레나릇이 정일권의 귀를 간지럽혔다.

지독한 술내가 코를 찌른다.

《당신은 인차 국군2군단장으로 임명될거요. 이제 얼마 안남았소. 사단장 석달에 부군단장 석달, 군단장도 석달일거요. 그 다음은…》

정일권은 가슴이 후두두 떨려왔다.

한순간이 지나자 미심쩍은 눈길을 들었다.

《각하는 또 나를 상대로 새로운 유모아를 창조하는겁니까?》

《하하하. 정, 명석한 당신도 이번엔 틀렸소. 이건 말이요. 당신이 웨스트포인트를 수석으로 졸업하고 귀국했을 때 릿지웨이대장과 리승만박사가 밀담한 내용이요. A급정보요.

한번 지금까지의 진급행정을 돌이켜보오.》

정일권은 활짝 웃고있는 젠킨스중장을 멍하니 마주보며 생각을 굴렸다.

그것은 사실이였다. 사단장을 꼭 석달 한셈이다.

그렇다면?…

다시 가슴이 울렁거리고 숨결이 가빠진다.

젠킨스는 아리숭한 미소를 던지며 그의 등을 두드렸다.

《정, 이 늙은 로병을 잊으면 안돼.

전쟁이 끝난 뒤 소박한 로병이 고향도시에 빈 트렁크를 들고가게만 하지 말아주. 당신이야 부유한 출신이 아니요.》

정일권은 그를 친근하게 바라보며 감개무량해했다.

《각하, 우리의 전투적우의야 어디 가겠습니까.》

《좋아, 좋아. 이 로병이 군과 정계엔 선이 강해. 그런 정보가 어디서 내 손에 들어왔겠소.》

포천의 동북쪽 장암에 있는 군단지휘부에 도착하여 두 대장이 오찬회장으로 들어갔을 때 몸이 비대한 미군대좌가 젠킨스에게 급히 다가왔다.

《사령관각하, 지금 8군보도처 장교와 함께 기자들이 물밀듯이 달려들었습니다.》

《콜참모, 사령관각하의 래방은 비공식적인 성격을 띠고있소. 무조건 돌려보내시오.》

대좌는 난색을 지었다.

《각하, 좀 곤난할것 같습니다. 일행에는 백악관 출입기자들도 끼여있고 크레믈리와 연줄이 있는 영국기자도 있습니다.》

젠킨스는 급히 오찬회장으로 들어갔다가 긴장한 눈길로 정일권을 찾았다.

《부사령관, 아무래도 당신이 내려가 기자제씨들을 진정시켜야겠소… 릿지웨이사령관각하의 지시요. 이런 땐 영어를 아는 당신을 우리 군단에 둔것이 다행스럽거든. 아마 정전담판문제를 가지고 소동을 일으킬거요.》

대좌의 뒤를 따라 지휘부청사앞의 철조망을 친 출입구에 이르자 전선지역으로 힘들게 뚫고 들어온 기자들이 저마끔 항의를 들이댔다.

갈색머리의 눈매가 날카로운 기자가 마이크를 들이대며 육박해왔다.

《정장군, 난 영국특파기자 웨닝톤입니다.

우선 〈유엔〉군사령부가 우리 보도단의 입국을 이틀간이나 불허한데 대하여 항의합니다.》

《…》

정일권이 웨닝톤을 무시하고 돌아서자 촬영기를 멘 아시아계인이 서둘러 다가섰다.

《홍콩〈대공보〉특파원 주계평입니다.

미극동군사령관의 전격적인 전선시찰은 분명 〈철의 삼각지대〉를 겨냥했는데 정전담판과의 관계속에 그 군사적배경을 설명해주십시오.》

《당신은 정전담판이 군사분계선문제와 포로송환원칙에 대한 인민군측의 불허로 지연되고있는 사실을 외면하는거요?

릿지웨이각하의 전선시찰은 군업무를 위한 일반적인 성격을 띠고있습니다.》

《릿지웨이각하는 왜 보도계를 피합니까. 그는 지금도 전방지휘소에 있는가요?》

한 기자가 질문하자 정일권은 말문이 막히고말았다.

곁에 장승처럼 서있던 콜대좌가 의심쩍은 시선을 던졌다.

지금쯤 릿지웨이는 밴플리트와 함께 오찬회장에서 육감적인 몸매의 베키양이 부어주는 꼬냐크를 마시며 전선시찰의 피로를 풀 것이다.

정일권이 음울하게 기자들을 둘러보았다.

《각하는 지금 오찬석상에 있소.》

기자들의 폭탄질문에 진땀을 뺀 정일권이 겨우 풀려나 돌아서려는데 불쑥 장발을 한 묘령의 녀기자가 앞을 막아섰다.

《안녕하세요? 중장님!》

정일권은 주춤 굳어져 눈을 치떴다.

《아니, 이게 리지아부인이 아니요?》

《뉴욕에서 지난해 만난 후 처음이군요.

중장님이 미군장령으로 승진하여 미9군단에서 중추역할을 한다는 소식 프란체스카사모님에게서 들었어요.》

정일권은 그 말에 얼굴이 벌개져서 리자아의 청초한 모습을 홀린듯이 마주보았다.

《뉴욕타임스》지 사회부기자인 리지아는 정일권이 미국류학시기 사귄 조선계 미국시민이다.

하버드출신으로 지성이 있는 녀성인데 남편은 명문가태생의 워싱톤변호사협회 중심인물이고 신문편집장이다.

들리는 말에 의하면 리승만《대통령》의 부인이 리지아의 교모라고 한다.

《그런데 어떻게?…》

《저 역시 전선종군기자니까요. 사실은 중장님께 부탁드릴 일이 있어서…》

《말하오. 부인의 명령이라면야…》

《젠킨스중장을 시중드는 녀장교가 있지요?》

리지아는 새물새물 웃으며 눈을 반짝였다.

《아, 마거래트 베키양!》

《저의 동생벌인데 좀 만났으면 해서요.》

《알겠소. 기다리오…

내 대구에 나가면 숙소를 찾겠소.》

《감사해요. 전 대통령관저에 려장을 풀었어요.》

그것은 대단히 의미심장한 일이다.

대통령을 개인적으로 만날수 있는 기회가 생긴데다 어쩌면 특별보좌관격인 프란체스카부인과 유익한 한담을 나눌수 있을지도 모른다.

워싱톤과 도꾜의 명문가에 뿌리가 든든한 리지아 역시 정일권에 대해서는 각별한 호의를 베풀고있는터였다.

정일권이 기자들과 헤여져 부지런히 사령부쪽으로 가는데 젠킨스중장이 서둘러 마주왔다.

《정중장, 오찬석상에서 각하가 당신을 찾고있소. 이건 흔치 않은 일이요.》

오찬회장에 들어서니 이미 아이크2세는 빠지고 조카소식과 주독에 얼굴이 벌개진 밴플리트와 술을 조금밖에 안마신듯 낯빛이 그냥 퍼릿퍼릿한 릿지웨이가 무심한 눈길을 들었다.

정일권이 기자들과의 인터뷰내용을 간단히 말하려 하자 릿지웨이는 귀찮다는듯 한손을 내저었다.

《정중장, 앉소. 당신은 지금 미군장령이지만 한국군을 대표하고있소. 당신의 군사적직무에 파동이 많다는걸 난 알고있소. 한때는 군참모총장에 미8군부사령관까지 력임했었는데… 불만가질건 없소. 지금은 야전경험이 필요한 때요.

한국군에서 크게 기대를 걸 인물은 당신뿐이라고 하오. 그러니 당신의 사명과 임무가 더욱 커진셈이지. 앞으로 진행될 〈서조선만작전〉에서도 그래. 그 작전에서 성공하자면 적을 계속 여기 〈철의 삼각지점〉과 전선동부에 비끄러매둬야 하는데 그런 면에서 나는 미군보다 당신네 한국군을 믿소. 산악전에서는 한국군이 미군보다 월등하거든. 당신을 믿겠소. 난 긴 말을 좋아하지 않소. 한잔 드오.》

정일권은 릿지웨이가 부어주는 위스키잔을 들었다. 탄 목으로 흘러드는것이 뜨거운 액체뿐이였는가. 그것은 위스키만이 아니였다. 무엇인가 가슴을 치는것이, 그의 정신을 취하게 하는것이 눈물겹게 흘러들고있었다.

그래 강대한 나라 미국, 이들이 아니였다면 전쟁초기 파죽지세로 밀려오는 북조선군을 누가 막아나설수 있었겠는가. 자유세계의 수호를 위하여, 힘이 약하여 하늘을 우러르며 구원을 청하는 불우한 인생들을 위하여 그들은 이 땅에 피를 뿌리고 유골을 묻고있지.

신의 나라 사도들이 몰고 온 비행기와 땅크들이 없다면 이 땅은 순간에 붉은 세계로 될것이다.

미워도 고와도 우리는 이 강력한 철가면의 품안에서 업수임을 받아도, 때로 어쩔수 없는 피해와 민족적수모를 당해도 큰것을 위해 작은것을 희생하는 억하심정으로, 불교승의 인의정신으로 이 가혹한 재난의 시대를 지내보내야 할 숙명을 지녔다. 나 개인적으로 놓고보아도 수난많은 민족의 일원으로서 나라를 위해 사나이 한번 세상에 태여나 개국공신은 못되여도 후세에 이름을 더럽히지 않게 우국충정을 바쳐야 하지 않겠는가.

정일권은 비로소 멀던 마음이 가까와지고 안식의 그림자가 깃들고 그토록 경원하던 이 미군장령이 낯설지 않고 친근하게, 고마웁게 느껴지는것을 온몸으로 절감했다.

그는 이것이 결코 자존심을 헤집는 사대로, 추종으로 생각되지 않았다. 이 나라와 겨레의 앞날을 위하여 자기가 결코 무시할수 없는 군의 중추로 등장한다면 력사는 박수를 보낼것이다.

개인적으로 놓고보아도 전쟁은 군인에게 있어서 립신양명의 절호의 기회이며 《장원급제》의 지름길이 아닐수 없다.

신라의 마지막 경순왕도 결국은 어쩔수 없는 력사의 추이를 따라 30리 행렬을 짓고 스스로 고려왕궁을 찾아가 인장을 바치고 왕건의 막내사위가 되지 않았는가. 영웅호걸이라고 세상을 굽어보던 견훤마저 그 길을 아니걸을수 없었다.

요컨대 인간이란 자기보다 거대한 존재, 물리적이든 정신적이든 보호와 의지의 기둥에 머리를 숙이고 매달리기마련이며 정의와 륜리, 진리는 이 기둥을 떠나 서식하지 못한다.

하물며 달처럼 차면 기울고 구름처럼 모이면 쏟아지는것이 세상리치일진대 운명의 주인공, 력사의 풍운의 사나이는 때를 놓치지 말고 바람새를 잘 보고 닻을 올려야 하며 앉아서 행운을 기다릴것이 아니라 가속도로 쫓아가 든든히 움켜쥐여야 하는것이다.

정일권은 지금 자기가 무엇을 그리도 간절히, 안타까이 갈구하고 변호하는지 짧은 상념의 세계를 헤매면 헤맬수록 더욱 오리무중에 빠져드는것을 쓰겁게 감수하고있었다.

오찬회장을 나설 때 정일권은 문득 새삼스레 너무나도 명백한것을 깨달았다.

그것은 자기의 앞길에 보라빛채운이 뽀얗게 드리웠다는 다행하고도 현실적인 인식이였다.

(릿지웨이, 이자는 바로 철가면을 쓴 영국신사처럼 속을 감추고있지만 크게 일어설수 있는 야망과 지략이 엿보인다. 결코 운명에 순응할 인간이 아니야. 저 눈빛만 봐도 알수 있어. 아직도 큰 영향력을 행사하게 될것이다. 서조선만작전이라…)

《베키양, 리지아부인이 당신을 찾아왔소.》

오찬회장입구에서 정일권은 활기에 넘쳐 에쓰자형의 몸을 흔들며 지나가는 베키양의 옆구리를 슬쩍 건드렸다.

《네? 리지아부인?…》

마거래트 베키의 얼굴이 갑자기 해쓱해지더니 한동안이 지나서야 비로소 퍼릿퍼릿한 눈가에 례의 그 발그레한 생기가 도는것이였다.

 

×

 

종군작가일행은 회양군 내금강의 상순갑리에 있는 전선사령부에 도착하자 자기들과 함께 동행한 전무성과 헤여지게 되였다.

《이거 섭섭하구만. 군관동무, 왔던 일은 다 봤다지. 군단에 돌아가면 박정덕군단장동지에게 전해주오. 전선군인들을 위해서 좋은 작품을 꼭 쓰겠다고. 그리고 가만, 이름이 뭐드라? 우리가 떠날 때 도중식사를 싸준 녀성중위말이요. 그 처녀통신군관동무에게 꼭 인사를 전해주시오.》

체통이 크고 틀진 심봉운이 일행을 대표하듯 전무성소좌의 앞을 막아서서 사설을 늘어놓았다.

전무성은 처녀통신군관소리에 얼굴이 저으기 검붉어져가지고 눈길을 내리깔았다.

윤애사가 따뜻한 손으로 키꼴이 빠지고 이목이 그쯘한 젊은 소좌의 집게같은 손을 잡아흔들었다.

《그래주세요. 그 김인정언니에게 우리 인사를 전갈해주세요.》

《알았습니다.》

전무성의 대답은 다소 뚝하게 들렸다.

《그리고 말이예요. 군단장동지에게…》

《됐소. 애사동무, 무슨 작별인사가 그리 기오.…》

전선사령부 정문쪽에서 위장망을 친 수송차가 성급하게 경적소리를 울리자 전무성은 손목시계를 들여다보았고 심봉운은 아쉬운듯 손을 홱 내저었다.

전무성은 몇걸음 걷다가 얼핏 돌아서서 손을 흔드는 일행을 다시한번 쳐다보더니 급히 수송차쪽으로 뛰여갔다.

윤애사는 수송차가 멀리 사라질 때까지 그냥 손을 저었다.

전선사령부 군사위원 김익 장령이 직접 그들을 방에 불러들여 일일이 손을 잡아흔들었다.

키가 작달막하고 대신 체통이 다부진 장령은 몸에 비해 목소리가 어찌 우렁찬지 방안이 드릉드릉 울려 윤애사는 속이 한줌만 해졌다. 그 녀자는 심봉운뒤에 자꾸 몸을 숨기려 들었다.

《혁명전쟁은 하나의 예술이요. 쏘쓰따꼬위츠의 교향곡1번을 생각해보오. 전쟁이 인류문명의 대작을 낳았거든. 우리 전사들에게는 그런 레알리즘적대작이 필요하오.》

김익은 체격이 거쿨진 심봉운앞에 다가서서 고개를 쳐들고 허리에 손을 얹었다.

《오, 동무가 〈자동차운전사의 노래〉를 썼지?》

《예, 저의 가사입니다.》

《우리 전선운전사들이 아주 좋아하는 노래요. 걸작이야, 걸작!》

김익은 얼굴이 벌개진 심봉운의 어깨를 탕탕 두드렸다.

윤애사는 어쩐지 키가 머리 하나는 더 솟은 심봉운보다 전선군사위원이 오히려 커보이는것이 이상했다.

《류경수군단장이 동무들을 눈이 빠지게 기다리오. 최고사령관동지께 직접 전화까지 걸었댔다오. 젊은 장령이니 예술이라면 오금을 못쓰거든. 가만 이 녀성동문 처음본다? 윤애사, 녀류종군작가라… 아주 랑만적이요. 무슨 작품을 썼소?》

《전 아직…》

윤애사는 얼굴이 활딱 붉어져가지고 한걸음 뒤로 물러섰다.

전선군사위원은 너그럽게 머리를 끄덕이고나서 박한주곁에 서있는 체소한 사람에게로 돌아섰다.

《동문 누구더라?》

《석강하라고 합니다.》

《석강하?…》

《…》

석강하가 우울한 표정으로 눈을 내리깔자 김익은 대뜸 몸을 제끼고 두팔을 엇결고 서서 그의 아래우를 훑어보았다.

《동무였댔구만. 〈섬멸의 길로〉! 여보, 그 노래때문에 나도 어지간히 골치가 아팠소. 심봉운동무, 동문 어떻게 생각하나?》

《군사위원동지, 그 노래가 비록 좀 말을 들었지만 몇군데를 바로 잡아놓았더니 전선병사들속에서 보급속도가 정말 대단했습니다. 그리고…》

심봉운이 내친김에 《섬멸의 길로》에 대한 자기의 견해를 거들려하자 김익은 한손을 홱 내저으며 눌러버렸다.

《여보, 바로 그게 문제란 말이야. 전쟁은 곧 생사를 판가름하는건데 전호에 선 병사들에게 뭘 주자는건가? 혁명의 씨뚜아찌야가 절정에 이를 때 우리의 선동, 아니 예술은 혁신적이고 전투적이고 원칙적이여야 하는거요.

석강하동무, 찍어말하면 동문 전형화에서 탈선했단 말이요. 난 일부 사람들의 가혹한 의견처럼 염전적이라고까지는 하지 않겠소. 엥겔스동무는 일찌기 우리들에게 전형적환경에서의 전형적성격을 제기했소. 내 말을 알겠소? 석강하동무!》

《가르쳐주어 감사합니다.》

석강하가 다소 큰소리로 툭 쏘듯 대답하자 김익은 그의 등을 두드리며 걸걸하게 말했다.

《됐소, 됐소. 73군단에 가서 전사들을 만나보우. 도움이 될거요. 지난주에 71군단과 72군단에도 종군작가들이 더러 나갔는데 반영이 대단해. 황건, 박세영… 또 누구드라? 응, 김사량, 안룡만…》

군사위원은 전화통을 들고 한참 뭐라뭐라하더니 종군작가들에게 저녁녘에 73군단으로 직행하는 차편을 리용하라고 권고했다. 그러나 윤애사가 우기고 기분이 여지없이 처진 석강하가 지원포를 쏴서 결국 일행은 저녁까지 기다릴것없이 인차 걸어서 떠나기로 하였다.

무장이 없는 그들을 념려하여 김익이 전선쪽으로 가는 병사 2명을 붙여주었다. 련합사령부 소속 중국인민지원군 련락병 한명이 함께 떠났다.

련락을 왔댔다는 중국인민지원군병사는 스물을 갓 넘겼을 순박한 인상의 청년이였다.

해방직후 쏘련군사대표단을 따라다니며 로씨아어를 비롯한 외국어에 정통했다고 하는 심봉운이 먼저 나서서 깍듯이 인사하는 지원군병사를 얼싸안고 의사를 소통하려고 한참 애를 썼으나 그의 동북지방 얼치기 뜯개말이 통할리가 없었다.

지원군병사는 류다른 행장의 거쿨진 심봉운을 올려다보며 싱긋싱긋 웃기만 했다.

보다못해 소심한 성격인 박한주가 나서자 심봉운은 제풀에 어색해서 물러났다.

《병사동무, 우린 최전선으로 가는 종군작가일행이요. 그래 어디까지 가오?》

동북에서 어린시절을 보낸 박한주가 류창한 중어로 묻자 지원군병사는 반색을 하였다.

《예, 전 함께 도하장까지 가면 됩니다. 거기서 상감령에 있는 우리 부대로 가는 우편차가 절 기다리고있습니다. 련합사령부에 보내는 문건때문에 지휘원동지와 함께 왔댔습니다.》

《오ㅡ오성산쪽으로! 난 박한주라고 부르오.》

《전 황계광이라고 합니다.》

황계광은 명랑한 미소를 지으며 시무룩해진 심봉운과 찬 기운에 얼굴이 발깃해진 윤애사를 돌아보았다.

일행이 박앗소대근처에 이른것은 한낮이 기운 때였다.

여기서부터 길은 좀 복잡해진다.

이곳까지는 경사가 느리지만 이제부터는 구배가 심한 내리막길이요, 수송로를 차단하려는 적의 포사격이 검질긴 로정이다.

일행은 큰 바위밑에서 간소한 식사를 마치고 휴식하였다.

두눈을 깜박이며 윤애사의 옆모습을 이윽히 지켜보던 황계광이 그의 귀에 대고 조용히 속삭였다.

《애사동지! 힘들지 않아요?》

《아니?! 계광동문 조선말을 알고있었군요. 어쩐지 난 처음부터 짐작이 갔어요.》

황계광은 윤애사의 말에 피식 웃었다.

《우리 중대장동지가 대주었어요. 복건성전투때까지 조선인부대에서 분대장을 했답니다. 서당개 삼년이면 풍월 읊는다지 않아요. 하지만 난 아직 설어요.》

《호호호, 저 시인선생들이 이걸 알면 기절초풍할거예요. 황계광동무, 내 저분들을 소개해주지요. 저 체통이 큰 사람이 유명한 〈전호속의 나의 노래〉를 창작한 시인이고 그 옆이 지금도 일부 사람들이 말밥에 올리는 〈섬멸의 길로〉기사를 쓴분이예요.》

《그래요? 얼마전에 우리 중대장동지가 린접한 인민군부대에 갔다가 리수복영웅의 시와 그 노랠 배워왔는데 우리 전사들의 심금을 울렸어요. 참 좋은 노래인데… 그 원쑤의 불구멍 몸으로 막은…》

황계광이 가볍게 흥얼거리자 석강하가 예민하게 홱 얼굴을 돌렸다. 그 바람에 두사람은 목을 쑥 움츠렸다.

윤애사는 고개를 살래살래 흔들며 생각깊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지원군동무들도 그 노랠 알고있군요.》

윤애사는 문득 얼굴이 굳어져가지고 석강하쪽을 할끔할끔 바라보며 한숨을 푹 내쉬였다.

전선군사위원에게서까지 말을 들은 석강하에게는 지금 이 노래가 몹시도 지겨울것이다.

1950년 12월 석강하는 불비 쏟아지는 양구계선에서 진격하는 인민군전사들과 함께 여러 전투들에 참가하여 강한 충격을 받았다.

그때 적들은 아군의 진격을 막아보려고 양구서남쪽 요충지들에 견고한 화점들을 설치하고 필사적으로 저항해나섰다.

그는 총폭탄이 작렬하는 속에서 적진을 향해 내닫던 김창걸소대장이 원쑤의 불구멍을 몸으로 막아 부대의 진격로를 열어나가는 모습을 보면서, 쓰러진 전우의 원한을 씻으러 총창을 비껴들고 공화국기를 휘날리며 육박의 길로 내닫는 병사들의 불굴의 모습을 보면서 가사 《섬멸의 길로》를 창작하였다. 여기에 작곡가 김옥성이 곡을 달았다.

그런데 창작된 노래를 작품합평회에 내놓았을 때 전투성이 부족하고 지나치게 비장성에만 치우쳤다는 의견들이 제기되였다.

기본문제는 작곡가가 적의 화구를 막은 영웅전사의 희생을 두고 비분의 감정만 앞세우다나니 비장한 음악양상의 틀에서 벗어나지 못한것이였다.

그래서 몇달을 모대기다가 지난해 7월에 가사와 곡이 다시 씌여져 세상에 나오게 되였다.

가요는 전사들속에서 폭풍같은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그 보급속도는 실로 놀랄만 한것이였다.

삽시에 군단들과 사단들, 비행대와 함선의 병사들이 그 노래를 애창하게 되였다.

그런데 그때까지도 전선사령부 김익군사위원같은 총정치국의 일부 사람들은 노래가 너무 비장하고 어두운 색채를 띠므로 전사들의 정신상태에 좋지 못한 영향을 끼친다고 하면서 보급을 중지하자고까지 제기했다.

그바람에 지난해말에는 석강하가 비판무대에까지 올랐었다.

그때 일부 목청이 높은 사람들은 아예 이 노래를 반동작품으로까지 락인찍었다.

작가대렬에 갓들어선 윤애사는 연탁앞에 나가 비판을 받는 석강하의 후줄근한 모습을 보면서 입술을 깨물었다.

(왜 반동작품인가. 전사들은 그 노래를 부르며 수령만세를 부르며 죽음을 맞받아나가지 않았던가. 심동지도 언젠가 말했지. 노래란 단순히 오선지나 축음기에 올라 전해지는게 아니라고…

그건 사람들의 심장에 간직되는거야.

그건 불사를수도 쉽게 빼앗을수도 없어…)

멀리 매석산이 바라보이는 지경동기슭에 들어서자 미제침략군의 폭격이 심해졌다.

인민군보급로를 항시적으로 차단할데 대한 임무를 받은 적폭격기떼는 거의 하늘을 비울새 없이 들이닥쳐 눈먼 폭탄을 마구 뿌려던졌다.

도하장을 가까이 할무렵이였다.

언덕을 넘어서는 순간 불시에 나타난 적폭격기편대들이 급강하하여 기총탄을 퍼붓고 줄폭탄을 쏟았다.

언덕자드락에는 삽시에 불연기가 타번지고 시커먼 흙기둥이 일어섰다. 백설이 녹아내리고 대지가 진동하였다. 매캐한 연기에 속이 메슥메슥하고 눈이 따가왔다.

윤애사는 귀청을 찢는 폭음에 두손으로 량귀를 감싸쥔채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리도 짙푸르던 하늘은 누런 흙먼지와 포연에 가리워 컴컴해졌는데 그 검은 하늘에 해무리진 태양이 짓붉게 떠있었다.

윤애사는 그 재빛하늘의 검붉은 태양을 쳐다보았다.

그찰나 둔중한 폭음과 함께 거대한 흙의 노도가 담벽처럼 일어섰다. 드세찬 폭풍에 온몸이 공중으로 떠오르고 흙비가 줄기차게 쏟아져내렸다.

순간이 지나자 곁에서들 찾는 소리가 들렸다.

《애사동무! 애사ㅡ》

누군가 다가와 그의 등을 흔들었다.

윤애사는 자기를 내려다보는 심봉운과 석강하의 걱정어린 얼굴을 알아보았다.

황계광이 곁에 와 윤애사의 어깨와 잔등의 흙을 털어주었다.

윤애사는 웃고있었다.

군복팔소매가 너덜너덜해진 심봉운이 걱정어린 눈으로 윤애사를 내려다보며 물었다.

《다친데 없소?》

《없잖구요.》

《허허 참… 옳소! 시인은 그런 눈먼 폭탄에 쉽게 죽는게 아니지. 일어서오. 어서 갑시다. 》

《심형이 그 말 한마디는 잘했소!》

석강하도 미더운 눈으로 윤애사를 내려다보며 느슨하게 웃었다.

도하장입구에서 종군작가일행을 향해 한 녀성군인이 달려왔다.

위장망을 친 군복에 교통안전완장을 두른 키가 호리호리한 녀성군인이였다. 볕에 탄 가무스레한 얼굴에서 새별눈이 반짝거린다.

녀성군인은 체통이 크고 틀진 심봉운앞으로 거침없이 다가왔다.

《안녕하십니까? 전 김상금이라고 합니다. 평양에서 오시는 종군작가선생님들이지요?》

《그렇소, 처녀동무, 용케 알아봤구만.》

심봉운의 점잖은 대답에 그는 새물새물 웃으며 뒤를 돌아보았다.

《저기 73군단에서 온 련락병동무가 아침부터 종군작가선생님들을 기다리고있습니다.》

《?!…》

일행의 눈길이 도하장입구의 엄페호곁에 서있는 젊은 군인에게로 쏠렸다.

색바랜 솜군복을 입은 애티나는 군인이 반가운 기색으로 절도있게 걸어왔다.

《전 대대장련락병 박원진입니다.

군단장동지의 전화를 받고 온 대대가 작가동지들을 기다리고있습니다.》

황계광또래의 애어린 전사는 명민해보이는 눈을 반짝이며 밝게 웃었다.

심봉운이 앞에 나서서 나어린 전사의 두손을 잡고 흔들었다.

《오, 내가 심봉운이요.

종군작가들을 대표하여 전투적인 인사를 보냅니다.》

박원진은 종군작가들에게 일일이 인사했다.

황계광이 윤애사의 손을 잡고 머뭇거리더니 군복 웃주머니에서 자그마한 수첩을 꺼내들었다.

《애사동지, 전 여기서 서쪽으로 가야 합니다. 헤여지기전에 여기다 글을 몇자 써주십시오.

아니, 저… 그보다도 유명한 리수복영웅의 시를 써주세요.》

윤애사는 황급히 뒤졌으나 폭풍에 군복웃주머니에 끼웠던 만년필이 어데론가 달아나버렸다.

목이 빠지고 눈이 반짝이는 박원진전사가 싱긋거리며 검은색 만년필을 꺼냈다.

《작가동지, 여기 있습니다.》

 윤애사는 만년필을 받아쥐였다가 도로 내밀었다.

《전사동무, 리수복영웅의 시를 동무가 써주세요.》

《아닙니다. 전 악필입니다.》

《그래도 지원군병사에게 인민군병사가 써주는게 의의가 있지요.》

《옳소. 아주 전투적이고 랑만적인 제의요!》

심봉운이 곁에서 큰머리를 끄덕이였다.

박원진은 또 싱긋 웃더니 황계광의 수첩을 넘겨받았다.

소학교학생의 글씨같은 약간 비뚤싸한 큼직큼직한 글자들이 수첩장을 가득 채웠다.

 

나는 해방된 조선의 청년이다

생명도 귀중하다

찬란한 래일의 희망도 귀중하다

그러나 나의 생명, 나의 희망, 나의 행복-

그것은 조국의 운명보다 귀중치 않다

하나밖에 없는 조국을 위하여

둘도 없는 목숨이지만

나의 청춘을 바치는것처럼

그렇게 고귀한 생명

아름다운 희망

위대한 행복이

또 어디 있으랴!

 

가다가는 돌아서고 또 뒤돌아보며 손을 흔드는 황계광을 아쉬운 눈으로 바래주던 윤애사는 누군가의 지꿎은 눈길에 황급히 얼굴을 돌렸다.

박원진은 윤애사의 눈길을 받자 가볍게 얼굴을 붉히며 군모에 손을 가져갔다.

박원진은 한참 걸음을 옮기다가 슬쩍 윤애사를 돌아보았다. 그는 무엇인가를 주저하는듯 머뭇거린다.

촉감이 빠른 윤애사가 눈에 미소를 담았다.

《왜 그러세요? 원진동무.》

《작가동지, 이자 그 리수복영웅의 시말입니다.

우리 조순근부분대장동지가 뭐랬는지 압니까? 그런 위훈을 세우는것도, 불멸의 시를 짓는것도 다 이를테면… 특출한 인간만이 할수 있다나요.》

《그래 원진동문 어떻게 생각해요?》

윤애사는 진중한 눈길로 박원진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박원진은 천천히 도리머리를 했다.

《모르겠습니다. 우리 군단장동지는 최고사령관동지를 따르는 군인들은 모두가 리수복과 같은 영웅이 될수 있다고 말하군 하지만 나같은 애숭이야 무슨… 난 아직 민청원입니다.》

《리수복영웅도 민청원이 아니였던가요?》

《그래두…》

《나도 민청원작가예요. 민청원, 이게 얼마나 힘차고 억세고 자랑스러운 부름이예요. 원진동무, 용기를 내세요.

동무의 빛나는 눈은 큰 희망과 포부를 내뿜고있어요!》

윤애사는 사내처럼 박원진의 어깨를 툭 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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