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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소설 빛나는 아침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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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강산
댓글 1건 조회 8,226회 작성일 20-06-17 21: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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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침묵이 흘렀다. 그 침묵은 자연히 박원식을 재촉하는것으로 되였으며 또한 그 재촉가운데는 응당한 기대가 실려있었다. 정작 입을 열자고 하니 가슴과 목구멍이 순식간에 꽛꽛하니 얼어드는것 같으면서 말을 해낼수가 없게 되였다. 눈자위에는 경련이 일고 굽슬굽슬하고 총이 센 머리는 중압을 받아 차차 아래로 내려갔다.

김일성동지께서는 벌써 어떤 징조를 감촉하시였는지 탁자에 놓인 유리재털이를 가까이 당겨다놓고 담배를 붙이시였다.

침묵이 계속되다가 불쑥 《한마디로 결과부터 보고드리면 완전히 실패했습니다.》하고 거쉰 음성이 방안을 울리였다. 박원식의 말은 한자한자 찍어넘기는 전보문같은것인데 그의 음절끝은 매번 파르르 떨었다.

《완전한 실패라?》

김일성동지께서는 박원식이쪽으로 흠칫 고개를 들면서 검고 진한 눈섭이 꿈틀할만큼 의혹을 표시하시였다.

그이께서는 박원식이 입대해서 이날까지 10년동안에 언제한번 이렇게 완전히 기대에 어긋나는 결과를 가져와본적이 없다는것과 또 이번 서울공작을 보더라도 그럴만한 어떤 미지수의 전제가 없었다는것을 확신하고 계시기때문이였다.

《처음부터 차근차근 다 이야기를 하시오.》

이렇게 함으로써 그이께서는 박원식의 결론이 부정확할수도 있으며 설혹 정확한 경우라 하더라도 《실패》라고까지 표현하는것이 너무 성급한것이 아닌가라는 속심을 충분히 울려놓으시였다.

원래 내성적이고 완강한 성미인 김책은 흥분이 지나쳐서 안절부절 못하고있다. 자리를 고쳐앉기도 하고 앞에 놓였던 두팔을 각각 팔걸이로 가져가는가 하면 항상 틀이 있고 무게있게 보이던 얼굴은 초조한 감정을 감추지 못하고있다.

그와 반면에 별치 않은 일에도 흥분하기 잘하던 오기섭은 자기 예측이 맞아떨어졌다는 속심에서 그랬던지 아무런 감정변화도 없이 묵묵히 앉아 침묵을 지키기만 하였다.

박원식은 침착하게 경위를 설명하기 시작하였다. 서울까지 가는데 사흘이 걸리고 그다음 서울거리를 방황하면서 닷새 그리고 우연히 양춘만을 만나게 되였다고 하였다. 뜻밖의 일이 련달아 생기는 가운데는 유리한 정황도 없지 않았지만 대체로 장애물경기를 하는것처럼 요행 한고비를 넘기면 또 한고비식으로 거듭거듭 길이 막혔다는것을 실감있게 설명하였다.

《재미있소. 죄다 말하시오. 마치 추리소설 줄거리를 듣는것 같소.》

김일성동지께서는 진심으로 흥미를 가지고 대하시였다. 극적으로 얽히고 돌변하는 줄거리도 재미있었지만 그것을 타고 우연히 묻어 나오게 되는 그 숱한 서울풍경과 생활세부들이 주목을 끌었다.

《그래 양춘만을 직접 만나보았습니까?》

그이께서는 박원식이 지나칠 정도로 긴장하고 침울했던 기분이 어느 정도 가라앉았다고 보아질무렵에 가장 요긴한 문제에로 화제를 집중시키시였다.

《만났습니다. 양춘만의 중학시절 대수선생네 집에서 그것도 역시 우연히 맞다들었습니다.》

이렇게 시작해놓고 우선 양춘만의 팔목을 붙잡고 약봉지가 한벌 널린 온돌방에 들어앉아 밤새껏 담판을 하던 장면을 눈으로 보는것처럼 선하게 형상하였다. 그런후에 그는 《가겠소. 당신네를 따라 북으로 가겠소.》하던 그때로부터 렬차에서 뛰여내려 온데간데없이 종적을 감춘 대목까지 상세히 보고를 올리였다.

《그러니까 양춘만을 데려오라는 과업을 집행하지 못하고…》

《그만하오. 또 한가지 물읍시다.》

한마디도 놓칠세라 주의깊이 듣고계시던 김일성동지께서는 일단 결속해버리려는 박원식의 말을 성급히 중단시키시였다. 들어보나마나 맨 앞머리에서 규정해버린 《완전한 실패》 거기에 귀착시킬것이 뻔하였기때문이다.

《그래 동무는 우리가 양춘만에게 하라던 그 말을 정확하게 전했습니까?》

박원식은 붉게 상기된 얼굴을 들고 몸을 꼿꼿이 세우면서 맑은 음성으로 대답하였다.

《장군님의 말씀을 정확하게 전달했습니다. 저쪽에서 잊을수 있을것 같아 같은 내용을 몇번 반복했습니다.》

《그렇습니까. 잘했습니다. 정말 수고했소.》

그이의 얼굴에는 한껏 만족할 때만 볼수 있는 그런 흐뭇한 빛이 한벌 번져가고있었다. 그이께서는 담배를 또 붙이시였다. 흰 연기가 담담한 방안공기를 타고 란초잎이 활등처럼 휘여내린 창문쪽으로 미끄러져가고있다.

《양춘만을 데려오라.》

박원식을 떠나보내시면서 그이께서는 이렇게 지시를 준것만은 사실이다. 때문에 박원식은 결과를 놓고 《실패》라는 평가를 서슴지 않는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산수적으로 그 복잡한 인간문제 즉 인테리문제를 단순하게 보아넘길것인가. 그렇게는 할수 없는것이다.

《자! 실태는 이렇습니다. 우리 서로 의견을 교환해봅시다.》

그이께서 처음에 김책이 다음에 오기섭이 그다음에 역시 박원식을 차례로 쳐다보며 각각 발언할것을 요구하시였다.

잠시후 김책이 팔걸이에 올려놓았던 손을 내리우며 입을 열었다.

《제 생각에는 박원식동무가 수고는 했지만 역시 실패한것은 사실이라고 봅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실망하거나 그런 대상과의 사업을 포기할수 없을것입니다.》

그때 오기섭이 뒤로 기대였던 상체를 흠칫 일으켜세우면서 날카로운 시선을 보내였다. 짐작컨대 그는 결과에 의해서 명백해진 문제를 놓고 그렇게 집요하게 정도이상 둔감하게 사고하는데 대해서 불만이 생긴 모양이다.

그러거나말거나 김책은 자기 의견을 거침없이 제기하였다.

《우리가 주관적욕망에 의해서 사람문제를 조급하게 처리한다면 큰 후과를 낳게 되리라고 생각합니다. 더구나 양춘만은 좀 특이한것 같습니다. 어째서 그가 우리를 따라오지 않는가, 따라오다가 달아나는가, 그것을 깊이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아니 김책동무, 거기에 무슨 연구할것이 있소. 모든것이 명백한데.》 옆차대우에 놓인 손가락으로 도드락도드락 상판을 울리면서 오기섭은 론의대상도 되지 않는 응당한 결과라는 내심을 보이고있다.

그러나 그에는 응수하지 않고 김책은 계속하였다.

《우리의 경험에 의하면 사람들에 대한 문제는 상점에서 물건을 사는 식으로 그렇게 되지 않았다는것입니다. 두번세번 지어 열번백번 교양해서 성공하는 경우도 있고 혹은 실패하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김책은 오기섭이 옆에 있다는것과 더구나 그가 인테리문제에 있어서는 처음 만나서부터 판이한 의견을 가지고있고 류창한 언변으로 매번 말씨름을 걸어왔다는것도 념두에 두면서 제 할 말을 하고 마는것이였다.

김일성동지께서는 오기섭에게 의견을 말해보라고 하시였다.

《저는 별로 할 말이 없습니다. 박원식동무가 수고를 많이 했다는것뿐입니다.》 그러고는 더이상 말이 없었다.

그이께서는 침묵을 지키고있는 오기섭에게서 한동안 시선을 옮기지 못하시였다. 침묵은 사실상 백마디 웨침보다 더 많은 말을 하고있었다. 그의 침묵속에는 여직까지 자기가 말하지 못하고있던 딱한 심리가 력력히 드러나있었다.

김일성동지께서는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서시여 창가로 다가가시였다. 어느새 어두워졌는지 벌써 거리에는 색등이 명멸하고있다. 그러나 강한 광선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자연은 태반이 어둠에 잠겨있었다. 큰길에서 오가는 사람들과 자동차들이 흡사 그 어둠속을 헤염치고있는것 같았다.

그이께서는 사색에 잠겨계시였다. 호상 리해의 부족이 이런 분위기를 만들어낼수 있는것이다. 경험에서 지식에서 또는 관계에서 처음에는 눈에 뜨이지 않을 정도의 미세한 차이를 낳고 그것이 자라 융합시켜낼수 없는 간격을 이룬다. 그러나 이 마당에서도 그의 해결은 방금 김책이 말한것처럼 《상점에서 물건사는 식으로》 되여서는 안된다는 준엄한 진리가 살아숨쉬고있는것이다.

김일성동지께서는 창문을 향해 뒤짐을 지고있던 몸을 삑 돌려 박원식이 고개를 떨구고있는데로 한걸음 다가가시였다.

《박원식동무! 동무는 어째서 그렇게 울상을 하고있소. 난 그것이 전혀 리해되지 않소. 실패했기때문이다. 이것이 리유요? 참말 이렇게도 큰 착오를 범하다니.》

그이께서 오른쪽손을 높이 들었다가 허공을 쭉 내리그으시면서 완전히 부정하는 표현을 하시자 오기섭은 흠칫 놀라기까지 하였다. 그만 못지 않게 김책이도 의아한 시선을 보내였다.

《동무가 만일 산에 있을 때 이런 일이 생겼다면 지금처럼 그런 모양을 보이지는 않았을것입니다. 적구에 들어가 강철기사를 하나 설복해서 데려오라, 이렇게 문제를 제기했다면 그 가능성을 아마 최대한으로 50%정도로 보았을것입니다. 왜냐하면 한 인테리의 리념을 바꾸는 문제를 단마디 말이나 고작해서 하루이틀 기껏해서 한 열흘기한으로 해결할수 없다는것을 우리는 서로 잘 알고있기때문입니다. 그런데 박원식동무는 지금 해방이 되였다는 그 전제가 모든 문제를 수월하게 만들어낼수 있으리라고 착각하고있는것입니다. 어떻소? 박원식동무.》

그이께서는 고개를 든 박원식을 보시는것이 아니라 김책이와 오기섭을 주시하면서 그리고 뭇시선이 함부로 날아드는 그 어느 큰 모임에서 수많은 청중을 향해 하시는것처럼 근엄하고 침착한 몸가짐으로 말씀을 계속하시였다.

《동무는 실패로 보고있지만 우리는 그것을 부정합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준 과업은 양춘만을 만나서 정확하게 우리의 말을 전달하라고 한것입니다. 그것이 달성되였다면 동무의 임무는 끝입니다. 물론 그가 즉석에서 우리쪽으로 왔다면 그이상 더 좋은 일은 없었을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다른 경우도 예견안한것이 아닙니다. 인간이 한 세계에서 다른 세계에로 넘어오는데 어떻게 기일이 걸리지 않으며 곡절이 없겠습니까. 양춘만을 데려오라는것은 그를 포로해오라는것이 아닙니다. 만약 그렇게 했다하더라도 육신이 왔을뿐이지 그의 처지와 사상은 바다건너 저쪽세상에 있게 됩니다. 그러니 필연코 풍랑을 헤치면서 그가 스스로 노를 저어 대안에 와닿아야 하는것입니다. 그러나 명백한것이 하나 있습니다. 양춘만은 본래자리에서 자리드팀을 하였다는 그 사실입니다. 이것은 박원식동무가 떠밀었기때문입니다. 두고봅시다. 양춘만은 자기 궤도를 타고 우리에게 오고야말것입니다. 우리가 그를 포기하지 않는 조건에서 우리는 이것을 믿어야 합니다.》

그이께서는 말씀을 중단하시고 방안사람들을 차례로 하나하나 다시 둘러보시였다.

김책은 그 어떤 위태로운 낭떠러지에 미끄러져내리다가 불쑥 나타난 팔에 잡혀 구원된것처럼 얼굴에 안도의 빛을 띠고있었다.

《박원식동무는 매우 조급했던것 같습니다. 저도 당장 되돌아가 붙잡아오라고 할번했습니다, 하하하.》

김책은 매우 후련한 기분으로 자기자신을 비유해서 박원식을 두둔하였다. 한바탕 같이 웃고나신 그이께서는 역시 같이 웃고있는 오기섭을 쳐다보시였다. 예리하면서도 언제나 사색하고있는 빛을 띠였던 오기섭의 눈에는 약간 쌀쌀하면서도 실망한듯한 기분이 어려있었다. 다 옳기는 한데 인테리들이 종당에는 우리를 따라오게 되리라는 그 예측을 그대로 믿어도 일없겠는지 우려되는 모양이다.

《이야기가 난 기회에 말해둘것은 조급하게 생각하는것은 박원식동무만이 아니라 현재 우리들모두인것 같습니다. 이것을 우리는 분위기라고 지적하고싶습니다. 며칠사이에 혹은 몇달사이에 하나의 사회혁명을 해치울것처럼 내미는 사람도 있습니다. 사회를 개조하고 인간을 개조하고 체계를 새로 세우는것을 그렇게 쉽게 생각한다면 박원식동무처럼 비관하게 될수 있습니다. 오기섭동무, 우리가 보천보를 치거나 대홍단에서 적을 족친 후에 어째서 그것으로 일제가 패망하지 않았는가 하고 의문을 제기하지 않은 까닭이 리해됩니까? 박원식동무는 지금 그것을 범하고있습니다, 하하하.》

호탕한 웃음소리가 한동안 침울해졌던 방안의 공기를 사정없이 흔들고있다.

김일성동지께서 잠간 사이를 두시였을 때 오기섭이 재빨리 그에 반응하였다.

《솔직히 말하면 저도 그가운데 한사람이며 조급한데서는 첫번째로 지적되여야 할 대상이라고 봅니다. 해방이라는 기분은 사람을 성급하게 만드는것 같습니다. 하기야 세기를 두고 정체되였던것이 한순간에 뚝을 터치고보니 급류를 이루는것은 응당한 일이기는 하지만말입니다.》

그는 쾌활하게 웃었다. 이때 처음부터 줄곧 고개를 숙이고 앉았던 박원식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천천히 좌우를 한번 살피고 나서 장군님을 정중히 바라보면서 입을 열었다.

《사령관동지, 제가 어학자이고 작가인 홍명희선생을 만났습니다.》

《홍명희선생을?》

김일성동지께서는 뜻밖이라는듯이 빛나는 시선으로 크게 관심을 표시하시면서 다음말을 재촉하시였다.

박원식은 경성역대합실에 나붙은 광고문에서부터 홍명희를 만난 그 어간에 있은 일들을 자세히 보고드리였다. 양춘만의 보통학교시절 수학선생이였던 오씨와 함께 장안빌딩, 경성제국대학, 다음에는 허헌의 집 등등 서울전역을 편력한 실황을 그대로 펼치였다.

《그래 허헌선생도 만났소?》

김책이 다그쳐물었다. 하지만 두번이나 거듭 찾아갔는데 종시 만나지 못했다는 대답이 나오자 김책은 대단히 아쉬워하였다.

양춘만의 도주사건으로 해서 침울했던 박원식은 어느정도 기분이 맑아져서 서울에서 보고 들은것을 신이 나서 재현하였다. 남조선에는 일본군대 대신 미국군대가 판을 치고있다는것, 그러나 인민들은 기세만만해서 김일성장군님께서 서울로 개선하실 날을 손꼽아 기다리고있다고 하였다. 홍명희선생을 위원장으로 하고 변호사 허헌 등이 김일성장군 환영준비위원회를 구성했는데 서울거리 도처에 나붙은 광고문앞에는 밤이고 낮이고 사람 찔 시간이 없다고 하였다. 로동자, 농민도 기다리고 상공인도 기다리고 지식인도 기다리고 지어 80이 가까운 로인도 기다린다고 하였다.

《제가 홍명희선생을 만나 이야기를 나누고 헤여질 때 홍명희선생이 저에게 이런 부탁을 했습니다.》 박원식은 목에서 떨꺽소리가 나게 마른침을 삼키고나서 계속하였다. 《우리가 무엇보다 기쁜것은 김일성장군님께서 건강하시다는 소식입니다. 혹시 장군님을 직접 만나뵈올 기회가 있으면 이렇게 전해주시오. 남조선에 있는 전체 우리 겨레는 김일성장군님께서 서울로 개선하실 날을 기다리고있다고 하시오. 2달도 좋고 3달도 좋습니다. 아니 10년이고 20년이고 기다리겠다고 전하시오. 이렇게 말했습니다.》

왜 그런지 이때 박원식의 가슴속에서는 뜨거운것이 부그그 끓어올랐다. 금시 눈자위가 붉어졌다. 무엇인가 더 설명할 내용이 있는것 같았는데 인차 떠오르지 않아 잠간 망설이다가 자리에 앉았다.

덜컥 의자 드티는 소리가 나더니 김일성동지께서 자리를 뜨시여 창문가로 다가가시였다. 아무 말씀도 하시지 않고 줄곧 창밖을 내다보고계시는것이다. 방안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그이의 어깨에 쏠리였지만 그이께서는 전혀 그에 개의치 않으시고 침묵을 지키고계실뿐이다. 《뿌지직》하는 소리가 나서 박원식이 눈여겨보니 그이의 손에서 성냥갑이 부서지고있었다. 담화는 더이상 계속되지 않았다. 더 자세한것은 후날 듣기로 하고 박원식이더러 먼저 나가 쉬라고 하시였다.

박원식은 아직도 채 직성이 풀리지 않아 며칠후 양춘만을 찾아 또 서울에 가겠다고 제기하였다. 그러나 김일성동지께서는 그럴 필요가 없다고 단호히 거절하고 곧 평양철도국에 다시 나가도록 지시를 주시였다.

《가만!》하고 그이께서는 다리를 부자연스럽게 옮겨놓고있는 박원식을 불러세우시였다. 《아까도 그렇게 보았는데 동무는 왜 다리가 그렇게 뻣뻣하오?》

《네? 예!》하고 박원식은 우정 발을 굴러보이면서 태연하게 대답하였다. 《걸음을 많이 걸어서 부르텄습니다.》

《부르텄다? 산에서 단련된 다리가 벌써 그렇게 될수는 없겠는데.》

《산보다 평지가 더 걷기 바빴습니다.》

《믿어지지 않는 소리요.》

그이께서는 부자연스럽게 움직이는 박원식을 미심쩍게 쳐다보시였다.



3

 

헐럭한 고무신을 털썩털썩 옮겨짚으며 안동권은 마당을 거닐고있었다. 반반하게 다져진 석비레땅을 내려다보다가는 고개를 들어 유리처럼 파란 하늘을 쳐다보기도 하였다. 왜 그런지 안정이 되지 않는것이다. 독서를 하면 번민을 얼마간이라도 가실수 있을것 같아 몇장 읽었더니 혈압이 오르면서 머리가 휘휘 돌아간다. 그는 문득 김책이 또 나타날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러나 그것을 우정 피할 필요도 없었고 또 그닥 싫지도 않았다. 다만 그의 요청에 성근히 응할수 없는것이 매번 안타까울뿐이다. 독실한 농민같이 수수하게 생긴 김책은 침착하고 내성적이면서 또한 완강하였다. 공산당 본부의 요직에 있다는 그는 온적마다 한본새로 맑지 못하게 대하건만 낯색 한번 달리하지 않고 계속 같은 용무를 안고 또 같은 기분으로 찾아온다. 그래서는 똑같은 음조로 왜 교단에 나와주어야 하겠는가, 그것이 건국사업과 어떻게 련관되여있는가를 해설한다.

초인종이 울리였다. 아니나다를가 안동권은 김책이 온것으로 짐작하고 급히 대문을 열어주었다.

《선생님, 그간 안녕하셨습니까?》

하는것은 예상과는 판이한 서울신사였다. 향수내를 확 풍기면서 몇초동안 서있다가 이쪽에서 인사차림을 하자 중절모를 벗어들며 천천히 걸음을 내짚는다.

《선생님, 저를 기억하십니까? 한달전에 잠간 들렸던 일이 있었습니다만.》

《알만합니다. 민씨라고 하셨지요.》

《옳습니다. 민기환입니다. 감사합니다. 저를 잊지 않으시고 친절히 맞아주시니.》

안동권은 역시 그의 고유한 품성대로 손님을 친절히 안내해서 응접실로 들어갔다. 검소한 방에는 키낮은 네모탁자가 놓이고 그 둘레에 방석이 널려있었다. 창가에 놓인 화분대에는 유능한 원예사의 정성이 깃든 키낮은 무궁화 한그루가 청자기화분에서 싱싱히 자라고있고 벽 한쪽에는 김홍도의 그림을 모사한 족자 한폭이 단정하게 걸려있었다. 방안을 잠간 둘러보고있던 민기환은 눈부시게 흰 와이샤쯔목깃과 밤색바탕에 흰점이 찍힌 넥타이를 만져보고나서 침착하게 말을 떼였다.

《무엇보다 선생님께서 건강하시니까 저의 기쁨을 무어라 표현하기 힘듭니다.》

먼저번이나 이번이나 다같이 그의 침착한 거동이라든가 세련된 언어구사를 통해서 대단히 능란한 외교관같은 인품을 느낄수 있었다.

《온, 천만에, 저같은것이 뭣이기에.》

안동권은 손을 내저었다. 보다 세련된 몸가짐과 보다 능란한 례법을 그도 갖출수 있었지만 저쪽에서 정도를 초과하는 때는 불쑥 이렇게 엇나가는 괴벽한 점이 있었다. 그는 부엌에 대고 차를 가져오라고 하였다. 그러자 민기환은 방바닥에 놓았던 가죽트렁크를 가져다 절컥 열었다. 텍사스주 특산품인 고양이표 브란데와 담배 럭키스트라이크가 나오고 브라질제 커피도 한통 나왔다. 그것들은 모두 지함에 든것이였다.

《선생님, 달리 생각지 마십시오. 이것은 아무 의미도 없이 그저 제가 여기서 소비하고 갈것들입니다.》

빨락지를 째고 병을 내놓으니 술이나 담배들에서는 벌써부터 각각 향기를 풍기였다. 민기환은 담배를 테서 안동권에게 권하고 자기도 한대 붙여물었다.

《다시 말씀드립니다만 우리는 선생님께서 예정한 날에 나타나지 않기때문에 무슨 변고가 있든지 아니면 몸져누우신것으로 짐작했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정정하시니 참말 감개무량합니다.》

《아니, 내가 그쪽과 언제 날자를 정한적이 있었던가요?》

예민한 안동권은 과분한 치하속에 은근히 까닭을 캐는 뼈가 숨어있다는것을 감촉하고 웃으면서 되물었다.

《그거야 없었지만 저번에 왔을 때 감기가 나으면 지체없이 떠난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거야 어쨌든간에 서울서는 지금 선생님을 목이 빠지게 기다리고있습니다. 아마 누군가가 우정 찾아왔을거루 저는 알고있습니다.》

《오! 왔소 그런 일이 있었지. 려순공대출신이라고 하면서 안경을 낀 젊은이가 왔댔소. 그 사람은 인차 돌아간다고 했었는데 그후 어떻게 됐는지.》

《그 사람도 소식이 없고 선생님도 통 기별이 없으니 궁금할밖에요.》

홍차 잔을 밀어놓고 민기환은 브란데를 부어 권하였다. 안동권은 잔을 받으면서도 약간 불안해지기 시작하였다. 상대가 인차 속심을 드러내지 않으면서 멀리 환을 지어 죄여오기도 하고 또 때로는 툭툭 타진도 해오기때문에 한껏 정신이 긴장되였다. 한동안 이러저러한 이야기를 펼치던 민기환은 제낀옷 속주머니에 손을 넣어 하얀봉투 하나를 정중히 꺼내놓았다. 그는 이름이 보이는쪽으로 돌려잡더니 안동권앞에 두손으로 밀어놓는다.

《이것은 무엇입니까?》 안동권이 드디여 예측이 맞았다고 생각하면서 눈덕을 들어 예리한 시선으로 쳐다보았다.

《속을 보시면 아시게 됩니다.》

민기환은 안동권의 기분을 살피며 잘못하다가는 《무기명봉투를 나는 개봉할수 없소.》하면 안될것 같아 인차 봉투를 뜯어 단정히 내놓았다.

안동권은 무심히 속지를 집어들고 탁자에 놓인 돋보기를 걸치였다. 그리 크지는 않지만 예리한 빛을 뿜고있는 그의 눈은 잠시동안에 한장의 글을 다 읽어치웠다.

속지는 영문자로 된 글이 타자기를 거쳐 나온것이였다. 안동권은 돋보기를 벗고 속지를 한쪽으로 밀어놓더니 입가에 빙긋이 미소를 지었다.

그것을 본 민기환은 안도의 숨을 내쉬였다. 혹시 그 편지를 북북 찢어 창밖에 내던지든지 그렇지 않으면 상대자의 면상을 후려칠 경우도 예상했던것이다.

《보셔서 아시겠지만 이것은 선생님에 대한 저희들 그리고 저쪽의 최대의 신임의 표시인줄 압니다.》

《그렇소. 그것은 참말 고마운 일이요.》

이쯤되면 안심할수 있는것으로 보이는 모양인지 민기환은 기분을 돌리기 위해 술을 따서 각각 잔을 채우더니 《축하를 받아주십시오.》하고 잔을 들어올린다. 그러는 민기환의 얼굴에는 자못 희열이 넘쳐흘렀다.

《여보! 민군!》 안동권은 갑자기 하대하는쪽으로 호칭을 돌리면서 허리를 꼿꼿이 폈다. 《이 신임이라는것은 내게 과남할뿐더러 격에도 맞지 않소. 거치장스럽기까지 하구. <서울대학 학장으로 초대한다. 미군정청 고문 송성수> 여보! 똑똑히 듣소. 이 안동권이는 송성수따위의 추파에 매혹을 느낄 인간이 아니요.》

《아? 선생님,고정하십시오. 사실은 그런것이 아니라 저희들이 너무 선생님을 기다리다가 나중에는…》

《무엇때문에 당신네들이 나를 기다리는가 하는거요.》

안동권은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방안을 왔다갔다하였다. 언제 보나 온건하던 그의 언동은 거칠어질대로 거칠어졌다. 민기환이로서는 그것이 도저히 리해되지 않았다. 묵묵히 앉아있던 그는 고개를 번쩍 들었다. 인테리들의 경우에는 이런 때 단단히 눌러놓아야 한다. 그의 자존심을 그대로 두면 어느 지경에 이르게 될는지 모르는것이다.

《안선생!》하고 민기환은 나직이 불렀다. 안동권이 자리에 앉자 그는 엄엄한 눈길로 쏘아보면서 말하였다. 《우리가 선생님을 존경하고 기다리였다는것이 잘못이라면 잘못이라고 칩시다. 그러나 거기에 담긴 신임이야 그렇게까지 타기할수 없잖습니까. 더구나 우리는 저쪽의 동의와 지원밑에서 행동하는것만큼… 이에 대해서는 먼저번에도 약간 말씀올렸습니다만…》

불을 끄려고 쏟아부은것은 물이 아니라 기름격으로 되였다.

안동권은 얼굴이 새파래져서 소리쳤다.

《그러니 당신은 나더러 어데다 대고 굴복하라는거요. 나는 조선사람이란말이요. 서울대학 학장으로 초대한다는 글을 꼭 영어로 표기해야만 하겠소, 응? 미국? 그것으로 위압될 촌뜨기가 아니라는것쯤 당신은 모르오? 나를 뭐 어째보자구. 하긴 그것도 자유일수 있겠지. 그러나 하는짓이 어리석단말이요. 이제는 내가 공개해도 되오. 안동권으로 말하면 1944년 12월에 캘리포니아대학에서 데리러온것을 물리친적이 있소. 그 사람들은 나의 개인연구소를 꾸려준다고까지 했댔소.》

민기환은 어깨를 으쓱 추어올리며 놀랐다. 그런것까지는 몰랐던것이다.

《여보, 당신 똑똑히 들어두오. 내가 서울에 가는것은 당신들에게 필요되는것이 아니라 안동권 나자신의 필요에 의한것이란말이요. 그래 안동권을 무슨 미끼로 하려는건가? 응? 너절한 속물들같으니.》

《고정하십시오, 선생님. 사실은 저의 잘못이 큽니다. 선생님께서 여기 눌러앉으시면 서울과 남에 있는 그 숱한 지성인들을 이끌 사람이 누구겠습니까. 그래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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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산님의 댓글

강산 작성일

(위에서 계속)

민기환은 돌변하는 저쪽 기분을 어떻게 수습해야 할지 몰라 쩔쩔매였다. 한참동안이나 분노를 터뜨린 안동권은 더이상 말을 하지 않고 랭랭히 앉아만있다.

《이렇게 하면 내가 무례한 인간으로 된다는것을 나도 잘 아오. 그러나 난 지금 이렇게밖에 달리 할수 없소. 민군! 돌아가오.》

《선생님! 저는 이대로 돌아갈수 없습니다. 저는 선생님께서 서울로 오시겠다는 의사가 있었기때문에 그것이 빨리 성취되도록 도와드리기 위해서 한것인데 어째서 오늘에는 선생님이 이렇게 생각을 달리 하시는지 알수 없습니다.》

《달리 한다?》

안동권은 바퀴가 큰 귀를 상대쪽으로 돌리면서 반문하였다.

《그렇습니다. 왜 서울에 가신다는 예정을 바꾸시였는지.》 민기환은 울상이 돼서 두손을 앞으로 내대고 머리를 흔든다.

《말씀해주십시오. 제가 납득될수 있게말입니다.》

그렇게 되자 안동권은 더 론의할것이 없다는 투로 편지를 앞으로 썩 밀어놓으면서 차잔을 들어올린다.

《당신하군 우선 론리가 통하지 않아 말을 해낼수 없소. 달라지긴 누가 달라졌나, 응! 나는 서울에 가야겠다는 생각이 이전이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단말이요. 그런데 당신이 군정청이요 학장이요 하면서 잔꾀를 부리고있단말이요. 응? 누가 달라졌나 보오. 달라진건 그쪽이지. 그렇지 않소?》

민기환은 더 할 말이 없었다. 안동권의 명석한 판단과 빈틈없는 론리를 도저히 허물어낼수 없었다. 더구나 서울로 간다는것이 스스로 명백해졌고 그자신을 통해서 재삼 확인되였기때문에 그는 환성을 지를만치 기뻤다. 불행중 다행이라 할가. 하지만 그는 조심스럽게 체면을 유지하면서 후퇴해야 하였다. 결론이 이렇게 떨어지는것을 공연히 처참하다 할 정도로 빌붙은것이 후회되기까지 하였다. 그는 봉투를 다시 안동권이 앞으로 밀어내놓고 또 한번 잔을 찧을것을 제의하였다.

《감사하네!》 안동권은 시초에 유지했던 존대로는 끝내 돌아가지 않고 계속 도고하게 하대를 한다.

민기환은 잔을 비우고 거듭 건강에 류의할것을 말한 다음 자리에서 일어났다. 안동권은 민기환을 친절히 배웅하였다. 그가 늘쌍 자녀들에게 《상대가 누구든 관계없다. 집에 찾아온 손님은 문밖까지 잘 바래주어야 한다. 이것이 안동권의 집안의 가풍이다.》라고 훈계하군 했는데 이때도 그 생각을 하면서 고무신을 끌고 문밖까지 따라나갔다.

민기환은 두세번 거듭 인사를 하고나서 한길쪽으로 멀어져갔다.

《아! 이건 큰 고역이군. 오늘이나 래일쯤 김책이 또 나타나겠지… 허허 참.》

그는 고개들 쳐들고 긴 한숨소리를 터치였다.

언제 보나 맑고 깨끗하던 가을하늘이 피빛으로 물들어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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