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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소설 50년 여름 제2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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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강산
댓글 1건 조회 3,691회 작성일 20-02-04 01: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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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장

 

내각의 하루일과가 끝나가는 시간이였다. 문건을 보시던 김일성동지께서는 방안이 갑자기 어둑해지는것을 느끼며 창문쪽을 바라보시였다. 한낮의 더위를 막느라고 닫아놓은 창문밖으로 침침히 흐려드는 하늘이 보였다. 트레트레한 먹구름이 겹겹이 엉켜들며 허옇게 트인 공간마다 빼곡이 메워들었다.

김일성동지께서는 창쪽에 다가가 문을 활짝 열어제끼시였다.

벌써 비발이 뿌리치며 습하고 서늘한 공기가 밀려들었다.

무심중에 손을 내밀어보시였다. 땀기어린 손바닥에 몇개의 비방울이 날려와 닿았다. 먼 우뢰질소리가 들렸다. 뒤미처 그 천둥이 불러낸듯 우- 하는 소리와 함께 폭우가 쏟아져내리기 시작하였다. 창가림이 찢어질듯이 펄럭거리며 그이의 팔에 휘감겨들었다.

《…오끼나와남쪽에서 태풍발생, 반경 80, 중심기압 960미리바르, 〈엘시〉라는 이름을 띤 이 태풍은 급격한 속도로 북상…》

정오에 받은 기상수문국 통보자료가 상기되셨다. 이 태풍의 영향으로 다른 피해가 없을가 하고 다시금 생각을 굴려보셨다. 저수지며 농경지들, 도로며 철도들을 그려보시는 그이의 뇌리속에는 래일 있을 백두산 림철개통식이 떠오르셨다. 《엘시》의 태풍은 백두산쪽에도 비를 몰아갈것이였다. 그렇게 되면 개통식행사가 시원찮게 될것이다. 그곳 사람들의 실망은 더욱 커질것이고… 김책은 얼마전 그곳 건설책임일군에게 개통식때는 김일성동지께서도 내려가실수 있을것이라고 알려줬다고 했다. 사실 보름전까지만 해도 김일성동지께서는 개통식을 계기로 김책이와 함께 북부지구의 공업기지들과 백두산지구의 옛 싸움터들을 돌아볼 계획을 하셨었다. 그러나 지금의 정세는 그러한 계획을 허용하지 않고있다. 도꾜와 서울의 심상치 않은 움직임은 김책이마저 그리로 떠나는것을 주저하게 하고있다.

번쩍!

번개의 푸른 화광이 하늘 한귀퉁이를 베여냈다. 뒤이어 대지를 깨뜨릴듯 한 폭음이 요란스럽게 지나갔다. 김일성동지께서는 천천히 창문을 닫으시였다. 그리고 시계를 보시였다. 홍명희부수상이 올 시간이 림박하였다. 그이께서는 다시 서탁에 나앉아 문건을 보기 시작하시였다.

《…〈척양척왜〉론의 신봉자로서 리승만을 극도로 혐오질시하나 〈반공〉의 리념적일치로 괴뢰정부에 동조… 상해〈림정〉에서 〈반공〉테로단에 관계…

※ 보천보전투직후 유격대를 찾아 동북지방을 편력한바 있습니다. 친구에 대한 의리심은 있음…》

이 대목에 시선을 멈추신 그이께서는 마지막 줄에 밑선을 그으셨다. 김일성동지께서는 어제저녁 홍명희부수상을 만나 남북조선 제정당사회단체련석회의참가대상에서 극우익반동이라고 제외시켰던 괴뢰정부의 일부 고위인사들까지 초청할데 대한 의향을 비추시고 매 인물의 동향자료를 만들데 대한 과업을 주셨다. 려현역에 나간 우리측 평화통일호소문전달자들에게 만여발의 총탄을 퍼붓고 마지막에는 체포까지 감행해나선 적들의 야만적행위에 극도로 분격하고 한편 사태의 비극적인 진전에 불안을 금치못하던 홍명희는 밤을 밝혀 이 문건을 만들었다. 평소에는 상대할 필요조차 없는 반동들이라고 타매하였던자들에 대해서도 뭔가 긍정점을 찾으려 애쓴것이 대목마다에서 느껴졌다.

그이께서 문건의 마지막 페지를 번지실 때 강부관이 들어섰다.

《장군님! 김책동지와 최용건동지, 강건동지 세분이 오셨습니다.》

《강건?! …》

김일성동지께서는 자리에서 일어나시였다.

《들어오시오.》

빠르신 걸음으로 문가로 나가시던 그이께서는 강건을 보고 저으기 놀라시였다. 강건의 입술에는 보풀이 일고 알릴듯말듯 피가 진 눈에는 근심어린 빛이 짙게 배여있었다.

《앓지 않았소?》

김일성동지께서는 거수경례를 하는 강건의 손을 잡아내리우며 유심히 보시였다. 강건은 그 시선에 눈길을 내리깔았다.

《앓지 않았습니다. 정세가 좋지 않습니다. 사태는 전쟁을 예고하고있습니다.》

강건의 표정은 긴장과 흥분으로 굳어져있었다. 김일성동지께서는 그의 말에 따라 더욱 엄숙한 빛으로 서있는 김책과 최용건을 돌아보고 우선우선한 태도로 말씀하시였다.

《아무리 바빠도 좀 앉읍시다.》

그이께서는 푸른색 라사직을 씌운 긴 앞상에 다가가시였다. 강건에게는 친히 자리를 권하시고 선풍기를 그쪽에 돌려놓으시였다. 그러시고는 보시던 문건을 접어놓으시였다. 무어라 이름할수 없는 압박감이 가슴을 지그시 눌렀다.

《그럼 강건동무의 이야기를 들어봅시다.》

그이께서는 책상우의 목책을 끄당겨놓고 연필을 잡으시였다.

강건은 소리없이 재빨리 일어섰다. 그는 19일밤에 38선으로 나갔다. 그가 나가서 목격하고 듣게 된것은 보위성청사안에서 생각하였던것보다 더욱 엄청나고 놀라운것들이였다. 수많은 산고지들을 오르내리고 포대경과 마주하기도 하고 경비대 지휘관들과 이야기도 나누며 그는 고질인 위병탓도 있겠지만 입맛까지 싹 잃었다. 련천, 화천 지대에서 목격한 육안으로도 환히 보이던 갓 닦은 적의 기동로들, 얼룩덜룩한 위장포에 가리운 포진지들, 숲과 산기슭에 줄느런히 자리잡은 천막들에서 받은 충격은 그를 숨가쁜 흥분에 몰아갔다.

《그래 그 예고한다는 근거는 무엇이요?》

김일성동지께서는 여유어린 기색으로 강건을 보시였다. 맞은편 벽에 걸린 조선자연전도에 시선을 준채 입술을 깨물다가 빠른 어조로 말하기 시작하였다.

《제가 나가본 38선 중부와 동부계선에서 적들의 공격대형편성과 공격출발진지 진출은 전부 완료되였다는것입니다. 포와 인원, 전투기재의 38선에로 집중은 어저께로 끝났습니다. 아군 경비대와 대치한 38선 거의 모든 지역들에 야영천막들이 전개되고 새로운 포진지들이 개설되여있습니다. 제가 본 련천앞 도로로는 21일 하루동안에만도 무려 50여대의 운수차에 적의 보병들이 실려왔습니다. 저는 먼저 한 경비초소의 감시기록부자료를 인용하려고 합니다. 양양군 기사문리 경비대의 감시기록입니다.》

강건은 웃주머니에서 수첩을 꺼내여 미리 접어놓아 표시한 부분을 펼치고 마디마디 력점을 찍으며 천천히 읽어내려갔다.

《6월 19일 밤 10시부터 6월 20일 새벽 5시까지 50여대의 화물차로 포와 탄약(추증한것입니다)수송.

6월 21일 새벽 150여개의 야영천막 발견.

6월 22일 아침 10시 석대의 스리쿼타 경비초소앞 700메터 지점에 도착, 다섯명의 미군장교와 다수의 괴뢰군 장교들이 쌍안경으로 북측지대를 보면서 지도작업. 이들이 돌아간지 30분후 기사 문리경비대지휘부 주변과 도로변들에 여섯발의 포탄이 떨어짐.(새로 전개한 포진지들에서의 시사사격으로 인정됨.)

6월 22일 밤 12시부터 6월 23일 새벽 3시까지 경비초소 전방 남쪽분계선에 적괴뢰보병들 지뢰해제작업 진행.

6월 23일 괴뢰군 공병대위가 의거입북. 매 중대장들에게까지 공격지대지도가 하달되였다고 함.》

강건의 읽기는 여기서 끝났다. 그의 얼굴이 눈에 뜨이게 해쓱해졌고 까만 두눈은 열기가 어려 번뜩였다. 그는 수첩을 접어넣는다는것이 헛손질로 끝나자 그대로 수첩을 움켜잡은채 말을 이었다.

《다 아시겠지만 오늘아침 채병덕이가 장갑차대대를 끌고 연안에 나왔다고 합니다. 그뿐아니라 인민유격대 토벌에 내몰리워 있던 괴뢰 2사 3사 5보사도 전방으로 움직이고있다고 합니다.

만약 전면전쟁도발이라면 몇달후가 아닌 래달, 아니 이 며칠안에 터질수도 있습니다.》

강건은 격하게 부르짖고 입술을 깨문채 꼿꼿이 서있었다. 방안에는 한동안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선풍기 돌아가는 소리만이 들렸다. 김일성동지께서는 강건이라는 이름자외에 아무것도 써놓으신것 없는 자신의 목책에 시선을 주신채 생각에 잠겨계셨다.

그이께서는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자신에게 쏠려있음을 생생히 느끼고계셨다. 흥분할 때면 항용 그러하듯 이마전에 피줄이 파랗게 살아오른 김책이 두손으로 책상모서리를 쥐였다놓았다하는것도 느끼셨으며 최용건이 석상처럼 굳어져 벽의 한점을 꿰뚫어지도록 응시하는것도 놓치지 않으셨다.

(알고있은것인데, 모르고있은것은 아닌데… 당황인가, 긴장인가, 아니면 놀라움인가, 불안인가?)

그이께서는 이들을 두고, 또 자신을 두고 속으로 뇌여보시였다. 그 어떤 쇠덩이같은 인간일지라도 의지와 마음이라는것은 환경에 따라 흔들릴수도 있다는데까지 생각이 미쳐가셨다.

《강건동무!》

김책의 칼칼한 목소리가 침묵을 깨뜨렸다.

《적의 도발에 대처해 어떤 안이 있습니까?》

여느때라면 김책은 이런 자리에서 이런 질문을 삼가할것이였다. 그는 김일성동지의 사업을 보좌하는 부수상들중에서 첫째가는 일군으로 지목되여있지만 좀해서는 앞에 나서기를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였기때문이였다. 김일성동지께서는 《나 역시 그걸 묻고싶소.》 하는 눈길로 강건을 보시였다. 강건은 망설이는 빛으로 서있다가 결심한듯 입을 열었다.

《적들의 상태에 비해볼 때 우린… 첫 타격을 제압하고 격퇴시킬 준비가… 미약합니다. 38선상에 배치된 적아의 무력을 대비하면 압도적으로 적들이 우세합니다. 적들의 도발책동을 예견하여 일부 군부대들이 38선 가까운곳에 나가있으나 중장비기재들은 대개 후방에 있고 거기 나간 군인들도 거의가 농촌 모내기에 동원된 형편입니다.

이제 그 부대들과 후방에 있는 사람들까지 전투준비를 시켜 38선에 내보낸다 해도 빈공간을 다 메울순 없습니다. 그리고 여기엔 절대적으로 시간이 모자랍니다. 특히 중동부계선이 문제입니다. 우리는 작년도부터 적들이 서부를 주공방향으로 정하고 침공책동을 벌리는데 대처하여 그곳에는 일정하게 진지들을 꾸렸습니다. 그러나 현재 중동부계선은 적들이 집결시킨 병력을 볼 때 거의 빈공간이나 다름없습니다. 적들이 이것을 알고 주공을 여기에 지향시키지 않겠는가고 우려하는 지휘관들도 있었습니다. 물론 중동부에로의 력량집중이 우리의 시선을 돌리기 위한 기만일수도 있으나 결코 일리가 없는것은 아니라고 봅니다. 적들은 작년도 서부로의 침공계획이 우리에게 알려졌다는것을 알고 엉뚱한 수를 꾸밀수도 있다는것입니다. 가급적으로 여기에도 두개사단범위의 력량은 더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지금 상태에서 이 요구를 실현한다는것이 무리라는것은 압니다. 그러나 이것은 절대적으로 필요한 일입니다. 장군님, 전…》

강건의 입술이 알릴듯말듯 떨었다. 까만 눈동자는 강렬한 희망과 호소를 담고 번쩍였다. 그는 떨리는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이제라도 전국적인 동원이나 긴급조치가 필요하다고 봅니다…》

강건은 눈을 깔며 어떤 질책도 받아들일 자세로 버티고 섰다.

혁명의 전취물을 지킬 중임을 받아안은 총참모장으로서 그는 자기의 우려와 소망을 숨김없이 털어놓은것이다. 그의 너무나도 돌연적이고 엄청난 제기에 김책과 최용건은 아무말도 못하고 묵묵히 생각에 잠겨있었다.

《앉으시오. 강건동무!》

김일성동지께서는 부드럽게 말씀하시며 앞상우의 선풍기를 강건의 쪽에 더 바투 옮겨놓으시였다. 강건은 그제야 철철 흐르는 땀을 느끼고 손수건을 꺼내 얼굴을 문질렀다. 김일성동지께서는 그의 수척하고 창백한 얼굴을 보시다가 불쑥 말씀을 떼시였다.

《동무가 떠날 때 내가 무슨 과업을 주었댔소.》

의외의 질문에 강건이 얼떠름해 일어서려는것을 김일성동지께서 손짓으로 제지시키시였다.

강건은 질문의 의도를 깨닫지 못한채 김일성동지의 얼굴빛만 눈여겨보았다.

《동문 내 당부를 잊었군. 나는 동무를 보내면서 식사시간을 정확히 지키고 5월 13일에 내린 의사의 처방대로 식사할것을 지시에 포함시킨것 같은데-》

팽팽히 긴장되던 강건의 얼굴빛이 확 풀렸다. 알릴듯말듯 홍조가 지나갔다. 김책과 최용건도 이 《엄혹한 사태》에서 잠시 물러 나게 하신 말씀에 소리없는 웃음을 지었다.

김일성동지께서는 미간을 찌프리셨다.

《그건 아무것도 아니라는거요? 그 관점을 언제면 고치겠소?》

김일성동지께서는 저으기 엄한 어조로 계속하시였다.

《내가 알아보니 동무는 오늘아침도 안먹었소. 그래 벌써부터 몸을 혹사하다가… 일단… 도래하면.》

이때 이 방에 있는 사람들은 생략된 단어 《전쟁》이라는 말을 다같이 동시에 느끼며 이 여름날 지역의 평화스러운 방에 계시는 그분의 유연한 웃음과 온화한 표정뒤에 얼마나 크고 요란스러운 세계가 있는가를 절감했다.

그이의 음성은 점점 높아지면서 우렁우렁 울렸다.

《가장 위급하고 어려운 시각이 오면 어찌겠소?!… 벌써 여러 동무들이 떠나가지 않았소.》

이 순간 방안에는 정적이, 공기의 흐름조차 얼어붙고 호흡조차 멎어버릴듯 한 정적이 깃들었다.

강건에게는 불쑥 추도가의 처절한 노래가락이 울려오고 비애에 싸인 령구차가 천천히 움직여가는것이 보이는것만 같았다.

김정숙동지와 안길참모장을 떠나보낸 가슴의 상처가 누구에게도 아물지 않은 때였다.

《물론 강건동무의 심정은 리해됩니다. 38선에 나가 직접 보게 되니 사태의 엄중성과 절박성을 더 심각히 느꼈을겁니다. 그러니 식사도 뭐도 다 잊고 뛰여왔겠지요. 그러나 이건 내가 아는 강건동무답지 않습니다. 그래도 한 나라 총참모장이라는 사람이, 수만 왜적과 싸우면서도 눈섭 한번 까딱할줄 몰랐다는 빨찌산이 그쯤한것에 당황해서 덤비면 어떻게 합니까. 인민군 전 하사군관들이 다 동무의 얼굴을 볼것이 아닙니까. 나나 여기 김책, 최용건 동무도 그렇습니다. 전방에 나갔던 동무가 뛰여들어와 〈야단났습니다.〉 하고 놀란 소리를 치면 놀라지 않겠습니까. 우리가 놈들의 책동을 전혀 모르고있었던가 전혀 뜻밖에 일어난 사태라면 모르지만 우리야 이미 작년부터 적들의 전쟁도발책동에 맞서있는 사람들이 아닙니까. 고립무원한 상태의 빨찌산때도 끄떡않던 우리가 이젠 나라가 있고 인민이 있고 정규적인 무력을 가지고 총포탄을 만드는 공장까지 가지고있는데 무엇이 두렵단말입니까. 나는 강건동무가 오늘 적의 실체는 보면서도 우리 군대와 인민은 왜 보지 않았는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김일성동지의 말씀은 엄하고 준절하였다. 그런데 그 말씀을 듣는 강건의 얼굴은 비록 쑥스러운 빛은 없지 않으나 확연히 밝아졌다. 정기어린 두눈이 열정과 경모의 정을 담고 김일성동지를 우러렀다.

《작년에 최현동무는 송악산에서 한개 대대력량으로 근 5배나 되는 적의 공격을 물리쳤습니다. 물리쳤을뿐만아니라 그때 그 동무는 서울까지 쳐나가겠다고 했습니다. 그때 내가 막지 않았으면 인민들의 희생을 본 그가 서울까지는 몰라도 의정부까지 나갔을것입니다. 어떻습니까. 가령 강건동무가 한개 련대쯤 가지고 화천이나 련천에 틀고앉아있다면 적의 한개 사단쯤 막을수 없겠습니까?》

강건의 입가에는 저도 모르게 웃음이 떠올랐다.

《문제는 믿음입니다. 자신과 자기 군대, 자기 인민에 대한 믿음이 없으면 이런 정세하에서 다 신경환자가 될수 있습니다.

이렇게 생각해봅시다. 우리 매 사람이 전호에 있다고말입니다. 혼자라고 생각하면 단 일분도 견디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옆에 전우들, 린접의 부대들, 뒤의 인민들을 생각하면 담이 생기고 힘이 생기고 용기가 생깁니다. 군사적용어로 말하면 종심과 익측 문제입니다. 종심 이것은 무한대한 인민이며 익측 이것은 피로 맺어진 전우들입니다.》

그이의 눈길은 정을 가지고 열을 가지고 매 사람의 모습을 따뜻이 감싸시였다. 그이께서는 의자를 조용히 밀치며 자리에서 일어서시였다.

《지금 여기서 적이 언제 쳐들어오는가 그리고 서부로 쳐들어오는가 중부로 쳐들어오는가를 완전히 결론한다는것은 불가능합니다. 그러나 견해는 명확히 가지고있어야 합니다. 강건동무의 판단대로 적은 쳐들어올것이며 그것도 시급한 시일내에 시작할것입니다. 서부인가 동부인가 하는데서 나의 생각은 변함없습니다. 적은 산이 많은 중동부를 주타격방향으로 설정할수가 없습니다.

맥아더는 아직 산에서 싸우는것은 모릅니다. 그가 숭상하는 나폴레옹이나 씨저도 벌판에서 싸웠고 그 역시 벌판에서 싸우는것밖에 모릅니다. 그렇지만 문제는 이것이 아닙니다. 적이 언제 어떻게 들어오겠는가 하고 적의 기도에 따라서만 움직이려 하면 수세에 빠집니다. 우리는 든든한 배심을 가지고 적들의 준동을 살피며 끝내 쳐들어오는 경우 주동적인 작전으로 적을 피동에 몰아넣겠다는 각오와 결심을 굳게 다지는것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배심을 든든히 가집시다. 그래야만 우리는 평화적건설도 계속할수 있고 적들이 감히 덤벼드는 경우 당황하지도 동요하지도 않고 싸울것입니다.》

김일성동지께서는 방안을 둘러보시고 창문쪽에 시선을 멈추셨다. 창문쪽은 포장을 드리운것처럼 보였다. 김책이 일어나 전등스위치를 넣자 천정의 둥근 전등에서 은회색빛이 쏟아져내렸다.

김일성동지께서는 여전히 어둠을 감촉하시는 눈길로 창가를 보시였다. 방안에 불을 켠때문인지 밖은 더 어두워보였다. 문득 노래소리 같은것이 들렸다. 김일성동지께서는 그 소리에 귀기울이시다가 일어나 창문으로 다가가셨다. 창가림을 제끼고 문을 여시였다. 창광산둔덕아래의 학교쪽으로부터 풍금소리와 함께 밝은 노래소리가 흘러들어왔다.

 

        백두산 말기에 백학이 너울너울

        해방된 강산에 뻐꾸기 뻐꾹 뻐꾹

        …

 

이즈음 농촌이며 가두 어디서나 즐겨부르는 노래였다.

김일성동지께서는 분명 고중써클원들이 부르는듯 한 그 노래에 심취되신듯 한동안 서계시다가 돌아서시였다.

《지각있는놈들이라면 저런 노래를 부르는 사람들에게 감히 덤벼들진 못할것이요.》

최용건과 강건이 떠나가고 김책이 뒤따라나가다가 돌아보았을 때 김일성동지께서는 침통한 기색으로 비내리는 밖을 주시하고계셨다.

《그냥 계시겠습니까?》

김책이 물었다. 김일성동지께서는 벽시계를 언뜻 보시였다.

《홍명희선생을 만나기로 했습니다.》

《퇴근하지 않았겠습니까.》

《그냥 갈리가 없는데…》

김일성동지께서는 부관실과 련결된 신호단추를 누르려다가 문쪽으로 걸음을 옮기시였다.

부관실에서는 홍명희부수상이 깜장스카트에 흰브라우스를 입은 동싯한 얼굴의 처녀와 함께 무슨 그림인가에 열중해있었다. 문소리에 고개를 든 처녀는 장군님의 뒤켠에 선 김책의 엄엄한 얼굴올 보자 옷걸이판옆에 물러섰고 홍명희는 약간 붉어진 얼굴로 인사를 했다.

《기다리셨군요?》

김일성동지께서 민망스런 표정으로 말씀하시며 강부관에게 나무람어린 눈길을 주시자 홍명희가 서둘러 말씀올렸다.

《부관동무가 알리겠다는걸 제가 말렸습니다. 여기서 그림감상을 했습니다.》

김일성동지께서는 홍명희가 집어드는 수채화를 보시였다. 옷걸이판에 붙어서 지금 어쩔바를 모르는 저 오영혜가 8. 15해방기념일을 계기로 열리는 미술작품현상응모에 내겠다고 보름전부터 틈틈이 그리던 그림이였다. 김일성동지께서는 그림의 소재로부터 주제에 이르기까지 오영혜와 이야기가 있은지라 새삼스러운것이 없었지만 찬찬히 여겨보시였다. 전람회에 낼수 있는가 없는가에 대해서는 그이께서 결론해달라고 오영혜가 이미전에 부탁을 드렸기때문이였다. 오영혜는 희생된 오중성의 딸로서 김일성동지께서 각근한 관심을 가지고 돌봐주시게 된 그 많은 유자녀들중의 한사람이였다.

《어떻습니까?》

김일성동지께서는 홍명희에게 물으시였다.

《저는 지지표를 주기로 했습니다. 이건 영혜의 당당한 출세작이 될수 있습니다. 다만 이 옷차림에서 영혜와 의견이 상치되였습니다.》

홍명희는 익살어린 눈길을 오영혜에게 주었다. 오영혜는 도릿한 얼굴이 홍시처럼 익어 숨조차 크게 못쉬고있었다. 《온 나라가 배운다》라는 제목을 붙인 그림은 일을 끝마친 로동자들이 야간등교수업을 하는것을 형상하였다. 칠판앞에서 산수문제를 푸는 중년나이의 남자를 중심에 앉히고 창문밖에서 그 광경을 지켜보며 저희들끼리 속삭이는 인민학교 학생들의 웃음어린 모습을 측면으로 조화시켜 생신하고 밝은 양상을 띠고있었다.

그런데 칠판앞에 선 사람은 아래우 맞달린 푸른 작업복을 입고있었다. 김일성동지께서는 오영혜가 로동자를 형상하기 위하여 의도적으로 그 차림을 시켰음을 알았으나 내색하지 않으셨다.

《이 동무가 아마 지각을 한 모양입니다. 옷을 갈아입을 시간이 없었겠지요.》

《장군님!》

오영혜가 얼어불었던 입을 열었다.

《그건… 부수상선생님이 전형화에 맞지 않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고치기로 했습니다. 다시 생각해보니… 이런것을 두고 자연주의표현이라고 하는것 같습니다.》

《그-래?!》

김일성동지께서는 새삼스레 오영혜를 보시였다. 동북에서 나온 첫해에는 조선글조차 똑바로 못쓰던 그가 《유식한 술어》까지 탕탕 쓰는것이 우습기도 하면서도 놀라우셨다. 그러나 그림 하나를 두고 가슴을 조이는 영혜의 긴장된 눈매를 보면볼수록 가슴 한복판을 스쳐가는 근심과 불안을 지우실수 없었다. 이 천진란만하고 순진한 영혜가 지금 시시각각 다가오는 엄혹한 사태를 안다면 어찌할가.

《접수되면 고쳐야지. 그게 좋겠다.》

김일성동지께서는 자신의 심중이 드러나실가봐 재빨리 말씀하시고 돌아서시였다.

《장군님, 무슨 좋지 않은 일이라도 생긴것이 아닙니까. 안색이 좋지 않으십니다. 최용건선생도 그렇고 김책선생도 그렇고…》

집무실에 들어선 홍명희는 자리를 잡아 앉기바쁘게 이렇게 물었다. 홍명희가 만든 문건을 끄당겨 펼치시던 김일성동지께서는 뜻밖의 물음에 놀라움을 금치 못하고 마주보시였다. 소년의 눈처럼 티없이 맑은 로인의 안청에 드리운 다심한 정과 근심어린 빛을 포착하신 그이께서는 이 오랜 학자며 작가인 부수상앞에서는 아무것도 숨길수 없음을 깨달으셨다.

《선생님, 전쟁이 터질것 같아서 그럽니다.》

군살이 없는 홍명희의 갱핏한 얼굴이 재빛으로 변해갔다.

《장군님…》

다시 고개를 쳐들었을 때 홍명희의 눈시울이 떨었다.

《전쟁은 꼭 터지고야말것입니다. 이 땅의 력사가 그렇게 비틀러져있는것이 아니겠습니까.》

재차 말을 잇는 홍명희의 눈에는 처연하면서도 슬픈 빛이 넘쳐흘렀다.

어찌보면 모든것을 체념한듯 하고 또 다르게 보면 울분에 지쳐버린듯 한 표정이기도 하였다.

《정통적인 맑스주의와는 좀 어긋날지 모르지만 력사란 결국 순환과 반복의 과정이 아니겠습니까. 물론 발전이라는 의미에서 라선형적반복이라고 보지만… 전 이즈음 리승만패당과 미국이 하는 노릇을 보고 천년전에도 있었고 백년전에도 있은 반역을 봅니다. 사색당쟁에 피눈이 되여 날뛰고 돈과 권력이라면 제 나라 제 인민까지 서슴없이 팔아먹는것이 리완용의 대에 끝난것이 아니니 이 얼마나 안타까운 일입니까.》

《그래도 시대가 달라지고 인민들이 각성하지 않았습니까.》

《장군님, 옛말에도 민심이 천심이라 하면서 백성의 힘에 대해서 말했고 더우기 맑스주의는 인민이 력사의 창조자라는것을 명백히 찍었지요. 필연이란 의미에서 보면 인민이, 정의가 승리한다는것은 론할것이 없습니다. 그렇지만 력사란 우연과 필연의 사이길에서 방황하는 나그네라는 말이 있는것처럼 우연에 기울어질때가 적지 않거든요. 부정의가 정의를 심판하고 참살한 경우가 얼마나 많았습니까. 현대에도 그렇지 않습니까. 인민의 의지대로 한다면 이미 사회주의는 빠리콤뮨에서 성취되여야 했고 일본제국주의는 조선땅에 발을 붙이지 못해야 했으며 히틀러는 총통자리에 올라앉지도 말아야 했을겁니다.》

《허허, 선생은 저를 몹시 난감하게 하는데요.》

《제 장군님앞이니 다 터놓습니다. 다른 사람들 알면 로망든 늙은이 소리라고 펄쩍하겠지만… 》

《계속하십시오. 흥미있습니다.》

김일성동지께서는 홍명희의 현학적인 론조에 끌려 잠시나마 현실의 중압에서 벗어나신 기분이였다. 홍명희는 방금전의 비감어린 빛을 다분히 가신채 이야기에 열중하였다.

《전쟁에 대한 말이 났으니 장군님, 인류가 생겨나 지금까지 계산해본데 의하면 1만4천번의 전쟁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전쟁에 대해서는 처음부터 많은 사람들이 반대해나섰습니다. 싸움을 하면할수록 더 그랬습니다.

그러나 첫 전쟁이 있은 때로부터 수천년이 지난 오늘까지 전쟁은 계속 일어나며 이제는 〈전쟁유익설〉이라는 체계정연한 리론까지 나오고있습니다. 30여년전의 빠리국제협정은 조건부를 주긴 했지만 전쟁을 국제법으로 승인하기까지 했습니다. 이런데서보면 맑스주의자들도 크게 례외로 되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반혁명적폭력에 혁명적폭력으로 맞서자는 구호는 결국 전쟁에 대한 인정이 아니겠습니까. 이렇게 보면 전쟁은 없을수 없습니다.》

《그럼 전쟁에 대해 선생생각은 어떻습니까?》

《할것은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지금 리승만이가 내놓고 북침하겠다고 하고 덜레스까지 날아들어 전쟁모략을 꾸미고있는판에 칼 들어 오너라 하고 기다릴수야 없지 않습니까. 기회를 놓치다가는 큰 참화가 빚어질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엥겔스나 레닌은 이에 대해서 〈씨뚜아찌야〉라는 뜻으로 풀이했던것 같은데 결단을 내릴 때가 왔다고 생각합니다. 자기 전취물을 지키기 위한 이 결단은 맑스주의원칙에도 부합되는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맑스주의라구요?》

김일성동지께서는 허구픈 웃음을 지으시였다. 김책이나 다른 누가 이렇게 말했다면 그것은 응당하다고도 할수 있었다. 그러나 홍명희가 이렇게 말한다는것은 상상밖이였다.

홍명희는 맑스주의를 연구했으나 자신을 맑스주의자라고 하지 않았다. 그는 공산주의자들로 꾸려진 이 내각에서 유일한 비당원부수상이였다. 저 멀리 한일합방의 비운의 날 일제침략자들의 조선강점에 항거하여 선친이 자결한 그때로부터 한생의 목표를 구국독립에 둔 홍명희는 일찌기 1920년대에 《신간회》창립자로서 정치운동에 뛰여들었다. 그 길에서 《민족개량주의》의 황혼을 체험하였고 신사조로 물결쳐들어온 어중이떠중이 좌우경 공산주의리론과 운동의 탁류속에서 이것도 저것도 다 아니라는 쓰디쓴 환멸과 좌절감도 맛보았다. 모든 주의와 운동이 파벌의 란투극으로 종말을 고하고 일제침략자들의 총부리밑에 스러져버릴 때 그는 세상을 개탄하며 은둔생활로 들어갔다. 그에게 남은것이란 《떠가는 구름 흐르는 물같이 거침이 없고 티가 없어야 한다.》는 좌우명뿐이였다.

그러나 그 좌우명과 《애국을 저버리지 말라》는 선친의 유언을 지킨다는것마저 어려운 일이 아닐수 없었다. 해방을 맞아 김일성장군님을 찾아오는것으로 그는 자기의 좌우명과 량심, 선친의 유언을 참답게 지키는 활로를 찾았다. 조선력사에 대한 깊은 통찰과 파란많은 한생의 귀추끝에 그가 얻어내고 표방하는 교훈이란 한나라 한집안에서 당쟁과 파쟁은 멸망의 징조라는것이였다. 그는 오직 조국의 평화통일에 마음기울이며 민족의 화해와 번영을 지망하는 사람이였다. 서울에는 그의 벗들이 많다. 괴뢰정부의 많은 사람들과도 친면이 두텁다. 그런데도 그는 자기의 과거와 친지들이 있는 낡은 세계와의 싸움을 정당화한것이다.

천성이 참하고 단정한 이 기품있는 로인의 비상한 결단은 감정이라기보다 오랜 력사를 추슬러 얻은 론리적해답에서 나온것일것이다. 그리고 그 해답을 맑스주의전쟁론으로까지 공고화시키고있다.

그렇다. 맑스와 레닌의 전쟁론에서는 절대의 다수 피압박계급의 승리를 위해서는 그 결정적기회에 선손을 써 싸우는것이 필요하다고 하였다. 김일성동지께서는 머리를 저으셨다.

《우리는 그럴수가 없습니다. 이 땅에서 한겨레가 서로 피흘리는 싸움에 대해서는 그것이 설사 맑스주의, 그보다 몇배로 훌륭한 주의로 정당화된다 하여도 받아들일수 없습니다.》

김일성동지께서는 홍명희에게서 뭔가 다른, 전쟁이 아니라 평화에 대한 희망과 가능성을 들으려고 기대하셨던 자신을 돌이켜보며 서운함을 느끼시였다.

《그럼 선생이 이 〈국회의원〉과 〈정부장관〉들에 긍정점까지 밝히려 애쓰신것은 무엇때문이였습니까? 선생은 지금 이 시각까지 아니, 래일도 모레도 화합을, 통일을 바라실것입니다. 선생은 전쟁을 아십니까?》

홍명희는 대답을 하지 못했다. 김일성동지께서는 말씀을 끊으신채 강부관이 날라온 차를 홍명희에게 권하시고 자신도 조금 마시였다. 그리고 차잔을 책상우에 내려놓으시고 노란 차물의 파동을 지켜보다가 흥분한 안색으로 말씀을 떼시였다.

《선생의 말씀처럼 인류는 그 문명이 시작될 때부터 전쟁이라는걸 알았습니다. 곤봉과 창으로부터 시작된 전쟁이 오늘에는 비행기와 대포 지어 원자탄으로까지 번져졌습니다. 그러고보면 인류사는 전쟁사이기도 합니다. 슬프게도 이 과정엔 포악한 침략자들이 이긴 경우가 많았고 그로 하여 력사의 반복이라는 가슴아픈 말도 나오게 되였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인민이 자기 힘과 사명을 자각하지 못한 때의 일들입니다. 너무나 오랜 과정을 겪었지만 인민대중은 자기의 위치와 사명을 깨닫고 세기와 력사의 주인으로 나서고있습니다. 이렇게 될 때 슬픈 력사는 결코 그대로 반복될수는 없을것입니다.

나는 우리 인민이 어제날의 인민이 아니란것을 잘 알고있습니다. 나는 이 점을 믿기때문에 지금까지 평화통일에 대한 구상을 포기하지 않고있으며 극반동이라고 하는 괴뢰 〈국회〉나 〈정부〉의 인사들과도 만날 용의를 품고있는것입니다.

선생의 문건에도 밝혀진 인간으로서의 그 마지막 잔해를 확대해보며 손을 내밀자는것입니다. 선생도 잘 아시지만 나는 화성의숙시절부터 오늘까지 수다한 〈반공〉의 거물들을 만났습니다. 그런 거물들속에서 인간적인 량심, 민족적인 량심이 조금이라도 남아있은 사람들은 례외없이 우리와 손을 잡았습니다. 나는 그런 경험과 믿음으로부터 중립적인 인사들은 물론 우익정치인들에 대한 희망도 완전히 포기하지 않고있습니다.》

《장군님, 솔직히 말씀드려서 저는 그들이 협상장에만 나오면… 하고 기대를 가지고 생각합니다. 김구도 김규식이도 장군님을 한번 만나뵈옵고 개과천선하지 않았습니까.》

김일성동지께서는 홍명희의 얼굴로부터 창문쪽에 시선을 돌리셨다.

《글피가 김구선생의 한돐제지요.》

《네, 그래서 그날 조국전선명의로 추모회를 열자고 생각합니다.》

《벌써 한해가 되였군!》

김일성동지께서는 나직이 뇌이고 한동안 침묵을 지키고계시다가 문건을 번지시였다.

《이 추가초청명단은 김구의 한돐제를 계기로 내보냅시다. 조전도 보내고…》

김구는 평화통일을 주장한것이 죄가 되여 백주에 흉탄을 맞고 쓰러졌다. 민족주의운동선상에서 마지막 거장의 비통처절한 운명이였다. 김일성동지께서는 색연필로 동그라미를 치신 매 사람의 이름을 더듬다가 《※ 기타》라고 한 란에 시선을 멈추셨다.

《여기 인사들은 어떤 사람들입니까?》

《무소속인사들입니다.》

홍명희는 반쯤 몸을 일쿼세우고 문건을 들여다보다가 쑥스러운 미소를 띠우며 계속했다.

《제 개인적인 친면으로 써넣은 사람도 있습니다. 그저 그들이 장군님을 한번 만나뵙게 했으면 하는 소망에서이지요. 례하여 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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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산님의 댓글

강산 작성일

(위에서 계속)

《제 개인적인 친면으로 써넣은 사람도 있습니다. 그저 그들이 장군님을 한번 만나뵙게 했으면 하는 소망에서이지요. 례하여 거기 성송암이라고 하는 사람은 제 오랜 론적인데 정계와 학계에서 이름있는 학자입니다. 옛날 성삼문이라는 학자의 후손인데 괴벽한 고집불통입니다. 끝없이 박식하면서도 끝없이 막혔습니다. 정견으로 보면 민족주의에 가까우나 본인의 주장으로는 일체 주의와 주장을 다 부정합니다. 나라와 민족의 장래를 완전히 어둡게 보는 사람이기도 하지요. 그런 면에서는 숙명론자이기도 합니다.》

《흥미있는 사람입니다.》

《자기말로는 력사를 부여안고 통곡하며 산다는데 인간으로 볼 때는 더없이 깨끗하지요. 전 그가 한번 장군님을 뵈옵고 깨도를 하여 그 문객들과 친지들에게 좋은 영향을 줬으면 합니다. 려운형과도 막역한 사이였습니다. 전 아까 장군님께서 인민대중의 각성에 대하여 말씀하실 때 이 사람 생각도 했습니다. 그처럼 박식한 사람이 그처럼 모호하고 복잡한 사상의 기로에서 헤매이니 과연 언제면 모두가 각성할가 하고말입니다. 그 사람의 리론인즉은 인민이란 드센자의 손탁에서 놀아나는 불쌍한 양떼에 불과하다는것입니다. 저 역시 리론적으로는 인민의 무궁한 힘에 대해서 믿지만 총칼앞에서는 어쩌지 못한 과거를 생각지 않을수 없습니다.》

《과거?! 물론 그런 과거가 있었지요.》

김일성동지께서는 지금 히비야본점(미극동사령부)이나 워싱톤, 서울에 틀고앉아있는 많은자들이 우리 인민을 그 옛날처럼 얕보리라는 생각에 끌수 없는 분격이 치밀으며 음성이 떨리셨다.

《그러나 력사는 조만간 우리 인민이 침략자의 총칼앞에 뿔뿔이 흩어져 쓰러지는 약자가 아니라는것을 알게 될것입니다. 이 세기는 우리 인민의 괴로운 과거에 영원한 종지부를 찍는 증견자로 될것입니다.》

 

김일성동지께서 내각청사를 나오시여 저택에 이르셨을 때는 10시, 비멎은 뒤끝이였다. 야외등이 푸릿하게 비치는 정원길을 곧추 질러 저택정문에 들어섰을 때 강부관이 마중하였다.

《최현동무가 몹시 기다렸겠지? 식사는 시켰소?》

《네, 처음에는 기다리겠다고 하다가 지시라고 하니까 몇술 들었습니다. 지금 쉬는것 같습니다.》

김일성동지께서는 신을 벗고 발끝걸음으로 왼쪽 응접실문앞에 이르시였다. 길게 숨을 들이그었다가 짧게 내보내는, 잠들었을 때의 최현의 숨소리를 확인하신 그이께서는 소리가 날세라 조심스레 문고리를 잡아당기시였다. 밤색유단을 씌운 쏘파우에서 최현이 왼켠으로 머리를 떨군채 말뚝잠을 자고있었다.

그의 한쪽 무릎우에는 룡옥이가 머리를 올려놓고 색색 코소리를 내며 깊은 잠에 빠져있었다. 딸애의 어깨우에는 최현의 꽜꽜한 손이 어루쓰다듬듯 놓여있었다. 어설프면서 눈물나는 광경이였다.

김일성동지께서는 한참이나 서서 그 모습들을 지켜보시다가 맞은편 안락의자에 가앉으시였다.

강부관이 매우 긴장된 기색으로 방에 들어와 김일성동지께 속삭이듯 말씀드렸다.

《내무성에서 전화가 왔습니다.》

김일성동지께서는 최현을 다시한번 돌아보고 방안을 걸어나가시였다. 강부관은 장군님께서 오시면 제꺽 알려달라고 하던 최현의 부탁을 리행하지 못하여 저 범같은 사람한테 한번 땀줄이 나게 닥달을 받으리라는 생각을 하며 시름겹게 서있다가 《뭐요?》하는 장군님의 격하신 음성에 흠칫하며 돌아보았다.

열려진 전실옆방에 김일성동지의 옆모습이 뵈였다. 한손으로 전화탁을 꽉 누르신 그이의 눈길에 심상치 않은 불빛이 번쩍였다.

《그래… 알겠소. 나도 나가겠소.》

김일성동지께서는 송수화기를 그대로 든채 굳어진듯 서계시다가 한참만에야 내리시였다. 응접실에서 최현이가 황급히 얼굴을 문지르고 옷자락을 쓸어내리며 뛰다싶이 나왔다.

《장군님, 안녕하십니까?》

어망결에 인사를 올리며 황황히 마주오자 방금까지 불꽃을 튕기던 김일성동지의 안광에는 따뜻한 미소가 피여오르시였다. 《최현동무.》 그이께서는 그러안을듯 마주가시여 최현의 두손을 꼭 잡아주시였다.

최현은 벙글벙글 웃었다.

《축가지 않으셨군요.》

《허허, 내가 왜 축가겠습니까. 그랬다간 또 동무들한테 야단을 만나려구.》

김일성동지께서는 호탕하게 웃으며 최현의 어깨를 그러안고 응접실로 들어가시였다.

《오늘 철호동무한테 욕을 먹진 않았습니까. 그렇게도 꿈쩍 안하면 됩니까.》

김일성동지께서는 아까 앉았던 안락의자에 앉으며 물으시였다. 최현은 그이께서 권하시는 맞은편 쏘파에 엉거주춤 앉아 싱긋 웃었다.

《그 사람이야 제게 욕할 자격이 있습니까. 자기야 사민이고 나는 군인이 아닙니까.》

롱담으로 얼버무린 최현은 웃음어린 눈으로 김일성동지를 우러러보다가 정색하여 말씀드렸다.

《이젠 그 사람에 대해서 걱정하지 말아주십시오. 호부자집 귀부인처럼 호강을 하는데… 참 춘국동무를 거기서 만났습니다.》

《문병을 왔던가요?》

《예, 렌트겐촬영하러 왔다가 들렸습니다. 다리는 철덩이같은데 장군님께서 자꾸 걱정하신다고 민망해하더군요.》

김일성동지께서는 빙그레 웃으시였다.

최현은 그 웃음에 용기를 얻은듯 한무릎 나앉으며 두눈을 가느스름히 쪼프리고 말을 이었다.

《장군님, 춘국동물 그냥 〈몽골해군〉으로 두시겠습니까. 그 사람은 송악산물이 제몸에 딱 맞는다고 했습니다. 그저 산이 좋다는겁니다.》

《허허, 최현동무는 춘국동무한테서 단단히 무슨 침을 맞은 모양입니다.》

김일성동지께서는 소리내여 웃으시였으나 왜서인지 그 웃음뒤끝에 쓸쓸한 음영이 뒤따르는듯싶었다. 그이께서는 담담한 어조로 말씀하시였다.

《사실 이제와서는 해군에 그 동무가 꼭 있어야 될 필요는 없습니다. 하지만 다리부상처도 채 낫지 않고 해서 그자리에 두는것인데… 참, 거기 정세는 어떻습니까? 어제 포사격이 있었다지요.》

최현은 김일성동지께서 최춘국의 직무문제에 대하여 대답을 주시는중에 얼굴빛을 흐리신것을 보고 왜서일가 하는 의문을 굴리느라 그저 《네.》 하고말았다.

《전사 한명이 희생되였다는데 어쩌다가 그렇게 되였습니까?》

김일성동지께서 재차 물으시였다. 최현은 잠시 대답을 못드리고 망설였다. 모든 사실을 다 말씀드릴것인가 말것인가, 순간적으로 눈앞에 쓰러진 전사의 얼굴이 떠오르고 뒤미처 거뭇한 봉분앞에서 곡도, 흐느낌도 없이 눈물만 똑똑 떨구던 가날핀 녀인의 모습이 스쳐지났다.

《장군님, 정말 참기 어려운 일입니다.》

최현은 그때의 분격과 슬픔이 다시금 끓어올라 어제의 포사격으로부터 오늘 장례식에 이르기까지의 일을 상세히 말씀드렸다. 김일성동지께서는 원탁에 올려놓으신 두손을 꽉 마주잡은채 아무 말씀도, 조그마한 움직임도 없이 듣고계시다가 림운학이가 38선전방구분대로 오겠다고 했을 때 그의 어머니가 말없이 절을 하는것으로 아들의 소청에 동의를 표시하더라는 대목에 이르러서 문득 말허리를 끊으시였다.

《그 어머니 년세가 어떻게 됩니까?》

《쉰한살이랍니다. 전 그 운학이라는 동무의 제기에 대해서는 그저 용쿠나 하고만 생각했는데 어머니의 그 태도를 보고서는 정말 눈물이 났습니다.》

《고향이 남조선입니까?》

《고향은 승호리랍니다. 참 그 집안 래력을 듣고보면 기가 막힙니다. 그 동무네 아버지는 해방전에 〈반일무장단〉사건으로 체포되여 서대문형무소에 갇혔는데 지금도 그 신세를 면치 못하고 있습니다. 올해들어 열여덟살에 잡힌다는 그 동무 동생은 아버지를 만나는것이 소원이였답니다. 포대경으로 서울쪽을 보며 울기도 하고… 그런데 죽는것도 참 기막히게… 호박밭을 돌아보다가 파편에 맞았는데 손에 호박꽃을 떡 쥐고 숨이 넘어가있는것이 아니겠습니까. 글쎄 이런 일이 벌써 얼마입니까.》

최현은 작년도의 적의 무장침습사건만도 2 617회를 기록하고있고 그 무장도발에서 희생된 사람이 경비대를 제외하고도 400여명이 넘는다는것까지 말씀드리려다가 김일성동지의 안색이 무섭게 변한것을 보고 입을 다물었다.

《그 희생된 전사의 이름이 무어라고 했던가요?》

김일성동지께서는 갈린 음성으로 물으시였다.

최현은 김일성동지께서 희생된 유격대원들과 그 유자녀들의 이름과 주소를 적군하던 비망록을 꺼내 펼치시는것을 보았다. 그가 희생된 전사의 이름을 말씀드리자 김일성동지께서는 어머니와 형의 이름까지 물으시였다.

《림운학?…》

그이께서는 이름을 적다가 기억을 더듬어 눈길을 쪼프리시였다.

《그 동문 총참모부 군관인데 애인이 서울에 있답니다.》

《서울에?》

《네, 이 집안을 보면 온 나라의 불행이 한군데 모인듯합니다. 장군님, 정말 이대로는 참기 어렵습니다. 쩍하면 놈들은 갈개지, 계속 희생이 생기지, 전사들은 눈에 불이나 들이댑니다. 원쑤들을 요정내고 통일을 해야 한다는것입니다.》

《통일!》

김일성동지께서는 천만의 무게를 가진 음조로 나직이 뇌이시였다. 또 한번 마음 무거운 진통을 체험하셨다. 모두가 통일을 웨치고있구나. 홍명희는 론리로, 최현은 감정과 담기로… 그 녀인과 아들은 가정적비극으로부터…

김일성동지께서는 한동안 침묵을 지키고계시다가 조용히 말씀하시였다.

《물론 통일은 해야 합니다. 통일이야말로 우리모두의 숙원이고 최대의 희망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우리에겐 이 땅에 두번다시 류혈이 없게 해야 할 사명도 지워져있습니다. 우린 아직 동북에 널려있는 전우들의 유해도 다 안치하지 못하지 않았습니까.》

최현은 숨이 탁 막혀드는것 같았다. 어제날 만주의 수림속에서 사랑하는 전사들이 쓰러졌을 때 그 시신을 부여안고 눈물짓던 장군님의 영상이 현재의 비통한 모습과 엇섞여 안겨왔던것이다.

《장군님, 제… 담배를 좀 피우겠습니다.》

《담배를?!》

김일성동지께서는 되묻고나서 《참, 내 깜빡 잊을번했소.》 하며 일어나시였다. 그이께서는 방을 나가셨다가 인츰 되돌아오시였다. 손에는 호화판포장을 한 네모난 함이 들려있었다.

《며칠전 벌가리아동무들한테서 선물받은것입니다. 그 나라의 특산이라고 자랑을 하길래 동무를 주자고 남겼던것입니다.》

김일성동지께서는 포장을 헤치고 담배 한갑을 터치여 친히 담배가치를 최현에게 내미시였다.

《원 장군님두… 이런것까지… 뒀다가 피시지.》

김일성동지께서는 최현이 담배 한대를 다 태울 때까지 그냥 지켜보기만 하시였다. 최현은 이상스런 긴장감을 느끼며 담배불을 비벼껐다.

《최현동무…》

그이께서 말씀을 떼시자 안색이 심각해지고 알릴듯말듯 주름이 일어서는 이마에서는 준절한 기운이 풍기시였다.

《방금전에 받은 전화인데… 10시경부터 38선 거의 전반지역에서 적들이 포사격을 시작했습니다. 심상치 않은 놀음입니다. 사태는 우리의 희망과는 달리 번져나가고있습니다.》

《녜?!》

최현은 흠칫했다.

(이래서였구나.)

오늘 만나뵈인 김일성동지는 어딘가 다른데가 있었다. 그이께서는 전쟁을 보시였다. 하지만 다문 30분이라도 최현의 기분을 아늑한 즐거움속에 안아두려고 혼자서만 고뇌를 걸머지시였다.

최현은 입술을 꽉 악물고있다가 벌떡 일어섰다.

《장군님, 떠나겠습니다.》

김일성동지께서는 묵묵히 보시기만 하다가 자리에서 일어서시였다.

《잠간만 있으시오.》

그이께서는 방밖에 나갔다가 도자기병 하나를 들고오셨다.

상두대우에 놓인 커다란 차잔 두개를 가져다가 그 병의것을 부었다. 병의 액체는 그 두잔에 다 쏟아졌다.

《앉으시오. 최현동무.》

그이께서는 술이 담겨진 차잔을 물끄러미 내려다보시다가 잔 하나를 최현에게 내미시였다.

《식사할 때 들자고 준비한건데… 자 듭시다.》

최현은 눈굽에 눈물이 핑 고였다.

《장군님, 이거 정말… 》

《왜 그러시오?》

《마음이 스산해 그럽니다.》

《아니, 동무도 약한 소릴 할 때 있소?》

《아니, 그것이 아닙니다. 아까 방에 혼자 와 있을 때도 그랬습니다만… 정숙동무가 없으니 영… 스산합니다. 지금도… 이제 험한 일이 생기면 더하겠지요. 왜 먼저 가서… 》

최현은 말끝을 채 맺지 못하였다.

김일성동지께서는 흔들거리는 액체면의 잔물결을 보시다가 약간 고개를 저으셨다. 다함없는 정이 어린 눈길을 최현에게 주시였다.

《나에 대해선 걱정마시오. 동무들이 잘 돌봐주니까. 동무에게 미안한게 많소. 동무랑 철호동무랑 주을온천에 보내려고 했는데… 내 마음대로 잘 안되는구만. 언제 한번 쉬우지 못하고-》

《장군님, 무슨 말씀을… 전…》

최현은 목이 꺽 막혔다.

《마시기요.》

최현은 불을 삼키는것만 같았다. 그리고 그 불은 온몸을 달구었다. 그는 이 세상에서 누구보다 김일성동지를 잘 알며 가깝다고 생각하고있었다. 그의 가슴에 새겨진 김일성동지는 세상에서 가장 강한 인간이면서 동지에 대해서는 가장 마음이 무르고 인정이 많은분이시였다. 동지들과 인민들의 희생과 아픔과 슬픔에 대해 백배천배로 감수하며 괴로와하시는 분이시였다. 미구에 다가올 사변속에서 가슴아프신 일이 한두가지이겠는가.

《최현동무!》

김일성동지께서는 뜨거운 눈길로 최현을 보다가 말씀하시였다.

《만약 적들이 덤벼들면 단단히 답새기시오. 그러나 적들이… 물러선다면 자제하시오. 혹시 단념할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나의 희망을 동무가 잊지 말기를 바랍니다.》

《장군님, 명심하겠습니다.》

《철호동무를 만나고 가시오.》

《네.》

잔을 놓고 침묵속에 마주보았다. 언어가 아닌 심장과 심장의 사랑과 믿음, 약속과 맹세가 오고갔다.

최현은 쏘파에 꼬부리고 누워 세상모르게 자고있는 자기 딸애에게 시선이 닿자 어깨를 잡아 조심히 흔들었다.

《룡옥아, 룡옥아, 이젠 가야지.》

룡옥은 입을 다시며 돌아누웠다.

《허허 다 큰게 이게 뭐냐?》

최현은 어찌할바를 모르다가 룡옥이를 훌쩍 들어안았다. 룡옥은 반짝 눈을 뜨다 말고 《아부지.》 하고는 도로 감아버리며 가느다란 두팔로 최현의 목을 꼭 그러안았다.

최현을 바래주신 김일성동지께서는 그길로 다시 내각청사로 가시였다. 차를 타지 않고 어둠에 잠긴 길로 천천히 걸음을 옮기시며 복잡한 생각을 이어가실 때 느닷없이 최현의 이야기에서 아슴푸레 기억을 건드리던 림운학이라는 군인의 모습이 얼핏 떠오르셨다. 순서도 꼬리도 없는 추억이 점선을 그으며 그이의 뇌리를 스쳐갔다.

(그래, 보안간부훈련소에서였지. 그 동문 무슨 〈송기떡〉이라는 별명을 가진 대원과 함께 처벌훈련을 받고있었다. 두사람 다 기막힌 사연을 가지고있었지. 그 운학이라는 동무는 동생까지 잃었다.… 포사격에… 포사격이라?!…)

회상은 여기서 끊어지였다. 어마어마한 사변을 예고하는 38도선의 소란이 그이의 모든 사색과 감정을 무참히 짓눌렀다.

 

한때 보안간부훈련소 신입병사반에서 《송기떡》사건으로 크게 물의를 빚어낸바 있는 송기덕소대장은 금천군 시변리에 나와 모내기동원으로 틈바삐 지냈다.

래일 일요일 농촌지원을 나가는 군인들을 푸짐히 먹이겠다고 돼지접수를 갔다오라는 량식과장의 청탁을 마지 못해(사실은 바람쐬는것으로 좋았지만) 받아물고 대원 한명과 함께 이른아침에 떠났던 송기덕은 소짝같은 돼지 두마리를 접수하였다.

그런데 우리에서 나올 때만도 얌전하다고 봤던 돼지들이 길에 나서자 애를 먹이기 시작한것이 종내는 한마리가 새끼줄을 끊어버리고 맹렬한 기세로 달아났다. 기덕이 주먹을 부르쥐고 다쫓자 바빠맞은 돼지는 길가 논판에 뛰여들었다. 논물을 보던 처녀가 기급을 하며 고함을 치는바람에 주변의 모군들이 달려와 소리치고 뛰며 법석을 놓았다.

기덕이 논두렁을 올리뛰고 내리뛰고 하며 겨우 돼지를 잡았을 때는 반들거리던 장화가 죽탕이 되였을 때였다.

기덕이 숨을 톺으며 논물에 장화를 씻는데 논물을 보던 처녀는《아유, 저 논을 어째. 한섬을 밑졌네요.》 하며 기덕에게 곱게 눈을 흘기였다. 기덕은 생글생글 웃으며 《어쩌겠소, 저놈이 군대규률을 모르다나니 그리된걸. 처벌로 저놈을 오늘내로 없애버릴테요.》 하고는 넘어진 모대 몇개를 세워놓는 시늉을 하고 돼지의 궁뎅이를 발길로 조기며 몰아왔다. 그런데 부대정문에 이르니 중대장이 나와 기다리고 섰다가 근심이 가득한 얼굴로 련대장이 찾는다는것이였다.

기덕은 자기가 무슨 잘못이라도 저지르지 않았는가 두루 생각하였으나 잘못이란 불을 까지 않은 돼지가 사납다는것을 모르고 각성을 늦춘통에 농민의 논밭에 좀 피해를 준것뿐이나 그 사실은 아직 알리가 만무한것이고 혹시 꺽다리 부소대장이 리민주선전실 처녀와 어쩐다는 말이 있더니 그때문이 아닐가 하는 억측도 있었지만 그것이라면 자기우에 부중대장, 중대장, 대대장까지 있는데 이 조그마한 별 하나짜리를 중성 셋을 단 지휘관이 부른다는것이 말이 되지 않았다. 련대장은 시퍼렇게 성이 난 얼굴로 그를 기다리고있었다. 련대에 배치될 때 가까이 만나고는 처음인, 늘 상냥스런 웃음으로 인상지어진 련대장이 성나있는 바람에 기덕은 죄 지은것이 없으면서도 가슴이 두근거렸다. 그가 도착보고를 하자 련대장은 흙탕이 된 바지며 장화에 못마땅한 눈길을 던지며 딱딱하게 물었다.

《동무, 처가 있소?》

《네?… 아 아니 없습니다.》

기덕은 간부과에 바친 리력서에 적었던대로 대답하였다.

《정말 없소?》

《…네.》

기덕은 가슴이 방망이질했으나 꾹 참았다. 련대장은 눈섭 한번 깜박이지 않고 빤히 그를 보다가 딱 잘라말했다.

《동문 열흘간 영창처벌이요.》

송기덕은 얼음물에 잠겼다나온 사람처럼 정신이 홱 맑아졌다. 혹시- 하는 불길한 예감이 머리를 쳤으나 지레 겁먹고 이실직고 하는것은 사내가 아니지 않는가.

《련대장동지, 질문할만합니까?》

《하시오.》

《무슨 리유인지 알려주십시오.》

《이런 소가죽같은-》

련대장 리훈은 빽 소리치고는 제풀에 껄껄 웃었다. 그리고는 다시 퍼렇게 성을 내며 물었다.

《리복심이라는 녀자는 누구요? 솔직히 말해보오.》

련대장의 안존한 얼굴빛은 이미 태풍의 한고비가 지나갔음을 암시했다. 이렇게 된바에는 더 숨기고 뻗댈 여지도 없다. 더구나 마음이 녀자같이 착하다는 련대장이 아닌가. 송기덕은 얼굴이 뻘개서 자백은 하되 이럴 때일수록 수세에 빠지는 저자세가 아니라 공세로 나가야지 괜히 잘못했소 하고 흰기를 들어서는 안된다고 생각했다.

《련대장동지, 사실은 말입니다. 억울하게 된 일이 있습니다. 우리 부모가 까막눈의 화전군인데다가 할아버지는 봉건이 가뜩했습니다. 글쎄 해방된 다음해 평생 처음 낟알마대나 건사하게 되니까 홑 열일곱살인 저를, 그때 전 다른 열일곱살짜리보다 퍼그나 어렸습니다. 장가들인다는것이였습니다. 색시감으로 찍어놓은 녀자는 역시 화전뚜구리 리달보라는 어른네 딸인데 제야 뭐 압니까. 철이 있습니까, 셈이 있습니까, 미운거 고운거 압니까. 로할아버지는 〈사내 열일곱살이면 아들딸 3형제는 거느릴 때다〉고 하며 으르지 아버지, 어머니는 땅이 있고 돈이 있는데 무슨 걱정이냐 하며 강제결혼을 시키는것이 아니겠습니까. 울며불며 나귀 타고 가서 색시를 맞긴 맞았지만 어떻게 삽니까.

련대장동지, 그래 이것을 장가간것으로 봐야 옳습니까. 전 아직 그 동무의 옷고름에 손도 대지 않았습니다. 정말입니다. 그통에 로할아버지의 대통에 이마빼기가 두군데나 터졌습니다.》

《여 됐소, 됐소.》

련대장은 소리치다말고 배를 그러쥐고 웃어댔다. 그럴수록 송기덕은 어리광대처럼 오히려 제가 큰 모욕이나 당한것처럼 풀풀 하며 눈을 부라렸다.

《그래 그 녀자는 몇살이요?》

《제보다 한살우입니다. 그래야 녀편네사랑을 올리도 받고 내리도 받는다는겁니다.》

《군말할게 없소. 동문 이제부터 내 명령에 복종하오. 동무의 처가…》

《련대장동지, 정말 처가 아닙니다.》

《소대장동무, 연극은 그만 노우. 지금 동무의 처가 평천리 부대에 와있소. 온성이 어디요. 먼곳에서 왔는데 안만나면 되겠소. 휴가를 줄테니 가서 열흘간 지내고 오오. 조혼이란 잘된건 못되지만 어쩌겠소. 맺어논 고름이니, 가서 티각태각했다간 철직에 제대요.》

《아, 련대장동지. 그거야 봉건이지요. 련애나 가정이란게-》

《어리석은체하지 마오. 봉건을 반대한다 해서 부모가 맺어주고 혼례까지 치른 녀자를 리유없이 버린다는건 용서할수 없소. 지금까지의것은 용서해줄테니 어서 가오. 참 동문 대원들앞에서도 이러오?》

《련대장동지, 그 녀자는 정치엔 문맹입니다. 그래도 군관의 안해라면-》

《동문 입대할 때 어드랬소?》

련대장은 억이 막혀 기덕을 바라보았다. 기덕은 그 말앞에서는 아무리 개비위를 부리려 해도 더 입이 열려지지 않았다.

《당장 가오. 이제 30분후에 후방물자를 실으러 가는 운수차가 있을거요.》

송기덕이 이 《불행》을 가지고 중대장 최만덕에게 갔을 때 중대장은 깊은 동정을 표시했다. 조혼을 강요한 부모들의 《몽매성》과 봉건의 잔재를 함께 한탄하면서…

그런데 정작 기덕이가 떠나게 되자 이제껏 복심이에 대한 푸념에 맞장구를 치던 중대장이 영 거꾸로 나왔다.

《가서 만나면 잘 대해주라구.》

《잘 대해주란건 어쩌란겁니까?》

《그나저나 무어놓은 배필이 아닌가.》

《난 싫수다.》

《그럼 쫓아보내겠다는건가?》

《쫓기야 뭐… 그러나 살지는 않겠습니다.》

《동문… 그 밸집을 고쳐야 돼.》

《하여튼 잘 설복하지요.》

《어떤 설복을 한단말인가.》

《나야 혁명에 몸바친 사람이고… 그건 촌보리동지니 물러가라고… 》

《허허… 난 모르겠소. 여하간 쫓는것은 반대요.》

이야기는 결국 매듭을 짓지 못한채 끝나고말았다. 기덕은 저녁켠에 부대로 가는 후방부 운수차에 하나의 짐짝처럼 마음 편치않게 올라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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