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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소설 계승자 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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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강산
댓글 1건 조회 6,005회 작성일 20-08-12 19: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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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

 

뜨락또르가 도시교외의 눈녹은 언덕배기를 올라가느라 속도가 떠지자 한창범은 트렁크처럼 손잡이 달린 함통을 길섶에 집어던지고 적재함에서 뛰여내렸다.

중낮이 되기 전에 로동교양소에서 나와 40리는 걸어서 오고 나머지 30리길은 뜨락또르를 얻어타고 오느라니 몸이 꽁꽁 얼었다.

일을 성실히 하고 생활을 잘한탓에 마지막 한달은 치르지 않고 표창으로 로동교양소를 나온터였다.

창범은 로동교양소에서 얻어쓰고나온 허름한 털모자를 벗어 뜨락또르적재함에서 뒤집어쓴 낡은 솜옷의 먼지를 털었다.

2월의 신작로길은 길가녁에는 때묻은 눈이 그대로 쌓여있었지만 차들이 다니는 가운데는 눈이 녹은지 오래서 바퀴뒤에 줄창 먼지를 휘말아올리는것이였다.

언손으로 얼굴을 쓸어보니 볼 홈타구와 목덜미에 이르기까지 온통 껄껄한 길먼지가 손에 잡혔다. 이런 한심한 몰골로 시내에 들어갈수는 없었다.

창범은 길섶의 꽤 깊은 묵은 눈을 박차고 내려가서 개울복판의 얇은 얼음층을 발로 꽝꽝 내리찧어 깨뜨렸다. 벌겋게 언 손을 개울물에 넣으니 오히려 따스한감이 났다. 그는 시린줄 모르고 한바탕 얼굴을 씻었다.

얼굴피부가 홧홧 달아오르고 조여들었지만 상쾌한 기분이 들었다.

해는 이제야 서켠산마루에 기울어지고있었다.

창범은 날이 어둑해져 아는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을 때 슬그머니 시내에 들어갈 작정을 했지만 배가 고파 도무지 기다려낼것 같지 못했다. 로동교양소를 나오는 바람에 흥분에 뜬 그는 아침밥을 죄다 작업조의 동무들에게 덜어주었고 싸준 점심마저 그들을 위해 남겨두었다. 아버지가 차를 가지고 자기를 데리러오면 인차 집에 갈수 있는것이였다.

그러나 로동교양소의 높다란 담장밖에서 그를 마중하는 사람은 없었다.

그때의 버림받은것 같이 고독하고 허전하고 쓸쓸하던 심정은 70리길을 온 지금에도 내려가지 않았다. 로동교양소생활에서… 춥고 잠오지 않는 긴긴 겨울밤에 늘 생각하던 부모와 동무들이건만 청춘의 자유와 권리를 회복한 자기를 관심에 두지조차 않았으며 아주 잊어버렸다고 생각하니 괴롭기 그지없었다.

그러나 자기의 불량행위로 해서 피해를 입었을 그들의 원망스런 심정과 랭대를 예견하고 응당한것으로 받아들여야만 하는것이였다.

창범은 헝겊으로 감싼 함통의 손잡이를 거머쥐고 시내쪽으로 걸었다. 배고픔을 못 참아서가 아니라 소년시절의 어리석은 꿈과 청년시절의 배포유하고 방자스런짓들을 무랍없이 받아준 낯익고 정든 산간도시에 대한 마음끌리는 강렬한 충동이 그를 떠미는것이였다.

부모가 있는 집으로, 로동생활의 기쁨을 주던 공장이 있는 곳으로, 동무들이 있는 시내로 가고싶은 마음이 그의 발걸음을 다그치게 하는것이였다.

2월, 저녁해의 따스한 온기속에 잠겨있는 도시, 높다란 처마에 고드름이 달린 아빠트의 창유리와 타일벽들이 해빛에 반사광을 낸다. 눈이 녹은지 얼마안되는 가로수의 거뭇한 가지들이 멀리서 오는 봄의 기미를 감촉하고 설렁대고있었다. 포석을 깐 길의 울타리나무쪽은 낮에 구멍을 숭숭 내며 녹은 눈이 다시 꾸득꾸득 얼어붙기 시작한다. 포석길에 흩어져 잽싸게 뛰여다니며 먹이를 찾던 참새들이 별안간 아빠트처마에서 고드름이 챙그렁- 하고 떨어지자 깜짝 놀라 후드득 나무가지에 날아올랐다.

그전에는 스쳐지냈던 도시풍경의 자그마한 하찮은 모습까지도 창범에게는 새롭고 정다운 의미를 띠고 안겨왔다.

아직은 엄혹한 겨울이 물러가지 않았지만 오래지 않아 다가올 봄을 기다리는 도시에 자기도 푸른 싹으로 돋아나서 새로운 줄기를 뻗고 자라고싶었다. 마음은 재생의 희망에 부풀어올랐으나 얼굴을 아는 사람을 만날가 보아 자연히 숙어지고 어둑컴컴해졌다.

거리엔 퇴근길에 오른 사람들이 점점 불어났다.

창범은 허름한 털모자를 눈덕까지 눌러쓰고 솜옷깃속에 고개를 꾹 박은채 길가녁으로 피해 혼자 스적스적 걸었다.

《여, 저게 창범이 아니야?》

《어느 창범이말이야?》

《도안전국장의 아들 있잖아.》

방금 창범의 옆을 지나친 사람들중에 분명 누군가 그를 알아본 모양이였다.

《패싸움두목?!》

《그럼, 지난번에 불량배짓을 하다가 로동교양소에 가지 않았어.》

《한 3년 처박아두고 혼쌀내줄게지 1년도 못돼서 내놔줬군.》

《아버지덕에 나왔겠지.》

《밤거리가 또 소란스러워지겠는데.》

《고쳐졌겠지 뭐. 로동교양소생활이 어디 간단해.》

《제 버릇 개 떼주겠나. 애비등을 믿구 또 그럴거야.》

창범은 다리맥이 쭉 빠져 더 걸을수 없었다. 등골을 불로 지지는것처럼 아팠다.

그는 치밀어오르는 분노에 두주먹을 불끈 쥐였으나 뒤를 돌아보지는 않았다. 그를 우려하고 비난하는 목소리는 멀어졌다.

창범은 속으로 눈물을 삼켰다. 방금전까지 희망에 떴던 푸른 감정은 졸지에 사그라져버렸다. 체내 깊숙한 곳에 잠재해있던 고통스런 자아의식, 자기는 사회와 집단으로부터 버림을 받았으며 아무리 버둥거려도 불량청년딱지를 벗을수 없다는 절망적인 인식이 다시금 불붙어오르기 시작했다. 희망의 상실에서 오는 무서운 아픔, 타락의 심연, 온몸이 데는듯 한 고통에 그는 신음소리를 질렀다.

쫓기듯 창황히 내닫던 그는 낯익은 맥주집 창유리를 보자 무작정 그리로 갔다. 맥주를 실컷 마시고 취하여 누군가 때려눕히고 들부시고싶었다.

단숨에 맥주집출입문을 열고 들어선 그는 오래전에 잊어버렸던 기계공장 로동자들의 체취와 담배내와 혼탁된 들크무레한 맥주냄새에 숨이 꺽 막혔다. 솜옷안주머니를 뒤졌으나 한푼도 없었다.

희뿌연 담배연기속에서 두런두런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맥주를 마시는 사람들속에는 그가 아는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쇠망치》패의 친구들과 앉아 마시던 구석쪽식탁에 눈길을 던지던 창범은 불현듯 정신이 들었다.

격자무늬샤쯔를 입고 식탁의 웃쪽에 방자스레 앉아 맥주고뿌를 거머쥐고 지껄이던 지난날의 자기를 본것이였다. 바로 이 맥주집식탁에서 자기의 운명이 불행의 낭떠러지에 굴러내린것이였다. 일을 하지 않고 패거리의 어린 청년들한테서 돈을 긁어내서는 맥주를 량껏 마시고 싸움질하고… 얼마나 무분별하고 어리석고 불량스런 짓인가. 격자무늬샤쯔를 입은 방종한 청년은 자기 아닌 자기였다. 한푼어치의 동정도 애달픈 추억조차 지닐수 없는 경멸시할 청년이였다.

어떻게 하면 지난날의 그 방탕스런 인간을 마음속에서 떼던질수 있을가. 그림자처럼 눈빛도 없고 목소리도 없으며 의식도 없으나 검은 형체만 살아 끈끈이 붙어다니는것이 아닌가. 정말이지 어둑한 과거와 결별할수 없단말인가?

창범은 구석쪽식탁에 여전히 환영처럼 살아앉아있는 격자무늬샤쯔가 자기를 손흔들어 오라고 재촉하는것만 같아 도망치듯 맥주집출입문을 열고 나와버렸다. 거리를 지나가는 사람들중에 누군가 또 그를 알아보고 저 자식이 로동교양소에서 나오는 길로 바로 싸움질한 그 맥주집에 들어갔댔다고 말할가봐 겁이 났다.

허둥지둥 물러나는데 어디선가 씩씩하고도 기백있는 청년들의 노래소리가 들려왔다.

겨울저녁의 활기찬 소음을 누르며 호른과 클라리네트의 반주에 부드러우면서도 힘찬 북소리장단이 가슴을 설레게 하였다. 《청년사회주의건설자행진곡》이였다.

도사로청건물로 들어가는 사이길에서 취주악대를 앞세운 삼사백명가량 되는 청년들의 대오가 흘러나오더니 버젓이 큰 길복판에 들어섰다.

 

피끓어라 청춘아 불타라 심장아

우리들은 청년들 사회주의건설자다

찬란한 조국건설 설계도를 펼치고

피로 지킨 이 땅에 우리 보람 꽃피우자

 

중학시절에 그리고 공장생활에서 뜨문히 부르던 노래이다. 그때는 그저 곡이 장쾌하다는 생각으로 범상히 불렀는데 오늘은 《청년사회주의건설자행진곡》이 유별나게 가슴을 울린다. 가사가 좋고 곡이 좋아서인가?… 그보다도 《청년사회주의건설자행진곡》을 꼭같은 새 솜옷에 혁띠를 띠고 붉은별이 달린 털모자를 쓴 청년들이 씩씩한 발걸음에 맞춰 우렁차게 부르는것으로 해서 감흥이, 충격이 큰것 같았다.

붉은 기발을 높이 쳐든 대렬의 선두가 점점 가까이 온다. 달리던 차들이 그들에게 길을 내주고 포석길에서는 지나가던 사람들이 걸음을 멈추고 거리와 산간도시를 들썩하게 만드는 청년들의 힘찬 노래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지켜보고있었다.

이건 어떤 청년들의 부대인가?

의문이 커지던 창범은 대렬의 앞장에 날리는 붉은기발에 눈길이 닿았다. 사로청휘장아래에는 《당중앙이 무어준 속도전청년돌격대》라는 큼직한 글발이 온 기폭을 가로지르고 펄럭이였다. 그뒤에 선 대장인듯 한 청년과 앞줄에 선 십여명청년들의 가슴에는 군대지휘관의 견장 비슷한 금빛사각휘장이 번쩍이고있었다. 뒤줄대렬의 청년들은 하나같이 가슴에 그냥 붉은색이거나 붉은 바탕에 누런 줄이 간 사각휘장을 달고있었다. 처녀들도 많았다.

갑자기 창범은 돌격대청년들의 대렬속에서 낯익은 얼굴을 발견하였다.

《순봉이! <막내>…》

그는 놀라서 입속으로 부르짖고 반가움과 동경심이 북받쳐 오한을 만난 사람처럼 몸을 떨었다.

창범은 집으로 간다는 생각은 까맣게 잊어버리고 시야에서 순봉이를 놓치지 않으려고 애쓰며 대렬을 따라 정신없이 걸었다.

 

로동당 부름에 젊은 힘은 용솟는다

아름다운 우리 조국 락원으로 꾸리자

 

처녀애처럼 귀염상스럽고 《쇠망치패》의 잔심부름을 곧잘하던 순봉이가 름름한 속도전청년돌격대원이 되여 도시의 큰 길복판을 얼마나 보무당당히 행진해가는가!

 

들끓어라 기쁨아 높뛰라 가슴아

우리들은 돌격대 사회주의건설자다

 

창범은 부러움과 경탄이 도를 넘어 마치 자기가 속도전청년돌격대원이 된것처럼 기쁘고 자랑스러웠다. 《청년사회주의건설자행진곡》의 부드럽고 경쾌한 취주악선률, 목청껏 부르는 노래소리는 그의 가슴을 쿵쿵 울렸다.

눈쌓인 울타리나무옆을 가재걸음으로 따라가던 그는 자기도 모르게 자세를 바로하고 은연중 《청년사회주의건설자행진곡》선률, 청년돌격대원들의 힘찬 발걸음에 보조를 맞춰 걷기 시작했다.

불시에 창범은 마주오던 사람과 부딪쳐 나가넘어질번 하였다.

창범의 어깨에 가슴을 든든히 얻어맞고 비칠하던 그 사람은 대뜸 눈을 부릅뜨고 소리질렀다.

《이 동무가 삥이 나가지 않았어?! 아이들같이 대렬지어 가는데 혼이 빠져가지구. 앞을 보고 다니오!》

《이거 정말 안됐습니다.》

황급히 사죄하던 창범의 눈길이 그 사람의 얼굴에서 굳어졌다.

락타직외투에 오소리털모자를 쓴 몸집이 실한 상대방도 그를 알아보았다.

《창범이 아니야?! 로동교양소에서 벌써 나왔나?》

창범은 길거리에서 오줌벼락을 뒤집어쓴 느낌이였다. 길가던 사람들이 쳐다본다! 창피스러웠으나 반감은 그에 못지 않았다.

강운학, 시사로청지도원, 분주소구류장에 와서 종개 한마리가 개울물 흐려놓듯이 시사로청망신을 시켰다고 욕설을 퍼붓고 주먹질을 하지 않았던가! 로동을 안하고 살만 올라 솜싼 헝겊뭉치같은 강운학의 주먹을 머리우에서 틀어쥐고 부르르 떨며 어찌할바를 모르던 순간이… 그때의 비탈린 적의가 불길처럼 몸을 달군다.

그러나 로동교양소의 괴로운 생활속에서 눈물겹게 키워낸 리성… 참을성과 순종의 감정론리가 그를 억눌렀다. 피하는게 결코 굴종은 아니다.

창범은 끝내 눈인사도 한마디의 대꾸도 하지 않고 땅바닥에 떨어진 함통손잡이를 왈칵 끌어잡고 돌아섰다.

그리고는 멀어지는 《청년사회주의건설자행진곡》선률을 쫓아, 《속도전청년돌격대》대렬을 따라 달려갔다.

수치와 죄의식, 반감, 굴종, 불신이 고통스럽게 몸을 지져도 그것은 어제날의것, 과거의 일에 해당하는것이다.

사람들의 생활이 들끓는 거리와 회색빛하늘공간에 울려퍼지는 《청년사회주의건설자행진곡》소리와 청년돌격대원들의 힘찬 발구름소리는 그를 래일로, 희망을 기대하는 미래로 부르는것이다.

그곳에서는 지난날의 묵은 종처를 들추어 그를 괴롭히지 않을것 같고 그는 다만 하얀 종이장에 자기의 인생을 자기 손으로 새로이 아름답게 그려나갈수 있을것만 같다.

창범은 거리의 한끝에 있는 공원에서 청년돌격대를 따라잡았다.

이전에는 소공원이였는데 그가 없는 사이에 사방 넓게 확장하고 나무들을 많이 심었다. 공원둘레를 낮은 철책으로 둘러쳤고 긴 의자들을 많이 놓았다. 눈쌓인 풍경도 좋지만 나무잎이 무성한 여름에는 공원이 참 멋있겠다.

《속도전청년돌격대》는 공원에서 잠시 휴식을 하고 역전거리방향으로 행진해갈 모양이다.

창범은 공원안에 들어찬 돌격대원들속을 비집고다니며 순봉이를 찾아보았다. 솜옷과 털모자가 하나같아서 한참만에야 그는 쇠울타리구석의 나무곁에 웬 돌격대원처녀와 같이 있는 순봉이를 찾아냈다.

순봉이는 발로 눈을 다져 처녀와 자기가 서있을 자리를 마련하였다.

《<막내>야!-》

창범은 눈을 박차고 어푸러질듯 달려갔다.

《<첫째형님!>》

순봉은 너무도 반가와 송아지울음소리같은 괴상한 비명을 지르며 마구 달려왔다.

두 청년은 힘껏 부딪쳐 끌어안자 모재비로 눈속에 나가넘어져 딩굴었다. 털모자가 어디로 날아났는지도 모르고 온몸과 얼굴에 눈을 들쓴 그들은 서로 마주 쳐다보고는 다시금 기쁨을 삭이지 못해 끌어안고 두어바퀴 딩굴었다.

그리고는 눈우에 누운채로 아무 말도 못하고 눈물을 흘렸다.

창범은 삐여지게 달라진 《막내》가 대견해서 울었고 순봉은 패싸움의 죄를 혼자 걸머지고 고생한 《첫째형님》에 대한 죄의식과 고마움에 눈물이 저절로 나왔다.

《용서해줘요. <첫째형님>, 한번도 찾아가지 못해서…》

《자식, 옹졸하다구야. 내가 너희들 위로를 받을 사람이가. 지난 일은 꺼내지도 말아. 별명조차도.》

《창범형님, 그동안 앓지는 않았어요?》

《건강했다구. 우리야 본래 쇠망치를 어깨에 멘 로동계급이 아니가.》

창범은 순봉이를 껴안고 일어나서 손으로 그의 머리와 얼굴에 묻은 눈을 털어주었다.

순봉은 창범의 솜옷에서 눈을 털었다.

눈우에서 털모자를 주어들고 서있던 돌격대원처녀가 어줍은 미소를 짓고 다가왔다.

처녀의 눈은 털모자의 별처럼 빛났다.

《<첫째형님>, 석화예요. 참 그 있잖아요. 맥주집에서… 우리 식탁에 앉았던… 도당책임비서동지의 딸이예요.》

창범은 묵묵히 처녀의 손에서 털모자를 받아들며 인사치레로 웃음을 지으려고 했지만 이마살만 찡그러지고말았다. 그리고는 석화가 물러가기를 기다리지 못하고 순봉의 솜옷 웃가슴에 붙은 붉은판의 사각휘장을 만져보았다.

《순봉아, 너희네 청년돌격대기발에 어떻게 되여 <당중앙이 무어준 속도전청년돌격대>라고 씌여있니?》

《그건… 친애하는 지도자동지께서 직접 무어주신 속도전청년돌격대이기때문이예요.

지난날 도사로청위원회가 조직했던 돌격대들하고는 판 달라요. 대건설의 큼직한 대상을 맡아 해제끼는 청년정치부대예요. 이 돌격대제복두 털모자두 솜신두 다 지도자동지께서 보내주신거예요. 대원이라는 이 붉은 경표두…》

가슴에 손을 가져가던 순봉은 문득 생각난듯 솜옷단추를 끄르고 안주머니에서 두꺼운 증명서케스를 꺼내여 펼쳤다.

《파견장이예요.》

창범은 자랑과 긍지가 한껏 어린 순봉의 얼굴을 쳐다보고는 조심스레 붉은 뚜껑에 누런 글로 파견장이라고 쓴 증서를 집어들었다. 왼쪽면에는 백두산을 배경으로 사로청휘장을 새긴 붉은기발이 날리고 《위대한 수령님과 친애하는 지도자동지께 끝없이 충직한 근위대, 결사대가 되자!》라고 씌여져있었다.

파견장의 오른쪽에는 누런 국기훈장바탕에 큰 글자로 《친애하는 지도자 김정일동지께서 직접 무어주신 <속도전청년돌격대>에 채순봉동무를 파견함. 조선사회주의로동청년동맹 중앙위원회》라고 뚜렷이 찍혀있었다.

창범은 이렇듯 엄숙하고 신성한 증서를 가진 순봉이가 부러워 파견장을 선뜻 돌려주지 못하고 다시금 들여다보았다.

《돌격대가 언제 떠나니?》

《오늘까지 대렬훈련을 하구 아마 래일이나 모레쯤 떠날거예요.》

《어디루?》

《딱히는 모르겠는데 희천-고인사이 전기철도공사장이 아니면 구장-팔원사이 새 철길공사장에 갈거라고 해요. 어쨌든 수송전선이예요.》

순봉은 파견장을 케스에 정히 끼워 안주머니에 넣고 가슴을 쭉 폈다. 마치 총포탄이 울부짖는 전선에 목숨을 내걸고 조국을 사수하러 가는듯 한 자부심어린 심각한 자세였다. 그 서툰 몸가짐과 표정이 아직 애숭이티를 벗지 못한 얼굴에 썩 어울리지는 못해도 인생의 방향이 없이 곤궁에 처한 창범이한테는 몹시 의젓해보이고 부러움과 동경을 자아내는것이였다.

《순봉아…》

창범은 청년돌격대원들이 오가는 주위를 살피며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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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산님의 댓글

강산 작성일

(위에서 계속)


《나도… <속도전청년돌격대>에 들어갈수 없을가?》

《그건… 힘들거예요.》

《어째서? 늦었단말인가?》

창범은 순봉의 량어깨를 와락 거머쥐였다.

그 서슬에 순봉은 한걸음 뒤로 물러섰다.

《<속도전청년돌격대>원은 도사로청에서 최종선발을 했어요. 공장초급사로청위원회에서… 일을 잘하고 조직생활도 잘하는… 입당도 할수 있는 청년을 추천하거든요. 목에 꽃테를 씌워주며 추천모임을 굉장히 했어요.》

《안된단말이지…》

창범은 잡았던 순봉의 어깨를 놓으며 신음소리처럼 중얼거렸다.

《넌 그새… 사람이 됐구나…》

자기의 비참한 처지에 대한 재인식이 뼈저리게 갈마들었다.

창범은 순봉이한테서 물러나 고개를 떨구고 눈깔린 공원속을 허청허청 걸어나왔다.

《창범형님, 저녁에 집에 꼭 와요.》

뒤에서 각근히 당부하는 순봉의 목소리가 들렸지만 창범은 돌아보지 않았다.

손에 든 함통이 무겁게 매달리였다. 세면도구와 속내의, 양말짝따위밖에 없는 함통이 이렇게 거치장스럽게 여겨지는것은… 로동교양소생활을 했다는 그 어지러운 과거를 상징하는것이기때문인지 모른다. 함통을 길옆의 눈얼음이 얼어붙은 개천도랑에 활 집어던지고싶은것을 꾹 참았다.

공원에서 청년돌격대원들이 휴식을 마치고 대렬을 정비했는지 북소리가 쿵쿵 울리고 취주악소리가 잇달았다.

《청년사회주의건설자행진곡》을 부르는 속도전청년돌격대원들의 드높은 목소리가 거리에 울리고 그의 절망에 얼어붙은 가슴속에 흘러들었다.

창범은 다시 뒤를 돌아보지 않았으나 마음은 더욱 《청년사회주의건설자행진곡》소리에 유혹되였고 《속도전청년돌격대》에 온 정신이 쏠렸다. 노래도 기발도 파견장도… 죄다 끝없이 부럽던 나머지 자기가 마치 그 기발밑에서 노래부르며 행진해나가는듯 한 착각이 들었다. 아니, 기어코 현실로 만들어야 한다는 결심이 굳어져갔다.

《속도전청년돌격대》에 들어가는 길은 불량스런 과거의 흔적이 찍혀있는 이 도시를 떠날수 있고 사람들의 비난과 불안스러운 눈초리를 피하고 아들을 무덤속에 들어가야 허리를 펴는 곱사등이로 단정하는 아버지를 멀리 할수 있는 길이 아니겠는가. 내가 이 도시를 떠나가야 아버지는 간부로서 체면이 깎이지 않고 맘 편히 도안전국장사업을 할수 있을것이다. 그리고 나도 어딘가 멀리 대건설전투장으로 나가서 지난날을 씻을수 있는 위훈을 세워볼수 있잖겠는가. 아버지한테 찾아가 부탁할가? 아니, 우선 도사로청에 찾아가보자.

그렇게 마음 다지고 출로를 열어보니 기분이 뜨고 걸음은 날듯이 빨라졌다.

한창범이 도사로청위원회에 찾아갔을 때는 해질무렵이였다.

마당에는 속도전청년돌격대제복을 입지 않은 청년들이 수십명 몰켜서서 도사로청일군인듯 한 반외투입은 청년의 말을 듣고있었다.

건물의 바깥현관문을 열고 날파람있게 걸어나온 몸매 다부진 청년은 반외투입은 청년에게 손짓했다.

《돌격대부장동무, 명단을 확인해보시오.》

그는 재빨리 달려온 반외투입은 청년에게 종이장을 넘겨주고 몇마디 짤막한 지시를 주었다.

순간 창범은 알수 없는 기쁨에 몸이 굳어졌다. 돌격대부장보다 더 높은 그 청년일군은 분명 중학동창생인 철규였다. 시사로청에서 지도원을 하댔는데 어떻게 이런 승급을?!…

《철규!…》

창범은 현관문으로 들어가는 그를 나직이 불렀다.

《이게 누구야? 창범이 아니야?!》

철규가 달려온 창범의 팔을 붙잡고 다른 손으로 어깨를 쳤다.

《로동교양소에서 언제 나왔니?》

어디 휴양지에라도 갔다왔는가 하는듯 례사롭게 묻는것이 기뻤지만 속은 찔렸다.

《철규동무도 알아?》

《왜 모르겠어. 온 시가 들썩했는데… 하지만 됐어. 이렇게 나왔으니, 내 방에 올라가자.》

《싫어, 철규동문… 도사로청에서 뭘하나?》

《위원장이야.》

《뭐 도사로청위원장?! 그럼 됐구나! 철규, 날 좀 도와줘.》

《뭘 말인가!》

《나를 <속도전청년돌격대>에 받아줘.》

《<속도전청년돌격대>에?!》

철규는 저으기 놀래서 눈을 크게 떴다.

《왜, 안되나?》

창범은 다급히 물었다. 그는 철규의 얼굴에 웃음이 사라지고 신중한 표정이 어리는것을 불안스레 지켜보았다.

《공장에서 그냥 일하면 안되겠나?》

창범은 그의 외면적인 친절한 말에 한동안 대답하지 못했다.

《보내줘. 도사로청위원장동무, 동창생으로 일생에 처음이자 마감으로 한번 부탁하는거요.》

《창범이… 리해해달라구. <속도전청년돌격대>에는 아무나 추천하구 입대시키지 못해.》

《안된단말이지…》

창범은 얼굴이 시커멓게 되여 한숨을 내그었다.

《그러니 철규동무도 겉으로 날 반가워하지… 속으로는 불량배로 여기는구나.》

《아니, 그런게 아니야.》

철규는 난감한 립장을 설명하려고 했지만 창범은 밀막아버리고 돌아서고말았다.

반시간후에 집에 돌아온 창범은 어머니의 다심스럽고 눈물겨운 보살핌을 받으며 더운물에 목욕을 하고 식사를 한 다음 잠에 곯아떨어졌다.

그러나 밤늦게 들어온 한경택은 안해의 만류를 뿌리치고 아들의 어깨를 잡아일으켜 앉혔다.

《내 너를 한달나마 먼저 퇴소시킨 로동교양소 소장을 가만두지 않겠다.》

한경택은 마치 아들이 당자이기나 한것처럼 사납게 을러메였다.

창범은 졸음이 떠박지르는 속에서 아버지의 목소리를 산너머 우뢰소리처럼 듣고있었다. 피곤으로 온몸이 흙덩이처럼 물러앉는감을 느꼈으나 지탱하고있었다. 어쩌면 아버지가 이리도 박정한가… 그 힘겨운 로동교양소생활을 끝내고 돌아왔는데 따뜻한 말은 고사하고 아들이 집에서 쉬는것조차 허락할수 없단말인가…

창범의 가슴속 깊은 곳에서는 아버지에 대한 뿌리깊은 원망과 증오에 가까운 감정이 괴여올랐다. 아버지의 가차없는 사건처리에 의해 수치스럽게 법적제재를 받았다는 반감, 어렸을 때부터 기억의 뇌리에 새겨져있는 혹독한 욕설과 매질에 대한 회오와 삭일수 없는 경원의 심리, 인제는 늙은 아버지에게 혈육의 정은 마를대로 마르고 남들앞에, 당앞에 자녀교양의 랭혹성을 보여주면서 체면이나 유지하려는것밖에 다른 인간미가 없다는것을 확신한데서 오는 조소와 멸시의 감정이 혼탁되여 눈앞이 어지러웠다.

《아버진 잘못 생각하시는군요. 난 소장의 개별적인 <대사령>을 받은것이 아니라 남들보다 두배 세배 일을 해서… 표창을 받은거예요.》

창범은 눈부리가 꼿꼿해서 대꾸했다.

《아무튼 소장이 내보냈겠지. 그건 그거구 인젠 어떡할셈이냐?》

《뭘 말이예요?》

《직업문제말이다. 일을 해얄게 아니냐?》

《원래공장에… 나가야지요.》

《종합기계에 나간단말이냐? 공장사람들의 손가락질이 두렵지도 않느냐?》

《두렵긴요. 누군 뭐 기저귀차고 자리에 오줌 누지 않았어요?》

《그따위 변명으로 건달군불량배딱지를 가릴셈이냐? 넌 지금 몇살이냐? 스물여섯살이면… 전쟁때 련대장, 대대장들도 너보담 어렸다. 도사로청위원장도 네 또래다.》

《어찌겠어요. 심리부전발육인걸. 그렇지만 틀림없이 아버지피줄을 타고난 자식이니 리해해야지 않겠어요.》

《흥, 입도끼질은 조금도 무디지 않았구나. 사람의 속통은 말에 씌여진다. 네 녀석은 개준된것 같지 않아.》

《그야 두구봐야지요.》

《원래공장에는 안된다.》

《어째서요?》

《네 쏠쏠이패당을 또 거느리지 못해 그러지? 넌 시내에 있으면 안돼!》

《불량배자식때문에 도안전국장의 영상에 그늘이 진다는거지요? 알겠어요. 사라지겠어요! 그러지 않아도 로동교양소생활함통을 팽개치지 않고 가지고온걸요.》

창범은 반발적인 행동으로 방구석에서 함통을 집어다놓고 잠바를 걸쳤다.

어머니는 잠자코 문지방에 서서 가슴만 조이고있었다.

《네 밸대로 아무데나 가진 못한다.》

한경택은 낮으나 칼날같이 선뜩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도당책임비서동지하구 의논이 있었다. 널 령산탄광에 보내기루 했다. 거기 가서 로동단련을 더해라.》

《날 또 교양대상으로 보내는가요?》

《래일 배치장을 떼주마.》

한경택은 말투가 누그러졌다.

창범은 눈굽이 쓰렸다. 아들이라는 존재를 망각하다싶이 한 아버지와 직업문제따위로 싱갱이를 벌리고싶지 않았고 거리에서 품었던 소원을 꺼내기도 싫었다. 아버지의 도움으로 될 일도 아니였다. 탄광이라도 좋다. 어떻든 이 도시를 떠날수 있지 않는가.

창범은 함통을 열고 잡동사니속에서 헝겊에 싼 조그만것을 끄집어냈다. 그는 헝겊을 헤치고 로동교양소생활기간 한번도 쓰지 않은 마그네트라이타를 아버지에게 내밀었다.

《도당책임비서동지한테 전해주세요. 제가 로동교양소로 갈 때… 좋은 말을 해준걸 내내 고맙게 생각했어요. 옹졸해서 돌려드리는게 아니라… 과거와 결별했다는걸 알려드리고싶어요.》

창범은 함통을 들고 건넌방으로 가서 문을 닫았다. 침대에 엎드리자 참고참았던 눈물이 쏟아져 베개잇을 적시였다. 로동교양소생활을 마치고나와 그토록 새 생활에 대한 희망과 포부를 안고 달려왔지만 정든 도시는 지난날의 그 불량배딱지를 낡은 건물간판처럼 펴들고나와 그를 맞았다. 친구도 사로청조직도 아버지도 그를 신뢰하지 않았다. 믿어주는 사람이 없다. 경계심을 가지고 랭대하거나 명목상 친절을 나타냈을뿐이다. 아버지는 아직도 나를 독에 넣고 소금에 절이려 하고있다.

그렇지만 나는 이젠 고통스레 짜디짠 물을 먹지 않고 신선한 공기를 마시며 청춘을 살고싶다. 내 불찰로… 내절로 내 몸에 칼질을 해서 피가 흐르고 상처에 허물이 졌지만 결코 병신은 아니지 않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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