녀성중대의 첫 중대장 혁명투사 박록금동지의 한생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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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스러운 주체혁명사와 더불어 영생하는 충신들 불굴의 혁명신념으로 삶을 빛내인 녀성중대의 첫 중대장 혁명투사 박록금동지의 한생에서
주체25(1936)년 4월 만강부근의 수림속에서는 위대한 수령님을 모시고 조선인민혁명군 녀성중대의 탄생을 선포하는 의식이 엄숙히 거행되였다.우리 나라 군건설력사상 처음으로 되는 이 사변은 남존녀비사상과 봉건인습이 뿌리깊이 지배했던 당시의 형편에서 참으로 경이적인 일이였다.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께서는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에서 그때를 감회깊이 추억하시면서 다음과 같이 쓰시였다. 《녀성중대의 첫 중대장 박록금은 중대를 잘 통솔하였다.많은 전우들은 박록금의 특징을 단마디로 녀장부라고 규정하였다.》 조선인민혁명군의 첫 녀성중대장이였던 박록금동지, 그는 위대한 수령님을 한생의 은인으로 받들어모시고 수령님의 참된 전사답게 생명의 마지막순간까지 혁명신념을 지켜 용감하게 싸운 불굴의 혁명투사였다. 박록금동지는 왕청에서 이불 한채도 없이 누데기차림으로 혼례를 치른 후 남편과 함께 한날한시에 유격대에 입대하였다.그후 그가 해산을 하였지만 가난한 살림에 애기포단 하나 만들 천조차 없다는 사실을 아신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곧 소부대를 파견하여 천과 솜을 마련하도록 하시고 그것으로 두툼한 이불과 애기포단, 애기옷을 만들어 보내주도록 하시였다.그 은정에 목이 멘 박록금동지는 애기포단과 애기옷은 갓난아이에게 덮어주고 입혀주면서도 이불만은 덮지 않고 가보로 소중히 보관하였다. 후날 박록금동지는 사연깊은 그 이불보따리를 이고 위대한 수령님께서 계시는 곳으로 찾아왔다.그에게 《이불보따리》라는 별명이 붙은것이 바로 그때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가정도 행복도 혁명에 다 바칠 굳은 각오를 안고 찾아온 그의 장거를 치하하시며 새로 조직되는 녀성중대의 중대장감이 제발로 왔다고 기쁨을 금치 못하시였다. 《이불보따리》로부터 녀성중대의 첫 중대장으로. 너무도 꿈만 같은 신임에 몸둘바를 몰라하는 박록금동지의 마음속에는 자기가 걸어온 길이 되새겨졌다. 한뉘 천덕꾸러기로 살아야 했던 인생에 봄을 주시고 혁명의 꽃으로 피워주시는 위대한 은인, 태양의 그 품이 없었더라면 어떻게 이런 영광에 대해 생각할수 있으랴. 위대한 수령님을 따르는 길에 자신의 모든 영광도, 혁명의 승리도 있다는 철리를 심장에 쪼아박은 박록금동지는 사령부의 명령을 결사관철하는 길에서 무비의 용감성과 헌신성을 발휘하였다.그는 육중한 기관총을 메고 30~40리길을 쉬임없이 행군하면서도 힘든 내색을 몰랐으며 언제나 돌격전의 맨 앞장에서 내달린 항일유격대의 녀장부였다. 당시 일제가 작성한 비밀자료에는 이런 내용들이 있었다. 《김일성부대의 부녀대원 박록금이하 40여명이 소화11년(1936년) 음력 5월 초순경 무송현 시난차의 위만군수비대를 공격》, 《대영을 습격하여 장총 10여정과 군복 등을 로획》… 박록금동지는 원쑤들이 그 이름만 들어도 벌벌 떠는 용감무쌍한 유격대지휘관이였지만 인민들속에서는 인정많고 마음씨고운 유능한 정치공작원으로서 존경과 사랑을 받았다. 주체26(1937)년초 박록금동지는 위대한 수령님으로부터 조국광복회조직을 확대할데 대한 과업을 받고 장백현 20도구 신흥촌일대에 파견되게 되였다. 박록금동지는 낮에는 농사일을 하고 밤이면 부녀회조직을 꾸리는 사업에 정력을 기울였다. 어느날 박록금동지는 밤늦도록 동이를 이는 법과 걸음걷는 련습을 하느라고 무척 애를 쓰고있었다.그 모습을 보고 같이 사는 녀인이 밤도 깊었는데 그만 쉬라고 안타까운 심정을 터놓았다. 그러나 박록금동지는 이것도 혁명과업이다, 사령관동지께서 주신 혁명과업을 수행하기 전에는 물러설 권리가 없다고 하면서 좀처럼 잠자리에 누우려 하지 않았다. 그의 이런 꾸준한 노력과 능숙한 군중정치사업에 의하여 신흥촌일대의 부녀회조직은 급속히 확대되였다. 보천보전투가 있은 후 국내진공작전의 승리를 경축하는 지양개군민련환대회에 전달된 축기도 박록금동지가 여러날동안 부녀회원들과 함께 온갖 성의를 다하여 만든것이였다. 신흥촌일대를 혁명화하기 위해 헌신분투하던 박록금동지는 주체26(1937)년 가을 일제가 조작한 《혜산사건》당시 변절자의 밀고로 적들에게 체포되게 되였다. 박록금동지를 혜산경찰서로 압송한 놈들은 그에게서 혁명조직의 비밀을 알아내려고 야수적인 고문을 들이대였다.그러나 그 무엇으로써도 죽음을 각오한 그의 신념을 꺾을수 없었다. 그는 고문장에서도 《똑똑히 들어두라.나는 김일성장군님의 손길아래서 자라난 항일유격대원이다.》라고 추상같이 웨치며 놈들을 전률케 하였다. 이듬해 5월 박록금동지는 혜산경찰서로부터 함흥형무소로 이송되여갔다.놈들은 저들도 접근하기 꺼려하는 결핵환자가 있는 감방에 그를 밀어넣었다. 박록금동지는 일신의 건강같은것은 생각지도 않고 결핵성복막염으로 중태에 놓인 환자를 친혈육의 심정으로 간호해주었다.그것이 너무 고마워 그 녀성은 병보석되는 날 눈물만 하염없이 흘리였다.그로부터 얼마후에는 그의 가족들이 은혜를 갚기 위해 옷과 떡을 싸들고 찾아와 면회를 요청했지만 악착한 놈들은 박록금동지를 면회실이 아니라 고문실로 끌어냈다. 야만적인 고문으로 쇠약해진 몸에 전염병까지 침습하여 그는 사경에 처하게 되였다. 의식이 몽롱해진 속에서도 박록금동지는 오히려 벽을 두드리면서 나는 절대로 죽지 않는다, 병과 싸워이긴다, 적들과도 싸워이길것이라는 신호를 보내여 동지들을 고무해주었다. 어느날 박록금동지는 옆감방에 노래를 함께 부르자는 통방신호를 보내였다.그리고 있는 힘을 다하여 《유격대행진곡》을 불렀다.이렇게 온 감방으로 울려가던 그의 노래소리는 다음절에로 더 이어지지 못하였다. 박록금동지는 이렇게 최후를 마치였다.그러나 그의 노래는 끝나지 않았다.투사가 부르던 신념의 노래는 오늘도 천만의 심장속에 끝없이 울리며 총진군대오에 혁명열, 투쟁열을 백배해주고있다. 본사기자 박철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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