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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소설 50년 여름 제19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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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강산
댓글 1건 조회 15,572회 작성일 20-02-18 20: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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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 장

 

피반령계선에서의 53사 9련대 철수는 비밀무선암호문으로 시달되여 극비속에 진행되였다. 52사 지휘참모일군들은 이 조치가 최현사단장의 고집스런 제기때문에 취해진것으로 생각했다.

최현사단장에게도 이 일은 뜻밖이였다. 그제저녁 그는 9련대문제로 강건과 무선전화를 하였다. 그때 강건은 대전정면은 걱정말고 빨리 피반령을 극복하라고 하면서 9련대 철수문제를 부결하였다. 하여 최현은 피반령공격전투조직에 9련대도 포함시켰었다. 그런데 그 지시가 변경된것이다. 참모장은 여직껏 보이지 않던 완강한 태도로 최현에게 들이댔다.

《9련대 철수는 하루만 연기하게 해주십시오. 6련대의 공격이야 9련대의 엄호밑에 하기로 되여있지 않습니까. 9련대가 가면 우리의 공격계획은 튑니다.》

강경하게 나오는 참모장의 주장에 최현은 여느때라면 어성을 높였겠으나 부드럽게 웃으며 말했다.

《여보, 사내장부 일언이 중천금이라고 그저께만도 우린 9련대 없는 전제밑에 공격계획을 짰고 또 9련대 철수제의에 동무도 동의를 하지 않았소. 글쎄 볼에 밤알을 물긴 했댔지만.》

참모장은 그의 말에 더 격동되여 열을 올렸다.

《사단장동지, 이것이 개인의 체면과 관계된 문제입니까. 사단의 운명, 작전의 운명과 관계된것이 아닙니까?》

《그건 옳소.》

최현은 순간이나마 침울해졌다. 피반령을 아직 극복하지 못했다는 생각이 비수같이 날아들며 그를 괴롭혔다.

(그래 체면문제가 아니라는 참모장의 말은 백번 옳다. 그러나 그때문에 9련대를 다시 둬달라고 할수는 없다. 9련대는 대전정면을 압축하게 되지 않았는가. 그런데 왜 어제까지 철수를 부결하다가 오늘엔 명령을 떨궜겠는가.)

최현은 여러가지 번거로운 생각에서 벗어나지 못한채 그리고 참모장을 설득시키지도 못한채 배비변경을 하고있는 전방으로 나갔다.

53사 9련대가 차지하였던 계선에는 7련대의 한개 대대가 전개하였다.

9련대는 한정량의 포탄을 피반령의 적방어연선에 쏟아붓는것으로 마지막 작별인사를 하였다. 그 포사격은 련대의 철수를 적의 감시로부터 음페하기 위한 수단이기도 하였다.

긴 여름해가 서켠으로 떨어질무렵 53사 9련대의 마지막종대인 군의소대렬이 출발하였다. 그 군의소대렬속에는 성련화가 있었다. 련화는 자기가 어떻게 되여 53사 9련대 군의소로 소환되게 되였는지 몰랐다. 늙수그레한 군의소장은 량식카드를 주면서 매우 섭섭한 기색으로 《어찌된 영문인지 나도 모르겠소. 엊저녁 아바이한테 주사를 놓으러 가니 동무에 대해서 꼬치꼬치 캐물었소. 동무가 서울에서 왔다는걸 들었을 때는 아바이가 매우 기뻐했는데… 하여간 이상한 일이야. 동무의 소환은 아바이의 지시거든.》라고 말했다. 그 의문은 군의소대렬을 지나치던 9련대장의 흰 차가 멈춰섰을 때 풀렸다.

52사에서 넘어온 간호원을 찾은 련대장은 성련화가 부끄러울 정도로 한참이나 훑어보다가 림운학이를 아는가고 물었다. 련화가 대답을 못하고 얼굴만 잔뜩 붉히자 련대장은 《이제 만나면 다시는 헤여지지 말라고… 최현사단장이 부탁했소. 알겠소?》라는 말을 남기고 그 차에 올라 사라졌다.

련화는 길가의 오동나무밑에 서서 말없이 그들을 바래주던 수염이 거밋한 최현사단장의 주름진 얼굴을 상기하자 가슴이 아릿해났다.

그 사단장이 자기와 림운학의 관계를 어떻게 알며 또 가혹한 전투환경에서 하루에도 몇번씩 전방에 오가는 사단장이 자기같은것이 무엇이라고 그렇게 관심할가. 운학이를 만나면 어떻게 대하고…

놀라움과 의혹, 기쁨과 황송함이 착잡히 엉켜드는 속에 련화는 얼굴이 점점 달아올라 옆에 동무들의 눈길이 그에게 자주 쏠려드는것도 모르고 기계적으로 걸음을 옮겼다.

최현사단장에게서 림운학의 일은 가장 사사로운것이면서도 잊어넘겨버릴수 없는 문제였다. 성련화를 찾아 9련대에 돌린것은 그의 수만가지 잔걱정중에 하나를 매듭지은셈이였다. 한사람에게라도 기쁨을 주었다는것이 9련대 철수로 생겨나는 마음에 하나의 온기로 스며들었다. 그 역시 참모장앞에서랑은 땅땅 큰소리를 쳤지만 정작 한개 구간을 맡고있던 9련대가 떠나니 속이 허전했다. 하여 그는 9련대의 진지에 배비된 7련대 1대대에 나가 병사들과 한식경이나 이야기를 나누었다. 여전히 사기넘친 전사들과 어울려 있으니 부직간부들의 불안스런 태도로 엉켜있던 불쾌감도 어지간히 날려버려졌다. 병사들은 한개 련대계선을 대대로 담당한다는데 대하여 두려워하는것이 아니라 오히려 긍지를 가지고있었다.

《이런 전사들을 볼줄 모르거든. 샌님들이야, 샌님들.》

최현은 참모장이며 그러루한 부직간부들의 얼굴을 눈앞에 그리며 몇번이고 이렇게 중얼거리며 사단지휘부로 돌아왔다. 그런데 그를 기다리고있던 참모장은 한결 풀려진 그의 마음에 또하나 타격을 안겨주었다.

《4련대와 6련대 계선에서 적들이 반돌격을 개시했습니다. 이젠 반돌격까지 해오는 형편입니다.》

최현에게 타격으로 된것은 그 사실자체라기보다 과장된 표정과 억양으로 말하는 참모장의 태도때문이였다. 그것도 차에서 내린 참모장의 눈빛은 이렇게 말하고있었다. 참모장은 최현의 얼굴이 활짝 달아올라 갓 구워낸 무쇠빛으로 변하는것을 여느때면 두려웁게 보았겠으나 직책상 임무와 책임감에서 하는 보고라는듯 눈길을 곧추 세워보고있었다. 최현은 불끈하고 성미가 살아올랐으나 참았다. 하등 성을 낼 일이 못되며 참모장은 자기의 직책상 보고를 하고있다는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화가 뻗쳐오는것이 참모장탓이 아니라 자기 역시 현 사태에 초조하고 불안했기때문이라는것도 알았다. 부관이 뛰여나와 전화가 왔다는바람에 적당한 대답을 고르던 최현은 그대로 방문을 열고 들어섰다. 전화기를 들자 6련대장의 되알진 목소리가 울려나왔다.

《적들이 역포위를 시도하고있습니다. 할수없이 2대대도 전투에 말려들었습니다.》

《2대대를?》

《그렇습니다. 그런데 대대장 박로수동무가 상했습니다.》

《…》

최현의 얼굴은 삽시에 컴컴하게 질려갔다. 2대대는 오늘밤 괴뢰 2사와 3사의 린접점을 뚫고나가는 전투를 하게 되여있으므로 일체 전투에 인입시키지 않고 대기하게끔 되여있었다. 그것을 잘 알며 사단내 지휘관들중에서 그중 담보가 센 6련대장이 2대대를 전투에 인입시킨것은 사태가 그만큼 엄중하다는것을 의미하는것이였다.

《11번동지, 포사격을 하게 해주십시오.》

《그건 안되오.》

최현은 딱 잡아떼였다. 6련대 뒤계선에는 포대대를 은밀히 기동시켜놓고있었다. 그런데 그들 역시 오늘밤 전투에서 진로를 개척하기 위해 써먹으려는것이였다.

《내… 곧 가겠소.》

최현은 전화기를 놓고 부관에게 자동총 총탄 두정량분을 준비하라고 했다.

《또 나가겠습니까?》

참모장은 아연하여 그를 보았다. 최현은 군복 웃저고리를 벗었다. 모직으로 된 그 옷은 몹시 더웠고 장령으로 전투에 참가하는것은 불허되였기때문이였다. 그는 철함우에 개여놓은 전사복을 입기 시작하였다. 그때 모터찌클 발동소리가 울리는가싶더니 문밖에서 부르릉소리를 내지르며 멈춰졌다. 참모장이 뛰여나갔다가 얼굴이 환해서 다시 달려들어왔다. 모자에 《M》형표식을 새긴 중성 한알의 군관이였다. 먼지투성이의 그 군관은 전사복을 입은 최현을 놀랍게 보았고 최현 역시 단추를 채우다 말고 그 군관을 삼키듯 바라보았다.

《사단장동지! 최고사령관동지께서 친서를 보내셨습니다.》

우드득 단추가 떨어져나갔다. 단추를 채운채 전사군복을 급히 벗는바람에 그렇게 되였다. 최현은 장령군복을 다시 입고 목깃 호크까지 다 채운다음 련락군관의 손에서 봉서를 받아쥐였다.

《장군님께선 건강하시오?》

최현의 목소리는 떨리였다. 련락군관은 차렷한채로 대답했다.

《장군님께선 건강하십니다. 52사에 대해서 걱정이 크십니다.》

최현은 손칼을 꺼내 봉서모서리를 찢고 하얀 모조지를 꺼내들었다. 최현은 오래도록 그 편지를 보았다. 그리고 말없이 참모장에게 그 친서를 넘겨주고 발깃한 저녁해빛이 쏟아져들어오는 뙤창가에 다가가 못박힌듯 서있었다. 편지를 다 읽고난 참모장은 숨이 막힌 사람처럼 한동안 까딱 않다가 울먹진 소리로 조용히 불렀다.

《사단장동지!》

최현은 그대로 서있었다.

《용서해주십시오.》

《뭔지… 알겠소?》

《큰! 멋진 싸움입니다. 우리를 믿으시고… 그리고 우리가 모험적인 행동을 할가봐… 새로운 작전안이 있는것 같습니다.》

참모장은 목이 꺽 막혀 더 말을 잇지 못했다. 최고사령관동지의 친서는 많은 경우 암시적이였지만 그들에게는 쉽게 리해되는것이였다.

김일성동지께서는 사단이 앞으로 더욱 가혹한 정황에 직면할수 있다는것을 밝히면서 48시간동안 현재의 공격태세를 계속 견지하라고 하셨다. 그러되 사단장을 비롯한 모든 전투원들이 《무모하고 결사적인 돌격》을 하는것을 금하며 공격기도는 보이되 유생력량을 적의 증대될수 있는 화력권에 마구 로출시키지 말라고 당부하셨다.

《동문.》

최현이 돌아섰다. 그의 눈에는 물기가 배여있었다.

《우리가 왜 장군님! 장군님! 하는지 아오?》

최현은 환희에 밝아진 참모장의 얼굴을 마주보다가 련락군관에게 다가가 그의 손을 꼭 잡았다.

《고맙소!》

《사단장동지, 편지가 또 있습니다.》

련락군관은 전투가방에서 또 하나 편지를 꺼내 내밀었다.

《장군님께서 꼭 본인에게 전달하라고 한것입니다.》

편지를 받아든 최현은 의아해 그를 보았다.

《그러니 장군님께서 이 편지를 직접 주시더란 말이요?》

《그렇습니다.》

최현은 6련대장에게 전화를 걸가 하다가 고쳐 생각하였다. 원래의 결심대로 그쪽에 나가야겠다고 마음먹었다. 과장이상 모여 김일성동지의 친서사상을 전달한 그는 화선진출을 금하라고 하신 명령을 어긴다는 참모장의 반발을 무릅쓰고 차에 올랐다. 그는 달리는 차우에서 오영혜가 박로수에게 보내는 편지를 만지작거렸다.

 

태풍이 휘몰아쳐간듯 한 언덕, 흩날리는 초연과 먼지속에 엷은 락조가 엇비스듬히 흘러내렸다,

아름드리 신갈나무밑에 박로수가 누워있었다. 련대장으로부터 전투과정을 들으며 언덕에 오른 최현은 박로수가 누워있는데서 좀 떨어진 아래비탈에 팥밥이 담긴 수십개의 휴대용밥통을 주런이 늘여놓은채 취사병인듯 한 군인이 고개를 떨구고있는것을 보았다. 박로수앞에 꿇어앉아있던 군인들이 불시에 나타난 사단장앞에 조심스레 길을 틔워주었다.

박로수는 적우회대의 불의적인 기습을 맞받아 총창돌격을 하다가 흉탄에 맞은것이였다. 목으로부터 윈쪽가슴을 엇가로 동인 붕대는 피에 젖어 뻘건 반점들이 중간중간 배여있었다. 그의 머리맡에는 부혁이 끊어진 자동총이 놓여있었다.

최현은 조용히 무릎을 꺾고앉아 그의 팔목을 잡아쥐였다. 뼈대 굵은 팔목이 나무토막같이 온기도 맥박도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여, 대대장!》

최현은 나직이 불렀다. 반쯤 감츠린 박로수의 눈이 최현이를 물끄러미 보다가 눈까풀이 떨었다. 눈에는 물기가 어려있는듯싶었다. 최현이를 알아본듯 입술을 움죽거리다가 낯을 찡그리였다. 동맥과 후두가 못쓰게 된 박로수는 말을 할래야 할수 없는것이였다.

최현은 앞이 흐려들어 지그시 눈을 감았다.이 사람을 처음으로 알게 되던 소양강기슭으로부터의 일들이 주마등처럼 지나갔다.

견장도 없이 후줄근해 섰던 모습, 투박스런 손에 잡힌 숟가락이 떨던것까지 방불히 보였다. 그저께 오영혜를 두고 하던 궁상스럽다고 여긴 말이 귀전을 울렸다.

《…오영혜동무는 편지를 안씁니다. 후날 그에게 이 박로수는… 용감한 군인이였다는걸 알려주면 더 원이 없겠습니다.》

그때 왜 이 사람을 욕했던가 하는 생각에 목이 메여올랐다.

누군가 《흑-》 하고 흐느낌을 터뜨렸다. 최현은 이를 악물고 고개를 쳐들었다. 거뭇한 얼굴의 하사관이였다. 소양강에서 이 박로수를 변호하던 분대장이였다.

최현은 터져나오려는 슬픔을 참고 그에게 오영혜의 편지를 내밀었다.

《이걸 독보하오.》

박로수의 묻는듯 한 눈길을 느끼자 최현은 애써 웃으며 말했다.

《오영혜가 편지를 보내왔다.》

최현의 손에 잡힌 박로수의 팔목에 경련이 지나갔다. 타는듯 한 눈이 최현에게 애원하듯 하는 빛을 발사했다. 최현은 그가 자기눈으로 직접 보고싶어 한다는것을 알았다. 분대장이 최현이를 앞질렀다.

《진짜편지입니다.》

꺽꺽 막히는 소리로 부르짖는 분대장은 편지장을 박로수의 앞에 펼쳐들었다. 박로수는 한껏 눈을 치뜨고 편지의 글발을 보다가 또 한번 팔목에 경련을 일으키며 눈을 감았다. 그러자 분대장이 손등으로 눈물을 훔치고 큰소리로 읽기 시작했다.

《사랑하는 박로수동지에게!

저는 장군님앞에서… 이 편지를 써요…》

둔덕우에 메아리치던 자지러진 총소리도 사라진듯싶었다. 최현은 꿈을 꾸는듯 한 상태에서 박로수만 내려다보았다. 감겨진 박로수의 눈귀에서 눈물이 주루룩 흘러내렸다. 생명의 온기가 떠나간듯싶던 박로수의 팔목에도 힘이 뻗쳐올랐다.

그래 이 사람은 살것이다. 어떻게 죽을수 있는가.

《대대장동지!》

뼈아피 부르는 소리에 정신을 차렸다. 모두가 어깨를 들먹이고있었다.

《울지 말어.》

최현은 크게 소리쳤으나 그자신도 눈물을 걷잡을수 없었다. 박로수의 팔목이 또다시 꿈틀했다. 최현은 놀라 내려다보았다.

박로수는 그의 손에서 팔목을 뽑으려 하고있었다. 최현이 손을 놓자 박로수는 물기가 그렁한 눈으로 최현을 보다가 온 얼굴을 이지러뜨리며 반대로 최현의 손을 잡았다.

오른손으로 최현의 손바닥에 글을 썼다. 나무꼬챙이가 손바닥을 뚫는듯한 감촉이였다. 박로수는 필사의 기력으로 마지막말을 남기는것이였다.

모두가 울음을 짓씹고 숨을 멈춘채 박로수의 손가락이 움직이는 최현의 손바닥을 지켜보았다.

《장…군…님…께…고…맙…습…니…다…》

박로수의 팔이 맥없이 떨어져내렸다.

전호가에 어둠이 내려덮일무렵 박로수는 최현의 손에 팔목을 잡힌채 숨을 거두었다. 놀랍게도 하늘을 우러르는 그의 눈에는 여전히 미소가 실려있었다.

최현이 그의 눈을 감겨주었다. 까칠까칠한 눈섭이 손바닥에 미칠 때 최현은 어금이를 부서져라 깨물었다.

무겁게 몸을 일으킨 그는 검은 조각군상처럼 굳어진 대원들을 둘러보다가 무뚝뚝하게 말했다.

《이제부터 대대는 내가 지휘하겠소.》

그는 눈시울이 뻘겋게 짓무른 취사병에게 다가갔다.

《식사여분이 있소?》

《있습니다.》

《하나 주오.》

밥통을 받아쥔 그는 자기를 지켜보는 군인들에게 엄하게 말했다.

《다들 식사를 가지고… 일루 모이시오.》

최현은 발치에 딩구는 수류탄상자우에 걸터앉아 주머니에 늘 갖고다니던 양은숟가락을 꺼내들었다.

사단장의 어마어마한 호령탓인지 아니면 슬픔을 이겨내려 애쓰는 최현의 심정에 대한 동정때문인지 하나 둘 밥통을 들고 그의 주변에 와 앉았다. 최현은 눈섭을 잔뜩 찌프리고 둘러보다가 숟가락으로 밥을 푹 떴다.

《이래야 박로수가 좋아해. 든든히 먹고 이제 그의 복수전을 하자구.》

그는 눈을 감고 밥을 떠넣었다. 기침이 터져나오려 했다. 입안에 들어간 밥알은 모래알처럼 훑어지였다. 그런대로 꿀꺽 삼켰다.

사단장의 행동을 지켜보던 한 전사가 터져나오는 울음을 간신히 참으며 말했다.

《사단장동지, 일없습니다. 우린… 슬픔에 지지 않습니다.》

최현은 숟가락을 올리다 말고 울음이 터져나올것 같아 고개를 수그렸다.

《그래, 그래야지.》

전사들은 그의 갈린 목소리에 고개를 떨군채 기계적으로 숟가락을 옮기였다.

최현이 넘어 안가는 밥을 억지로 삼키고있을 때 부관이 달려와 사단참모장으로부터 전화가 왔다는것을 알려주었다. 최현은 련락군관에게 사단의 결심을 알려줘야 한다는것을 상기하였다. 최고사령관동지께서 주신 명령대로 적의 이목을 계속 끌뿐만아니라 종전의 계획대로 피반령을 점령할 결심을 다시금 굳게 다진 최현이였다.

 

7월 18일 아침, 대전비행장에 내린 채병덕은 마중나온 초라한 모습의 띤에게서 6월 28일의 패전을 전후한 자기를 보았다.

비행기 다라쁘에서 내려서는 워커를 향해 거수경례를 한 띤은 무어라 중얼거렸으나 발음이 똑똑치 않았고 흐리멍텅한 눈길은 차고 딱딱스런 워커의 눈길앞에 갈팡질팡하였다. 군정장관(띤은 한때 서울에서 군정장관을 했다.)시절의 그 여유어린 몸짓과 기풍은 찾아볼래야 볼수 없었다.

워커는 띤과 그의 참모장교 몇만을 데리고 비행장옆 막사로 들어갔다. 대전작전에서 띤사단장의 《한국인》고문격으로 사업할 특명을 지닌 채병덕은 이 변덕스러운 푸대접에 적잖게 기분이 잡쳤으나 미군헌병들로 에워싸인 막사옆 풀밭에 대전시가도를 펼쳐놓고 앉아 지도작업을 하였다. 뜨거운 해볕아래 무려 한시간동안이나 콤파스와 부호자를 놀릴 때 작전토론을 끝마치고 나온 워커는 벽돌장처럼 달아오른 얼굴에 땀이 비오듯 하는 중에서도 끄떡않고 지형판독에 열중하는 채병덕을 보고 저으기 감동하는 상이였다. 그는 채병덕에게는 알리지 않을 심산이였던듯 한 《비밀》을 알려주는것으로 그 감동의 일부를 표현했다.

《제네랄 채, 이틀을 견지하면 됩니다. 이틀후면 1기병사단이 대전작전의 크라이막스를 장식하는 포문을 열것입니다.》

워커를 쫓아 막사로 들어갈 때만도 우거지상이 되여 흐려있던 띤은 활짝 개인 얼굴로 채병덕에게 악수까지 청하며 말했다.

《우리는 의의깊은 력사적지점에서 벗으로 되게 되였습니다.》

워커가 비행기에 올라 떠나가자 띤은 채병덕에 대해 더욱 너그럽고 선량한 사람으로 되여 친히 자기 차에 태웠다. 띤의 지휘소는 사방에 콩크리트방탄벽을 한 요새화된 건물안에 있었다. 창문마다 기관총대좌가 설치되여있었고 파리와 모기의 침습을 막기 위해 뿌린 향수내가 지독스레 코를 찔렀다. 띤의 방문앞에 이르렀을 때 부관인듯 한 금발머리의 애젊은 장교가 수심어린 빛으로 보고했다.

《사단장각하, 아이큘론스중좌님이 자총을 했습니다. 히스테리발작이 끝난 뒤였습니다.》

띤은 걸음을 멈추고 채병덕을 피끗 살피고는 사나운 눈길로 금발머리를 쏘아보았다.

《그건 잘한것이야.》

그리고는 십자를 그으려는듯 손을 올리다 말고 문을 활 떠밀어 성급히 걸어들어갔다. 띤은 철모를 벗어 모자걸개에 건 후 따라들어서는 미국인장교들을 다 보내고 한동안 침울한 눈길로 창문쪽을 내다보다가 무겁게 입을 열었다.

《그 장교는 훌륭한 군인이였소. 대대가 전멸된것으로 고민하던 끝에 자기 병사들을 따라간셈이요.》

띤은 작전탁우에 접어놓은 지도를 천천히 펼쳤다. 누런 반지가 번쩍거리는 투실투실한 손가락에서 새까맣게 때가 끼인 뾰족한 손톱이 눈을 끌었다.

(세수도 못하고 지내는구나.)

그 손톱과 띤의 머리에 듬성듬성 섞인 흰 머리칼이 채병덕의 꼿꼿한 마음을 얼마간 눙그러뜨렸다.

《당신 자살을 생각해봤소?》

띤은 뚱딴지같은 물음으로 채병덕을 얼떨떨하게 만들었다. 웃는것 같기도 하고 쏴보는것 같기도 한 종잡을수 없는 서양인의 노란 눈알을 바라보던 채병덕은 점점 얼굴이 붉어져갔다. 서울함락직후 절망과 울분속에 표류하던 자기의 심리를 직시한 질문같았다. 채병덕이 대답을 못하자 띤은 싱그레 웃었다.

《당신은 일본군출신이지?》

《그렇습니다.》

《우리 미국인들은 당신네 일본군대의 할복자살법을 무지스럽다고 비웃지만 난 그렇게 생각하지 않소. 난 거기에 군인으로서 경의를 표하오. 전패한 군인은 죽어야 한다. 이것은 일종의 랑만주의며 동시에 군대의 기강을 세우는 훌륭한 질서지. 그런데 우리 미국사회는 아직 이것을 리해 못하고있소. 막다른 골목에서는 포로되여서라도 살라고 하는것이 미국의 선전이요. 물론 이것은 군대를 싫어하고 죽기를 싫어하는 미국젊은이들을 싸움판에 내보내기 위해 필요한 선전이긴 하지만 나는 반대요. 나는 어제 우리 사단장병들에게 퇴각과 포로란 있을수 없다는것을 정식 명령으로 떨궜소. 기자나부랭이들이나 국회의 리론가들이 이 면을 시비한다 해도 나는 이 초지를 꺾지 않을것이요.》

《각하, 저 역시 초전실패후 군인의 도로써 그것을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저에게는 살아서 적을 타승해야 할 임무가 있었습니다.》

《아니, 나는 당신을 두고 하는 소리가 아니요. 이 대전을 두고 나의 결심을 말하자는것이요. 왜냐하면 이 대전을 사수하느냐 못하느냐에는 나의 사단의 명예뿐아니라 대아메리카의 명예가 달려있기때문인것이요.》

《각하에게는 명예만 있지만 저에게는 나의 생활의 전부, 나의 과거와 고향 친척과 친우들 전부가 있습니다. 빨갱이들한테 이제 다시 쫓기는 날에는 멸망만이 있습니다. 사상과 생활전부를 위해 나는 이 싸움에 자신의 전체를 바치지 않을수 없습니다.》

채병덕이 서투른 영어로 이까지 말하고났을 때 띤은 저으기 감심한 낯빛이였다.

《우리는 서로 비슷한 처지요.》

그리고는 싱그레 웃으며 조선말로 말하였다,

《우리 함께 아리랑고개를 아리랑 아리랑 넘어갑시다.》

다른 두손으로 지도의 주름살을 펴며 영어로 계속하였다.

《이것은 대전방어도입니다. 나는 당신의 의견을 듣고저 합니다.》

띤은 매우 허심한 태도로 청했다. 채병덕은 삼각방어진으로 구축된 진지형성에서 이렇다할 흠집을 발견할수 없었다. 지도상의 표기대로 보면 대전은 철통같은 수비속에 들어있는셈이였다. 모든 길목이 땅크와 장갑차, 지뢰원으로 차단되여있고 인민군 보병이 진격해올수 있는 구역마다 집중적인 포사격을 해댈수 있게 조밀한 포화력망이 꾸려져있었다. 채병덕은 띤으로 하여금 입을 딱 벌릴수 있는 신통한 의견을 주고싶었으나 틈이 없었다. 부득불 도꾜의 맥아더앞에서 뽐내본 범벅된 전투경험을 말할수밖에 없었다.

《인민군의 전술은 다종다양합니다. 그들은 김일성이 만들어낸 게릴라전법을 응용하므로 전투가 진행될 때까지 그 기도와 행동을 예측할수 없습니다. 예상외의 지점에서 예상외의 습격과 교란작전으로 방어진을 뚫고 모든 지휘와 작전을 마비시키고 들이칩니다. 서울함락의 교훈으로 볼 때 여기서도 땅크와 보병기습대의 게릴라적침투를 막는것이 가장 중요한 과제라고 생각됩니다.》

《어데가 그 위험지점으로 될수 있다고 생각하오?》

띤은 저으기 초조한 기색으로 지도의 여기저기틀 더듬어 살폈다.

《기본은 대전정면이겠지요. 그러나 주의를 돌릴것은 여기 우리 l군단과의 린접점입니다.》

《세개 사단의 방어를 그 인민군 52사가 돌파할수 있다고 생각하오?》

《물론 할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신묘합니다.》

띤은 음울한 눈길로 채병덕의 손가락이 가닿는 벌판을 보다가 조용히 물었다.

《그곳으로 진출한 인민군 사단장이 <산악게릴라전>의 용장이라는 사람이지?》

《그렇습니다. 각하.》

《그가 어떤 수를 쓸수 있소?》

《게릴라적인 침투로 조용히 잠적해들어올수 있습니다.》

《당신네 세개 사단이나 되는 국군이 그것을 못막아낸단 말이요?》

《막아낼것입니다. 그러나 만약의 대비책은 서야 할것입니다.》

《다음은 어디라고 생각하오?》

채병덕은 딱히 짚을만 한 지점이 없었다. 그의 손가락은 미군전투부대가 투입되지 않은 공간인 대전후면의 금산-영동간 계선을 짚었다.

《이 후방계선에도 일정한 방어진을 조성하는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띤은 불만스레 미간을 찌프리며 어이없다는 눈길로 채병덕을 보다가 《노, 노.》를 련발하였다. 채병덕이 입을 꾹 다물고 침묵을 지키자 띤은 벌떡 일어서며 성급한 목소리로 말했다.

《당신은 나를 겁쟁이로 만들려고 하는것이 아니요? 인민군이 항공륙전대가 없는 이상 날개가 달리지 않는 이상 어떻게 그 지점에 나타날수 있단 말이요?》

《각하, 그들의 용병술은…》

《그만하시오.》

띤은 책상을 두드리고 방안을 성급히 왔다갔다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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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산님의 댓글

강산 작성일

(위에서 계속)


띤은 책상을 두드리고 방안을 성급히 왔다갔다하다가 방구석에 부풀어있는 방수포를 홱 잡아벗겼다. 무반동포 비슷한 형태의 포가 놓여있었다. 띤은 장탄대를 절컥 잡아당겼다가 도로 놓고는 한결 풀린 어조로 말하였다.

《이 무기는 어떤 땅크도 격파할수 있는 최신형바주카포요.》

채병덕이 그대로 서있자 띤은 입술을 질근질근 깨물다가 지도앞에 다가와 손바닥으로 피반령쪽을 덮쳤다. 그리고는 채병덕을 보고 살기어린 웃음을 지었다.

《여기의 인민군은 이틀후면 우리 25사단의 포위타격에 섬멸될것이요.》

《네?!》

채병덕은 1기사의 출동에 대한 소식을 들을 때보다 더 놀랐다. 띤은 고개를 끄덕이고 주먹을 움켜쥐며 채병덕의 코등을 스칠듯하며 흔들어댔다.

《그렇소. 25사가 피반령을 동쪽으로부터 지원하고 1기사가 그에 맞춰 가위작전을 펼치면 이 대전에서 인민군은 주력전체가 소멸된단 말이요. 알겠소…?》

《각하.》

채병덕은 환희에 목소리가 떨렸다. 행운의 녀신이 그에게 축복의 미소를 보내주는상싶었다. 띤은 싱그레 웃는듯 하다가 병아리를 덮치는 독수리의 눈이 되여 채병덕을 한동안 바라보았다.

《이 작전의 비밀을 아는 한국인은 오직 제네랄 채뿐이요.》

《각하, 믿음에 죽기로 보답하겠습니다.》

채병덕은 띤과 함께 있는 이 대전이 자기 운명에서 대역전을 마련할 기회임을 알았다. 그는 대전방어가 적을 저지시키는데 그치는것이 아니라 인민군주력을 소멸하는 섬멸전으로 되리라는것을 알았다. 맥아더의 륜곽적설계를 심화시킨 워커참모부의 대전작전은 미24사와 1기사, 25사로 인민군을 역포위하여 섬멸하려는데 그 목적이 있었다. 띤의 미24사가 인민군 53사와 54사의 공격을 견제하는 그 시간을 리용하여 포항의 1기사를 대전 동남쪽으로 진입시키고 영천의 미25사를 우회기동시켜 괴뢰1군단과 합세하여 인민군 52사를 압축소멸한 후 동북쪽으로부터 53사와 54사 반달형으로 포위하여 섬멸한다는 이 구상은 작전전술적면에서 그 실현가능성이 충분한것으로 인정되였다.

《워커사령관은 이 작전이 한니발의 깐느작전보다 못지 않는것으로 될것이라고 했소. 그런데 이 승패여부는 전적으로 시간에 달려있소. l기사의 도착전에 피반령이 돌파당하면 이 거창한 작전은 한갖 신기루로 나타났다 사라지는것으로 끝날것이요. 미스터 채의 견해는 어떻소? 당신네 김홍일군단이 우리 미군부대의 도착전까지 고수해낼것 같소?》

《제가 가보겠습니다.》

《그렇다면 대단히 고맙겠습니다. 그 군단고문관은 웨포사관학교시절의 나의 후배요. 나의 인사도 전하오. 물론 나의 련락장교도 보내겠소만. 이번 작전만 성공되면 나는 맥원수에게 직접 당신의 군사적능력과 열성에 대해 보고하겠소.》

《각하, 고맙습니다.》

채병덕은 전패의 쓰디쓴 고배를 마셔본 띤이 적잖게 자기에게 의지하려 한다고 속으로 쾌재를 올렸다. 그러자 그의 눈앞에는 또다시 보라색으로 채색된 명예회복과 출세의 화려한 지평선이 바라보였다. 띤은 그를 바래여 부관실에까지 따라나왔다. 부관실에는 여러명의 좌급장교들이 대기하고있었다. 왼손에 붕대를 처맨 중좌를 발견한 띤은 대번에 얼굴이 험악하게 이지러지였다.

《당신은 뭣때문에 여기 와있소?》

《각하, <B>지구의 전기철조망가설지역은 주민지입니다.》

《그래서?…》

《주민들이 알면 비밀루설이 될수 있고 또…》

《대략 얼마나 있소?》

《가옥만도 100여채입니다.》

《그때문에 왔소?》

《그렇습니다. 각하.》

띤은 가엾다는듯이 그 중좌를 바라보았다. 뚜벅뚜벅 다가간 그는 중좌의 손에 처맨 붕대를 가볍게 다쳐보고는 머리를 설레설레 저었다.

《파상풍주사는 맞았소?》

《맞았습니다. 각하.》

《그렇다면 좋고… 내 이제 당신한테 장갑보병중대를 보내주겠소.》

《네?! 그건… 무슨…》

《한시간내로 가설하오. 그리고 그 비밀을 아는 <한국>인은 없어야 하오.》

《알겠습니다. 각하.》

《전쟁이니까.》

띤은 싸늘히 굳어진 얼굴에 웃음을 띠우다가 그때까지 번히 서있는 채병덕을 보고 어깨를 툭 쳤다.

《전쟁에는 바라지 않는 희생도 있는 법이요.》

띤은 엄숙한 눈길로 채병덕의 속까지 꿰뚫듯 바라보았다. 채병덕은 가슴이 서늘해졌다. 두개 부락을 초토화할데 대한 명령을 내리고도 눈섭하나 까딱 않는 띤의 담보에 위압이 되였던것이다. 밖에 나와 차에 오를 때에야 그는 띤이 《한국인》의 목숨따위는 개벼룩만치도 여기지 않는다는것을 깨달았다.

그는 장갑차의 포격과 기관총사격에 쓰러져 나딩구는 늙은이와 부녀자들의 피흘리는 모습을 환영으로 그려보며 입술을 앙다물었다.

띤의 생각은 옳다. 큰것을 위한 작은것의 희생이다. 모든 위대와 명성은 그런 피의 무덤우에 솟아 빛나는것이 아닌가. 대아메리카도 인디안의 백골우에 건축된것이다. 인간도 같다. 나의 명리와 나의 영광을 위해서는 그 어떤것도 희생해야 한다. 그리고 그 무엇보다도 반공성전의 승리를 위한것이 아닌가!

채병덕은 호위와 감시를 위해 붙은 미군대위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피반령계선의 1선진지에까지 나갔다. 그는 인민군 박격포탄이 쉬임없이 날아오는 참호를 돌아보고 사병들과 장교들에게 이틀간만 견지하라고 고무하였다. 빈틈없이 굴설된 참호와 포진지를 돌아본 채병덕은 한개 사단이 아니라 그 몇곱의 병력으로도 이 계선 돌파는 불가능하다는 결론을 얻었다. 그가 보은에 있는 김홍일사령부로 가보려고 할 때 어디서 침을 맞았는지 만나려던 김홍일이도 전방진지로 나왔다. 평시에 서로 너는 만주괴뢰군의 늙다리요, 너는 한갖 탄약따위나 주무른 병기장교요 하는식으로 쓴외보듯 했던 채병덕과 김홍일은 다가오는 거창한 작전을 앞두고 서로의 간극을 뛰여넘은채 굳게 악수도 하고 진지하게 토론도 하였다. 채병덕은 김홍일로부터 래일아침부터 전면적인 공격에 진입하겠다는 반가운 답변을 가지고 띤에게 돌아왔다. 띤은 부관에서 채병덕을 맞았다.

상아손잡이로 된 지시봉을 든 띤은 아침에 보았을 때보다 더욱 자신만만하고 여유어린 표정이였다. 그는 채병덕의 보고가 몹시 궁금한듯 선자리에서 대답을 요구하였다. 피반령계선에서의 인민군돌파가 불가능하며 김홍일이 공격을 결심했다는 얘기를 했을 때 띤은 입가에 둥그런 주름살을 그리며 웃었다.

《감사하오. 당신은 이젠 가서 쉬시오. 그리고 래일부터 당신은 <한국군>부대들의 전투진지를 순회하면서 인민군게릴라의 시내침투를 막기 위한 대응책을 세우시오.》

띤은 조선말과 영어를 엇섞어 말하고는 자기 방으로 총총히 사라졌다. 채병덕은 누런 가죽을 덧대인 문이 열렸다 닫기는 순간 띤의 작전탁앞에 여러명의 미군장교들이 서있는것을 보았다. 부관실벽 옷걸개에는 여러개의 철갑모와 코트가 걸려있었다.

(나를 제외시키는구나.)

채병덕은 띤이 자기를 작전수뇌부의 머리로가 아니라 하나의 수색장교역에 불과한 처지에 떨궈버렸음을 깨달았다.

《한국》장성의 도움을 받는다는 세론이 꺼려서인가, 아니면 전승후의 공로를 나누기 싫어서인가. 띤, 당신은 용렬하다.

그는 어금이를 꽉 악문채 띤이 사라진 문을 노려보다가 껌을 질겅질겅 씹고있는 부관의 조롱기어린 눈길을 느끼자 홱 돌아서 나왔다.

밤의 시가는 골목골목을 순회하는 땅크와 장갑차의 소음으로 떠들썩했고 귀설은 외국말과 휘파람소리로 악마구리 끓듯 했다.

채병덕이 탄 차는 분주히 오가는 트럭들사이를 조심스럽게 빠지며 숙소인 도시 남쪽변두리의 영빈관쪽으로 달렸다. 이따금 완전무장을 갖춘 순찰대가 차를 멈추기도 하였으나 워커중장의 수표가 있는 그의 증명서를 보고는 군말없이 통과시켜주었다.

그런데 영빈관에 이른 채병덕은 뜻밖의 광경에 부딪쳤다. 아침에만도 경찰 두명이 지켜서있던 영빈관이 미국헌병들로 둘러싸여 있었다. 도처에서 전지불이 껌벅이면서 움직이는 모든 형체를 그 불빛으로 샅샅이 훑었다.

정원등이 희미한 빛을 던지는 정문에서는 키가 전보대같은 헌병과 그의 배허벅에나 와닿을 흰두루마기차림의 로인이 마주서 닭싸움하듯 붙었다 떨어졌다 하였다. 헌병은 팔을 휘저으며 맹렬히 돌진해오는 두루마기의 공격에 분명 싫증을 느낀듯 곤봉으로 그 늙은이의 배허벅을 쿡쿡 찌르며 《노, 노.》 하고 소리를 질렀다. 곤봉에 가슴을 떠박질리운 두루마기는 두손으로 가슴을 탕탕 치며 기광스럽게 고아댔다.

《야, 이녀석들아, 눈깔이 멀었느냐. 이 내가 이래뵈두 <대한민국>의 <장관>이다.》

헌병은 그 소리는 듣는척도 않고 마주오는 채병덕의 차를 무섭게 쏘아보며 곤봉을 뻗쳐 길을 막았다. 채병덕은 그 헌병보다 자동차불빛에 들어선 두루마기가 어제 대구에서 《유엔기계양식》에 참가하고 《위문단》인지 《갈보》들인지 한차 싣고 대전으로 떠나온 리윤병임을 알고 저으기 놀랐다. 그는 육중한 몸을 차문에 부딛치며 맹렬한 기세로 밖에 뛰여내렸다. 헌병은 불쑥 뛰여나온 장대한 몸집의 군복을 보자 동족의 장성으로 여겼는지 《차렷》을 했다.

《여보게 채총장!》

울음이 버물린 소리와 함께 맥빠진 손이 채병덕의 팔소매를 움켜잡았다. 뾰족한 수염턱을 달달 떨며 리윤병이 눈물이 질척한 눈으로 채병덕이를 바라보았다.

《령감님이 어찌된 일입니까?》

《글쎄 내가 망녕인지 저 사람들이 망녕인지, 자네가 말 좀 해주게. 아, 글쎄 저 두억시니같은 량반들이 갑자기 들이닥치더니 이 가방만 쥐여주고는 말할새도 없이 내쫓는것이 아니겠나. 아니 내차라도 줘야겠는데… 무슨 굴뚝쇠들인지 예수를 믿는 나라사람들같지 않다니.》

채병덕은 흙이 게발린 리윤병의 바지무릎을 보고 처량한 심회를 걷잡을수 없었다. 그는 증명서를 꺼내들고 이때까지의 대화를 흥미있게 지켜보던 헌병에게 다가갔다. 이미 채병덕이 미국인이 아니라 《한국군》장성에 불과하다는것을 알아차린 헌병은 방금전에 보인 공손성을 갚음하기 위해서인지 두다리를 쩍 벌리고 선채 눈을 들들 굴리며 아래우를 훑어보고는 증명서를 되는대로 받아 펼쳤다. 전지불까지 비춰 증명서를 확인하고난 그는 어떻게 처리하면 좋을지 모르는듯 망설이다가 호각을 불었다. 그러자 위병장교인듯 한 역시 키꼴이나 한 중위가 뛰쳐나왔다. 그는 헌병보초에게서 증명서를 받아보고는 정중한 자세로 채병덕에게 돌려주며 뒤따르라고 손짓하였다.

《여보게.》

리윤병이 한손으로 두루마기자락을 걷잡아쥐고 뛰여오는것을 그 헌병이 밀쳐버렸다. 채병덕은 차마 이것을 그대로 볼수 없었다.

《중위!》

채병덕은 그 광경을 못본척 하고 빠른 걸음을 놓는 미군장교를 불러세웠다.

《저 사람은 <정부>의 고관이요. 이거야 너무하지 않소. 저 사람의 승용차까지 징발하고있다니… 이런 무례한 법이 어디 있소?》

중위는 알았다는 식으로 머리를 끄덕여보이고는 《갑시다.》 하고 걸음을 옮겼다. 채병덕은 부질부질 끓어오르는 분격을 간신히 참으며 뒤따라갔다. 그런데 미군중위는 현관문에 이르자 채병덕이를 멈춰세웠다.

《기다리시오.》

《여기가 내 숙소요.》

채병덕이 따라들어가려 하자 문전보초가 총대로 막아나섰다.

《이건 뭣이야!》

채병덕은 몸을 떨며 소리쳤다. 그때 중위가 나타나 례의 그 상냥한 웃음을 지으며 두개의 트렁크를 쳐들었다.

《어느것이 당신것입니까?》

젊은 중위는 채병덕의 군사칭호같은것은 인정않는투로 물었다. 채병덕은 얼굴이 퍼렇게 질린채 중위를 쏘아보다가 터져나오는 노성을 간신히 누르고 점잖게 물었다.

《중위, 경고하건대 나는 워커중장의 명령으로 띤사령부에 와있는 <국군>소장이요, 알겠소?》

《알고있습니다.》

중위는 트렁크명세란을 보고는 《이것이지요?》 하며 밤색 트렁크를 내밀었다. 채병덕이 눈을 딱 부릅뜨고 움쩍않자 중위는 량해를 구하는투로 말했다.

《나는 띤사단장의 명령을 집행하는중입니다. 이 건물에 <한국인>은 한명도 없이 하라는 지시입니다.》

《나도?》

《그렇습니다.》

채병덕은 눈앞이 뿌잇하게 흐려왔다. 주먹이 와들와들 떨렸다.

갑자기 째지는 녀자의 비명소리가 울리며 긴 꼬리치마를 입은 녀인이 달려나왔다. 저고리 팔소매 한짝이 떨어져나갔다. 그 녀인은 짙은 분내를 풍기며 채병덕에게 매달렸다.

《살려주세요.》

너무 뜻밖의 일에 채병덕이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뻥해있는데 투닥거리는 군화소리와 함께 불머리의 미군장교 하나가 문을 걷어차며 뛰쳐나왔다. 그 불머리는 채병덕과 위병장교를 보고는 주춤했다가 껄껄 웃으며 녀자의 손목을 잡아채였다.

《살려주세요.》

녀인은 끌려가며 또다시 소리쳤다. 진하게 화장을 한 얼굴이 이지러진채 원망스럽게 채병덕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이 순간 채병덕은 녀인의 애원어린 눈길이 아니라 그 녀인을 끌고가는 미군대위의 팔을 보고있었다. 팔에는 말대가리가 새겨져있었다.

《1기사의 선발대요?》

채병덕은 중위에게 물었다.

《그렇습니다.》

채병덕은 아무 말없이 중위의 손에서 자기의 트렁크를 받아들고 돌아섰다. 중위는 그의 점잖은 행동에 분명히 감동된듯 《<한국>량반의 차를 가져가시오.》라고 친절을 베풀었다. 미군병사 하나가 리윤병의 차를 몰아 정문밖에 내다세웠다.

《여보게, 저 사람들은 왜 이다지 거친가. 아무리 군대라도 이런 법 있는가? 내 데려온 녀배우들서껀은 한명도 놔주지 않고 나만 내쫓지 않았나.》

승용차를 받고나서도 리윤병은 불만이 풀리지 않아 채명덕에게 하소연하였다. 얼굴색이 거멓게 죽어 나온 채병덕은 리윤병을 독살스레 쳐다보았다.

《령감님, 공산주의가 더 싫소, 저 량반들이 더 싫소?》

《아, 그야 빨갱이들이지, 내 그때문에 잃은 땅과 불쌍한 북의 교인들을 생각하면…》

《그럼 군말 말고 가십시오. 저들은 빨갱이들과 결사전을 할 군대입니다. 나나 령감을 위해서 말입니다.》

《아, 그야 옳은 소리지. 헌데 군졸들이라 교양이 없구만.》

채병덕은 그 말을 들으며 입술을 꽉 깨물었다.

(그렇다. 참아야 한다. 이 모든것은 사사로운것이다. 문제는 승리에 있다.)

《정부》의 장관과 륙군장성을 내쫓고 영빈관에 들어앉은자들은 미1기병사단의 참모장교단 1진으로서 띤사단과의 협동작전을 토론하며 동시에 중대장들에게까지 발급할 대전지도를 복사하기 위해 먼저 도착한것이였다. 채병덕이 음울한 심사를 비장한 초지속에 묻어버리고 시가남쪽의 괴뢰군수색대를 찾아가고 리윤병이 자기 며느리와 사돈령감이 틀고앉은 장촌동의 친척집으로 차를 달릴 때 포항앞바다에는 미1기사의 마지막 보병대렬을 실은 수송선이 도착했고 캄캄한 어둠속에서 유령같은 급유차가 굴러다니며 항만과 도로에 빼곡이 널린 거뭇거뭇한 바위같은 장갑차와 땅크들에 최종연유공급을 끝냈다. 그리고 자동차들마다에 여섯줄씩 앉은 보병들이 배멀미로 하여 채 하지 못한 저녁식사를 치르며 전투명령을 받았으며 2차대전시기 《붉은 사냥군》이라고 불리운 6개의 바퀴로 달리는 장갑차와 불도젤삽을 단 60t급 패톤땅크와 40t급의 셔만땅크로 된 척후대가 지도작업을 마치고 출발시동을 하였다. 도로상의 장애물은 그것이 설사 사람이건 달구지건 가차없이 제껴버리라는 명령을 받은 조종사들은 렵기적흥미와 광적인 열기에 차 차를 몰아댔다. 척후대가 떠나 5분후 게이사단장의 흥분된 목소리가 련대장으로부터 소대장들에 이르기까지 휴대하고 있는 무선송신기의 진동판을 요란스럽게 울려댔다.

《나의 친애하는 전투병들!

미주의 땅을 진감시키던 용맹한 기병사단의 전통을 떨칠 때가 다가왔다. 24사의 형제들이 우리를 기다리고있다.》

포항시가 생겨 들어보지 못한 굉음이 터져나왔다. 수백대의 자동차와 땅크, 장갑차들이 일시에 발동을 건것이였다. 검은 하늘에 검은 연기를 토하며 사단전투종대가 움직였다.

전투급식으로 배당된 위스키로 얼근해진 검둥이, 흰둥이 운전수들은 만용을 뽐내며 가스답판을 세차게 누르며 전속으로 차를 몰아댔다.

회오리바람처럼 굽인돌이를 돌았고 어지간한 고개는 변속도 없이 날아넘었다. 울퉁불퉁한 도로에서 차가 들추고 굽이길에서 차가 옆으로 쏠릴 때 바람처럼 날아떨어지는 병사도 있었다. 그러나 누구도 넘어진 차나 날아떨어진 병사를 위해 차를 멈추지 않았다.

《명령없이 차를 세우는 경우는 재판없이 총살이다. 최대속도로!》

명령은 엄격하고 단호하였다.

척후대가 내달리며 깔아버린 괴뢰군부상병들의 시체와 부서진 달구지들을 흙속에 짓뭉개며 이 거대한 행렬은 질풍같은 속도로 대전으로 대전으로 달렸다.

공중에는 무선전파가 맹렬히 날아다녔다. 그 전파들속에는 인민군 최고사령부의 특수정찰과 62사 잠복정찰이 날리는 무선전파도 있었다.

《…포항으로부터 미군 기계화대무력이 서쪽으로 이동하고있음…》

전선사령부무선대는 조치원으로 이동준비를 갖추던 중에 이 전파를 받았고 그 사실은 즉시 김일성동지께 보고되였다.

《이젠 누가 더 빨리 대전후면에 도착하는가에 따라 승패가 결정된다고 봅니다.》

54사 18련대의 기동을 념두에 두고 하는 김책의 말에 대하여 김일성동지께서는 태연자약하신 음성으로 말씀하셨다.

《옳습니다. 이것은 생사를 두고 하는 경기와 같습니다. 기계기술과 정신력의 경기입니다. 나는 그 동무들을 믿습니다.》

굳센 믿음이였다. 18련대와의 일체 통신련락은 엄금되여있었다. 비밀엄수와 관련하여 일체 전파도 오고갈수 없게 되였다. 그리고 그들의 행처도 아직은 알수 없었다. 김책이며 강건을 비롯한 작전일군들은 지도상에 그어진 18련대의 로정을 지켜보며 조바심치는 마음을 믿음 하나를 가지고 눌러야 할따름이였다.

7월 18일 저녁 여섯시에 론산군 련산리를 떠난 54사 18련대는 120리를 목표로 한 류례없는 강행군을 개시하였다. 그가 지휘관이든 전사는 매인당 제정된 장구외에 l. 5정량의 저격탄, 3주야분의 식량과 두발의 박격포탄을 의무적으로 휴대하였다. 합계 50∼60㎏의 중량을 걸머진 그들은 초인간적의지로 달렸다.

그들이 걷는 앞길엔 태고의 수림과 산과 골짜기, 날벼랑과 장마로 범람한 탕수가 막아나섰다. 밤이 되자 캄캄한 어둠이 짙은 그 길에 또하나 장애로 덮씌웠다. 그러나 일분도 설수도 쉴수도 없었다.

걷자! 빨리 걷자! 미국놈들이 나타나기전에!

모든 삶의 목적과 의의가 이 하나에 집중된듯싶었다. 오직 이 땅, 이 자연, 이 산악의 아들들만이 할수 있는 행군이였다. 먼 후날 이 행군을 회상할 때 사람들은 인간의 승화된 감정과 의지가 어떠한 힘을 냈는가를 자랑스럽게 추억할것이다. 그들의 그 감정, 그 의지에는 하나같이 최고사령관동지의 명령을 관철하겠다는 철석같은 신념, 그이의 믿음에 끝까지 따르겠다는 결사의 투지가 비껴있었다. 그 행군대오속에는 송기덕이도 있었고 서울계선에서부터 로무자격으로 억지다짐으로 따라오다가 끝내 입대한 전기회사 로동자 곽근철이며 오늘아침 퇴원해온 전호근이도 있었다. 전호근은 장군님을 만나뵈옵고 악수까지 나누었다는 사실로 온 중대와 대대에 파문을 일으켜놓고 이 대렬속에 들어섰다.

송기덕은 중대의 맨뒤끝에서 걸었다. 이따금 행군속도가 떠지면 앞으로 나가군 하였다. 넘어진 전사를 일으켜 그의 배낭을 메기도 하고 벼랑에 오르는 전사의 발밑에 어깨를 들이밀기도 하였다. 그리고는 다시 중대행렬이 다 지나갈 때까지 서있다가는 맨 마지막 병사의 옆에 붙어섰다. 그 병사는 호근이였다. 기덕은 좀전부터 호근이의 숨소리가 높아지는것을 들으며 망설이다가 입을 열었다.

《이젠 내가 좀 메자구.》

《또 깔보는군요.》

호근은 고개조차 돌리지 않고 그대로 수걱수걱 걸었다. 여전히 부르터있는것이다. 허약자와 부상병들을 떨구라는 련대부의 지시에 따라 호근이도 떨어지게 되여있었다. 이때문에 호근은 기덕이한테 한바탕 쌈싸우듯 대들었다.

《중대장동진 나에게 무슨 원혐이 있어서 그러시오. 그래두 우리야 아는 사이가 아니시오. (그는 전쟁이 시작된 첫날 황주-중화길에서 만난것을 코에 건것이다.) 그렇다면 도와주는게 옳지 썩은 호박 따버리듯한단말이요. 그래 내 죄가 뭐이시오. 부상당한것이야 내 잘못입니까. 또 부상처가 나은지가 언젠데.》

기덕은 딱했다. 그는 이 호근이에 대해서 각별한 친근감을 느끼고있는것이였다. 로량진전투때 받은 인상도 인상이지만 이 호근이가 복심이의 소식을 가져왔기때문이였다. 호근은 장군님께서 한식경이나 계셨다는 한 녀성중상자의 방에 찾아까지 가서 복심이를 보았을뿐아니라 그 전투행적까지 상세히 알아와 한바탕 눈물이 글썽해 연설을 하였던것이다. 그때부터 기덕에게는 호근이가 남남같지 않았다. 하여 기덕은 호근이가 밸집을 드러내는데 조금도 성을 내지 않고 말했다.

《호근동무, 인정으로 봐서도 그래. 이번 행군은 특별하거던. 파악없는 적후의 길인데다가 잔뜩 짐을 지고 하루밤새 100리를 넘어달려야 하는데 갓 퇴원한 형편에 어림있나말이야.》

이 말에 호근은 받을 소상을 하고 팔소매까지 걷어붙였다.

《그럼 중대장동지 저하고 팔씨름을 해봅시다.》

《호근이, 생떼를 쓰지 말라니까. 동무가 쓰러지면 대신 업고 가야겠지. 그러면 어떻게 되나말이야.》

《중대장동지, 이거 정말 황주에서 첨 만날 때부터 우습게 알더니, 아 저야 로동계급이라고 몇번 말했습니까. 중대장동지도 말했지요. 이번 행군은 진짜배기 장군님 전사로 되느냐 마느냐 하는 엄숙한 길이라구… 신입병사래서 너무 깔보지 마십시오.》

호근은 눈물까지 글썽해서 소리치고는 가둑나무숲을 와작와작 헤치며 사라져버렸다. 기덕은 그래놓고 보내니 속이 좋지 않아 슬그머니 따라가보았다. 호근은 잔디뿌리가 꽉 엉킨 땅을 보병삽으로 쾅쾅 조겨대고있었다. 잠간새에 구뎅이를 판 그는 배낭을 거꾸로 들어 사품을 쓸어넣었다. 짐을 가볍게 하기 위하여 불필요한 사품을 처리하라고 한 지시를 집행하는것이였다. 흰면내의에 싼 퉁구리가 나오자 호근은 잠시 추연한 표정으로 보다가 한숨을 길게 내쉬고 그마저 구뎅이에 처넣었다. 기덕은 호근이가 그자리를 뜬 다음 구뎅이를 파헤치고 내의에 싼 퉁구리를 꺼내였다. 그안에는 푸른 비단이 있었다. 기덕은 가슴이 뭉클해졌다. 전라도 어디엔가 산다는 제 누이에게 가져다주겠다고 하던 옷감이였다.

기덕이 그 천을 자기 배낭에 넣고 숲에서 나오니 호근이가 배낭 가득 탄약과 중기총차까지 메고 자기 분대대렬속에 버젓이 서있었다. 기덕은 자기가 업고가는 한이 있더라도 그를 떼놓아서는 안된다고 마음먹었다.

그런데 호근이는 쓰러지지 않았고 여느 병사들 못지 않게 짐까지 그냥 지고가는것이다.

대렬이 불시에 멈춰섰다.

모두가 앉을념을 못하고 나무에 기대인채 서있었다. 이제 앉았다가는 다시 일어설 힘이 없었기때문이였다.

기덕은 알싸한 냄새를 풍기는 나무기둥에 화끈한 얼굴을 대고 잠시 서있었다.

《이거 야단났소. 저 공병들이 바줄을 늘여보자는건데 두사람이 다 물에 들어갔다가 초주검이 돼 나왔소.》

대대장이 다가와 근심스럽게 말했다.

《에도는 길은 없답니까?》

《그러자면 20리를 에돌아야 되오. 날이 밝는데 야단났소. 동무네 수영명수가 없소?》

《제가 해보겠습니다.》

《동무솜씨는 내 잘 아오. 어림없소.》

《해볼판이지요.》

그는 대대장의 대답도 듣지 않고 공병들이 있는곳으로 뛰듯이 걸어갔다. 사색이 된 공병 세명이 바줄을 버티여잡고 《악악》 소리치고있었다. 네굽을 쳐 노호하는 검붉은 흙탕물속에 팽팽히 헹기운 바줄끝에는 벌거숭이 군인이 매달려 물속에 잠겼다 솟았다 하다가 그대로 척 늘어진 상태에서 끌려나오고있었다. 기덕은 잽싸게 신발과 웃옷을 벗었다. 바줄에 동인채 끌려나온 공병의 어깨와 머리는 짓찢겨져 피가 흘렀다. 기덕은 그의 몸에서 풀어낸 바줄을 허리에 동이며 사품쳐흐르는 강을 으쓸한 기분으로 바라보았다. 급한 물살에 와당탕 퉁탕하며 바위돌까지 굴러내려왔다.

(돌탕에만 맞지 않으면 되는데.)

그는 한껏 공기를 들이키고 무슨 뾰족한 나무에 발을 찔리며 강물에 뛰여들었다. 그러나 더 나갈수 없었다. 바줄이 헤워들며 잡아끌었다.

《중대장동지!》

온 중대가 다 달려와있었다. 벌써 날쌘 전사들은 웃옷과 바지를 벗고있었다. 기덕은 껄껄 웃었다.

《허 기운들이 남아있구나. 이건 놔. 시간이 없다.》

그는 바줄을 감아쥔 손들을 잡아 뿌리치고 다시 물에 뛰여들었다. 강웃쪽으로 헤덤비며 뛰여올라가는 허우대 큰 몸집이 피끗 눈에 띄였다. 전호근이였다.

(저치는 왜 그래, 설사를 만난게 아니야.)

그런데 호근의 뒤로는 곽근철이까지 따랐다. 근철은 호근이가 신대원이라는것을 알고 어디서나 승벽내기로 그가 하는 일은 같이 하려고 하였다.

강물에 몸을 잠근 순간 세차게 들이치는 물바래에 하마트면 사래들릴번 한 기덕은 입과 코로 흘러든 물을 내뿜으며 도하훈련시에 배운대로 팔을 길게 뻗쳐 뺄헴을 쳐나갔다. 그러나 수십톤중량으로 내리쏟아지는 급류는 기덕이의 의도를 비웃듯 그를 풀잎처럼 가지고 놀았다. 발바닥이 땅에서 떨어진 이후부터 더욱 그랬다. 그럴수록 그는 굴러내리는 돌과 나무에 치이지 말자고 정신을 바싹 도사리고 손발을 움직였다. 그러나 몸은 아래로 떠밀려갈뿐 별로 전진하지 못했다. 문어다리처럼 가닥진 나무뿌리가 그를 떠밀치며 하류로 끌고내려갔다. 나무뿌리에서 벗어나려 하다가 물을 먹었다. 눈앞이 핑핑 돌았다.

그때 무언가 흰 물체가 그를 향해 돌진하였다. 기덕은 나무가지사이로 언뜻거리는 그 물체를 굴러내리는 바위로 생각하고 필사적으로 빠져나려 했으나 그 물체는 지척에 다가왔다. 기덕이 다시한번 피하려는 순간 세찬 물결이 그를 후려갈겼다.

또다시 물을 먹자 눈앞이 아찔해졌다. 그때 물큰한것이 그의 손을 잡았다.

《중…대장동지.》

전호근이 물귀신처럼 입으로 물을 뿜으며 한손으로는 그의 팔목을 다른 손으로는 얽힌 나무뿌리를 밀쳐내며 물에 잠겼다 솟았다 했다.

(이 친구 떼를 탔다고 했지.)

흐려진 머리속에도 이런 기억이 찾아들었다. 기덕은 물속에 머리마저 잠긴채 바줄을 풀려고 했다. 전호근이가 가지고 가게 하자는것이였다. 그러나 바줄을 어루더듬기만 했을뿐 매듭을 찾아 풀어내는 재주가 없었다. 몸이 둥 떴다. 시원한 공기와 훤한 빛이 눈에 들어왔다. 나무뿌리는 보이지 않고 흰내의바람의 전호근이 그를 떠받친채 한손으로 물을 헤가르며 헤염치고있었다.

기덕은 마지막 기력을 다 짜내여 소리쳤다.

《날 두고… 바줄을 풀어 건너라…》

《허릴! 내 허릴…》

우악진 손이 기덕의 팔목을 쥐며 빳빳한 허리띠로 이끌었다.

《잡으라니까.》

기덕은 한손으로 호근의 허리띠를 잡고 물을 헤갈랐다.

《좋수다!》

호근은 두팔을 일시에 내뻗치며 물고래처럼 헤여나갔다.

기덕은 커다란 통나무 하나가 물속에서 솟구치며 호근이의 머리를 향해 쏜살같이 내려오는것을 보았다. 검은 통나무의 터슬터슬한 껍질과 삐죽삐죽한 옹이들을 보며 기덕은 절망적으로 손을 뻗쳤다. 손에 마주친 통나무는 핑그르 돌며 사나운 짐승처럼 기덕이의 어깨에 부딪쳤다. 그 둔탁한 타격에 기덕은 물속에서 한고패 굴었다. 숨이 꽉 막혀들고 눈앞이 노랗게 안개가 끼였다.

그는 혼미한 의식속에서도 기계적으로 손을 저었다. 허리를 동인 바줄이 팽팽히 죄여들었다.

《바줄을 풀어… 가라… 풀어!…》

기덕은 물을 삼키며 소리쳤다. 무릎과 어깨를 무엇엔가 세차게 부딪치며 눈을 떴다. 꽉 막혔던 가슴이 시원히 열리며 훤한 빛이 안겨들었다. 다리는 아직 물속에 잠겨있었으나 온몸은 모래흙에 비물린 풀밭에 나와있었다. 그는 흙냄새를 느끼며 물을 토했다.

한바가지가량 토하고나니 정신이 건뜻해졌다. 코앞에 멍이 들고 찢겨진 시뻘건 종다리가 보였다. 두손으로 풀뿌리를 틀어쥔 호근은 땅에 얼굴을 박은채 어깨를 푸들푸들 떨고있었다. 기덕은 엉기적거리며 기여가 그의 어깨를 그러안았다.

《호근이, 살았어?》

호근은 푸-하고 숨을 내쉬고 일어나앉았다.

《그잘나게 헤염을 치면서 뛰여들건 뭡니까. 알리지도 않고…》

기덕이와 호근은 서로 부축한채 강웃쪽으로 올라가 짝지발이 진 구름나무에 바줄을 동여맸다. 기덕은 왼쪽팔을 도저히 쓸수 없어서 결국 호근이가 그 일을 끝내고 맞은편 강안에 대고 손짓했다. 그쪽에서는 두팔을 쳐들고 《만세》신호를 보냈다. 물우에 한m정도의 높이로 띄운 바줄을 타고 병사들이 건너오기 시작할 때 기덕이와 호근은 서로 약속이나 한듯 그자리에 쓰러졌다.

《중대장동지, 뭘 생각합니까?》

《엉?…》

기덕은 돌아누웠다. 호근의 크고 유유한 눈길에 마주치자 사무치는 애정이 솟구쳤다.

《처 생각을 했어. 후날 동무를 데리고 가면 어떻게 맞겠는가를 생각했어.》

《처가 있습니까?》

《있지, 눈이 동무비슷해.》

《허, 소문엔 총각이래서 우리 누이동생을 어찔가 했는데.》

기덕은 호근의 눈길을 피해서 얼굴을 돌렸다. 눈물이 왈칵 쏟아지려 했던것이다. 아침부터 내내 가슴속에 서려돌던 복심이의 모습이 이 순간 사무치는 그리움속에 떠올랐던것이다.

《…그 녀성동문 전선신문에까지 났대요. 부상병을 자기 몸으로 막아 구원한 녀자라는데 체네가 아니고 아주머니라는것이 아니겠습니까. 군관가족이래요. 남편의 생활비를 꽁꽁 싸서 몸에 지니고있더라나요. 전쟁이 끝나면 살림을 잘해보려고 했겠는데…가망이 없다는것 같애요. 우리가 들어가도 모르더란 말입니다.》

호근이가 하던 말이 귀가를 쟁쟁히 울리며 그의 어깨를 떨게 했다. 지금까지 내처 참고있던 감정이 지금 호근이와 몸을 나란히 붙이고있으니 피였던 샘이 터져나오듯 온몸을 타고 흘렀다.

평천리에서 마지막으로 본 엿보자기를 자기에게 안겨주고 얼굴을 싸쥔채 돌아서던 모습은 그의 가슴을 북북 긁어댔다.

(복심이! 죽지 마오. 복심이! 내가 한심한 놈이였어. 한심한…)

기덕은 복심이가 앞에 있다면 무릎을 꿇고 용서를 빌고싶었다.

《중대장동지, 왜 그럽니까. 쥐가 오르는것이 아닙니까?》

호근이가 그의 어깨를 흔들었다.

《엉?!… 아니 그저.》

기덕은 눈살을 찡그리고 호근이를 외면한채 있다가 더 참지 못하고말았다.

《이보게, 동무가 봤다는 그 복심이라는 녀자는 바로 내 처야.》

《네?-》

전호근의 눈이 화경처림 커졌다.

《그… 그랬댔군요. 야-》

강을 건너온 병사들은 사기들이 올라 호근이를 칭찬도 하고 익살어린 롱담까지 던졌다.

《여, 호근이, 동문 물고기가 되려다 사람된것 아니야.》

《저 친구 아까 옷을 벗을 때 보니 밑에것이 대왕님이더군. 그게 노질을 하니 여북 잘 뜨겠나.》

웃음이 터져 잔물결처럼 흘러갔다. 11호차라고 하는 보병, 이 보병의 행군에서 웃음어린 이야기는 휘발유와 같은것이다.

《우리 어머니 말씀으로 분석하면 내 헤염은 궁한 팔자탓에 배운것이구요, 계급적으로 분석하면 일제식민지통치때문이지요.》

총차는 누구에겐가 빼앗기고 배낭만 멘채 활개걸음을 치는 호근은 짐짓 시쁫한 기색으로 말을 꼬아 하며 전사들의 귀를 항아리처럼 만들었다.

본래 전라도 구례에서 살았던 전호근이네는 해방되기 몇해전에 빚값으로 땅과 누이마저 빼앗긴채 떠돌다가 림진강떼놀이장에서 보짐을 풀었다. 호근의 아버지는 딸의 빚값 80원을 마련하기 위하여 호미를 잡던 손에 떼장대를 잡았다. 열다섯살소년의 호근이도 풀려진 통나무를 물에서 건져내는 살판띔에 들어섰다. 갈고랑이 하나를 쥐고 사나운 물속에 뛰여들어 죽음을 내대고 하는 격투였다. 그 한대, 한대의 통나무를 림업주의 도감독에게 넘기면 짤락거리는 엽전이 그의 손에 쥐인다. 그 돈을 가지고 어머니에게 달려가 이제 얼마나 있으면 누이를 찾아오는가 묻고는 또다시 물바다로 나간다. 그렇게 물과 싸우며 살았으나 끝내 80원을 마련하지 못한채 비바람 세찬 폭우의 날 소용돌이치는 물속에 떼와 함께 아버지를 잃고 누이가 기다리는 고향으로가 아니라 먼 친척이 있는 북쪽으로 눈물어린 걸음을 걸었다.

숲을 꿰지른 새벽빛이 오솔길우에 그려내는 희미한 무늬를 밟으며 기덕은 이런 숲속, 이런 오솔길에서 당했던 옛일들을 돌아보았다.

나무지게를 진 소년이 걸어가고 그옆에 싸리나무단을 인 소녀가 총총히 따른다. 시뻘건 혀를 빼문 호개가 길목을 막고 무릎까지 오는 장화에 렵총을 멘 짝귀간수가 나타나 호통을 뺀다.

《요 도적놈들 잘 만났다. 뉘집 거지들이냐, 산림도벌죄로 징역을 살아봐야겠느냐.》

나무지게가 나동그라지고 회초리가 울고 발길에 채인 소녀의 애처로운 비명이 터진다.

《복심이 우지 마.》

소년은 날아드는 회초리와 발길속에서도 이웃집소녀가 팽이처럼 딩구는것이 가슴아파 목메여 웨친다. 다음 주재소에 끌려가고 무릎 꿇림을 당한채 류치장안에서 고달픈 하루밤을 밝힌다. 눈물에 싸인 어머니가 《나리님》을 웨치며 주재소에 와 사정사정하고 벌건 인즙을 손에 발라 《벌금통지서》에 지장을 찍은 아버지가 매질과 굶주림에 지친 소년을 집으로 데려간다. 그와 함께 찢겨진 저고리자락을 손으로 감싸쥔 소녀가 서럽게 울며 따르고…

(그런 일은 다시 없을것이다. 다시는. 복심이… 우리 이 모든 일을 옛말하며 살수 있을가.)

기덕이네 중대는 한시간후에 보문산기슭에서 다시 위장을 하고 대전-영동간 도로를 끼고앉은 삼정리에 도착하였다. 기덕이네는 도로와 직선거리로는 30∼40m, 경사거리로는 50∼60m 되는 둔덕에 자리를 잡았다.

누룽지로 아침요기를 하면서 전호를 팠다. 전호를 파고난뒤 휴식이 선포되였으나 잠에 곯아떨어지는 전사는 하나도 없었다. 온밤을 밝혀 100여리 넘는 길을 헤쳐온 사람들같지 않았다. 오전 11시경에 낡은 《시보레》승용차 한대가 기덕이네 매복한 앞도로로 지나가다가 수류탄 튀는 소리를 내며 멈춰섰다. 밀려드는 잠과 뙤약볕에 눈알이 무겁게 처져있던 기덕은 자동차의 한 바퀴가 물러앉는것과 동시에 뛰여내리는 도리우찌를 쓴 운전수의 황급한 기색을 보며 무슨 일인가 생각하였다. 다이야를 만져보던 운전수가 차안에 대고 뭐라 말하자 중절모와 맨머리바람의 두 령감쟁이가 나왔다. 이 삼복더위에 둘 다 두루마기차림인데 맨머리바람의 령감은 중절모의 어깨에나 와닿을 난쟁이였다. 그 맨머리가 운전수에게 삿대질을 하며 야단을 치자 중절모가 그의 팔을 잡아끌었다.

《잡읍시다. 고관놈들이야요.》

곽근철이가 눈을 번뜩이며 그에게 기여왔다. 다른 병사들도 그런 눈빛으로 보았으나 《안되오. 더 큰걸 먹어야지.》 하고 기덕은 엄하게 막았다. 쌍안경에 비치인 두 령감쟁이는 꾀죄죄한 옷차림으로 봐서 도망군떨거지에 불과하다고 생각하였다. 운전수가 쟈끼로 차체를 뜨고 바퀴에 붙어 씨름하는사이 중절모는 길녘에 서서 막연히 사방을 살피고 맨머리는 길을 왔다갔다하며 서북쪽만 바라보았다. 마침 《엠블런스》(미군전용위생차)가 나타나자 맨머리는 멀리서부터 두팔을 휘저으며 《스톱! 스톱!》 하고 코맹맹이소리를 내질렀다. 그러나 《엠블런스》는 그의 옷자락에 진창만 잔뜩 뿌려주고 바람처럼 지나갔다. 좀 있어 또 한대의 스리쿼타가 지나갔으나 그 령감쟁이나 빵크난 차에 대해서는 아랑곳 않았다.

그런데 뜻밖에도 앞대가리에 흰 별을 새긴 군용짚차 한대가 쏜살같이 달려오다가 무작정 막아나서는 난쟁이령감의 앞을 스쳐 얼마 안가서 멈춰섰다. 난쟁이령감은 죽은 조상의 귀신마중이나 하듯 달려가 뒤좌석에 엇비스듬히 기대앉은 괴뢰군장교에게 손짓 몸짓 다 써가며 이야기했다. 기덕은 쌍안경을 쳐들어 살피다가 장교의 굉장한 몸집우에 붙어있는 계급장에서 두개의 큰 별을 알아보았다.

《대대장동무, 우리앞에 괴뢰장령과 교관놈들이 탄 차가 멎었습니다. 홀치겠습니다.》

《나도 보고있소. 움쩍말라는 명령이요.》

괴뢰장성이 탄 차는 뒤꽁무니에 매여단 예비다이야를 떼여놓고 바람처럼 사라져갔다. 기덕은 쌍안경렌즈속에 든 음울한 얼굴의 괴뢰장성이 자기쪽을 돌아보는것을 보고 쌍안경을 내렸다. 해빛반사로 그놈한테 발각될수 있었기때문이였다. 기덕이네가 잡을수 있었으나 보다 큰것을 위해 놓아보낸 장성은 채병덕이였다.

채병덕은 오늘아침 구봉산쪽으로 순회하던 순찰대로부터 2렬종대를 지은 인민군대가 산길을 타고 움직인다는 긴급보고를 받고 띤한테 직접 전화를 걸었다. 조선말과 영어 절반으로 황급히 웨쳐대는 채병덕의 보고에 대하여 띤은 야유어린 대답으로 면박해왔다.

《당신네 조선속담에 놀란 토끼 자라 보고도 호랑이님 한다고 했습니다. 공포에 눌려 요언을 돌리는자들은 처벌하시오. 새벽은 겁쟁이들에게서 유령을 보는 시간입니다.》

로골적인 멸시와 비양이 담긴 그 말에 채병덕은 아연격분하여 그렇지 않다고, 정 그러면 미군정찰대를 급파하여서라도 다시 알아볼 필요가 있다고 고집하였다. 띤은 이 말에 이제까지의 허식을 벗어버리였다.

《그만하오. 나에게는 수다스런 로파가 필요없소. 당신은 자기 사병들에게나 훈시하시오.》

채병덕은 자기의 모든 성의와 진심을 한꺼번에 묵살하고 짓밟는 이 모욕앞에서 더는 견딜수 없었다. 하여 그는 이 설분을 풀려고, 그리고 이 설분보다 더 크고 주요한 인민군으로부터의 대전사수를 위하여 대구의 워커사령부를 찾아가는 길이였다.

 

너는 무엇을 피하여 어데로 가느냐?

또다시 덜컹거리는 차우에 올라앉았다. 고달픈 행각, 비참한 도주다. 성송암은 두눈을 꾹 감고 낭떠러지로 낭떠러지로 줄기차게 내닫는 자신을 뜨겁게 돌이켜보고있었다. 이젠 사색도 상념도 죄다 버렸다. 의지와 신념은 애당초 있지도 않았거니와 있었다 해도 그것은 집떠나는날 밤에 그 한강교의 폭발속에 다 재처럼 흩날려버렸다. 아무런 희망도 뜻도 없이 지어진 운명의 소로길로 끌려갈뿐이다.…

《채병덕이 그 사람 인물은 인물이야. 운수가 사나와 일시 고액을 겪긴 하지만… 하느님 굽어 감찰하옵소서.》

리윤병의 수다가 다시 시작되였다. 보름전만도 채병덕이를 적색마귀에 홀려 얼뜨기가 된 천치라고 질곡을 퍼붓던 그는 다이야 한짝에 훌러덩 변심이 되여 칭찬의 꽃다발을 엮는다. 성송암은 치밀어오르는 역기를 느끼며 곱지 않게 눈을 치떴다. 제 로친네며 재산까지 강물에 처박히게 한 장본을 극찬하는데는 인간추물로 락인하여버린 리윤병이라지만 다시 보지 않을수 없었다.

리윤병은 창밖을 내다보며 쭈그렁박같은 얼굴에 웃음을 띠였다. 초가집마당에서 서너명의 애들이 돌차기를 하고 터밭에서 흰수건을 동인 아낙네가 김을 매다말고 달려가는 차를 물끄러미 보고있었다.

《여긴 치안이 잘돼가는군. 민심이 평온해.》

채병덕에게서 인민군대가 대전지경에까지 들어선것 같다는 말을 들은 뒤 한동안은 자라목이 되여 눈알이 뱅뱅 돌아가던 리윤병은 제법 《장관》의 직분을 상기했는지 좀상한 몸집을 잔뜩 뒤로 제끼고 고개까지 끄덕거렸다. 인민군대의 총알이 더는 따라오지 못할 곳에 이르렀다는 안도감이 그의 가벼운 체통을 훌 띄워놓은것 같았다.

《차 좀 세워줘요.》

꺼져드는 목소리에 송암은 소스라치며 고개를 돌렸다. 창백하다 못해 푸르게 질린 계화의 얼굴에는 진땀이 한벌 덮이였다.

《또 멀미냐?》

《네. 못참겠어요.》

꼭 깨문 계화의 입술이 바들바들 떤다. 손목은 얼음장처럼 차겁다.

《아가, 조금만 참아라. 한시간이면 된다. 배에 힘을 주고 멀리 내다봐라. 멀리!》

리윤병이 안경알을 번쩍이며 뾰족한 입술을 나불거린다.

《세우오.》

송암은 윤병이를 찔 흘겨보며 운전수의 어깨를 잡았다. 차는 논벌가운데서 멈춰섰다. 송암은 헝겊막대처럼 가벼워진 계화를 부축하고 차에서 내렸다. 체면에 안됐는지 리윤병이도 계화의 한쪽손을 잡고 따랐다.

《그 멀미란건 입쓰리탓일게다. 입쓰리란것두 맘먹기에 달렸느니라. 그래 토할바치고는 콱 토해라.》

리윤병은 길가의 뽀뿌라나무밑에 옹크리고 앉은 계화의 등뒤에 딱 붙어서서 그 다사스런 입을 다물지 못했다.

《그만 물러서구려.》

성송암은 보다 못해 한마디 하였다. 리윤병은 요즈음 점점 더 퉁명스럽게 나오는 송암의 태도에 늘 그러듯 가시돋힌 눈길을 한번 빨고는 《애햄, 애햄》 하는 기침소리로 며느리며 사돈에 대한 불감의 일부를 표시하고 돌아섰다. 송암은 그에는 아랑곳않고 토할듯토할듯 하면서도 어깨만 떨고있는 계화를 바라보았다.

(불쌍한것!)

가슴 한복판을 무딘 칼로 북-긁어내는 아픔이 치밀었다.

천안삼거리의 한 빈집에서 기총탄에 맞아죽은 소고기내포를 설 삶아먹은 뒤로부터 앓기 시작한 계화였다. 성송암이 차고있던 회중시계를 찔러주고 데려온 의사는 계화의 병이 식중독만이 아니라 입쓰리에 로독이 겹친것이라고 하였다. 입쓰리라는 소리에 너무 기가 막혀 성송암이 아무 말도 못할 때 리윤병은 바람벽을 마주 십자를 그었다.

《주님의 덕은 측량무진코나. 악운속에서도 복을 주심을 잊지 않으시니…》

코맹맹이 그 소리에 송암은 터져나오는 울기를 참지 못했다.

《여보, 그 망녕된 소리 작작하오. 이 란세에 복은 무슨 말라죽은 복이란 말이요?》

《사돈, 모르는 소리요. 이건 우리 가문에 재액이 끝났음을 말하는것이요.》

한강교폭발통에 잃어버린 안해와 재산을 두고 쩍하면 쥐오줌방울같은 눈물을 떨어뜨리던 리윤병은 실성한 놈처럼 웃기까지 하였다. 이 몰골앞에서 송암은 세상의 종말을 보는듯 했다. 그러나 우선은 계화를 살리고봐야 했다. 의사는 입맞는 음식과 보약제로 잘 구관하면 쉽게 회복될수 있다고 했으나 피난민과 패잔병무리가 황충이떼처럼 휩쓸고 지나간 땅에서 쌀 한줌 얻는것도 쉽잖은 일이였다. 하루밤 편히 안정할새도 없었다. 포소리만 울리면 리윤병은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 운전수를 두들겨 깨우고 계화를 끌고 내달았다. 송암은 계화때문에 리윤병의 낚시줄에 걸린 고기처럼 할수없이 따라갔다. 모든 체면과 량심을 하나하나 집어던지는 길이기도 하였다. 남의 집 처마전에서 감자와 오이를 훔쳐오기도 하였고 밥을 동냥하기도 하였다. 휘발유를 도적질하는 운전수를 지켜 감시보초가 되기도 하였다.

수치감과 부끄러움도 별반 없었다. 모두가 이렇게 하니 나도 한다는식이였다. 그리고 이 모든것은 어쩔수 없는 환경앞에 지어진 운명의 순종으로 보았다. 때로 반디불처럼 리성과 자존심이 살아오를 때도 있었다.

(네가 과연 청렴한 학자로 자처한 성송암이가 옳단 말이냐?)

이 질시어린 비난앞에서 그는 희랍의 철학자 디오게네스를 내다보기도 하였다. 그러나 일생을 길바닥에서 천한 개처럼 누워지낸 그와 자기에게는 공통의 분자는 있으나 공통의 분모는 없었다. 디오게네스는 가족도, 재산도, 명예도, 민족도 다 초월하고 버렸지만 송암은 력사속에 민족을 붙안고 우는 사람인때문이였고 혈붙이인 딸에 비끄러매여있는 사람이였다.

너는 무엇을 피해 어데로 가느냐?

이런 물음앞에 그는 대답이 막혀 당혹했고 종잡을길 없는 모순속의 자기와 자기의 래일을 물어보며 억이 막힌 웃음을 터뜨리기도 하였다. 그럴 때면 계화는 겁먹은 눈길로 그를 보군 했다. 송암은 얼굴을 붉히며 그 눈길에서 외면하군 했다.

(내가 살아 움직이는것은 이 딸이라는 혈붙이때문이다. 대의를 잃은 사람에게서 유일한 일은 가족에 대한 자기 의무를 리행하는것뿐이다.)

이렇게 송암은 자기를 합리화하다가도 여기서도 엄청난 모순에 부딪치군 했다.

(아버지로서 내가 과연 무엇을 해주고있고 앞으로 무엇을 할수 있단 말인가.)

이것은 그야말로 가혹한 깨달음이였다. 그러나 이 느낌이 강렬할수록 그는 자기가 딸을 위해 산다는 신념을 굳혔으며 사실 그렇게 돼갔다. 그는 이제껏 다 못준 아버지로서의 관심과 정을 봉창이나 하듯이 계화를 성심성의로 돌보았다. 대전에 와서는 그처럼 아끼던 5룡촉대를 《한국은행》에 저당잡혀 계화의 몸조리에 썼다. 《장관》구실을 하느라고 도청에 나가 박혀있는 리윤병이가 이따금 얻어오는 미군의 통졸임같은것보다 자기가 직접 지은 밥을 계화에게 먹일 때 그는 일종의 행복감까지 느꼈다. 리윤병이가 《정부》를 따라서 도망치고 계화와 단 둘이 남은 며칠은 악몽같은 현실마저 잊으리만치 눈물어린 정속에 보낸 달콤한 나날이기도 하였다.

캄캄한 밤에 문득 깨여나 계화의 숨소리를 듣고 가느다란 손목에서 맥박이 뛰는것을 감촉하느라면 죽은 처와 련화의 얼굴까지 떠오르며 슬픔어린 환희가 짜릿하게 가슴을 파고 지나갔다. 나한테 남은것은 계화밖에 없다. 계화야말로 나에게 남은 삶과 미래의 전부다. 이미 리윤병이를 통해 대전감옥에도 련화가 없음을 알고 죽은 자식으로 단념한 송암이였다. 그의 인생이 담겨진 서울에 두고온 유물들마저 이제는 다 없어져버렸으리라고 단정하는 송암이였다. 결국 그를 이 세상과 련결시키는것은 계화뿐이였고 그때문에 리윤병이와 결별하지 못하는것이였다. 그로 하여 리윤병이 대구로부터 미국놈의 양갈보로 섬겨바칠 《위문단》을 끌고나타났을 때도 침묵하고말았으며 대전에서 싸움이 붙기때문에 떠나자는 요구에도 순순히 응했던것이다.

그러나 어제저녁 영빈관인지 뭔지 하는데서 리윤병과 채병덕이 미군장교한테 놀아나는것을 먼발치에서 구경한 뒤로부터는 도대체 자기가 가는 세계가 무엇인가를 생각지 않을수 없었다. 존재가치를 다 체념해버린 그였으나 자기가 추악과 혐오의 세계로 간다는 느낌은 시종 그를 괴롭히는것이였다.

《이젠 좀 일없느냐?》

송암은 계화가 논벌 한끝을 망연히 보는것에 시선이 미쳐 물었다. 계화는 얼굴을 돌려 방그레 웃었다. 검버섯이 핀 수척한 얼굴엔 피기란 찾아볼수조차 없다.

《아버지, 저걸 봐요.》

송암은 계화의 손끝이 가리키는 논뚝쪽을 보았다. 두마리의 학이 논뚝우에 서서 의좋게 거닐고있었다. 머리를 맞비비기도 하고 목을 빼들고 사위를 근엄히 둘러보기도 하였다.

《저들에게는 여기가 너희들이 말하는 에덴동산이다.》

송암은 롱말을 하였다. 물기가 가랑가랑한 눈이 송암이를 쑥스럽게 보고는 얼른 외면하였다. 송암은 부질없이 던진 자기의 말을 후회하였다. 염세적인 자기의 감정을 드러내보였다고 생각한때문이였다. 푸른 논벌우에서 근심없이 노니는 학들은 어릴적 동심에 비껴들던 아름다운 꿈나라에 대한 동경처럼 그자신의 마음을 걷잡을길 없이 흔들었다.

《그만 가지 않으련?》

《아버지, 여기가 좋네요. 조금만 더 있어요.》

계화는 어리광치듯 말하였다.

《이게 무슨 소리요?》

논두렁쪽으로 나가 소변을 보고 돌아오던 리윤병이 깜짝 놀란 소리를 쳤다. 성송암은 폭음을 들었다. 뿌잇한 구름이 떠있는 하늘로 수십대의 비행기가 해빛을 반사하며 나타났다. 송암은 쓴웃음을 머금었다.

《하느님의 천사들이군.》

《이거 우리를 잘못 보고 폭탄을 떨구지 않을가. 이 허허벌판에서 피하지도 못하고.》

리윤병은 낯이 까매져서 뾰족한 수염을 떨었다.

《허허, 하느님의 천사들이 하느님의 수제자를 몰라보겠소.》

《여보시오. 사둔, 당신은 어째 늘 비꼬임이시오?》

《비꼬임이 아니라 사실이 그렇지 않소. 미국군대를 하느님의 천사들이라고 귀닳게 말한것이 누구시오?》

송암이 여전히 웃으며 말하자 라윤병은 며느리앞이여서인지 《령감은 참!-》 하고 억지웃음을 지었으나 눈길은 비행기에서 한초도 떠나지 않았다. 높이 뜬 비행기들은 구름장틈새마다에 허연 비행운을 남겨놓고 북쪽으로 날아갔다.

《북쪽으로 가는군. 우리 군벌 돕자는겁네다. 그럼 그럴테지.》

리윤병은 언제 빼들었는지 모를 꼬닥꼬닥 꾸겨진 성조기를 주머니에 집어넣으며 승용차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만 가봅세다.》

운전수가 발동을 걸자 계화는 나직이 한숨을 짓고 일어섰다.

그는 여전히 논벌가운데 서있는 학들을 바라보다가 성송암의 그늘진 얼굴에 시선이 닿자 가냘핀 웃음을 지어보였다.

《여기 그냥 있음 좋겠네요.》

휘발유와 쩐 담배내가 뒤섞여 떠도는 차안에 들어섰을 때 계화는 사지판에 가는 사람처럼 얼굴빛이 어두워 입을 꼭 깨문채 눈을 내리깔았다. 차는 얼마 안가서부터 별스런 꾸르럭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운전수는 마을을 지날 때마다 쉬고가자고 했으나 리윤병은 밤중으로 《정부》가 있는 대구까지 가야 한다며 말을 듣지 않았다. 해질녘에 이르러 차는 피난민과 부상병 달구지로 가득찬 길에 들어섰다.

내무부장관 조병옥의 포고령으로 집에서 쫓겨나 남하하는 사람들의 대렬이였다. 달구지 하나를 앞질러나가는데도 경적을 몇번씩 울리지 않으면 안되였다. 사민들은 그 소리에 놀라 황급히 뒤돌아보고는 길을 내주었으나 총대를 거꾸로 메고 절뚝거리며 걸어가는 괴뢰군들은 아예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리윤병이 분을 참지 못하고 《이 몰상식한것들!》 하며 욕질을 하다가 하마트면 깜장콩알을 먹을번 하였다. 다짜고짜로 총대를 벗겨든 괴뢰군들이 격발기를 절컥거렸던것이다.

《이사람들… 이… 이게 무슨짓인가. 한나라 장관앞에, 엉?》

리윤병은 며느리와 성송암이 앞이라 열을 올리다가 정작 총구가 그를 겨누자 달팽이껍질속에 기여들듯 차문을 닫으며 몸을 옹송그렸다. 군인들은 짐승같이 흉한 웃음을 터뜨렸다. 다른 때면 《주여!》를 부르며 십자를 그렸을 리윤병은 이번에는 그럴념도 못하고 손수건을 꺼내 이마만 문질렀다. 그때부터 안절부절만 하였다. 길을 막는 달구지건 사람이건 탓할념을 못했다.

파국은 지진현상과 같은 땅울림으로부터 시작되였다. 바람째는 소리를 내며 쌕쌔기들이 도로를 핥듯이 날아오며 기총탄을 쏘아대고 새된 부르짖음과 비명이 터져나올 때도 무엇이 닥쳐오는지 몰랐다. 그 모든 소음을 짓누르며 온 대지를 쪼개여놓을듯한 폭음이 승용차의 창문까지 드릉드릉 울릴 때도 몰랐다. 알았을 때는 늦었다. 앞서가던 사람들이 《아! 아!》하는 단말마의 포효성을 지르며 길가의 도랑과 밭에 뛰여들었다. 공기를 째는 예리한 기관총성과 더불어 소가 꺼꾸러지고 사람들이 쓰러졌다. 시꺼먼 포신을 내뻗친 무수한 철갑괴물들이 끝없는 렬을 이루어 맹속으로 달려오고있었다.

단테의 《신곡》에도 없는 지옥의 한장면이 눈깜박할새 성송암의 앞에서 벌어졌다. 장갑차와 땅크들에서 발사하는 예광탄이 퍼런 불빛을 날리며 날고 무한궤도와 바퀴들에 소며 달구지들이 처참하게 무질러지였다. 운전수가 조향륜을 꺾어 길옆밭에 차를 들이몰 때 유리창이 박산나며 그 쪼박이 성송암의 뺨을 갈겼으나 그는 그것도 모르고 굳어진 동공으로 그 괴물들만을 망연히 바라보았다.

《아버지!》

실날같은 부르짖음에 송암은 고개를 돌렸다. 계화가 한손으로 동가슴을 꼭 누르고있었다. 손가락짬으로는 빨간 피가 슴새여나와 하늘색 치마우에 똑똑 떨어졌다.

《아니!》

송암은 눈앞이 아찔해서 한동안 멍청하니 보기만 하였다. 그것도 모르고 리윤병은 《저 사람들이… 저 사람들이!…》하더니 무슨 용기에서인지 차문을 열고 뛰여나갔다. 윤병은 두팔을 쳐들고 만세시늉을 하기도 하고 박수를 치기도 하였다. 땅크포탑뒤에 우뚝 서 무표정한 눈길로 파괴의 흔적을 바라보던 미국군인이 윤병이의 해괴한 움직임을 보다가 싱긋 웃으며 손을 저어주었다. 그러자 윤병은 승용차를 손짓하며 쏘지 말라는 시늉을 하고 주머니에 찔러두었던 《성조기》를 꺼내 열심히 흔들었다.

송암은 가슴속깊이에서 터져나오는 호곡을 참으며 덜덜 떨리는 손으로 계화의 가슴을 헤쳤다. 자그마한 총알구멍에서는 피가 샘솟듯 솟구쳤다. 따뜻한 피는 전류처럼 손바닥을 지졌다.

《아버지!》

소리는 없고 계화의 입과 눈이 그것을 말하고있었다. 눈자위가 돌기 시작하였다. 송암은 《으흐흑》 흐느끼며 계화를 끌어안았다.

《안된다. 안돼, 이 못난 애비때문에 네가 죽다니. 안된다, 안돼!》

계화의 몸이 꿈틀했다. 눈이 한껏 커졌다. 바르르 떨던 입술이 옴죽거렸다.

《아버지, 련활 만남 나… 용서하라고…》

《빌어먹을-년》

송암은 그대로 울부짖었다. 눈물방울이 계화의 볼에 방울방울 떨어져내렸다. 계화는 그 눈물을 닦아주려는듯 손을 쳐들다가 맥없이 떨궈버렸다. 고개가 한쪽으로 떨어지고 눈까풀이 소르르 맞붙었다.

《계화야!》

송암은 정신없이 딸의 얼굴에 볼을 비였다. 모자가 벗겨져 날아나고 길게 자란 흰 머리칼이 계화의 이마를 덮었다.

《선생님, 정신차리십시오.》

운전수가 어깨를 흔들어 고개를 들었을 때 송암의 얼굴에서 초점잃은 두눈이 황황히 불렀다. 그는 어스름이 내리는 바깥에서 무언가 안고 들어오는 윤병이를 응시한채 미륵처럼 굳어있었다.

《그 사람들 참, 조포하면서도 어린애같은데가 있어. 이런걸 뿌리더라니-》

차문을 열고 들어서던 윤병은 의외의 사태에 깜짝 놀라며 가슴에 안고있던것들을 떨어뜨렸다. 마분지통이 열려지며 도로프스알들이 쫘르륵 흩어지였다. 송암은 눈을 감았다.

바로 이것이 지옥의 끝이다!

그는 배낭을 둘러메였다. 그리고는 차에서 내려 축 늘어진 계화의 시신을 안아내렸다. 윤병이 코멘소리로 뭐라 부르짖는것도 아랑곳 않고 가을한 보리밭으로 비칠비칠 걸어갔다. 윤병이가 달려와 그의 배낭을 잡는바람에 하마트면 넘어질번 하였다. 송암은 딸의 시체를 보리그루에 찔릴세라 고랑에 조심히 눕히고 천천히 일어섰다. 그리고 윤병이의 뾰족한 얼굴을 한참이나 바라보다가 주먹을 꽉 쥔 손으로 뺨을 후려갈겼다.

《가라. 딸은 내것이다!》

축축한 바람이 불어왔다. 좀 있어 비방울이 가늘게 날렸다. 운전수의 도움으로 밭둔덕에 무덤을 팠다.

봉분도 묘비도 없는 무덤속에 계화를 잠재웠다. 윤병이가 곡을 했으나 송암은 울지도 않았다. 검은 하늘을 쳐다보며 저주를 퍼부었다.

《내가 딸을 죽였다.》

이날밤 송암은 길녘에서 주어든 지팡막대에 의지하여 대전쪽으로 가는길로 돌아섰다. 대전쪽 하늘은 밤새 벌겋게 물들고 폭음이 련속 울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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