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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소설 번영의 길 제9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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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강산
댓글 0건 조회 3,568회 작성일 20-03-05 00: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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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jpg

제 2 장

 

간고한 출발

 

1

 

지상으로 간신히 얼굴을 내민 크지 않은 장방형의 뙤창으로부터 해빛이 흘러들고있었다. 하지만 모든 지하실들이 다 그러하듯 여기도 음침하고 어둑시그레 하였다. 뙤창을 낸 지하실 바람벽으로는 벌레가 기여간 자리처럼 비물이 흘러내린 흔적과 연기에 그슬린 자국이 보기흉하게 나있었다. 지하실 천정을 덮은 두꺼운 층막에 그악스레 뿌리박은 쑥대와 뙤창밖으로 삐여져나간 가느다란 연통이 지하실안에서도 잘 보였다.

콘로와 난로를 대신하고있는 도람통과 그 주위에 널린 그릇들, 알지 못할 설계도면과 부속품 같은것이 딩구는 책상, 찌국거리는 나무의자, 군용모포가 포개져있는 좁고 딱딱한 쇠침대, 쇠침대밑의 세수대야와 걸레, 바람벽못에 걸린 군복과 배낭… 어쩐지 모든것이 어수선해보이는 이 지하실은 리웅천이 밤낮으로 리용하는 현장사무실이자 숙소였고 강선제강소에 조직된《8월3일돌격대》의 지휘부이기도 하였다.

옥산에게는 이 류다른 풍경과 생활이 전혀 놀랍지 않았고 생소하지도 않았다. 이 땅에 포화가 멎은지 한주일이 지나자 평양-신의주, 평양ㅡ개성, 평양ㅡ만포, 평양ㅡ라진을 비롯한 주요철도간선들에서 려객렬차가 정상적으로 운행되기 시작하였다.

옥산은 평양ㅡ라진사이의 첫 개통렬차를 타고 동해선 천리를 달리였다.

그는 수령님께서 다녀가신 공장, 기업소들을 선참으로 찾아 복구건설의 성과들을 널리 소개하였다. 그는 간 곳마다에서 강선제강소에 조직된 《8월3일돌격대》와 같은 각이한 명칭을 띤 돌격대들이 복구건설에 달라붙었다는것을 알았다. 그 모든 돌격대들의 지휘부와 숙소 역시 지하실이거나 아니면 무너지다가 남은 건물의 한쪽 귀퉁이, 그런것조차 없으면 부랴부랴 쳐놓은 천막에 자리잡고있었다.

조국의 이러한 모습에 옥산은 벌써 어지간히 익숙되여 어둑시그레하고 눅눅한 곰팡이냄새 같은것이 떠도는 이 지하실이 그에게는 조금도 이상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지금 책상우에 팔굽을 세우고 평소에 그처럼 다감하고 쾌활하던 얼굴에 자못 심각한 표정을 짓고 찌국거리는 나무의자에 조각상처럼 까딱 움직이지 않고 앉아있는것은 전혀 딴데 원인이 있었다.

그의 앞에는 하나의 크지 않은 《사진첩》이 펼쳐져있었다. 그러나 사진은 한장도 없고 신문과 잡지들에서 오려낸 몇편의 글들이 《사진첩》에 끼워있었다. 그것은 그가 조국에 나와 번역하였거나 취재하여 쓴 글들이였다. 이《사진첩》의 주인은 용케도 옥산이 조국에 나와서 쓴 몇편 안되는 글들을 모조리 찾아서 모아둔것이였다. 물론 그 글들이 특별히 잘되여서 모아둔것이 아니라는것쯤은 옥산이도 잘 알고있었다. 글자체보다 글을 쓴 필자에게 더 관심을 두고 자기의 행적을 극성스럽게 뒤쫓았고 현재도 뒤쫓고있다는것을 말해주고있었다.

성격이 걸걸하고 호방한 그러면서도 어딘가 모르게 능청스러워보이는 리웅천기사장이 강선제강소에 취재나온 자기더러 《8월3일돌격대》지휘부에 꼭 들려달라고 두번세번 부탁하던것이 결코 리유없는 일이 아니였다는것이 이제 와서는 명백해졌다. 복구가 시작되면서 몇번 만나 안면을 익힌 리웅천은 지휘부에 찾아온 옥산이더러 느닷없이 신철이라는 청년을 아는가고 묻고는 옥산이 깜짝 놀라자 더 대답을 들으려고도 하지 않고 이 《사진첩》을 참고삼아 보라고 하고는 어디론가 사라져버렸던것이다.

옥산은 여전히 책상우에 팔굽을 세우고 턱을 고인채 눈을 약간 쪼프리고 깊은 생각에 잠겨있었다. 잠시후 밖에서 여러 사람의 목소리가 떠들썩하게 들려오더니 지하실 철계단이 쿵쿵 울리였다.

옥산은 천천히 머리를 돌리였다. 타는듯 한 검은 눈이 지하실에 들어서는 리웅천을 지켜보고있었다. 원래 그에게는 아무런 주저도 없이 상대방을 마주보는 버릇이 있었다. 까만 눈을 동그랗게 뜨고 깜빡거리지도 않고 상대방을 지켜보군 하였다. 지금도 옥산은 그런 눈길로 리웅천을 한동안 지켜보았다.

《다 보았습니까?》

리웅천이 《사진첩》을 념두에 두고 물었다.

《보지 않았습니다.》

《왜요?》

《내가 쓴 글이니까요.》

《아하, 알만합니다.》

리웅천이 천연스럽게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럴수록 옥산은 휘우듬히 굽어든 진한 두눈섭을 가운데로 모으고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이 글이나 보여주자고 여기 오라고 부탁한것은 아니겠지요?》

옥산이 저으기 날카롭게 물었다. 무척 쾌활하고 명랑한 인상인 처녀가 예상밖에도 심각한 표정을 짓고있는것을 보고 리웅천도 차차 심중해지지 않을수 없었다. 《사진첩》의 글들을 보고 신철이와 옥산이 사이가 범상치 않다는것을 알아차린 리웅천은 신철에게 옥산을 찾아볼것을 권했다.

그러나 신철은 그런 용단을 내리지 못하였다. 리웅천이 오늘 이 자리를 마련한것도 바로 그때문이였다.

《물론 그렇지 않습니다.》

옥산의 물음에 리웅천은 사실대로 대답하였다.

《그렇다면 <사진첩>의 주인은 어데 갔어요?》

옥산은 직방 물었다. 그는 자기의 속생각을 교묘하게 감출줄 몰랐다. 《신철동무말입니까? 조금 기다리십시오. 지금 전기로복구현장에 있는데 내가 가서 당장 데려오겠습니다. 그런데 한가지 리해해주어야 할것은…》

《…》

옥산은 대답대신 여전히 타는듯 한 까만 눈으로 리웅천을 지켜보았다. 리해시킬것이 있으면 어서 그렇게 하라는 무언의 요구였다.

《사실 나는 신철동무 모르게 이 글들을 필자에게 보여드리기로 결심했습니다. 이 점을 고려해주십시오. 이 사실을 비밀에 붙여주면 더욱 고맙겠습니다.》

능청스러운 기사장은 싱글싱글 웃고있었다.

《…》

옥산은 의연히 상대방의 표정에서 눈길을 떼지 않고있었다. 반짝이는 그 눈길에는 무엇인가 인력 같은것이 있었다. 그런 눈을 마주본다는것은 사실 헐치 않은 일이다. 성격이 콸콸하고 호방한 리웅천이였지만 그 역시 옥산의 눈을 마주보기 힘들었던지 아무말없이 철계단을 쾅쾅 울리며 다시 밖으로 나갔다. 누군가를 소리질러 찾는 그의 석쉼한 목소리가 지하실에까지 들려왔다. 옥산은 리웅천이 자기의 동정을 살피려고 잠간 들렸다는것을 알고 뜻밖에 다시 만나게 된 신철이 나타나기만을 초조하게 기다리였다.

(신철… 신철…)

마음속으로 그 이름을 외워보는 옥산의 눈앞으로 수풍호반의 푸른 물결이 출렁이며 다가들었다.

옥산이 조국해방전쟁때 조국에 나와서 처음으로 배치받은 곳은 쏘련에 파견하는 류학생들과 실습생들에게 로어를 가르쳐주는 강습소였다. 쏘련에서 사범대학을 졸업했으므로 조선말은 물론 로어를 아주 잘한다는것이 로어강습소 교원으로 배치한 중요한 리유였다. 문학에 상당한 취미를 가지고 세계의 이름있는 작품들을 거의 다 본 다정다감하고 랑만에 넘쳐있던 옥산은 조국에 나오면서 군복을 입고 종군기자가 되는것을 최대의 소원으로 내세웠다. 로어강습소 교원이라는 직무는 그의 이 소원과 상당히 거리가 멀었지만 기껏해서 대여섯달 참으면 된다고 하기에 뻗대지 않았다. 교육자의 긍지도 전혀 없지 않았던 옥산은 자기의 첫 직무에 모든 열정을 다 쏟아부었다.

당시 로어강습소는 수풍호반에 있었다. 낮에는 수업을 하고 저녁에는 호반에서 오락회를 벌리군 하였다. 그시기 전선과 후방에서 널리 류행되던 노래들인 《전호속의 나의 노래》와 《샘물터에서》가 많이 불리워지군 하였다. 옥산은 인차 그 노래들을 배웠고 오락회에서는 매번 그가 지명을 받아 노래를 부르군 하였다. 그러나 그는 노래보다 용감한 전선군인들속에서 전투담을 듣는것을 더 좋아하였다.

강습생들은 골짜기에 널린 동기와를 이은 귀틀집들에 분숙하고있었다. 옥산은 치장도 별반 하지 않고 옷차림도 수수하게 하고 다녔다. 간고한 전쟁을 치르고있는 나라의 공민에게 어울리는 체모를 갖추기 위해 의식적으로 그렇게 꾸미는것은 아니였다. 도대체 위장술은 그의 활달한 성격에 맞지 않았다. 하지만 그의 아릿다운 용모와 쾌활한 성격, 싱싱하고 민첩하고 청초한 자태만 가지고서도 강습생들의 인기를 독점하기에는 충분하였다. 물론 그에게 이국풍이 전혀 없은것은 아니였으나 당시 그것은 크게 흠으로 되지 않았다.

수풍호반의 일점홍인 옥산은 도고하기는 하였으나 밉지 않았다. 어떤 의미에서는 그것이 그 처녀의 독특한 매력이기도 하였다. 그가 있는 곳에서는 언제나 웃음이 넘쳐나고 기지있는 롱과 유쾌한 노래소리가 울려나왔다. 옥산은 나이지긋한 한 남선생과 같이 밤늦도록 강습생들을 찾아다니며 개별교수를 해주군 하였다. 그의 시야에는 젊고 용감하고 지식있는 많은 훌륭한 청년들이 비껴들었다.

이렇다 할 특징을 찾아보기 힘든 둥글넙적한 얼굴에 늘 고개를 수그리고다니는 신철이라는 존재는 오래도록 그의 안중에 없었다. 전선에서 소환된 용감한 군인이라고 보기에는 너무도 온순하고 내성적이였다. 옥산이 신철이란 이름을 기억에 새겨두게 된것은 그의 고향이 성진제강소가까이에 있다는 말을 들은 그때부터였다. 성진제강소가까이 어덴가 옥산이가 출생한 쌍바위포구가 있는 쌍암이라는 바다가마을이 있었다. 아버지는 옥산이 다섯살되였을적에 정든 고향을 떠나 북간도로 들어갔다가 그이후 쏘련연해주의 한까호기슭에 정착하였다. 대를 내려오며 바다가에서 고기도 잡고 농사도 짓던 아버지는 아무래도 물비린내가 풍기는 물가를 잊지 못하여 그 호수가에 마침내 고달픈 보따리를 풀어놓았을것이다.

가을이면 씨비리나 캄챠카지방에서 여름을 보낸 기러기들이 한까호상공을 지나 줄을 지어 남으로 날아갔다. 해빛 밝고 따스한 우리 나라에서 겨울나이를 하려는것이였다. 옥산의 기억속에는 지금도 호수가의 새초밭에서 땅을 일구던 아버지가 무리에서 떨어진 외기러기가 짝을 잃고 한까호상공을 구슬피 울며 돌다가 남쪽으로 날아가는것을 정신없이 멍하니 쳐다보던 처량한 모습이 진하게 새겨져있다.

그후 옥산이네는 연해주를 떠나 모래바람이 휘몰아치는 중앙아시아로 이주당하지 않으면 안되였다. 거기 가서도 아버지는 늘 나서자란 동해바다가 쌍암마을을 그리워하였다.

이런 남다른 래력을 가진 옥산은 신철이 자기와 한 고향내기라는것을 알고 초기에는 그에게 일정한 관심을 돌리기도 하였다. 그러나 신철은 옥산의 이런 호의를 전혀 받아들일줄 몰랐다. 보건데 내성적인 신철은 옥산이 열마디 물어보면 겨우 한두마디 어물어물 대답할뿐이였다. 옥산의 열정적인 까만 눈길이 얼굴에 닿기만 하면 그는 벌에 쏘이기라도 한것처럼 질겁하여 눈길을 떨구며 제먼저 얼굴을 붉히는것이였다.

만약 옥산이 수풍호반에서 보낸 생활의 갈피속에 신철이와 얽힌 하나의 잊을수 없는 자그마한 사건이 없었더라면 그는 신철이라는 이름조차 까맣게 잊어버리고 말았을것이다.

옥산이로 하여금 신철이라는 존재를 기억속에 뚜렷이 새기게 된 그 사건은 강습생들의 졸업식이 있은지 며칠이 지난 어느날 저녁에 있었다. 그날저녁 일찍 식사를 한 옥산은 소풍을 하려고 호수가로 나갔다. 그밤이 지새면 강습생들은 모두 조국을 떠나게 되여있었다. 강습생들은 삼삼오오 떼를 지어 호수가에서 이야기꽃도 피우고 노래도 불렀다.

그런데 유독 한 강습생만은 동무들과 휩쓸리지 못하고 호수가에 자리잡은 동기와집 퇴마루에 홀로 외롭게 앉아있었다. 옥산은 이상하게 생각하면서 그한테로 사뿐사뿐 다가갔다.

그 사람이 바로 신철이였다. 신철은 퇴마루에 무릎을 세우고 앉아 자기의 손바닥만 물끄러미 들여다 보고있었다.

《무슨 일이예요?》

신철의 가까이로 살금살금 다가간 옥산이 그를 놀래워줄 심산으로 갑자기 큰소리로 물었다.

신철은 와뜰 놀라며 벌떡 일어섰다.

《뭘 보고있었어요?》

호기심을 품은 옥산은 신철의 얼굴에서 눈길을 떼지 않았다.

《아무것도 아닙니다.》

신철은 손바닥에 펴들고있던것을 대뜸 가무리였다. 그러지 않아도 신철은 옥산이 옆에 오기만 하여도 당황하고 수집어하였다. 옥산은 그것을 녀선생앞에서 어린 학생이 취하는 태도정도로 받아들이군 하였다.

《무슨 비밀쪽지가 아니예요?》

《아닙니다.》

《그럼 뭐예요?》

옥산은 신철의 발치에 놓인 군인배낭을 내려다보았다. 배낭깊숙이 보관하고있던 귀한 물건 같았다.

《뭐 특별한건 아닌데…》

《보여주지 못하겠어요?》

옥산은 선이 굵은 희맑은 얼굴에 애써 엄한 표정을 짓느라고 했으나 조금 클사한 입에는 매혹적인 웃음이 떠올라있었고 까만 눈에는 지꿎은 장난기가 어려있었다.

신철은 녀선생의 요구를 더는 거절할수 없었던지 손바닥에 가무리였던것을 펼쳐보였다. 굉장한 비밀이나 들춰낸것처럼 의기양양했던 옥산은 손바닥에 든것을 보자 저도모르게 그만 실소하고 말았다.

《이건 돌멩이가 아니예요?》

《예, 조약돌입니다.》

《여기 호수가에서 주은거예요?》

옥산은 그가 하찮은 조약돌을 배낭에 넣어가지고 다니리라고는 생각 못했다.

신철은 머리를 가로저었다.

《그럼?》

신철은 대답하지 않았다. 조약돌에 무슨 사연인가 있다고 짐작한 옥산은 커다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신철을 빤히 지켜보았다.

신철은 녀선생의 찌르는듯 한 눈길을 더는 견뎌낼수 없었다.

《이건 우리 고향 희귀한 대리석조약돌입니다.》

《그러니 고향마을의…》

옥산은 놀라움에 뒤말을 삼키기까지 했다.

《예.》

《아!》

자기의 기분을 억제할줄 모르는 옥산은 탄성을 질렀다. 그는 신철의 손에서 대리석조약돌을 홱 빼앗아들었다.

그는 파르스름한 줄무늬가 곱게 물든 조약돌을 이윽히 내려다보다가 볼에 대고 쓰다듬었다.

《고향마을에서 멀지 않은 곳에 대리석산지가 있는데 이 조약돌은 거기서 내물을 따라 내려온거랍니다. 표면을 보십시오. 수천수만년동안 비바람과 물에 씻기며 바다기슭에까지 내려오느라 얼마나 매끈하게 다듬어졌습니까?》

《아, 내 고향의 귀중한 <보물>, 난 철이 든 다음 아직 한번도 고향을 보지 못했어요. 고향은 고사하고 바다도 보지 못했어요. 아 바다, 바다.》

흥분에 온몸이 달아오른 옥산은 망망한 바다마냥 폭넓게 펼쳐진 호반을 향해 두팔을 벌리고 레르몬또브의 시《돛》을 로어로 류창하게 읊었다.

《어때요?》

녀선생은 어리무던한 제자앞에 풍만한 앞가슴을 내밀며 활기에 넘쳐 물었다.

신철은 녀선생이 레르몬또브의 시에 대한 의견을 들으려는것인지, 아니면 자기의 시읊는 솜씨를 평가받으려 하는것인지, 고향의 바다에 대한 열렬한 사랑을 인정받으려는것인지 똑똑치 않아 우물쭈물했다. 물론 옥산은 대답을 받아내려는것은 아니였다. 다만 솟구치는 흥분을 억제하지 못하여 그렇게 물었을뿐이였다.

《어때요? 이 조약돌을 나한테 주지요? 신철동무는 래일이면 압록강을 넘어갈텐데… 조약돌은 나한테 두고가세요.》

옥산은 신철이 자기의 요구에 쾌히 응하리라는것을 조금도 의심치 않고 새알같은 자그마한 조약돌을 손에 꼭 쥐였다.

《안됩니다.》

불현듯 신철의 입에서 이런 대답이 떨어졌다.

그때까지도 자기의 자그마한 요구가 이렇게 무참히 거절당하리라고 전혀 생각 못했던 옥산은 신철의 입에서 튀여나온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처음에는 가늠조차 못했다.

《안됩니다. 그건 줄수 없습니다.》

평소의 신철이답지 않게 그는 강경한 어조로 말했다. 여직껏 숱한 제자들과 대상하면서도 이런 류의 거절을 당해본적이 없는 옥산은 졸지에 얼굴이 새빨갛게 붉히였다. 어리무던한 제자를 업수이보고 자기가 그앞에서 경망스럽게 처신한것이 틀림없었다. 그렇다고 순순히 물러설 옥산이 아니였다.

《왜요? 왜 주지 못하겠다는거예요?》

옥산은 항의하듯이 따져물었다.

《…》

《대답해보세요.》

옥산의 목소리는 벌써 시험장에서 궁지에 몰린 제자한테서 기어이 대답을 받아낼 때처럼 엄하게 울리고있었다.

《…》

신철은 고집스럽게 침묵을 지켰다.

《대답을 듣기전에는 이걸 줄수 없어요. 선생에게 이만한 권한은 있다고 봐요.》

신철은 머리를 반쯤 들고 옥산의 성이 난듯 한 얼굴을 흘끔 치떠보았다. 옥산은 그가 내심을 솔직하게 토로하리라는것을 느끼고 입을 다물었다.

《선생님, 이렇게 기탄없이 말씀드리는걸 리해해주십시오.》 신철은 추연한 눈빛으로 굼실거리는 호수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선생님은 그 어떤 시적기분에 휩싸여 조약돌을 요구하고있지만 내경우에는 그와 전혀 다릅니다. 나한테는 그 하나의 조약돌이 고향의 귀중한 <보물>입니다. 정다운 산천이고 바다입니다. 나는 지금도 수천수만년동안 이 대리석조약돌을 다듬고 품어준 고향의 그 바람결과 물결을 생각합니다.

그러나 지금은 미국놈들에 의해 여지없이 파헤쳐진 수난당한 고향입니다. 행복하고 평화로운 고향을 뒤에 두고 국경을 넘는다면 이다지도 괴롭지 않을것 같습니다. 불타는 조국, 신음하는 고향을 두고 압록강을 넘어가야 할 저는 괴롭습니다.

그런데 선생님은… 선생님은 저에게서 마지막으로 남은 이 고향의 조약돌마저 두고갈것을 요구하니…》

시에 신철의 두눈에 눈물이 핑 돌았다.

옥산이도 가슴이 찌르르해지면서 눈굽이 달아올랐다.

《그렇군요. 안됐어요. 무리한 요구를 해서…》

옥산은 그렇게 큰 충격을 난생 처음 받아보았다.

신철은 이제 하루밤만 자고 국경을 넘으면 째는듯 한 공습경보도 뇌신경을 허비는것 같은 자지러진 기총사격소리도 더는 듣지 않아 좋을것이였다. 눈부신 휘황한 전등불과 호기심을 자아내는 평화로운 이국풍경, 예상되는 높은 대우와 접대, 이것은 모두 가슴을 설레게 하는 새로운 생활일것이다. 옥산은 출발을 앞두고 잠 못드는 류학생들의 그 심정이 리해되였다.

그런데 한사람, 신철은 하나의 자그마한 조약돌을 손바닥에 놓고 국경을 넘어야 할 그 시각에 조국과 고향을 생각하며 눈물을 흘리고있는것이였다.

옥산이 성장하고 대학까지 나온 중앙아시아의 그 도시에는 그와 같은 또래의 조선청년들이 많았다. 그들속에서 한번은 고향이 어딘가 하는 문제를 놓고 론쟁이 벌어진 일이 있었다. 어떤 청년은 나서자란 그 도시가 고향이라고 했고 다른 청년은 남이 사는 이 땅이 어떻게 고향인가, 고향은 선조들의 뼈가 묻히고 같은 조선사람의 피가 흐르는 그곳이라고 주장했다. 어떤 청년들은 이것도 저것도 다 고향이고 조국이라 했다. 옳다. 아니다, 론쟁은 끊임없이 벌어졌으나 누구도 결론은 내리지 못했다.

그때 옥산은 사람마다 어머니가 하나이듯이 자기의 고향과 조국도 하나이다, 나에게서는 그 하나밖에 없는 고향과 조국이 바로 선조들의 뼈가 묻힌 동해바다가 쌍암마을이라고 완강하게 주장했다.

고향과 조국에 대한 그의 표상은 고향과 조국이 무엇인지도 모르던 어린 시절에 어머니가 들려주던 고향의 바다가 쌍바위에 깃든 전설에서, 술이 얼근하면 아버지가 저가락장단을 치면서 건드러지게 뽑군 하던 배따라기의 구슬픈 선률속에서 소리없이 그의 가슴속에 젖어들기 시작했는지도 모른다. 고향과 조국에 대한 그의 표상은 이렇듯 감상적인 테두리를 크게 벗어나지 못한것만은 사실이였다.

그러나 신철의 고향과 조국에 대한 표상은 그와는 달랐다. 고향과 조국은 바로 그의 피속에 슴배여있고 살속에 녹아있는 그런 강렬한 사랑이란것을 옥산은 똑똑히 보았다. 옥산은 자기도 도저히 미치지 못할 신철의 그 뜨거운 조국애의 높은 경지에 진정 머리가 수그러졌다.

다음날 아침 강습생들은 수풍호반을 떠났다. 옥산은 강습생들 한사람 한사람과 다정하게 작별하였다.

신철이와 헤여질 때였다. 밤사이에 별로 수척해진듯 한 신철은 어색해하면서 옥산에게 손을 내밀었다.

《받으십시오. 조약돌입니다.》

옥산은 이런 경우를 전혀 짐작조차 못했으므로 받아야 할지 말아야 할지 결심이 서지 않아 망설였다.

《어제는 안됐습니다. 제가 생각이 짧았습니다. 자그마한 대리석조약돌에 선생님의 어린 시절 고향에 대한 귀중한 추억이 깃들어있으리라는것을 그리고 선생님이 지금도 그 고향을 얼마나 그리워하리라는것을 생각 못했습니다. 받으십시오.》

《?》

《받으십시오. 선생님이 갖고있으나 제가 갖고있으나 마찬가집니다.》

신철의 목소리는 의미심장하게 울리였다. 그러자 옥산은 이 하나의 조약돌을 받는 문제가 보통 문제가 아니라는것을 알아차렸다. 그것은 무엇인가 엄숙하고 고결하고 비장하기도 한것을 약속해주고있었다.

러나 옥산은 오밀조밀하는 처녀가 아니였다.

그는 인차 평소의 쾌활한 그 성미대로 환히 웃으며 명랑한 어조로 말하였다.

《고마워요. 받을 자격은 아직 갖추지 못했지만… 정히 받겠습니다.》

옥산은 파르스름한 조약돌을 한손에 꼭 감싸쥐였다.

신철은 국경을 넘어 멀리 떠나갔지만 옥산에게는 어쩐지 품속에 간직한 조약돌로 하여 늘 그와 함께 있는 기분이였다.

그러던 신철이 류학을 앞당겨 끝내고 뜻밖에 자기 눈앞에 나타난것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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