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편소설 푸른산악 20 > 통일게시판

본문 바로가기
사이트 내 전체검색

통일게시판

장편소설 푸른산악 20

페이지 정보

profile_image
작성자 강산
댓글 1건 조회 2,585회 작성일 20-05-08 23:29

본문

01.jpg

20

 

8월 19일 저녁 밴플리트는 이번 작전의 가능성을 놓고 처음으로 위구를 느꼈다. 그는 세시간남짓 《천재의 고독》속에 묻혀있었다. 완전한 오감은 고독속에서 활개를 펴기때문이다.

(어디에 걸렸는가. 무엇이 부족되였는가.)

허수는 없었다. 그와 릿지웨이를 전쟁의 《스타》(명성)로 만든 《노르만디공략전》때처럼 모든 준비로부터 시작까지 완전무결하였다. 주타격방향을 묘연케 하는 기만전에서도 보급로를 제압하고 공격지점들을 불바다화하는데서도 노르만디를 무색케 할 정도였다. 그러나…

첫날 싸움때에 이미 검은 고양이가 지나갔음을 생각하지 않을수 없었다. 결과는 수천의 사상자를 제물로 바치는것으로 끝났다. 우군끼리의 전투에 대대를 전멸시킨 두 대대장의 자총사건이야말로 불길한 조짐이였다. 물론 밴플리트나 그 수하 장성들은 《정신박약자》들의 자총사건이나 수천의 사상자쯤에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더구나 그 사상자들 대부분이 《한국》인들이라는데 있었고 또 그러한 희생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각오했던 일이기때문이였다. 문제는 어떻게 되여 《세마리의 불쌍한 새》들만이 달려가던 그 불바다속에서 강력한 화력진이 그대로 건재해있었고 또 공격서렬을 짓뭉갰는가 하는것이였다.

(산악?!… 산악에 대한 파악부족이였다. 또 하나 그들의 게릴라적솜씨를 경시한데 있다. )

다음날 아침 밴플리트는 미 10군단장 바야스의 야전지휘소에 나가있었다.

지휘소주변에는 화려한 천막들이 새로 쳐지고 반경 5km구간은 키다리 《헌병》들로 삼엄한 《철책》이 둘러쳐져있었다.

아침공기는 무척 싱그러웠으나 파리잡이약과 향수내로 어지간히 혼탁되여있었다. 하지만 푸른 하늘, 푸른 산발, 하늘거리는 아지랑이-그 모든것은 본래의 자연그대로였다.

정각 9시, 5공군과 7함대의 함재기들이 고성고개로부터 천미리까지의 상공을 휘덮고 천여문의 포가 으르렁거리기 시작하였다.

하늘과 산이 맞붙은 곳에서 목화송이같은것이 점점이 피여오르다가 그것은 점차 회백색구름으로 엉켜지였다.

포대경에 바싹 붙어앉은 밴플리트는 (그의 옆에는 바구니형의 빈 참대의자가 놓여있었다. )도일 히키를 비롯한 막료진들의 눈길을 한몸에 받은채 두눈을 지그시 감고있었다.

그들 퍽 뒤에는 남조선군 1군단장 백선엽이 음침한 얼굴로 밴플리트와 그 막료들을 살펴보다가 그 자리에서 유일한 《한국》인인 송우인에게 뭔가 묻는듯 한 눈길을 던졌다. 그때마다 송우인은 례의적인 눈인사를 보냈을뿐 입엔 빗장을 지른듯 함구무언이였다.

전방상공에 세발의 록색신호탄이 오르자 밴플리트는 백선엽을 찾았다.

《미스터 백, 오늘의 주인공은 당신입니다.》

영어에 밝지 못한 백선엽은 그의 말보다 눈짓에서 《각하》의 의도를 깨닫고 전화통앞에 마주갔다. 그의 얼굴에 서렸던 음침한 기운은 가뭇없이 사라지고 눈이 날카롭게 빛났다.

밴플리트는 느슨한 미소를 머금고 그를 보다가 다시금 포대경에 시선을 돌렸다. 그러나 두눈은 여전히 감긴채였다.

지난밤 그는 릿지웨이와 장시간의 텔렉스교신을 하였다. 비교적 허심탄회한 대화라고 할수 있었다. 지금까지 두사람사이에는 미묘한 간극이 있었다. 밴플리트는 릿지웨이보다 나이로도 년장자였을뿐아니라 사관학교 2년 선배였다. 하지만 운명은 그들의 위치를 다르게 바꾸어놓았다. 그것은 두사람의 경력에서 다같이 빛나는 페지로 새겨진 노르만디공략전부터 생겨난 변화였다. 그 당시 두사람 다 군단을 이끄는 장성들이였으나 이미 북아프리카에서의 공정부대지휘와 씨실리공략전에서 이름을 떨친 릿지웨이는 가장 수월하면서도 각광이 조명된 돌파구의 선두를 차지함으로써 밴플리트의 앞자리에 서게 되였고 그뒤 무혈전투와 다름없는 네데를란드와 벨지끄, 도이췰란드지역에 대한 공격전에서도 쾌승의 영광을 떨쳤다. 반대로 밴플리트는 가장 어려운 구간의 공방전에 말려들거나 남들이 지나간 자리를 청소하는 히에나가 되여 갖은 고역을 다 치르었지만 포츠담에서 열린 전승연회때는 릿지웨이보다 훨씬 뒤의 보조탁에 앉게 되였다.

그때 밴플리트는 이를 갈았다.

군사적지략이나 무장다운 갖춤새로 볼 때 릿지웨이는 의연 2년만큼의 후배라고 생각한 그였기때문이였다. 그러나 시간의 흐름에 따라 그는 자기 생각을 수정하지 않을수 없었다. 릿지웨이에게는 그가 따를수 없는것이 있었다.

밴플리트는 작전이건 전투이건 일단 임무를 받으면 그 하나에만 집착했다면 릿지웨이는 그와 함께 좌우앞을 잘 볼줄 알았고 실패와 성공의 경우에 생겨날 일까지 정확히 내다보았던것이다.

판단의 정확성과 예리성, 정세감각, 유리할 땐 나서고 불리할 때에는 물러서는 신축성과 림기응변… 특히 사람들의 마음을 귀신같이 알아맞추고 대상에 따라 끌어당기기도 하고 진탕속에 차버리기도 하는 예지로운 언변에는 혀를 두를 지경이였다. 이로 하여 밴플리트는 군사적인 면에서는 의연히 그를 숙보면서도 《백악관》과 《펜타곤》- 정치와 군사라는 두 힘의 받침속에 날아든 《유엔군》사령관의 권위앞에는 머리를 수그리지 않을수 없었다. 이 《굴종》에는 커다란 인내와 용기가 필요했으니 그것은 릿지웨이를 만날 때마다 불현듯 생겨나는 렬등의식에 온몸이 난로통처럼 달아올랐기때문이였다. 지난밤도 자기의 반백과 2년선배라는 감정의 작용으로 《우는 소리》와 《부탁》을 두고 꽤나 망설이게 되였다.

하지만 미군의 운명과 명예가 결정되는 력사적국면이라는 사명감이 그의 자존심을 눌러버렸다. 다행히 릿지웨이도 지금까지의 간극은 전혀 없었다는듯 그 어느 때보다 상냥하고 소탈한 태도로 응답해나섰다.

《제임슨, 나는 언제나 그랬지만 지금도 귀하를 선배로 존경하고있습니다. 때문에 나는 현작전에 다대한 난관이 있지만 그 승리에 대하여 조금도 의심하고있지 않습니다.》

릿지웨이의 이 말로써 밴플리트의 마음속 바재임은 수증기처럼 증발하고 말았고 화기애애한 속에서 《노르만디》를 추억하며 그 재판을 위한 의견을 교환하였다.

물론 밴플리트의 립장에서 볼 때 불쾌한 점도 없지 않았다. 릿지웨이는 밴플리트의 새로운 발견과 결심에 놀라운듯 한 찬사를 보내면서도 시종 가르치는것을 잊지 않았고 마지막에는 밴플리트의 착상까지 제것으로 만들어 포괄적인 지시를 떨구었다.

귀하도 감지한것처럼 현작전지역은 돌투성이의 황야(노르만디)가 아니라 원시림의 산악이며 대상도 우리와 같은 기사도적군대가 아니라 신앙숭배적인 다시말하여 김일성최고사령관을 위하여 죽음마저 불사하는 인종들이다. 때문에 우리는 이 산악을 황야로 만들고 신앙심의 존재들을 씨도 없이 소멸해치워야 한다.

이로부터 출발한 나의 구상은 다음과 같다.

첫째로, 지금까지 예비대를 두고있던 모든 포병대들까지 전방계선에 진출시켜 초토화작전을 심화시킬것.

둘째로, 보급로의 봉쇄와 적의 진지를 제압파괴하기 위한 공중폭격을 배가할것. 이를 위해 비행기의 일 출격회수를 2배로 늘구는것과 함께 5공군과 7함대의 함재기들을 전부 리용동원한다.

셋째로, 결정적인 최후공격까지의 기간에 한국군의 사기를 일층 높여 산악통로개척과 적의 주력을 쇠진케하는 파장식공격을 전면적으로 벌리도록 할것이다. 이 경우 산악전에 경험이 부족한 미군지휘관을 한국군의 사단내지 련대급지휘감시소에 내보내여 지형관측과 전투과정연구를 하게 할것이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것은 재삼 강조하지만 한국군의 사기문제이다.

이를 위해 이번 작전참관을 요망하는 리승만대통령의 전선래방을 승인해줘야 할것이다.

리대통령의 전선래방은 한국군의 전투사기를 제고하는것과 함께 정치적으로도 중요한 여건을 띠고있다. 백악관에서도 우려하는바이지만 현재 국내외에서 벌어지는 반전운동은 미군주도하의 적극적인 공세를 불허하고있다. 이로부터 현작전은 북조선공산군의 대규모적공세에 대처한 한국군의 부득이한 반격전으로 공포하였는바 미군투입은 결정적인 승세가 조성되는 경우나 세론이 한국군의 공세에 협조를 바랄 경우에만 있게 되여있다.

물론 이것은 어디까지나 대내외 시각에 미칠 전술적고려로서 미군투입의 기회선택은 전적으로 귀하의 결심여부에 따른다. 여기서 나는 <승리자에게는 죄를 묻지 않는다.>는 말을 귀하에게 상기시키는바이다.

끝으로 미군의 전면공세에 유리한 여론을 조성하기 위해 귀작전지역에 대한 <유엔기자단>의 전선출입을 공식 승인하게 했음을 귀하에게 통고하는바이다.

그 기자단은 귀하의 사령부 공보처에서 엄선한 자들로 선발하게 되였으나 이번 작전과 관련된 대화에서는 <정전불사반대>의 리대통령의 립장을 설명하고 북조선군의 공세에 대처한 한국군의 주동적인 공격임을 강조하여야 할것이다.

충심으로의 경의를 표하며.》

밴플리트는 이렇게 되여 정전담판장에 나가있던 백선엽을 곁에 끌어왔고 어제 있은 두개 련대의 괴멸로 잔뜩 뿔어난데다가 지난밤 밴플리트의 긴급지령에 따라 5보사와 8보사외에 수도사단과 11보사를 불바다속에 더 진입시킨 상태에서 울울불락해있던 백선엽은 전반지휘권이 자기에게 돌아오지 않았는가 하는 황홀감과 그와 대등하게 치밀어오르는 초조감과 불안속에 전화통과 마주서있게 된것이다.

리승만일행이 도착한 시각은 야전지휘소안에 깃든 어마어마한 침묵이 바야흐로 폭발을 일으킬듯 한 때였다.

백선엽의 노기찬 울부짖음이 그 폭발의 발화점으로 되였다.

다섯개의 공격사단이 예상치 않은 인민군의 중곡사포화력과 사방사처에서 날아드는 박격포탄과 총탄의 비발속에서 곤혹을 겪고있다는 아우성을 들었을 때도 백선엽은 《맹호출림》의 평안도 사나이답게 꿋꿋한 자태를 무너뜨리지 않았다.

계속 진격할것을 요구하는 호령에는 담찬 강기가 엿보였고 사납게 번쩍이는 눈에는 반드시 공산군진을 뭉그러뜨리고 말겠다는 의지가 비껴있었다.

그러나… 미군포병대의 사격이 《우군을 맹타》한다는 보고를 받자 그의 낯색이 달라졌다. 뢰우를 품은 광포한 기상이 뿜겼다. 그런 상태에서도 말씨는 공손했다.

《각하, 미군의 포사격이 잘못되고있습니다.》

그의 서투른 영어가 끝나자 송우인이 보충적으로 오고간 말들을 요악하여 미군포병대의 사격이 《한국》군 공격서렬을 붕괴시키고있음을 듣기 좋게 말하였다. 그의 말에 밴플리트는 몹시 노한 빛을 보이며 미 10군단장 바야스에게 즉시 수정시키게끔 지시했다. 전화통을 잡은 바야스는 누군가에게 거센 소리로 욕설을 퍼붓고는 진중한 자세로 어깨를 으쓱하며 송수화기를 놓았다.

《어쩔수 없답니다. 포지휘기들과 지휘정찰수들로서는 지금과 같은 상태에서 정확한 포사격의 유도가 불가능하기때문입니다. 포연속이니 적아의 판별도 곤난하고… 이걸 리해못하니 딱하군요.》

그의 입만 지켜보던 백선엽은 아연하여 소리쳤다.

《그런것이 아닙니다. 저의 부하들은 유도사격에서의 실수가 아니라 미리 선정된 사격지점과 반대되는 한국군 공격서렬에 집중사격이 퍼부어지고있다는것입니다.》

《백, 당신네 사람들은 과장벽이 심해. 한데 당신이야 포병학을 배웠겠지.》

밴플리트의 웃음진 말에 백선엽은 온몸을 우르르 떨었다.

《배웠습니다. 워스트 포인트의 교재 그대로 보병과 포병의 협동, 공중지원시의 상호간 련계와 실책방지의 대책안까지-》

《그건 좋고… 그렇다면 실탄이 있을수 있다는것쯤이야 알아야 할것이 아니요.》

《각하, 이건 실탄이라기보다 무책임입니다. 가령 저 고지에 미군들이 붙었다면… 각하, 지금과 같은 <실탄>은 없을것입니다.》

《당신은 불만이 많은 사람이구만. 혹시 당신은 우리의 지원자체가 달갑지 않다는것이 아니요?》

밴플리트의 볼살이 푸들푸들 떨렸다. 송우인이 옆구리를 찔렀으나 자포자기와 분노에 악이 받친 백선엽은 심약한 리기붕국방장관이나 리종찬륙군참모총창과 맞서던 때의 본새대로 사자처럼 울부짖었다.

《그렇습니다. 지금과 같은 포사격은 무익합니다.》

《필요없다?!》

백선엽의 서툰 영어지식으로 하여 호상 주고받는 대화의 뜻이 제대로 소통되지 않았으나 이 순간의 밴플리트는 자기 앞에 선 《한국》장성을 적으로 규정하고 말았다. 그의 얼굴이 석고처럼 굳어지고 낯색까지 희벗하게 달라지는것을 보자 그의 뒤에 섰던 호위관의 손이 권총집에 가닿았다. 바로 이때 리승만일행의 도착이 알려지였다.

《이 군단장은 필요없어.》라고 말하려던 밴플리트의 입에서는 《까뗌!》이라는 소리가 알릴듯말듯 울렸다. 그것으로 끝났다. 그가 뜨지도 빠르지도 않는 동작으로 일어섰을 때는 석고가 본래의 반죽으로 변한 때였다. 얼굴에도 분칠한듯 한 느슨한 웃음을 담았다.

리승만과 포옹할 때는 프란체스카를 데려오지 않은것으로 무슨 롱말까지 하며 웃었으나 상봉은 서먹하기 그지없었다. 《대통령각하!》 하고 울음울듯 웨치는 백선엽의 흐린 얼굴로 하여 더욱 그랬다. 그런중에도 얼마간 례식다운데가 있었다면 유엔기자단의 수선스러운 움직임과 사방에서 번쩍거리는 사진촬영시의 불빛때문이였다.

리승만의 수행으로는 리기붕국방장관과 리종찬륙군참모총장이 따랐다.

전망대에 올라 얼마간의 정황설명을 듣고 인사차림식으로 포대경에 잠시 눈을 붙였다 뗀 리승만은 밴플리트가 권하는 바구니형침대의자에 앉자부터 몹시 피곤한 기색을 보였다. 로령의 몸으로 먼 길을 차로 달려온데다가 《정전반대운동》에 심화를 쓴것으로 하여 더욱 메말라진듯 한 모습이였다. 부석부석한 눈두덩살은 무겁게 내리쳐져 있었고 방금전 인사를 나눌 때만 해도 따뜻하던 눈이 졸음에 실린듯 게슴츠레했다. 위생복차림의 장교가 그와 밴플리트앞의 탁자에 커피잔을 가져다 놓을 때 그는 지쳐 빠진 늙은이의 형색이였다.

반대로 밴플리트는 몸에 배인 위엄을 더욱 북돋구듯 근감한 자세로 전방고지를 살폈고 이따금 백선엽이나 송우인을 볼 때면 아량어린 미소까지 보여주었다.

(너무나 늙었어. 여기엔 무엇때문에 왔담.)

송우인은 물기어린 눈으로 리승만을 줄곧 보면서 속으로 한숨을 지었다. 지금까지 그는 절반미국인이 된 자세에서 모든 미국인들이 그러했듯 리승만을 크게 생각하지 않았고 이렇다할 존경과 애착도 느끼지 못했지만 밴플리트와의 대조속에서 보게 된 《국부》에 대하여 새삼스러운 동정과 측은함과 함께 같은 혈족으로서의 굴욕감까지 느끼게 되였던것이다.

백선엽의 오기가 단말마적넉두리로부터 비극적인 관직박탈로 끝나리라는 침하된 기분때문에 더욱 그런것 같았다.

그런데 뜻밖의 변화가 일어났다. 누군가의 손짓에 기자단패거리가 물러가자 리승만의 태도가 돌변해진것이였다. 축 늘어졌던 눈두덩이살이 팽팽해지고 흐릿한 눈이 생기롭게 반짝였다.

《이봐, 자넨 누구던가?》

그는 송우인에게 떠보는듯 한 눈길을 던졌다.

영어로 하는 질문이였다. 송우인이 자기 직명을 밝히자 리승만은 새삼스럽게 손을 내미며 감심한 어조로 말했다.

《자네 직함이 이만저만한게 아닐세. 직함으로 보면 우리 국군과 아니 나까지 전체를 대신한셈이야. 알겠나?》

그리고는 대답도 기다리지 않고 밴플리트에게 말을 걸었다.

《장군, 어떻습니까. 우리의 견마잡이가?》

《송준장은 나의 훌륭한 벗이고 보좌관입니다.》

리승만의 《견마잡이》로부터 《벗》으로 승격시켜주는 밴플리트의 말에 송우인은 얼굴이 화끈해졌다.

(역시 늙었구나, 아니 망녕이지. 자기를 대신한다고 하는 나를 《견마잡이》라고 하다니.)

송우인이 모욕감을 참지 못해 눈을 내리깔 때 리승만의 눈길은 백선엽에게 가멎었다.

《여보게 백군단장, 자네 얼굴이 그게 뭔가.》

《대통령각하.》

백선엽이 뭔가 한마디 할듯 한걸음 나서자 리승만은 황급히 손을 저었다.

《아네, 알아. 싸움이 힘들다는거지. 암 힘들구말구. 하지만 자네야 <맹호출림>의 으뜸가는 사내가 아닌가. 보라구. 이 60줄에 오른 밴플리트장군께서도 이 허기막히는 더위속에서 우릴 위해 전장지휘까지 나와 하는데 자넨 그게 무슨 우거지상인가. 싸움에는 실패도 있고 그로 해서 목을 잘리울수도 있지만 저 옛날 충무공이나 관우, 장비 같은 기백쯤이야 있어야지. 내 방금도 듣구 또 예까지 오면서도 알았지만 자네의 군지휘가 여의치 않은것 같애. 잘못될것 같으면 여기 미군어른들한테 묻구 어려운것이 있으면 떳떳이 방조를 청하구… 또 의견이 있으면 당당히 말하는것이 대장군다운 처사가 아닐텐가.》

언제 끝날지 모를 대통령의 말을 망녕든 로인의 푸념으로 스쳐듣던 송우인은 그렇게만 들을것이 안된다는것을 깨달았다. 더구나 공식석상에는 《십리에 한마디씩》이지만 조선말을 쓴다는 대통령이 백선엽으로서는 절반의 절반도 알아들을수 없는 영어를 물 쏟듯 하는데서 (아하, 역시 초야의 늙은이들과는 다르구나. 뭔가 낌새도 알아차렸고 목적도 있구나.) 하고 생각했다.

밴플리트도 그것을 알아차린것 같았다. 리승만이 《잘못될것 같으면 여기 미군어른들한테-》할 때부터 볼이 불룩하게 나와있던 그는 리승만이 한숨 돌리는 기회를 타 자못 허심하면서도 사교적인 태도로 입을 열었다.

《각하, 잘못된 일이라면 저나 저의 지휘관들의 책임을 먼저 물어야 할것입니다. 오늘 전투에서도 우리 잘못이 적지 않습니다. 유감스러운 일이지만 지형에 대한 파악이 부족하고 혼전상태이다보니 미군포병대의 사격에 한국군들이 적잖게 피해를 입었습니다. 백군단장은 바로 그 일이 가슴아파 방금전에도 저희들에게 의견을 주었습니다. 수하장병을 책임진 지휘관으로서 십분 그럴만 한 일이라고 봅니다.》

《아니 장군, 그렇게는 말씀 마시오. 이애들은 제가 잘 압니다. 저 사람은 원래 분기가 살아나면 아래우도 모르는 <맹호출림>이여서 막주정을 한것이 분명합니다.

이보게 백군단장.》

백선엽을 다시 찾는 그의 눈에는 노염과 질책의 빛이 가득 서렸다.

《자넨 무슨 사람이 그런가. 대의를 놓고 사감에 빠지다니. 더구나 멸공보국의 성업에 나선 한집안끼리 서로 흠잡을 내기만 하면 결과가 어떻게 될텐가. 수만장졸이 싸우는판에서 몇사람의 과실치사를 당하는거야 여반장한 일 아닌가. 아, 옛날 맨 창칼로만 싸울 때도 제편의 창칼에 등허리가 찔리고 팔다리가 떨어지는 일은 부지기수라고 했는데… 그래 오늘날 나나 자네가 이렇듯 목숨을 부지하고 배달국토를 보존하게 된것이 뉘덕인가. 큰덕을 작은 원형으로 지워버리면 못 쓰네, 못써.

서루 미점만 보고 마음을 합치면 저 미군어른들덕에 풍지박산된 빨갱이들이 견뎌야 얼마나 견디겠나.… 이젠 그만하구… 저기 자넬 찾는 전화가 온것 같네.》

알아듣기 어려운 꼬부랑말의 쌍겹포위속에 들었던 백선엽은 다행이라는듯 돌따섰다.

《무어요?》

송수화기를 들고 선 송우인의 얼굴이 납덩이처럼 된것을 알아본 백선엽은 퉁방울눈이 되여 물었다.

《8사 사단장의 전화입니다.》

송우인은 더이상 내용을 말해줄수 없었다.

백선엽이 어떻게 나올가 하는것만이 궁금했다. 밴플리트가 그를 손짓해 불렀다.

《송준장, 무슨 내용이요?》

송우인은 《뭐요? 뭐라구.》 하는 백선엽의 목소리가 또다시 높아지는것을 두렵게 들으며 망설였다. 하지만 리승만까지 깔끔한 눈길로 지켜보는 바람에 말하지 않을수 없었다.

《약간한 사고가 생겼습니다. 국군 8보사의 한 부련대장이… 미 2사 곡사포대대에 갔는데… 거기서 그만 잘못된것 같다고 합니다. 미군측에서 그 부련대장의 신원을 확인해온데서 알았다고 하는데… 신원을 확인한 즉시 미2사 곡사포대대에서는 인민군정찰병들이라고 주장한다지만 8보사 사단장은 그것을 믿지 않습니다.》

《대통령각하.》

처량할 정도의 목멘 소리에 송우인은 고개를 돌렸다. 백선엽이였다. 리승만은 묵중한 바위처럼 눌러앉아있는 밴플리트를 얼핏 눈줘 보고는 귀찮게 덤벼드는 모기를 휘쫓듯 백선엽이더러 물러가라고 했다. 허나 백선엽은 움직이지 않았다.

《각하, 저희네 한 부련대장이… 잘못되였습니다.》

《나도 들었어. 그 사람은 빨갱이들한테 잡혀갔고 그 사람역을 논 인민군정찰병들은 미군들한테 처단되였어.》

《각하, 그런것이 아닙니다. 그건.》

《이봐, 자네 오늘 실성하지 않았나?》

리승만의 말은 얼음장처럼 싸늘했다. 리종찬참모총장이 《백장군!》 하며 백선엽을 끌어당겼다. 백선엽은 끌려가면서도 소리쳤다.

《각하, 그 사람은 <서북청년단> 관북회 회장으로서 반공의 기수였습니다.》

리승만은 쓰겁게 웃었다. 그는 정맥이 드러난 하얀 손으로 턱을 쓰다듬다가 침울한 얼굴의 밴플리트에게 말을 걸었다.

《장군께선 저 사람 리해를 해줘야 할것 같습니다. 평안도사람이라 성정이 괴벽한데가 있지만 사람이야 진국입지요.》

밴플리트는 들은듯만듯 굳어져있다가 부관에게 눈짓했다.

《알아보오. 우리 사람들이 실수를 했을수도 있으니.》

송우인은 구슬픈 눈길로 백선엽이며 전화를 거는 부관을 엇갈아보았다.

(숙명인데 무엇때문에 저항하는가.)

살해된 그 부련대장은 송우인이도 잘 아는 사람이였다.

《서북청년단》의 연회나 모임때마다 거의 빠짐없이 참가하던 송우인은 백선엽을 형님이라고 부르던 그 사람의 고향이 홍원이라는것까지 기억하고있었다.

…이름 모를 꽃들이 자름자름 얼굴을 내민 숲속길에서는 멀리서 울리는 폭음마저 음악처럼 들린다. 늘 거치장스럽던 방독면과 수류탄띠를 벗어던지고 카빙총만을 가볍게 멘 송우식은 숲속의 향긋한 공기때문인지, 아니면 앞서걷는 《켈리포니아의 암말》에서 풍기는 지독한 향수내때문인지 시종 코를 벌름거리는 보튼의 헐떡이는 숨결에 웃음을 지으며 뜻밖에 차례진 행운을 놓고 여러가지 생각을 굴렸다.

분명 이《행운》은 그제 오후 불현듯 나타난 형과의 상봉이 시작점으로 되였을것이다. 그로 하여 《하느님》같은 밴플리트와도 인사를 나누었다.

《송준장, 당신은 훌륭한 장군감을 묻어두고있구만. 이번 작전이 끝나면 내 명의로 미국보병학교에 보내야겠소.》

밴플리트는 그와 몇마디 회화를 나눈끝에 대번에 자기를 장군감으로 보아준것이다. 송우식으로서는 자기가 장군이 될수 없다는것도 또 장군이 되고픈 소원도 없었지만 밴플리트가 돌아간 뒤부터 카츄사병들에게 차례지는 세면물운반과 변기청소 같은것에는 죄다 면제되다싶이 되였고 오늘은 중대장도 아닌 대대장이 직접 찾아와 그와 보튼에게 이름높은 미국기자 하린 히스를 미10군단장 전방감시소에까지 수행하라는 분에 넘친 《혜택》을 안겨주었던것이다.

반벌거숭이로 포탄을 나르고 장탄을 할 때마다 내지르는 악청들과 발사시마다 고막이 터져나갈듯 한 굉음에서 벗어난것만 해도 얼마나 다행인가.

그런데 한가지 수상스러운것은 떠날 때 하던 대대장의 말이였다.

《방금전 자네들이 쏴눕힌건 한국군 장교와 운전사가 아니라 인민군정찰병이란걸 명심하게. 누가 물어도 그렇고.》

한시간전이였다. 오침도 없이 사격을 시키는데 지치고 화가 난 포수들이 마구잡이사격을 들붓는데 전방 소로길로 한대의 군용찦차가 맹속으로 달려왔다. 그 차에서는 온 얼굴이 흙탕에 버물려 깜둥인지 백둥인지 모를 장교가 권총을 뽑아들고 팔을 저었다.

보튼과 함께 인민군정찰대의 기습에 대비해 포좌지앞 50m지점에 은페하고있던 송우식은 그 장교의 입에서 《노! 그만 둬라! 까뗌!》 하는 영어절반, 조선말절반의 소리를 알아들었다. 그런데 차는 전방 보초병의 정지에도 아랑곳 없이 그냥 달려들었다. 장교의 총구에서는 자동총 련발사격처럼 권총탄이 공중으로 날아올랐다.

(미쳤는가?)

송우식이 두눈이 덩둘해 있을 때 《일제 쐇!》 하는 구령이 울렸다.

송우식은 자기가 방아쇠를 당겼던지 안당겼던지는 알수 없었다.

다만 나는듯 달려오던 차가 풀숲 홈타기에 구겨박히는것과 권총을 휘두르던 장교가 밑둥 잘린 무우처럼 쓰러지는것을 보았을뿐이였다. 모든 병사들이 그 차를 향해 우르르 달려갈 때 송우식은 가슴이 써늘해 지켜보기만 했다. 상대가 인민군정찰병이든 《한국》군 장교이든 피를 보는것이 싫었기때문이였다.

보튼이 그를 찾았다.

《송, 이걸 보라구.》

보튼의 손에는 무궁화표지의 군번증이 들려있었다.

송우식은 군번증을 받아들다말고 흠칫하고 놀라 굳어졌다. 장교는 채 죽지 않았던것이다. 한손으로 풀뿌리를 꽉 움켜쥔 장교는 몇번이고 일어설듯 움짓거리다가 기진한듯 늘어졌다. 잔등과 입에서 샘처럼 피가 솟구쳐나왔다.

댓글목록

profile_image

강산님의 댓글

강산 작성일

(위에서 계속)

《쌍 백당놈들, 늬들이, 늬들이… 우리를 죽인다.…》

《이자가 뭐라고 했나?》

《모… 모르겠습니다.》

《어떤 히스테린가 빨리 보게.》

보튼의 재촉하는 말에 군번증을 펼쳐보던 송우식은 저도 모르게 《아.》 소리를 질렀다. 어디선가 본듯 싶은 얼굴이였기때문이였다.

사진밑에는 이름과 함께 부대명과 직급이 밝혀있었는데 중령에 부련대장이였다.

《어떤잔가?》

《8보사… 부련대장입니다. 》

《뭐 부련대장?!》

군용찦차밑에서 운전사의 시체를 꺼내던자들까지 우구구 모여들었다.

보튼이 뜻밖일 정도의 너털웃음을 쳤다.

《그런즉 우리는 큰 놈을 해제꼈어. 한국군 부련대장의 증명서를 빼앗은 놈쯤이면 대단한 공산군정찰병이 아닐텐가.》

송우식은 부련대장의 실제 얼굴을 확인하고싶었다. 그러나 풀숲에 박힌 얼굴을 되돌릴 용기까지는 없었다.

《뭣들 이러고있어?》

한 장교의 손이 군번증을 나꿔채갔다. 돌아보니 소년시절을 개성에서 보냈다는 정훈장교였다. 우멍진 눈을 희번득이며 송우식의 아래우를 위혁적으로 훑어보고난 그는 그간의 기회를 타 여기저기 자빠져 있는 포수들을 일떠세우고 대대장이 있는 막사쪽으로 뛰여갔다. 다시 포사격이 개시되였음에도 불구하고 송우식의 귀에는 대대장이 막사안에서 다급히 돌려대는 전화발전자돌리개소리가 방불히 들려오는것만 같았다.

그 장교는 거의 20분 넘어서야 다시 나타났다. 약간 허둥이는 표정이였으나 송우식이네 앞에 이르렀을 때는 표독스런 기상이였다.

《저자들은 인민군대정찰병들이다. 우리가 확인한만치 시체보존은 필요없다. 즉시 소각하라.》

《대위님, 표창은 있겠습지요?》

보튼이 능청을 떨었다. 그제야 장교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그렇다. 오늘안으로 상부에 보고하여 해당 평가를 내리게 할것이다.》

송우식은 휘발유벼락을 들쓴 시체와 자동차가 불더미로 변하는것을 보며 자기가 쏜것이 (확실히 쏘았는지 미타했지만) 인민군정찰병임을 굳게 믿으려 했으나 그렇게 되지 않았다.

(아니 이렇건저렇건 나한테 관계없어. 나는 쏘지 않았으니까. 정말이야, 쏘지 않았어.)

슬그머니 탄창의 탄알을 검사해보려 했으나 갑자기 구역질이 일어나 단념하고말았다. 시체타는 냄새때문인것 같았다. 느티나무밑에 달려가 뭔가 토하고싶었으나 뜻대로 되지 않았다.

보튼이 다가와 그의 어깨를 두드렸다.

《이보게, 어린 천사, 고개를 높이 들어 하늘을 보라구. 오늘 우리들의 공로는 밴플리트장군에게까지 보고될수 있어. 자네나 내가 세운 공로란걸로 말이야.》

이렇게 보면 보튼의 말이 맞은듯싶다. 모름지기 대대장은 상부에 밴플리트의 《후광》을 받은 자기 이름을 선참으로 꼽았는지 모른다.

련대부에 와 다시금 《인민군정찰병사살》에 대해 치하를 받고 보튼이 슬쩍 해온 위스키를 한모금 마시자 구역질과 오한 비슷한 어지럼증도 사라졌다.

《아, 인민군정찰병들을 쏴제낀 무공자들이군요.》하린 히스의 악수까지 받고나자 온몸은 건둥 뜨는듯 했고 산 하나를 넘고난 뒤부터는 전쟁과는 가뭇 멀어진 해방감까지 느꼈다.

(그래. 나는 이런 평화로운 숲과 꽃들을 사랑한다.)

오래간만에 맛보는 한적속에서 지나온 날들이 되밟혀왔다.

고향집앞의 전원, 수원농림전문학교의 채마전, 도미류학의 꿈, 전쟁, 《전쟁터에 가지 말아요.》 영희의 말, 《그래 안가겠어.》 허나 전쟁의 물결은 그런 의지마저 허물어버렸다. 《정 군이 싫으면 일본에 있는 카츄사훈련소에라도 가렴. 그동안이면 싸움이 끝날지도 모르니까. 》 매정한 형의 가냘픈 보살핌… 보튼이 그의 추억을 깨뜨렸다.

《저 녀자는 켈리포니안의 순혈종 암말 같아.》

떠날 때부터 하린 히스의 호함진 엉뎅이에 눈길을 박고있던 보튼은 송우식이도 보란듯이 옆구리를 쿡 찔렀다.

《이봐. 한국에는 저런 미인이 없지?》

보튼의 청높은 목소리에 켈리포니아의 암말과 그의 옆에 붙어가던 명태짝 같은 대위가 동시에 고개를 돌렸다.

대위는 너희들생각은 다 알겠다는듯 히죽이 웃었고 갸름한 얼굴의 하린 히스는 《미인》이라는 말때문인지 아니면 사내싼 보튼의 열기어린 눈에 끌려서인지 교혹적인 미소를 뿌려던진다. 웃음은 매력적이였으나 붉은 반점이 내돋친 얼굴에서는 아무런 미도 찾아볼수 없다.

보튼의 얼굴은 더욱 검붉어진다. 송우식은 불시에 심기가 꾀여들었다.

《자네 말처럼 우리한텐 없어. 한데 일본엔 많더군.》

《어디에?》

《후지산밑의 오덴바.》

《아, 카츄사훈련소말인가.》

《그렇네. 저녁마다 열댓명씩 나타나 자네네 쥐아이(미군)들을 끌어내더군.》

《거야 난쟁이빵빵걸(미군에게 몸을 파는 녀자들에 대한 별칭)들이 아닌가.》

《내 눈에는 그들이나 저 암말이나 다 같고같이 보여.》

송우식이 좌우로 흔드적이는 암말의 엉뎅이를 가리키자 보튼의 눈에 독살이 뻗쳤다. 하지만 지금까지의 말을 롱말로 스쳐버린다는듯 대범하게 말을 받았다.

《하긴 그렇기도 하지. 우리들의 사랑이 스며들면 모든 녀인들이 완성된 미를 지니게 되지. 그렇게 보면 자네네 녀인들에게도 그런 미인이 많이 생겨나지 않나.》

보튼은 승리자연한 미소를 던졌다. 송우식은 대답을 못했다. 보튼의 말이 옳았기때문이다. 이른바 《양공주》 빵빵걸이 수많이 생겨나는것이다.

마음이 흐려들었다. 대전에 있는 영희의 모습이 눈앞에 얼른거렸다. 그 모습은 풀숲의 이름모를 꽃처럼 청초하며 아름답다.

(거기도 미군들이 많지.)

대전시청의 타자수로 일하는 영희는 미군초대연회때마다 일개 녀급처럼 끌려다닌다고 편지에 썼다.

(이자가 영희를 본다면 어떻게 나올가.)

종마장 수말같은 보튼을 치떠보자 가슴이 싸늘해들었다. 녀자들에 한해서는 거의 모든 미군들이 보튼과 다름없다.

산속의 숲길을 벗어나자 무질서하게 널린 덴트(천막)가 나타났다. 《켈리포니아의 암말》때문인지 몇사람이 서성거리던 그곳에서 쥐아이(미군)들이 무리져 쓸어나왔다.

하린 히스가 그들에게 손을 저어보이자 몇명의 백둥이들이 휘파람을 불어대다가 명태짝 같은자의 안경이 번쩍하는것을 보고 서름서름한 자세로 눈길을 내리깐다.

불도젤로 마구 밀어제껴 생흙이 두드러지게 보이는 길로 군용찦차 한대가 기다렸던듯이 달려와 그들앞에 섰다.

송우식은 《쿠크》(한국인 카츄사병들을 경멸하여 부르는 미국인들의 속칭)란것이 알려질가보아 철갑모를 코등까지 눌러썼다.

하린 히스를 공주 모시듯이 끼고 앉은 보튼의 옆에 엉뎅이 반쪽을 붙이고 앉자 운전사옆석에 앉았던 대위가 엄한 눈길로 돌아보았다.

《탄알들이 있소?》

《녜. 있습니다.》

《꺼내 놓으시오.》

송우식은 대번에 가슴이 철렁했다.

(아까의 그 부련대장사살때문에?)

떡심좋은 보튼의 얼굴마저 희벗하게 변했다.

대위의 얼굴에 만족스런 표정이 떠올랐다.

《다른 생각마오. 리대통령께서 당신들을 불렀소.》

 

×

 

밴플리트가 송우인을 찾았다. 전화를 마친 밴플리트의 부관이 웃음진 얼굴로 눈을 끔뻑해보일 때 밴플리트도 입안의 금이가 드러날 정도로 환히 웃었다.

밴플리트가 리승만에게도 뭔가 말하자 리승만은 고개를 끄덕끄덕하고는 불시에 생각난듯 청높은 소리로 말했다.

《밴플리트장군, 내 오늘 우리 사람들에게 훈장을 주자고 몇개 가져왔는데 그 무공자들에게 줄가 하는데 어떻습니까?》

(이건 또 무슨 연극이란 말인가?)

밴플리트의 부관이 또다시 전화통에 다가붙을 때 송우인은 타래쳐오르는 불구름쪽을 우울히 바라보았다.

(무공자들은 저기에 있지 않는가. 그런데 진심으로 자기를 바쳐 싸울 무공자들이 몇이나 될가. 대다수는 총구에 떠밀리웠다. 그러한 개개의 존재들은 강물의 흐름에 따라가는 짚검불에 불과하다. 자기 의지, 자기 희망과는 별개의 흐름이다. 하지만 그네들에게는-)

송우인의 머리에는 언제 한번 지워버리지 못한 황영학이며 로병관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들은 사상과 주의를 자주 말했지. 하지만 사상과 주의란 관념에 불과한것이 아닌가. 그렇다면… 자기 보존의 욕구와 집념때문에 싸우는것으로 봐야 하지 않을가.

자기 보존?!… 나도 그때문에 이 길을 밟았지. 그래 그렇다. 하지만…)

여기서 송우인의 머리에는 혼란이 일었다. 로병관이나 황영학과 길을 같이 했어도 《자기 보존》의 절대치에는 변화가 없을것이라는 생각때문이였다.

(그렇다면 나 역시 사상과 주의때문이였는가? 아니, 나는 보다 높은 행복에 대한 갈구에서 이 길을 택한것이다. 이 선택에는 운명의 혜택도 있었다.

그 혜택이란 무엇인가.… 웨드마이어? 그다음 밴플리트라고 해야 할것이다. 그러나 나는 시중군에 불과한것이 아닌가.…)

지휘소안이 술렁거렸다. 쫓겨나갔던 몇명의 기자들이 들어서고… 유쾌한 미소를 머금은 미군장성들이 진기한 구경거리를 발견한 눈길로 전망대계단쪽을 내려다 볼 때 송우인은 관청에 들어서는 촌닭처럼 어리둥절한 눈길을 어데다 둘지 몰라 쩔쩔 매는 동생의 초췌한 몰골을 보고 쓴웃음을 삼켰다.

(연극치고는 참으로 훌륭하다. 하긴 세상사는 연극이다. 연극을 할바치고는 비극역이 아니라 정극의 행복자가 되여야 한다.)

밤, 야전지휘소의 대형천막안에는 긴 탁을 사이에 두고 밴플리트와 그의 막료진이 리승만을 중심으로 한 《한국》군 수뇌자들과 서로 마주앉았다. 량측의 가운데 있는 위치라 적당한 자리를 찾지 못했던 송우인은 밴플리트의 호의로 리승만의 왼쪽켠에 앉았다. 오늘 전투의 기본지휘관으로 아무런 전과도 이루지 못한데다가 여러면에서 초달을 당하여 앙앙불락해 있던 백선엽은 밴플리트와 리승만의 아량으로 《대통령》의 오른쪽켠에 앉았다.

얼음 탄 위스키가 한순배 돌아가자 리승만이 먼저 입을 열었다.

《내가 오늘 예 온것은 우리 <국군>용사들의 무훈을 직접 보려는것도 있었거니와 주요하게는 밴플리트장군과 제하 장성들에게 섭섭한 말을 하고저입니다.》

장내의 수선거림이 싹 가셔졌다. 밴플리트의 우묵진 눈이 툭 튀여나오는것 같았고 음식을 나르던 접대원들은 못처럼 박혀서있었다. 하지만 리승만은 그 모든것에는 아랑곳 않는다는 태도로 반쯤감은 눈으로 장탄조의 말을 계속했다.

《사실 나는 여기 모인 밴플리트장군이나 여러 지휘관들에 대해서만 아니라 릿지웨이장군에 대해서도 의견이 없지 않았습니다.》

《각하.》

리기붕이 황급히 말하자 리승만의 눈에 부시불같은것이 번쩍했다.

《자넨 가만 있게.》

말은 점잖았다. 그는 누군가의 손짓에 접대원들이 소리없이 나가는것을 유연히 보다가 계속했다.

《그건 빨갱이들과 정전을 하겠다는 대아메리카합중국의 무장답지 않은 소위에 분격했기때문이였습니다. 하지만 그건 순간의 우두망찰이였습니다. 비록 좀 늦게 깨닫기는 했지만 그 <정전>안이 릿지웨이장군의 독단적결심도 아니였고 또 미국의 기본저의도 아니라는걸 알았기때문입니다. 바로 오늘도 미국어른들이 피와 땀을 바쳐 금강산과 원산이북까지 찾아내기 위해 애쓰는것이 그 증명이라 하겠습니다.

그런데 미국의 막강한 군세로 볼 때 한번 용을 쓰면 지난해 가을처럼 압록강까지 밀고 나갈수 있겠는데 과인에게 며칠안이면 먹는다던 저앞의 산들도 타고 앉지 못하니 이 심정을 무슨 말로 다하겠습니까.

하기사 그 비싼 폭탄을 아낌없이 쏟아부어 빨갱이들의 소굴을 뭉개고 씨종자를 말리우리라는건 불보듯 명백하지만… 미국군대들이 왁 밀려가면 순간에 다 타고앉을 일이 아니겠습니까.

물론 과인도 지금 미국내의 온전치 못한 사람들이 전쟁반대를 웨치기때문에 적잖게 재고있다는것을 알고있습니다. 그러나 조선속담에 구데기 무서워 장 못담그겠는가 하는 말이 있는것처럼 반공의 성업을 막는 자들의 여론에 몰릴것이야 없지 않겠습니까. 이때문에 나는 미국대통령 트루맨씨와 국회에 대고 항소편지를 보낼가도 했는데 고쳐 생각했습니다. 그건 여기 밴플리트장군께서나 여러 제씨들이 결심하면 능히 될 일이기때문입니다. 존경하는 밴플리트장군, 나는 장군을 타국사람으로가 아니라 나의 혈족으로 죽마지우로 여기고 부탁합니다. 우리가 누구를 믿고 반공을 하고 호국을 합니까. 우리 국군이야 세살난 어린애인데 장군과 여러 제씨들이 형님으로, 아버지로 되여야 하지 않겠습니까.

제발 부탁입니다. 미국군대를 죄다 풀어 내밀어주십시오. 정 그러지 못하시겠다면 온갖 병쟁기들을 다 우리에게 주시오. 저 산골안의 늙은이들로부터 부녀와 소년들에게까지 총을 메워 미국과 대한민국의 명예와 권익을 반드시 되찾겠습니다. 필요하다면 이 나에게도 륙혈포든 카빙총이든 메워주십시오.》

리승만은 손수건을 눈에 가져다대였다.

(취했구나. 아니, 완전한 망녕이다.)

송우인은 바늘방석에 오른듯 수치감과 모멸감에 가슴이 죄여들었다. 그런데 왜서인지 눈언저리가 뜨끈히 달아올랐다.

늘 돌덩이 같던 밴플리트마저 숙연한 얼굴로 두눈을 겁석이였다.

《대통령각하, 너무 심화를 쓰지 마십시오.

저희도 다 생각이 있습니다. 상대가 상대니만치 신중성을 기할 따름입니다. 북조선군은… 여느 군대와 다르기때문입니다.》

《옳습니다. 장군, 분통한것은 그것입니다. 다 같은 된장에 밥을 먹고 피도 같은데 빨갱이감투만 쓰면 늑대보다 더 무섭게 되는데… 이건 어찌한것입니까.》

리승만의 눈은 새말개졌다.

밴플리트는 허구픈 미소를 지었을뿐 대답을 피했다.

송우인은 이 순간 또다시 로병관이며 황영학을 생각했고 먼 옛날 김일성장군을 사숙하며 나누던 말을 되새겨보았다.

마음이 언짢아졌다. 생각 같아서는 리승만과 밴플리트에게 들으라는듯이 말해주고싶었다.

(빨갱이들속에는 우리보다 훨씬 못한 사람들도 있지요. 하지만 속담에도 있지 않습니까. 제왕이 강하면 장졸도 강해진다. 우리의 《존경하는 국부》는 늙은 염소올시다.)

이날 밤 12시, 밴플리트는 릿지웨이와 텔렉스교신을 하였다.

터져나갈듯 한 분노와 울화에 휩싸인 밴플리트는 리승만의 《주정》과 자기의 결심을 말하였다.

리승만의 《주정》은 늙다리의 순간적인 취중망발이 아니라 깊은 타산밑에 나온 정략적발언이라는것과 권모술수와 능변에 이골이 난 그가 백악관과 국회에 쐐기질을 들이대고 세계여론을 환기시키면 릿지웨이나 자기를 좋아 안하는 적수들에게 공격무기를 쥐여준다는것과 나아가서 미국의 수하동맹국들앞에서 미국의 체면을 저하시킬수 있다는것을 언급하고 미군사단들을 유리한 계선에 진출시켜 전투에 인입시키겠다는것을 강경하게 제기한것이였다.

이에 대하여 릿지웨이는 쾌히 수락하였다. 그는 전날밤 미군의 본격적공격은 산악의 《황야화》와 최종승리가 담보될 경우에야만 있어야 된다고 한것을 단호히 철회하였다.

《…전반상황으로 볼 때도 기회는 성숙되였다고 할수 있습니다. 오늘 보내온 합동참모본부의 통보에 의하면 북조선측에 대한 쏘련의 무장지원이 극히 줄어들던가 일정한 기간 두절될것이라는것으로 보고있습니다. 그것은 우리와 서방동맹국들의 강력한 압력과 외교적활약의 성공으로 이룩되였는바 첫째로는 3차세계대전촉발에 대한 위협, 둘째 조선전쟁의 조속한 종결, 평화 내지는 <정전>을 위한 유엔의 굳건한 결심으로 되였다는데 있습니다. 쏘련측은 이미 유엔주재 말리크대사를 통하여 평화조정안을 들고나온 상태이니만치 유관국들의 군사적원조를 중지해야 한다는 그물에서 벗어날수가 없으며 대전후의 파괴된 경제를 간신히 일으켜세우는 형편에서 세계대전에 대한 위협에 맞설수 없으니만큼 전쟁의 조속한 중지만을 바라는 립장에 있다는것이 명백한 사실로 증명되였습니다.

때문에 백악관과 펜타곤에서는 이번에 벌린 우리들의 공세가 시기적절한것이고 합목적적이라는것을 재삼 확인하며 그의 조속한 성과를 촉구하고있습니다.

나의 추리에 의하면 전선동부에서의 인민군의 저항은 한주일이상은 더 끌수 없다고 봅니다. 그것은 탄약을 비롯한 물자결핍에서 오는 필연적귀결이라고 볼수 있습니다. 오늘 그들이 맹렬한 응전을 벌리면서도 박격포와 76㎜산포로만 맞섰다는것이 그에 대한 반증이라고 할것입니다.

설혹 김일성최고사령관이 우리의 작전기도를 처음부터 포착하고 물자보급과 축적에 관심을 돌렸다 해도 전반 보급로가 봉쇄된 상태에서 종래의 등짐운반만을 위주로 했겠으니만치 그 절대량은 우리 사단들의 일일정량보다 못할것입니다.

이 모든것은 귀관의 결심이 옳다는것을 여러 각도에서 확인되는것으로 됩니다.

귀관도 알겠지만 오늘 받은 믿음직한 정보에 의하면 전선동부를 지원하기 위한 인민군 6군단은 홍수로 인한 교량파괴와 우리의 항공폭격으로 아직까지 명령된 지역에 도착하지 못하였다고 합니다. 이로부터 전선동부작전집단은 6군단이 오기전에 1211고지와 그 일대를 점거하여야 할것입니다.

다음으로 귀관의 생각과 반대되는 한가지 의견을 피력하자고 합니다.

백악관과 국회에 공개메쎄지를 보내려 했다는 리대통령의 저의를 존중시하고 실현시키도록 하는것이 좋다는것입니다. 그것은 리대통령의 편지가 우리들에 대한 불만을 표시하는것으로 된다 해도 그 화살은 반전파들과 이른바 비둘기파들에 대한 힐난으로 될것이며 동맹국군으로서 한국에 대한 책임과 그에 따른 임무를 리행해야 한다는 자극제로 될것이기때문입니다. 동시에 그것은 우리 군대의 전면공세에 대한 대내외적비난을 완화시킬수 있게 한다는데 있습니다. 이에 대해서는 서울주재 우리 대사를 통해 나의 인사를 전하고 그 실현에 힘쓰도록 하겠습니다.

끝으로 적어도 래일안으로 적의 고지 두세개를 무조건 점령해야 하겠다는것입니다.

여기에는 중대한 정치군사적의의가 있는바 합동참모본부와 본관은 그 점령여하에 따라 정전담판을 중지시킴과 함께 전반동맹국들의 적극적인 지지밑에 공세를 보다 활성화시키자는것입니다.…》

다음날 아침 남조선군 8보사 사단장감시소에 나타난 밴플리트는 여러 미군지휘관들과 지형판독을 다시하면서 전투과정을 지켜본 끝에 일거의 결심안을 채택하였다.

8월 22일, 8만여명의 《미한련합군》이 1211고지와 전방고지들에 대한 《불사점령》의 공격이 개시되였다. 초토화폭격과 포격을 앞세운 이 공격에는 금강, 회양일대를 점거할 때 인입시키려던 땅크예비대까지 출동되였다.

처음에는 전선전반에 걸쳐, 다음에는 983. 1고지와 965고지에 화력을 집중시켰다. 평방당 2∼3발의 폭탄과 포탄을 들붓고 주검에 주검을 겹쌓으면서 대대와 련대들을 계속 들이밀었다.

드디여 이날 오후 983. 1고지와 965고지에 대한 공격이 《성공》되였다.

도망치는 《적》도 보지 못하고 이렇다하게 형태를 갖춘 전호도 보이지 않는 고지들이였다. 산등은 파헤쳐진 밭 같았고 그속에서 전호들은 자기 형체를 잃어버렸던것이다.


서비스이용약관 모바일 버전으로 보기 상단으로


Copyright © 2010 - 2023 www.hanseattle1.com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