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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소설 번영의 길 제51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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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강산
댓글 1건 조회 7,020회 작성일 20-04-16 19: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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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차당대회를 앞둔 조국은 들끓고있었다. 당보는 매일같이 1면에 3개년인민경제계획을 초과수행한 공장, 기업소들의 성과를 소개하고있었다.

사람마다 감격과 격동에 휩싸여있던 그때 수도의 경상골에 자리잡고있는 자그마한 단층가옥에는 무덤속 같은 괴괴한 침묵이 무겁게 드리워있었다. 밤이 깊어 자정도 훨씬 지났으나 아래방에 이불을 머리우에까지 뒤집어쓰고 누운 옥산이도 웃방 쏘파에 절반 파묻히듯이 깊숙이 들어앉은 한윤호도 잠들지 못하고있었다.

《기어이 두만강을 넘어가야 하는가?》

컴컴한 창문을 멍청한 눈으로 바라보는 한윤호의 머리속에 피뜩 이런 생각이 스치였다.

일제통치의 가장 암담하던 시기 아버지의 손에 이끌리여 넘어간 두만강이다. 두만강을 넘으면 지척에 아버지가 고달픈 보짐을 풀어놓았던 한까호수가가 나지고 거기서 기차를 타고 밤낮으로 사흘을 가면 안해와 아이들이 기다리는 중앙아시아다. 생각만 해도 지긋지긋한 이 모든 번민과 고달픔을 다 잊어버리고 살가죽이 타는것 같은 건조한 뙤약볕과 모래바람, 갈증, 몸에 맞지 않는 이국의 이 모든 불순한 기후에 정을 붙이고 다시 교편을 잡아야 하는가?

자책과 번민에 휩싸인 한윤호는 자기의 길다란 손이 책상서랍을 열 때까지도 그것을 의식하지 못하였다. 딱딱한 마분지에 손가락이 닿자 그는 전류에 감전되기나 한것처럼 흠칫 놀랐다.

언젠가 정준택이 자기한테 한 말이 새삼스럽게 각별한 의미를 띠고 그의 뇌리를 쳤다.

《국장동무, 내 언젠가 한번은 하자고 별러오던 말인데 그 담배있지 않습니까. 담배란 기호품의 한가지로 보면 누가 무슨 담배를 피우건 크게 관계할것은 없지요. 그러나 외국담배 그 <까즈베크>담배를 피우는건 아무래도 좋지 못합니다. 지금 우리 나라 형편이 수입제담배를 피울 정도로 넉넉하다면 말하지 않겠습니다. 사람들은 죽물로 끼니를 에우며 복구건설을 하는데 그 담배는 어울리지 않습니다. 살림살이를 쪼개가며 해야 할 우리 계획일군들에게는 더구나 어울리지 않습니다.…》

한윤호는 정준택의 진정에 넘친 이 말에 큰 충격을 받고 며칠은 《까즈베크》를 피우는것을 삼가했으나 쓸쓸한 홀아비생활을 하면서 술도 별로 마시지 않는 그는 애용품인 그 담배만은 단념하지 못했다. 이번에 진행된 사상투쟁회의에서 한윤호가 비판받은 많은 문제들가운데는 이 외국담배건도 들어있었다.

이번 사상투쟁회의에서 집중적으로 비판받은 사람은 최일만이였다. 남의것을 통채로 삼키고 기계적으로 본따는데 이골이 난 최일만은 우리 나라의 구체적인 현실은 알려고도 하지 않으면서 중공업을 우선적으로 발전시키면서 경공업과 농업을 동시에 발전시킬데 대한 경제건설의 기본로선을 비롯하여 당의 새 로선과 방침이 제시되기만 하면 그것이 쏘련에서 하는것과 맞는가 맞지 않는가 하는것부터 따져보고 맞지 않으면 덮어놓고 의문시하였다. 최일만은 지어 다른 나라의 원조만을 절대시하면서 우리 힘으로 복구건설을 하는것마저 부정해나섰다. 한윤호는 지금에 와서야 여태껏 최일만이 강선제강소와 흥남비료공장의 복구를 왜 그처럼 집요하게 반대하고 훼방을 놀았는가를 똑똑히 알게 되였다. 그는 그곳 로동계급이 외국의 원조를 바라지 않고 자체의 힘으로 공장을 복구하는것을 달가와하지 않았던것이다. 그의 눈에는 그런 사람들이 다 《반쏘분자》로 보였을것이 틀림없었다.

최일만은 걸핏하면 누구는 친일분자고 누구는 친미분자라고 몰아대였고 그것도 성차지 않아 간첩으로 모해하기까지 하였다.

이번 회의에서 숱한 사람들이 격분에 넘쳐 사대주의가 골수에까지 뿌리박히고 관료주의와 전횡을 일삼은 최일만을 우리 당대렬에서 영영 제거해버릴것을 제기한것이 결코 우연하지 않았다.

최일만은 이번에 당적으로는 엄중경고를, 행정적으로는 국가계획위원회 부위원장의 직책에서 해임이라는 처벌을 받았다. 사람이 민족의 넋을 잃으면 나라도 수령도 모르며 나중에는 헤여날수 없는 엄중한 구렁텅이에 빠진다는 심각한 교훈을 주는 처벌이였다.

최일만이 비판을 받는 전기간 한윤호는 마치도 바늘방석우에 올라앉기라도 한것처럼 안절부절하였다. 최일만을 비판할 때마다 자주 그의 이름도 튀여나왔다. 그때마다 그는 예리한 칼끝에 찔리기라도 하는것처럼 흠칠흠칠 몸을 떨었다.

한윤호는 책상머리에 앉아서 관료주의를 부렸다든가 작풍이 거칠었다든가 로동계급의 충실성을 믿지 않았다든가 남의것만 쳐다보면서 자기 나라것을 멸시했다든가 하는 비판들은 아프기는 했지만 접수했다. 하지만 최일만의 졸개라는데 대해서는 참을수 없는 인신모욕처럼 생각되였고 그것을 접수하느니보다 차라리 죽는것이 낫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객관적으로 나타난 일련의 사실들은 그가 최일만에게 아부굴종해왔다는것을 도저히 부인할수 없게 되였다.

그는 이번 회의에서 엄중경고라는 당책벌을 받았다. 차승룡이도 이번에 자기 당조직에서 심각한 비판을 받았다. 한윤호는 그가 비판을 받게 된데는 자기의 책임도 크다고 생각했다. 사실 그는 당책벌뿐아니라 최일만이와 마찬가지로 자기도 우리 당의 경제정책을 집행하는 경제참모부이고 작전국인 국가계획위원회에 더는 남아있을 명분도 자격도 잃어버린 인간이라는것을 아프기는 하나 인정하지 않을수 없었다. 조국에 남아있을 자격도 량심도 다 상실한 인간이였다. 그러니 이제는 언젠가 울며 넘어갔던 두만강을 또다시 울며 넘어야만 했다.

이 밤이 지새면 한윤호는 두만강을 건느게 되여있었다.

동창이 알릴듯말듯 훤해지기 시작하였다. 밤새껏 담배를 피우던 한윤호가 사이문을 빠금이 열었다.

《옥산아, 얘야, 자느냐?》

한윤호가 아래방을 내려다보며 겨우 들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한윤호는 자기와 마찬가지로 동생도 이 밤 한잠도 자지 못하였고 지금도 자지 못하고있다는것을 너무나 잘 알고있었다.

이불을 머리우에까지 끌어올린 옥산은 죽은듯이 까딱 않고 누워있었다. 그처럼 쾌활하고 명랑하고 랑만에 넘쳐있던 동생이 이 며칠동안 갑자기 딴사람이나 된것처럼 말이 없고 우울해있는것을 보느라면 한윤호는 가슴이 갈가리 찢어지는것 같았다.

《옥산아, 제발 이제라도 생각을 돌려라. 네가 나와 함께 두만강을 넘어가겠다면 나는 당장 오늘 떠나는것을 그만두겠다. 네가 필요한 수속을 하는동안 기다리겠단 말이다.》

한윤호의 목소리는 안타까움에 젖어있었다. 그런데도 옥산은 여전히 아무런 기척도 내지 않고 누워있었다.

《옥산아, 그러지? 내 말대로 하지?》

한윤호의 목소리는 애원에 가까왔다. 그래도 동생은 여전히 침묵이다.

《내 온밤 생각해보았는데 너를 두고는 절대로 갈수 없다. 너를 두고 나혼자만 갈수 없단 말이다. 생각해봐라 나만 떠나면 너한테 무엇이 남느냐? 아무것도 없다. 이 땅에 소꿉놀이를 같이 한 동무들이 있느냐, 너의 손발을 얽어매는 중책 같은것이라도 진것이 있느냐. 아무것도 없지 않느냐.》

한윤호는 아래방으로 내려와 안타까이 타일렀다. 조국에 남겠다는 동생의 결심을 돌려보려는 오빠의 마지막시도인것이다.

한윤호는 자기가 조국을 뜨기로 결심만 하면 동생은 두말없이 자기를 따라서리라고 생각했었다. 그점에 대해서는 조금도 의심하지 않았다. 설사 반대를 한다 해도 그것은 얼마 가지 못하리라고 타산했다. 옥산은 흥분하거나 언짢은 일이 있으면 터무니없이 고집을 세우고 변덕을 부릴 때가 종종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오래가지 못했다. 그래서 이번에도 조국에 남겠다는 동생의 고집이 기껏해야 하루이틀 가리라고 짐작했다. 그런데 예상밖에도 그 고집은 하루이틀이 아니라 한달이 다 가도록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다.

《제발 내말을 들어다오. 여기에 먼 친척이라도 한사람 있다면 나는 이러지 않겠다. 백사지에 철없는 너만 홀로 남겨놓고 내가 어떻게 수천수만리 이국땅으로 떠날수 있겠느냐? 나는 발길이 떨어지지 않는다, 가슴이 터진다.》

한윤호는 무릎걸음으로 동생한테 벌렁벌렁 기다싶이 다가갔다.

《제발 이 오빠가 너한테 빈다. 무릎을 꿇고 너한테 비니 제발 내 말을 들어다오, 옥산아!》

한윤호는 기어이 동생의 대답을 들으려고 머리우에서 이불을 벗기였다. 순간 온통 눈물범벅이 된 얼굴이, 이 며칠사이 몹시 앓고난 사람처럼 할끔해진 동생의 얼굴이 한윤호의 가슴을 찔렀다.

동생은 울고있었다. 베개잇이 눈물로 푹 젖어있었다.

《오빠!》 옥산은 자기를 내려다보고있는 오빠의 목을 와락 그러안았다. 《오빠, 가지 마세요. 버리지 마세요. 모든것을 다 버려도 조국만은 버리지 마세요.》

《뭐 뭐… 뭐라구?》

한윤호는 가지의 목을 꼭 그러안은 동생의 두 팔을 부여잡고 신음소리를 내듯 소리쳤다. 그리고는 동생을 난생 처음보기라도 하듯이 눈물범벅이 된 그 얼굴을 뻔히 지켜보았다.

(정말 이럴수 있는가?)

한윤호는 기가 막혔다.

녀자란 자라면서 아홉번 번진다는 말도 있지만 확실히 동생은 조국에 나와서 외모에서나 내면세계에서 너무도 엄청나게 변하였다.

(그러니 어쩌면 좋단 말인가?)

엷은 입술을 꾹 다물고있는 한윤호의 얼굴이 컴컴하게 질리였다. 끝내 동생을 설복하지 못하고 혼자 떠나지 않으면 안된다는 그 무서운 현실이 자기앞에 다가선것이다.

모란봉숲속에서 들려오는 소쩍새의 처량한 울음소리가 무겁게 서린 침묵을 깨뜨리며 두사람의 애간장을 피터지게 하였다. 대동강의 철썩거리는 물결소리도 전에없이 가슴아프게 젖어들었다.

《오빠, 제발 부탁이예요. 가지 마세요.》

옥산은 오빠의 목을 다시한번 힘있게 그러안으며 애절하게 부르짖었다.

순간 오빠의 눈이 노기를 띠고 번쩍이였다. 그는 동생의 두 팔을 홱 뿌리치며 소리질렀다.

《그- 그만큼 말했는데도 또 그 소리냐?》

《오빠!》

눈물을 거둔 옥산은 발딱 일어나앉으며 오빠를 간절한 눈길로 바라보았다.

《안된다, 안돼. 당장 떠나겠다고 말해라. 말하란 말이다.》 한윤호는 동생을 쏘아보며 다시 소리질렀다. 《네가 말 못하겠다면 내가 해당한 곳에 제기하겠다.》

《그만두세요!》

《난 네 오빠다! 넌 내 말을 들어야 해.》

《오빠.》

《내 말을 들어야 한다.》

《들을수 없어요.》

《뭐, 뭐? 그 말이 이날 이때까지 아버지없는 집안에서 너를 키워주고 돌봐준 이 오라비의 사랑에 대한 대답이냐?》

《그래도 난 들을수 없어요.》

《들어야 한다.》

《싫어요!》

《들어야 한다!》

얼굴이 새파랗게 질린 한윤호는 성이 나서 고래고래 소리질렀다.

《싫어요! 싫어요!》

옥산은 얼굴을 쳐들고 오빠의 말에 한마디라도 뒤질세라 마주 응수했다.

《에익 발칙한것!》

화가 꼭뒤까지 치밀어오른 한윤호는 동생을 후려갈길셈으로 한팔을 높이 쳐들었다. 그러나 그 팔은 눈한번 깜박하지 않는 동생의 그 당돌한 얼굴앞에서 뚝 멎었다. 그의 창백한 얼굴에 고통의 그림자가 얼핏 스치더니 보기 참혹하게 일그러졌다.

꽉 감은 그의 두눈에서 상처에서 피가 스며나오듯이 진한 눈물이 걷잡을수 없이 스며나왔다. 한윤호는 흑흑 흐느끼였다.

《오빠, 저를 용서해주세요. 전 조국을 버릴수 없어요.》

한윤호는 동생의 말을 듣는둥마는둥 하였다. 한동안 실신한 사람처럼 앉아있던 그는 웃방으로 비청거리며 올라가더니 쏘파에 쓰러지듯이 주저앉았다. 그리고는 한손으로 머리를 받치고 오래도록 말없이 앉아있었다. 그의옆에는 큼직한 트렁크 2개가 놓여있었다. 떠날 준비가 다 되였던것이다.

《오빠, 나때문에 너무 걱정마세요. 난 다 잘되리라고 믿어요.》

옥산은 이제와서 오빠의 결심을 뒤집어놓을수 없다는것을 알고있었다. 남은것은 그가 마음 편하게 조국을 떠나게 하는것이였다. 그래서 옥산은 어떻게 하나 오빠를 위로하려고 하였다.

《옥산아, 너 정말 이 오빠의 가슴을 이렇게도 아프게 허비여줄셈이냐?》

한윤호는 눈물이 글썽한 얼굴을 들고 동생에게 안타까이 물었다.

옥산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오빠의 등뒤에 머리를 떨구고 묵묵히 서있을뿐이였다.

《말해다오. 이 땅에서 너를 붙잡고있는것이 대체 뭐냐? 사랑이냐, 우정이냐, 사업이냐?》

그래도 옥산은 말하지 못했다. 그러자 한윤호는 홱 돌아앉더니 동생의 축 늘어진 두손을 덥석 그러잡았다. 그리고는 그 두손을 자기의 가슴에 꼭 대고 눈물어린 어조로 간절히 말했다.

《말해다오. 그동안 우리가 이 땅에서 겪은 고생이 과연 적었단 말이냐? 전쟁, 폭격, 파괴, 굶주림과 랭방… 이제 네 앞길에 중중첩첩 쌓이게 될 그 고난과 시련을 네 혼자서 어떻게 헤치고나간단 말이냐. 아, 너는 모른다. 네 앞길에 무엇이 기다리고있는가를…》

《그래요. 알지 못해요…》

《알지 못한다!》

한윤호가 동생의 손을 잡아흔들며 소리쳤다.

환희와 랑만, 기쁨으로 출렁이던 옥산의 커다란 눈에 다시금 수정같은 눈물방울이 다롱다롱 맺히였다.

《알지 못해요. 그렇지만…》

옥산은 울먹울먹하며 속살거렸다.

뜨락에서 인기척이 들려온것이 그때였다.

《옥산이!》

나직이 들려오는 그 목소리.

《옥산이!》

이제는 목소리의 임자를 알아 맞힐만큼 낮으나 분명하게 들려 왔다.

눈물에 젖은 옥산의 두 눈동자에서 광채가 빛발쳤다. 옥산은 두손으로 가슴을 부여잡았다. 가슴속애서 금시라도 튀여나올듯이 세차게 방망이질을 하는 심장을 다잡기 위해서였다.

《들었지요? 저 목소리를… 아!》

웃방문을 활짝 열어젖힌 옥산은 폭풍같이 달려나가 뜨락에 우뚝 선 한 청년의 가슴에 몸을 던지였다. 그는 신철이였다.

《왜 이제야 왔어요? 왜, 왜, 왜…》

옥산은 흐느끼며 울부짖으며 두손으로 신철의 가슴팍을 떠박질렀다.

《몇시간전에야 들었소. 국장동지가 조국을 떠나려 한다는걸… 그래서, 그래서 달려왔소.》

신철의 상기된 얼굴에서는 땀이 흐르고있었다.

한윤호는 금시 석상으로 굳어져버린듯 넋을 잃고 멍하니 두사람을 바라보기만 하였다. 그는 비로소 지금껏 동생의 발목을 붙잡고있는것이 무엇인가를 알았다.

(아, 일이 이렇게 될줄이야.)

한윤호는 이 땅에서 자기가 마지막으로 지탱하고있던 그 지지점마저 발밑에서 통채로 빠져나갔다는것을 의식하였다. 그는 빛을 잃은 눈으로 멍하니 발부리를 내려다보았다. 거기에는 마지막으로 남은 그의 재산인 두개의 커다란 트렁크가 출발을 재촉하듯 나란히 놓여있었다.

신철은 옥산이를 한팔에 껴안은채 퇴마루에 올라섰다.

《기어이 떠나시렵니까?》

신철은 한윤호에게 정중하나 저으기 날카로운 어조로 물었다. 한윤호는 대답하지 않았다.

《저 트렁크안에 무엇이 들어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러나 저 트렁크속에 조국의 푸른 하늘, 조국의 맑은 공기, 모란봉의 저 푸른 숲과 대동강의 출렁거리는 저 물소리를 담아싣고 갈수 있습니까?》

한윤호는 여전히 석상처럼 굳어진채 아무말도 없었다.

《안됩니다. 가서는 안됩니다. 살아도 죽어도 조국에서 살고 조국에서 죽읍시다.》

《신철이, 이사람 그만하라구. 옥산아, 이전 세월에 사형수에게도 고별주를 한사발씩 주었다는데 우리는 리별주나 마시자.》

한윤호는 많이 마시고 많이 이야기했다.

《조국이란 무엇이기에 이다지도 가슴을 저며놓는가. 신철이 이사람, 지난날 내 자네를 괄세한건 다 용서하라구. 난 자네한테 내 하나밖에 없는 사랑하는 동생을 맡기고 가네. 이찌겠나. 이건 다 피할수 없는 운명인것을…》

《그러니 기어이 조국을 버리겠다는겁니까? 조국을 배반하겠다는겁니까?》

신철이 한윤호의 불깃한 두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날카로운 어조로 물었다.

《이사람 신철이, 너무 그러지 말라구. 그러지 않아도 이 가슴은 갈가리 찢어지는것처럼 아프네. 아, 조국… 조국… 조국이란 무엇인가?》

벽시계의 초침은 사정없이 원을 그리며 돌아갔다.

국제렬차가 떠날 시간이 한초한초 다가오고있었다. 그러나 오빠는 자리에서 일어설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아, 이제라도 오빠가 달리 마음을 먹었으면…)

옥산은 한가닥 희망을 품고 오빠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그 희망은 인차 실망으로 바뀌여졌다. 오빠가 천천히 머리를 쳐들더니 개개 풀린 눈으로 벽시계를 물끄러미 쳐다보는것이였다.

《엉?》

급기야 오빠가 놀란 소리를 질렀다. 떠날 시간이 된것이다.

《오빠! 가지 말아요!》

옥산은 마지막으로 오빠의 무릎을 부여잡고 애원했다.

 

밖에서 승용차 멎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 집에 누가 없나?》

뒤미처 들려오는 목소리.

《아이, 숙영이 아버지.》

무심히 밖을 내다보던 옥산이 깜짝 놀랐다. 정준택이 마당에 들어선것이였다.

정준택은 전에없이 싱글싱글 웃으며 옹색한 표정으로 몸둘바를 몰라하는 옥산이와 신철을 번갈아보았다.

《국수를 혼자 먹으면 안돼.》

두 젊은이가 보통사이가 아니란것을 알고있는 정준택이 롱소리를 하였다. 성미가 활달한 옥산이였지만 정작 그 말을 듣자 얼굴을 활딱 붉히였다.

《오빠는 없나?》

정준택이 옥산에게 물었다.

《있습니다. 어서 들어오십시오.》

옥산이 부자연스럽게 서둘며 정준택앞에 웃방문을 열어주었다.

정준택이 웃방 쏘파에 편히 자리를 잡은 이후에도 한윤호는 얼굴을 보이지 않았다. 어수선한 잠자리와 정준택의 발치에 놓인 커다란 두개의 트렁크, 반쯤 열려진 사이문 저쪽에서 들려오는 두 젊은이의 안타깝게 소곤거리는 목소리… 정준택은 이 가정을 무겁게 감싸고있는 심상치 않는 공기를 대뜸 느끼였다. 그러나 그런 내색은 하지 않고 말없이 쏘파에 앉아있었다.

이윽고 잔기침소리가 들려오더니 어깨를 축 늘어뜨린 한윤호가 웃방으로 올라왔다.

《몸이 불편하지 않습니까?》

정준택이 충혈된 한윤호의 눈을 주의깊이 들여다보며 물었다.

한윤호는 대답대신 머리를 가로저었다.

《앉으십시오. 국장동무.》

손님이 오히려 주인을 권하였으나 웬일인지 주인은 앉을 생각을 하지 않고 정준택앞에 죄지은 사람처럼 머리를 떨구고 묵묵히 서있었다.

언제보나 머리를 건듯 추켜들고 틀지게 걸어다니군 하던 한윤호에게서 그런 표정과 몸가짐은 모두 처음 보는것이였다. 정준택은 최근에 그가 겪고있는 마음속고충에 대하여 짐작은 갔으나 정작 눈앞에서 당자를 띄여보니 마음이 좋지 않았다.

《국장동무, 내가 오늘 여기 들린것은 다름이 아닙니다. 지난밤 늦게까지 내각에서 전원회의가 있었습니다. 제1차 5개년계획작성문제와 관련하여 수령님께서 중요한 말씀이 계시였는데 웬일인지 국장동무의 얼굴이 보이지 않더군요. 그래서 함흥으로 내려가던 걸음에 여기에 들렸습니다.》 정준택이 찾아온 용건을 이야기하기 시작하였으나 한윤호에게서는 의연히 아무런 변화도 일어나지 않았다. 《수령님께서는 그 회의에서 전쟁때에, 머리우에서 폭탄이 꽝꽝 터지던 그때 룡흥리갱도에서 전후복구안을 검토하던 일을 감회깊이 회고하시였습니다. 그때 국가계획위원회일군들의 수고가 많았다고 하시면서 한윤호동무에 대해서도 오랜 시간 말씀이 계셨습니다.》

한윤호의 머리는 점점 무겁게 아래로 수그러졌다. 그래서 정준택은 이 순간 그가 무엇을 생각하고있으며 무엇을 느끼고있는지 전혀 알수가 없었다. 그렇지만 정준택은 간고한 전후복구건설의 시련을 함께 겪어온 동료에게 이야기하지 않을수 없는 절박감에 휩싸여 다시 입을 열었다.

《수령님께서는 한윤호동무가 큰 나라에서 성장하고 교육까지 받다보니 큰 나라에 대한 의존심은 좀 있지만 그러나 복구건설의 시련을 통하여 많은것을 체험하였을것이라고 말씀하시였습니다. 그러시면서 한윤호동무는 우리 나라 경제학분야의 재능있는 학사라고, 계획경제를 전공한 그가 이제 우리가 창조한 속도와 균형에 대한 귀중한 경험을 리론화하고 일반화하여 권위있는 박사론문을 쓸것이라고 크나큰 기대를 표시하시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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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산님의 댓글

강산 작성일

(위에서 계속)

갑자기 한윤호가 중심을 잃은 사람처럼 비칠거리였다. 그는 한손으로 쏘파의 등받이를 꽉 틀어쥐고서야 간신히 자기 한몸을 지탱할수가 있었다.

《수령님께서는 전후복구건설을 통하여 한윤호동무와 같은 보배들이 있기에 새로운 1차 5개년계획도 짧은 기일에 훌륭히 작성될것이라고, 자신께서는 그것을 굳게 믿는다고 하시였습니다. 그러시고는 장내를 둘러보며 한윤호국장동무를 찾으시였습니다. 그런데…》

《아!》

한윤호는 끝내 자기를 다잡을수 없었다.

《오빠!》

한윤호가 쓰러지려는 그순간 아래방에서 시종 숨을 죽이고 그의 동정을 살피던 옥산이 웃방으로 뛰여올라와 오빠를 부둥켜안았다.

《수령님, 이 불효막심한 놈을 이다지도… 이다지도 잊지 못하고 사랑하시니… 아!》

한윤호는 꺽꺽 흐느끼며 한손으로 자기의 앞가슴을 쾅쾅 두드리였다. 그것은 지난날의 과오에 대한 타매였고 새 출발에 대한 결의였다.

…그로부터 한주일후 옥산이와 신철은 평양역에서 국제렬차에 오른 한윤호를 배웅하였다.

한윤호는 옥산이와 신철의 어깨에 두손을 얹고 절절하게 말하였다.

《나는 지금까지 누가 뭐라고 해도 자신은 누구보다 조국을 사랑해왔다고 자부했다. 조국을 사랑한다는것은 그만큼 조국에 자신의 가장 귀중한것도 서슴없이 바친다는것을 말한다. 그런데 나는 이제껏 내 생활의 절반을, 내 심장의 절반을 남의 나라 땅에 고스란히 남겨두고왔으니 내가 조국을 사랑했다면 얼마나 사랑했겠느냐? 조국을 위해 내 심장을 바쳤다면 얼마나 바쳤겠느냐? 나는 이제라도 이국에 남겨둔 내 심장의 절반을 찾으련다. 찾아서 조국에 바치련다.…

옥산아, 너의 형님 조카들도 인차 조국으로 돌아올것이다. 그날을 앞당기려고 내 조국을 떠나니 부디 나를 기다려다오.》

《오빠!》

옥산은 오빠의 정다운 품에 얼굴을 묻었다.

《기다리겠습니다! 빨리 돌아오십-시-오!》

렬차가 기적소리를 높이 울리자 신철은 승강대에 나선 한윤호를 향해 소리쳤다. 그와 옥산은 렬차가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오래도록 팔을 저었다.

《어쩐지 난 두려워요. 혼자 남았다고 생각하니…》

역두에 말없이 서있던 옥산이 문득 침묵을 깨뜨렸다.

《나역시, 한 운명이 나에게 의탁하고있다고 생각하니 갑자기 두려워지오. 하지만 우리한테는 어버이수령님께서 계시오. 수령님만 믿고 삽시다.》

옥산은 그 말에 전적으로 동감이라는듯이 방긋이 웃었다. 그러더니 품속에 소중히 간직했던 파르스름한 줄무늬가 간 대리석조약돌을 꺼냈다. 그것은 잊을수 없는 수풍호반에서 신철이 옥산에게 준것이였다.

《이건 영원히 우리 두사람의거요.》

신철은 조약돌이 든 처녀의 손을 다정히 꼭 그러쥐며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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