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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소설 빛나는 아침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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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강산
댓글 1건 조회 4,600회 작성일 20-06-13 1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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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현이가 떠난 후에 박원식은 안명숙에게 무슨 용무가 있기에 그러는가고 물었다. 그러나 안명숙은 대수롭지 않게 웃어보이면서 처녀가 샤쯔를 만들어왔길래 입어보고 가라고 그랬다고 했다. 처녀말이 나오자 공연히 몸이 굳어진 그는 빨리 철도에 나가봐야겠다면서 휙 돌아서 나갔다. 키가 후리후리하고 어깨가 넓으며 미끈하게 생긴 박원식은 제입으로 군복을 입었을 때보다 격이 뚝 떨어졌다고 하지만 안명숙은 그렇게 보지 않았다. 사나이답게 언틀먼틀하게 생긴 얼굴륜곽이며 름름한 그 체구가 사복, 제낀옷에 의해 한껏 효과를 내고있었다.

《아니 넌 왜 그렇게 눈치가 없어, 평양처녀가.》

안명숙이 옆에 서있던 처녀의 등을 탁 밀쳐서야 비로소 필남이 걸음을 뗄수 있었다. 아닌게아니라 이제 놓치면 열흘이 될지 한달이 될지 기약이 없는것이다. 치마자락이 날릴만치 총총히 뒤따라가건만 저쪽에서는 뒤를 한번 돌아다보지도 않고 무엇에 쫓기듯이 내빼고있다.

《저! 이보세요, 이거.》

혼신의 힘을 다해서 웨치건만 귀에는 모기소리만큼도 울리지 못한다. 젊음이 가득찬 가슴이 급히 오르내리고 숨이 턱에 닿았다. 한데 천만다행으로 어떤 할머니가 박원식에게 길을 묻고있었다. 할머니가 길을 물었는지 그가 말을 걸어서 그 핑게로 처녀를 기다렸는지 알수 없으나 어쨌든 필남이는 그사이에 따라잡을수 있었다.

록록치 않은 깔끔한 눈을 치켜뜨면서 처녀는 박원식이앞에 불쑥 나섰다.

《할머니, 조심해 가세요. 요 골목 지나서 인찹니다.》

성급하고 거칠다고 보았던 그는 심술궂을만치 깐깐해져서 골목어귀까지 로인의 손목을 잡고 가기까지 한다.

필남이쪽으로는 고개도 돌리지 않는다. 혹시 그러다가 그쪽 골목으로 아주 빠져나갈것 같아 처녀는 그의 뒤에 붙어서지 않을수 없었다.

《필남인 정말, 남보는데서 졸졸 따라다니면서…》

말로는 노엽다는것이지만 얼굴에는 기쁨이 넘쳐있었다.

《누가 따라왔나요. 그쪽에서 막 내빼구선.》

긴 살눈섭을 들어올리자 흑진주같은 눈동자가 사나이를 옴짝 못할만큼 취하게 만든다.

《왜 왔어?》

《옷이 됐으니 입어보라고 그래서.》

서로 번연히 알고있는 숨박곡질대화가 몇마디 오가는 사이에 그들은 꼭같이 이대로 헤여질수 없다는 속심을 드러내보이고야말았다. 하긴 이렇게 되기를 그들이 서로 바랐을수도 있다.

박원식은 우정 역전쪽으로 나가지 않고 양기산기슭으로 돌아가기로 하였다. 날은 어두워져 거리는 네온으로 장식되였는데 그들이 한가롭게 걷고있는 아카시아숲속만이 가뭇 정적에 잠겨있었다. 바람이 불적마다 동전잎같은것이 우수수 떨어지군 하였다. 박원식은 드문드문 서있는 외등밑에 이르게 되자 처녀를 몇걸음 앞세워놓기도 하고 또 뒤에 두기도 하면서 얼굴이며 몸맵시를 앞뒤로 뜯어보는것이였다. 알맞춤한 키에 급하게 곡선을 이룬 어깨와 목 그리고 팽팽한 앞가슴은 오늘따라 처음보게 된 깜장치마에 흰저고리와 황홀하게 잘 어울려있다. 건강미가 안받침된 감실감실한 살결에 언제나 사색하고있는듯한 눈과 약간 도드라진 입술, 그것들은 평양고녀출신이라고 볼수 없을만치 순박하고 어져보이였다. 하지만 박원식은 처음부터 이토록 아름다운 처녀의 용모에 대해서는 그닥 관심이 없었고 오직 자기를 그리워한다는 그것을 처녀의 얼굴에서 읽는 순간에 가슴에서 확 불길이 용솟음쳐올랐던것이다. 부모와 형들을 부암동근거지에서 다 잃고 토스레잠뱅이적삼을 걸친채 마안산밀영을 찾아갔던 그였다. 그는 이때까지 오직 전우들의 보살핌과 지휘관들의 관심속에서만 살아가는데 습관되여있었다. 한데 눈앞에 아릿다운 처녀가 몸에 감쌀 속옷이며 양복을 해들고 나타났을 때 그는 머리가 뗑 하고 리성이 혼미해지고말았다. 하여 그가 여태 상식으로 간직했던 우정을 거치지 않은 애정은 백년불행의 시작이라든가 애정은 공통된 지향과 행로에서 얻게 되여야 한다는 등의 교훈을 고려할 여유가 전혀 없었던것이다. 인정에 주려왔던 그가 이성이라는것을 처음으로 대상하게 되였을 때 이미 간직했던 리상이나 기존지식같은것은 모두 걷잡을수 없이 무너지고말았다. 하지만 이 단순하면서도 복잡한 로정을 처녀나 주변사람 그 누구도 알수 없었다. 다만 지금 바싹 붙어서서 거의 공포에 질리다싶이 되여 따라오고있는 필남이만은 저편에서 자기를 굴복시키고도 남을만 한 야심과 정열과 과격함이 있다는것을 알고있을뿐이다. 처녀도 고녀시절과 그 이후에 사람들한테서나 또는 책에서 얻은 남성에 대한 견해가 없지 않았다. 그러나 박원식을 만나는 순간부터 처녀는 남성의 미는 행위의 고상한 목표 또는 애정을 영원히 지켜낼수 있는 완강한 의지라는것을 생각할 여유조차 없게 되였다. 처녀가 보건대 박원식은 열정의 화신이였다. 예리하지 못하고 뭉툭한 심리, 세련을 거치지 못한 대인관계에서의 조잡성, 군사, 전투 그것외에는 모든것을 무시해버리는 일면성, 이를테면 9가지 단점에 단 하나의 장점이라 할수 있는 그의 열정 그것이 이여의 모든것을 압도해버린 그런 남자였다.

《그만하고 돌아가오.》

박원식은 앞을 막아서며 약간 갈린듯 한 목소리로 말을 하였다.

《여기서 옷을 입어볼수도 없는거구 또 입어봤대야 그게 무슨 소용이요.》

처녀는 긴 살눈섭을 들어올리며 절망적으로 쳐다보는것이였다. 처녀의 그 시선은 (왜 그래요. 나는 그래도 이것을 정성껏 만들었는데… 캄캄하고 바깥이니까 입어볼수는 없다쳐도 소용없다는건 또 뭐야요.)하고 웨치고있었지만 오히려 그의 입술은 피가 날만치 씹혀있었다.

한동안 서로 말없이 서있었다. 그러다가 박원식이 까닭을 밝혀야겠다고 생각했음인지 가던 길로 또 걸음을 내짚으며 무뚝뚝하게 입을 놀리였다.

《지금 철도가 잘 운영되지 못해 온 나라가 큰 난관에 처해있소. 역전마다 인산인해요. 물자를 싣지 못해 공장이 못돌아가고 식량이 없어 아우성이고…》

《그런데 그것이 누구탓이게 그쪽에서 그렇게까지.》

처녀도 얼마간 대담해져서 말끄러미 쳐다보았다.

《탓으로 말하면 일본제국주의탓이지. 그렇지만 그걸 해결할 의무와 책임이 우리들한테 있단말이요.》

《해결할 의무와 책임이요?》

처녀는 더욱더 미궁으로 들어가는것 같았다. 자기가 알고있는 범위에서의 의무나 책임은 그런것이 아니였을뿐더러 설사 그렇다 하더라도 그것때문에 자기들의 사랑이 파동을 겪어야할만 한 그 어떤 타당성이나 필연성을 꼬물만치도 찾아낼수 없었다. 더구나 며칠전까지 그렇게 소망했던 샤쯔가 이제는 전혀 쓸모없는것으로 보이게 되는 그것과 전혀 련결시켜낼수가 없었다.

《그러니까…》

하고 처녀는 따지고들었다.

《그러니까 가져다 둬두오.》

《둬두라구요?》

너무나 놀라와 처녀는 무의식적으로 받아외웠다. 그것만으로도 처녀는 며칠사이에 박원식에게 어떤 근본적인 변화가 일어났다는것을 능히 짐작할수 있었다. 가슴에 안았던 보자기를 동댕이치고 목청껏 울음을 터칠만치 분한 생각이 들었다. 그렇지만 처녀는 참았다. 아직 열어보아야 할 미궁의 칸은 얼마든지 있었고 또 이 자리에서 설음을 보인다고 해서 해결될 성질의것도 아니였다.

《그런 의무와 책임이 세상에 어디 있어요. 내가 알기에는 김일성장군님부대는 10년이상 산중에서 초근목피를 달게 여기며 일제와 싸웠다지 않아요. 그래서 인민이 사랑하고 존경하고 나도 역시 그렇고. 그런데 철도가 어떻고 공장이 어떻고 식량이 어떻고 그게 왜 거기 책임이겠어요. 그건 다 거짓말이고 결국 내가 싫어서…》

손등으로 눈을 가리고 숨을 흑 들이그으며 고개를 돌리는 순간 《아니요, 아니요.》하며 박원식은 마치 새새끼를 덮치는 아이들처럼 처녀의 어깨를 덥석 부둥켜안았다. 처녀가 본능적으로 반발하자 그는 억센 팔로 더 부쩍 그러당겨 가슴에 머리를 눌러대였다.

《난 달라진것이 없소. 진정이요. 나는 필남이를 사랑하오.》

짓눌린 박원식의 목소리가 아카시아숲속을 울리였건만 그 누구도 그것을 들을수가 없었고 지어 턱밑에 안긴 처녀마저도 들은것 같지 않았다. 하지만 처녀의 얼굴과 입술은 불덩이처럼 뜨거웠으며 온몸으로 이성의 애무를 갈망하고있었으나 행동은 그와 정반대였다.

끝내 몸을 빼낸 처녀는 두걸음이나 뒤로 물러나서 박원식이 안고있는 보자기를 쏘아보며 명령하였다.

《그걸 이제 입어보세요. 그렇지 않으면 물러서지 않겠어요.》

박원식은 입을 한 반쯤 벌리고 저편을 쳐다보면서 울상이 된다.

《그렇게 똑똑히 말했는데 그래도 못믿겠소?》

《그런게 아니예요.》

또 부인하게 되자 박원식은 상의를 풀밭에 벗어던지고 보자기의것을 와락와락 헤치더니 와이샤쯔에 팔을 꿰였다. 그러자 처녀는 빽 돌아서서 어깨를 들먹이며 울기 시작하였다. 무엇때문에 우는지 자기자신도 몰랐다. 욕할 때는 삐쭉했다가 얼리며 가슴에 안아줄 때 울음을 터치는 어린애심정과도 같은것인지 덮어놓고 눈물이 그칠새없이 흘렀다.

귀전에 울린 박원식의 음성이 《이제 석탄투성이가 되겠는데》하는것 같아 처녀는 《아무래도 좋아요. 불에 타도 좋구요.》하려고 했지만 그것은 종시 입안에서 나가지 않았다.

그들은 다시 걸어서 평양역쪽 한길에 들어섰다. 밤이 깊어 사람들 래왕이 거의 없었는데 다만 야경을 서는 사람들의 그림자가 이따금씩 보일뿐이였다. 박원식은 묵묵히 길바닥만 내려다보며 걸었다. 이런 때 무슨 말을 해야 처녀에게 위안이 되겠는지 알지도 못하였으며 설혹 그것을 알고있었다 해도 입술에 발린 그런 천박한 말을 번지고싶지 않았다. 하지만 그도 노상 고민이 없는것도 아니고 또 처녀와 의논하고싶은 마음도 없지 않았다. 바로 그것이 얼굴에 내비친것을 보고 처녀가 그토록 강경해지고 초조해졌는지도 모른다.

며칠전에도 그랬고 또 오늘도 그런 충격이 있었는데 동무들가운데서 유격대원들의 사랑, 결혼, 그런것은 지금 너무 시기상조라는것이다. 어떤 친구들은 공공연히 비난조로 말하기도 하였다. 군복을 벗자마자 기다렸다는듯이라든가 아직 행군길이 멀고먼데 벌써 배낭을 벗자고 하는가 그런것이였다. 좌현이의 귀띔에 의하면 지휘관들가운데도 머리를 흔드는 사람이 있다고 하였다. 때문에 박원식은 이런 정도로 있다가 적절한 기회를 볼 생각도 없지 않았다. 그리고 소탈하게 필남이를 설복해서 자기와 같은 립장에 서도록 만들고싶었다. 그러나 매번 만나기만 하면 감정은 심술궂게 조급한데로 끌고갔으며 자기와 다른 또하나의 박원식이가 제멋대로 휘둘러놓는것이였다. 마치 처녀의 빛나는 눈동자는 그 모든것을 꿰뚫어보고있는듯 하였다.

《결국 지내보니까 필남이는 제마음대로 할수 있는 그런 남자를 요구하는거지?》

하고 박원식이 롱을 걸자 《그렇게 보이면 그렇게 생각해도 좋아요. 세상의 모든 남녀관계는 그렇게 되기마련이라나요.》하고 천연스럽게 응수하였다.

《아니 뭐?》

놀라와하는데 처녀는 《왜요?》하고 제편에서 오히려 놀라움을 보인다.

그들은 서로 롱담을 하고있었지만 그안에는 진심의 알맹이가 깃들어있었다.

《그렇단말이지.》 박원식은 처녀의 어깨를 붙잡고 다정하게 말하였다. 《필남이, 나는 이렇게 생각해. 남편이 차지하는 안해, 안해가 차지하는 남편 그것은 옳소. 그렇지만 그것이 전부가 될수는 없고 그렇게 돼서는 안되오. 내 말 좀 듣소. 필남이는 나를 완전히 제것으로 만들고싶겠지. 그러나 그렇게 되면 나는 바보구실밖에 못하오. 이 박원식은 필남이보다 먼저 혁명이 차지해야 하오, 알겠소? 지금 내가 어데로 가는가. 철도기관구로 가오. 혁명이 거기서 부르고있단말이요. 우리는 이렇게 여태 살아왔소.》

잠간 이야기가 중단되였을 때 마주서있던 처녀는 어깨를 들었다놓으며 긴숨을 내쉬였다. 어쩌면 그렇게도 솔직하고 고상한가, 여직 들어본 일도 없고 따라서 상상도 할수 없었던 그런 숭고한 이야기가 지성이 깊지 못하다고 보았던 저편에서 거침없이 흘러나오고있다.

《필남이 내 말을 듣소. 우리도 따뜻한 온돌방이 그리웠소. 또 안해와 자식을 아침저녁으로 쳐다볼수 있는 단란한 가정도 필요했구. 그런데 우리는 눈구뎅이속에서 잤고 가정을 뒤에 두고 밀림속을 걷고걸었지. 그러다는 전투에서 희생되고, 그래 지금 평양에 온 조선인민혁명군은 얼마 많지 않소. 그들은 천에 하나 만에 하나 살아남은 사람들이요. 알겠소. 숱한 사람들이 해방된 조국이 그리웠지만 종시 오늘을 못보고 갔거든. 자! 이렇소. 이런데두 내가 깡그리 필남이가 차지하는 그런 사람이 되면 좋겠소? 우린 할 일이 많소. 이 땅에다 나라를 세워야지 또 세계혁명도 해야 하구. 와이샤쯔에 넥타이를 매구 필남이와 나란히 대동강가에 앉아 밤새도록 이야기를 하고싶소. 나에게 하고싶은 말이 오죽 많은줄 아오. 나의 어머니, 아버지 고생한 이야기두 하구, 유격대밀영생활도 참 재미있었소. 필남이 알겠지, 내 말을…》

《알겠어요.》

처녀는 불타고있는 사나이의 눈을 말끄러미 쳐다보면서 입새로 대답을 겨우 내보내였다. 하지만 그것은 가슴속깊은데서 퍼올린 진심이 담긴것이였다.

《후회하지 않겠지. 사람이 슴슴하구, 뚝바우구. 그렇지만 한가지만은 좋은점이 있을거요. 그건 뭔가. 변하지 않는다는거요. 우리가 배운것은 변절하지 않는다는것을 목숨을 걸고 배웠소. 혁명앞에서도, 동지앞에서도 또 처녀앞에서도 그것을 담보한단말이요. 그만하고 난 가겠소. 자 다시 만나기요.》

박원식은 철길옆 느티나무밑에 이르자 손을 내밀었다. 《나는 래일 서울로 떠나오. 보름이 될지 한달이 될지 모르겠소. 어쨌든 갔다오겠소.》하는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오는것을 꿀꺽 삼키였다. 무슨 말인지 할듯할듯하면서도 자꾸 손만 흔들어준다. 또 휘딱 장면을 뒤집어놓는데 놀란 처녀는 손을 내밀기는 했지만 그다음은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 손을 놓고 박원식이 돌아설 때 《좀 서세요.》하고 엉겁결에 소리를 쳤다. 박원식은 돌아섰다. 한걸음 사이를 두고 마주섰는데 처녀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쳐다본다. 이윽해서 박원식이 또 자리를 뜨려고 하자 다시 같은 구령을 반복하는것이였다. 《좀 서세요.》 그다음에도 두번이나 같은것이 반복되였다.


5

 

《우선 잠자리부터 구하고보지 않겠습니까?》

옆에서 따라오던 리만석이 넌지시 한마디 던졌다. 그러나 무슨 생각에 잠겼는지 박원식은 전혀 반응이 없었다.

한참만에야 박원식은 담배를 붙여물고 쓰겁게 한마디 내뱉었다.

《기분이 나빠서. 원 조선땅인지 미국땅인지 갈래판을 모르겠거든.》

그때 그들앞으로 총을 멘 미국병사 3명이 입에 무엇을 넣고 질겅질겅 씹으면서 지나갔다. 룡산쪽으로 통한다는 대통로로는 푸른 연기를 풀풀 내불면서 땅크 3대가 기여가고있다.

《여보 만석동무, 기왕 여기까지 온바에는 경성역이라는것이 도대체 어떻게 생겼는지 구경이나 좀 하고갑시다.》

《그게 좋겠습니다. 이름이 그래도 서울인데 돈 내고 잘데야 없겠습니까.》

그들은 천천히 걸어서 대합실로 들어갔다. 사람우에 사람이 덮씌우다싶이 되였다. 남녀로소 각양한 사람이 각양한 모양으로 앉기도 하고 눕기도 하구 꿈지럭거리기도 한다. 혼잡정도는 한달전쯤의 평양역과 비슷하였다. 그중 볼만한것은 벽에 나붙은 광고들이였다. 어떤것은 《광고》이고 어떤것은 《알림》이고 어떤것은 《공시》이고 또 어떤것은 몇마디 내용뿐인것도 있다. 박원식은 발을 골라 디뎌가며 하나씩 읽어나갔다. 무슨 회가 발족했는데 본소는 어데다, 무슨 강연회가 있는데 강사는 누구다, 무슨 려관이 새로 나왔는데 숙박비는 얼마다, 이러루한 등속인데 내용이 같은것은 하나도 없고 종이장의 규격이 각이하고 글을 쓴 색도 붉은것, 검은것, 푸른것 등으로 가지각색이다.

한참이나 그렇게 나가는데 한군데에 특별히 사람이 많이 모여 웅성거리는곳이 있었다. 틈을 비집고 들어가니 과연 그럴만하게 큰 광고문이 하나 나붙었다. 붉은색으로 쓴 글자 하나가 옹근 책장 하나만큼씩이나 컸다.

 

절세의 애국자이시며 민족적영웅이신 김일성장군님 서울개선을 열렬히 환영한다.

김일성장군 환영준비위원회 위원장 홍명희

 

다음은 《단군》하고 몇년 몇월 날자가 있었던것 같은데 그밑은 떨어져나갔다.

《하아!》

박원식은 눈을 둥그렇게 뜨고 입을 한반쯤 벌리였다. 보고 또 보았지만 역시 틀림없었다. 잠시동안에 그의 얼굴은 벌겋게 상기되였다. 기쁘고 환희로운 감정이 온몸에 젖어든것이다. 그는 좀체로 그자리를 뜰수 없어 시간가는줄 모르고 서있었다. 모여선 사람들 각기 제나름으로 한마디씩 한다.

《며칠전에 평양에 오셨다고 방송에 나왔다면서요.》

《그럴리가 있소. 뜬소문이지. 장군님께서 개선하시면 먼저 서울에 오실건 틀림없지요. 저기에 9월 28일이라고 날자가 있었다는군요.》

《그러니 더 의문이 아니요. 날자가 1달 가까이나 지났는데.》

《어쨌거나 불일간 서울에 개선하실것은 틀림없어요.》

각이한 사람들의 종잡을수 없는 말소리를 들으며 그들은 거리로 나왔다.

《참말 대단하군요. 대단해요. 여기 와보니까 장군님에 대해서 더 잘 알겠습니다. 과시 3천만 온 민족이 떠받드는분이지요.》

리만석이 뒤에 따라오며 연방 감탄을 한다.

그들은 숙소를 정하기 위해 전차길을 건너 세브란스병원쪽으로 들어갔다.

세브란스병원을 지나고나니 길 량쪽에 간판이 촘촘히 잇대붙었는데 그것은 모두 려관 또는 려인숙들이였다. 벼락치듯 간판들을 내붙이였다. 양철이나 널쪽으로 만든것도 있었지만 갈노전에 뼁끼칠을 해서 붙인것은 몇배로 더 많았다. 《신의주려관》, 《함흥려관》, 《철원려관》등 북조선의 이름난 지명이 련달아 나왔다.

정신없이 간판을 쳐다보며 나가던 리만석이 《알만합니다. 알만해요.》하고 자기 해석을 내놓았다. 북조선지명을 적당히 따온 이 려관들은 모두 북에서 오는 손님을 자기한테로 끌자는 수작이 명백하다고 하였다.

박원식은 고개를 끄덕이며 장사물계에 민감한 리만석에게 감탄을 표시하고나서 중절모를 벗어 훌쩍훌쩍 부치였다. 부지런히 걸었더니 땀이 난다.

《여기 <사리원려관>이 어떻습니까?》

박원식이 두릿두릿 사위를 살피고있는 리만석에게 물었다.

《나도 그쯤 생각을 하면서도 좀더 그럴사한데가 없겠는가 해서 살피는중입니다.》

그들은 《사리원려관》앞으로 다가갔다. 주인을 찾자 안방에서 몸이 비대한 중년녀인이 뚱기적거리며 나왔다. 중절모차림을 한 박원식을 쳐다보더니 녀인은 《신사나리는 안방 고급에 들구 이쪽사람은 사랑방 목침칸에 드시오.》하며 따라들어오라고 한다.

《우리는 한방에 들어야겠습니다. 동행이니까요.》

박원식의 점잖은 목소리에 반발이나 하듯이 녀인은 《글쎄 북에서는 공산주의라니까 주인과 머슴을 한이불에 재울지 모르나 여기는 다르지요. 그대신 꼭같이 고급을 물어야 합니다. 하루밤에 1원씩》하며 돈만 내면 만사는 해결이라는 기색을 보인다.

박원식은 방안에 들어가 트렁크를 선반에 얹고 옷을 벗어 건다음 우선 담배를 붙여물었다.

그러는사이에 리만석은 어덴가 갔다오더니 좋은수가 있다고 하며 기뻐하였다.

《박선생! 요 앞에 천막촌이 있는데 저걸 보고 <38따라지>라고 부른다고 합니다. 거기에는 38°선을 넘어가고 넘어오는 사람이 드는덴데 거기에 줄을 늘이면 양춘만을 쉽게 찾을수 있을것 같습니다.》

《그것 참 잘됐습니다. 그런데 도대체 따라지라는건 무슨 말입니까.》

《그걸 모릅니까. 하긴 우리와 다르니까. 모이쪼에서, 아하 모이쪼가 또 뭔지 모르겠지요. 하여간 투전놀음인데 3자하고 8자를 합치면 11이 되는데 그것은 열을 떼갈기고 1끗이란말입니다. 그러니 1끗은 최하 즉 맨 하바닥이란 뜻입니다. 그저 그러루한거지요. 여하간 오가잡탕이 모인데서두 잘 골라잡으면 혹시 갑오가 나올수도 있습니다.》

박원식은 신기하게 듣고있다가 껄껄 웃었다. 최하층생활에서는 모르는것이 없는 리만석이 부러울 정도이다.

어느덧 저녁때가 되여 사랑채에 있는 그 목침칸에서 장길이상을 펴놓고 밥을 먹기 시작했다. 박원식이와 리만석은 고급방에 들었기때문에 제자리에서 소반을 각각 받게 되였다.

상을 물리고 그들은 《38따라지》로 찾아갔다. 참말 놀라운 광경이였다. 사람들이 자고 먹고 하다뿐이지 이것은 집도 아니고 천막도 아니며 어느 리재민의 가설거처라고나 할수 있었다.

판자, 노전, 풍천 닥치는대로 주어다가 둘레를 막고 하늘은 함석장, 합판, 석유초롱 따갠것으로 엉성하게 가려놓았다. 그속에서 연기를 피우고 악다구니질을 하고 흐지부지하고 가끔 노래도 나온다.

박원식은 골목골목을 찾아다니며 평안도사람들이 어데 들어있는가 알아보았다. 평안도도 여러가지였다. 안주, 남포, 숙천, 개천이 있는가 하면 승호, 강동도 있었다. 그의 속심은 강선과 잇닿은데를 찾고싶었지만 그런 방향으로 화살이 그어지지 않았다. 양춘만을 찾기 위해서는 이미 리만석이와 토론해서 몇개의 지점이 찍혀있기는 하였다. 양춘만의 6촌이 있다는 명동 50번지와 종로에 있다는 소학교시절의 그의 은사네 집이였다. 하지만 박원식은 유격대시기 척후에 나가보아도 언제나 예견하지 않았던 뜻밖의 사건이 항상 문제로 되여있어서 꼭 그 2개 대상에만 국한할수가 없었다.

그는 제낀옷에 넥타이를 멘채로 여기저기 기웃기웃 들여다보면서 《여긴 어데요?》하고 묻기도 하고 《여기 강서사람이 없소?》하고 나드는 거적을 들어보기도 하였다. 둘이 서로 갈라져서 찾아보기로 하였다. 매사에 성실한 박원식은 밤이 깊어서야 려관으로 돌아왔다. 리만석은 진작 단념한것인지 자리도 펴지 않은채 웃목에 활개를 펴고 코를 드릉드릉 골고있다. 웃방에서는 두런두런 말소리가 나면서 무엇인가 철썩철썩 메치는 소리가 났다. 자리에 누워서 귀를 기울이니 도박을 놀고있었다.

《삼칠장 짓구 오땅이라?》 그 소리에 뒤이어 《오늘밤에 철원량반 그 무슨 땅이 그렇게 잦아.》하자 또 누군가 《뽑을 때 련달아 뽑아야지. 자! 이번에는 내가 박을 쥐겠소. 5원을 대겠소.》하였다. 이런 투로 종잡을수 없는 대화가 오간다.

《5원이라! 원산 손님치군 손탁이 너무 엷구려.》

《엷구 두껍고 가릴거 있소. 갑오만 뽑구려.》

《자! 여기 모잇쪼.》

《난 그만.》

《자! 알알팔짓구 삼오 여덟끗! 제꺽제꺽 펴시오.》

《어이구! 투전이 사람 죽인다. 하루종일 머렝이야.》

《자! 쌍 이에 륙 짓구 알팔 갑오라! 흐흐흐.》

이런 식으로 웃기도 하고 가슴이 꺼지게 한숨도 쉬고 또 싱갱질도 하였다.

박원식은 새벽 3시가 다 되여 깜박 졸고 다시 일어났다. 그때는 벌써 리만석이 일어나 사이문을 열어놓고 투전군의 등뒤에서 구경을 하고있었다.

아침을 일찍 채근해 먹고 박원식은 명동6번지와 종로 3정목을 찾아떠났다.

서울거리는 상상외로 복잡하였다. 명동거리 6번지에 양한규라는 명확한 주소성명을 가지였는데도 옹근 5시간 걸려서야 겨우 찾아낼수 있었다. 박원식은 신사풍의 차림새가 몸에 붙지 않은데다가 열댓번 길을 물어서 찾아오고나니 지칠대로 지쳤다. 《이건 밀림에서 헤매는것보다 더 한심한걸.》하고 혼자소리를 하면서 거치장스러운 중절모를 벗어 활활 부채질을 하였다.

주인을 찾으니 허리가 굽은 령감이 널대문을 빗서 열고 내다본다.

《누구를 찾으시오?》

《저, 이 집이 양한규댁이 맞는지요?》

그러자 먼저 대문이 닫기고 빗장지르는 소리가 난후에 《그 집은 작년에 부산으로 갔소.》하는 소리가 겨우 널판자틈으로 새나왔다.

박원식은 종로쪽으로 발걸음을 돌리며 떨떨한 주소를 가지고 양춘만을 찾는다는것은 전혀 불가능하다는것을 확신하였다. 그러면서도 그는 종로 3정목 소학교뒤골목 한성약국집을 찾아갔다. 두툼한 근시경을 끼고 머리가 훌렁 벗어진 50대의 오선생은 추위가 나기전부터 감기에 걸려서 쿨럭쿨럭 기침을 하였다. 양춘만을 찾아왔다고하자 오선생은 《평양에서요?》하고 놀라움을 보이는것이였다. 세파에 찌든 오선생은 옷차림새나 말투에서는 별것이 없었지만 로동자풍의 체취에서 대뜸 양춘만에게 심상치 않은 일이 생겼다는것을 짐작한 모양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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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산님의 댓글

강산 작성일

(위에서 계속)

《글쎄 나도 모르지요. 한달전에 양춘만군의 친구를 길가에서 만났는데 짬을 봐서 이제 나를 한번 찾아오겠다고 하더랍니다. 평양에서 왔다면 혹시 강선제강소에서 왔는가요?》

《예! 제강소에서 왔습니다.》

《아! 그러세요.》

오선생의 얼굴에는 그늘이 휙 지나간다.

《매우 실례의 말씀입니다만 우리는 오선생님에게도 할 말이 있는데 잠간 방을 빌수 없겠습니까?》

《네? 저한테요?》

뒤로 한걸음 물러나며 흠칫 놀라는것이였다. 몇초동안 생각하더니 마루쪽을 가리키면서 올라가자고 하였다.

박원식과 리만석이 웃목에 앉고 오선생은 누웠던 자리를 밀어제끼고 아래목에 앉았다. 박원식은 유격대에서 하던 군중공작방법을 쓰기로 하였다.

《오선생님! 이 동무는 강선제강소 강철용해공이고 저는 평양철도국에서 일을 봅니다. 우리를 좀 도와주십시오. 강철이 없어서 기관차가 움직이지 못하고 탄광에서 탄을 캐내지 못합니다.》

무엇인가 항상 깊이 사색하고있는듯한 오선생의 눈이 듬직하고 완강해보이는 두 청년을 눈여겨보고있다. 한생 중학교 대수교원을 하면서 생계를 보태기 위해 안해에게 약국을 차리게 한 빈곤한 지식인의 관찰은 예리하였다.

《동무라구요? 하긴 북에서는 호상 동무로 통한다지요. 공산당에서는 그것이 하나의 미풍미덕이구요. 한데 미력한 저에게 무슨 연고로 도움을 청하는지 알수 없습니다. 저는 아무런 능력도 없습니다. 어린 학생들에게 한뉘 산수를 가르치고있을뿐인데요.》

《이제 말씀드리겠습니다. 여기서도 아시겠지만 지금 평양에서는 김일성장군님께서 개선하셔서 정치를 펴고계십니다. 지난 10월 14일 평양공설운동장에서 연설을 하셨는데 우리 조선은 민주주의자주독립국가를 건설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박원식은 연설내용을 거침없이 설명하기 시작하였다. 한참동안이나 귀를 기울이고 듣고있던 오선생은 고개를 끄덕이며 탄복하였다.

《옳습니다. 우리도 여기서 신문을 보았습니다. 장군님께서 이제 서울로 오신다는 소문이 자자합니다. 그러니 젊은이들은 장군님의 뜻을 받들고 강철을 만들고 기관차를 달리게 하자고 하겠습니다?》

《그렇습니다.》하고 박원식은 한걸음 나앉으며 목소리를 높이였다. 《그런데 강철을 만들어야 할 기술자인 양춘만은 여기 와서 돌아다니니 한심한 일이 아닙니까.》

《과시 옳은 말이요. 그러나 내 모르긴 해도 양춘만군이 절대로 허송세월은 하지 않을것이요. 정작 그 사람의 립장이 되고보면 강철을 꼭 강선에서만 만들어야 한다는 법은 없을테니까.》

그때 여직 침묵하고있던 리만석이 끼여들었다.

《오선생! 양춘만은 강선에 가야 합니다. 우리는 그래서 여기까지 찾아왔습니다. 거기에 처자도 있고 몇달전까지 강철을 만들던 친구들이 다 있습니다. 기다립니다.》

《그렇기는 한데요.》하고 오선생은 약간 의아한 빛을 띠고 두 청년을 다시 번갈아보고나서 말을 계속하였다.

《공산당에서는 인테리를 잡아다가 강제로동을 시킨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놀라서 달아났겠지요.》

《오선생님, 그건 오해입니다.》하고 박원식이 재빨리 부정하였다.

《불 안땐 굴뚝에 연기날가 하는 식으로 그래도 얼마간…》

《옳습니다. 연기가 났다면 불을 땠을것입니다. 그러나 그건 우리가 땐것이 아니라 일제나 친일파 민족반역자놈들의 악선전입니다. 김일성장군님께서 개선연설에서 민주주의독립국가를 세우기 위해 힘있는 사람은 힘을 내고 지식있는 사람은 지식을 내고 돈 있는 사람은 돈을 내야 한다고 가르치시였습니다.》

《나도 그걸 읽었습니다. 참말 김일성장군님은 하늘이 낸 위인이요. 그것이 우리 3천만 겨레의 뜻인줄 압니다.》

부엌에서 저녁준비를 하는 소리가 났다. 박원식은 후에 다시 만나게 될수 있을것이라는 인사를 남기고 마당에 나섰다.

《혹시 양춘만선생이 여기 오거나 그의 행처를 알게 되면 저희들 이야기를 꼭 전해주십시오. 우리는 세브란스병원 뒤골목 <사리원려관>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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