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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소설 푸른산악 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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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강산
댓글 1건 조회 8,450회 작성일 20-05-27 1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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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

 

새벽녘에 한줄금의 보슬비가 내렸다. 흐린 날씨도 아니고 일기예보에도 없었던 비였다. 1211고지일대에서 드문히 보게 되는 이런 비는 찬공기와 더운 공기가 맞부딪쳐 생겨나는 현상이라고들 했다. 땅과 하늘을 태우던 화염이 차디찬 공기와 부딪치면 비방울로 변한다는것이였다.

로병관에게는 이 비가 18살난 병사의 최후를 애도하는 눈물처럼 느껴졌다. 18살! 인생으로는 첫 걸음이다. 고향의 어머니와 동무들에게 보내는 그의 편지에도 애어린 소년의 꿈만이 보였다. 그에게는 과거보다 래일이 더 긴것이다. 그러나 그는 꽃나이에 갔다. 수복이네 부모들은 오래 살라는 뜻에서 목숨 수자와 복 복자를 따붙였을것이다. 수복이네 소대원들도 그런 뜻에서 풀이를 했고 그가 애솔나무를 떠다 키울 때부터는 나무 수자 복 복자로, 나무복이라고도 부르고.

 

나는 해방된 조선의 청년이다

생명도 귀중하다

찬란한 래일의 희망도 귀중하다

그러나 나의 생명, 나의 희망, 나의 행복-

그것은 조국의 운명보다 귀중치 않다

하나밖에 없는 조국을 위하여

둘도 없는 목숨이지만

나의 청춘을 바치는것처럼

그렇게 고귀한 생명

아름다운 희망

위대한 행복이

또 어디 있으랴!

 

(아, 어떤 병사인가. 어떤!)

로병관은 차창밖의 모든것이 흐릿하게 보였다. 차는 고속으로 달렸으나 몸은 그냥 한자리에 있는듯 싶었다.

산발과 산발, 골짜기와 골짜기, 이름모를 고지와 메부리마다에 숨져 누운 영웅전사들을 생각했다.

그들모두가 리수복이였다. 리수복이처럼 조국을 사랑했고 리수복이처럼 자기 생명을 바쳤다. 팔다리가 부러진 상태에서 적의 땅크를 맞받아 수류탄을 안고 들어간 전사, 불붙는 소이탄을 몸으로 눌러 포탄고를 지켜낸 전사, 적의 포지휘기를 유도하여 홰불을 쳐들고 무인지경의 골짜기로 내달린 전사, 복부가 파렬된 상태에서 부서진 다리기둥에 몸을 버틴 공병전사…

로병관은 북받치는 격정속에 자기가 직접 보고 들은 일을 돌이켜보았다.

먼 후방에 간 장천일의 소식을 알아보지 못한것이 가슴을 찔렀다. 황영학은 오늘 미순이에 대해서 말하며 그 역시 영웅이라고 했다.

(그래, 그렇다, 우리 사람들은 모두가 영웅이다.)

인간의 진가는 가장 어려운 순간에 드러난다.

순간의 선택! 매 인간의 삶은 순간마다의 선택이 어떠한가에 따라 행과 불행, 영광과 수치가 결정된다는것을 다시 생각하게 되였다. 방금전 황영학이와 함께 만나본 송우식이며 진갑수의 모습이 생생히 되밟혀왔다.

송우식은 진갑수때문에 살아났다.

우식은 리수복이 화구를 막는 순간에 보튼을 요정내기로 마음먹었다. 그전까지 중기관총사수들에게 권총을 들이대고 한놈도 살리지 말라고 호통을 치던 보튼은 웬 사람의 몸이 화구를 덮치는것을 보자 기절초풍하여 교통호로 빠져나갔다. 그 순간 우식은 그자의 골통을 겨누어 방아쇠를 당겼다. 그러나 그자는 쓰러지지 않았다. 그때야 우식은 자기가 격발기를 당기지 않은채 쏘았음을 알았다. 격발기를 재차 당길 때는 늦었다. 보튼이 기미를 알아차리고 곧 권총을 겨누고있었다. 그 순간 송우식은 《영학형님한테서 배운 누워차기동작》을 했다고 한다. 우식의 발타격에 권총을 떨어뜨린 보튼은 짐승같은 울부짖음을 치며 우식에게 덤벼들었다. 그의 거센 손에 눌려 목줄대가 부러지는가 했는데 보튼의 몸이 허궁 떠굴렀다.

《누구야?》

온 얼굴이 피칠갑이 된 전사가 물었다. 눈에 불이 이는것이 무서웠다.

《쏘라요. 나를 어서 죽이라요.》

송우식은 진실로 그것을 바랐다. 그런데 피투성이 전사는 총을 쏠 대신 그를 잡아 일으켜세웠다.

《동포들의 피값을 해라.》

이렇게 되여 송우식은 진갑수와 함께 도망치는 미군을 향해 내달렸다.

오늘의 그 습격전에서 포로란 한명도 없었다. 그 무차별소탕에 앞장섰던것이 진갑수였다. 그런 그가 송우식을 그냥 둔것이 놀라왔다.

선택! 어느 길로 가는가, 어떻게 가는가, 쏘는가 마는가?

리수복은 오늘 그냥 엎드려있었으면 살수 있다. 진갑수역시 마찬가지였다. 광열한 증오와 복수심에 따르면 송우식을 가차없이 쐈을것이였다.

그러나 그들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것은 순간의 결심에 따른것이라고도 할수 있지만 그 결심과 선택에서는 그 인간이 도달한것만큼한 높이의 수양과 량심, 신념과 의지가 결정적인것으로 된다.

(그렇다면 나는…)

군단지휘부에 도착하니 최현 역시 방금 왔는데 긴급한 작전문제외에는 누구도 만나지 않겠다고 하며 방에 들어가있고 김웅전선사령관이 저녁부터 와있는데 로병관의 방에 있다고 했다.

로병관은 김웅이 찾는다는 바람에 황영학의 련대에서 떠나왔다. 그 지시는 군단장감시소에 있던 최현이 전화로 알려왔다.

그가 방에 들어서니 불은 죽어있으나 김웅은 자지 않고있었다. 하긴 날이 밝아오는 때라 불을 켤 필요는 없었다. 방안은 담배연기로 꽉 찼다.

《군단장동문 아직도 안왔는가?》

로병관의 인사를 받은 김웅은 책상우에 펼쳐놓은 모포를 의자등받이에 걸쳐놓으며 몹시 불쾌한 기색을 보였다.

《군단장동지는 몸이 불편한지 누구도 만날 형편이 못된다고 합니다.》

《또 심장신경통이 생긴게구만. 하긴 어떤 심장인들 견디겠소.》

김웅은 길게 한숨을 쉬고 의자에 앉으라고 하였다.

《무엇때문에 찾으셨습니까.》

로병관은 그가 의자등받이에 걸어놓은 모포를 구석쪽 책상우에 말아놓고 김웅과 마주 앉았다.

《동무넨 하루동안에 이틀분의 포탄을 썼다며?-》

《네, 그쯤 될것입니다.》

《앞으로도 오늘 같은 반공격전투를 하자고 하오?》

《반공격까지는 모르지만 습격활동은 더욱 강화될것입니다.》

《필요한거야 해야지.》

김웅은 담배를 입에 물고는 신경질적으로 성냥을 그어댔다. 세번째 가치로 불을 붙인 그는 몇모금 소리없이 빨다가 눈살을 찌프렸다.

《난 동무네 습격전이 요령있게 돼야 한다고 보오. 너무 판을 크게 벌리면 이모저모로 재미가 없소.》

《그건 무슨 말씀입니까?》

로병관의 날카로운 반문에 김웅은 침착한 태도로 머리를 끄덕이였다. 《내가 판을 크게 한다는건 습격전이 말그대로의 습격전이 아니라 지난 기간과 같은 〈기동전〉이 될가봐 념려하는것이고… 다른 하나는 지금의 형세로 볼 때 우리도 일정한 아량과 자중을 보일 필요가 있어서 하는 말이요.》

《아니, 아량과 자중이란 무슨 소립니까?》

《허허, 동무도 지금 놈들이 어떻게 나오는가 하는건 어느 정도 알겠는데. 지금 놈들은 호미난방격이요. 계속 치자니 힘이 딸리고 그렇다고 해서 손을 들기에는 체면이 허락치 않고… 때문에 놈들이 얼마동안 공세를 강화하면서도 정전담판에 대한 흥정을 또다시 걸어온것이요.》

《알고있습니다.》

《하여간 내 말을 잘 들어보오. 놈들은 지금 계속 으름장도 놓고 거센체 하지만 유관국가들까지 발동하여 〈평화〉와 〈정전〉을 떠들게 하고있소. 우리한테는 더 말할것 없고. 그때문에 최고사령관동지께서도 소분과위원회정도의 운영은 허락해주셨소. 이런 상황에서 우리가 한수 늦춰주는 자세를 보이면 놈들로서도 생각이 달라질것이 아니요? 말하자면 우리측이 평화적인 노력을 보인다는것으로 해서 지난 기간과 같은 떼고집을 쓰지 않을거란말이요.》

《그럼 갱도나 전호에서… 오는 적만 치며 조용이 있어야 한다는것입니까?》

《본질은 그렇소. 덤벼들면 되게 족치되 그들을 자극시킬 대규모적인 습격전같은것은 좀 고려해야 한다는것이요. 생각해보오. 만약 그렇게 하지 않고 여기저기 계속 때리는 전투를 벌리면 놈들은 마지막자제력까지 다 잃고말것이요. 그때면 작년부터 벼르던 원자탄사용까지 마다하지 않을것이고.》

로병관은 온몸의 피가 거꾸로 치솟는듯 했다.

《사령관동무는… 무엇때문에… 그런 생각을 나에게 말합니까?》

그의 말소리가 이상스러웠던지 김웅은 깔끔한 눈길로 훑어보다 웃었다.

《여보, 건 동무한테만 아니라 최현동무한테도 말하자고 한것이였소. 전선사령관이란 내가 그리고 동무네도 뭔가 똑똑한 판단을 하고 처신하는것이… 체면에도 맞지 않소?》

《체면?!… 그러니 사령관동무는… 이 김웅이가 똑똑하다 그걸 보여주자는거겠지요?》

《뭐야?》

김웅이가 벌떡 일어섰다.

《그렇습니다.》

로병관도 자리를 차고 일어섰다. 불꽃과 불꽃이 마주쳤다.

《허허, 이러지 말기요.》

김웅이가 먼저 수그러들었다. 로병관은 왜서인지 눈물이 울컥 솟아났다.

《사령관동무, 지금 우리 전사들이 고지를 지키기 위해, 한치한치의 땅을 지키고 되찾기 위해 어떻게 싸우는지 압니까?》

《걸 왜 모르겠소. 난 그때문에 더욱 그런것이요. 습격조의 활동도 그렇지 거야 사지판을 찾는 일인데 전사들을 아껴야 하지 않소.》

로병관은 심장이 멎는듯 했다.

(수복동무! 지금 이 사람은 동무들을 모독하고있다.)

그는 저도 모르게 권총을 뽑아들었다.

《떠나가시오. 그렇지 않으면 쏘겠습니다.》

《어… 이 사람이 돌지 않았소?…》

《돌지 않았습니다. 당신때문에… 길을 잘못 들번 했다는것까지 똑똑히 명심하고있습니다. 당신은 자기밖에 모르는 야심가이고 영웅주의자라는것도 그리고 지금은 그때문에 투항주의자가 되고있다는것도 잘 알고있습니다.》

《야, 총을 내리지 못해?》

《더 들으시오. 난 오늘 송우인의 동생을 만났습니다. 그로부터 우인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며 당신과 송우인이 신통히도 같은 인간이라는것을 생각했습니다. 자기! 오직 자기만을 생각하는-》

《닥쳐라.》

로병관은 웃었다.

《끝까지 들어주십시오. 우인이도 한때는 조국과 민족을 위한다고 떠들었고 우리 장군님을 숭상한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개가 되였습니다.

난 사령관동무가 이 필연에서 벗어나기를 바랍니다. 자기만을, 자기를 앞세워 생각하는 인간은 조국도 수령도 모르는 배신의 길에 떨어진다는것을…》

로병관은 문을 차고 뛰여나왔다. 세면장에 가서 얼굴을 씻고 나오니 김웅의 차가 떠나가는것이 보였다.

(내가 지나치지 않았는가?)

일순간 이런 생각이 떠올랐으나 단호히 부정해버렸다.

 

로병관은 잘못 보지 않았다.  김웅은  자기만을 위한 영웅주의자이고 야심가였다. 장군님앞에서는 감히 머리도 못쳐들면서 자기를 돋보이려는데만 주심했던 김웅은 결국 반당, 반혁명의 길에까지 굴러떨어지게 되였던것이다. 량심이 결여된 자들, 해빛을 피하는 자들이 걷게 되는 파멸의 길이였다…

 

잠시후 로병관은 최현의 방에 들어갔다.

지독한 약내가 코를 찔렀다.

《어데 다치지 않았습니까?》

《다치긴.》

최현의 책상우엔 종이장들이 어지럽게 널려있었다.

《내가 좀… 가슴이 말째서 머저리주사를 또 맞았소.》

그가 말하는 머저리주사란 강심제주사약인 안나카다. 최현은 몹시 흥분될 때거나 격할 때면 일종의 쑈크현상을 일으키는데 그때마다 안나카를 맞군 한다. 산에서 싸울 때 얻은 타박상후유증때문에 생긴 무슨 신경의 고장이라고 하지만 과격한 성격때문이라는 말들도 있다.

《왜 서있소, 앉으라니.》

최현은 처음과 마찬가지로 그를 보지 않고 말했다.

《그건 무슨 문건들입니까?》

《엉, 이거.》

최현은 그때에야 고개를 들었다. 눈굽이 불깃한것이 알렸다.

《내가 방금 장군님한테서 되게 꾸중을 들었소. 보고때마다 왜 전투전과만 밝히고 전투원들에 대해서는 밝히지 않느냐고… 그래서 그동안의 문서장들을 들춰보는데… 나 혼자루는 안되겠소. 아침 첫 시간에 보고드리겠노라고 다짐은 했지만.》

《정치부동무들이 종합한것이 있지 않습니까.》

《이게 그거요. 한데… 전화루 이걸 죄다 말씀드리기두 베차구. 그래서 난 문건으로 올려보낼가 하는데 어떻겠소.》

《그게 좋을것 같습니다.》

로병관은 그의 눈치를 살피다가 리수복의 수첩을 그의 책상우에 슬며시 올려놓았다. 그와 수첩을 엇갈아보던 최현의 얼굴이 시르죽었다.

《이게 그… 시가 적힌거요?》

《네.》

최현은 수첩을 쥐다 말고 도로 놓았다.

《이제 가서 식사부터 하고 오오.》

《군단장동지는 안가겠습니까?》

《난… 생각이 없소.》

《저도 같습니다.》

로병관은 최현이 왜 혼자 있으려는가를 알았다. 최현은 그의 전화를 받은 황영학이 리수복의 시를 읽어줄 때 중간에서 그만두라고 하고는 왕청같은 소리를 하며 울먹거렸었다.

로병관이 그냥 뻗쳐 앉은것을 본 최현은 큰 결심이나 내린듯 《그럼 먹고 오기요.》 하며 일어섰다. 그가 밥식기 절반도 비우지 못하고 일어서는 바람에 로병관 역시 몇술 뜨다말고 따라나왔다. 방에 다시 들어왔을 때도 최현은 리수복의 수첩은 볼념을 않고 그에 대해 묻지도 않았다. 오늘의 전투를 놓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는데 전화종소리가 울렸다. 시계를 얼핏 보고난 최현은 여러대의 전화기를 보다가 빨간 신호등이 켜진 전화를 보고는 흠칫하며 로병관을 보았다.

김일성동지께서는 식사부터 물으시는것 같았다.

《장군님께서는 식사를 하셨습니까?》

《했습니다. 그래 보고준비는 다 되였습니까?》

《저… 하기는 했지만두 지내 많아서 련락군관한테 보내려고 합니다.》

《어제 무명고지 점령전투에서 성과가 많았다는데 그에 대해… 들읍시다.》

《…》

《최현동무, 왜 말이 없습니까?》

《장군님… 제… 머저리주사를 맞아놔서… 다른 사람에게… 대신하게 하겠습니다.》

《누구요?》

《로병관동무가 그 전투를 직접 보고왔습니다.》

《바꾸시오.》

《장군님, 죄송합니다.》

최현은 미안스러운 눈길로 로병관에게 송수화기를 넘겨주었다.

로병관은 마른 침을 삼키며 송수화기를 받아들었다.

《장군님, 안녕하십니까. 로병관 전화받습니다.》

《그래 그새 잘 있었소?》

《네.》

《장령이 그냥 전투원이 된다니 추궁부터 해야 되겠지만 우선 듣고 보자구.》

그이의 밝으신 말씀에 로병관은 더욱 가슴이 죄여들었다.

《장군님, 전투는 〈김일성장군의 노래〉로부터 시작되였습니다.》

《노래로부터?》

《네, 전사들의 요청으로 화선방송국에서 노래방송을 하였습니다.》

《그건 그렇고… 참 그곳에서도 이제 군무자예술축전을 하는걸 알고있겠지?》

《알고있습니다.》

《동무네… 2군단 말이요. 2군단이 1등을 해야 되오.》

《저… 아직 그에 대한 준비는…》

《아오. 알아, 언제 노래련습이랑 할 시간이 있었겠소. 하지만 이젠 갱도도 거의 돼간다니 틈시간마다 오락회도 하고 노래련습도 하게 하오. 이건 그 축전자체보다 전사들의 사기를 높이는데서 더욱 중요하오. 2군단이 와서 할 때엔 내가 편심을 들어주겠소.》

《고맙습니다.》

《그래, 계속하오.》

로병관은 최현을 돌아보았다. 최현은 어쩔수 없지 않느냐 하는 표정이였다.

로병관은 마음을 굳게 먹고 전투의 첫 시작으로부터 리수복이 화구를 막기까지의 과정을 죄다 말씀드렸다.

그이께서는 로병관의 보고가 끝나자 오래도록 침묵을 지키고 계셨다.

《그 리수복이라는 동무의 고향이 어데요?》

《순천입니다.》

《순천?!… 나이는 몇살인데?》

《만 열여덟살입니다.》

《열여덟살?… 그 동무가 남겼다는 시를 알고있소?》

《네, 그 동무의 사품중에서 시첩만은 여기 가지고왔습니다.》

《들려주오.》

그이의 목소리는 콱 흐려있었다.

로병관은 최현이 밀어주는 수첩을 받아 펼치긴 했으나 선뜻 입이 열려지지 않았다. 눈물이 솟구쳐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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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산님의 댓글

강산 작성일

(위에서 계속)

눈물이 솟구쳐나왔던것이다.

연필로 또박또박 박아 쓴 글줄이 춤추듯 하는것을 보며 마디마디에 힘주어 읽었다.

한동안 징-하는 전류소리만이 울렸다.

《다시 불러주오.》

그이의 말씀에 흠칫했다. 될수록 감정을 내색하지 않으려 애쓰며 반복해외웠다.

《나는 해방된 조선의 청년이다.》

《나는… 해… 방된… 조선의… 청년이다. 계속하오.》

《생명도 귀중하다.》

《생명도… 귀중하다.》

로병관은 그이께서 시를 받아적고계심을 알았다. 가슴을 꽉 조이는듯 한 아픔에 운을 떼기가 힘들었다.

《찬란한 래일의 희망도 귀중하다… 그러나 나의 생명, 나의 희망, 나의 행복.》

《…》

《계속하랍니까.》

《읽어… 주시오.》

그이께서는 이때부터 더는 말씀이 없으셨다.

로병관은 쭉 따라외웠다.

 

…하나밖에 없는 조국을 위하여

둘도 없는 목숨이지만

나의 청춘을 바치는것처럼

그렇게 고귀한 생명

아름다운 희망

위대한 행복이

또 어디 있으랴!

 

최현은 창문을 바라보았고 로병관은 그이의 말씀을 기다렸다.

《열여덟살?!》

뜻밖에 울리는 나직한 말씀에 로병관은 입술을 깨물었다.

《네, 열… 여덟살입니다.》

《그를 어데 묻기로 했소?》

《그 고지에…》

《잘… 묻어주오. 후날 모든 사람들이… 다시 볼수 있게…》

그이의 음성은 젖어있었다.

또다시 숨가쁜 침묵이 흐르는속에 그이께서 다시 물으시였다.

《그가… 무슨 애솔나무를 키운다고 했는데… 그건 무슨 소리요?》

《저… 그 동무는 불에 다 탄 속에서도 그 애솔만이 살아있기에 떠다 키운것입니다.… 전쟁이 끝난 다음 불탄 산에 다시 푸른 수림이 생기게 해야 한다고-》

《푸른 수림?!》

《네.》

《그 나무를 동무네가 꼭 책임지고 살리오. 아니 전사들이 살릴테지.》

《그렇습니다.》

《그래 옳소. 푸른 수림, 그 말이 옳소. 동무네 그 산도 조국도… 바로 그런 전사들이 있기에 영원히 푸를것이지.》

《장군님! 리수복동무는 조기천의 시 〈백두산〉을 애송했다고 합니다.》

《〈백두산〉을…》

《그렇습니다. 그 동문… 그 시를 읊을 때마다 백두산은 장군님이시고 이 나라 청춘들은 장군님의 아들들이라고.》

《지금 수복이네 전사들은 어찌하고있습니까.》

그이께서 말허리를 끊으시였다. 로병관은 큰 숨을 들이쉬였다.

《최고사령관동지! 전사들은 한결같이 복수전을 웨치고있습니다. 아예 적진을 완전히 짓뭉개버리며 나가자는것입니다.》

《그래 동무의 생각엔 어떻소?》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한번 본때있게 쳐야지… 이거 견뎌내지를 못하겠습니다.》

《옳소. 칩시다. 이번 전투는 리수복의 복수전이라고 합시다. 군단장동무와 함께 기재에 오시오.》

《알겠습니다. 최고사령관동지!》

그가 송수화기를 놓자 최현이 그의 어깨를 콱 쳤다.

《고맙소.》

무선실에는 애어린 무전수와 함께 황영숙이 있었다.

기세넘쳐 들어서던 최현은 로병관을 본 황영숙이 얼굴을 붉히는것을 보자 로병관에게 하듯이 그의 어깨를 탁 쳤다.

《앉아라. 오빠소식은 후에 듣고. 처남, 매부될 사람들이 꼭 붙어있다가 왔다.》

김일성동지와 무선교신은 1분도 채 안걸렸다. 교신이라기보다 명령접수였다.

변신문으로 된 명령서였다.

 

명  령

 

오늘 밤 정각 21시부터 2군단은 방어전연의 적진에 대한 전면적인 기습, 타격전을 진행할것이다. 기습 및 타격지점들에 대한 선정과 준비는 오늘 16시까지 완료하고 나에게 보고할것이다.

2군단의 기습, 타격전의 성과적보장을 위해 3군단도 동시 보조타격을 진행할것이다.

 

                                            최고사령관 김일성

 

최현은 《고맙습니다.》라는 한개 글구로 답신을 올렸다. 최현의 억지다짐에 로병관이 영학의 문안인사 몇마디를 영숙에게 전하고 돌아나오니 최현의 방에서는 큰 싸움이나 붙은듯 투닥거리는 소리와 거치른 숨소리가 울려나왔다.

황급히 문을 열어제낀 로병관은 너무나 뜻밖의 광경에 아연했다.

최현은 공병도끼와 톱을 든 두 군인과 함께 작전탁을 짓부시고있었다.

《아서라. 널판이 못쓰게 되면 안된다.》

탁의 다리와 모판사이에 엠완총 총창을 박고 지레대식으로 뜨던 최현은 공병도끼를 든 군인이 널판밑을 조기는것을 보자 범치듯 호령했다.

《아니 이건 어찌된 일입니까.》

《어찌긴 어째. 이건 오동나무널판이란 말이야. 악기를 만드는데 이게 으뜸이거든.》

로병관은 그 좋던 작전탁이 없어지는것에 아쉬움을 금할수 없었다.

《이건 군무자축전준비때문입니까?》

《그래 그렇지. 장군님말씀대로 1등을 해야지. 안그렇소?》

《허, 군단장동진 싸움이 완전히 끝난걸로 생각하는것이 아닙니까?》

《이보라구, 선생님. 선생님은 아까두 백두산소릴 했는데 이것두 백두산전통을 잇는것이야. 우린 장군님 받드는 노랠 부르며 왜놈들을 쳤구 오늘두 래일두 장군님 노랠 부르며 힘을 돋굴거거든. 임잔 오중흡일 알아?》

《들었습니다.》

《그 동무네 련댄 싸움에서두 으뜸이였지만 노래춤 잘하기루두 일등이였어.》

최현은 뜯어낸 널판의 먼지를 손수건으로 닦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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