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편소설 번영의 길 제22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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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일성동지께서는 국가계획위원회에서 제기한 계획조절문건을 보시다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서시였다.
(과연 계획을 조절해야만 하는가?)
그이께서는 또다시 이런 물음을 자신에게 스스로 제기하시였다. 그리고는 책상우에 펼쳐진채로 놓인 계획조절문건을 다시 찬찬히 내려다보시였다. 문건은 쏘련의 기술과 설비로 복구신설할 일부 대상들을 명년도에 복구신설할 대상에서 조절할것을 제기하고있었다.
그이께서는 쏘련방문을 마치시고 조국에 돌아오시기 바쁘게 평양시 중심거리 살림집건설장과 모란봉극장, 대성요업공장, 평양방직공장 복구건설장들을 현지지도하시였고 내각전원회의를 비롯한 여러 회의들을 지도하시며 수많은 건설자들과 일군들을 만나시였다. 복구건설에 일떠선 인민들의 열의는 그 어느때보다 높았다. 그러나 일부 일군들속에는 외국의 원조에 대한 환상이 있다는것을 포착하시였다. 특히 최일만을 비롯한 중공업부문의 몇몇 책임일군들속에는 이번 쏘련방문에서 채택된 콤뮤니케를 보고 자금도 많이 들고 기술적요구도 높은 중공업부문의 복구가 쏘련의 원조에 의하여 아무런 문제도 없이 아주 헐하게 실현될것처럼 생각하면서 방대한 복구계획의 현실적가능성을 주인다운 립장에서 세밀히 따져보지조차 않고있었다.
김일성동지께서는 이 문제를 심각히 보시고 정준택에게 나라를 복구하는데서 외국의 원조에 지나친 기대를 걸지 말고 어디까지나 자체의 힘으로 복구할 생각을 하여야 하며 그런 관점에서 이미 세워놓은 계획이라도 조성된 정황에 맞게 잘 검토해볼 필요가 있다고 말씀하시였다. 그리하여 국가계획위원회에서는 명년도에 복구신설할 대상들을 전반적으로 다시 검토하였는데 이번에 일부 대상들을 명년도계획에서 조절할것을 제기하였다. 그런데 그 대상은 생각밖에 너무도 많았다.
이것은 또다른 하나의 편향이 아닌가?
외국의 원조에 환상을 가져서도 안되며 그렇다고 하여 원조를 믿을것이 못된다고 하면서 이미 세워놓은 복구계획을 대폭 조절하여서도 안될것이였다.
그이께서는 깊어가는 이밤에도 이 문제를 놓고 끊임없이 사색을 기울이시였다. 시름과 걱정이 그이를 괴롭히였다.
그이께서는 천근만근의 무게가 실린듯 전에없이 어깨가 무거워지고 가슴이 답답하여 창문을 활짝 열어놓으시였다.
잔자누룩한 정적속에 뒤산 소나무숲을 스치는 바람소리와 울타리밖 두릅나무가 자라는 샘물터에서 샘치물이 돌돌 흘러내리는 소리가 류달리 깊어가는 가을밤의 정취를 돋구어주었다.
한동안 사색에 잠겨 창문가에 서계시던 그이께서는 문득 바로 여기 건지리 숙소에서 우리 당 제6차전원회의 보고를 집필하시던 그 여름밤을 회상하시였다.
그때도 전후복구건설의 운명과도 잇닿은 우리 당 경제건설의 기본로선을 구상하시며 깊은 사색에 잠기군 하시였다. 그이께서는 허리띠를 졸라매고 복구건설의 간고한 길, 전인미답의 그 길을 헤쳐나가는것이 여간 어렵지 않으리라는것을 그때 벌써 내다보시였다. 그러자 지금처럼 이렇게 예상치 않았던 뜻밖의 엄청난 난관이 앞에 막아설줄은 몰랐다.
그이께서는 책상앞으로 다시 다가와 계획조절대상들을 하나하나 따져보시였다. 특히 그이의 우려를 자아내는것은 흥남비료공장에 질안비료생산계통을 신설하는 문제를 뒤로 미루는것이였다.
이미 쏘련측에서는 흥남비료공장에 10억루블의 원조몫으로 질안비료생산계통을 새로 신설하여줄것을 약속하였었다. 최일만을 비롯한 중공업성의 일부 일군들은 질안이 류안보다 훨씬 전망이 좋다고 환성을 올리면서 질안생산시설을 앉히는데만 열을 올리고있었다.
국가계획위원회에서는 올해에 준비를 빈틈없이 했다가 명년 한해동안에 질안비료생산계통을 와닥닥 건설할것으로 타산하고 전망적인 비료생산계획도 맞추었었다. 그런데 이번에 국가계획위원회에서는 질안비료생산계통 신설을 뒤로 미루었고 비료생산계획도 그에 따라 조절하여 안을 제기한것이였다.
김일성동지께서는 쏘련방문시에 쏘련측 국가계획위원회 일군들과 여러 차례 실무회담을 하여본 정준택이 원조분으로 질안비료생산계통을 건설하여주겠다는 그 약속이 언제 실현될지 명백치 않다는것을 확신하고 그런 조절안을 제기하지 않으면 안되였다는것을 충분히 리해하시였다. 하지만 그렇다고 하여 그런 의견에 선뜻 동의하실수는 없었다. 그이의 고충이 바로 여기에 있었다.
분계연선지구 농민들이 비료가 모자라 농사를 제대로 짓지 못한다고 보고하던 김일의 안타까와 하던 목소리, 풀죽을 먹으면서도 오히려 맛있다고 말하던 사리원교외의 병철이네 오누이의 목소리가 아프게 귀전을 두드리였다.
방문을 활짝 열어놓았으나 답답한 가슴은 조금도 시원하게 풀려지지 않았다. 밤은 소리없이 깊어갔으나 잠은 오지 않고 온갖 시름과 걱정만이 밀물처럼 가슴속으로 겹겹이 밀려들었다.
김일성동지께서는 방문으로부터 흘러나오는 불빛을 밟으며 좁은 뜨락을 지나 대문밖에 나서시였다.
높은 지대에 자리잡아서인지 바깥은 몹시도 선선하였다. 보석을 뿌려놓은듯 무수한 별들이 유난히 선명하게 반짝이고있었다. 우중충한 산그림자가 깔리여 류달리 깊어보이는 골짜기에서 불어오는 한줄기의 서늘한 바람이 그이의 반군복상의자락을 조심스럽게 흔들었다. 달빛아래 명상에 잠긴듯 고요히 드러누워있는 앞산의 소나무숲도 귀전을 스치는 한줄기 바람결도 가을밤의 향취를 돋궈주는 샘물소리도 남쪽으로 탁 트인 골짜기의 자름자름한 서덜밭들과 농가들도 그이께서는 마치 처음 보고 듣고 느끼시는것처럼 더없이 소중하게 가슴에 젖어들었다.
원쑤들은 이 귀중한 조국강산을 불모의 페허지로 만들려고 미쳐날뛰였지만 우리는 기어이 조국의 촌토를 굳건히 지켜냈고 이제 세상에서 누구도 가보지 못한 력사의 지름길을 내달려 이 나라를 자자손손 번영하는 지상락원으로 일떠세우리라.
그이께서는 미제를 력사상 처음으로 내리막길로 처박은 우리 인민의 무궁무진한 힘을 굳게 믿으시였다.
그러자 또다시 국가계획위원회가 제기한 계획조절문건에 생각이 미치시였다. 그이께서는 계획을 조절하기로 한 대상들의 중요성으로 보아 대부분 뒤전으로 밀어놓아서는 안되겠다고 확신하시였다.
자정도 훨씬 지난 깊은밤 그이께서는 계획조절문건표지에 활달한 필치로 의미심장한 네글자를 남기시였다.
《다시 검토》
정준택은 이른 아침의 서늘한 기운이 풍기는 룡흥리골안의 주차장에서 불룩한 문서가방을 옆구리에 끼고 서성거리고있었다. 굵은 검정테의 안경알속에서 발끝만 내려다보는 사색어린 쌍가풀눈과 높은 이마에 가로 건너간 한줄기의 주름살만이 그의 내심에서 일어번지는 심각한 번민과 고뇌를 드러내보이고있었다.
(이제라도 돌아가는것이 옳지 않을가?)
그의 머리속에는 이런 생각이 벌써 몇번씩이나 칼끝처럼 예리하게 파고들었으나 그는 용단을 내리지 못하고있었다.
지금 그가 옆구리에 끼고있는 불룩한 가방에는 김일성동지께 올릴 계획문건들이 들어있었다. 그이께서는 며칠전에 국가계획위원회가 쏘련의 원조로 복구신설할 일부 대상들을 계획에서 조절할것으로 타산하고 제기한 안을 보시고 그것을 다시 검토할데 대한 가르치심을 주시였다.
정준택은 큰 충격을 받았다. 쏘련의 원조를 받는데서 난관이 제기된다고 하여 계획을 많이 조절할것으로 타산한것은 그이의 의도와는 심히 어긋나는것이였다. 그는 심각한 자책속에 조절안을 거듭 검토하였다. 해당 일군들과 협의도 자주 하였다. 그 과정에 쏘련의 원조가 당장 미치지 않는다 해도 많은 대상들을 능히 자체의 힘으로 일떠세울수 있다는 확신을 가지게 되였다. 그는 자신이 한 나라의 계획사업을 책임진 일군으로서 얼마나 경솔하게 판단하고 처신하였는가를 심각히 뉘우치지 않을수 없었다. 그이께서 또 걱정을 하시게 하였다는 자책으로 그는 잠조차 제대로 이루지 못하였다.
그런데 몇가지 대상에서만은 끝끝내 확신을 가지지 못하였다. 그중의 한 대상이 바로 흥남비료공장에 질안비료계통을 신설하는 문제였다.
정준택은 이 며칠동안 자체로 질안문제도 풀고 비료생산목표도 조절하지 말자고 여러가지로 검토하고 방도를 모색하였으나 종시 출로를 찾지 못하였다.
(어떻게 할것인가?)
정준택은 이 한가지 생각으로 가슴을 태웠다.
그는 식량생산과 잇닿은 비료생산계획을 조절하겠다고 제기한것이야말로 하나의 범죄행위와도 같은것이라고 자신을 채찍질하였다.
그런데 현실적으로 질안계통신설이 지연되면 높이 세운 비료생산목표를 점령하기가 어려운것도 엄연한 사실이였다. 그런 불확실한 계획을 세웠다가 미달이라도 하게 되면 그것이 농업생산에 미치는 후과는 실로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로 클것이다.
정준택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있을 때 한윤호가 슬그머니 그에게 귀띔하였다.
《흥남비료공장 복구문제로 쏘련측조사단이 방금 함흥에 도착하였다고 합니다.》
쏘련측조사단이 도착하였다는 소식자체도 예상밖의것이였지만 한윤호가 쏘련측의 원조문제에 대해서 매번 민감하게 반응하는것이 정준택으로서는 더구나 놀라운것이였다.
《그래요?》
정준택은 미심쩍은 눈길로 한윤호의 세모진 눈을 웅시하였다.
《질안계통공사를 확정하려고 최부상이 어제 함흥으로 내려갔습니다.》
《그 사람이야 중공업성사람이 아닙니까?》
정준택은 흥남비료공장복구때문에 화학건재공업상인 백홍건이 함흥에 내려가있다는 말을 들었지만 중공업성 부상인 최일만이 그리로 내려갔다는것은 처음 듣는 소리였다.
《중공업성에서는 류화철을 보장하기 힘드니까 류안대신 질안에 기대를 거는거지요.》
정준택은 그제야 짐작이 갔다. 류안비료의 원료인 류산은 류화철에서 나오는것이다. 그런데 중공업성에서는 류화철광이 고갈되여간다고 하면서 류산생산계획을 조절해줄것을 이미전부터 제기하고있었다. 그러니 중공업성으로서는 류안비료대신 질안비료만 생산할수 있다면 그것처럼 다행스러운 일은 없을것이다.
《질안에 기대를 겁시다. 질안문제는 이미 비준된것이고 또 그것을 잘못 처리하면 쏘련측의 오해를 살수 있습니다.…》
한윤호가 은근히 오금을 박았다. 그것은 질안문제를 놓고 동요하는 정준택에 대한 일종의 경고이기도 하였다. 그러지 않아도 질안을 계획화하는 문제때문에 그와 한윤호는 여러 차례 마찰을 일으켰던것이다.
머리를 건뜻 추켜들고 스적스적 틀지게 걸어나가는 한윤호에게서는 금시 서리가 돋칠듯 랭기가 풍기고있었다. 정준택은 그러지 않아도 자기가 쏘련방문결과에 대한 강연을 자기 말로 할 때 은근히 쏘련의 원조를 시비했다고 한윤호가 자주 상기시키는 당중앙의 요직에 있다는 그 사람이 자기를 매우 좋지 않게 보고있다는것을 그전부터 잘 알고있는터였다.
(어쩌면 좋은가?)
쏘련의 원조를 시비한다고 걸고드는데 대해서는 그닥 두려울것이 없었다. 다만 그를 괴롭히는것은 수령님께서 다시 검토할데 대한 가르치심을 주신후에도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의연히 계획을 조절하자고 제기하는것이였다. 미흡한 계획이라도 둬두고 볼가 하는 생각이 얼핏 그의 뇌리를 스치였다.
그러나 그렇게 할수는 없었다. 그것은 더구나 충실치 못한 소행일것이다.
정준택은 계획작성에서 모든 자료와 수자들의 객관성과 정확성, 과학적인 담보 등을 가장 중요시하는 일군이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과학적인 담보에 문제가 있다는것을 뻔히 알면서도 책임회피를 하는것 같아 스스로 얼굴을 붉히기도 하였다.
(수령님을 찾아뵙자! 설사 내가 잘못생각하고 잘못 판단한것이라 해도 그이께 솔직히 말씀드리고 결론을 받자.)
그리하여 지금 정준택은 수령님께서 출근하실 때를 기다리며 주차장에서 서성거리고있는것이였다. 그는 옆구리에 끼였던 문서가방을 앞으로 돌려 그러안고는 자주 목을 빼들고 가루개언덕쪽을 바라보았다. 중앙기관들과 내각의 중요 부서들이 거지반 시안의 중심으로 옮겨간 지금도 그이의 집무실만은 전쟁때와 마찬가지로 여전히 룡흥리 갱도앞의 추녀낮은 단층벽돌집에 자리잡고있었다. 그이께서는 지금도 전화의 나날과 같이 멀리 교외에 있는 건지리산골마을에서 이곳 룡흥리의 집무실로 출근하시였다.
이윽고 가루개골안으로 들어서는 승용차발동소리가 들려왔다. 정준택은 옷매무시를 단정히 하며 승용차를 마중하여 달려갔다.
《정동무 왔소?》
김일성동지께서는 환히 웃으시며 정준택을 반갑게 맞아주시였다. 그이의 온몸에서는 신선한 산천의 정기가 풍기고있었다. 윤기가 반짝이는 승용차의 차체에서도 산천의 이슬이 그대로 내려앉은듯 물기가 번들거리였다.
정준택은 그이께서 안아가지고 오신 산천의 청신한 아침공기가 일시에 온갖 잡념을 날려버리고 번거롭던 머리도 차분히 정화시켜주는것만 같아 마음이 한결 개운해졌다.
《화학비료생산계획 조절문제때문에 왔습니다.》 정준택은 이른아침 그이를 찾아뵙지 않으면 안될 피치 못할 사정을 저으기 황송스러워하는 어조로 말씀드렸다.
《그래 생각해봤소?》
그이께서 기대를 가지고 물으시였다. 그 기대에 어긋나는 대답을 드려야 할 정준택의 가슴은 벌써부터 조여들었다.
《그동안 많이 생각해보았는데 아무래도 자신이 없습니다.》
정준택의 목소리는 가늘게 떨리였으나 발음은 똑똑하였다.
《자신이 없다?》
그이께서는 퍼그나 놀라는 눈으로 정준택을 바라보시였다.
《아무리 타산해보아도 흥남비료질안계통은 당장 조업하기가 힘들것 같습니다.》
정준택은 그이의 눈길을 침착히 받아들이며 낮으나 또렷이 말씀드렸다.
그이께서는 더는 아무 말씀도 하지 않으시고 승용차옆을 거니시였다. 이어서 그이께서는 그 어느때보다 무거운 시름에 잠겨계시는것 같았다.
정준택은 그이께서 심려하시게 하였다는 자책으로 죄스럽기 그지없었다.
《그러니 비료계획을 꼭 조절해야 하겠다는거겠소?》
그이께서는 걸음을 멈추고 다시 물으시였다. 이것은 정준택이 그이께 올린 대답이 그이의 기대에 몹시 어긋났다는것을 의미하고있었다.
정준택에게는 마치도 귀전을 스치는 바람결도, 잠을 깬 새들도 일제히 숨을 죽인것만 같았다.
그이께서 무겁게 옮겨놓으시는 발자국소리만이 이른아침의 정적을 깨뜨리고있었다.
정준택은 그이의 걱정을 덜어드릴 대답을 올리고싶었다. 그러나 그렇게 할수는 없었다.
한가정을 꾸려나가는데서도 시름과 걱정거리가 꼬리잡이를 하는데 옹근 한나라의 살림살이를 운영해 나가는데서 항상 기쁨으로 되는것만 그이께 보고드릴수는 없었다.
정준택에게 가장 괴롭고 고통스러운 때가 있다면 그이께 걱정으로 되는 보고를 드릴 때였다.
그러나 정준택은 자신의 괴롬과 고통을 덜기 위해 그런 순간들을 결코 외면하거나 피하려고는 하지 않았다.
《계획을 조절해야 할것 같습니다.》
정준택은 자신으로서도 몹시 불손하게 들리는 그런 대답을 다시 올리지 않을수 없었다.
《다른 무슨 방도가 없겠소?》
그이께서 다시 물으시였다.
《현재로서는 없습니다.…》
정준택의 목소리는 떨리였다. 그는 문서가방을 앞가슴에 붙안은채 그이의 결론이 있기만 기다렸다.
《하긴 먹는 문제를 남에게 의존해서는 안되지.》
그이께서는 혼자 말씀처럼 조용히 뇌이시였다.
정준택은 그이의 사색을 깨칠가 저어하면서 여전히 긴장한 자세로 서있었다.
《인민들의 먹는 문제를 빨리 풀자면 흥남비료공장의 파괴된 류안계통부터 시급히 복구해야 하겠소. 남이 질안계통을 건설해줄것만 기다릴수 없지. 정동무가 문제를 잘 제기했소.》
마침내 그이께서는 걸음을 멈추고 결론하시였다. 그이의 얼굴에 환한 미소가 피여올랐다. 봄날의 해빛같은 그 미소는 정준택의 마음 한구석에 잠시나마 무겁게 갈앉았던 그 우려와 불안을 한순간에 말끔히 씻어내리였다.
정준택의 눈에 눈물이 핑 돌았다.
《내가 아무래도 함흥지구에 내려가봐야 할것 같소. 현지에 가서 흥남비료공장을 비롯하여 중요 공장, 기업소들의 복구문제를 토론해보고 계획조절문제도 락착지읍시다.》
그이께서 정준택을 바라보며 의논조로 말씀하시였다.
《함흥지구에 내려가면 며칠 묵으셔야 하겠는데 거기에는 아직 변변한 숙소 하나 없습니다.》
《일없습니다. 전쟁때에는 숙소가 있어서 현지에 나가군 했습니까.》
《수령님께서는 천천히 내려오셔도 됩니다. 이번에는 제가 먼저 함흥지구로 내려가 실태를 알아보겠습니다. 백홍건동무도 이미 내려가있습니다.》
《그러지 말고 며칠 기다렸다가 나와 같이 갑시다.》
《수령님!》 정준택의 목소리가 절절하게 울리였다. 《이제부터라도 제가 먼저 실태를 료해하여 과학적이고 현실적인 자료를 보고드리겠습니다.》
《허허… 그러니 꼭 먼저 내려가 알아보겠단 말이지. 정 그렇다면 말리지 않겠소. 가되 승용차를 타고가도록 하오. 거리는 좀 멀어도 승용차편이 편리할수 있지.》
《그렇게 하겠습니다.》
그날 정준택은 승용차를 타고 함흥을 향해 출발하였다. 그가 흥남비료공장 북문앞에 차를 세운것은 저녁녘이 다 되여서였다. 북문에서 비료공장구내를 대충 둘러보아도 공장이 황철이나 강선제강소 못지 않게 어떤 의미에서는 그보다 더 혹심하게 파괴되였다는것이 알렸다. 전쟁전에 여러번 와본 공장이였으나 지금은 모조리 파괴되여 어디가 어딘지 알수 없었다.
정준택은 공장정문을 지켜선 경비원에게 공장사무실이 어디에 있는가를 물어서야 북문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는 2층 청사를 찾을수 있었다.
그것은 전쟁전에도 비료공장사무실로 쓰던 건물이였다. 전쟁때 파괴된것을 다급히 복구한듯 아직도 폭격의 흔적들이 많이 남아있었다.
그가 현관에 들어설 때까지도 청사에서는 사람그림자 하나 볼수 없었다. 정준택은 두런두런 말소리가 들리는 어느 한 방문을 열었다.
《아니. 위원장동무가 어떻게...》
어둑시그레한 방에서 누구인가 소리쳤다. 심한 근시안인 정준택은 한동안 시신경을 긴장시켜서야 그가 백홍건이란것을 알아보았다. 방안에는 백홍건이 말고도 또 한사람이 있었다. 그 사람은 주사기를 들고서서 불청객을 시답지 않는 눈길로 바라보고있었다. 정준택은 그제야 백홍건이 치료를 받고있는중이란것을 알았다. 백홍건은 정준택을 반기며 인상적인 커다란 눈에 미소를 담고 줄창 웃었으나 얼굴에 비낀 컴컴한 병색만은 감출수 없었다.
《몸이 좋지 않은 모양이구만....》
정준택이 걱정했다.
《아, 아무것도 아닙니다. 이 사람들이 공연히 떠들어가지고… 허허허.》
백홍건이 주사기를 든 사람을 흘겨보았으나 그 눈에서는 여전히 웃음발이 가셔질줄 몰랐다.
《그런데 주인들은 왜 보이지 않습니까?》
《2층 지배인실에서 회의를 하지요.》
《그럼 난 내려왔던 걸음에 현장부터 돌아보겠으니 상동문 치료를 받으시오.》
정준택이 이렇게 말하고 방을 나서자 백홍건이 따라나섰다. 정준택이 만류하였으나 그는 막무가내였다. 정준택은 어쩔수 없이 백홍건의 안내를 받지 않을수 없었다.
한㎡당 한개의 폭탄이 떨어졌다고 하는 공장구내는 그사이 퍼그나 정리를 했다고 하지만 아직 오솔길 같은 통로만이 겨우 나있을뿐이였다. 가로 넘어진 철탑과 뒤엉킨 고압선으로 하여 걸음을 옮겨놓을수 없는 변전직장으로 간신히 헤쳐들어갔다. 형체없이 파괴된 변압기가 운모쪼각들이 흩어진 땅우에 잔해를 드러내보였다. 기울어진 전주우에 철심이 엿가락처럼 녹아붙은 변압기가 위태위태하게 매달려있었다.
《몹시 파괴되였군.》
정준택이 비통한 어조로 말하였다.
《쏘련측조사단은 현장을 돌아보고 공장을 다른 곳에 새로 짓는것이 좋겠다고 했습니다.》
백홍건이 땅바닥에 깔린 운모쪼각을 한웅큼 쥐고 한참 들여다보다가 화가 난듯 홱 쥐여뿌리며 말하였다.
《그래요?》
《이번에 쏘련이 원조분으로 여기에 질안계통을 새로 건설해주게 되여있지 않습니까. 그래서 종전의 류안계통은 다 집어던지고 제창 질안계통부터 새로 건설하자는거지요. 지금 진행되는 협의회에서도 이 문제를 토론하고있습니다.》
《류안계통이 다 파괴되였기때문에 집어던지겠다는겁니까?》
《그것만 아니지요. 류안은 전망이 없다는것입니다. 류안비료의 기본원료인 류화철이 나오는 만덕광산은 갱도들이 침수되여 언제 광석이 나올지 막연하고 산곡광산은 매장량이 바닥이 났다는겁니다.》
《산곡광산이?》
정준택은 저으기 놀랐다.
《예.》
《근거가 있는 말입니까?》
정준택이 날카로운 어조로 물었다. 두꺼운 안경알 저쪽에서 쌍까풀진 우묵한 눈이 상대방을 뚫어지게 바라보고있었다.
《최일만부상이 바로 그 문제때문에 내려와있습니다. 쏘련측조사단에 지질전문가도 있는 모양인데 최부상은 지금도 그 사람들한테 가있습니다.》
두사람은 한동안 말없이 걸었다. 변류직장에 들어선 그들은 매캐한 검은 연기가 여기저기 피여오르는것을 보았다.
《변류기를 건조시키고있습니다.》
백홍건이 설명했다.
《그러니 변류기복구에 착수한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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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산님의 댓글
강산 작성일
(위에서 계속)
《그러니 변류기복구에 착수한셈입니까?》
《착수했습니다. 질안만 쳐다보며 들떠있지 말고 당장 복구할수 있는것부터 복구하자고 내밉니다.》
《그렇다면 자체의 힘으로 변류기를 몇대나 복구할수 있습니까?》
《형체가 남아있는 21호 변류기를 먼저 복구하고 련달아 4대를 복구하자고 합니다.》
정준택은 자기가 질안이냐 류안이냐 하면서 제기만 하고있을 때 백홍건은 벌써 복구현장에 내려와 류안계통복구에 본격적으로 달라붙은것을 보고 은근히 놀랐다. 그러지 않아도 정준택은 백홍건이 건재에 대해서는 별반 알지 못하지만 강남땅에 큼직한 요업공장을 일떠세웠을 때 백홍건이야말로 믿음직한 일군이라고 생각해오고있었다. 지금 그는 비료공장복구현장에 내려와보고 자기의 기대가 어긋나지 않았다는것을 다시 확인하였다.
정준택의 머리속에 쏘련이 질안계통신설을 질질 끌어도 류안으로 능히 그 몫을 메꿀수 있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이 차차 자리잡히기 시작하였다.
그들은 다시 이그러진 극판들이 불성사납게 널린 넓은 전해직장을 거쳐 3,000㎥가스탕크복구장으로 향하였다.
《탕크는 없어도 탕크를 무었던 철판들은 있으니 저것들을 잇고 때고 붙이고 하면 탕크복구도 능히 우리 힘으로 할수 있을것 같구만....》
정준택이 혼자소리처럼 말하고 넌지시 백홍건을 쳐다보았다.
《복구할수 있지요. 이번에 복구할 때에는 종전 같은 리베트방법으로 하지 않고 용접방법으로 하자고 합니다.》
《하긴 그것이 앞선 방법이지.》
그들은 합성직장 합성탑앞에서 발걸음을 멈추었다. 이 합성탑이야말로 류안비료생산의 가장 핵심적인 부분이라고 볼수 있었다. 그런데 그 어느 부분보다 이 합성탑이 많이 파괴된것이 문제였다. 그들은 아무 말없이 처참하게 파괴된 합성탑앞에 오래도록 서있다가 무겁게 발걸음을 떼였다. 류안직장을 지나 비료창고앞에 이르렀다. 적들의 폭격에 불에 타다가 남은 비료가마니들이 창고구석에 쌓여있었다.
《전쟁이 시작된 그해 8월 1일 적들의 폭격때 이곳에 있던 2만여매의 가마니에 불이 당겨 한주일동안 탔습니다. 함주벌농민들은 그것을 바라보며 인제는 농사를 다 지었다고 낫과 호미를 내던지며 울었습니다.》
백홍건이 비분에 찬 어조로 말하였다. 높다란 창고천정과 바람벽에는 아직도 그날의 그을음이 시꺼멓게 그대로 흉하게 얼룩덜룩 남아있었다.
《비료없이는 농사를 짓지 못하니 그럴수밖에, 농민들을 생각해서라도 하루빨리 비료를 생산해야 겠는데...》
이렇게 말하는 정준택의 눈앞에 우리 당의 경제건설기본로선에 의견이 있다고 하던 흐루쑈브의 희뿌연 얼굴과 식량은 가져가라고 하면서도 비료공장설비납입문제는 기어코 뒤로 가져가던 이와노브의 능청스러운 얼굴이 번갈아 떠올랐다.
《내생각에는 질안도 중요하지만 류안도 그에 못지 않게 중요한것 같습니다. 아니, 당면해서는 류안이 더 중요하다고 볼수 있습니다. 류안계통은 혹심하게 파괴되긴 했지만 우리 땅, 우리 눈앞에 있는것이고 질안은 멀리 남의 땅에 있는것으로 실지 언제 우리한테 현실로 전환되겠는지 두고봐야 알 일이 아닙니까? 당면한 비료생산예비는 질안이 아니라 류안에 있다고 보는데... 그렇지 않습니까?》
정준택은 의미심장한 표정을 짓고 백홍건을 주시했다.
언제 보나 웃는 인상인 백홍건의 얼굴에 갑자기 모진 아픔을 참는듯 고통의 그림자가 비끼였다.
이마에 굵은 땀방울이 맺히였다.
《몸이 말째지 않습니까?》
《아, 아무것도 아닙니다. 사실 질안을 바라보고 계획을 세운건 그리 잘된것 같지 않습니다.》
백홍건이 짜내듯 말했다.
《얼굴색이 좋지 않습니다.》
정준택은 백홍건의 말은 들으려 하지 않고 컴컴하게 질린 그의 얼굴색만 불안한 눈길로 지켜보았다.
《원 별소릴 다 합니다. 내 얼굴은 원래 그렇게 표정이 풍부하답니다. 오죽하면 젊어서 한때에 영화배우까지 해볼 생각을 했겠습니까.》
백홍건은 끙끙 신음소리를 내면서도 희떠운 소리를 하였다.
《상동무의 그 배우기질은 후에 전문가들이나 평가하게 합시다. 그러나 내가 걱정하는건 상동무의 건강이요. 안정할걸 괜히 의사의 권고를 뿌리쳤단 말입니다.》
정준택이 백홍건을 나무랐으나 상대방은 그 말을 전혀 타내지 않고 류안문제로 다시 화제를 돌렸다.
《우린 류안을 홀시할수 없습니다. 질안만 보고 세운 계획은 확실히 잘되지 못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질안을 보고 세운 계획을 뒤로 가져가고 그대신 류안으로 보충할수 없겠습니까?》
정준택은 백홍건의 이야기에 끌려들었다.
《토론해보겠습니다.》
정준택은 그이상 묻지 않고 걸음을 다그쳤다. 백홍건에게 주사를 놓아주던 의사를 다시 찾아 그한테 백홍건을 맡겨 치료를 받게 하기 위해서였다. 그들이 정문쪽으로 나왔을 때 한대의 승용차가 곧바로 그들한테로 다가왔다.
《위원장동무가 내려왔다는 말을 듣고 찾아왔습니다.... 선기가 날 때인데 덥기란... 휴ㅡ》
승용차에서 내린 최일만이 눈덩이같이 흰 손수건으로 굵은 목덜미의 땀을 닦아내며 떠들었다.
정준택은 걸음을 멈추고 최일만이 들고온 용건을 들어보려고 귀를 기울였다. 백홍건은 최일만이 말하려는것을 벌써부터 다 알고있는듯이 그에는 별반 주의를 돌리지 않았다.
《방금 쏘련측조사단성원으로 와있는 지질전문가를 만나보았습니다. 씨비리의 웨르호얀스크에서 전도유망한 유색광물을 찾아내여 유명해진 실력자지요. 그 사람이 우리 나라의 류화철매장량에 대하여 분석하여보았는데 우리의 견해와 일치합니다. 말하자면 전망이 없다는거지요. 흥남에 류산을 보장해주던 산곡광산의 류화철매장량도 바닥이 났다는것입니다. 만덕광산은 다 침수돼서 당장은 류화철을 생산할수 없는 형편이고...》
최일만은 자기앞에 있는 두사람이 자기보다 직급이 높았지만 그에는 전혀 구애되지 않고 줄곧 혼자서 떠들었다. 어찌보면 속에 묻어두는것이란 없이 아무말이나 탕탕 잘하는 사람 같았으나 부어오른듯 한 두툼한 눈등밑에 감춰진 두눈이 음험한 빛을 발산하며 앞에 선 두사람을 이따금씩 쏘아보군 하는것은 이사람이 결코 만만히 볼 사람이 아니란것을 암시해주고있었다.
《그러니 부상동문 류안이 전망이 없다는겁니까?》
정준택이 따지듯 물었다.
《그렇지요. 전망이 없습니다.》
최일만은 이 말을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내뽑았다.
《미안하지만 부상동무차로 이 상동무를 병원에 실어다줄수 없겠습니까?》
정준택이 최일만에게 물었다. 최일만은 급기야 대화가 왕청 같은데로 번져지자 어리뻥해서 얼른 대답을 못했다. 정준택은 백홍건의 건강상태가 매우 나쁘다는데 대하여 다시 상기시키지 않을수 없었다.
《그렇게 하지요. 그거야 어렵겠습니까.》
최일만의 말이 떨어지자 정준택은 한시름이 놓이는듯 자기 차를 찾기 시작하였다.
《어데 급히 갈데가 있습니까?》
백홍건이 의아해서 정준택에게 물었다.
《산곡으로 가겠습니다.》
《산곡으로?》
백홍건이도 놀랐지만 최일만은 더 놀랐다.
《산곡광산의 류화철이 동이 났는가 내 눈으로 직접 확인해보겠습니다. 겸하여 만덕광산에도 가보고...》
《비료때문에 여기 내려왔던 김일동지도 며칠전에 만덕광산에 들렸다가 산곡광산에까지 가보겠다고 떠났습니다. 류화철전망이 어떤가 직접 확인해보자는거지요.》 백홍건의 말이였다.
정준택은 몹시 놀랐다. 비료공급문제가 얼마나 걱정되였으면 농업부문을 맡아보고있는 김일이 만덕과 산곡광산에까지 가보겠다고 나섰겠는가.
정준택은 새삼스럽게 자기 할바를 다 하지 못하고있는 자신을 심각히 돌이켜보지 않을수 없었다.
《오늘밤은 쉬고 래일 떠나십시오.》
백홍건이 권하였다.
《내 걱정은 마시오. 승용차가 있는데 무슨 걱정입니까. 최부상동무는 인차 이 상동무를 병원에 데려다주시오.》
정준택은 마지막으로 이렇게 부탁하고나서 승용차에 올랐다.
최일만의 큼직한 입가에 고랑처럼 깊이 패운 두줄기의 주름살이 푸들푸들 경련을 일으켰다. 정준택은 그에게 조금도 기분에 거슬리는 말을 하지 않았지만 어쩐지 최일만은 그에게서 뒤통수를 호되게 얻어맞은 기분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