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편소설 번영의 길 제32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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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태는 악화일로를 따라 줄달음쳤다.
리웅천이 옥산이와 함께 가죽이김공한테서 바킹감으로 쓸 가죽제품을 받아가지고 분괴압연직장 복구현장으로 돌아왔을 때 그들은 의외의 사태에 눈이 뒤집힐 지경이였다.
밤낮을 모르고 들끓고있던 복구전투장에서 사람그림자 하나 찾아볼수 없었다. 채 조립하지 못한 그대로 내버려둔 전동기와 축세기, 여기저기 나딩구는 부속품들과 내화벽돌들, 파헤쳐진 구뎅이와 자빠진 도람통들, 땅바닥에 늘여진 전기선들과 용접선들… 직장은 방금 폭격을 받은 뒤처럼 살풍경이였다.
리웅천은 전투속보가 나붙군 하던 가열로벽체에서 자기를 《국제간첩》으로 묘사한 풍자만화를 보았다. 그순간 그의 귀전에서는 며칠전 가열로원도의 출처를 따지면서 필요한 곳에 가면 다 불게 될것이라고 울러메던 한윤호의 새된 목소리가 들려왔다. 며칠전에는 전기로와 분괴압연기복구과정에 일어난 설비사고를 조사한다고 하면서 신철을 알수 없는 곳으로 데려갔고 오늘은 자기까지 《국제간첩》으로 몰아 모해하려는것이 분명하였다.
리웅천이로서 더구나 참을수 없는것은 분괴압연기복구가 중지된것이였다. 리웅천은 금시 피가 거꾸로 솟는것 같았다. 그는 두주먹을 으스러지게 틀어잡았다.
《기사장동지 아닙니까?》
휴계실에서 승남이가 뛰여나오며 소리쳤다.
《모두들 어디 갔소?》
리웅천이 등에 지고온 가죽제품을 벗어놓으며 물었다.
《지배인이 지시해서 동원되여온 동무들은 모두 자기 직장에 돌려보내고 우리 직장 동무들만 휴계실에 있습니다. 모든것이 해명되기전에는 작업을 중지하라는겁니다.》
《됐소. 모두들 여기 모이라고 하오.》
직장에 남은 복구대원들은 20명 남짓하였다. 그들은 바킹감으로 쓸 가죽제품을 쓸어만지며 너무좋아 어쩔줄 몰라했다.
《누가 뭐라고 하든 우린 복구를 중지할수 없소.》
이렇게 선포한 리웅천은 그자리에서 가죽바킹을 리용하여 고압관들을 련결하기 위한 작업조직을 하였다. 작업은 크게 지상과 지하로 나누고 리웅천자신이 가장 어려운 지하통로구간의 관들을 맡았다.
복구대원들의 얼굴에는 한결같이 결사전에 나선 전투원들의 얼굴에서나 볼수 있는 긴장감이 떠돌고있었다. 그들은 말없이 일감을 찾아 민활하게 움직이였다.
옥산은 원래 가죽바킹감만 갖다주고는 인차 다른 일을 보려고 하였다. 당보기자의 취재대상에는 분괴압연직장만 올라있는것이 아니였다. 그러나 분괴압연기복구전투장에 닥쳐든 뜻밖의 정황과 리웅천을 비롯한 전투원들의 비상한 각오는 그로 하여금 작업장을 떠날수 없게 하였다.
그는 리웅천을 따라 압연기의 배관들이 뻗어간 지하의 좁은 통로로 내려갔다.
《무슨 일입니까?》
뒤따르는 발자국소리를 듣고 무심히 돌아보던 리웅천이 옥산이를 의아한 눈길로 바라보며 물었다. 그도 옥산의 오늘 하루일정이 분괴압연직장에만 한정되여있지 않다는것을 알고있었다.
《함께 일합시다. 보아하니 로력이 부족한것 같은데…》
옥산은 자기의 말에 별다른 의미를 담지 않으려고 애쓰며 짤막하게 대답하였다.
《그런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됩니다.》
리웅천의 목소리는 저으기 랭정하게 울리였다. 옥산이와 그의 오빠인 한윤호와는 될수록 련결시키지 말자고 하지만 이따금 그런 옭맺힌 감정이 튀여나가는것을 어쩔수 없었다. 지금도 그는 분괴압연기복구가 중지된데는 한윤호의 책임이 적지 않다고 믿고있었다.
《신철기사는 왜 보이지 않아요?》
옥산이 불쑥 물었다.
《가열로벽체에 붙은 만화를 보고도 그럽니까?》
《<국제간첩>이라는거예요?》
리웅천은 대답하지 않았다.
《승남이, 뭘해. 일을 시작해야지.》
리웅천이 한발 먼저 작업장에 내려온 승남이를 재촉했다. 승남은 기사장과 한조가 되여 관련결작업을 하게 되였던것이다.
《인주세요.》
느닷없이 승남이앞에 나선 옥산이 손을 내밀었다.
《뭘말입니까?》
승남은 옥산이 무엇을 요구하는지 알지 못했다.
《스파나, 바킹, 볼트…》
옥산이는 승남의 공구주머니에 든것을 용케도 하나하나 이름까지 대며 집어내였다.
《어쩌자는겁니까?》
승남은 아직도 영문을 알지 못해 눈만 디룩거리였다.
《승남동문 다른 일을 보세요. 기사장동지와는 아무래도 내가 한조가 되여야겠어요.》
옥산이 승남이를 대신해나서자 리웅천이 펄쩍 뛰였다.
《안됩니다.》
《왜 안된다는거예요?》
옥산이 뿌루퉁해서 대꾸하였다.
《아무나 하는 일이 아닙니다. 말하자면 기술과 기능이 필요합니다.… 승남이, 기자동무가 정 일하겠다면 작업장정리나 하게 하오. 흩어진 내화벽돌을 한쪽구석에 쌓고 자빠진 도람통도 바로세우고… 중학생들이 하던 일 말이요.…》
《중학생들이 하던 일이라구요? 그러니…》
옥산은 자기에 대한 터무니없는 과소평가에 너무도 약이 올라서 뒤말을 삼키기까지 하였다. 화가 북받친 그는 승남의 손에서 공구주머니를 와락 나꾸어채더니 안에 든것을 바닥에 와르르 쏟아놓았다. 공구, 부속과 함께 온갖 잡동사니가 바닥에 널리였다.
《스파나는 이게 다예요?》
옥산이 승남에게 질책하듯 물었다.
《예.》
《볼트를 보니 22㎜스파나가 꼭 있어야 하겠어요. 22㎜스파나…》
《22㎜스파나? 그런것까지 다 압니까?》
공구임자인 승남이도 놀랐지만 리웅천은 더 놀랐다.
《기사장동진 올라가서 작업장정리나 하세요. 가능하면 22㎜스파나도 얻어다주고요. 나와 승남이가 한조가 되여 일하겠으니 더는 걱정마세요.》
《허허허.》
리웅천은 어이가 없다는듯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옥산이도 따라웃었다. 고깝게 생각했던것이 순간에 다 풀리였다. 결국 리웅천이와 옥산이 한조가 되여 관련결작업을 하였다. 그런데 그 작업이 여간 어렵지 않았다. 숨막힐듯 한 무더위, 습기, 배밀이로 전진해야 할 좁은 통로… 옥산은 잠간사이에 온몸이 땀으로 흠뻑 젖었다.
《좀더 조이시오!》
두관사이에 바킹을 끼우고 볼트를 꽂은 리웅천은 볼트가 헛돌지 않게 스파나로 고정하고는 옥산이더러 나트를 조이라고 재촉하였다.
《예, 예, 조입니다.》
옥산이 대답은 잘하지만 두관은 도무지 조여지는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힘껏!》
리웅천이 다시 소리쳤다.
옥산은 힘이 모자라서인지 아니면 손이 잘 움직여지지를 않는지 혼자서 쌕쌕거리기만 할뿐 도무지 나트를 돌리지 못하였다.
《빨리!》
리웅천은 은근히 짜증을 냈다.
《손이 들어갈 짬도 없는데 어디 힘 쓸수가 있어요?》
마침내 옥산이 푸념을 했다. 사실 관련결작업 같은것은 넓은 공간에서 한다면 별로 힘들것이 없었다. 그런데 숨막힐듯 한 좁은 공간에서 스파나를 돌리자니 사방에 온통 부딪치는것뿐이였다.
《안되겠소. 내가 나트를 돌릴테니 옥산동무는 볼트를 고정시키시오. 헛돌지 않게 든든히!》
《예, 든든히 잡고있겠어요.》
일자리를 바꾼 리웅천은 끙하고 소리치며 스파나로 나트를 돌리였다.
순간 《아야!》 하는 비명소리가 터졌다.
륙각볼트머리에서 옥산이 잡고있던 스파나가 벗겨진것이였다. 그통에 옥산의 손등이 콩크리크바닥에 긁히면서 살가죽이 처참하게 벗겨지고말았다.
《내가 뭐랍디까. 기술과 기능이 있어야 한다고 했지요?》
리웅천이 그를 나무랐다.
《듣기 싫어요. 신호도 없이 뚝심을 쓰니까 그렇게 된거지요.》
《그러니 이번에도 잘못은 나한테 있구만. 허허허.》
리웅천은 터무니 없다는듯 웃기는 하였지만 그러면서도 옥산의 손을 잡고는 살가죽이 벗겨진것을 세심히 닦아주고 손수건으로 쓰리지 않게 감싸주었다.
《어떻습니까?》
《참을만 해요.》
《자, 이젠 그만하고 다른 일을 보시오. 이런 일은 아무래도 승남이가 낫습니다.》
리웅천은 진심으로 권고했으나 오히려 옥산의 부아만 돋구어주는것으로 되였다.
《내 걱정은 말고 작업준비나 잘하세요. 볼트, 나트가 온통 녹이 쓸었으니 어디 제대로 돌기나 해요?》
《그러니 이번엔 모든 죄가 볼트, 나트에 있다는거구만.》
《그렇잖구요.》
말해놓고보니 공연한 엇드레질을 한것이 우스워서 옥산은 허리를 꺽으며 깔깔거렸다.
옥산이로서는 작업하기가 불편하고 힘이 드는것은 얼마든지 참아낼수 있었지만 낮은 천정에서 걸죽한 흙탕물이 뚝뚝 떨어지면서 목덜미로 스며들어 벌레처럼 등골로 스멀스멀 기여내리는것은 정말 질색이였다. 그러나 그것도 참았다. 나어린 금희가 고생하는것에 비하면 자기가 하는 이쯤한 일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했던것이다.
점심시간에 옥산은 복구대원들과 함께 강낭죽을 한그릇반이나 먹었다. 그리고도 부족하여 가두인민반에서 지원해온 참외를 세개씩이나 덧붙여먹었다.
《옥산동문 스파나질이 정 서툴지는 않는데 그런 일을 언제 해보았소?》
저으기 흡족해진 리웅천은 정겨운 눈으로 옥산이를 바라보며 물었다. 깊이 알수록 옥산에게 정이 가고 믿음이 가는것이였다.
《언젠 중학생대접을 하더니 이젠…》
《허허, 우리 중학생들이 어쨌다고? 우리 꼬마복구대원들을 너무 얕본다.…》
《호호호》
《하하하》
두사람은 작업장이 들썩하게 웃었다. 휴식하던 복구대원들모두가 따라웃었다.
지하통로에서의 작업은 오전에 이어 오후에도 계속되였다. 가장 어려운 구간에 대한 작업이 끝나갈무렵 갑자기 금희가 찾아와서 일남이가 앓는다는것을 알려주었다.
《아이가 앓으면 병원으로 가야지 나를 찾아오면 어찌란거냐?》
리웅천은 버럭 역증을 내였다.
《아지미가 꼭 아저씨한테 알리랬어요. 아저씨, 빨리… 빨리 가보세요.》
금희는 발을 동동 굴렀다.
밖에서는 소낙비가 쏟아지고있었다. 이따금 번개불이 번쩍이면 지하실에까지 섬광이 스며들었다. 그때면 지하실에 매단 누런 전등불조차 빛을 잃었다.
꽈르릉-
요란한 우뢰소리에 온 직장이 통채로 드릉드릉 울리였다.
《난 시간이 없다. 네가 빨리 달려가서 아이병이 중하면 입원시키라고 해라.》
리웅천이 자리에서 움쭉 일어섰다. 그때 번개불이 또 한번 번쩍이면서 갑자기 엄하게 굳어진듯 한 리웅천의 모습을 환히 비치였다.
《아저씨.》
《기사장동지.》
금희와 옥산이 번갈아 다졸랐으나 리웅천은 끄떡도 하지 않았다. 옥산은 개인적인 모든것을 깡그리 혁명임무수행에 바치는 한 인간의 거인적인 모습을 그대로 눈앞에 보는듯 싶었다. 그는 이전 같으면 다급히 수첩을 꺼내서 자기의 느낌을 몇마디로라도 적었겠지만 지금은 그럴 필요를 느끼지 않았다. 그 감정은 벌써 취재가 아니라 산 체험으로 머리속에 깊이 새겨지는것이였다.
《기자동무, 시작한 일을 마저 끝내야지요.》
리웅천은 아무런 근심도 없는 사람처럼 싱긋 웃으며 말하였다.
《그렇게 합시다.》
리웅천은 옥산을 앞세우고 또다시 어둑침침한 지하통로로 내려갔다.
그들이 작업을 끝내고 지상으로 올라왔을 때 납작한 캡을 눌러쓴 다부지게 생긴 젊은 사람이 리웅천을 기다렸던것처럼 마주오며 좀 만날수 없겠는가고 물었다.
《오늘 작업을 누가 지시해서 했습니까?》
청년이 입가에 야룻한 웃음을 띠우고 물었다.
《내가 지시했소. 그런데 동문 대체 누구요?》
리웅천은 사나운 눈찌로 청년을 쏘아보았다.
《나하고 같이 가보면 알게 됩니다.》
청년은 여전히 얄궂은 웃음을 입가에 띠우고 조용히 대답했다.
상대방을 얕잡아보는것 같은 그 여유있는 웃음이 더구나 리웅천의 부아를 돋구었다.
《기사장동무, 갑시다. 우에서 무엇인가 좀 해명하려는것 같은데 도와주어야 하겠소.》
반나마 조립한 집채같은 전동기뒤에서 별안간 나타난 차승룡이 흡사 죽은 사람을 보는듯 한 그런 눈으로 리웅천을 쳐다보며 알지 못할 청년과 합세해나섰다. 더는 뻗칠수 없었다.
얼마후 알지 못할 곳에 실려간 리웅천은 몸은 좋으나 얼굴색이 창백하고 눈에 피가 진 사람과 마주앉았다.
《일은 잘돼가오?》
눈에 피가 진 사람이 리웅천을 주의깊이 쳐다보며 물었다.
《무슨 일 말입니까?》
《분괴압연직장복구말이요.》
그 사람은 리웅천의 얼굴에서 눈길을 떼지 않은채 잔잔한 목소리로 물었다. 상대방의 말보다도 그 표정에서 대답을 읽으려는것 같았다.
《예.》
보건대 복구사업을 중지시킨 장본인 같았으나 시치미를 떼고 어이없는 질문을 하는데 리웅천은 대뜸 속이 울컥했으나 대방의 체면을 생각해서 공손하게 대답했다.
이때 캡을 쓴 청년이 트렁크를 들고 들어왔다. 그는 트렁크를 책상우에 올려놓고 뚜껑을 열어제낀 다음 방주인에게 깍듯이 인사를 하고는 말없이 방에서 나갔다. 이것만 보아도 방주인이 상당히 높은 직책에 있다는것이 알리였다.
리웅천은 책상우에 놓인 트렁크가 자기가 쏘련에 갔다가 돌아올 때 가지고나온것임을 대번에 알아보았다.
《이 트렁크안의 도면들을 보았소?》
눈에 피가 진 그 사람이 다시 물었다.
《예.》
《왜 일부 도면들이 없소?》
《어떤 도면들말입니까?》
《극비도면들말이요.》
《극비도면들이라니요?》
《동무네가 건설하고있는 3단복식인가 뭔가 하는 그 가열로도면말이요. 어디 있소?》 그 사람은 사뭇 달래는 어조로 튕겨주었다. 《원도말이요.》
《원도라니 무슨 원도를 두고 묻는지 모르겠습니다.》
《쏘련에서 극비로 취급하는 그 가열로도면말이요. 동무야 장본인이니 잘 알테지. 이건 위장도면이지요?》
그 사람은 트렁크에서 설계도면 하나를 끄집어내더니 리웅천의 눈앞에 쳐들어보이며 물었다. 그것은 현재 신설중에 있는 신철이 그린 가열로도면이였다.
리웅천은 그 사람의 질문이 터무니 없는데다가 그 질문자체가 이미 짜가지고 내려온 각본에 뜯어맞추기 위한 한갖 형식에 불과하다는데 생각이 미치자 더는 그 사람과 응대도 하고싶지 않았다.
《말하오. 동무가 손에 넣은 극비도면을 어떻게 했소? 어디에 넘겨줬는가?》
《넘겨줬다는건 또 무슨 소립니까?》
리웅천은 또다시 속이 벌컥 뒤집히면서 이마전의 피대줄이 금시 튀여나갈것처럼 세차게 툭툭 뛰는것을 느꼈다. 그는 이를 악물고 분노를 간신히 누르고있었다.
《몰라서 묻소? 하긴 동무가 말하지 않아도 신철이 그자가 다 불었소.》
눈에 피가 진 그 사람은 이 문제를 해명하느라고 밤을 패며 퍼그나 수고를 하는것 같으나 조금도 짜증을 부리거나 신경질을 내지 않으면서 침착한 어조로 계속 따지고들었다. 심지어 어처구니없는 고집을 그만 부리라는듯이 싱긋싱긋 웃기까지 하였다.
《그러니 나를 <국제간첩>으로 몰자는겁니까?》
리웅천은 이 말을 순탄하게 그리고 끝까지 하려고 모든 의지력을 다 발휘하지 않으면 안되였다.
《질문은 내가 하는것이지 동무가 하는게 아니요.》
리웅천은 더는 참지 못하고 자리를 차고 일어서며 소리쳤다.
《왜 내가 못한다는겁니까? 내가 죄인인가?》
《앉소, 앉소. 흥분하지 말고…》
《그래서 가열로공사를 중지시켰습니까? 예? 왜 가열로공사를 중지시켰는지 그거나 말하시오!》
《흥분하지 마오. 흥분하지 말라니까…》
그 사람은 또다시 능청스럽게 웃음을 짓고는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나 리웅천의 어깨를 눌러 자리에 앉혔다. 그리고는 리웅천의 앞에 종이장을 내놓았다.
《여기다 쓰시오. 천천히 생각하면서 죄다 쓰시오.》
《뭘 쓰라는겁니까?》
《광복전 일본에서 공부할 때 있은 일, 남조선에 있는 처남과의 관계, 북에 들어와서 여러가지 설비사고들을 저지른 일, 특히 며칠전 전기로와 분괴압연기에서 일어난 엄중한 설비사고의 원인을 잘 밝혀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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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목록
강산님의 댓글
강산 작성일
(위에서 계속)
원인을 잘 밝혀야 하겠소. 그리구 모스크바회담에서 돌아와 쏘련의 원조가 어찌구저찌구 하면서 시비한것들…》
《자백서를 요구하는겁니까?》
리웅천은 쓰거운 웃음을 지었다.
그러나 상대방은 그런것을 전혀 눈치채지 못한듯 여전히 달래는듯한 어조로 그건 좋도록 생각하라고 말했다.
《시간은 얼마든지 있으니 기억을 더듬으면서 쓰시오. 오늘은 여기서 쓰도록 하오. 그렇다고 어디 나가서는 안되겠소. 출입문에 쇠를 잠그거나 보초를 세우지는 않겠소.》
그 사람은 이렇게 말하고 방에서 나갔다. 갑자기 빈 방에 홀로 남은 리웅천은 두손으로 머리를 싸쥐였다.
사람이 한생을 살아가자면 반드시 하고싶은 일만 하게 되는것은 아니다. 때로는 하고싶지 않지만 반드시 하지 않으면 안되는 그런 일도 있기마련이다. 그렇다면 지금 이 백지에다 자백서와도 같은 황당한 글줄을 남기는것도 내키지는 않지만 반드시 해야 할 그런 일인가?
별안간 마른 번개가 펑긋하더니 이윽고 먼 우뢰가 우르르 하고 머리우를 들들 굴러갔다. 번개불이 번쩍거릴 때마다 침침한 방안이 눈부시게 밝아지군 하였다. 번개는 시간이 갈수록 더 잦게 번쩍거리며 죽은듯이 머리를 싸쥐고앉은 사람을 조각상처럼 또렷이 부각시켜주군 하였다.
리웅천은 그 어떤 보이지 않는 검은 손이 자꾸만 자기의 등을 밀어 깊숙이 파놓은 함정에로 몰아가는것 같은 환각에 빠지군 하였다. 순박하고 어리무던하기만 한 신철은 그 함정에 이미 빠져서 자기를 구원해달라고 울부짖는것만 같았다.
(어찌하여 이런 일이 벌어졌는가? 사태의 진상은 과연 무엇인가?)
또다시 가열로의 벽체에 나붙은 그 만화가 눈앞에 떠오르고 필요한 곳에 가면 다 불게 될것이라고 위협하던 한윤호의 목소리가 귀청을 때렸다.
전기로와 분괴압연직장 복구문제를 놓고 한윤호와 마찰을 일으키던 일들이 눈앞에 얼른거리였다. 한윤호는 현대적인 대형전기로와 가열로를 외국의 원조가 없이 자체의 힘으로 일떠세운다는것을 전혀 믿으려고 하지 않았다.
그런데도 전기로복구에 뒤이어 3단복식으로 된 최신형가열로신설을 계속 내밀고있으니 그것을 눈에 든 가시처럼 여기는것이 아닐가? 하지만 한윤호 한 개인의 힘으로는 오늘과 같은 이런 엄청난 《사건》을 조작해낼것 같지 못했다. 그렇다면 그의 뒤에 서있는 인물은 누구인가?
소낙비는 여전히 억수로 쏟아지고있었다.
문득 일남이가 앓는다고 하면서 발을 동동 구르며 빨리 집에 가달라고 하던 금희의 목소리가 귀전을 두드리였다. 이제껏 너무도 오래동안 떨어져있어서인지 부자간의 정도 어쩐지 뜨겁지 못하였다. 그것이 그의 가슴에 늘 아프게 걸려있었다.
언젠가 일남의 생일이니 꼭 집에 와달라고 신신당부하던 안해의 쪽지를 받고도 가지 못하고 출장길을 떠나던 일이 류달리 가슴저리게 마쳐왔다.
(아, 일남아… 일남아…)
리웅천은 머리를 감싸쥐고 거의나 신음소리처럼 중얼거리였다.
번개는 시간이 갈수록 더 잦게 번쩍거리며 방안에 앉은 한 녀인을 또렷이 비쳐주군 하였다.
지금 흰 저고리에 검정치마를 받쳐입은 분임은 고열에 시달리는 일남이 옆에 고개를 떨구고 앉아있었다. 정수리로 바른 가리마를 타서 머리칼을 두쪽으로 쪽지고 비녀를 꽂은 그의 자태는 너무도 아련하였다.
또다시 번개불이 번쩍하고 우뢰가 터지면서 온 집안이 통채로 전률하듯 부르르 떨었다.
《아버지.》
어린것이 두팔을 허우적거리며 아버지를 찾았다. 아버지를 어려워하면서도 이따금씩 꿈속에서 아버지를 찾군 하는 일남이다.
《일남아, 아버진 이제 오신다. 꼭 오신다. 일남아!》
분임은 어린것을 부둥켜안듯이 웃몸을 낮추 꺾고 탈탈 마른 그 입술에 자기의 입술을 갖다대였다. 어린것의 온몸은 불덩어리처럼 활활 달아올랐다. 쌕쌕거리는 거치른 숨소리가 어머니의 가슴을 말리였다.
(불행은 항상 쌍으로 온다는데, 너의 아버지는 지금 어디로 갔느냐?)
분임은 갑자기 종적을 감추었다는 남편의 운명이 불안스럽게만 하였다.
《동무 남편이 리웅천이지? 남조선에 있는 동생이 왔다갔지? 남편이 비밀도면을 감췄지?》
며칠전 그를 찾아와 문초를 들이대던 표독스럽게 생긴 사나이의 목소리가 송곳끝처럼 뇌리를 파고든다. 신철이와 리웅천이 간첩이라는 흉흉한 소문, 듣기만 해도 소름이 끼친다.
분임은 오싹 몸을 떨었다. 우뢰 울고 번개치는 이밤에 꼭 무서운 재난이라도 들이닥칠것만 같았다. 그 재난으로부터 어린것을 구원이라도 할것처럼 분임은 일남이를 그러안았다. 그리고는 또다시 타드는 어린것의 입술에 자기 입술을 갖다대였다.
꽃잎 같은 어린것의 입술에서 전달되는 뜨거운 열기는 어머니의 온몸을 깡그리 불태우는것 같았다. 열에 뜬 그 얼굴을 정신없이 들여다보던 분임은 갑자기 제정신이 든듯 어린것의 머리맡에 놓인 약봉투를 집어들었다. 엊저녁 의사가 주고간 흰 알약을 부스러뜨려 물에 탄 다음 가랑잎처럼 초들초들 말라든 어린것의 입술에 흘려넣었다. 어린것은 이제는 도리질을 할 기운도 다 빠진듯 어머니의 팔에 축 늘어져 입술을 추기는 약물을 간신히 넘기고있었다. 그것이 어머니의 불안과 공포심에 부채질을 하였다.
《일남아!》
분임은 어린것을 흔들며 안타까이 불렀다. 그래도 기척이 없다. 왕왕 소리높이 울기라도 하였으면…
《일남아! 일남아! 너 어찌자고 이러니.…》
분임은 목메여 울부짖었다.
《아-버-지-》
일남이의 타드는 입술에서 가느다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또다시 아버지부터 찾는 일남이, 아버지는 그 애에게서 그만큼 그립고 소중한 존재였다.
번개가 다시 번쩍이자 찌르는듯 한 창백한 섬광이 비녀를 꽂은 쪽진 머리아래 솜털이 보르르하게 일어선 녀인의 목덜미를, 그 섬약한 살갗을 꿰비칠듯이 환히 밝혔다. 부드럽고 유순한 자태와 용모는 아름답고 청초하였지만 분임의 온몸에 실린 고뇌의 빛은 가셔내지 못하였다.
분임은 천천히 머리를 들었다. 눈물이 가랑가랑 고인 눈으로 수령님의 초상화를 우러렀다.
《아, 장군님, 아버지장군님, 저의 아들과 남편의 운명은 이제 어찌됩니까?》
분임은 울먹이는 목소리로 아뢰였다.
언제부터인가 분임은 그이를 자기 운명의 구세주로 굳게 믿기 시작하였다. 그것은 조국의 광복과 함께 자기의 가슴속 깊은 곳에 조용히 깃들기 시작한 믿음이고 신앙이였다. 광복전 어린 나이에 리웅천과 결혼한 분임은 남편의 사랑이란 거의나 모르고 살아왔다. 어려서는 철이 없어 그 사랑을 몰랐고 철이 들어 남편의 사랑을 알만하니 남편은 고학을 한다면서 내내 일본에 건너가있었다. 나라의 광복이 이룩되여 좀 살아볼가 하니 이번에는 38선이 막혀 북쪽 어데선가 일한다는 남편과는 생리별을 당하지 않으면 안되였다.
그러던 어느날 한사람이 찾아와서 남편이 이북 어디에 있는지는 몰라도 이분을 찾아가면 반드시 남편을 찾아줄것이라고 하면서 그에게 사진한장을 주었다.
김일성장군님의 사진이였다.
분임은 그 사진을 가슴에 품고 어렵고 힘들 때마다 사진을 꺼내서는 《장군님.》 하고 목메여부르군 하였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였다. 그 일이 있은지 며칠이 안되여 꿈과 같이 장군님께서 보내주시였다는 한 젊은이가 나타났다.
그이께서 부르신다고 하며 남편한테 가자고 하는것이였다. 그리하여 그 젊은이를 따라나섰다. 38선을 넘어 평양에 도착하였을 때 김일성장군님께서 몸소 바쁘신 시간을 내시여 만나주시였다. 분임은 그이의 품에 얼굴을 파묻고 울었다.
자기 생애에서 가장 행복했던 생활이 꿈결마냥 흘러갔다.
그런데 이번에는 전쟁이 일어났다. 남편과의 생리별, 남편이 병기생산부문에서 복무하다가 중상을 당했다는 소식…
분임은 장군님의 초상화를 우러르며 장군님 계시여 남편은 반드시 초소에 다시 설것이라고 믿었다.
그리하여 기적은 또한번 일어났다.
남편이 다시 소생한것이였다. 더구나 장군님께서는 남편의 지난 공로를 평가하시고 전쟁이 한창인 때 복구건설의 래일을 내다보시고 제강소 기사장이란 중책을 맡겨주기까지 하시였다.
장군님은 운명의 구세주이시고 살뜰한 친아버지이시였다. 그리하여 그는 지금도 그이의 초상화를 우러러 자기의 안타까운 심정을 하소하며 눈물짓는것이였다.
그이의 자애로운 영상이 분임을 내려다보고계시였다. 그러자 머리우에서 우렁우렁한 목소리가 금시 들려오는듯 싶었다.
그이께서 38선을 넘어온 자기를 친히 만나주시고 그동안 살아온 형편과 앞으로 살아갈 방도를 의논해주시던 그날의 말씀이 귀전을 울리였다.
《분임동무, 그동안 고생이 많았소. 사실 사람이 한생을 살아가는 길은 항상 평탄하지 않소. 분임동무는 이번에 멀리 충청도에서부터 38선을 넘어왔지. 그길 역시 평탄하지 않았을거요. 때로는 올리막이 있고 그런가 하면 내리막도 있었겠지. 그러나 자기가 목적하는 곳으로 끝까지 가자면 그러한 길을 쉼없이 그리고 조금도 헛디딤이 없이 꾸준히 이악하게 걸어가야 하오. 그러자면 강의한 의지가 있어야 하지. 강의한 의지, 인생의 길을 걸어가는것도 그와 같다고 말할수 있소.…》
분임은 결연히 일어섰다. 눈물이 가랑가랑 고였던 가는 눈에 굳센 의지의 빛발이 어리였다. 너무도 연약하고 섬약해보이기만 하던 체내에서는 벌써 무엇으로써도 꺽을수 없는 무서운 강단과 의지의 힘이 꿈틀거리고있었다.
우르릉 꽝! 번개불이 번쩍하고 방안을 환희 비치자 하늘이 빠개져나가는것 같은 우뢰소리가 터졌다. 창문이 드르릉 울리고 벽체가 부르르 떨었다. 그러나 분임은 더는 공포에 잠기지 않았다.
그는 일남이를 꽉 그러안고 한손에는 우산을 들었다. 그러자 또한번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밖에서 차멎는 소리가 들려오더니 누구인가 자기를 찾았다. 금희와 낯모를 젊은 녀성이였다.
《빨리 차를 타세요. 아이를 입원시켜야겠어요.》
분임이 처음보는 젊은 녀성이 일남이를 받아안았다. 옥산이였다.
누구네 지붕에선가 기와장이 비바람에 날아떨어져 깨지는 소리가 와지끈 탕! 요란하게 울리였다.
우우 솨솨-
노호하는 비바람소리.
승용차는 폭우속으로 달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