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편소설 번영의 길 제20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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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려한 양장을 한 젊은 녀서기가 문을 열어주자 한윤호는 주밋거리며 최일만의 방으로 한걸음 내짚었다. 그러나 웬일인지 그전 같으면 짧은 두팔을 머리우로 번쩍 추켜들고 떠들썩하며 맞아줄 방주인이 보이지 않았다.
《쉬-》
불현듯 김이 빠지는듯 한 거센 소리가 들리기에 한윤호는 원탁이 놓인 구석쪽을 돌아보았다. 최일만이 전후시기에 널리 류행된 커다란 《오리온》라지오앞에 앉아서 라지오조절기를 돌리고있었다.
한윤호가 무엇이라고 말을 걸려고 하자 최일만은 대뜸 조용하라고 손가락을 입술에 갖다대였다.
최일만은 잔뜩 신경을 도사리고 조절기를 조금씩 돌리였다. 그에 따라 참새떼의 지저귐소리같이 여러 나라 말이 엇바뀌기도 하고 뒤섞이기도 하였으며 파장신호등의 파르스름한 불빛이 커졌다 작아졌다 하면서 눈을 시그럽게 하였다.
한윤호는 류달리 선명한 그 불빛을 호기심어린 눈으로 바라보며 묵묵히 서있었다.
《중대보도요, 중대보도!》
마침내 어디엔가 파장을 맞춘 최일만이 허리를 쭉 펴며 자신만만하게 선포하였다.
라지오에서는 한윤호가 알지 못하는 외국노래가 흘러나오고있었다.
《무슨 중대보도입니까?》
한윤호는 몹시 궁금하였다.
《몇시간전에 박부위원장이 알려 왔소. 중대보도가 있다는걸 말이요. 국장동무가 이 소식을 누구보다 먼저 알아야 하겠기에 이렇게 불렀소.》
최일만이 초조한 기분으로 손목시계를 내려다보았다. 그러면서도 정작 무슨 보도인가 하는것은 말하려고 하지 않았다. 새로 지은 홈스빵 양복을 쭉 빼입고 가죽장화를 신은 최일만은 팔짱을 끼고 기세등등해서 주홍빛주단우로 성급하게 오락가락하였다.
《이제 이 소식은 <로동신문>을 비롯한 모든 신문들에 일제히 대서특필될거요. <로동신문> 호외로도 나간다 하오. 비행기로 호외를 뿌린다는 말도 있소. 두고보오. 전국이 환성을 올릴거요. 환성! 아!》
흥분에 휩싸인 최일만은 끊임없이 구미를 돋구었으나 여전히 중대보도가 무엇인가 하는데 대해서는 비치지 않았다. 정세에 어둡고 감정이 무딘 동료를 깜짝 놀래워보자는 심산이 분명하였다.
최일만이 걸음을 멈추고 라지오의 음향조절기를 돌리자 갑자기 노래소리가 높아지더니 불시에 뚝 끊어졌다. 두사람은 긴장하였다. 라지오에서는 보도시간을 맞추는듯 잠시 침묵이 흘렀다.
이윽고 침묵을 깨뜨리며 방송원의 높은 목소리가 방안을 꽉 채웠다.
《여기는 모스크바방송국입니다. 지금부터 쏘련정부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부대표단간의 회담에 관한 쏘련-조선 공동콤뮤니케를 보내드리겠습니다.》
한윤호는 온 신경을 다 모아 귀를 강구었다. 최일만은 의연히 방안을 오락가락하며 이따금씩 한윤호의 얼굴을 물끄러미 들여다보군 하였다. 그는 이미 콤뮤니케의 내용을 알고있는것이 분명하였다.
칼칼한 위엄이 풍기는 한윤호의 강마른 얼굴에 서서히 놀라는 빛이 비끼기 시작하였다. 입귀가 아래로 처져서 괴벽하고 심술이 있어보이는 최일만의 꾹 다문 입술에도 감출수 없는 미소가 떠돌고있었다. 그는 지금 당장이라도 폭발할것 같은 흥분을 가까스로 눅잦히고있었다.
《어떻소?》
방송원이 콤뮤니케를 다 방송하자 한윤호앞에 우뚝 멈춰선 최일만이 참지 못하고 물었다. 콤뮤니케를 들은 동료의 감상을 들어보자는것이였다.
《수풍발전소, 성진제강소, 흥남비료공장 등을 모두 쏘련이 맡아서 복구해주겠다는게 아닙니까?》
한윤호가 반문하였다. 최일만은 아직도 무엇인가 석연치 못하여 확인해보려는 동료의 그 의심병에 화가 난다는듯 한윤호한테 위협하는투로 삿대질을 해대였다.
《그렇소. 쏘련이 우리 나라 중공업의 핵심적인 중요 공장, 기업소들을 직접 맡아서 복구해주겠다는거요. 그뿐인가? 대중소비품도 대대적으로 무상원조해주겠다지 않소. 쏘련이야말로 우리 인민의 진정한 원조자요. 그렇지 않소?》
한윤호도 대답대신 머리를 끄덕거리며 기꺼이 동의를 표시하였다.
《훌륭한 콤뮤니케가 채택된것은 큰 성과요. 우리한테는 이보다 큰 경사가 없지.》
라지오에서는 쏘련의 광활한 대지와 그속에서 자유를 누리며 화목하게 사는 쏘련사람들의 행복상을 찬양하는 노래가 장쾌하게 흘러나왔다. 그것은 당시 우리 나라에서도 많이 불리우던 노래였다.
최일만은 굵은 탁성으로 노래를 따라부르며 거의나 춤추듯이 책상으로 걸어갔다. 그리고는 책상밑에 허리를 구부리더니 워드까병 하나를 꺼내들었다.
《오늘의 경사를 축하해서 한잔 듭시다. 자, 앞상에 나앉소. 가만, 안주도 있어야지. 귀빈이 오셨는데…》
기분이 둥 뜬 최일만이 능청을 떨었다. 그러자 젊은 녀서기가 기다리고나 있은것처럼 쟁반에 간단한 안주를 받쳐들고 경쾌한 걸음걸이로 들어왔다. 최일만이 자기와 녀서기와만 통하는 그 어떤 신호를 한것이 틀림없었다.
고정한 한윤호는 매혹적인 야릇한 미소를 입가에 찰찰 흘리며 할낏거리는 녀서기의 눈길을 등뒤에 바투 의식하자 갑자가 주눅이 들어 눈길을 떨구며 몸을 옹송그리였다. 최일만과 이 녀서기가 보통사이가 아니라는 여러가지 추문을 듣고있는 한윤호는 그 당자들을 눈앞에 보자 오히려 제편에서 어색해하며 몸둘바를 모르는것이였다.
한윤호는 녀서기의 통좁은 스카트자락이 자기의 몸에 닿기라도 할세라 한쪽으로 비껴앉으며 부자연스럽게 헛기침을 하였다.
녀서기는 한윤호앞의 유리잔에 술을 넘치게 붓고는 소리없이 돌아서나갔다.
《누구도 들여보내지 마오.》
최일만이 녀서기의 등뒤에 소리쳤다. 녀서기는 대답대신 뒤를 할낏 돌아보기만 하였다.
한윤호는 그 두사람이 말보다도 눈빛이나 얼굴표정으로 의사소통을 더많이 한다는것을 느꼈다.
《자, 들라구.》
최일만이 한윤호와 마주앉으며 술잔을 권하였다.
한윤호는 별로 내키지는 않았으나 주인의 성의를 생각해서 조금 마시는 시늉을 하였다. 그러거나 말거나 최일만은 자기앞의 술잔을 닁큼 들더니 단숨에 쭉 들이켰다.
《내가 뭐라고 하던가? 조선사람들도 쏘세지, 꼴바싸, 스메따나, 햄을 먹고 번쩍거리는 구두를 신고 다닐 때가 올것이라고 했지. 자 꼴바싸를 집소.... 우리도 쏘련의 원조덕분에 잘 살게 된단 말이요.》
최일만은 술이 들어가기 바쁘게 기가 돋아서 떠들었다.
한윤호는 별 대꾸도 없이 앞에 놓인 술잔만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원래 말수더구가 적은 그였지만 취기가 돌면 더구나 말이 적어지군 하였다.
《왜 말이 없소?》
최일만이 볼부은 어조로 동료의 얼굴을 치떠보았다.
《좀 이상한게 있어 그럽니다.》
한윤호가 넌지시 비쳤다.
《무스게 이상하단거요?》
최일만이 봉의눈을 흡뜨며 물었다.
《쏘련이 복구해주겠다고 하는 중공업기업소들가운데 강선제강소가 없으니 말입니다. 강선기사장이 쏘련방문 대표단수원으로 따라가기까지 했는데...》
《강선제강소, 흥!》 최일만은 사납게 코김을 내불었다. 《그자들은 주제넘게 쏘련의 원조를 받지 않고 순수 제힘으로 복구하겠다지 않소. 실컷 해보라지. 제대로 되는가.... 그러나 흥남비료공장을 비롯한 중요한 공장, 기업소들이 살아있으니 크게 걱정할건 없소.》
《흥남에다 쏘련의 원조로 질안비료생산계통을 신설할것으로 보고 비료바란스를 맞춘것이 아주 잘되였습니다.》
한윤호는 저으기 만족한 기분으로 술잔을 기울이였다.
《보란 말이요. 내 말대로 하면 언제나 실수가 없소. 쏘련이 우리 나라에 없는 질안을 건설해주겠다니 얼마나 다행이요. 아, 질안, 질안... 전망이 없는 류안을 붙들고서는 아무 일도 할수 없단말이요.》
흥분한 최일만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더니 또다시 방안을 성급하게 거닐었다. 범잡은 포수마냥 얼마나 의기양양하여 발걸음을 옮겨놓는지 비좁은 목조가설건물이 움씰움씰하였다.
질안비료는 식물에 흡수가 잘되고 식물의 성장에 유익한 질소성분이 34%이상이나 되여 류안비료보다 그 질이 훨씬 좋다고 볼수 있었다. 더구나 질안비료의 중요한 원료인 질산은 공기중의 질소가 기본인 반면에 류안비료의 원료인 류산은 지하 깊숙이 매장되여있는 류화철을 기본으로 하여 얻고있었다.
최일만의 가장 큰 골치거리로 되고있는것은 류화철을 캐내고있는 만덕광산과 산곡광산이 전쟁기간 선광장이 혹심하게 파괴되여 생산이 어렵게 되였거나 매장량이 고갈되여 당장 페광해야 할 형편에 처한것이였다. 이런 때 쏘련이 흔한 공기만 있으면 되는 질안을 생산할수 있는 공장을 건설해주겠다는것은 그야말로 궁지에 몰린 최일만에게 구원의 손길을 뻗쳐주는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이제 우리 나라 정부대표단이 돌아오면 쏘련의 원조에 감사를 표시하는 군중대회와 기관, 기업소 종업원집회들이 성대하게 열릴거요. 지금 박부위원장이 작전하고있으니 틀림없이 그렇게 될거요. 조쏘친선이야말로 위대하고 영원한 친선이요. 이 친선이 있는이상 우리는 두려운것이 없고 어떤 난관도 다 이겨낼수 있소....》
술기운이 뻗쳐서인지 얼굴이 불깃해진 최일만은 끊임없이 호기를 부리였다.
한윤호도 흥분하여 독한 술을 연방 꿀꺽꿀꺽 마시였다. 최일만은 그것이 만족하여 방안이 들썩하게 웃었다. 한윤호도 얄팍한 입술에 미소를 그려붙이고는 흡족하여 담배를 꼬나물었다.
입귀로 담배연기를 푸실푸실 날릴 때마다 그의 세모진 눈이 가늘게 쪼프려지군 하였다. 환상적인 론조를 가장 싫어하는 무미건조한 한윤호였지만 이 순간에는 저으기 들뜬 기분으로 쏘련의 원조를 받아 수풀처럼 일떠서는 공장, 기업소들의 위용을 눈앞에 그려보는것이였다.
《국장동무는 역시 무시할수 없는 인재야. 학자가 다르거든.》 최일만이 느물거리며 느닷없이 칭찬의 말을 꺼냈다. 《전번에 국장동무가 당보에 정준택의 이름으로 써서 내보낸 그 글을 박부위원장이 아주 높이 평가했소. 나만 알고있는 비밀이긴 하지만...》
한윤호는 별다른 반응은 보이지 않았지만 랭철한 그도 이런 때 그런 칭찬을 받는것이 싫지는 않았다.
《내가 박부위원장한테 추천했는데 이번 정부대표단의 쏘련방문성과와 관련한 글을 또 한번 써야 할것 같소.》
《제가요?》
한윤호가 난색을 보였으나 최일만은 거기에 별로 개의치 않았다.
《이제 조직적으로 지시가 있을거요. 잘 써야 하겠소.》
최일만은 의미있게 싱긋 웃고는 책상앞으로 걸어가 자기 자리에 털썩 앉았다. 그리고는 책상우의 전화기를 끄당겨 전화번호판을 삑삑 돌리기 사작하였다. 한윤호와의 이야기는 끝난것이였다.
다음날 한윤호는 해당일군으로부터 우리 나라 정부대표단의 쏘련방문과 관련한 강연제강을 급히 쓸데 대한 과업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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