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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소설 빛나는 아침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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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강산
댓글 1건 조회 5,202회 작성일 20-06-14 19: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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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그 이튿날 중절모에 코트를 걸친 박원식은 종로 3점목을 또 찾아갔다. 리만석은 양춘만의 친척을 찾아보기 위해 룡산쪽을 나갔다. 목이 쑥 빠지고 키가 후리후리해서 그의 행동거지는 위풍이 있어보이였다. 오선생은 전날이나 다름없이 반갑게 맞아주었다. 박원식은 장군님께서 가르쳐주신대로 남조선인테리들이 모이는데를 뒤져볼 생각이였다. 간단히 의도를 말한다음 박원식은 오선생에게 간곡하게 청을 들였다.

《좀 도와주십시오. 정 몸이 불편하시지 않으면 같이 몇군데 다녀보았으면 좋겠습니다. 우선 우리는 어데가 어덴지 길을 모르다나니…》

천식기가 있어서 한참동안이나 기침을 하고나서 오선생은 안방에 들어가 코트와 모자를 들고나왔다.

《헛걸음인셈치고 같이 가봅시다.》

오선생의 말에 의하면 남조선의 지식인은 8할이상이 서울에 있다고 하였다. 그 지식인은 대개 2개부류로 나누어지는데 사회과학자들은 모두 정치운동에 가담하고있고 자연과학자들은 뿔뿔이 흩어져 때가 오기를 기다린다고 하였다. 그런것을 전제해놓고 우선 먼저 장안빌딩이 요새 인기가 있는데 거기 가보자고 하였다. 빌딩 현관이 저쯤 바라보이는 골목에서 그들은 담배를 1대씩 피웠다. 아닌게아니라 나들문에 불이 일만치 사람출입이 잦았다. 중절모패들이 뻔질나게 드나든다. 그런가 하면 감옥에서 금시 나온것으로 짐작되는 까까머리패들도 그만큼 되였다. 오선생은 자기는 거기에 아는 사람도 없고 들어가볼 용기가 나지 않으니 들어가볼라면 당신 혼자 들어가보라고 하였다.

《여보! 당신은 누구요. 보아하니 부르죠아인테리같은데 여긴 왜 왔소?》 광실로 된 첫칸에 박원식이 들어섰을 때 문칸을 지키고있던 장발청년이 앞을 막아서며 위협조로 물었다.

《나도 좀 관계하고싶어서 찾아왔소.》

《관계? 북에서 오지 않았소?》

《북에서 왔소, 평양에서.》

《으흠, 그렇다.》

장발은 이쪽의 아래우를 훑어보더니 현관에 나가있다가 박선생의 연설이 끝난 다음에 만나자고 하였다. 문틈으로는 뽀얀 담배연기와 함께 휘지근한 냄새가 흘러나왔다. 그와 함께 열기를 띤 그러나 바짝 여윈 노란 목소리가 복도까지 울리였다.

《우리가 제구실을 똑똑히 못하니까 평양에 또하나의 공산당이 나온것이요. 그러나 그것은 오래가지 못하오. 우리가 원산에 있는 리주하나 함남도 배경의 오기섭에게도 사람을 보냈지만 그들은 곧 우리 로선을 따를것이요.》

박원식이 복도창가에 서있는데 장발청년이 팔을 잡아 현관쪽으로 끌어내였다.

《그러단 재미없어. 당신이 밀정일수 있단말이요. 편포짝이 되기전에 물러가오.》

장발은 어깨를 으쓱으쓱 추어올리며 쌈패냄새를 풍기더니 문간으로 되돌아가 눈을 히끗히끗 흘기며 쳐다보는것이였다.

쓴입을 다시며 되돌아나온 박원식은 오선생에게 좀 그럴듯한데가 없는가고 하였다. 오선생은 자기가 권고하고싶은곳은 그래도 경성제국대학밖에 없다고 하였다. 박원식은 그길로 전차에 앉아 물리과교사를 찾아갔다. 정문을 지키고있는 수위에게 오선생이 박아무개교수를 찾아왔다고 하였다. 그러자 로이터안경을 끼고 깡뚱한 코트를 걸친 사나이가 나오더니 조용히 좀 만나자고 하였다. 오선생을 앞세우고 강당을 에돌아 들어가니 좁다란 방에 조선말을 능숙하게 하는 미국군인이 앉아있었다. 중좌였다.

《당신이 누구를 찾는다구요?》

중좌는 금테안경너머로 조소하는듯한 시선을 보내왔다. 제발로 함정에 찾아든셈으로 되였다. 박원식은 들은둥만둥하고 염낭에서 담배를 꺼내였다. 불을 달면서 제꺽 둘러댈 생각을 하였다.

《박만기라는 교수를 찾아왔소.》

《박만기? 무엇이 전문인가요?》

중좌는 방구석에 서있는 소위에게 눈짓을 하였다. 그러자 소위는 수첩을 펼치고 받아 적을 태세를 취하였다.

《고고학이지요. 벽돌장이나 질그릇을 주어모은다고 합니다.》

《당신네는 북에서 왔다고 하던데.》

《그렇습니다. 북에서 왔습니다.》

《박만기를 데려가겠는가요?》

《아니요.》하고 박원식은 단호히 부정하였다. 《이 복새통에 박물관이나 무덤을 뒤지면 한몫 크게 잡을수 있다기에 북에서 우정 왔습니다.》

《오! 그렇습니까? 그것을 하자면 여기보다 북이 더 좋겠는데. 북이 고구려의 본거지니까.》

중좌는 소위에게 알아보라고 하자 소위는 제꺽 서류장에서 두툼한 명부를 뒤지더니 박만기라는 교수는 없다고 하였다.

《여보! 북에서 온 신사, 박만기는 유령이요. 이 대학에는 없소.》

입가에 랭소를 담고 이쪽의 동향을 살핀다.

《아! 그러면 우리는 전주로 가야겠습니다. 전주에 그의 집이 있다고 했으니까. 거기에도 없으면 일본에서 아직 돌아오지 않았을수도 있구요.》

중좌는 이쪽에 대해서 전혀 가늠이 가지 않아 고개만 기웃거리고있다.

오선생은 얼굴이 하얗게 질려 세상이 이렇게까지 변한줄은 정말 몰랐다고 하였다. 이쯤하면 남조선은 일제대신 미합중국판이 되고 말았으니 더이상 돌아다니지 말자고 하였다. 오선생은 기분이 나빠 그런지 또 천식기침을 터뜨려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고 컬럭컬럭 하였다. 그러나 박원식이 마지막으로 부탁한 허헌변호사네 집까지는 자기가 안내해주겠다고 하였다. 전차를 2번이나 갈아타고 한참 걸어서 골목으로 들어가니 대문앞에 《법률상담소》라는 간판이 붙어있었다. 주인을 찾으니 중년녀인이 나와 허헌선생은 한 열흘째 집에 들어오지 않는데 언제 올지 모른다고 하였다.

그것으로 꼬박 하루해가 지나갔다.

다음날 박원식은 아침 일찌기 음식점에 들려 설렁탕을 한그릇 사먹고 오선생네 집에 들렸다가 그길로 경성역으로 나갔다. 대합실에 들어가 장군님 환영준비위원회의 광고문앞을 지키였다. 사람들은 끊임없이 모여들었다는 흩어지군 하였다. 박원식은 군중들틈을 오가면서 모여선 사람들을 하나하나 뜯어보았다. 그러다가 지식이 있어보이는 사람을 붙잡고 홍명희에 대하여 묻군 하였다. 한 댓명 붙잡고 물었지만 모두 홍명희라는 이름은 익히 들었지만 그의 집이 어데인지 그가 지금 어떤 직분에 있는지 알지 못한다고 하였다. 중낮이 기울무렵 허름한 중절모를 쓰고 등나무지팽이를 짚은 로인이 하나 나타났다. 등에는 보따리를 졌고 발에는 일본군화를 신었다. 그러나 영채가 도는 눈으로 광고문을 한참이나 쳐다보다가 《옳거니, 옳거니 과연 뜬소문은 아니였구만. 김일성장군님께서 서울에 오셔야지.》하며 고개를 끄덕끄덕한다.

박원식은 그 로인의 손을 붙잡고 홍명희를 잘 아는가고 물었다. 로인은 잠간 쳐다보더니 지팽이를 들어 출입문쪽을 가리키였다. 박원식은 로인의 팔을 부축하고 광장 한옆에 나가 마주앉았다.

《나는 올해 77인데 홍명희는 잘 모르고 그의 부친 홍범석과는 친한 사이였소. 금산군수로 있다가 한일합방소식을 듣고 명주수건으로 목을 매고 자결하였소.》

이렇게 시작한 로인은 묻지 않는것까지 마구 늘어놓았다. 그로서는 그렇게 하는것이 왜정 36년간 참고참았던 설분을 토해버리는것으로 되였던 모양이다. 로인은 차츰 서울이 돼가는 꼴을 보니 왜정때나 다를바 없는데 일루의 희망으로서 장군님께서 개선하신다는 소문에 기대를 걸고있다고 하였다. 그래 수원에 있는 딸네 집에 갔다올가 해서 떠난김에 광고를 확인하던중이라고 하면서 묻는 말에 대답하였다. 홍범석의 맏아들 홍명희는 괴산군 동부리에서 태여났다. 어려서부터 총명했다고 하는데 15살에 서울 중교의숙에 들어가 외국어를 공부하였다. 뛰여난 재능이 알려져 고종이 만나주었고 《리조실록》을 보는 특혜를 받았다고 했다. 3. l운동때 홍명희는 일경에 체포되여 징역을 살았다. 그후 중국이요 어데요 전전하다가 시골에 내려가서 소설 《림꺽정》을 썼는데 홍명희는 단연 조선의 《3수재》중 한사람이라고 하였다. 로인은 이런 정도밖에 모른다고 하였다.

《그 집주소는 모르십니까?》

박원식은 다그쳐물었다.

《홍명희는 촌에 나가있다고 했는데 그 아들네 집은 저 사직동에 있소. 하기야 지금 서울에 와있게다 저렇게 광고를 내붙였겠지요. 그러나 어찌 만나겠소. 뜻이 있는 사람은 누구라없이 동분서주하는때인데.》

로인과 헤여진 박원식은 사직동을 찾아떠났다. 요행 있으면 만나는것이고 그렇지 않으면 행처라도 알수 있을것이였다. 전차를 타고 종로에 내려서 골안으로 들어갔다. 단층집이 오구구 모여앉은곳인데 널판자를 둘렀다.

박원식은 널대문앞에 서서 누구의 이름을 불러 찾을가 잠간 망설이다가 우선 《주인 계십니까?》하고 불렀다.

《거 누구요?》

마당에서 서성거리던 대머리진 환갑나이 로인이 문을 열었다.

《저 여기가 홍명희선생네 댁이 옳은지요?》

박원식은 조심스럽게 물었다.

《네, 그런데 어데서 오셨는가요.》

이때 박원식은 예민한 감각으로써 상대자가 홍명희일수도 있다고 단정하였다.

《선생님, 안녕하셨습니까?》

박원식은 환성을 지르다싶이 큰소리를 내며 인사를 하였다.

《저는 평양서 왔습니다.》

흥분된 음성과 부자연스러운 몸가짐을 보고 저쪽에서는 흠칫 놀란다.

《평양서요?》

그러는 사이에 아래방문이 열리더니 젊은 녀인이 중절모와 회색두루마기를 들고나왔다.

로인은 두루마기를 입고 모자를 올려놓더니 그제서야 《평양손님은 직발 홍명희에게 용무가 있겠습니다?》하고 물었다.

《그렇습니다. 선생님을 꼭 만나야겠습니다.》

이렇게 허두를 뗀 박원식은 자기 소개를 대충 한 다음 양춘만을 만나야겠다는것과 겸해서 이곳 몇몇 지식인들의 안부나 알자고 한다고 말하였다.

김일성장군님부대에 계시다는것이 사실입니까?》

홍명희는 발을 모으며 정중한 표정을 지었다.

《사실입니다.》

홍명희는 방금전에 손님의 용무를 무시해버리고 어데론가 떠나가려던것을 그만두고 모자를 벗어 뒤에 지켜섰던 녀인에게 들려주었다.

《서재의 문을 열어라!》

녀인은 급히 되돌아들어가더니 남쪽으로 향한 유리문을 열었다. 홍명희는 아들벌이 되고도 남는 년령차이에는 관계없이 깍듯이 존대를 한다.

《우선 먼저 문안을 드리겠습니다. 김일성장군님께서는 건강하신지요?》

《건강하십니다. 지금 매우 분망한 나날을 보내고계십니다만 건강은 일없습니다.》

《아! 그렇습니까? 매우 반갑습니다.》

홍명희는 고개를 숙여 근엄하게 경의를 표하였다. 방안은 책으로 꽉 차있고 둘이 앉고보니 사람 하나 비킬 자리도 없이 비좁았다. 이야기를 빨리 진척시켰으면 좋겠는데 저쪽에서는 손님에 대한 신분에 믿음이 덜가 그런지 그렇지 않으면 무슨 생각되는바가 있어 그런지 좀체로 의사표시가 없다. 번들번들한 이마와 누리끼레한 얼굴은 부석부석해보이였다. 홍차를 2잔이나 마시는동안에도 말이 없었다.

《여기 지식인들의 동향이나 안부를 알려거든 우리 아들애를 만나보는것이 좋겠습니다. 나는 여적 촌에 들어박혀있어서 잘 모릅니다. 말은 바른대로 조선사람으로 자연과학을 전공한것은 10손가락안에 듭니다. 그러니 거의 없는셈이지요. 방금 리영기가 어데 있는가 물었지만 나는 작년까지 일본에 있었다는것외 모릅니다. 지금 1~2달이야 전에 몇해에 맞먹는 변화가 있으니까요, 우리 아이는 저 <매일신보>자리를 차지하고 신문을 내고있는데 거기에 찾아가야 합니다. 집에는 오지 않습니다.》

《아! 그렇습니까.》 대화를 하면서 홍명희는 30살되나마나한 청년의 모습을 기회가 있을적마다 자세히 뜯어보고있다. 막로동자처럼 거칠어보이기도 하고 때로는 범접키 어려운 위엄을 풍기기도 한다.

《젊은이, 새삼스러운 말이지만 난 참으로 기쁩니다. 장군님께서 건강하시다는 안부를 들으니 천만금보다도 더한 기쁨을 얻었고 만시름이 놓입니다.》

《그렇습니까? 저는 오직 홍명희선생이 김일성장군 환영준비위원회 위원장이라는 그 명칭 하나를 보고 한량없는 기쁨을 가지고 찾아왔었습니다. 장군님의 전사로서 서울에 왔다가 그냥 발길을 돌릴수 없었습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해요. 그런데 이제 직발 평양으로 가시겠는가요?》

《네, 며칠 더 있다가 사람을 하나 만나고 곧 떠나겠습니다.》

홍명희는 이윽토록 말없이 박원식을 응시하다가 간절한 눈빛을 띠우며 이렇게 말하였다.

《젊은이는 나의 부탁을 하나 들어줄수 있는가요?》

《어서 말씀하십시오.》

《장군님께 안부를 전할수 있습니까?》

《있습니다.》

《장군님께 말씀올려주시오. 여기 남조선 전체 동포들은 장군님께서 서울에 개선해오실 때까지 기다리고있더라고 전해주시오. 2달도 좋고 3달도 좋습니다. 아니 10년이고 20년이고 기다리겠단다고 전해주시오.》

《꼭 전하겠습니다.》

홍명희는 고개를 깊이 숙여보이였다. 그것은 박원식에게가 아니라 그를 거쳐 장군님께 드리는 인사로 느껴졌다.


7

 

이튿날 박원식은 영등포와 인천으로 예정했던 방향을 급전환시켰다. 추격전이 언제나 좋은것이 아니고 매복전이 오히려 우월한 때도 있는것이라고 보는 그였다. 그는 전차를 타고 종로로 나갔다. 오선생네 집을 지켜보자는것이였다. 그는 오선생네 대문안에 들어섰다. 토방에는 구두가 2컬레 놓였는데 방안에서는 두런두런 말소리가 울리였다.

《오선생님 계십니까?》

말소리가 뚝 끊어지더니 잠잠해졌다.

《오선생님 계십니까?》

다시 불러서야 안에서 《누구요?》하고 가래끓는 소리가 섞인 대답이 흘러나왔다. 그러나 문은 열리지 않았다. 잠간 기다리는데 안에서 젊은 사나이 둘이 서둘러 마루로 나서는데 얼굴이 모두 붉게 상기되였다. 뒤미처 오선생이 뜨개덧옷을 어깨에 걸친채 따라나오는데 매우 당황한 기색이였다.

《혹시?》하는 순간 가슴에 쭝 울리는것이 있어서 박원식은 사나이들앞을 막아섰다.

《실례합니다. 양춘만선생이 아닙니까?》하면서 사진에서 본것 같은 매우 리지적인 눈을 가진 사나이를 쳐다보았다.

《양춘만이? 난 모르오.》

상대편에서 태연하게 대답하는데 그의 말꼬리가 약간 떨리는듯 하였다.

《반갑습니다. 양춘만선생이 옳구만요.》

박원식은 본능적으로 저편의 팔목을 움켜잡았다. 그렇게 되자 사나이는 얼굴이 하얗게 질리면서 몸을 떨었다. 마루에 나섰던 오선생은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면서 마당에 내려서고있다.

《방안에 들어들갑시다. 서로 과격해지지는 말구요.》

애원하는 목소리였다.

박원식은 온돌방문켠에 앉고 양춘만이라고 생각되는 사나이는 아래목에 앉았다. 또 1명의 사나이는 어데론가 가버렸다. 어간에 오선생이 앉아 일단 통성을 하도록 하였다. 사나이는 그제서야, 즉 그 어떤 위험이 느껴지지 않게 되여서야 자신의 입으로 강선에 있던 양춘만이라고 실토하였다. 몸은 가느다란편이였지만 지혜가 있고 의지가 강하다는것이 섬세한 얼굴륜곽에 잘 나타나있었다.

《우리는 양춘만선생을 데려가자고 여기까지 찾아왔습니다.》하고 박원식은 신중한 표정을 짓고 말을 떼였다. 그런후에 그는 여직까지 수십수백번 속으로 외워보았던 일련의 표현들을 하나하나 꺼내기 시작하였다. 《양선생! 우리와 함께 강선으로 돌아갑시다.》

《강선으로 돌아가요?》 양춘만의 입가에는 알릴듯말듯한 비웃음이 비껴있었다. 《난 나대로 필요에 의해 여기 와있는데요.》

《그렇긴 하겠지만 강선에는 양선생이 공들여 만든 강철전기로가 있지 않습니까.》

《전기로요?》 그의 눈에서는 불이 번쩍하였다. 마치 그는 호되게 얻어맞은 사람처럼 몸을 비틀면서 적의에 찬 시선으로 박원식의 근엄한 얼굴을 쏴보았다. 《난 전기로를 증오하오. 다시는 내앞에서 전기로가 어떻다는 말을 하지 마시오.》

《그것은 옛날입니다. 우리에게는 전기로가 필요합니다. 빨리 가서 불을 지펴 강철을 뽑읍시다.》

《강철을 뽑는다?》 담배갑으로 가져가던 손이 파르르 떨면서 몇번이나 헛데를 짚고있다. 《나는 강선에 가지 않을것이고 역시 강철도 뽑지 않을것이요. 난 그 모든것과 결별한 사람이니까요. 나는 나대로 행로를 다시 찾겠소.》

이쯤하고보니 공연한 말씨름만 계속하게 될것 같았다. 끝까지 참아야 한다고 굳게 다짐하였지만 조소와 멸시가 로골적으로 어린 양춘만이의 눈길이 가슴을 못견디게 흔들었다.

《마음을 눅잦히고 생각해보시오. 저번날 내 여기 오선생님한테도 자세히 설명했지만 우리는 강철이 없어 철도도 탄광, 광산도 운영을 못하고있습니다. 그러니 인민생활에 지장이 있습니다. 우리는 민주주의자주독립국가를 건설해야 하는데 공장들이 돌아가서 나라를 부강하게…》

《여보시오.》 얼굴이 하얗게 질린 양춘만은 끈덕진 상대편에 대해 더는 참을수 없었던지 무례한줄 알면서도 되알지게 내쏘았다. 《보아하니 당신도 공산주의자같은데 8. 15가 되자 로동자들을 선동해서 모두다 두들겨패지 않았습니까. 야만같이말입니다.》

《어쨌든 군중은 자기들의 눈으로 보고 자기들의 힘이 미치는껏 압제자들을 징벌했을겁니다. 그들은 자유와 권리를 찾았으니까요. 그런데 양선생이야 아무런 벌도 받은것이 없지 않습니까.》

《그건 내가 제때에 몸을 숨긴탓이지요. 여하튼 나는 당신네 요구에 응할수 없습니다.》

잠간 침묵이 흘렀다. 바깥에서 인적기나서 그랬던지 오선생이 부엌을 거쳐 밖으로 나갔다.

《아니 신들을 어쨌소?》

《거기 마루밑에 있었지요.》

양춘만이 바라지를 열어제끼였다.

《허 참, 생눈 뽑아가겠군.》 오선생은 너무 턱자없어 허허 웃고있다. 《몽땅 들어갔네. 반반하게. 세상이 이러구서야 어떻게 살아가나. 이건 무법천지거든.》

마루밑에 벗었던 구두들을 몽땅 걷어갔다.

《하기야 뭐 인간의 정신마저 앗아가자고 달려드는판인데 구두가 대수요.》

양춘만의 비꼬임이 몹시 거슬렸지만 박원식은 분기를 꾹 눌렀다. 그런후에 오선생에게 잠간 기다리라고 하고 그는 앞거리로 나갔다. 한 30분후에 운동화 2컬레를 사들고 돌아왔다.

《어찌겠습니까? 걸음을 걷자면 신이 있어야 할테니까 피차 아무거나 하나씩 걸칩시다.》

너무나 태연하고 로골적으로 기성화해버리는 박원식의 해석에는 놀라움을 일으키지 않을수 없었다. 그런데도 양춘만은 그것을 탓할만한 용기를 내지 못하였다.

급히 걸어서 그런지 얼굴이 벌겋게 된 박원식은 양춘만이 앞에 마주앉으며 오선생에게 고뿌를 빌자고 하더니 염낭에서 술병 2개를 꺼내였다. 한홉들이 사기고뿌를 내놓자 박원식은 마개를 뽑고 35도짜리 소주를 가득차게 부었다. 그는 다른 주머니에서 마른 명태 2마리를 꺼내 쭉쭉 찢어놓더니 고뿌의 술을 제가 먼저 단숨에 쭉 들이켰다.

양춘만이도 오선생도 술좌석의 범례를 너무나 엄청나게 어기는데 놀라 눈이 둥그래져서 마주보았다.

《먼저 실례했습니다.》 입술에 매달린것을 손바닥으로 문대며 박원식은 어질게 웃었다. 《이렇게 해야 안심할수 있습니다. 우리 항일유격대원들은 소금에 독약을 치고 우물에 청산카리를 타고 쌀에 비상을 섞고 하는 별의별 경난을 다 겪었기때문에 서울복판에서 파는 술도 조심히 대합니다. 한대씩 피우지요. 그사이에 내가 별일없으면 그때 정식으로 권하겠습니다.》

양춘만은 오선생과 박원식을 놀라운 시선으로 번갈아 쳐다보고있다. 그런데도 다시 놀라운것은 박원식이 그 경악할만한 행동을 별로 꾸밈없이 자연스럽게 수행하는것이다. 더구나 《우리 항일유격대원들은》하는 대목에서 그의 넋은 완전히 질리고말았다.

《허어 참!》

오선생은 장미가 꿋꿋이 내뻗은 눈섭을 치켜올리며 연방 감탄의 소리를 지르고있다.

박원식은 얼굴이 홍당무우처럼 되였다. 그는 주정에 과민한 체질이여서 전혀 술을 이기지 못하였다. 그러나 태연하게 술을 부어 오선생에게 먼저 권하고 그다음에 양춘만에게 잔을 돌리였다.

《우리 유격대가 활동하던 초기에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박원식은 양춘만이 잔을 비우는것을 보고 또 병을 기울이였다. 기왕 위장포를 벗은바에는 거침없이 자기를 드러내놓을 결심을 하였다. 옴니암니 체면과 정황과 심리동향을 가리노라면 한정이 없겠고 또 그래봤대야 론리로써는 양춘만을 이겨낼 자신이 없었던것이다. 그는 고개를 들고 억실억실한 눈으로 웃으며 말을 계속하였다.

《유격대에 최의관이란 성실한 대원이 있었습니다. 그는 이전에 룡정거리에서 간판을 붙이고 병원을 차리고있었는데 어느날 밤 항일유격대원 2명이 나타나 우리한테 부상을 당한 사람이 많이 생겼는데 수고스러운대로 같이 가서 치료도 하고 수술도 해달라고 하였습니다. <난 못간다. 난 통비가 될수 없다>하고 그는 고래고래 소리쳤습니다. 하는수 없어 유격대원들은 그의 입에 수건을 틀어막고 둘쳐업었습니다. 한사람은 수술도구와 약가방을 들고 산으로 들어갔습니다. 강제로 업히여간 최의사는 인간을 귀히 여기는 정신이 얼마간 있다보니 나라를 찾기 위해 싸우는 유격대원들의 애국심에 감동이 되여 밤을 새워가며 수술을 했습니다.》

《어-험!》

오선생이 취기에 거나해진 눈을 크게 뜨면서 고개를 꺼떡꺼떡하였다.

《환자들의 생명이 다행히 구원되게 된 열흘후에 최의사에게 말했습니다. <선생님! 내려갑시다. 우리가 약속한 기일이 되였습니다. 선생님에게 피해가 없게 하기 위해 우리가 안내해드리겠습니다. 경찰이 물으면 강압에 못이겨 붙잡혀갔댔노라고 사실대로 말하십시오. 자! 떠납시다.> 그러니 최의사는 <나는 환자를 이대로 두고 못가겠소. 이제 알고보니 항일유격대원들은 우리 민족사에 첫째가는 애국자들이요. 이들의 생명이 위태로운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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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산님의 댓글

강산 작성일

(위에서 계속)

이들의 생명이 위태로운데 내 하나의 안일을 위해 여기를 떠나다니. 나는 못가오.>라고 대답했습니다. 그후 최의사는 유격대군의가 되여 적탄에 희생되는 날까지 잘 싸웠습니다. 그는 우리모두가 기억하는 혁명투사였습니다. 그래 유격대원들은 최의관이라고 하면서 룡정의사의 전설같은 이야기를 지금도 외우고있습니다. 그건 그렇다치고 우리는 지금 술을 마셔야지요.》

박원식은 숨이 차서 헐떡거리면서 또 잔을 부었다.

방안에는 침묵이 흘렀다. 차츰 더 팽팽해진 양춘만은 공연히 자리를 고쳐앉기도 하고 술잔을 들어옮겨놓기도 하면서 안절부절을 못하고있다. 하지만 그와는 반대로 오선생은 고개를 숙인채 빚어세운듯이 앉아서 박원식의 다음말에 귀를 기울이고있었다.

여담을 끝냈다고 본 박원식은 아까 시작했던 말을 다시 꺼내기로 결심하였다. 시작한바에는 앉은자리에서 끝장을 보아야 할것이기때문이였다. 그의 머리속에는 강선에 갔다온 그날밤 김일성동지께서 자기를 앉혀놓고 하시던 그 말씀과 그때 그이의 모습이 생동하게 떠올랐다. 더하지도 말고 덜지도 말고 그때 그 말씀을 그대로 재현해야 할것이였다. 흥분을 가라앉히기 위해 담배를 한대 태우고나서 그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나는 김일성장군님께서 양춘만선생을 데려오라고 해서 여기까지 찾아온 박원식이라는 사람입니다.》

《김일성장군님께서요?》

양춘만이와 오선생이 일시에 같은 소리를 내였다. 하지만 양춘만은 인차 얼굴에 그늘이 비끼면서 의아쩍은 표정을 지었다. 잠시후에 양춘만이 입을 열었다.

《분에 넘치는 일이라고 생각됩니다. 따라서 믿기도 어렵구요. 또 김일성장군님께서 어찌하여 나같은 인간을 알게 되였는지 그것이 의문입니다. 나는 공산주의자들에게 환영을 받을만한 인간이 못됩니다. 그러니 그편의 말을 내가 믿기 어렵다는것을 리해할수 있겠지요?》

《그렇습니까?》하고 박원식은 더욱더 침착해지면서 입에 물었던 담배를 재털이에 올려놓았다. 《시간이 오래 걸리지 않을테니까 제말을 끝까지 들어보고 결심하십시오.》 박원식은 의혹과 공포에 가위눌린 양춘만을 동정하는 눈길로 쳐다보며 말을 계속하였다.

《김일성장군님께서는 저를 여기에 보내시면서 이렇게 말씀을 주시였습니다. 양춘만기사를 만나면 우리가 한 말을 그대로 전하시오. 강선제강소에서 강철을 만들던 기사 양춘만은 해방된 우리 조국의 강철을 만들기 위해 우리에게 필요합니다. 당장은 그가 우리의 의도를 잘 리해하지 못할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앞으로는 반드시 리해하게 됩니다. 혹시 그가 일본놈들에게 리용된것이 마음에 걸려 우리를 따라오는데 주저할수 있습니다. 우리는 과거를 묻지 않고 민주주의자주독립국가건설에 나서는 사람은 누구나 손잡고나갈것입니다.》

박원식은 잠간 말을 중단하였다. 흥분이 앞서고 귀가 벙벙 울리였다. 자기가 말을 하고있는것이 아니라 장군님앞에서 자신이 듣고있는것 같은 착각마저 생기였다. 그는 자기를 정시하고있는 양춘만의 예리한 시선을 감촉하였다. 의혹은 점점 더 커지는것 같았다. 이야기의 구절구절이 다듬어지고 론리에 빈틈이 없다. 어쩌면 이렇게 막벌이군같은 사람한테 그런 정치적이고 세련된 표현이 거침없이 나오는가 의심하는것 같았다. 하지만 박원식은 그냥 한본새로 내리엮었다.

《김일성장군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우리 나라에 강철이 필요하기때문에 강철을 만드는 양춘만이 필요합니다. 그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보다 중요한것은 식민지인테리인 그 인간을 해방시키자는것입니다. 일본제국주의에 얽매였던 그 지식과 그 정신을 해방시켜 자기 나라, 자기 인민의 편에 그를 세우자는것입니다. 그 식민지인테리들속에 양춘만이도 끼워있습니다. 인테리에 대한 해방, 그것은 마주앉아 이야기를 하는 방법으로는 안됩니다. 오랜 기간 일을 같이하면서 서로 의사가 통하고 역시 그것도 인테리답게 마음으로 우리의 의도를 접수해야 하는것입니다.》

《복잡하게 말하지 맙시다. 박선생!》

양춘만은 짓씹고있던 입술을 열고 약간 떨리는 목소리로 말을 걸었다.

《그것이 사실이요?》

《사실입니다. 방금 말했지만 우리는 인테리를 해방하자는것입니다.》

《해방이요? 해방이라면 우리한테 자유를 주어야겠는데 그렇게 할수 있을가요?》

《물론이지요. 당신들이 어느쪽으로 가는가 하는것은 자유입니다.》

《자유라? 그러면 하나 물어봅시다. 내가 이 자리에서 당신들을 따라 안가겠다고 한다면 그렇게 하라고 내버려두겠습니까?》

《그렇게는 못하겠습니다. 나는 양춘만을 데려오라는 명령을 받은 전사입니다.》

《그럼 나는 포로되였습니까?》

양춘만은 무릎에 올려놓은 주먹을 떨면서 고개를 떨구었다. 박원식에게는 그 모양이 매우 가련해보이였다.

《양춘만선생! 흥분하지 말고 차근차근 이야기합시다. 나는 인테리를 잘 모릅니다. 그러나 이제 보니 참말 인테리에 대한 해방이 필요하다는것을 절실히 느꼈습니다. 공산주의다 뭐다 자꾸 그러지만 말고 답변해보시오. 그럼 당신은 계속 일본제국주의와 운명을 같이하겠는가? 당신은 앞으로도 일제를 위해 강철을 만들겠는가? 양춘만은 엄연히 조선사람이고 조선사람의 량심을 가진 기술자인데… 그렇지 않습니까? 대답하시오.》

양춘만은 고개를 들고 앞에 떡 막아앉은 박원식을 쳐다보며 가슴을 움켜쥐는것이였다. 온몸이 와들와들 떨었다.

《당신네 맘대로 하오. 당신은 총을 가지고있겠지요. 룡정에 있는 최의사처럼 나를 만들자는거지요. 나는 먼 앞날에 대해서 지금 말하려 하지 않소. 그러나 오늘 지금 현재 나는 당신네를 따라갈수 없소.》

말을 끊고나서도 잠간 그는 이쪽을 모멸에 찬 시선으로 쳐다보았다. 그런데 갑자기 눈굽이 젖어들더니 흑 하고 숨을 들이그으며 방바닥에 엎어지는것이였다. 그는 울고있었다.

박원식은 다시 담배를 붙여물고 가련한 정상을 지켜보고있었다.

《양선생! 너무 이러지 마시오. 누가 당신을 죽인다고 했소, 어쨌소. 우리는 솔직히 다 말했습니다. 우리에게는 강철이 필요하다, 기관차도 수리하고 석탄도 캐야겠는데 강철이 없단말입니다. 새 나라를 세우는데 인테리도 있어야 나라가 흥한단말입니다. 우리와 같이 가면 당신네 앞길은 대단히 좋을것입니다. 또 거기에 처자가 있잖소. 당신도 인간이겠지. 당신은 남편이구 아버지가 아니요.》

《나도 인간?》

양춘만이 뻘겋게 충혈한 눈을 들었다. 초점을 잃은 그의 시선은 안해와 자식이 보이는것처럼 번뜩이고있다.

《양선생네 부인과 아이에 대해서도 할말이 많지만 잘 믿을것 같지 않아 여기서는 말하지 않겠습니다. 가보면 다 알게 될겁니다.》

이야기는 날이 어두울 때까지 계속되였다. 한쪽에서는 손을 내미는데 다른 한쪽에서는 그것을 한사코 물리치고있다. 그렇게 하기를 수십차례 거듭하고있는것이다. 처음부터 몇시간동안 가운데서 랭랭히 듣고만 있던 오선생이 담배연기가 자욱한 공기를 갈기 위해 미닫이를 틔워놓았다. 그런후에 간곡한 어조로 타일렀다.

《나는 양군의 스승으로서 한마디 권고할것이 있네. 내가 자네를 처음 만나서 북에서 사람이 왔다고 하면서 한 말이 있었지. 나는 김일성장군님을 숭배하는 사람이요. 우리 조국의 운명이 칠성판에 놓였을 때 누가 그것을 구원하기 위해 싸웠는가. 나는 목격하지도 못했고 들은 소리도 없소. 다만 나는 왜정때의 신문을 통해서 읽었을뿐이요. 왜놈들은 공산비적이요 토비요하고 악선전했지만 총을 들고 조국광복을 위해 싸운것은 오직 김일성장군뿐이요. 그래 김구가 그랬소? 리승만이나 김성수가 그랬소? 김일성장군님과 견줄 애국자가 어데 있소. 그러길래 우리 남조선사람들모두가 김일성장군님께서 서울에 오셔서 우리 3천리강토에 정치를 펴야 한다고 간절히 바라고있단말이요. 그러니 내 생각에는 장군님의 부르심이 틀림없으면 선뜻 따라가는것이고 그것이 미타하면 후에 다시 기회를 보는것이 좋겠소. 내 의견은 이렇소. 한 인간의 운명을 결정하는 순간인데 경솔히 해서는 안된다고 보오.》

오선생은 과연 스승답게 용의주도하게 그리고 사리에 맞게 판단을 내리고 나중에는 좌우 편향을 다 경계한 중립적인 대안을 제기하는것이였다.

그날밤 박원식은 오선생네 집 웃방에서 양춘만이와 함께 날이 샐 때까지 이야기를 하였다. 온갖 수놀음을 다했지만 방싯이 열리는것 같던 양춘만이의 마음은 인차 조갑지처럼 꽉 다물군 하였다.

박원식이 길거리에 나가 설렁탕을 한그릇 사먹고 들어오니 양춘만은 웃방에 누워 자고있었다. 숨소리도 없는것을 보니 자는것처럼 하면서 갈것인가 말것인가 바재이기도 하고 또 이런것 저런것을 예측하면서 운명을 점쳐보는것 같았다.

그앞에는 두 길이 열려있었다. 하나는 북이요 하나는 여기 남이다. 그는 벌써 몇달동안 확고하다고 믿었던 자기 행로가 불과 하루사이에 모질게 흔들리고있다는것을 감각하였다. 여직까지 그는 북에 대해서 한번도 생각해본적이 없었다. 그런데 소박하면서도 과격한 박원식이라는 사람이 나타나 그를 사정없이 밀쳐놓은것이다. 그는 눈을 감고 연방 자리를 뒤채면서 갈림길에 선 자기의 운명을 지켜보았다. 지금 내뗀 남쪽의 길, 이 방향으로 꼿꼿이 걸어가고싶은것이 그의 요망이기도 하였다. 그러면 그 길에는 무엇이 있는가? 이에 대해서 아직 확고하다고 볼만한 아무런 예측이나 가정도 만들수 없었다. 막연하게나마 볼수 있다면 미국쪽에 붙는것뿐이다. 그런데 그 앞은 단 한치앞도 보이지 않는 캄캄한 절벽이 아닌가 미국에 붙는다는것은 이전에 일본에 붙었던것의 반복일것이다. 지금 그러지 않아도 해방전에 일제의 리용물이 되였던 값을 톡톡히 치르고있는데, 바로 그것때문에 처자를 버리고 쫓겨다니는 설음많은 나그네신세가 되였는데 이제 또다시 그런 전철을 밟아야 한단말인가. 전철도 전철이지만 남에 와보니 미국놈이란 왜놈보다 더 혐오스러운 징그러운자들 같다. 온 남조선 일판을 미국판으로 만들려는 꼴이 헨둥하게 알렸다. 이제 그 손아귀에 잡히는 날에는 꼼짝달싹 못하고 수족을 얽히우고말것 같았다. 호랑이굴에서 빠져나오니 승냥이와 맞다든 처지라 할가. 아, 그렇다면 다른 경우는 어떤가? 박원식이라는 사람의 말을 따르는 길이다. 그런데 그의 말을 그대로 믿을수 있겠는가. 유인자란 언제나 마음이 동하게 들띄워놓는 수법을 쓰는법이다. 그러나 그 인간은 분명 두가지만은 명백히 자기를 나타내였다. 하나는 자기 요구에 응하지 않으면 그냥 두지 않겠다는 완강한 태도이고 다른 하나는 그 성품이 결코 악하지 않다는 점이다. 독이 들어있을수도 있다면서 먼저 술을 마시는것도 그렇고 장군님의 말씀을 전한다고 할 때면 수첩을 꺼내서 이미 적어두었던것을 그대로 읽어주는 성실한 점이다. 그러면 그를 따라 북으로 가면 어떻게 될것인가? 그가 말한대로 강철을 만들게 될것이다. 그저 평범한 조선사람으로 살게 될것이다. 이것이 최상일것이다. 만약 그것이 아니라면 극단한 경우 《일제에 복무한자》로 되여 강제로동을 당하거나 붉은 교수대에 목을 걸게 될것이다.

이 모든것은 다 가정이다. 현실은 내가 박원식의 손탁에서 빠져날수 있는가 하는것인데 그것은 지금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오선생의 권고를 따를것인가? 오선생의 공리는 한번도 빗나간적이 없지 않는가. 돌아설 기회는 아무때도 있을테니까. (박원식이 말대로 장군님께서 부르시는것이 사실이라면…)하고 그는 가정해보았다. 뒤이어 (그것은 거짓이다. 그럴리가 없다.) 이렇게 강하게 반발을 하면 그만한 세기로 또 앞의것이 되돌아와 가슴을 세게 두드린다.

그는 박원식의 얼굴을 상기하고는 공포에 질려 떨다가 개선연설을 하시는 장군님의 초상화를 본 생각을 하면서는 한가닥 기대에 젖어들군 하였다. 날이 샐 때까지 숨을 죽이고 누워 수십번 같은 생각을 반복하였다. 그러다가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가겠소, 북으로 가겠소.》하고 실성한 사람처럼 되뇌이였다.

박원식은 그를 붙잡고 눈물이 글썽해져서 《고맙소, 정말 고맙소.》하고 같은 소리를 반복하였다.

이렇게 되여 박원식은 다음날 《사리원려관》에서 만나 같이 가기로 약속하고 둥둥 뜬 기분으로 숙소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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