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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소설 푸른산악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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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강산
댓글 1건 조회 2,322회 작성일 20-05-10 2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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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jpg

22

 

담배불이 빨깃하게 타비칠 때마다 피터진 손끝과 뒤젖혀진 손톱이 아프게 눈을 찔렀다. 손만아니라 얼굴모상도 험상스러웠다.

《뭘 그렇게 뚫어지게 보오?》

황영학의 언짢아하는 말에 로병관은 너털웃음을 쳤다.

《난 옛날옛적일을 생각해보는중이요. 백두산화산이 분출하며 지각이 뒤집혀지고 이 동굴이 무너졌을 때… 동무의 그 조상님들이 어떠했겠는가.》

《저 동무들이 듣고있소.》

황영학은 아직도 실신상태에서 깨여나지 못한 군인들을 가리켜보았다. 로병관은 또 한번 가슴이 저릿해지는중에 사흘전과 몰라보게 달라진 굴간을 새삼스럽게 둘러보았다. 굴간바닥은 아름드리 바위돌과 흙더미들로 묘한 산줄기를 이루고있다. 자동차로 실어도 한차분이 넘을 그 바위와 흙은 이 《혈거인의 동굴》을 영원한 무덤으로 만들번 한 것들로서 황영학이와 실신상태에서 깨지 못한 전사들이 한치한치 손끝으로 파가며 밀어제껴나간것들이다.

탈환전투전까지는 전혀 상상 못했던 일이였다.

20여km 전선의 모든 고지와 릉선들에서 함성을 올리고 위혁사격을 들이대며 일거의 반돌격기세를 보이고 1211고지 뒤골짜기에서 끌어온 중곡사포들이 965고지 뒤통수를 타격할 때 팔에 흰천을 동인 탈환조가 소리없는 걸음으로 고지기슭에 붙고 그 검은 파도가 산중턱 어둠속에 잠겨든것을 확인한 로병관도 권총을 뽑아들었다.

그때 일이 벌어졌다.

탈환조가 닿자면 아직도 상당한 거리를 두고있는 고지꼭대기에서 불시에 《만세》의 함성이 일며 수류탄폭음과 자동총사격이 벼락치듯 했던것이다.

(도대체 어떤 《유령》들인가.)

탈환조를 뒤따라 고지에 올랐을 때에야 그 《유령》들이 《혈거인들의 동굴》에서 뛰쳐나온 전사들이라는것을 알게 되였다.…

《난》

황영학은 담배불을 비벼끄며 로병관을 곧추 보았다.

《동무에게 한가지 긴요한 부탁을 할것이 있소.》

《무언데-》

《그건 이 고지가 함락된 일이 없었던것으로 해달라는것이요. 아까 전사들도 말하지 않았소. 다들 눈이 시퍼래 굴간에 있었는데 점령당했다는것이 웬 소린가고… 그리고 난 이안에 있던 모든 전사들에게 뭔가 내신했으면 하오.》

《옳소. 훈장감이요.》

로병관이 격앙하여 웨치자 황영학은 쓸쓸한 웃음을 지었다.

《그대신 난 또 처벌을 받아야 할것 같소.》

《허, 굉장한 도덕가가 되였구만.》

《아니, 내가 하는 말은 겸양도 위선도 아니요. 동무도 언젠가 군단장동지가 장군님께서 나를 믿어 굴간을 맡기셨다구, 내 밸통과 지식이 은을 낼것이라고 한 말을 기억하고있겠지. 한데 난 폭발응력에 대한 계산도 통기구멍에 대한 고려도 못했거든. 저 전사들만 아니였다면 난 동무도 다시 만나지 못했을것이요.-》

황영학은 《포사격 은페!》 하는 구령이 들렸을 때 그냥 은페호에 끌려들어온것부터가 잘못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그가 들어오지 않으면 수많은 전사들이 그대로 있을것이니 어쩔수 없는 일이였다.

들어와 3∼4분도 안되였을 때 거센 폭음과 함께 지진이 일었고 중국에서 한번 당했던 태풍속의 비행을 하였다. 벽에 부딪쳤다가 깨여나보니 수다하게 켜놓았던 가스등들이 죄다 꺼져있었다. 소대장과 중대장들이 자기 대원들의 이름을 호명할 때 굴이 무너졌다는 비명같은 소리들이 울렸다.

회중전등을 켜들고 그리로 내달아가니 굴간입구는 통채로 무너져내린 암반과 파석들, 산더미같은 흙더미로 꽉 메워졌는데 빛 하나, 바람 한점 없었다. 삐죽삐죽한 바위돌들에 정대를 찔러 움직여보았으나 움쩍도 하지 않았다. 인차 공기가 희박해지는것이 알렸다.

(끝장인가?)

한두시간도 견뎌내지 못할것 같았다. 그때 한 중대장이 다가와 《이상합니다.》하며 천반쪽을 가리켜보였다. 방금까지의 폭음도 지진도 더는 없었고 쇠와 돌이 마주치는듯 한 소리가 가늘게 들려왔다.

《적이요.》

그의 한마디 말에 이제까지 절망적으로 퍼더버리고있던 부상병들까지 움씰거리며 일어났다. 공기부족으로 바위벽의 물기를 걸탐스레 핥던 전사까지 일어서는것을 보며 황영학은 비장한 감정속에 말했다.

《여기서 죽을 사람은 앉아있고… 나가서 적을 족칠 사람은 나를 따르시오. 뚫고나갑시다.》

정대와 곡괭이는 물론 총창과 단도까지 쟁기로 썼다. 그 과정에 맨손이 제일 좋다는것이 알려졌다.

천반과 잇닿은 곳부터 맹렬히 파나갔다. 시간이 흐름에 따라 하나둘 쓰러졌다. 바위를 그러안고 맴돌이치다가 실신하는 전사들도 있었다.

누군가의 정대가 허공을 찌르고 시원한 바람기가 밀려들 때 황영학 역시 반실신상태에 있었다.

굴입구의 암반 하나를 내놓고 버럭들을 거의다 처리했을 때는 한밤중이였다.

영학은 면밀하게 정찰조직을 하고 불의적인 육박공격으로 적을 소멸하기로 마음먹었다. 쓰러졌던 전사들이 기운을 되찾을 때까지 한시간나마 더 기다리게 되였다. 아군의 중곡사포사격이 그 시간을 앞당기게 했다.…

《이젠 그만 떠나야지 않겠소?》

황영학의 말에 로병관은 서운해하는 기색이였다.

《떠나야지.》

로병관은 주둥이가 부러져나간 곡괭이자루 하나를 들고 일어섰다. 그 곡괭이자루엔 껍진껍진한 피가 묻어있었다.

푸릿한 어둠이 들리는 속에 벌집구멍처럼 송송히 파헤쳐진 포탄홈들과 폭탄구뎅이들이 선명히 드러났다.

전호를  다시 파는 전사들속에서 간간히 웃음이 터져나왔고 사위는 고즈넉하였다.

《놈들은 아직 이곳이 점령된걸 모르는것 같소.》

《점령소리는 더하지 마오.》

황영학의 말에 로병관은 허허 하고 웃다가 그들쪽으로 마주오는 담가에 눈길을 주었다.

《누구요?》

《우리 대대장동집니다.》

울음질린 목소리에 로병관은 무르춤하며 반사적으로 모자를 벗었다. 의식을 잃은 상태에서도 《은페!》구령을 치던 대대장, 정신을 차렸을 때는 자기를 총살해달라고까지 했다. 그렇게 보면 이 대대장은 스스로 죽음을 찾은듯싶다. 돌격선두에서 내닫던 그는 지뢰원도 알아보지 못하고 그냥 내닫다가 잘못된것이다.

《이 동무를 여기에 묻자고 하오?》

《네, 대대장동지의 유언입니다. 죽은 경우엔 이 고지에 묻으라고 하면서 죽어서도 싸움을 도와야 한다고… 련대부에서도 허락이 있었습니다.》

담가채로 들고 왔던 소대장의 말이 가슴을 더 울렸다. 담가가 멀어졌을 때 황영학이 쓸쓸히 말했다.

《저 동문 전쟁후 군사예술사를 쓰겠다고 했는데 나때문에 저렇게 된셈이요.》

슈- 하는 바람째는 소리와 함께 20m도 안되는 곳에서 포탄이 폭발하였다. 륙공포탄같았다.

《빨리 떠나라는것 같구만.》

로병관은 서글픈 웃음을 지으며 어깨띠를 풀었다. 황영학의 어깨띠가 끊어져있었던것이다.

《자, 이걸 받소.》

《그건 뭐요?》

《새거나 다름 없소.》

《아하, 좋은 고삐구만. 고맙소.》

황영학은 그가 준 어깨띠를 매다말고 로병관을 넌지시 보았다.

《내 한가지 물어도 되겠소?》

《뭔데.》

로병관의 의아쩍어하는 기색에 황영학은 묵묵히 침묵을 지키다가 말했다.

《동문 전선사령부에서 나를 취급하던 밤이 생각나오?》

《그걸… 왜 잊겠소.》

《그때 동문 왜 한마디 말도 못했소?》

로병관은 언제건 이런 말이 있을것이라 생각하며 기다렸었다. 아니 이 말이 나올가봐 각방으로 자기의 심정을 표시했었다. 그는 지금상태에서 더이상 숨길 필요를 느끼지 않았다.

《한마디로 겁이 났댔소.》

《이 고지에 오를 땐 겁이 나지 않았소? 적들과의 백병전을 각오했겠는데》

《그것과는 경우가 다르지.》

《난 동무한테서 그것이 마음에 안드오. 동문 이 고지에 오를 때 나를 먼저 생각했겠는데… 그렇지 않소?》

《그건 사실이요.》

《난 전선사령부에서의 그날 밤도… 나에 대한 동무의 감정만은 변함이 없었다고 보오.》

《!…》

《난 동무가 개인적감정을 초월했으면 하오. 뭐라고 할가. 우리야 장군님의 특별한 신임을 받고있는… 그이의 전사들이 아니요. 이렇게 볼 때 우리모두의 인간관계와 우정은 장군님의 신임과 뜻을 따르는 길에서 이루어져야 할것이요. 그 길에서 빗나가면 헤여지는것이고… 내 말이 과하지 않소?》

《아니, 하기 힘든 말을 해줘서 고맙소.》

《병관이!》

황영학이 그의 어깨를 꽉 때렸다. 로병관은 가슴이 울컥해 그를 껴안았다.

《내려갈 때 지뢰를 조심하오.》

로병관이 산밑에 내려섰을 때는 고지등말기가 온통 화염속에 묻혀있었다. 산골짜기의 개울에서 대충 세면을 하고 장화안에 찬 흙을 털어버렸다. 메마른 흙가루속에 부스럭돌들과 사금파리같은 파편알갱이들이 매만져졌다.

련대지휘부까지 산길을 타고간 로병관은 거기서 탄약수송차를 타고 군단지휘부에 도착했다. 최현도 방금 도착한 길이라고 했다.

맨내의바람의 최현은 군복에 새 견장을 달고있었다. 작전지도를 볼 때도 별로 쓰지 않던 안경을 끼고있었다.

《무슨 놈의 못된 바람에 견장이 날려갔어.》

최현은 이렇게 투덜거리며 실을 물어끊다가 얼굴을 찌프렸다. 견장아래의 잔등쪽이 반쯤 남짓되게 찢겨져있었던것이다.

로병관은 최현도 자기와 다를바 없었을것이라는것을, 아니 자기보다 더한 모험을 했을지 모른다는데 생각이 미쳤다.

983. 1고지와 965고지가 위태롭다고 하며 군단장 전방지휘소를 나설 때 최현은 어떤 경우에도 화선진출을 삼가하라고, 자기도 그러겠노라고 하며 전선사령부 《대표》까지 화선에 나간것이 알려지면 자기도 로병관도 모가지라고 했다.

그러던 최현이 견장까지 잃어버린것으로 봐선 포화속에 들었다던가 직접 총을 잡고 983. 1고지탈환전에 나섰을수도 있는것이였다.

《그곳 전투는 어떠했습니까?》

로병관은 조심스럽게 물었다. 새 실을 바늘에 꿰고있던 최현은 무슨 소리냐 하는듯 그를 치떠보았다.

《어째?… 혹시 전선사령관앞에서의 보고때문이요?》

로병관은 당황해졌다.

《그런것이 아니라 965고지에서 사상자들이 났기때문입니다. 그래서…》

《희생이 없는 전투가 있을수 있다고 보오?》

최현은 불퉁그러지게 말하였다.

로병관은 잽싼 솜씨로 바느질을 해나가는 최현을(지금의 그에게는 전쟁도 로병관도 없고 오직 바늘질만이 중대사인듯 싶었다.) 보며 떠날가말가 망설이다가 의자를 끄당겨 앉았다.

최현은 불쑥 물음을 건네였다.

《로동문 전쟁영화들에서 장군들이 어떻게 하는가… 하는걸 봤소?》

《건… 어떤걸 념두에 두신 말씀입니까?》

최현은 피식 웃었다.

《다들 멋있더라 하는 소리요. 포탄이 곁에서 떨어져도 눈섭하나 까딱 않고 누가 총에 맞아 쓰러져도 바위돌같고… 얼마나 담차고 위엄있는가. 그런데 난 그렇게 못하거든. 옆에서 꽝하고 포탄이 터진다던가 쌈이 제대로 안되면 안달복달이란 말이요. 오늘도 그랬다니. 락제였지. 그래서 지금 바느질을 해보는거야. 마음을 든든히 동여매는 련습이라고 할가. 그런걸 밑의 지휘관들이 보면 아, 모든것이 잘되는구나 하고 믿음을 얻는다는데 지금 봐주는건 동무 하나밖에 없구만.…》

최현은 또 한번 비주룩이 웃었으나 얼굴색은 흐린 못물처럼 침침했다.

로병관은 983. 1고지 탈환전투도 여의치 않았음을 알수 있었다.

《이제 떠나면 무스걸 타고가겠소?》

최현은 군복을 털어입으며 정색한 눈길로 그를 보았다.

《방금 탄약운반차를 타고왔는데 그 차로 가려고 합니다.》

《그건 어째서? 차야 동무것도 있잖소?》

《운수차들의 운행과정을 직접적으로 알아보고싶습니다. 고사화력이 배로 증강되였는데도 날만 밝으면 일체 차들의 수송을 금한다고 하니… 그 실태를 확인해봐야 할것 같습니다.》

《찬성이요.》

최현의 얼굴이 활짝 밝아졌다.

《그런데 갔다올 때는 모르겠지만 갈 때까진 제발 무사해 주시오.》

《아니 갈 때까지만이라는건 무슨 말씀입니까?》

《허허, 그건 잘못된 소리요. 내 말하자는건 동무가 무사히 간다면 그… 불가능론자들의 생각이 달라질수 있다는거요. 사실 어제일도 포만 제대로 있었다면… 그런 랑패는 없었을게요.》

최현은 신경질적으로 손을 홱 저었다.

《참모장동무가 동물 기다리고있을테니 가보오. 전선사령부에 보낼 보고서때문이요. 내가 미리 수표를 했으니 그냥 가지고 가오.》

《한가지 토론할 문제가 있습니다.》

로병관은 랑패라고 하는 최현의 말에서 뭔가 생각되는것이 있었다.

《무스건데-》

《포리용문제입니다. 만약 전선사령관동지가 두개 고지의 상실원인을 알려고 할 때 77사포문제들에 대하여 말해야 하지 않을가요? 그 포들을 철수시키지 않았다면 오늘같은 사태가 빚어지지 않았을것이 아닙니까.》

최현은 이마살을 찌프리며 매정스레 잘라버렸다.

《그런 시비가름이 무슨 필요가 있소?》

로병관은 참모장의 방에서 30분 넘게 지체했다.

보고서라고 하는것이 시시껄렁한 《허물》만 골라 묶은것이였다.

참모장은 전선사령관의 요구에 따른것이라고 발명했고 로병관은 전반적인 정황파악과 리해에 도움이 되게끔 일목료연해야 한다는것으로 적잖은 부분을 깎을것을 요구했다.

이른 아침을 먹고 적기들의 《식전산보》가 끝나기를 기다리다가 해가 고성고개로 올랐을 때 떠났다. 부장급이상의 작전회의를 소집했던 최현은 《갈 때까지만 무사》하라는 실언때문이였는지 밖에까지 나와 그를 바래주었다.

그가 타고온 운전사와는 구면인듯 무척 반가와했다.

《이젠 탄약운반이니?》

《네, 군단장동지로부터 말씀이 계셨더군요.》

《내 낯을 깎지 말아.》

《명심하겠습니다.》

《이제 놈들의 사등뼈를 분질러놓은 다음 공병들을 좀 붙여줄테니 그때 한번 다시 가봐라.》

《군단장동지! 고맙습니다.》

운전사는 대번에 눈물이 글썽해졌다.

《군단장동지와는 어떻게 아는 사이요?》

로병관은 차에 오르기 바쁘게 이 말부터 물었다. 여전히 눈에 눈물이 글썽해있던 운전사는 로병관의 얼굴을 힐끗 돌아보고는 어줍게 말했다.

《전… 군단장동지때문에 입대를 했습니다.… 얼마전까지는 부식물운반만 하여왔는데 군단장동지가 얘기해서 탄약도 나르게 되였습니다.》

《아니, 건 무슨 소리요?》

《그저 그런겁니다. 전 남들과 좀 다르니까요.》

운전사는 더이상 말을 하려 하지 않았다. 로병관은 그에게 뭔가 남다른 사연이 있다는것을 알았다. 운전사란 원래 《승인받은 자유주의자》들이여서 여느 군인들보다 자주 말썽을 일으킨다.

《요즘 적기들이 무척 갈개는데 꽤 다닐만 하오?》

《다니지 않구요.》

운전사는 판 다른 사람으로 되여 활기를 보였다.

《군단장동지는 장령동지의 신변을 걱정했지만 일없습니다. 적기들이 우리를 노릴 때쯤 해서는 항공신호탄이 오르고 또 고사총과 고사포들이 비행사들을 얼뜨기로 만들거든요.》

전선운전사들이 거의나 다 그러하듯이 이 운전사 역시 다변가였다.

《하기야 원래부터 얼뜨기들이지요. 더구나 이런 꼬부랑길에서 그런 얼뜨기들을 골려넘기기는 더욱 쉽답니다.

꿩을 본 매새끼처럼 급강하해올 땐 조금 땀을 뽑지만 그것도 그저 그렇습니다. 거리와 각도를 판단하고 변속만 잘하면 얼마든지 피할수 있거든요. 우리의 한 동무는 그런 능숙한 변속으로 적기를 산머리에 부딪치게 했답니다. 물론 떼지어 달려들 때는 좀 어렵습니다. 하지만 그럴 땐 온 하늘이 우르렁거리고 사방에서 지끈지끈하는 바람에 신경이 더 예민해지고 차도 더욱 날래게 움직여지지요. 적당한 산턱 어디에 들이박혀있으면 그것으로 안전끝입니다. 그땐 노래를 부르며 구경을 하는판이지요.》

《그렇지만 밤에보다는 더 어려운건 사실이겠지?》

《네, 거야 더 이를 말이 됩니까. 어려운건 사실이지요. 직동령같은 경우엔 사태리에서 쏘아대는 포탄이 위험하고 철령고개에서는 피할데도 없기때문이지요.

하지만 죽고사는 싸움판에서 그것이 무슨 큰 문제겠습니까.》

《그렇다면 낮에도 꽤 할수 있다는건데 요즘은 왜 못하오?》

《거야 상부의 지시때문이지요. 장령동지앞이니 말씀드립니다만 사실 저희들도 그때문에 말들을 좀 합니다. 전방동무들한테서도 말들을 듣게 되고… 사실 우리 군단지역에서는 별로 단속도 통제도 없지만 전선사령부 관할지역에서는 애당초 물자들을 내주지 않을뿐만아니라 혹간 받아싣는 경우에도 경무초소에 걸려들면 한바탕 졸경을 치러야 한답니다.》

그의 말은 갑자기 울리는 자동총 련발사격에 중둥무이되였다.

항공신호였다.

《구라망같습니다. 금강교를 목표한것들이지요.》

적기들은 인차 눈에 나타났다. 아홉개의 까만 반점이 금강다리어림으로 짐작되는 읍소재지상공을 선회하고있었다.

《여기서 좀 케를 보다가 가는것이 좋지 않을가?》

《네, 장령동지가 좋으시다면.》

변속지레대를 잡는 운전사의 기색은 별로 시답지 않아하는 빛이였다.

《혹시 여기가 합당치 못한 곳이 아니요?》

《꼭 그런건 아니지만 차라리 대피처에 가는것이 낫습니다.》

《게까지 가자면 이 앞의 벌을 통과해야 하잖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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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산님의 댓글

강산 작성일

(위에서 계속)

《건 눈 깜빡할새면 통과합니다. 적기들이 발견했을 땐 대피처에 들어가는것이고… 참 저 소리를 들어보십시오.》

고사기관총의 둔탁한 발사음이 주변 산고지들에서 요란스럽게 울렸다.

《저 동무들은 우리 차를 보고 놈들이 저공비행을 못하게 하자는것입니다.》

《그럼 동무 좋을대로 하오.》

《네.》

운전사는 만족스러워하면서도 어딘가 미안해하는 표정이였다.

《이제 보십시오. 적기들이 미처 발견하기 전에 대피처에 들어서는걸. 손잡이를 꽉 잡아주십시오.》

길좌우로 붙어선 산발들이 점점 물러서버렸다. 왼쪽켠으로 흐르는 내물만은 쉬임없이 조잘거리며 질세라 따라오고있다. 때로는 버들숲에 가려 숨었다가 불쑥 나타나기도 하고 꿍쳐진 마음을 풀어주기나 하듯 바위돌에 부딪쳐서는 폭포와 급류를 이루기도 했다. 보름전까지만 해도 가는 실오리같던 개천이 이번 장마비에 강으로 승격된셈이다. 이른 아침 요기로 날벌레를 잡는 물고기들이 37㎜ 고사포탄 같은 대가리를 불쑥불쑥 내밀었다.

먼 산기슭에 오롱조롱 달라붙은 초가막들에서 몇사람이 얼굴을 내밀고있는것이 보였다. 적비행기들에 하도 치여나서 방공호로 가야 할것인가 말것인가를 관망하는것 같았다. 놀랍게도 오른편의 논밭가운데서 담배를 꼬나문 로인과 딸이 아니면 며느리인듯 한 녀인이 엉거주춤히 구부리고 앉아 비행기를 살펴보고있었다. 잔등과 머리에 위장풀을 가득 써 비행기에서 볼 때면 풀단으로 착각할것이다.

벌판에 나선것으로 하여 은근히 마음을 조이고있던 로병관은 저도 모르게 웃음을 머금었다.

그때 땅을 흔드는 폭음이 일었다. 먼 앞쪽의 백양나무숲뒤에서 검은 폭연이 룡트림하듯 솟구쳐올랐다. 폭음은 련속되였다.

《빌어먹을 놈들, 읍거리를 치는군요.》

운전사는 혀까지 끌끌 차다가 로병관의 굳어진 얼굴을 보자 유쾌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걱정하실것은 못됩니다. 항공신호만 나면 읍거리사람들은 무조건 방공호에 들어가게 되니까요. 한데 오늘은 금강교가 조용하군요.》

로병관은 금강교를 볼수 없었다. 산이 막아섰던것이다. 언덕을 톺아오른 차는 팔을 벌려 마중하는듯 한 산협으로 들어섰다.

따라오던 내물이 아득한 벼랑아래로 숙어들고 그 물이 두개의 개울과 합수진 곳에 금강교가 있다. 파편과 폭풍에 아지와 잎들이 거의 다 날아나버린 가로수사이로 은빛강물이 다시 나타나고 흰 모래바닥에 뿌리를 내린 다리기둥이 보이는 순간 열댓발의 폭탄이 동시적으로 터졌다. 하늘높이 솟구쳐 올라간 물기둥이 무지개 빛을 띄며 구슬처럼 흩날려 떨어졌다.

《헛탕입니다. 그럴수밖에 없지요. 저걸 보십시오.》

운전사의 눈은 길앞이 아니라 두개의 뾰족한 산봉우리사이에서 불을 뿜는 고사총좌지쪽을 지켜보고있다.

《보고있으니 헛눈은 팔지 마오.》

《네.》

운전사는 가속변을 더 힘껏 누른다. 차는 경기용오토바이처럼 땅우에서 붕- 뜨는듯 했다. 그런 고속을 유지하면서도 운전사는 자주 고사총좌지쪽을 보고있다. 로병관은 이곳 녀성고사총소대원들의 인기가 이만저만한것이 아니라는것을 상기하였다.

《혹시 저기에 아는 동무가 있는것이 아니요?》

《예?!》

운전사는 저으기 놀라는 눈길로 스쳐보고는 우울한 기색으로 돌아갔다.

《좀 있습니다. 그들한테 탄약도 날라주고 혹간 편지심부름도 하니까요.》

길가의 숲속에서 붉은 수기를 든 전사가 뛰여나와 호각을 불며 주먹을 쥔 손을 위혁적으로 흔들어보였다.

《여기서부터 단속구간입니다. 하지만 저 동문 대피처로 어서 들어가라는것이지요. 다 왔습니다.》

운전사는 요란스럽게 경적을 울리였다.

산굽이를 돌자 로병관도 여러차례 신세를 진 일이 있는 샘터가 나타났고 다래덤불이 우거진 좁은 골짜기가 품을 벌렸다.

《우리만이군요.》

벌건 탕수가 흘러내리는 바위가까이에 차를 붙여세운 운전사는 바께쯔를 들고 뛰여내렸다. 로병관이 샘터로 가 한모금 추기고 얼굴을 씻는 사이 랭각기에 물을 채워넣은 운전사는 지루하게 기다릴 시간이 아깝다는듯 걸레를 들고 닦기 시작하였다. 로병관은 그의 눈길이 고사총소대가 있는 산길쪽으로 자주 가닿는것을 보며 다래넝쿨속에 들어갔다. 심심풀이삼아 채 익지 않은 말다래 몇알을 따드는데 챙챙한 녀성의 목소리가 울렸다.

《후방쪽으로 가요?-》

《그렇수다.》

틀지게 대답하는 운전사는 이미 기관실이 아니라 바퀴를 살피는 흉내를 내고있었다. 고사총소대의 산길쪽에서 두명의 녀성군인이 굴듯이 달려내려오는데 일여덟개씩의 탄약상자를 지고있었다. 운전사앞에 와서 탕-하고 멨다칠 때야 그것이 빈 상자이고 녀성고사총수들이 이런 운전사들에게 부탁해 상자를 되돌려보낸다는것을 알게 되였다.

《어데까지 가요?》

《선녀님들이 바라는데까지 가지요.》

《애개개, 싱검둥이동지군요.》

한 처녀가 까르르 웃음을 터칠 때 각광을 단 녀성군인의 눈이 올롱해졌다.

《장천일동지, 나 좀 보자요.》

《난 선녀님들과의 단독면회는 질색입니다.》

《롱담이 아니예요.》

각광을 단 처녀는 찌를듯이 장천일을 쏴보다가 옆의 처녀를 물러가라고 눈짓하고는 따지듯 물었다.

《동지가 우리 마정옥분대장을 놓고 뭐라고 했어요?》

《아, 그 독가시 말입니까? 다들 그렇게 부르니 나도 그렇게 부르는것이지요.》

《아니, 내가 묻자는건 그게 아니예요. 도대체 동문 무슨 심보를 가졌길래 그를 모욕하는가 말이예요.》

《목욕이라니, 남자가 어떻게 처녀를 목욕시킵니까.》

장천일은 반죽좋게 느물거렸으나 당황해하는 기색이 완연히 알렸다. 각광은 기가 차 더 말을 못하겠다는듯 쌔근거리다가 《그럼 좀 기다리라요. 우리 소대장동지를 데려올테니.》하며 돌아섰다.

《아, 무슨 일인지 예서 다 말하구려.》

장천일이 바빠난 얼굴로 각광의 손목을 잡았다.

《놓으세요. 그럼 말하자요. 동문 만나는 사람들한테마다 마정옥이 처녀가 아니라고, 무슨 애인인지 남편인지 있다고 했다는데 도대체 그게 제 정신을 가지고 하는 소리예요?》

장천일은 로병관이 사라진 다래넝쿨쪽을 보고는 모자를 뒤로 제껴썼다.

《안됐소. 난… 그 동무를 지켜주자고 한 소리요.》

《지켜준다구요? 소가 웃다 꾸레미 터질 노릇이군요. 그가 무슨 동지같은 물닭인줄 아세요. 당장 내 앞에서 사죄를 하구 그런 허튼 소리를 들은 사람들한테 꽝포를 놓았다는걸 말해주라요. 그러지 않았다간 그 번번한 얼굴이 날아날줄 알라요.》

처녀가 사납기 그지없는데다가 말투까지 거칠어 무슨 일이 터질것 같았으나 장천일은 밸이 쑥 빠져나간 사람처럼 매시근한 웃음만을 지어보였다.

《왜, 대답이 없어요?》

처녀의 눈살이 더 꼿꼿해졌다.

《편지들이나 있으면 내놓소.》

《그만 두라요. 이제부터 두번 다시 동지한테 부탁하지 않아요. 얘, 가자.》

각광은 샘터쪽에 가있는 처녀를 찾고는 인사도 없이 되돌아섰다. 로병관은 그들이 꼬부라진 산길숲에 사라졌을 때야 다래넝쿨속에서 나왔다.

《무슨 일이요?》

《들으셨습니까?》

《아니, 그저 몇마디만…》

《제가 실없는 소리를 해서 그만 메주를 먹었습니다.》

장천일은 웃어보였으나 우울한 인상이였다.

《이젠 가도 되지 않을가?》

《네.》

장천일은 다행이라는듯 운전칸에 올랐다. 적기들도 사라지고 총성도 멎었다.

차가 얼마간 달렸을 때 또다시 자동총소리가 울렸다. 산턱에서 경무관완장을 두른 하사와 중위가 나타났다. 운전사의 얼굴색이 시뿟해졌다.

《기본단속초소입니다.》

운전사는 켕겨든 소리를 하면서도 로병관때문인지 자신만만한 얼굴로 차에서 내렸다. 로병관은 어찌나 보자고 등받이에 몸을 기댄채 경무관과 운전사와의 대화를 지켜보았다.

첫눈에 벌써 일이 꼬여나가는것이 알렸다. 경무관이 무슨 말을 했던지 운전사는 잔뜩 찌프린 얼굴로 증명서를 내밀며 어서 도와달라는듯 로병관이쪽을 흘끔거렸다.

로병관은 하는수 없이 차문을 열었다.

운전사의 군인증을 보며 수첩에 뭔가 적던 중위가 깜짝 놀라며 거수경례를 붙였다.

《내 증명서도 봐야잖겠소?》

로병관은 될수록 점잖게 말하려 했으나 말소리가 거칠게 나왔다. 중위는 껑충 뛸듯 한 자세였다.

《장령동지, 전 장령동지를 잘 알고있습니다.》

《그런데 무엇때문에 이따위 단속놀음을 하고있소?…》

《저… 그건 명령에 따라-》

《도대체 그 명령이란건 어데서 나온거요?》

《장령동지!》

중위는 무슨 실언을 하는가 하는듯 한 기색이였다.

《말하오. 어떤 명령인지. 》

《저… 전선수송을 원만히 보장할데 대한 최고사령관동지의 명령 00164호에 따라-》

《뭐요?》

로병관이 어찌나 큰 소리를 쳤던지 중위는 낯색이 하얗게 질렸다. 하지만 로병관은 자기의 분노를 억제할수 없었다.

《누가 최고사령관동지의 명령을 이런 식으로 외곡집행하라고 했소.》

《저… 저흰 명령을 그렇게 받았습니다. 최고사령관동지의 명령에 따라 무질서한 운행을 단속하게끔-》

《그러니 지금의 운행도 무질서한 운행이란 말이요? 전선에 싣고 갈 포탄을 나르러 가는데 동문 인민군군관이 맞소?》

《장령동지, 저흰 그렇게 명령을… 대낮의 운행은 차와 탄약을 적들에게 바치는것으로 된다고- 이 지시는 전선사령관동지의 명령서에도 밝혀져있습니다.》

로병관은 기가 막혀 한숨을 내쉬였다. 중위에게 성을 낼 일이 아니였다.

《중위동무, 최고사령관동지께서는 어떤 수단과 방법을 다해서라도 전선에 필요한 탄약과 포탄, 식량을 제때에 보장하라고 명령하셨소. 동무가 받았다는 그 명령은 누군가 전달할 때 실수를 한것같소. 그러니 이제부터 이따위 단속놀음은 하지 마오. 책임은 내가 질테니. 알만 하오?》

《알았습니다.》

중위는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사실 저희도 전선에서 <포탄!>과 <탄약!>을 웨친다는 소리를 들으며 안타깝다는 생각은 했더랬습니다.》

《됐소. 내 말을 명심하오.》

차에 다시 오르자 운전사는 범 잡은 포수마냥 으쓱해있었다.

《장령동지, 이뿐만이 아닙니다. 고산에 가면 어떤줄 압니까. 최고사령관동지의 호소를 받들고 전선지원수송대로 나온 인민들을 한명도 철령고개를 넘지 못하게 합니다. 물론 사민들속에 간첩도 있을수 있으니만큼 경계하는건 좋지만 아, 해당 당조직에서 다 추천해보낸 사람들인데도 되돌려보내거든요.》

《거야 인민들의 희생을 념려해 그러는것이 아니요.》

《물론 그럴테지요. 하지만 산길로 나드는데야 무슨 희생이 있겠습니까. 또 그들 거의가 전선에 나가지 못하게 한다고 야단들인데-》

《그만하오.》

로병관은 머리가 욱신거렸다.

(도대체 어찌된 일인가.)

불암산전투때부터 지금까지의 일들이 화면처럼 흘러가며 수많은 의문이 갈퀴처럼 파고들었다.

그런중에도 자기가 김웅의 곁에만 그냥 있었더라면 지금의 모든 불미스러운 현상에 청맹과니로 되여있었을것이라는 생각이 마음을 어둡게 했다.

로병관이 김웅의 방에 이르렀을 때 그는 권총소제를 하고있었다. 김웅은 새벽마다 권총사격을 하고는 권총소제를 하는것을 일과로 삼았다. 그의 권총사격과 소제는 군인의 기강을 잃지 않기 위한 수련법이라고도 한다.

로병관이 방에 들어서자 김웅은 무척 반갑게 맞았다.

《아, 전선영웅이 드디여 나타났구만.》

그는 좀해 하지 않는 롱담까지 하였고 낮시간에 절대 마시지 않게 된 술까지 권했다. 팽덕회사령부에서 얻어온 모태주라고 하였다.

《그놈의 불길속을 헤쳐오느라니 오죽했겠소.》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라는것이였다.

그러나 로병관은 마실념을 하지 않았다.

《좀 긴요히 말씀드릴것이 있습니다.》

그는 김웅이 권하는 안락의자에 든든히 자리를 잡고 앉으며 마음을 사려먹었다. 그전에 보지 못했던 진한 화장을 한 녀성소위가 참외를 들고온것도 랭담하게 밀어놓았다.

김웅은 의아쩍게 그를 보다가 로병관이 미처 입을 열기전에 물었다.

《고지를 잃게 된 문제때문이요?》

《네, 그것도 있고… 좀 여러가집니다.》

《혹시 동문 그동안의 전선참관소감을 발표하자는것이야 아니겠지. 그에 대해선 대체로 다 알고있소. 동무가 늦어지는통에 군단참모장동무와 전화를 했고… 필요한걸 죄다 알아보았소.》

김웅은 마뜩지 않다는 태도로 말하며 로병관이 넘겨준 보고서는 보지도 않고 책상서랍에 밀어넣었다. 보고서내용도 보지 않고 다 아는데 무슨 군소리를 할텐가 하는 태도였다.

로병관은 욱- 하고 분기가 치밀었다. 그는 김웅이를 만날 때마다 늘 사지를 비끄러매듯 조이던 《사제》간의 《례의》에서 벗어나게 된것을 다행으로 여기며 말에 날을 세웠다.

《저는 전선사령부사업에서 바로잡지 않으면 안될 몇가지 문제를 말씀드리자고 합니다.》

《그렇소?!》

김웅은 이런 경우에 늘 그러듯이 한겨울 유리알같이 눈빛이 싸늘해들었다.

로병관은 그의 눈길에 위압될가봐 책상 한구석에 시선을 박은채 무기와 탄약의 수송보장문제로부터 《2방어계선》에서 《썩고있는》 포병대를 전방에 진출시켜야 하지 않겠는가 하는 요구를 들이댔다.

김웅은 간간이 고개를 끄덕이기도 하고 《당신은 아직 채 모르고있다》 하는 비웃는듯한 기색으로 듣기만 하다가 최고사령관동지의 명령 00164호가 와전되여 전달되였다는 말이 나오자 펄쩍 뛰였다.

《어느 녀석이 그런 소리를 줴쳤소? 나는 단지 공습시 대책을 철저히 강구할데 대하여 강조했을따름이란 말이요.》

김웅은 이 말로도 성차지 않았던지 전화통을 들고 누군가에게 한바탕 욕설을 퍼부었다.

《그런데 2방어계선의 포들은 그냥 그대로 두겠습니까?》

로병관은 그가 최고사령관동지의 명령을 외곡전달하지 않았다는것으로 한결 마음이 눅잦혀져 물었다.

김웅은 그의 말을 듣자 신중한 어조로 말했다.

《그에 대해선 이미 지시를 떨궜소. 일체 포들을 전방에 진출시키기로… 최고사령관동지께서도 명령이 계셨소.》

《그렇습니까?》

로병관은 환성을 올리듯 웨쳤다. 김웅은 또다시 《당신은 아직 채 몰라》 하는 눈길로 마뜩지 않게 보고는 자못 근심어린 태도로 말했다.

《놈들은 방금전인 새벽 네시를 기해 전선서부의 옹진반도 이남으로부터 전선중부의 백암산에 이르기까지의 모든 지역에 걸쳐 전면적인 공격에 진입하고있소.》

《또?!-》

로병관은 숨이 떡- 막히는것 같았다.

《크게 걱정할것은 못되오. 최고사령관동지께서는 이미 전날 밤 적의 새로운 기도를 포착하시고 강한 반타격전을 벌리도록 했으니까.》

이 순간 김웅의 얼굴에는 경건한 빛이 어려있었다. 그는 매우 허심한 그러면서도 감동깊은 어조로 말했다.

《사실 앉은 자리에서 얻어맞았을것이 아니겠소. 역시 장군님께서는 동북사람들이 늘 말하는것처럼 천지신명을 타고나신분이요. 난 방금 그이와 전화를 했는데 6군단을 되돌려보내야 하지 않겠는가 하는것 때문이였소. 그러나 그이께서는 불허하셨소. 이렇게 볼 때 주타격은 의연히 1211고지라는것을 의미하는것이요.》

김웅은 로병관을 뚫어지게 보다가 일어섰다.

《내가 동무를 부른것은 지금까지의 2군단작전전투행동을 총화짓고 앞으로의 대책을 위한 최고사령부의 결론을 얻기 위해서였소. 때문에 동문 최고사령부로 출발해야겠소. 보위상동지의 요구이기도 하오.》

《제가 꼭 가야 합니까?》

《그렇소. 최현동무한테는 이미 알렸소. 가서 동무가 보고 느낀것도 죄다 반영해야겠소.》

김웅은 그에 대한 반응을 지켜보듯 눈을 가느스름히 쪼프려보다가 약간 신경질적인 어조로 말을 이었다.

《그런데 동문 2군단에 가서 전선사령부의 전권대표라기보다 무슨 최현동무의 뒤바라지역을 한다는데… 그래선 안되겠소. 물론 그가 성실하고 용감한것은 사실이지만 이번 과정을 보면 좌왕우왕이거든.》

《사령관동지, 뭔가 오해가 있습니다. 제가 뒤바라지역을 한다는건 뭘 의미하는지 모르겠지만… 그가 좌왕우왕한다던가 하는것은 사리에 맞지 않습니다.》

《여보, 군단장이 제 위치도 잊고 이리저리 뛰여다니는것도 사리에 맞는다는것이요? 거기선 동무도 매한가지요.》

김웅의 눈에서 새파란 불찌가 튕겨났다. 그는 로병관을 노리듯 보다가 책상서랍을 와락 뽑더니 한장의 사진을 내밀었다. 미8군신문 《성조기》에서 오려낸 사진이였다.

《보오. 여기에 누가 있는가.》

로병관은 리승만부터 알아보았다.

그 좌우에는 미군과 남조선군장성들이 있었는데 맨 우측에 있는 사람은 신통히도 송우인이였다.

《이건 뭡니까?》

《뭐긴 뭐겠소. 정찰국에 들어온건데… 거기에 있는 송우인을 못알아보겠소? 동무의 친구였던 사람 말이요.…》

《그런데 이건 무엇때문에.》

《뭣때문이라니. 나는 지금 다른 사람들도 이 신문에 실린 괴뢰군장성이 동무의 친구였다는걸 알가봐 걱정이 되오.》

《그와 제가 친구였다는것이 무슨 큰 문제란 말입니까.》

《아니, 이 사람이. 그래 동문 당중앙위원회 허가이부위원장의 지시문을 못 봤소? 인민군대내에서도 당대렬을 정리하며 동요분자, 타락분자, 계급적신원이 명백치 못한자, 적과의 친교가 있을수 있는 대상을 적발제거할데 대한 지시를 말이요.》

김웅의 말은 미리 외워둔 대사를 되풀이하는것 같았다.

로병관이 아연한 눈길로 보기만 하자 김웅은 머리를 설레설레 저었다.

《난 말이요. 그 허가이라는 사람을 신통히 보지는 않소. 더우기 그는 우리쪽에서 나온 사람들을 늘 경계하며 본단 말이요. 이런 때 저런 사진이 그한테 들어가면 어떻게 되겠소.… 물론 그한테까지 저런 신문이 갈리는 만무하지만.》

그는 사진을 도로 책상서랍에 넣고 두툼한 봉서를 꺼냈다.

《이걸 보위상동지에게 가져다 드리오.》

최고사령부에 올려보내는 전선사령부의 이 보고서는 김웅이가 직접 작성한것이였다.

그는 이미 1211고지 방위전투의 첫날과 두번째 날에 보고서의 줄거리는 기본상 완성하였다. 그러나 전투행동의 성과적진행으로 뒤로 미루다가 983. 1고지와 965고지의 상실을 적당한 기회로 보았다. 하여 그는 최현이 983. 1고지로 내닫고 두개 고지를 탈환하기 위한 치렬한 전투가 벌어지는 시각에 보고서작성에 달라붙었다.

참모장이 제공한 자료들로 보충완비된 보고서는 2군단의 작전전투행동에서 나타난 오유와 결함들을 분석총화한것으로 되여있었다.

김웅이 내여준 차를 탄 로병관이 두대의 모터찌클의 호위밑에 고산, 신탄, 세고개, 마전, 양덕, 성천을 거쳐 시족면 건지리에 도착한것은 오후 두시반경이였다.

그는 총참모부에 도착보고를 하기 바쁘게 최용건의 부름을 받았다.

방금 점심식사를 끝마쳤다는 최용건은 면내의샤쯔바람으로 무선전신지들을 읽고있었다. 검은 테의 도수안경이 언제나 사색깊은 그의 얼굴을 더욱 엄엄하게 만들었다.

잡다한 인사절차를 무시하는 그는 수고했다는 말 한마디를 하고는 보고서부터 보았다.

벽가의 구식포의자에 앉은 로병관은 최용건에게 시선을 팔다가 저도 모르게 깜빡 졸았다.

무사히 도착했다는 안도감과 오래간만에 맛보게 되는 고느적한 정적이 그동안의 피곤에 지게 만들었던것이다. 몇번 고개방아를 찧다가 그 어떤 소리에 건뜻 정신을 차리며 눈길을 쳐드니 최용건은 들었던 송수화기를 내려놓고있었다.

선 자세였다.

보고서는 책상우에 흩어진 상태로 있었다.

(무슨 전화였을가?)

보위상앞에서 졸았다는 죄스러운 생각에 움찔려 그의 눈치부터 살폈다. 하지만 최용건은 그가 졸았다는것도 또 그가 있다는데 대해서도 전혀 잊은듯 한 얼굴이였다. 언제 입었는지 군복상의는 목걸개까지 빈틈없이 채워져있었다.

로병관은 무슨 영문인지 알지 못한채 소리없이 일어섰다.

최용건은 처음 보는 사람처럼 그를 유심히 보다가 물었다.

《동문… 이 보고서를 보았소?》

《못 보았습니다.》

《못 보았다?!》

최용건은 그의 말을 믿지 않는 기색이였다. 누구든 한번 걸려들면 진속을 터놓기전에는 못 빠진다는 례의 찬찬하고 엄한 눈길로 로병관을 치뚫어보기만 했다. 로병관에게는 마치 《뭘 그러오. 동무야 김웅이와 단짝이 아닌가.》 하는것처럼 느껴졌다. 조국에 나와 처음으로 최용건을 만났을 때 무엇때문에 귀국로정을 변경시켰는가고 따져묻던 때와 같은 표정이였고 눈빛이였다.

1945년 11월 중국팔로군 사령원 주덕을 통해 김일성동지께서 해외의 독립운동자들도 조국으로 부르셨다는것을 알게 된 로병관이네는 기차를 타고오던 도중 심양에서 그만 두패로 갈라지게 되였다.

박일우와 김웅이 동북지방에 할거하는 일본군패잔세력들을 정리하는 사업에 나서야 하겠다고 들고나섰기때문이였다.

로병관으로서는 한시바삐 조국에 나와 김일성동지를 만나뵙고픈 생각이 급했으나 김웅의 의사를 거역할수 없었고 또 대공은 몰라도 소공이라도 세워가지고 조국에 가야 하지 않는가 하는 그들의 주장도 무시할수 없어 《동북평정》의 길에 나섰다.

그러나 그때는 이미 김일성동지께서 파견하신 강건동지의 조선인민혁명군이 동북3성을 장악정리하고있던 때라 그들의 행각은 일종의 인사치례로 되고 말았다. 로병관은 썩 후에야 그 행각에는 조국앞에서의 명분도 명분이지만 일정한 지위확보를 위한 순결치 못한 야심도 있었다는것을 어렴풋이 깨닫게 되였다. …

《그러니 이 보고서내용과 동무는 관계 없다는것이요?》

최용건이 재차 묻는 바람에 로병관은 궁색스럽기 그지없는 상태에서 군단지휘부를 걸쳐 김웅이를 만날 때까지의 자초지종을 간단히 밝혔다. (물론 그는 김웅이한테 불리한 소리나 사건 같은데 대해서는 일절 비치지 않았다.)

최용건은 입술을 꽉 악문채 그의 말을 듣다가 나직이 한숨을 쉬더니 보고서를 그의 앞에 밀어놓았다.

《보오.》

로병관은 허둥이는 마음을 달래며 보고서를 급급히 훑어내려갔다. 잔등이 써늘해들었다. 보고서는 최현을 때리는데 초점이 모아지고있었다.

《…전선사령부는 지금까지의 작전전투행동을 총화분석하면서 2군단내 지휘관들속에서 엄중한 오유와 결함들이 발생하고있음을 보고드리지 않을수 없습니다.

그것은 첫째로, 일부 지휘관들의 무정부주의적독단과 군벌주의적작풍이 농후한바 최현군단장은 전선사령부와는 물론 군단참모부와의 토론도 없이 사단과 련대진지들에까지 나가 즉흥적인 전투지휘를 함으로써 군단의 지휘참모체계를 마비시키고있습니다… 둘째로, 일부 군단지휘관들과 관하 지휘참모일군들속에서 적의 다대한 무력과 화력앞에서 신심과 사기를 잃고 당황망조해하는 현상이 우심하게 나타나고있습니다.》

여기서도 최현은 례외가 되지 않았다.

당황망조한 대표적실례는 군단장 지휘감시소를 자주 리탈한 사실들로 렬거되였다. 이 비슷한 사실들로 황영학련대장의 습격전투참가는 자포자기한 상태에서의 자유주의적인 만용으로 지탄되였다.

《셋째, 최고사령부의 작전적방침과 의도에 대한 몰리해와 그릇된 집행이 문제로 되고있습니다. …》

김웅은 두가지 측면에서 최현의 오유를 분석했다.

《…2군단장은 보포(보병과 포병)간의 협동동작을 잘 할데 대한 최고사령관동지의 훈사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1211고지 뒤계선에 배비한 포들을 합리적으로 리용할 대신 1211고지에 지향될 적의 결정적인 공격에 대비한다고 하면서 그 포들의 리용을 불허하고있습니다.

이야말로 지휘관들과 전하사들의 사기를 극도로 저락시키고 적들의 공격열의를 부추김하는것으로서 965고지와 983. 1고지의 상실은 그에 직접적인 원인이 있다고 분석하게 됩니다. …

뿐만아니라 그는 최고사령관동지께서 가르쳐주신 수동적인 방어가 아니라 부단한 습격전으로 적을 수세에 빠뜨리게 해야 한다는 우리 식 방어전의 원칙을 어기고 그 관철을 위한 작전전투조직을 기피하고있는것입니다. 특히 리해할수 없는것은 첫날 전투에서 공격출발진지를 차지하려는 적의 공격서렬을 은밀한 매복기습으로 와해붕괴시킨 전례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성과를 계속 확대발전시킬 대신 결정적인 전투에 림한다는 명목밑에 진지강화와 보수에만 집념하고있는 사실입니다.

물론 이 모든 오유와 결함들은 전선사령부가 특히 전선사령관인 저자신의 무능, 무책임한 사업과도 관계된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김웅은 이 대목을 무척 중시한듯 글자도 좀 더 크게 박아썼다.

《현 상황의 렬악성, 전대미문의 폭격과 포격으로 하여 전선사령관인 저자신부터 이렇다 할 대책안을 내놓지 못하고있습니다.

그것은 우선 적의 다대한 폭격과 함포사격으로 보급로가 봉쇄된 조건에서 무기와 탄약을 제때에 수송보장할 대책을 세우지 못하고있는것입니다.

다음으로 이번 두개 고지전투의 교훈이 보여주는바 그대로 적의 폭격과 포격의 절대적우세밑에서 승산있는 방어의 열쇠를 찾지 못하고있는것입니다.

이로부터 현 상황에서의 진지방어전투가 군단방어력 전체의 괴멸로 끝날수 있다는 무시 못할 불안이 나돌고있으며 고정된 진지에서의 방어가 아니라 적의 시선과 력량집중을 분산약화시키기 위해 부단한 기동(기만적인 유인을 동반한)과 불의적인 기습(역습을 포함하여 적의 력량을 분산약화시키며 수세에 몰아넣기 위한것)으로 이행하는것이 합리적일수 있다는 의견들까지 제기되고있습니다.

상술한 의견의 주창자들은 이에 대해 두가지 측면에서 정당성을 찾고있습니다.

첫째, 이미 언급한바와 같이 현상태에서는 제아무리 진지굴설을 잘하여도 유생력량의 대폭적인 상실을 면할수 없고 결과적으로 모든 지역을 적에게 내여 줄수 있게 된다는것.

둘째, 부단한 기동과 불의적인 기습에 의한 전투방식이 항일무장투쟁시기 김일성동지께서 창조하신 유격전법을 창조적으로 활용하는것으로서 현 상태에서 매우 합목적적이며 효률적이며 승산이 있는 작전전술안이라는것입니다.

전선사령관으로서 저의 견해를 말씀드린다면 상술한 의견들에 대해 반박할수도 긍정할수도 없다는것입니다.

부단한 기동과 불의적인 기습도 궁극에는 지난 시기 저희들이 발로시킨 <기동전>방식과 대동소이한것으로 가부를 채택하기 어렵기때문입니다.

조속한 결론과 대책을 바랍니다.…》

로병관은 이 보고내용이 단순히 최현의 잘못을 밝히려는데만 있지 않음을 알았다.

오히려 김웅은 오유나 결함이라고 밝힌 최현의 행동이나 자기를 타매한 무능, 무책임에도 어쩔수 없는 필연성이 있음을 강조하였다.

이렇게 함으로써 현 상황에서는 최현도 자기도 맥을 추지 못하며 나아가서는 산악에 의거한 적극적인 진지방어전도 크게 은을 내지 못한다는것을 증명한셈이였다.

그런데는 묘하게도 《상술한 의견의 주창자》들이라는 보이지 않는 인물들을 내세워 자기의 주장을 밝힌것이 마음을 더욱 불안케 했다.

(단순히 《기동전》으로 추락된 명예와 신임회복때문인가?) 그가 이런 어지러운 생각속에서 갈팡질팡할 때 최용건이 그의 속을 환히 들여다보듯 물었다.

《거기 <상술한 의견의 주창자>들이란 어떤 사람들이요?》

《전 잘 모르겠습니다.》

《모른다?! 동문… 그들속에 포함되여 있지 않소?》

《…》

《안됐소. 한데 몹시 피곤한 모양이구만.》

《일없습니다.》

《그럼 장군님께 가기요.》

《네?!-》

로병관은 저도 모르게 큰 소리를 내질렀다. 지금까지 그 가능성을 놓고 기연가미연가했던 접견이 현실로 되였다는 기쁨은 한순간이나마 모든 시름과 의문을 다 잊게 했다. 최용건은 그의 밝아진 낯색을 보자 얼굴빛을 흐리였다.

《가서 물으시는 문제들이 있으면 잘 말씀드려야겠소. 보고 느낀걸 량심적으로 정확히 말이요. 잔사설많은 아낙네가 되지 말고… 알겠는지 모르겠지만 오늘 아침 적들은 정식<공세>를 선포했소. 정전담판도 어저께 현재로 깨뜨려버렸소. <유엔군>대변인이라는자의 성명이요. 그리고보면 오늘은 찾아드니 죄다 의주파발이요.》

로병관은 《의주파발》이라는 말뜻을 새겨보려 했으나 선뜻 짐작이 가지 않았다. 다만 김웅의 보고서를 가지고 온 자기도 례외가 되지 않는다는것만은 알수 있었다.

최용건이 말한 《의주파발》속에는 허가이도 있었다. 허가이는 늦은 점심을 치르신 김일성동지께서 잠시 눈을 붙이시려고 했을 때 그이께 불현듯 나타난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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