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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의 꽃상여 (이적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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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강산
댓글 0건 조회 2,542회 작성일 20-04-07 0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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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의 꽃상여                             이적


아버지의 꽃상여 사진 한장이 발견 되었다ㆍ
나의 아버진 경남 통영의
어촌 마을에서 태어났으나
서울의 고급학교까지 다녔슴에도 벼슬에는 별로 욕심이 없었던 분이었다
당시 그 학력 같으면 무슨 벼슬이든 할수 있었으나
일제때 공무원 생활 조금 하다가 몇년만에 그만두고 술도가를 경영하셨다ㆍ 마음씨가 여려 욕심이 없었고 아버지 술을 얻어먹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 할 정도로
술을 좋아 하셨고 그 덕분에 술도가도 망했다 이후 머구리배 선주를 하셨는데 잘나가다 사촌형한테 재산을 사기 당하고 들망배등
몇차례더 배사업을 하다가 폭싹 망하고 어릴때 우리
가족을 가난으로 몰아 넣었다


내것을 빼앗겨도 가슴속
으로만 분을 삭이던 분
덕분에 사십대 말에 병을 얻어도 치료할수 없었고
새벽녘 어머니의 울음소리에
아버지가 엎드려서 가쁜숨 몰아쉬다 운명 하였음을 알았다 내 중삼 시절이다
아쉬운것은 내 아버지가 반골 기질이 있는 지식인
이었기를 바랐는데 공화당 지지파였음이 기억 난다
덕분에 청년기가 되어서 마음씨 좋은 아버지를 좋아는 했지만 아버지를 존경할수는 없었다 내아들 둘에게도 니들 할아버지는 일제때 공무원 녹을 먹었으니 친일인사다 기억해 놓고 후손이 속죄 하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
라고 일러두었다


근데 물질적 재산을 남기지 않으시고 떠나신 아버지는 우리집안에 공안사건을 하나
남겨 놓고 떠나셨음을 나중에야 알게 되었다
아버지가 사망하신 10여년 뒤 내 어머니를 비롯하여
누나 고모 등이 느닷없이 안기부로 끌려 가 만신창이가
되어 돌아 왔다 죄목이 아버지의 반공법위반 이었다
살아계실때 아버지가 6.25때 월북한 사촌을 비밀리에 만났다는것이었고 이를 신고치 않았다는 것이었다 아버지는 살아
계실때 거의 돈으로 그사건을 여러 차례 덮었으나 고통도 많이 당했던 모양이다 아버지가 죽자 그댓가로 어머니가 아버지의 행적을 대신 짊어지고 엄청난 고문을 당했고 누나도 끌려가 곤혹을 치뤘다 후일 더 밝히겠지만 어머니는 그때 끌려가 얻었던 병명없는 병으로 고생하다 15년전 눈을 감았다.

함께 끌려갔던 친고모와 고종사촌 형님 역시 고문 휴유증으로 벌써 전에 눈을 감았고 형수 혼자 아이들을 키웠다 ㆍ


그런 가족사 덕분일까 5.60년대는 두분의 친인척 월북사건으로 집안이 쑥대
밭이 되었고 7.80년대는 부모님의 공안 사건으로부터 쑥대밭,2천년대의 내대까지 감옥 가고 국보법으로 엮이는 등, 내가족은 공안
으로 부터 자유로운 때가 한번도 없었다는 기억이 떠오른다 ㆍ
이것은 미국이란 국가가 우리에게 안겨준 민족사적
비극 덩어리 였다


48년여전 하얗게 부서져 오는 아버지의 흑백 상여 사진 한장으로 내게도
아버지가 있었음이 희미하게 기억나며 공안의 아픔이 덕지 덕지 묻어나는 나의 아버지 상여행렬이다 어린 누나와 세살어린 여동생과 나는 저 상여 뒤에 하얀소복을 입고 울며 따르고 있다 만약 아버지가 저때 병사 하지 않았다면 나의 아버지는 고문으로 죽었거나
우리집안은 조작 간첩단 사건에 연루되었을 것이다 그나마 아버지의 이른 죽음이 우리 집안을 살린것이다 ㆍ


6.25때 양심적 자주를 찾아 월북한 오촌 두분,결코 부끄
럽지 않다 도리어 그 반대다
살아계시다면 꼭 만나보고 싶어 이산가족 상봉 신청을 하려 한다 ㆍ

짧은 인생이다 ᆢ
가난하게 살고 탄압 받고 살지라도 이땅에서는 자주의 기치로 인내하며 평화협정 그날까지 살아서의 행적을 잘 가꿀 일이다 ㆍ오직 자주통일의 조국을 갈구 하며 말이다ㆍ
2018 ,2, 23

사진 설명이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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