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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소설 50년 여름 제10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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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강산
댓글 1건 조회 10,247회 작성일 20-02-09 1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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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jpg

 10 장

 

의정부의 전방지휘소는 이전 북조선파견 괴뢰첩보원들의 소굴이였던 《리재민수용소》라 이름붙인 바라크식건물에 자리잡고있었다. 최용건은 두명의 호위군관이 따르는속에 파아란 풀이 수북이 돋은 길로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마지막 보초선입니다. 돌아가야겠습니다.》

누군가의 말에 그는 걸음을 멈추었다. 비구름이 드리운 도봉산너머에서는 포소리가 울려오고 이따금 저격무기의 총성이 울려왔다.

《저 총소리는 뭐요?》

최용건이 산쪽에서 시선을 떼지 않은채 묻자 아까의 목소리가 대답하였다.

《저 산뒤에 패잔병들의 일부가 남았습니다. 방금전 땅크 한대에 보병소대를 태워보냈습니다.》

최용건이 여기에 도착한것은 새벽녘이였다.

강건은 무선통신실에서 도꾜방송을 듣고있던 중에 최용건을 맞았다. 도꾜의 시사방송으로 소개되는 맥아더사령부 출입기자의《토핑뉴쓰》는 이미 정찰국통보에 지적된 미국의 무력간섭을 다시금 확인하는 내용이였다.

《북조선공산군의 파죽지세와 같은 공격에 대처하여 <자유애호국가>들은 일치한 보조로 적극적인 견제행동에 들어설것이다. 관측은 수일내로 <유엔군>의 조선전선파견이 실시될것을 예측하고있다… 유엔의 <결정>에 고무된 <한국>군은 맹렬한 기세로 공산군을 핍박하며 급속한 진공을 개시하고있다. 맥아더사령부 작전국 모씨의 말에 의하면 서울은 <수도>로서 무조건 사수될것이라고 한다…》

《좀전에는 유엔안보<결정>을 발표했는데 그때도 무슨 <유엔군>소리를 떠들고있었습니다.》

최용건은 치받치는 격분을 주체할수 없었다. 미군참전이라는 사변은 구름장뒤에 숨겨진 뢰우처럼 그에게 안겨들었다. 그럴 때 김일성동지로부터 급변하는 정세에 대처하여 서울해방을 다그칠데 대한 무선명령문이 도착하였다.

최용건은 그 즉시 모든 서울타격부대들에 공격을 다그칠데 대한 명령을 하달하고 작전회의를 소집하였다. 회의에서는 공격시간을 앞당길 방법을 토론했으나 신통한 해결책을 얻지 못하였다. 춘천과 림진강쪽에서 지체된 52사와 56사가 아직까지 계획된 계선에 이르지 못했기때문이였다.

최현이 직접 이끌고 나온다는 한개 련대라도 서울측방에 붙는다면 앞당겨볼수 있겠으나 그것 역시 두고봐야 할 일이였다. 결국 최현부대를 비롯한 보조타격부대들의 진출속도를 높여 최대한 서울공격을 앞당기겠다는 일반적인 보고밖에 올릴수 없었다.

최용건에게는 이것이 매우 가슴답답하면서 괴로운 일이였다. 강건과 마주앉아 계속 토론을 벌렸으나 뾰족한 수가 나오지 않았다. 강건은 안타까운 나머지 류경수가 제기한 안이라고 하면서 땅크의 정면공격으로 해보자는 안을 제기했다. 최용건은 하나밖에 없는 땅크려단을 그런 《모험》에 투입할수 없다고 생각했다. 다섯개나 되는 적사단이 틀고앉아있는 서울이였기때문이였다. 토론할수록 난관만이 제기되였다. 갈수록 머리가 무거워지고 포화상태에 빠진듯한 심정이였다. 하여 그는 맑은 공기라도 마시면서 어떤 묘안을 찾고싶어 이처럼 밖으로 나온것이다.

(최현만이라도 오늘래일 나와준다면.)

최용건의 생각은 여기서 줄곧 맴돌이쳤다.…

그가 되돌아서 몇걸음 옮기는데 부관이 풀숲을 꿰질러 곧장 달려와 숨도 못잦힌채 황급히 보고했다.

《보위상동지. 52사에서 련락군관이 도착했습니다.》

《최현한테서?!》

《네, 최현사단장동지가 보냈습니다.》

최용건의 눈빛이 번쩍했다. 그는 무엇에 턱 떠밀치운듯 걸음을 떼였다.

《그런데 련락군관동무는 오는 도중 52사와 53사의 린접계선인 바람재에서 적들과 부딪쳤습니다.》

마당가의 오동나무밑에는 한필의 말이 거품을 문채 서있었고 이미 숨이 진듯 한 전사를 몇명의 군인이 맞들어가고있었다.

최용건은 잠시 걸음을 멈추었다가 그냥 강건의 방으로 들어갔다. 지금의 그에게는 한초가 급했다. 강건앞에 서있던 군관이 문소리에 홱 돌아섰다.

최용건은 알기도 하고 모를듯도 한 군관의 얼굴을 잠시 눈줘보았다. 눈에는 초점이 명백치 않았다. 땀에 절어 거밋하게 보이는 가슴앞자락엔 피자욱이 둥글게 나있었다. 강건이 먼저 52사와 53사사이로 들어오는 적에 대하여 한개 대대를 출동시켰음을 보고했다.

《보고서는 어데 있소?》

최용건은 누구에게라 없이 물었다.

《구두로 전달하라고 하였습니다.》

군관이 대답했다.

《어데서 떠났소?》

《홍천강 좌표 20, 23지점입니다.》

《보고하오.》

《복창하겠습니다.》

림운학은 혀로 입술을 감빨며 한 단어라도 틀릴세라 외웠다.

《…포화력기재로 증강된 서울포위부대는 좌표 20, 23지점에서 적의 항공습격을 받았음.》

최용건은 확대경을 들고 지도를 살펴보다가 그의 보고가 끝나기 바쁘게 물었다.

《동무도 폭격현장에 있었소?》

《네.》

《실태그대로 말해보오.》

운학은 최용건의 관자소리에 바줄같은 혈관이 살아오르는것을 두렵게 보며 춘천으로부터 가평까지의 려정과 불의에 나타난 대폭격기편대의 폭격에 대하여 자초지종 설명하였다.

《최현동무한테서 다른 말은 없었소?》

《없었습니다. 다만 사단장동진 <나의 결심은 변함없음>이라고 강조해 말했습니다.》

《알겠소. 가서 식사를 하오.》

《방금전에 정찰부장동무가 서울시방어략도를 가져왔습니다.》

운학이가 나가자 강건이 기다렸던듯 재빨리 말하며 책상서랍에서 접이지도 한장을 꺼내 펼쳤다. 그러나 최용건은 운학이가 사라진 문쪽에 시선을 준채 움직이지 않았다.

(최현은 포위속에 들어가 지리멸렬될수 있다. 이것은 작전전반에 위기가 조성되였음을 말한다. 그런데 저 련락군관의 보고를 어느 정도 믿어야 하는가?)

《저 동무의 보고가 백프로 사실일가?》

그는 자기 생각을 입밖에 드러내고말았다. 강건은 꼭 닫겨진 문을 일별하고 말했다.

《제가 알고있는 동무입니다. 저 동무가 23일 38경비대에 가겠다고 최현동무한테 부탁하고…》

《그런데- 최현동무의 보고에서 <나의 결심은 변함없음>이란 무엇을 의미하오?》

《그건 초기계획에 예견된 작전날자입니다. 그 동문 장군님께서 주신 작전지도에 밝혀진 27일이라는 수자를 서울까지 가야 할 자기의 작전날자로 결심하였습니다. 그가 <나의 결심>이라고 한것은 곧 장군님의 결심입니다.》

《그러니 동문 그가 오늘안으로 서울아근에 당도하리라고 보오?》

《전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러나 보고에도 밝혀진것처럼 도하기재가 없는 형편이라 경보병으로 유격전식으로 접근할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의 심정은 리해되오.》

최용건은 수면부족으로 피가 진 눈을 비비고 정찰부장이 가져온 서울시방어략도를 끄당겼다.

서울시의 외곽방어는 동북쪽으로는 괴뢰 2보사, 3보사, 7보사였고 서북쪽으로는 괴뢰 1보사와 수도사단 5보사로 형성되여있었다. 적의 이 반원형방어선도 점차 서북쪽으로 가드라들면서 종심방어로 넘어가 서울시가까지 여러겹의 참호로 둘러쳤고 시내입구의 도로는 물론 시내 골목마다 바리케트를 구축하였고 건물과 목책은 영구화점으로 되여있었다.

《적은 시가방어외곽전선이 무너지는 경우를 예견하여 시내에 견고한 방어진지를 꾸리고있습니다.》

강건의 말을 들으며 최용건은 책상앞에 놓인 딱딱한 나무의자에 앉아 확대경의 매끈거리는 손잡이를 만지작거리며 지도를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그가 깊은 생각에 잠겨 침묵을 지키자 강건 역시 입을 다문채 정찰부장이 가져온 적정자료들을 2만 5천대 l지도에 옮겨그리기 시작하였다. 최용건은 강건의 지도에 그려진 52사의 화살표에서 눈길을 뗄수 없었다. 최현이 꼭 나간다고 강건이까지 담보하지만 그것을 어떻게 믿는가. 어떻게 적이 욱실거리는 서울측방에 붙을수 있는가. 더구나 적은 52사와 53사 린접에서 역습까지 시도하지 않는가.

서울의 동남쪽에 그려진 적의 톱날형방어선이 일떠나 무수한 공격대형으로 덤벼드는것을 환각속에 그려본 최용건은 움쭉하고 일어났다.

《현재상태에서 최현동무가 결심한대로 나간다는것은 희망에 불과할따름이요. 더구나 적들이 최현의 52사와 53사사이로 역습까지 시도하는 형편에서 더욱 그렇소. 주타격린접의 56사도 서울계선에 이르려면 이틀은 걸려야 될것이고… 결국 보조타격부대들의 서울진출을 기다려 해보겠다는것은 서울해방을 늦잡겠다는것이 아닌가.》

최용건의 말은 고통스럽게 울렸다. 강건은 낯빛이 질려 그를 보았다.

《상동지, 결국 우리의 보고는 앞당기지 못하겠다는것으로 되고말았습니다. 저는 주타격부대만으로도 해봤으면 합니다…》

《두개의 보병사단과 한개 땅크려단으로 다섯개 사단을 친다? 동문 이것이 유격전이 아니라 지역해방이라는것을 생각해봤소?》

《다른 방법은 없지 않습니까?》

《시간을 앞당긴다는 의미에선 그 방법밖엔 없지… 허지만.》

최용건은 정찰부장이 가져온 서울시가정찰략도를 끄당겼다.

번열에 타는 눈길로 지도를 내려다보던 그는 색연필을 들고 서울시가의 매 포진지와 화점들을 따라가며 동그라미를 치였다. 그 수자를 서른두개까지 세고는 그만 색연필을 놓고말았다. 이때 문소리가 울리며 최용건의 부관장이 들어섰다.

《장군님으로부터 무선입니다.》

최용건은 오늘 벌써 두번째로 당하는 일이라 저으기 놀라며 일어섰다. 변신된 글자가 암호문밑에 깨알같이 박힌 무선문용지를 받아든 그는 안경을 끼려다가 창문쪽에 다가가 약간 올려쳐든채 읽었다.

최용건, 강건 동지 앞.

적은 당황망조한 속에 맹목적인 저항을 꾀하고있다. 주타격부대들은 현재의 공격기세를 늦춤없이 계속 진격하여 늦어도 래일안으로 서울해방전투를 결속지어야 한다. 적의 다대한 무력에 위압되지 말고 현재 서울계선에 진출한 부대들로써 서울해방전투를 조직할것이다…

최용건은 강건에게 무전명령문을 넘겨주고 다시금 지도를 내려다보았다.

《답전을 언제 올리겠습니까?》

《이제 곧.》

최용건은 여전히 지도만 보고있었다. 강건은 무선문을 다시 따라가며 한자한자 음미하듯 읽었다. 미군개입에 대한 통보를 받고 최대긴장상태로 전국에 림하시는 김일성동지의 엄한 모습이 우렷이 떠올랐다. 한편 현재의 부대만으로 적을 쳐이길수 있다는, 그이만이 가질수 있는 비범한 배심이 글줄마다에서 풍겨왔다.

《우리에겐 하루반이 있소.》

《시가지까지의 접근은 어렵지 않다고 봅니다.》

강건은 번쩍이는 눈길로 보위상을 바라보며 쇠를 끊는듯 한 옭맺힌 소리로 말하였다.

《문제는 시내의 화력진지들, 건물을 보루로 삼는 포와 기관총 화력진지들입니다.》

《유격전을 하던 식으로 들어가면 어떻소. 야간공격으로…》

최용건의 말에 강건은 까만 눈섭을 미간에 모으고 생각에 잠겼다가 패기있는 어조로 말했다.

《우리가 포나 비행대로 적의 화력체계를 부시고 그 식으로 나간다면 가능하다고 봅니다.》

《포사격?》

《그렇습니다. 잘만 조직하면 4~5시간내에 400문의 포를 시가 공격계선에 집중할수 있습니다. 그 화력이면 시내의 일체 화력진지와 유생력량집결처를 부실수 있습니다.》

최용건의 부르쥔 주먹이 책상 한귀퉁이를 부셔뜨릴듯 짓누르고있었다.

《옳소.》

그는 마치 앞에 다섯개 사단의 적군이 마주선듯 완강한 자세로 다시 곱씹었다.

《없애버려야겠소. 모든 련포군, 사포군의 포화력을 일체 동원하여 적의 방어시설들을 모조리 격파해버려야겠소.》

그 시각부터 전방지휘소의 모든 교환대와 무전기들은 최대마력으로 작업을 시작하였다. 내각수상실에 올라가는 전방지휘소의 결심안과 보위성 예비포무력과 사포군, 련포군들에 포전개위치를 알리는 명령들이 구두로, 전파로 날아갔다. 포병참모부들은 시가의 담당포사격구역에 대한 제원구득을 시작하였다.

최용건은 포병대들의 이동과 사격준비정형을 감독검열하기 위하여 파견되는 군관들을 만났다. 포병부국장, 부장, 부부장들로 된 성원속에는 그들을 수행하게 된 참모군관들까지 섞여있었다.

최용건이 서울해방작전의 의의를 설명한 뒤끝에 이번 전투의 승패를 좌우할 포사격에서 사소한 빈틈도 있어서는 안된다고 엄하게 강조하고 질문할것이 있으면 하라고 했을 때 한 군관이 대렬밖으로 한걸음 나섰다. 그런데 그 군관은 용감하게 나선것과는 달리 선뜻 말을 하지 못하였다.

최용건은 몇시간전에 최현사단에서 온 림운학이라고 하는 그 군관을 알아보고 입술에 미소를 띠웠다.

《어서 말하오.》

《상동지, 시가중심에도… 포사격을 하게 됩니까?》

최용건은 그 군관의 낯빛을 보고 채 말하지 않은 뜻까지 읽었다. 최용건은 그에게 뭔가 많은 말을 해주고싶었다. 전쟁의 제법칙과 승리와 희생의 필연적과정에 대한 현학적인 말구들이 떠올랐으나 《그렇소.》 하고 단마디로 대답하고말았다. 그대신 매개 포지휘관들과 포수들이 0-01의 편차도 없이 적의 기본목표만을 맞히게끔 해야 한다는것을 재삼 강조하고 그 자리를 떴다.

서울시가 포사격준비에 대한 전파가 온 공간에 차고넘칠 때 괴뢰륙군정보반 무선대도 그 정보를 도청하여 암호해득을 끝냈고 전방지휘감시소들에서는 그 사실을 육안으로 목격확인했다. 인민군대가 수천문의 대포를 가지고 온 서울시가를 불단지로 만들어버린다는 소문이 삽시간에 도시를 휩쓸었다.

도시는 온통 뒤죽박죽이 되였다. 길목마다 군인들이 우글거리고 피난민들로 혼잡을 이루었다.

이사짐을 싸고 움직이는 집, 장독이며 허접쓰레기들을 움에서 끄들어내고 요긴한 세간을 거기에 옮겨놓는 집… 경찰들이 돌아다니며 그건 헛소문이라고, 강력한 《국군》이 있는 한 도시는 끄떡 없다고 했으나 소동은 가라앉지 않았다. 달구지나 웬간히 큰 장농같은것은 《국군》들이 그자리에서 징발하여 《도시수비》에 썼다.

김규식의 집에도 여러 사람들이 그 흉흉한 소문을 안고와 이제 도시는 무덤이 되고 그 페허우에는 재먼지만 날릴것이라고, 그다음 외국군이 출병하여 마지막혈투를 벌리면 이 땅엔 공산주의자건 민족주의자건 배달의 족속은 깨끗이 사라져버리고 먼 후날 멸망당한 민족중의 하나로 력사책의 한 갈피에 남아있을것이라고 떠들었다. 엊저녁 김구의 한돐제로 경교장(김구가 살던 집)에 갔다온 뒤부터 내내 김규식집에서 술과 울분을 함께 마시며 딸 잃은 애비의 괴롬을 끄고있던 성송암은 중낮이 되여 그 집을 나섰다.

계화에게서 련화의 《실종》경위를 듣고난 뒤부터 아예 만날 희망을 저버린 그는 마지막으로 서울시가나 똑바로 보고 죽던살던 하자고 덕수궁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맥빠진 그의 걸음을 바께쯔 모자(미군운동모)를 쓴 일여덟살난 소년이 멈춰세웠다.

《할아버지, 글루 가면 안돼요.》

하수도나 남의 집 처마밀에 잠자리를 잡는 거지애였다. 며칠전만도 이런 애들은 《국회의사당》과 《경무대》가 가까운 이곳에 올수 없었다. 성송암은 더덕더덕 기운 소년의 옷차림과 부황기가 어린 누릿한 얼굴을 보다가 물었다.

《무엇때문에 안된다는거냐?》

《저 우에단 대포를 굴려다놓았어요. 글루 가면 군대들이 잡아가요.》

《그런데 넌 여기에 어떻게 왔냐?》

소년은 방긋이 웃었다. 그리고는 좌우를 살펴보고 속삭이듯 말했다.

《여기 가게들을 군대님들이 다 청소를 해요. 그통에 난 이런걸 얻었거든요.》

소년은 주머니에서 생과자를 꺼내보이였다.

《훔친건 아냐요. 군대들이 털어가며 흘린걸 주었어요.》

《넌 집이 어데냐?》

《집이요?!…》

소년은 경계어린 눈길로 되묻고 잠시 빤히 쳐다보다가 《없어요.》 하고는 반대쪽으로 뛰여갔다.

《잠간만.》

송암은 련민어린 정에 속이 울컥해서 그를 불렀다.

그리고 주머니를 황급히 뒤져 련화를 찾으면 뭔가 사먹이려던 돈을 꺼내였다. 그런데 소년은 송암이를 수상스럽게 볼뿐 되돌아올념을 하지 않았다. 송암이가 돈을 꺼내보여서야 홀린듯 달려왔다. 송암의 손에 쥐인 많은 액수의 돈을 본 소년은 두눈이 올롱해졌다.

《이걸 다 나한테 주나요?》

《가져라. 그리고 맛나는것을 다 사먹어라.》

《고마워요. 할아버지.》

소년은 꾸뻑 절을 하고 매우 신기스러운 눈길로 몇번씩이나 되돌아보며 걷다가 혹시나 다시 불러 돈을 달라고 할가봐서인지 장달음을 놓았다.

송암은 눈굽이 불깃해서 그를 보았다.

(저 생령이… 이제 얼마후면 이 땅에서 사라진다는것을 안다면 어떻게 생각할가. 사람다운 생활 한번 못하고.)

송암은 문득 이 란시에 어떤 가게방도 문을 열지 않았으리라는데 생각이 미쳤다. 그러자 소년을 위해 자기로서 해준 수고도 헛된것으로 되고말았다는 락담어린 느낌이 가슴을 아릿하게 만들었다.

성송암은 비칠걸음으로 언덕을 내렸다. 한때 려운형이와 함께 몇번 드나든적이 있는 《모나리자》다방 근처에 오니 길목에 군인들이 가득 모여 모래가마니며 널판따위로 바리케트를 만들고있었다. 분명 가게방에서 털어내온듯한 커다란 매대판우에 축음기가 돌아가고있었다. 언젠가 다방주인이 백계로씨야인들한테서 샀다고 하며 들려주던 로씨야민요가 그 축음기판에서 흘러나왔다.

 

날에 날마다 찾았네

님의 무덤을 찾았네

이 하루도 하염없이 헤매니

어데 있느냐 쑬리꼬

 

성송암은 숨이 꽉 막혀들었다. 불시에 련화생각이 뭉클 치받치며 심장이 멎어드는것만 같았다.

《이건 뭔가?》

하는 꽥 소리에 송암은 정신을 차렸다. 《국군》장교가 축음기레코드판을 들어 땅바닥에 내리쳤다.

《망할것들, 이건 아라사노래란 말이다. 빨갱이노래란 말이다.》

송암은 허친거리는 다리를 끌고 그자리를 떴다. 그런데 길목이란 길목은 온통 포와 속사포천지고 군인들이 득실거렸다.

도처에서 그를 붙잡아세우고 어떤 놈들은 몸뒤짐까지 하고서야 놓아주었다. 사방 길이 막혀서 집을 멀리 에돌아오지 않으면 안되였다.

남대문모퉁이가 비교적 조용하였다. 리야까며 말달구지따위들에 짐을 실은 사람들이 울상을 하고 종종걸음을 치고있었다. 송암은 자기가 이 도시를 마지막으로 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였다. 그렇게 되니 모든 정경을 망막속에 영원히 새겨두고픈 생각이 불끈 치밀었다. 그는 단장에 몸을 실린채 남대문층계를 올라 도시를 굽어보았다.

뿌연 구름속에 도시는 침침했다. 보이는것이란 군인들뿐이다. 먼지바람을 일으키며 포를 단 자동차들이 광화문쪽으로 내달려갔다.

성송암이 집에 오니 울짱문이 벙글써 열려있다. 송암은 가슴이 후두두했다.

《련화가 왔나?》

허겁지겁 뛰다싶이 들어가니 양음리 백주사댁에서 심부름을 하는 순남이가 굽석 절을 했다. 한다리가 뻐텅이라 몸이 한쪽으로 기울어질사 했다.

《임자가 어떻게 왔나?》

《채소를 가져왔이유.》

송암은 토방우에 놓인 부루며 쑥갓따위를 보고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이 란세에 채소 팔러 보내더냐?》

백주사네 집에서 대대로 종살이를 하던 이 순남이는 해방바람에 《종》이라는 명칭은 떼여버렸으나 오강씻기로부터 남새철이면 50리밖 서울장안에까지 와서 남새팔이까지 못하는 일이 없었다.

《젊은 주인님이 정세를 살피자구 사촌고모네 집에 오는 길에 저를 데리고…》

《사촌고모란 참모총장이라는 사람의 안사람이겠구나.》

《네.》

《그런데 게 있지 않고 이렇게 와서 일없냐?》

《네, 젊은 주인님은 나더러 먼저 가라구 했이유. 이제 <국방군>이 다시 밀고 올라간대유.》

《그래 자넨 그게 좋나?》

《글쎄요. 주인말룬 빨갱이들이 왔다간 우릴 죄 잡아죽인대유. 빨갱이들속에는 빨간 뿌리가 돋고 사람잡아먹는 좀생같은 괴물도 있대유.》

《허허, 그래 자네도 죽인다던가?》

《그러문요.》

성송암은 눈이 덩둘해 대답하는 순남이를 기가 막혀 보다가 한숨을 지었다.

《그 빨갱이들은 자네같은 사람은 안죽여.》

《정말이나요?》

순남이는 이상스럽다는듯 머리를 기우뚱거리다가 물었다.

《선생님이랑은 어떻게 되나요?》

《나?!… 나같은 사람이야 다르지. 죽이던가 저 어디 정배를 보낼거다.》

《그러니 역시 나쁜 놈들이군요.》

《다 우리같은 사람인데 주의에 미쳐 그런다.》

《주의란게 뭔가요?》

《주의가 주의지-》

성송암은 서글프게 되받았다. 이 땅에서 주의자들이란 바로 이런 백성들을 꾀여 자기 목적에 써먹는것이 아닌가. 리승만은 리승만대로 공산정권은 공산정권대로… 송암은 토방에 놓인 소채짐을 한쪽으로 밀어놓고 앉으며 순남이의 얼굴빛을 유심히 관찰했다.

수백년 내려온 무지와 편견이 자국자국 배인 얼굴이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얼마나 순진하고 인정스러운 덕이 깔린 눈빛이며 얼굴인가.

《이제 미국군대가 온단다.》

《네… 미국군대?!…》

순남이는 낯빛이 컴컴히 죽어 송암을 뚫어지게 보았다. 송암은 싱그레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 미국군대가 온단다. 좋으냐?》

《싫어유.》

순남이는 완강히 머리를 저었다. 이제껏 유순하던 두눈에 분노와 적의의 빛이 펑끗거린다.

(그렇다. 머슴살이에 인박혀 양같이 된 이 사람도 미국이라 하면 죽을 때까지 치를 떨것이다.)

순남이는 미국군대의 찦차에 치워 다리병신이 된 사람이다. 성송암이 길가에서 반주검이 된 그를 입원시키고 알아보니 성송암의 처제인 정화숙이 있는 양음리사람이였다. 대강 다리가 나은 다음에는 정화숙이가 자기 집에 데려다가 치료를 했으나 찌쿠덩 다리를 면할수 없었다. 머슴으로의 가치를 잃게 된 순남이는 병원에서 나오는 날로 백주사집에서 쫓겨나게 되였다. 무슨 대학교 명예리사요, 동물보호협회 간사요 하는 이름뒤에 숱한 전답을 틀어쥐고 지주질을 해먹는 백주사는 그 린근에서 제왕처럼 날뛰는자라 누구도 맞서지 못했다. 이 억울한 사정을 안 송암은 백주사를 두번씩이나 만나고 재판송사와 사회여론으로 위협한끝에 순남이를 그대로 살게 하는데 성공하였다. 특히 순남이에 대해서는 련화의 방조가 컸다. 서울병원에 입원하였을 때는 거의 매일이다싶이 병문안을 갔고 양음리에 내려갔을 때도 드문히 찾아가서는 우리 글공부까지 시켜주었다. 그래서 순남이는 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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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산님의 댓글

강산 작성일

(위에서 계속)

그래서 순남이는 성송암이와 련화에 대해서는 은인치부하며 제 혈붙이보다 더 끔찍이 따랐다.

《그럼 미국군대와 빨갱이중에 어느편을 따르겠느냐?》

《다 싫어요.》

《지금 사는게 좋으냐?》

《…선생님이 왔다가신 다음부터 백주사어른이랑 절 때리지 않아요. 요전번엔 이런 모자도 줬는걸요.》

순남이는 지게머리에 얹혀있던 좀이 나고 여러군데 고삭은 맥고모를 들어보이며 히무죽 웃었다. 성송암은 눈살을 찌프렸다.

올봄에 누이동생한테 갔던 길에 순남이가 보고싶어 찾아갔다. 대문이 열려있어 그대로 들어가니 행랑간막에서 신음소리와 욕설이 튀여나왔다. 송암이 놀라 문을 열고보니 백주사가 단장으로 웃몸을 발가벗은 순남이를 족치고있었다. 피줄이 죽죽 간 순남이의 어깨보다 먹다가 남긴 밥그릇이 더 가슴을 찢었다.

파리가 날아드는 밥그릇에는 채 빻지 않은 피쌀과 겨가루가 담겨있었다…

《불쌍하다.》

《무슨 말씀인지요.》

순남이는 성송암의 탄식하는 말에 어안이 벙벙해진 꼴이였다.

성송암은 오늘따라 더 지각이 없어보이는 그를 측은히 보다가 말했다.

《백성이란 불쌍하다는것이다.…》

《헤헤… 인생이란 다 그렇지요. 그런데 선생님, 미국군대가 오면 또 일정때처럼 되는가유?》

《그렇다.》

《야, 그럼 어쩌나요. 난 싫어유.》

송암은 눈물이 찔끔 솟았다.

《이녀석아! 백성이란 나라님들한테서 미물이요 미물의 뜻이나 희망인즉은 아랑곳없다.》

순남이도 뭔가 느껴지는듯 상심한 얼굴이 되여 맥고모만 주물럭거렸다. 그러다가 불쑥 물었다.

《참… 련화아씬 옥에서 아직 안나오셨이유?》

《나오긴 했다는데 안들어오는구나.》

《분명히 나왔겠습지요?》

《나왔다는구나. 3일전에.》

《아, 그럼 됐이요.》

순남이는 입을 하 벌리고 웃었다. 서른도 못되는 나이에 주름이 오골조골 서린 얼굴이 그대로 인정많은 할머니처럼 변한다.

《무슨 일이 있나?》

《저… 젊은 주인님이 그러는데…》

순남이는 그 큰눈을 희번득거리며 주위를 살피다가 성송암의 귀바투 다가왔다. 뻐텅다리를 잘못짚어 성송암이 얼른 그의 손을 잡아주었다. 순남이는 큰 비밀이나 말하듯 속삭였다,

《옥에 갇힌 <빨갱이>들을 다 죽인대유.》

《그게 정말이냐?》

《사실이얘요. 젊은 주인님과 장교어른이 말하는걸 제기 들었어요. 옥에 갇힌건 빨갱이기에 다 죽인다는거예요. 난 그래서 걱정했지유. 련화아씬 빨갱이가 아닌데… 어쩌나 하고…》

《련화도 그 사람들대로 하면 빨갱이다.》

《네-?!》

순남이는 펄쩍 뛸 정도로 놀란상이다. 성송암은 쓸쓸한 웃음을 머금었다.

(리승만은 바로 이런 어리숙한 백성에게 총대를 메워 북녘겨레들을 잡는 싸움에 내몰았다. 그 천진한 사람들은 이 순남이처럼 빨갱이라면 다 마귀로 생각하고 마구 죽일것이다. 그리고 공산주의선동에 말려든 인민군대도 이남땅의 우리같은 모두를 로동자, 농민의 피땀을 짜먹는 흡혈귀라고 가차없이 처단할것이고…)

성송암은 순남이가 돌아간 다음에도 방에 들어갈념을 하지 않고 토방앞에 쭈크리고 앉아있었다. 생각할수록 기가 막혔다. 정치에 무관계한 사람이노라고 자처한 그였으니 이 형극에 이르러 현실을 두고 랭철한 생각을 달리지 않을수 없었다. 그러나 생각할수록 적막강산이였다. 그만큼 울화가 뻗쳐올랐다. 자기대에서 끝난 《식민지 36년》이 또다시 시작된다는것이 무엇보다 가슴아팠다. 이제까지는 그래도 《독립국》의 허울이라도 있었으나 장차 외국군대가 더 들어오면 이 땅이 어찌될가. 그러다가 그는 저 모르게 껄껄 웃었다. 이 도시가 불바다가 되면 무슨 정의고 뜻이고 있는가.

송암은 자리를 털고 일어나 집으로 들어갔다. 규식의 집에서 떠날 때부터 결심한 일을 시행하리라 웃옷을 벗었다. 시간을 알려고 주머니에 넣은 회중시계를 찾으니 없었다. 좀전 몸뒤집을 하던 졸병이 히죽히죽 웃으며 잘 가라고 상냥스레 인사까지 하던 생각이 났다. 송암은 허구픈 웃음을 터뜨리고 벽에 걸린 그림족자들과 책꽂이의 고서들을 헐어내렸다. 그다음 양초를 찾아들고 허청간에 있는 지하실로 들어갔다. 습기를 방지하느라 가져다놓은 숯가마니들과 여덟개의 커다란 독이 양초불에 환히 드러나자 송암은 한동안 못박힌듯 우두커니 서있었다. 어느땐가를 위해 가문대대의 재산과 자기 노력을 바쳐 모은 희귀력사유물들이 그 독마다에 고스란히 간직되여있는것이다.

그는 깨여진 토기들과 자기쪼박들이 있는 덕대우에 양초를 고정시키고 지하실을 나와 책과 족자들을 천폭에 싸안아 날라들이기 시작했다. 몇차례 그렇게 나르고나자 다리가 후들거리며 더 움직일수 없었다. 그래도 앙심을 먹고 한축 더 나른 후 그는 지하실문을 꼭 닫았다.

《예가 내 무덤이라면 천하없는 명당이로구나!》

송암은 차고 눅눅한 벽에 기대여 땀을 들이다가 덕대우의 함에서 참지와 붓을 꺼내들었다. 그리고 참지우에 일필휘지로 글을 써나갔다.

어느 먼 후날 페허의 도시를 뒤지는 발굴대의 손에 들어가기를 바래서 남기는 글이였다.

《후세에 경고하노니-》

이 순간부터 송암의 눈에서는 또다시 눈물이 줄져내렸다.

《이 배달의 땅은 주의와 사상의 싸움터로 천지간 없는 슬픔의 땅으로 되였다. 개인의 권력과 야심의 경쟁, 당파싸움에 척추가 부러지고 대국의 발굽밑에 륙골이 부러졌다. 유교의 <결박주의>에 백성은 벙어리 돌부처가 되고 공산주의 파괴주의에 백성은 살괭이가 되였다. 나라 파는 역신의 <외세주의>에 이 땅의 보물과 생령들은 타국족의 제물이 되고. 통탄컨대 력사를 보라. 임금이 똑똑해도 쓸데 없었다. 밑에서 잘 받들지 못했다. 밑에서 잘받들어도 쓸데 없었다.

주의가 옳았어야 했다. 주의만 옳아 쓸데 있었는가. 제대로 받아들일줄 몰랐다. 백성이 받아들였다 해도 작은 나라라 어쩔수 없었다. 큰 승냥이한테 먹히웠다.

오, 불쌍한 백성… 이리 맞고 저리 밟히는 백성이여…》

송암은 더 쓰지 못했다. 눈물이 참지우에 마구 뿌려져 온통 흐려졌기때문이였다.

 

홍명희부수상은 쏘련대사 쓰티꼬브가 심각한 얼굴빛으로 계단을 내려가는것을 보다가 김일성동지의 집무실로 들어섰다. 오늘아침 홍명희는 전쟁이 일어난 새벽보다 더한 흥분속에 비감과 울분을 맛보았다. 공화국을 《침략자》로 오도하고 유엔성원국들의 일치한 행동으로 《응징》과 《제재》를 가하겠다고 한 유엔안보《결정》은 이 담백하고 박식한 로인의 심장에 모진 충격이 아닐수 없었다.

여러 사람들이 그의 방에까지 뛰여들어 격분을 터뜨려놓을 때 평소의 물흐르듯 하던 언변도 다 잦아든 로인은 굳게 입을 다문채 이마전이 댕댕하여 서슬푸른 기상으로 있었다. 그러나 마음속 고뇌와 노기를 참아내지 못한 그는 김일성동지를 만나뵈옵고저 서기실을 통해 전화를 걸었다. 그때는 김일성동지께서 작전회의를 지도하고계실 때였다. 홍명희는 안절부절 못하다가 보건상으로부터 첫 부상병렬차가 도착했다는 보고를 받고 그 즉시로 평양역에 내달아갔다. 엊저녁에 조직된 군사위원회에서 보건사업을 담당하기로 된 그는 부상병렬차를 보게 되자 김일성동지께 접견을 요청한 사실도 까마득히 잊고있다가 평양역 사령전화를 통해 그를 불렀을 때야 천방지축 달려온것이다.

《부상병들이 많았습니까?》

자리를 잡고앉자 김일성동지께서는 홍명희에게 담배를 권하며 물으시였다.

홍명희는 담배를 집어들었으나 그이의 심중한 기색때문에 말문을 열수 없었다. 김일성동지께서 성냥을 그어 불을 붙여주시였다. 그러시고 그이께서도 담배를 붙여무시였다.

전쟁이 일어나 이 방에 처음 들어와보는 홍명희는 낯설은 작전지도며 군용부호자며 보위성공인이 찍힌 문건들을 살피면서 가장 준엄하고 긴장된 정황을 안고계시는 장군님의 시간을 침해한데 대하여 일순간 가책을 느끼며 짤막히 부상병수자와 병원파송정형에 대하여 말씀드렸다. 파상풍주사가 미처 보장 못되여 오는 도중 한사람이 사망하였다는 보고를 들으신 김일성동지께서는 탁상일력에 《파상풍주사약》이라고 쓰시고는 화제를 돌리시였다.

《아침에 저를 찾았다지요?》

《네.》

홍명희는 얼굴을 약간 붉히였다.

《무슨 용무였습니까?》

《사실은 유엔<결정>때문에… 찾아뵈오려 했습니다. 그리고 그저… 좀 뵈옵고싶었습니다.》

홍명희의 솔직한 대답에 김일성동지께서는 알릴듯말듯 고개를 끄덕이시고 저으기 활달한 음성으로 말씀하시였다.

《나도 선생을 만나고싶었습니다. 이자 방금 쏘련대사도 그 문제때문에 왔다갔습니다만…》

홍명희는 놀람이 가시지 않은 표정으로 김일성동지의 안색을 우러러 살피다가 참고참던 울분을 터치듯 말씀드렸다.

《글쎄 그런 언어도단이 어데 있습니까… 이거야 너무하지 않습니까. 사람들이 불안해합니다.》

《그럴수 있지요! 선생 생각에는 어떻습니까?》

《걱정입니다. 유엔이 이렇게까지 나오는데는 미국때문에가 아니겠습니까. 세계의 절반이 미국놈의 손끝에서 놀아나는판이니.》

순간 김일성동지의 안색은 흐려지셨으나 인츰 부드러운 빛을 띠셨다.

《놈들의 그 <결정>에 대해서 서울에 있는 선생의 옛지기들은 어떻게 생각할것 같습니까?》

《좋아할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 모름지기 약소민족의 불행을 통탄하겠지요. 옛날 리준이 만국대표들의 외면에 통탄하여 피눈물을 뿌리듯이…》

홍명희부수상의 여위여 훌쭉해진 얼굴살이 떨리고 눈에는 당금이라도 눈물이 쏟아질듯 안개가 피였다. 김일성동지께서는 언젠가 홍명희의 집에 가서 보신 명주수건을 상기하셨다. 을사조약이 《시일야방성대곡》으로 온 나라를 비감속에 몰아넣을 때 홍명희의 선친은 고향땅이 한눈에 보이는 산자드락에서 그 명주수건으로 목을 대여 자결한것이다. 리조의 조락과 구한국의 멸망사가 가문의 족보에 점점이 피로 얼룩져있는 집안태생의 홍명희야말로 지금의 사태발전에 대하여 그 누구보다 예민할것이였다. 선친 잃은 때부터 오매불망 민족과 나라의 광복을 빌며 문필로 싸워온, 해박한 지식과 깨끗한 인격의 소유자인 홍명희의 말은 망국의 처절한 쓰라림을 경험한데서 오는 지사의 피타는 절규이기도 하였다.

《난 오늘 유격대초기 진퇴량난의 적의 포위속에 든 때의 느낌을 체험했습니다. 참 그때 별의별 생각이 다 들군 했습니다.》

김일성동지께서는 조용히 말씀을 떼시였다. 지금까지 엉켜끓던 온갖 사색과 감정이 뚝을 터치듯 흘러나왔다.

《어떤 때 보면 <토벌대>의 불무지가 수백리지경으로 우리를 둘러싸는 경우가 있었습니다. 검은 하늘밑에 사방은 흰눈뿐 그런 겨울밤엔 마음이 무거워지며 고독과 동요가 머리를 쳐들기도 합니다. 이것은 무서운것입니다. 그러나 그때마다 나는 정의가 승리한다. 참된 사상의 힘은 불패이다, 지금은 험난하고 외로우나 우리는 인민이 바라는 길을 심장의 피를 뿌려나가며 헤쳐가는 선각자들이며 그 정의로 하여 우리는 불사신이다 하고 자기 신념의 기치, 반항의 넋을 고무했습니다. 우리까지 이 진리의 기치를 던지고 한몸의 안락을 추구하는 생리적본능의 노예로 굴복한다면 인간의 위대성이 모독된다고 생각했습니다. 나의 아버지, 어머니, 쓰러진 동지들의 유언, 그들이 남기고 간 원쑤에 대한 불타는 중오를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나의 뒤에는 정의로운 위업을 따라 일떠서 싸우려는 각성하는 인민이 있다는 생각으로 자신을 고무했습니다.

그렇게 되면 불무지는 하나의 죽어가는 시체에서 떠도는 린광처럼 보이고 끝없는 어둠의 심연은 무한정 내달릴 거침없는 광야로 보일뿐 두려움은 가셔집니다. 이 사상의 불길, 시인들이 말하는 심혼의 웨침에 따라 내달릴 때 나는 인간의 위대성, 정의와 진리의 힘을 더욱 미쁘게 깨달으며 정의와 진리가 승리해야 될 책임을, 그 책임을 걸멘 인간으로서의 긍지를 느끼게 됩니다.

불무지뒤에는 그 불무지를 포위하고있는 수백수천만의 인민이 있다. 비록 무기는 못들었지만 정의와 량심으로 침략자, 강도를 규탄하는 심판의 목소리와 눈길이 있다. 이쯤되면 불무지앞에서 총대를 메고 두릿거리는 돈에 팔리고 거짓에 기만당하고 강제에 끌려온 적들이 더없이 가련해보이면서 비상한 용기와 담이 생기고 지혜가 트이고 방도도 열립니다. 진리에 자각된 인민의 힘은 위대한것입니다. 인민대중이 이 진리로 무장되고 자기의 위대성을 깨달았을 때 며칠전에도 말했지만 력사는 그야말로 우연과 필연의 사이길에서 방황하는 나그네로가 아니라 필연의 길로 줄기차게 내닫는 기관차로 될것입니다. 우리의 광복도 그 필연의 길에서 이루어진 결실이 아니겠습니까. 나는 막막하고 불안할 때마다 이런 생각속에 자신을 고무합니다. 오늘 역시 그랬습니다.》

김일성동지의 얼굴은 약간 상기되여있었고 빛나는 안광에는 다감하고도 세찬 정열의 후광이 어려있었다.

《장군님, 장군님께서는 인간만세의 시를 들려주십니다.》

홍명희는 깊은 감동속에 그이를 우러러보았다. 그러자 슬픈 과거가 되살아오르며 안타까운 한숨처럼 말이 흘러나왔다.

《장군님, 자고로 놈들은 우리를 얼마나 숙봤습니까. 엉큼하고 교활한것은 또 얼마였구요. 서양침략배들과 왜놈들이 쓴 글을 보면 례외없이 칭찬속에 독이 있고 멸시속에 탐심이 스며있었습니다.

황금의 복지, 은자의 나라, 금단의 땅, 근면하고 성실하고 담백한 민족, 가야금의 선률속에 달을 맞고 막걸리속에 잠들며 은금의 보물과 비단을 감고 사는 사람들… 이런 식으로 써놓아 허기진 식민주의자들의 식욕을 자극하여 병기를 장만하고 배를 띄워 덤벼드는것이 과거 수백년이였습니다.

지지리 못난 량반들은 간혹 얻어듣는 칭찬에 <옳거니, 우리는 인의를 중히 하고 백성 또한 성실하고 문명한 동방례의지국이거니…> 하며 수염을 쓸며 음풍영월로 소일하다가 총포로 들이닥치면 극상한다는것이 독을 먹고 숨진것밖에 없었지요.》

홍명희부수상의 로안에는 눈물방울이 비꼈다.

《선생, 마음을 고정하십시오. 오늘이 어제로 되돌아가는 일은 절대로 없을것입니다. 유엔안보<결정>은 력사과정의 하나의 수치입니다. 그러나 세계는 조만간 이 수치를 깨닫게 될것이고 력사는 누가 옳았는가를 밝힐것입니다. 나는 미국놈들의 도전에 대하여 서울해방으로 대답하려고 합니다. 늦어도 래일이면 우리는 력사깊은 이 도시로 들어갈것입니다.》

홍명희는 격한 호흡을 묵새기기 어려웠다. 흐느낌이 터져나올것 같아 입을 꼭 다물었다. 어린애처럼 환성을 지르고싶기도 하였다.

《서울!》

홍명희는 젖은 눈에 웃음을 담고 그이를 우러러보았다.

《저흰 소인배들입니다.》

《허허, 무슨 말씀을 그렇게 하십니까?》

《사실 장군님, 전 부상병들을 만났을 때 그들에 대해서 장군님께 꼭 말씀해드리겠다 생각했습니다.》

홍명희는 부상병들속에서 보고들은 몇가지 이야기를 열정을 기울여 말하기 시작하였다.

종종 전화가 와 이야기가 끊어지였으나 김일성동지께서는 끝까지 다 들으시였다.

어떤 유개차들에서는 부상병들이 내리려조차 하지 않았다. 한 방통에서는 담가를 들고선 간호병들이 울상이 되여 어쩔줄을 모르고있었다. 붕대투성이의 부상병들이 버티고 누운채 일어나지를 않았다. 한눈만 남기고 온통 붕대로 감긴 석줄배기 부상병은 자기를 담가에 실어눕히는 애어린 처녀에게 욕설을 퍼붓고있었다.

《안된다 안돼! 날 도로 전방으로 보내라…》

《정말이요. 우린 싸울수 있소. 보내주오…》

옆에 군인들도 하나같이 부르짖었다. 인솔군의가 홍명희에게 마취제와 수면제로 잠재운 이 중상자들이 평양에 실려왔음을 알고 딱 버틴다는것이였다.

홍명희가 석줄배기의 어깨를 부여안고 그러지 말라고 달래자 그는 울며 말했다.

《…분대원들을 다 싸움판에 두고… 리승만을 그대로 두고… 제가 예 와서… 어찌합니까…》

홍명희는 그때의 감격이 되살아올라 말을 떠듬거리였다.

《어떤 군인은… 위생차에 실리며 미안하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제가 무엇때문에 미안한가고 나무람하자 그 군인의 말인즉은 승리자로 돌아와 장군님앞에서 개선열병식을 하자고 했는데 부상 당해왔다고… 수치라고 울먹거렸습니다.… 저도 그때 따라울었습니다. 이게 바로 우리 장군님께서 키우신 인민이요, 장군님께서 보신 인민이로구나 하고 말입니다.》

《우리 인민은 원체 그런 인민입니다. 어저께 문산앞고지전투에서는 21살난 한 청년이 자기의 가슴으로 적화구를 막았습니다.》

김일성동지께서는 자리에서 일어나 방안을 천천히 거니시였다. 홍명희는 몇번이고 따라 일어서려고 하다가 김일성동지께서 깊은 사색에 잠기신것을 보고 숨소리마저 죽이고 까딱 안했다. 전화종소리가 김일성동지를 집무탁에 오시게 하였다. 전화를 받던 김일성동지의 안색이 눈띠게 확 변하셨다.

《응답이 없다?!… 계속 찾아보시오.》

그이께서는 작전탁에 놓인 지도의 한점을 뚫어지게 보시다가 전화기를 놓으시였다. 김일성동지께서는 오늘 오전 서울시가 정찰비행을 나갔다 온 리학비행부사단장으로부터 불길한 보고를 받으시였다. 리학은 서울시가 정찰비행을 마치고 돌아오는 도중 서울-춘천지대에서 미군 《B-26》전투폭격기편대의 집중폭격을 목격한것이였다. 김일성동지께서는 그 지대가 최현이 서울포위를 위해 한개 련대를 이끌고 내닫는곳임을 알아보시고 통신국에 그를 찾을 과업을 주셨었다. 그런데는 최현이 무선호출에 응답이 없다는것이다. 매우 좋지 않은 일이였다.

이날은 그이께 기쁜 일보다 괴로운 일이 겹쳐다가드는 불안스러운 날이였다. 유엔안보《결정》, 그에 대한 불안스러운 반향들, 쏘련대사 쓰티꼬브는 미군개입으로 3차대전이 일어날수 있다고 우려했다. 외무상은 미국에 빌붙는 호소를 하자고 하고, 동해선철도는 오늘아침부터 적의 비행대와 군함의 폭탄과 포탄사격속에 들고 그리고 아까운 전사들이 희생되고있다. 최현?! 아무리 날고뛰는 최현이라지만 항공습격에서는 어쩌는수가 없지 않은가. 조선인민혁명군출신 지휘관들 거의가 다 아직 항공습격을 겪어보지 못한것이다. 최현의 신상에 무슨 상서롭지 못한 일이 생기지 않았겠는가 하는 불안과 함께 서울측방으로의 진출이 늦어지게 되였다는 위구가 밀려들었다. 최용건이며 강건의 얼굴이 떠오르셨다. 보조타격부대들이 도착해야만 서울해방전투를 단행할수 있다고 생각하던 그들이 최현부대가 폭격당한것을 알면 어떻게 할가 하는 생각이 집요한 물음으로 떠오르셨다.

(명령을 받은이상 그들은 흔들리지 않을것이다. 그러나 신심있게 움직이는가 아닌가가 문제다.)

김일성동지께서는 집무탁에 다가가 리학이 공중촬영을 해온 서울시가 사진필림을 집어드셨다가 송구해 앉아있는 홍명희에게 눈길이 머무르셨다. 로인의 긴장된 자세를 보시고 자신께서 일순간이나마 여유를 잃은것을 아셨다.

《서울시가를 찍은것인데 좀 보십시오.》

그이께서는 사진필림을 홍명희에게 내여미셨다. 홍명희는 의아한 빛을 감추지 못하고 필림을 받아 살피다가 숫진 미소를 담고 말씀드렸다.

《필림을 봐선 잘 모르겠습니다.》

《찬찬히 보십시오. 여기가 경복궁이 아닙니까?》

김일성동지께서는 창문쪽으로 필림을 들어보이며 손가락으로 짚으셨다.

홍명희는 안경을 고쳐쓰고 호기심에 넘쳐 다시 보았다. 그러자 그의 눈안에는 서울시가가 금방 눈앞에 환히 펼쳐지는것 같았다.

《네, 알아보겠습니다. 그우에 점이 분명 백범의 자택일것이고… 참, 저쪽 저 길게 누운것이 창경원입니다. 그런데 길목이 달라졌군요.》

《그건 바리케트를 쌓은 자리입니다.》

《서울이 말이 아니게 됐군요. 그 고현놈들이 하필 창덕궁에다가 진지를 꾸리다니.》

문소리에 홍명희는 말을 채 잇지 못했다. 김책이 들어섰다. 김일성동지께서는 김책이 오전작전회의때와는 판달리 활기넘친 기색임을 보시였다.

《전방지휘소에서 답전이 왔습니다.》

김책은 푸른 마분지접이에 끼웠던 종이장을 서둘러 꺼내 김일성동지께 드리였다.

홍명희가 앞상밑에 의자를 밀어넣으며 일어섰다. 김일성동지께서는 그냥 종이장에 시선을 쏟고계시다가 홍명희가 다시 말씀을 올려서야 고개를 돌리셨다.

《선생이 좀 수고를 해주셔야겠습니다. 오늘저녁 내각전원회의를 하자고 합니다. 토의안건은 유엔안보<결정>에 대한 우리의 립장문제를 천명하는것과 각성, 각국들의 사업을 군사위원회밑에 복종시키는것과 관련된 집행대책안입니다. 선생은 유엔안보<결정>에 대한 기조보고를 준비하였으면 합니다. 그걸 가지고 좀더 토론했으면 좋겠는데 제가 시간이 없을것 같습니다.》

홍명희는 속이 무르춤했다. 시간이 없을것 같다는 말씀도 그렇지만 김일성동지의 안색에서 심중한 일이 생겼음을 간파했던것이다.

《장군님, 제 능력껏 해보겠습니다.》

홍명희는 치미는 호기심을 간신히 누르고 그이의 방을 나섰다.

《어떻게 생각합니까?》

김일성동지께서는 홍명희를 바래주신 문가에서 돌아서며 김책이를 향해 물으시였다.

《저는 의견이 없습니다. 현정황에서 다른 안은 없다고 봅니다.》

김일성동지께서는 전방지휘소가 서울공격단행을 주저하고있는데 대하여 오늘아침 김책이 몹시 조바심치며 불안해하던것을 상기하시며 다시금 수신지를 보시였다.

《내각수상 김일성동지 앞.

6월 27일 13시 수상동지의 명령에 따라 전방지휘소는 다음과 같이 전투조직을 하려고 합니다. 현재 적은 괴뢰 2보사, 3보사, 7보사로 서울 동북 11km지점의 창동계선 약 9km 전선에 괴뢰 1보사와 수도사단 5보사의 일부와 기타 부대는 문산, 서울방면에 집중배치되여 반달형밀집방어진을 형성하고 일부 지역에서는 반돌격을 꾀하고있습니다. 적의 전선 우익린접은 6보사, 좌익린접은 수도사단의 1련대로 여전히 보강되고있습니다. 특히 적들은 종심방어로 이전하면서 서울시내에 포와 기관총을 비롯한 화력진지들과 바리케트를 구축하여 강력한 방어선을 꾸리려 하고있습니다.

현재 아군은 53사, 54사, 905땅크려단만으로 서울을 압축하고있습니다. 서울포위를 위해 접근하던 52사 사단장이 인솔한 련대는 좌표 20, 23지대에서 항공폭격으로 저지되여 기대할수 없게 되였습니다…

전방지휘소는 서울해방전투를 다음과 갈이 조직하려고 합니다.

l. 보위성직속 예비포무력과 서울진출부대들의 모든 포와 박격포들을 서울시가 사정거리에 접근시켜 포당 l~l.5정량의 포탄으로 시가에 있는 일체 적의 방어시설과 유생력량을 격파소멸하려고 합니다.

2. …

3. 공격준비완료시간은 20시. 시가에 대한 포병준비사격은 20시부터 21시, 최종공격시간은 22시…》

김일성동지께서는 수신지를 책상우에 놓으시였다.

《김책동무, 포사격 말고… 다른 방법은 없겠습니까?》

김일성동지께서는 매우 힘겹게 이 물음을 꺼내시였다. 어쩔수 없이 이 방법을 택한 최용건이며 강건의 로고와 심정이 마쳐왔기때문이였다. 김책은 그이의 시선을 외면하며 나직이 대답올렸다.

《장군님… 파괴된것은 다시 건설하면 되지 않겠습니까. 저는 우리 포병들의 사격술을 믿고… 그대로 했으면 합니다. 다른 방법이 없지 않습니까.》

김일성동지께서는 집무탁쪽으로 천천히 걸음을 옮기시였다. 뚜벅뚜벅 저겨딛는 발걸음소리와 함께 시계의 초침소리가 유난히 크게 울렸다. 그이께서는 걸음을 멈추셨다.

《김책동무, 도시는 복구한다쳐도 사람들은 어찌합니까. 사람이야 다시 만들지 못하지 않습니까. 포탄에는 눈이 없습니다. 그 포사격으로 페허가 된 도시에서 과연 승리의 만세를 부를수 있습니까. 그런 승리가 우리에게 무슨 필요가 있습니까. 거기 서울엔 수십만이 넘는 우리 인민들이 살고있습니다. 그래 우리가 그처럼 이 전쟁을 피하기 위하여 애쓴것이 무엇때문입니까.》

그이의 음성은 짙은 고뇌와 안타까움으로 떨리며 울렸다.

《장군님!》

김책은 한마디 웨치고 더 말을 잇지 못하였다. 김일성동지께서는 괴로운 눈길로 김책을 보다가 무겁게 말씀을 떼시였다.

《언젠가 홍명희선생은 서울의 옛건축물과 우리 인민의 문화유산에 대하여 이야기하면서 그 건축물과 유산들은 남아있는것보다 외래침략자들의 침입에 불타고 잃어진것이 더 많았다고 가슴아파 했습니다. 그런데 그 얼마 남지 않은 선조의 유산들을 우리가, 바로 우리의 손으로 파괴할수 있습니까?》

김책은 불시에 눈앞이 흐릿해졌다. 멀리 경복궁의 단청이, 창덕궁의 퇴색한 바람벽이 얼른얼른 다가오는것 같았다. 서대문으로부터 광화문에 이르기까지 하얗게 흐르던 사람들의 물결, 20여년전 서대문감옥에서 금방 나와서 지지는듯 뜨거운 해볕에 비칠거리며 걸을 때 근심어린 눈길로 부축하며 《에구 가막소에서 나왔능기요.》 하며 목청을 흐리던 파파늙은 로인의 모습이 보인다.

출옥후 허헌과 함께 종일 돌아본 서울의 이 골목 저 골목이 몇초의 순간에 생생히 밟히우고 거지애들과 짐을 인 녀인들과 감투를 쓴 로인들의 군상이 흘러간다.

김책은 숙연한 낯빛으로 김일성동지를 우러러보았다.

《장군님, 저의… 생각이 짧았습니다.》

《사실 전방지휘소의 작전계획은 나무랄데 없이 째였고 훌륭합니다. 지금형편에서 포사격없이 서울을 해방한다는것은 용이하지 않습니다. 자칫 잘못하는 경우엔 몇갑절의 피해를 입을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포사격은 허용할수 없습니다.

나는 시가전을 한번 우리 식으로 산에서 익힌 유격전식을 도입해보자는것입니다. 아까 최용건동무에게 독촉할 때만도 명백치는 않았는데 이젠 떠오르는것이 있습니다. 그리고 야간공격도 고려해봐야겠습니다. 시가전에서 야간공격이란 인명손실을 크게 만들수 있습니다…》

그이께서는 집무탁에 가시여 부호자와 색연필을 집어드셨다.

일력장에 쓰신 글발에 피뜩 시선이 가셨다.

《17시: 우당련석회의 연설준비→사상동원! 물자보장!》

그이께서는 오늘 오후 각 정당 도위원장 련석회의에 나가 연설을 하시게 되셨던것이다.

《서둘러야겠습니다.》

김일성동지께서는 김책과 함께 보위성 작전국 사판실로 가시였다. 서울지구사판을 마주하신 그이께서는 시내에 종횡으로 뻗은 11개의 도로들에 장기쪽 비슷한 나무토막을 놓아가며 자신의 결심을 이야기하셨다.

《전방지휘소의 작전계획을 다음과 같이 변경하여야 하겠습니다. 공격시간은 래일새벽으로 하며 서울시가에 대한 포사격은 일체 불허하여야 합니다.

변경된 계획의 성과적보장을 위하여 우선 밤중으로 미아리-월곡리계선을 돌파하여 서울포위망을 최대한 좁힘으로써 총공격개시후 신속히 거리중심에로 돌입하여 시가전을 최단시간내에 결속지을 조건을 마련하는것입니다.

다음으로 오늘밤 보병과 땅크의 소부대들을 시내에 진입시켜 적방어거점들과 화력진지들을 기습타격함으로써 적방어에 일대 혼란을 조성하는것입니다. 야간습격은 항일무장투쟁시기의 성시 습격전투를 참작하여 진행하여야겠습니다. 이번 전투에서 특히 명심해야 할것은 서울에 있는 귀중한 우리 동포형제들의 생명재산과 유구한 민족문화의 재보들에 조그마한 피해도 없도록 하는것입니다. 이면에서 전투원들에게 정치사상사업을 잘하여야 하겠습니다.》

이 명령은 즉시 암호무선으로 변신되여 전방지휘소 무선대로 날아갔다.

고요한 수림속에서 청더구리가 그 긴 부리로 강대를 두드릴 때면 청아한 음악소리같이 따르락! 따르락! 공간을 울린다. 무전수들은 자기들의 전건소리를 딱따구리의 《연주》라고도 한다. 방음장치가 된 전방지휘소 최용건의 무전실에는 무선전신기가 그 음악을 《연주》하고있다. 최용건은 변신참모가 재빨리 암호문을 풀어 써넣는 무선전신테프를 왼손에 감아들고 한자한자 뜯어읽었다. 마지막부호가 《김일성》이라는 단어로 바뀔 때 최용건은 《음.》 하고 밀페된 방안의 긴장된 공기를 깨뜨렸다. 그는 오래동안 한자리에 서있다가 강건에게 테프를 넘겨주고 조용히 눈을 감았다.

《위대한분이요!》

그의 눈굽에 뭔가 구슬같은것이 맺혀 주르륵 흘러내렸다.

최용건은 무선실을 나서기전에 무선수와 변신참모에게 자기의 이름으로 감사를 주었다.

잠시후 전방지휘소의 무선수와 전화수들은 《포사격중지!》라는 말을 세상에 가장 아름다운 음악의 선률마냥 되뇌이며 모든 포부대 지휘관들에게 날려보냈다.

 

저녁해는 마지막 미소를 뿌려던지고있었다. 금빛불빛의 그 수만개의 빛살은 산자드락과 골짜기 숲과 나무에 연붉은 노을을 입힌다.

포구씌우개를 벗긴 대구경곡사포의 포신들도 그 빛에 붉게 번쩍인다. 포들의 전투준비는 끝났다.

《옜다, 승만이다.》

《옜다, 트루맨이다.》

포의 고정말뚝을 박으며 흥겹게 뇌이던 포병들의 먹임소리도 끝났다. 림운학은 말뚝을 박느라 힘을 쓰는 통에 통세가 나는 왼손을 감싸쥐고 이제 미흡한 구석이 없는가 포들을 돌아보았다. 그는 이까지 오는중에 왼손새끼손가락을 상했다. 그가 탄 포차가 소귀고개에서 헛바퀴질을 하였다. 좌우쪽은 급한 비탈이였다. 자칫하면 포와 함께 자동차까지 굴러내려가게 된 위급한찰나에 운학은 각목을 쥐고 바퀴밑에 뛰여들었다. 너무 덤벼 각목과 함께 그의 왼손이 바퀴밑에 들어갔다. 다행히 새끼손가락만이 이지러졌다.

《이건 개승만이한테 줄거야.》

《이건 노랑대가리 무쵸거고…》

우스개소리들에 운학은 그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곱등어새끼같이 생긴 포탄들에 신관을 맞추며 전사들은 기세가 올라 주고받고있었다.

(동대문?!)

운학은 아슴푸레 륜곽을 잃어가는 북한산장에 시선을 돌렸다. 그의 눈앞에는 마지막작별의 눈물을 옷섶에 휘뿌리며 섧은 웃음을 삼키던 련화의 하얗게 질린 얼굴이 피뜩 스쳤다가 사라졌다.

(이거 내가 너무 감상적인데.)

그는 싱긋 웃어보였다. 최용건보위상앞에서 한 물음이 맹랑한것이라고 상관들한테 꾸중을 받은 뒤끝에도 아직 자기가 정신을 못차린것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는 될수록 랭정해지려 애쓰며 이제 벌어질 장엄처절한 전투를 그려보았다. 《중앙청》이며 《경무대》며 《미대사관》, 적의 온갖 화력진지들과 방어시설물들은 모조리 불바다속에 들것이였다. 온갖 악과 부정의가 그 불바다속에 타버리고말것이다.

《모조리! 무자비하게!》

그는 비장하고도 준절한 표정으로 지그시 어금이를 깨물었다.

그리고 의식적으로 바람재에서 있었던 일을 상기하였다. 그때의 순간순간은 전쟁의 준엄성과 무자비성을 심각히 깨닫게 하는 영원히 잊을수 없는 충격으로 기억에 새겨져있었다. 자기가 탄 말이 꼬꾸라지고 땅에 나동그라졌을 때 왁 달려들던 적들이며 앞서 달리던 정찰병이 되돌아서 그의 허리띠를 잡아일쿠던것, 정찰병의 부축을 받아 말잔등에 올랐을 때 울리던 총소리, 총소리… 뒤에 앉은 자기가 아니라 앞에 앉은 정찰병이 총알에 맞아 말머리에 쓰러지던것, 전방지휘소마당에 와 그 정찰병의 주검을 내리우며 피터지게 마음속으로 다졌던 맹세를 되돌이켜보았다.

전쟁에서는 개인의 운명을 생각해서는 안된다. 전쟁은 준엄한것이다. 여기서 개인만을 생각하면 결국 비겁쟁이로, 도피분자로밖에 될수 없다. 자기라는 존재를 잊어야 한다. 개인의 온갖 희망과 소원을 이 전쟁에서의 승리를 위해 복종시켜야 하고 희생시켜야 한다. 그 정찰병은 바로 그것을 위해서 자기를 바치지 않았는가. 그런데 어찌하여 자기는 그때의 맹세, 그때 도달한 비장한 각오의 세계에서 떨어져 몇사람의 운명을 가지고 근심하는가. 운학이 이런 모순된 사색과 감정을 안고 포탄신관을 꽂고있는 포병들쪽으로 걸음을 옮길 때 《참모동무!》 하는 소리가 그를 멈춰세웠다. 화력부관이였다.

《련포군장감시소에서 찾습니다.》

운학은 숨을 크게 들이쉬였다.

(시작이로구나.)

그는 전투가방을 매만지며 다시금 북한산장을 바라보았다. 일순간 무서운 환각이 파도쳐왔다.

불바다가 된 도시, 대구경포탄의 폭발, 재개비로 화하는 집들… 운학은 입술을 깨물었다.

그는 이 말을 뇌이며 화력부관에게 기세좋게 소리쳤다.

《갑시다. 음악을 연주해야지요.》

련포군장감시소앞 아카시아수림속에는 중대장이상 군관들이 다 와있었다. 운학은 자기의 림시상관인 포병부부장을 찾다가 만나지 못하고 맨 좌익 뒤줄에 가 섰었다. 《차렷!》구령과 함께 감시소에서는 련포군장과 함께 강건총참모장이 나왔다. 운학은 이때부터 모든 일이 어떻게 흘렀던지 기억이 희미하다. 강건총참모장은 김일성장군님의 명령서를 랑독하였다. 운학은 모든 군관들이 헤쳐갔을 때도 그자리에 그냥 서있었다.

《동무로구만!》

강건총참모장이 그의 앞에 다가와 서있었다.

《총참모장동지, 무슨 일인지 말씀해주실수 없습니까?》

림운학은 꿈속에서처럼 물었다. 강건은 감회어린 눈길로 보다가 말했다.

《일체 포들의 서울시가포격은 금지되였소. 장군님께서 명령하셨소. 인민들과 도시의 구원을 위해 취하신 조치요.》

《장군님께서?!》

운학은 강건의 옆에 선 별로 잘 알지 못하는 포병부부장을 꽉 그러안았다. 흐느낌을 막으려 그의 가슴에 얼굴을 박았다. 강건은 젖어든 눈길로 그를 보았다.

전쟁이란 매 인간의 구체적인 심정까지 계산되고 고려되는것이 아니다. 그러나 오늘의 싸움은 이 평범한 군인의 마음속에 깃든 어두운 그림자마저 가시기 위하여 모든 작전이 검토되고 수정된것이 아닌가.

《총참모동지, 오늘밤 저를 야간습격조에 보내주십시오. 전 서울시가를 잘 압니다…》

눈물을 털고난 운학은 비장한 결심에 불타는 얼굴로 청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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