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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소설 푸른산악 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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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강산
댓글 0건 조회 5,796회 작성일 20-05-26 1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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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

 

점심시간치고도 드물게 보는 정적이 찾아들었다.

수천수만발의 폭탄과 포탄에 지동치던 산발도 순간의 안정을 즐기는듯 싶었다. 검회색안개가 산발을 쓰다듬었다. 그 안개는 폭연과 흙먼지와 포탄, 폭발에 찢기고 타고 부서진 나무재개비와 군복쪼각들로 이루어진 가렬한 전투의 산물이였다.

그 검회색안개가 구름발과 맞닿은 곳에서 주둥이가 시뻘건 정찰기 한대만이 감돌뿐 하늘도 조용하였다.

《이젠 시간이 되지 않았소?》

로병관의 물음에 황영학은 또다시 시계를 보았다.

정각 한시반이면 권석찬의 소대가 련대앞의 마지막 여우대가리를 없애게 된다. 《낫》릉선앞의 이 《여우대가리》야말로 련대방어의 암이였다. 로태진의 희생도 정미순의 중상도 다 《여우대가리》때문에 생겨난것이다.

지금까지 놈들은 거기에 숨어있다가 한패는 가칠봉쪽으로 돌고 다른 한패는 1211고지 좌측 릉선을 찔러 불의적인 공격을 가해왔다.

이때문에 여러차례의 야간습격전을 벌렸으나 요새화된 고지라 아직껏 타고 앉지 못했다. 쌍봉락타의 뒤등 혹같은 그 자그마한 무명고지의 영구화점과 진지들은 직사포로도 깔수 없게 되여있었다.

지뢰원과 철조망은 박격포와 곡사포사격으로 어느 정도 없애버렸으나 적들은 또다시 지뢰와 철조망으로 고지를 감쌌다.

《요전번 솜옷을 타러왔을 때 몇동무는 만나봤는데.》

로병관이 재차 하는 말에 황영학은 입술을 깨물었다. 불암산전투때부터 알게 된 그들을 놓고 로병관은 언제나 빚진 죄인이라고 했다. 오늘 사단장감시소에 있던 그가 황영학의 감시소로 온것 역시 그때문이였다. 황영학은 또 한번 시계를 보고 송수화기를 들었다. 권석찬은 인차 나왔다.

《지금 몇시요?》

《한시 십팔분입니다.》

《맞구만, 무슨… 더 제기할것이 없소?》

《저… 대대당위원장동무한테도 제긴 했습니다.》

권석찬의 목소리는 여느때없이 떨렸다.

《뭔지 어서 말하오.》

《좀 어렵긴 하겠지만 화선방송국에 말해서 〈김일성장군의 노래〉를 방송해줬으면 합니다. 맹세모임이 끝난 뒤끝에 여러 동무들이 말하는것이…》

《알만하오. 동무들의 전투개시와 더불어… 그렇게 하도록 하겠소.》

《련대장동지, 고맙습니다.》

권석찬은 큰 일을 치르고난 사람처럼 송수화기를 내려놓았다.

스물일곱쌍의 긴장된 눈길들에 웃음이, 기쁨과 감사와 결사의 각오에 충만된 웃음이 스쳐갔다.

권석찬 역시 싱그레 웃으며 큰 숨을 들이쉬였다. 스물일곱명의 생각과 감정을 더듬으며 맹세모임때의 불같은 토론들을 다시 돌이켜보았다.

《이젠 나갈 준비를 합시다.》

아직은 10여분간의 여유가 있으나 이 말을 했다. 지금 같은 시각에 매초와 분이 얼마나 지루하고 숨가쁜가 하는것을 잘 아는 그였다.

담배를 비벼끄는 사람, 총부혁을 훑어보는 사람, 서로 마주 보며 뜻도 생각도 없이 빙그레 웃음짓는 사람… 리수복이가 보이지 않아 휘돌아보니 은페부구석벽에 붙여놓은 탄피들을 세고있었다. 하루밤만 자고나면 그 탄피들엔 바위벽에 생긴 물방울이 모여 떨어져 반모금의 음료수가 고인다. 점심식사로 대대에서 보낸 콩나물국과 곡사포중대의 《산삼썩은 물》을 실컷 마시고난지라 물때문에는 아닐것이다. 리수복은 자기 번호에 이르자 통신선으로 고정시킨 기관총탄피를 조심스럽게 뽑아들었다. 손끝으로 탄피웃모서리를 툭 쳐보고는 은페부 바깥쪽에 놓인 소나무《화분》에 다가갔다. 두뽐도 채 안되는 소나무의 애리애리한 이파리를 쓸어보고는 탄피의 물을 뿌리쪽에 쏟아부었다.

《내가 아까 콩나물국 남은걸 거기에 줬습니다.》

진갑수의 말에 리수복은 알겠다는듯 고개를 끄덕이고는 화분을 통채로 들어 은페부 구석쪽에 옮겨놓았다. 하루 몇번씩 반복되는 일이다.

그 애솔나무는 리수복이 물을 길러 산중턱에 내려갔다가 떠온것이다. 포탄에 뒤집혀지고 타버린 땅우에 나무들은 하나같이 숯덩이처럼 되고말았는데 이 애솔만이 살아있는듯 싶어 떠왔다는것이였다. 이 나무를 살릴수 있는가 없는가를 두고 말들이 많았다. 대부분 살릴수 없다는 주장이였다. 나무 역시 해빛과 물이 있어야 자라는데 사람도 견디기 어려운 이판에 어찌 살리느냐고, 그때하던 리수복의 말이 생생히 가슴을 울린다.

《왜 못산다고만 생각합니까. 말 못 하는 나무라고 너무 숙보지 말자요. 난 이 나무가 우리를 닮았다고 봐요. 포탄과 휘발유불에도 그떡없이 견뎌내지 않았나요. 나무에 귀가 있어 동무들의 말을 듣는다면 얼마나 섭섭해하겠어요.

그리고 또 한가지 생각해보자요. 전쟁이 끝난 다음 이 불 탄 고지에 저 나무가 우뚝 솟아있으면 사람들이 와보고 뭐라고 하겠어요. 조선은 사람들도 억세고 나무도 억세다고 감탄할것 아니나요. 그땐 우리모두가 자랑스럽게 말하자요. 조국을 사랑하는 심장들이 있어 고지도 지켜냈고 나무도 지켜냈으며 이 불탄 산도 푸르른 산발로 영원히 높이 솟아있을것이라고.》

리수복의 말은 언제나 시로 끝난다. 오늘 맹세모임때의 토론도 시였다.

《동무들… 우리 차라리 한줌 흙으로 변할지언정 기어이 고지를 탈환합시다. 나는 맹세합니다.

내 이제 습격의 길에서 쓰러진다면 전우들이여 내 시체를 넘어 원쑤를 쳐부셔주시오. 그리고 만세를 소리높이 불러주시오. 오늘도 앞으로도 나는 승리의 만세만을 들을것입니다.…》

애솔나무에 물을 주고 기관총탄피까지 제자리에 꽂고난 리수복은 잊은것이 없는가를 생각하듯 하다가 덤덤히 굳어져있는 대대당위원장앞에 갔다. 왜정때 모나즈광산에서 일하다가 규페증에 걸렸다는 대대당위원장은 기침이 잦기로 소문난 사람이였는데 맹세모임때부터 지금까지 기침 한번 안했다.

그의 앞상자안에는 군인증, 당증, 민청맹증이 차곡차곡 쌓여있었다. 이제 전투가 끝나 돌아 온 다음 다시 찾게 될것이다.

《무슨… 못바친것이 있소?》

《저… 이것도 바쳐야 할것 같아서.》

리수복의 손에는 푸른 천뚜껑의 수첩이 들려있었다.

《이건 뭔데?》

대대당위원장은 수첩을 펼치다 말고 굳어졌다.

《건사합시다.》

그의 말 역시 굳어진 소리였다. 권석찬은 무엇때문인가를 알고있었다.

리수복의 복수기록장이면서 시첩이기도 한 그 수첩 첫장에는 신문에서 오려낸 장군님초상이 모셔져있는것이다.

왜서인지 섬찟한 느낌이 들었다. 맹세모임때도 그랬지만 저 수첩까지 바치는것이 불길한 예감을 안겨주었다. 리수복은 언제 한번 그 수첩을 몸에서 떼놓지 않았다. 지난번 병풍바위습격때도 그 수첩만은 몸에 품고갔다.

(에이, 좀상스러운 생각이다.)

그는 시계를 보며 자동총을 벗겨들었다.

《전투준비!》

《민청돌격조 나의 앞으롯!》

리수복의 챙챙한 목소리에 이어 진갑수와 박순병이 그의 앞에 가섰다. 모두가 엄엄한 얼굴로 렬을 맞춰설 때 현인석을 본 진갑수가 혀를 삐죽이 내밀어보였다.

오늘의 습격전이 이 《민청돌격조》와 권석찬이 인솔하게 된 《당원돌격조》에 의해 승패가 결정되는것이다. 각기 세명씩으로 구성된 이 돌격조가 고지점령의 난점으로 되고있는 영구화점을 까기로 되여있다. 리수복이네는 왼쪽, 권석찬이네는 오른쪽화점을 맡았다. 오늘 공개당총회로 진행된 맹세모임때 영구화점은 리수복이 발기한 《민청돌격조》가 전부 맡겠다고 했으나 권석찬이 갈라 맡기로 했던것이다.

《당원돌격조》는 권석찬이를 포함한 세명 다가 당원인것으로 진갑수가 지어붙인 명칭인데 진갑수는 이 두개 조를 제외한 소대원들을 놓고서는 《로인돌격조》라고 했다. 현인석에게 혀를 내밀어보이는것도 바로 이 《로인》들을 앞서게 된다는 자랑일것이다.

《혁띠를 더 조여매라구》

《옛, 알겠습니다. 분대장동지.》

리수복의 요구에 진갑수는 더 없이 정중한 태도를 보인다.

매번 그랬다. 여느 사람들 같으면 나이가 같다는데서 분대장을 허술히 대할수 있지만 소대의 《응석받이》인 진갑수는 그 반대다. 다른 소대의 구대원들이나 하사관들이 나어린 분대장에게 조금이라도 숙보려는 낌새가 보이면 생매처럼 달려붙는다. 그럴 때마다 수복은 되게 다불러 대지만 같은 동갑이여선지 쌍둥이형만큼이나 자상한 관심을 보였다. 이번 《민청돌격조》에 진갑수가 뽑힌것 역시 본인의 떼질도 떼질이지만 그러한 관심사때문이다.

《돌격조》구성을 놓고는 말들이 많았다. 진갑수에 대해서는 《아버님》이라는 말을 들을 정도로 각근한 애정을 품고있던 현인석도 반대했고 지어 권석찬이 나서는데 대해서도 의견들이 많았다. 중대지휘를 책임진 지휘관이라는데서였다. 리수복에 대해서만은 아무런 말들이 없었다. 《민청돌격조》를 발기한데도 있지만 리수복이야말로 어떤데서도 막힘없는 다재다능이였고 습격시에 갖추어야 할 예민한 시청각, 베아링 같은 머리, 다람쥐보다 더 빠른 동작, 결패와 담, 이 모든것이 적임으로 인정되였던것이다.

《위치 앞으롯!》

권석찬은 가벼운 전률을 느끼며 오른손을 쳐들었다.

씽- 하고 바람이 지나갔다. 한명, 두명… 얼굴들은 보지 않았다.

그들도 돌아보지 않았다. 이럴 때면 얼굴근육이 이지러지고 눈빛이 험악해진다는것을 다 알고있기때문이다.

문득 리수복이 멈춰섰다.

《무슨 일이요?》

《배낭을 정리하다가… 발견했습니다.》

그의 손에는 《금강》표 담배 두갑이 들려있었다. 권석찬은 억이 막혔다.

《동문?! 어서 나가오.》

《안됐습니다.》

리수복은 싱긋 웃어보였으나 권석찬은 얼굴근육을 풀수 없었다.

교통호에 나선 그들은 전날 밤에 파놓은 쌍봉락타의 첫번째 혹의 전호까지 배밀이로 기여갔다.

적진과의 거리는 100m, 40m 내리경사지를 극복하고 60m의 급경사면을 톺아오르면 끝나는 싸움이다.

권석찬이 미리 분담했던 돌격방향을 다시 알려주고 배밀이로 경사지를 내려갈 때 어디론가 사라졌던듯싶은 뻘건 주둥이의 정찰기가 여섯대의 구라망을 끌고 나타났다.

(에익, 빌어먹을.)

허벅허벅한 흙속에 몸을 더욱 깊이 묻으며 (그렇게 할순 없지만) 기여나가는데 《쿵.》 하는 소리와 함께 주변이 새까맣게 흐려들며 숨이 꺽 막혀들었다.

(연막탄이구나.)

뻘건 주둥이가 끝내 일을 친것이다. 권석찬은 그 정찰기가 자기들을 발견했고 연막탄을 떨굼으로써 폭격목표를 제시했음을 알았다.

《골바닥으로!》

처음으로 소리쳤다. 적진과 가까운 곳이라 폭탄을 떨구지 못하겠지만 이런 경우 흔히 휘발유통을 뿌린다는것을 잘 알고있는 그였다. 아닐세라 펑 하는 폭음에 이어 캄캄하던 주변이 눈부시게 환해졌다.

60m폭의 불길이 그들을 휩쌌다. 뒤이어 자지러진 총소리가 울렸다.

눈을 지져내는듯 한 초연과 불길속을 헤쳐나오자 목의 피줄이 펄쩍펄쩍 뛰였다. 그는 불에 그슬린 속눈섭을 털며 앞을 내다보았다. 가시철조망과 사복철조망이 숲을 이룬 속에서 수백개의 불꽃이 번뜩거렸다. 두개의 영구화점에서 뿜어나오는 비자루사격은 한치만 다가들면 죄다 죽음이라는것을 알리고있다.

사납게 휘몰아치는 불길과 먹장같은 검은 연막속을 헤쳐나온 전사가 과연 몇이나 될가. 가슴을 조이는데 장중하면서도 격조높은 노래소리가 울렸다. 화선방송국에서 내보내는 《김일성장군의 노래》였다.

《와.》 하는 폭풍의 울부짖음과 같은 함성과 함께 불에 그슬린 전사들이 뛰다싶이 달려왔다.

《엎드렷! 배밀이로!》

《먼저 까놓고 봅시다.》

리수복이 번개처럼 뛰쳐와 그의 옆에 엎드렸다.

《아까는 안됐소.》

무엇때문인지 모르게 그의 손을 꼭 잡았다. 기였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 돌격구령을 웨치고 싶었으나 그것은 전멸을 의미한다. 그런데 벌써 몇사람이 고지쪽으로 내달렸다.

《엎드렷. 배밀이로!》

권석찬은 위압적으로 소리쳤으나 마음으로는 그들을 품어주고싶었다.

고지밑에 이르자 수류탄들이 굴러내렸다.

《×이나 먹어라.》

《엿이나 먹어라.》

되받아던지는 전사들의 입에서 거친 욕설이 터져나왔다. 그들이 발견된것을 안 련대의 곡사포와 박격포들이 좌우측 릉선골짜기를 향해 포사격을 들이댔다. 온 천지는 삽시에 폭음과 화염속에 휘말려들었다.

《수복이, 부탁한다.》

《소대장동지, 념려마십시오.》

이 말을 마지막으로 수복이와 헤여졌다.

권석찬은 몇개의 수류탄이 옆에서 터지는것도 그리고 자기를 발견한듯이 련발로 갈겨대는 미식중기의 맹렬한 조준사격에도 아랑곳 않고 부채살같이 탄막을 펴는 그 불구멍을 향해 기고 또 기였다. 견장 하나가 날아나고 모자가 휘뿌려 지는것도 왼쪽어깨를 파편이 스쳐지나가는것도 몰랐다. 진갑수의 새된 부르짖음에 고개를 돌렸다.

《분대장동지!》

진갑수는 날아드는 뽈을 잡으려는 문지기처럼 몸을 날리다가 딩굴었다. 리수복의 발길에 채워 굴러난것이다.

꽝! 하는 폭음과 함께 두사람은 연기속에 잠겨 보이지 않았다.

굴러내리는 수류탄. 그것을 본 진갑수, 진갑수의 웨침에 자기를 향해 내려오는 수류탄을 봤을 리수복…

(잘못되였구나.)

신음이 터져나왔다.

권석찬은 허물어지는 마음을 다잡으며 기였다.

화점의 아구리는 좁았다. 콩크리트로 매닥질한 강철레루가 언듯 보였다. 45mm 포탄같은것에 꿈쩍 않을것이였다.

(저래서였구나.)

권석찬은 반땅크수류탄을 쳐들었다. 팔목이 따끔했다. 심줄은 상하지 않은것 같았다. 힘껏 던졌다. 육감으로 명중임을 알았다. 비명도 들리는듯 싶었다. 리수복이네쪽을 다시 보았다. 30m 조금 더 되는 구간이 무척 멀어보였다.

리수복이 맡은 화점은 《동료》의 죽음에서 발광이 난듯 더욱 모질게 《비자루사격》을 해댔다.

권석찬은 자기 눈을 의심했다. 죽은줄로만 알았던 리수복이가 머리를 들었다.

권석찬과 눈길이 부딪치자 말없이 고개를 끄덕여보였다. 그리고는 힘들게 포복전진을 했다. 머리는 한쪽으로 기울어져있고 왼쪽다리는 너덜너덜 끌려갔다.

화점과의 거리는 10여m…

권석찬은 숨을 죽였다.

리수복은 왼팔로 수류탄을 던졌다. 바른쪽팔에도 관통상을 입었던것이다. 몸에 차고있던 반땅크수류탄 두개를 다 던졌으나 화구에서는 여전히 불을 토했다.

《수복아.》

권석찬의 웨침에 수복은 고개를 돌렸다. 하얀 이가 알릴듯 말듯 드러났다.

그리고는 기였다.

화점과 5∼6m거리에서 바른팔을 짚으며 일어나려다가 오른쪽으로 쓰러졌다. 바른쪽팔의 부상때문일것이다. 몸전체를 왼팔쪽으로 기울이며 일어섰다.

권석찬이 피터지는 부르짖음을 내지르며 그리로 달려갈 때 수복이의 몸은 화구에 밀착되여있었다. 화구 웃모서리의 잔디풀을 움켜쥔 손이 바르르 떨렸다.

산병선이 일떠섰다.

《족쳐라.》

가시철조망과 부딪친 산병선앞에서 현인석의 갈린 목소리가 총성을 짓눌렀다. 망설이는 전사들은 없었다.

한사람, 두사람… 돌격조모두가 그의 잔등을 타고 내달렸다. 그사이 현인석의 의식은 점점 흐려지고 가슴과 배에서 흘러내리는 뜨거운 피는 땅을 붉게 물들인다.

전우의 등을 넘고 돌진하던 전사들앞에 지뢰원이 막아섰다. 포사격으로 여기저기 헤쳐졌으나 인발지뢰선들은 그물코처럼 널려있다.

《나의 뒤로!》

누군가 웨치며 그 지뢰원으로 뛰여든다. 논김을 매는 자세로 허리를 구부리고 널려진 인발선들을 와락와락 긁어모으며 내닫는다. 그러나 그의 몸은 뒤미처 일어난 지뢰폭발의 포연속에 더는 보이지 않는다.

폭발, 섬광, 악악하는 함성… 1참호, 2참호… 수류탄이 날아가고 총창이 번뜩이며 피가 뿌려졌다. 적을 추격하는 속에서 《미국놈들이다!》라는 웨침이 울렸다. 수류탄폭발로 온 얼굴이 피자박이 된 진갑수가 미식경기를 휘둘렀다.

《한놈도 살리지 말라…》

 

이날밤은 적들이 아니라 아군이 쏘아대는 포사격으로 하늘이 붉어졌다.

가칠봉으로부터 양구, 린제앞 적의 포병대까지 《맹타》하는 사격이였다.

이 포사격이 얼마나 맹렬했던지 적의 진지들에서는 일점의 대응사격도 못했다. 불빛만 드러났다가는 포탄에 얻어맞게 되는것이였다.

1211고지와 그 일대의 아군방어진에 쐐기처럼 들어온 《여우대가리》들은 이날 밤과 다음날 오전까지 전부 박살이 났다.

가스등의 불빛은 얼굴들을 창백하게 만든다.

로병관은 희생된 전사들의 사품을 하나하나 보았다.

리수복의 배낭과 주머니에서 나온것은 고향의 어머니와 동무들에게 쓰다만 편지, 조기천의 《백두산》시집, 목달개 두조와 꼼꼼히 기운 면내의, 손수건에 싼 훈장과 메달, 세개의 꽁다리연필, 라이타와 수첩 그리고 《금강》표담배 두갑이 전부였다.

그는 담배를 오래도록 보다가 권석찬에게 도로 넘겨주었다.

《그 동무가 피우라고 했으니… 부탁을 들어주오.》

그의 뒤전에서 흑- 하는 흐느낌이 터져나왔다. 송우식을 끌고왔던 진갑수였다. 얼굴에 붕대투성이인 진갑수는 련대군의소로 후송하게 되였으나 이 사품들때문에 지체된것 같았다.

그는 리수복이 떠다 키웠다는 애솔나무옆에 가서 있다가 교통호를 나섰다.

이날에 있은 권석찬중대의 습격전투는 1211고지방위전에서 볼 때 미세한 불꽃에 불과한것이였다. 이로부터 최고사령부와 총참모부에 올려보낸 일일전투보고에도 《1211고지 좌측릉선의 동북쪽 무명고지탈환》이라는 한줄의 문장으로 기록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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