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편소설 번영의 길 제10회 > 통일게시판

본문 바로가기
사이트 내 전체검색

통일게시판

장편소설 번영의 길 제10회

페이지 정보

profile_image
작성자 강산
댓글 1건 조회 4,782회 작성일 20-03-05 23:49

본문

01.jpg


2

 

다시 철계단을 쿵쿵 울리는 부산한 발자국소리가 들려왔다. 옥산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리웅천과 신철이 들어서리라고 생각했던것이다. 그런데 신철은 보이지 않고 리웅천 한사람만이 자기앞으로 천천히 걸어오고있었다.

《오늘은 신철동무를 만나기 힘들것 같으니 후날 만나지 않겠습니까?》

리웅천은 상심한 표정을 짓고 사정하듯이 물었다.

《왜요?》

《일이 아주 공교롭게 되였습니다.》

《무슨 일이 있었어요?》

옥산은 리웅천의 얼굴에서 눈길을 떼지 않고 물었다. 방금까지도 능청스럽게 싱글거리던 리웅천이 얼굴이 점점 침통한 빛을 띠였다. 옥산은 신철의 신상에 그 어떤 좋지 못한 일이 생겼다는것을 짐작하였다. 누구앞에서나 할 말은 서슴없이 하고야 마는 대바르고 호협한 성미인 리웅천이 전에없이 주눅이 들어 할말도 하지 못하고 우물거리는것이 더구나 옥산의 불안을 자아냈다.

《원, 사람도… 그렇게 참지 못한다구야…》

리웅천은 혼자소리처럼 중얼거렸다.

《무슨 일이예요?》

옥산이 다시 물었다.

《그럼 말씀드리지요. 어차피 알게 될 일이니… 며칠전 수령님께서 우리 제강소에 오시였을 때 우리는 수령님앞에 전기로를 이제부터 한달안에 복구하여 쇠물을 뽑아낼 맹세를 다지였습니다. 그것도 이전의 배로 확장된 로에서 말입니다. 그런데 이전 로의 기초가 든든치 못하니 반드시 새로 기초공사를 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의견이 제기되였습니다. 만약 이 의견대로 한다면 한달은 고사하고 서너달이 다 가도 쇠물은 뽑지 못합니다. 그래서 이전 로의 기초를 다시 조사해보기 시작하였는데 설상가상으로 기초가까이에 불발탄이 박혀있지 않겠습니까.

우리는 시뻘겋게 녹이 쓴 흉물스러운 그것이 오작품이 분명하니 그 자리에서 들어내자고 했습니다. 그런데 신철동무가 보더니 그건 오작품이 아니라 조금만 다쳐도 폭발할수 있는 그런 위험한 물건짝이라는것입니다. 할수 없이 내무원을 부르기로 했는데 신철이 그 사람이 언제 내무원을 부를 시간이 있는가, 공병출신인 자기한테는 시한탄을 해제한 경험이 있다고 하면서 불발탄 뢰관을 자기가 해제하겠다고 나섰습니다. 아무리 막아도 듣지 않는군요. 그래서 내가…》

리웅천은 무엇인가 더 이야기하려고 했으나 옥산은 그이상 참아내지 못하였다.

손가방을 옆구리에 낀 그는 탄력있는 걸음걸이로 돌진하듯이 철계단이 놓인 그쪽으로 씽 다가가더니 벌써 한발을 계단에 올려놓는것이였다.

《갑자기 어디로 갑니까?》

리웅천이 다급히 소리쳤다.

《전기로에.》

리웅천이 황망히 붙잡았으나 철계단을 두개씩 건너뛰는 옥산을 멈춰세울수는 없었다.

밖에 나선 옥산은 대번에 제강소전체가 긴장한 분위기에 휩싸여있다는것을 느꼈다. 그가 제강소에 첫 자욱을 옮겨놓을 때만 하여도 로동자들은 물론 주변농촌에서 달려온듯 한 농민들과 군인들, 가두의 녀성들, 어린 학생들까지 뒤덮여 제강소구내정리작업을 하고있었다. 자동차들이 먼지를 말아올리며 달리고있었고 심지어 달구지들도 무엇인가 가득 싣고 움직이고있었다.

그런데 지금은 그 숱한 사람들이 땅에 잦아들기나 한것처럼 한사람도 보이지 않고 가고오는 자동차나 달구지들도 눈에 띄지 않았다. 옥산이 지하실에 앉아있는 이 두어시간사이 놀라운 일이 벌어졌던것이다. 옥산은 그런줄도 모르고 지하실에서 귀중한 시간을 보낸것이 후회가 되였다.

《옥산동무, 좀 서오. 서라니까.》

리웅천이 뒤에서 따라오며 소리쳤다.

옥산은 걸음을 멈추었다. 리웅천이 서라고 소리쳐서가 아니라 신철이 어디에 있는지 알수 없어 멈춰섰던것이다.

《어디 간다고 그럽니까? 안됩니다. 보시오. 저기에 팔에 완장을 낀 사람이 길을 막고있지 않습니까.》

옥산은 리웅천이 가리키는 곳에 숱한 사람들이 웅기중기 모여있는것을 보았다. 엄청난 위험이 바로 그 사람들의 앞 어디엔가 도사리고있는것이 틀림없었다. 고향의 조약돌을 보며 눈물짓던 주인공이 바로 그 위험한 곳에 목숨을 내대고있는것이다. 잊을수 없는 수풍호반에서 전선용사들의 위훈에 찬 전투담들을 들으며 자기도 그러한 환경에 부딪치면 필시 그들과 같은 용감한 행동을 하리라 속다짐해온 옥산이였다. 하지만 전쟁기간 그에게는 종시 그런 기회가 차례지지 않았다. 그런데 지금 그의 눈앞에서 생사운명을 내건 전투가 벌어진것이다. 그는 응당 자기가 그 전투장에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옥산은 자기가 차단지점까지 어떻게 반달음으로 달려왔는지 몰랐다. 그는 날카로운 호각소리에 우뚝 멈춰섰다.

《어디로 가십시까?》

붉은색 삼각기발을 든 젊은 사람이 옥산이한테 다가오며 불만스레 물었다.

《전기로쪽에…》

《안됩니다. 돌아가시오.》

《가야 해요!》

옥산이 어찌나 당당하게 주장했던지 삼각기발을 든 젊은이는 얼떠름해서 옥산의 행색을 훑어보았다. 어딘가 모르게 색 달라보이는 옷차림이 젊은이를 혼란에 빠뜨린것 같았다. 그러나 젊은이는 인차 자신을 다잡은듯 안된다고 단호히 거절했다.

《보십시오. 내가 뭐랍디까. 누구도 가지 못한다고 하지 않습디까.》

리웅천이 젊은이의 편을 들고나선것은 옥산이에게 결정적으로 불리하였다. 옥산의 행색을 마뜩지 않은 눈길로 흘겨보는 젊은이의 성난듯 한 표정에서는 자그마한 아량도 찾아볼수 없었다.

옥산은 단념할수밖에 없었다.

《우리 사무실에 도로 갑시다. 이럴줄 알았다면 오늘 옥산동무가 온다는걸 미리 신철동무한테 이야기해주는건데… 자, 갑시다.》

리웅천이 거듭 권고했으나 옥산은 움직이려 하지 않았다.

이때 전기로쪽 어데선가 꽈르릉 하는 요란한 소리가 터져올랐다. 옥산은 화닥닥 놀랐다. 그의 얼굴이 대번에 해쓱해졌다.

《뭐야?》

《무슨 소리야?》

이런 웨침소리들이 사방에서 튀여나왔다.

《좀 조용들하라구. 벽체가 무너진거야. 눈으로 보지 못해!》

리웅천의 격한 목소리가 웅성거리는 군중을 단번에 진정시키였다. 옥산은 전기로쪽에 서있던 벽체가 무슨 원인으로 해서인지 저절로 무너져내렸다는것을 알아차렸다. 거기서는 메마른 누런 먼지가 풀썩하고 하늘로 치솟고있었다.

전기로주위는 점점 무겁게 긴장되여갔다. 리웅천이 더는 옥산이더러 사무실로 가자는 말을 하지 못하였다. 그도 손에 땀을 쥔채 전기로쪽에서 긴장한 눈길을 순간도 떼지 못하고있었다.

옥산은 문득 며칠전 김책제철소를 찾아갔을 때 그곳 제철소구내에도 10여발의 불발탄과 시한탄들이 깔려 으며 심지어 용광로밑에는 적들이 매설해놓고 미처 폭발시키지 못한 지뢰까지 묻혀있다고 하던 그곳 지배인의 말을 회상하였다. 성진제강소에 찾아갔을 때에도 그와 류사한 말을 들었었다.

옥산은 그때까지도 전후복구건설이 이처럼 치렬한 전투로 시작되리라는것을 미처 짐작하지 못하였다. 각종 폭탄과 지뢰해제로부터 시작되는 이 복구건설이야말로 또 한차례의 간고한 전투라는것을 옥산은 지금처럼 가슴저리게 느껴본적은 없었다.

시간은 지루하게 흐르고있었다. 8월의 무더운 바람이 윤기가 흐르는 부드러운 머리칼을 마구 헝클어놓았으나 옥산은 그것을 의식하지 못하였다. 그는 무슨 생각엔가 깊이 잠겨 서성거리고있었다. 그러다가도 전기로쪽에 눈길을 흘깃 던질 때면 평소에 그처럼 명랑하던 얼굴에 긴장으로 한줄기 어두운 빛이 비끼군 하였다. 그것은 모든 일이 무사히 끝나기를 바라는 처녀의 간절한 념원의 반영이였다.

불시에 물목이 터진것처럼 숱한 사람들이 우르르 전기로쪽으로 달려갔다. 리웅천과 옥산이도 달려갔다. 방금 무너져내린 벽체 저쪽에 내무원복장을 한 사람과 사민 한사람이 나타났던것이다. 그 두사람은 갑자기 해빛 밝은 곳에 나와 눈이 부신것처럼 이마에 손채양을 하고 잠시 한자리에 멈춰서있었다. 다음순간 두사람은 사방에서 달려온 군중들에게 둘러싸여 인차 자취를 감추었다. 하지만 옥산은 사민옷차림을 한 그 사람이 신철이라는것을 짐작하고있었다.

《불발탄을 해제한것 같습니다. 그럼 여기서 좀 기다리십시오.》

리웅천은 이런 말을 남기고 군중들이 몰켜서서 웅성거리는 곳으로 뛰여갔다. 그의 모습도 보이지 않았다.

옥산은 그 자리에 서서 군중들이 흩어지기를 기다렸다. 긴장으로 굳어졌던 그의 얼굴에 다시금 명랑하고 쾌활한 표정이 되살아올랐다. 이윽고 군중들이 흩어지기 시작하였다. 옥산은 리웅천과 함께 있는 신철을 보았다. 애틋한 정회가 짜릿하게 그의 가슴속에 젖어들었다.

는 어깨에 멘 손가방을 한손으로 꽉 누르고 빠른 걸음으로 그들에게 다가갔다.

신철이도 옥산이를 알아보고 뛰여왔다. 두사람은 방금 메운 폭탄구뎅이자리에서 마주쳤다.

《수고했어요.》

옥산은 신철이와 자기사이에는 지금까지 아무런 특별한 관계도 없었던것처럼 스스럼없이 인사를 하며 손을 내밀었다.

《기다리게 해서 안됐습니다, 선생님.》

신철은 강습생시절처럼 옥산이앞에서 얼굴을 붉혔다.

《선생님? 호호호.》 옥산은 쾌활한 성미그대로 이마전에 흘러내린 머리칼을 뒤로 쓸어넘기며 소리높이 웃었다. 《제가 신철동무앞에서 무슨 선생님이겠어요? 그저 동무라고 불러주세요.》

신철이도 부지불식간에 그렇게 불러놓은것이 쑥스러운듯 빙그레 웃었다.

《그럼 이야기를 하십시오. 난 바쁜 일이 있어서…》

리웅천이 이렇게 량해를 구하고 자리를 뜨자 신철은 갑자기 당황해하면서 어쩔줄 몰라하였다. 옥산은 그것이 오히려 재미있다는듯 신철에게서 눈길을 떼지 않고 그를 찬찬히 살펴보았다.

숫접게 고개를 숙이고 눈길을 내리깐 무척 순박해보이는 둥실한 얼굴, 흩어져내린 총이 센 머리칼, 그 어떤 무거운 짐도 짊어질수 있는 든든한 어깨와 넓은 가슴, 완강한 체력, 어디서나 볼수 있는 풍덩한 회색작업복… 수풍호반에서 헤여진 이 두해남짓한 사이에 그의 얼굴과 몸전체에서,아니 표정과 옷차림에서까지 변한것이 무엇인가를 옥산은 진지하게 밝혀내기라도 하려는것 같았다.

흩어져내린 머리칼과 어지러운 풍덩한 작업복을 걸쳤음에도 불구하고 유난히 광택이 나는 이마와 웃을 때 드러나는 하얀 이발, 지어 작업복 목깃이 벌어질 때마다 엿보이는 눈덩이같이 희고 깨끗한 런닝그까지도 그의 세련된 모습을 보여주는듯 싶었다.

두사람은 한동안 말없이 서있다가 지난번 수령님께서 제강소에 찾아오시여 걸으신 그길을 따라 걷기 시작하였다.

《철골만 앙상한 저 건물이 제강직장입니다.》

신철이가 차차 활기를 띠기 시작하였다. 그는 전기로복구에 대하여 이야기하기 시작하였다. 그는 옥산이 전기로에 대하여 별로 아는것도 없고 흥미도 가지지 않으리라 생각하였다. 그래서 륜곽적으로 몇마디 이야기하는것으로 그치려고 하였는데 처녀가 예상외로 깊이 파고들어서 신철은 상당히 구체적으로 이야기해주지 않을수 없었다.

《주의하세요. 로를 확장하다가 시간을 놓치면 성진제강소에 떨어질수 있어요. 그곳에서도 한달안에 첫 쇠물을 뽑겠다고 모두들 떨쳐나섰어요.》

《그러니 벌써 고향에까지 가봤습니까?》

신철은 수풍호반에서 고향의 바다가를 그리던 그를 상기하며 물었다. 옥산은 머리를 끄떡이였다.

두사람은 고향에 대하여 즐겁게 이야기를 하였으나 마치도 사전약속이라도 있은것처럼 고향의 그 대리석조약돌에 대해서는 입밖에 내지 않았다.

《수령님께서는 전번에 오시였을 때 바로 이 철길을 따라 분괴압연직장에 들리였습니다.》

신철이 말을 이었다. 그때는 수령님께서 발을 들여놓을만 한 자리가 없어 철길을 따라 걸으시였지만 지금은 구내가 말끔히 정리되여 분괴압연직장으로 가는 구내도로가 환히 틔여있었다. 하지만 두사람은 의연히 수령님의 발자취가 어린 철길을 따라 걸어갔다.

신철은 지붕이 통채로 훌렁 날아나고 뒤틀린 산형강골조만이 엉성하게 남은 분괴압연직장에 들어서자 옥산에게 전기로를 복구한 다음에는 여기에 세계적으로 가장 앞선 새로운 분괴압연직장을 일떠세울것이라고 열정에 넘쳐 말하였다.

《가열로는 어디에 건설하렵니까?》

옥산이 자못 진지한 어조로 물었다. 신철은 다시한번 은근히 놀라지 않을수 없었다. 수풍호반에서 전선용사들의 전투담을 들으며 밤이 지새는줄 모르던 랑만적인 이 처녀가 재가루날리는 야금기업소의 복구에 대하여서도 놀라울 정도로 계속 깊이 파고드는것이였다. 신철은 부스러진 내화벽돌쪼각들만이 지저분하게 널린 이전에 가열로가 서있던 자리를 손으로 가리켰다.

《3단복식으로 건설하겠습니까?》

옥산이 다시 물었다. 3단복식이란 가열로의 강괴장입능력을 2∼3배로 높일수 있는 혁신적인 방안이였다.

《3단복식이라니, 아니 그것까지 다 압니까?》

《기자란 뭣이나 다 알아야지요.》 옥산의 새까만 커다란 눈이 능청스러운 웃음을 담고 반짝이였다. 《잘 생각해보세요. 정말 그것이 가능하겠는지…》

신철은 비로소 옥산이 파고드는것이 단순한 기자의 호기심이 아니라는것을 알아차렸다. 전기로를 배로 확장하려다가 시간을 놓칠수 있으니 주의하라든가 3단복식이 가능하겠는지 잘 생각해보라든가 하는것은 다 속대사가 있는 스쳐버릴수 없는 말들이였다. 제강소복구문제를 놓고 심각한 의견상이들이 있는것을 옥산이 과연 어떻게 알았는가? 녀기자가 강선제강소를 찾은것이 이번이 처음이 아니라 해도 이런 깊은 내막까지는 다 알수 없을것이다.

신철은 전에없이 신중한 표정을 하고 말없이 발자국을 옮겨놓았다. 옥산이 이것을 재빨리 감촉하고 신철에게 자기가 공연한 질문을 했는가고 물었다.

《아, 아닙니다. 그런데 옥산동문 무엇인가 나한테 숨기는군요.》

《제가 숨겨요?》옥산이 불시에 허리를 꺾으며 깔깔 웃었다. 《사실은 강선제강소복구문제를 두고 우리 오빠가 여러번 걱정하는 말을 들었어요. 그래서 이곳에 취재나올 때마다 저도 좀 료해했지요.》

《그래요? 그런데 오빠란 누굽니까?》

《고스쁠란.》

《고스쁠란? 그러니 우리 제강소에 여러번 내려왔던 국가계획위원회 한윤호국장이 오빠입니까?》

옥산은 이제야 알아맞혔다는듯이 생글생글 웃었다. 신철의 눈앞에 오래동안 해빛을 보지 못한 사람처럼 부자연스럽게 얼굴이 희고 창백하던 그 사람, 삼복더위에 넥타이까지 매고는 웃몸을 뒤로 좀 제낄사한 자세로 걸어다니던 사람의 모습이 떠올랐다. 언제보나 강마른 몸에서 칼칼한 위엄이 풍기여 범접하기 어렵게만 생각되던 그 사람은 생기발랄하고 랑만적인 옥산이와는 너무도 대조적이였다. 하지만 제강소복구문제를 놓고 심심히 우려하고 걱정하는 그 두사람의 심정에는 어딘가 모르게 공통성이 있었다.

신철은 어쩐지 자기들이 주장하고있는 제강소복구안을 실현하는데서 예상치 않는 난관이 가로놓이고 남몰래 속깊이 묻어두고 키워오고있는 옥산이에 대한 련정도 오빠라는 그 사람에 의하여 흐려질것만 같아 기분이 좋지 않았다. 제강소를 다 돌아보고 대동강반으로 나왔을 때에야 신철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날씨는 여전히 찌는듯 무더웠으나 강바람은 그래도 시원했다. 그들은 강기슭에 있는 마치도 시원한 강물을 찾아 엉금엉금 기여가다가 그대로 굳어져버린듯 한 자라모양의 넙적한 바위우에 올라앉았다. 신철과 옥산은 철부지 어린 시절에로 되돌아온듯 바위등에 신발들을 벗어놓고는 강물속에 맨발을 드리우고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들은 수풍호반에서 있었던 일들을 사소한 세부들까지도 기억해가지고는 서로 보충하면서 끓임없이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것은 마치도 아득히 흘러간 어린 시절의 회상 같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것은 불과 2년전에 있은 일들이였다.

남모르게 키워오는 애틋한 감정과 진실한 우정에서는 시공간도 문제가 아닌듯 싶었다. 그들은 이 2년남짓한 기간 아득히 먼거리를 두고 소식한장 주고받음이 없이 지나왔지만 이전의 그 진실하고 애틋하던 감정이 조금도 사라지거나 흐려지지 않았다는것을 느꼈다.

한번은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옥산이 불쑥 말을 꺼냈다.

《며칠전에 책 하나를 읽었는데 거기에는 사랑의 맹세 다섯가지에 대한 이야기가 있었어요.》

신철의 얼굴을 빤히 지켜보는 옥산의 커다란 눈에는 호기심어린 미소가 어리광치고있었다.

《그래요? 어디 이야기해보십시오.》

신철의 권고에 옥산이 그 다섯가지를 꼽기 시작했다.

《사랑의 맹세 첫째, 사랑은 변하지 말아야 한다!》

신철은 공감이 간다는듯 머리를 끄덕이였다.

《찬성입니다.》

《둘째, 사랑은 순결하여야 한다!》

《찬성입니다.》

《셋째, 사랑은 서로 책임져야 한다!》

《찬성입니다.》

《넷째, 사랑은 서로 존중하여야 한다!》

《찬성입니다.》

《다섯째, 사랑은 서로 의지하여야 한다!》

《찬성입니다.》

《이상이 사랑의 맹세 다섯가지예요.》

《중요한것이 빠졌습니다. 말하자면 핵이 빠졌다 할가…》

《그래요?》

옥산은 뜻밖이라는듯 까만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그는 신철의 후더분한 얼굴이 신중한 빛을 띤것을 보았다.

《그럼 그 핵이 무엇입니까?》

《사랑은 창조하여야 한다!》

《사랑은 창조하여야 한다!》신철의 말을 되받아외우던 옥산은 마치 신철을 처음 보기나 하는것처럼 찬찬히 뜯어보았다. 《그러니 신철동문 철학에도 조예가 깊군요.》

《너무 추어주지 마십시오. 그건 옥산동무가 아직도 자기 조국과 자기 인민을 잘 모르기때문입니다. 창조로 들끓는 나라, 이것이 나의 조국입니다. 사업도 생활도 예술도 그리고 사랑도 모든것이 다 창조로 약동하고있습니다.》

신철은 잠시 말을 멈추고 생각에 잠기였다. 물결에 부서지는 해빛이 그의 얼굴에 반사되여 어룽거리였다.

《나는 전기로를 복구하면서도 사람들의 창조성이 어떻게 나타나고있는가를 똑똑히 보고있습니다.》

이렇게 다시 말머리를 뗀 신철은 형체조차 찾아볼수 없는 전기로를 전쟁전그대로 복구하자고 해도 여간 힘들지 않는데 리웅천기사장을 비롯하여 제강소로동계급이 전쟁전 전기로의 배나 되는 새로운 현대적인 전기로를 일떠세우기로 결의하였을 때 자기는 커다란 충격을 받았다고 말하였다.

물론 짧은 시일에 복구하자니 일련의 문제가 없는것은 아니였다. 본래전기로기초를 그대로 리용하는 문제가 심각한 론쟁점으로 나섰는데 일제시기 이곳 전기로기초공사에 이러저러하게 관계한바있는 기사장은 본래기초를 능히 그대로 쓸수 있다고 주장한다고 말하였다.

《솔직히 말해서 나는 리웅천동지와 용해공들이 15t 남짓한 전기로를 올려놓았던 기초에 30t 전기로를 올려놓자고 했을 때 동요했습니다. 그러나 일제시기 전기로건설에 참가했던 사람들과 이야기도 나누고 설계도면도 검토하는 과정에 그들의 주장에 일리가 있다는것, 내가 기존틀에 얽매여 소극성을 범하였다는것을 느끼기 시작하였습니다. 며칠안으로 본래의 기초를 쓸수 있는가 없는가가 결판이 날것입니다.

나는 지금도 전기로복구에서 기존관념을 마스고 새롭게 혁신해보자는 로동계급의 그 창조정신에서 커다란 고무를 받고있습니다.》

옥산은 강선제강소복구문제를 놓고 걱정하는 자기 오빠의 심정이 리해는 되였으나 혁신적인 발기를 한 사람들을 무작정 비난할 근거는 없다는것을 점차 깨닫기 시작하였다. 그는 신철을 믿는것만큼 그의 말도 믿지 않을수 없었다.

두사람사이의 이야기는 동강날줄 모르고 끊임없이 이어졌다. 청춘남녀사이의 교제에서는 때로 같은 성격보다 서로 다른 성격이 오히려 더잘 어울리는듯 싶었다. 신철은 옥산의 활짝 드러내놓은 그런 고백을 듣는것이 좋았고 옥산은 신철의 이따금씩 던지는 말의 참뜻과 의미를 깊이 새겨보게 되는것이 즐거웠다.

어느덧 대동강에는 아름다운 저녁노을이 비끼기 시작하였다. 강물은 노을에 반사되여 이글이글 불타고있었다.

《아이, 이걸 어쩌나!》

불시에 옥산이 새된 소리를 질렀다. 어느사이 밀물이 들어와 자기들이 타고앉은 자라바위가 강물에 포위된것을 발견하였던것이다.

《너무 놀라지 마십시오. 아직은 로빈손 크루소의 신세까지는 되지 않았으니까.》

신철은 이러며 바지가랭이를 허벅다리까지 걷어올렸다.

《어쩌자는거예요?》

《다리를 놔야지요. 저기 기슭까지 날아갈수야 없지 않습니까?》

《그만 두세요. 나도 강물에 뛰여들겠어요.》

《허허, 여기가 뭐 수영장인줄 압니까?》

신철은 웃으며 서슴없이 강물에 들어섰다. 그리고는 커다란 돌들을 안아다가 옥산의 발밑에 징검다리를 놓아주는것이였다. 옥산은 그 돌을 밟으려고 하지 않았다.

《빨리 내려서십시오. 강물이 차오르는걸 보지 못합니까?》

신철이 거듭 독촉해서야 옥산은 징검다리에 내려섰다. 신철은 그의 손을 꼭 잡아주었다. 역으로 나갈 때까지 두사람사이에는 한마디의 말도 없었다.

댓글목록

profile_image

강산님의 댓글

강산 작성일

(위에서 계속)

옥산은 렬차가 떠나기 직전에 승강대를 손으로 잡은채 신철에게 말했다.

《저 뭐랄가, 기사들을 모아들이는것 말이예요. 다시는 그러지 마세요.》

신철은 리웅천이 문제의 그 《사진첩》을 옥산에게 보여주었다는것을 이미 알고있었으므로 옥산이 하는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인차 알아차렸다.

신철은 침묵을 지켰다.

《그렇게 하지요?》 옥산은 다짐을 받듯 이렇게 묻고는 덧붙이는것이였다.

《변변치 못한 글들인데 부끄럽습니다.》

작별할 시각이 다가왔을 때에야 두사람은 피차 요긴한 말은 거의나 꺼내지 못하였다는것을 깨달았다.

《우리 오빠한테 부탁할것은 없어요?》

렬차가 떠나기 시작할 때 옥산이 갑자기 잊었던것을 상기한듯 승강대에서 웨쳤다.

《없습니다. 잘 가시오. 다시 만납시다.》

신철은 멀어지는 옥산이를 향해 손을 저으며 소리쳤다.


서비스이용약관 모바일 버전으로 보기 상단으로


Copyright © 2010 - 2023 www.hanseattle1.com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