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모] 노길남 선생님을 기리며 (이인숙)
페이지 정보
본문
[추모]
노길남 선생님을 기리며
지금도 선생님이 우리 곁을 떠나셨다는 사실이 정말 믿겨지지 않습니다. 활짝 웃으시며 앞에 금방 나타나실 것만 같고 전화를 해 주실 것 같은 기분에, 내 전화기에서 선생님 이름과 3월 22일 저에게 마지막 남기신 선생님의 메세지 “고맙습니다. 의사진단으로 약복용하고 많이 호전중입니다. 그동안 무리해서 일한 후유증 인것 같습니다. 60대 이상 조심하라고 하니깐……. 감사*^ “ 라고 쓰신 글을 지우지 않고 있습니다.
3월 20일인가 21일인가 저에게 전화를 하셔서 “내 와이프가 내 머리에 손을 대보더니 열이 있다고 해“ 라고 말씀하신 것이 선생님의 마지막 음성일 줄 어찌 감히 짐작이나 했겠습니까?
로즈힐에서 가졌던 통일일꾼 왕용운 선생님의 추모식때에 오셔서 추모사를 읽으시며 마지막에 눈물을 글썽이셨는데 그 후 불과 2달 조금 지나 가시다니 이게 웬말입니까.
선생님은 다른 여러 사람들에게 저를 소개하실때 마다, 가장 많이 듣던 말이 “이세상에서 가장 가슴이 뜨거운 여자” 라고 하시던 말씀이 가슴에 박힙니다. 실은 그렇지도 않은데 말입니다.
노선생님을 알게 된 시기는 사실 제가 1980년대 윤한봉 선생님이 시작하신 민족학교의 회원이었을때 만난 적이 있으니 35년 이상 되었지만 그리 가깝게 지내지는 않았지요.
그러다 9.11이후 미국의 중동 침략으로 반전 시위가 연방정부 앞에서 혹은 다운타운에서 열릴때마다 시위 끝나고 차 한잔 하자는 선생님의 제의를 항시 다음으로 미루다 보니 내가 선생님께 공수표만 난발한것 같기에 죄송한 마음이 들어 '그럼 저의 집에 한번 오세요' 라고 말한 그때부터 선생님과 더 가깝게 되었습니다.
마침 저의 교회가 글렌델 선생님 사시는 집에서 그리 멀지 않았기에 일요일 마다 교회가 끝나면 기다리시겠다 하셔서 교회끝나고 선생님댁에 들려 많은 이야기를 주고 받곤 했더랬지요.
한번은 일요일에 들렸더니 조선의 애국가를 크게 틀어났는데 저는 조선의 애국가가 그렇게 멋지고 가슴을 울리는 노래인줄 전에는 미처 몰랐었습니다. 그 후 노선생님은 조선을 가셔서 보고 느끼고 사람들을 만났던 이야기를 자주 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식당종업원을 비롯한 노동자들이 그렇게 지식이 많고, 고위급일 수록 일을 많이 해서
- 이전글장편소설 푸른산악 41 (마지막 회) 20.05.29
- 다음글장편소설 푸른산악 40 20.05.28
댓글목록
강산님의 댓글
강산 작성일
(위에서 계속)
고위급일 수록 일을 많이 해서 손이 더 거칠다면서 자본주의와 전혀 다른 말씀을 감동적으로 들려 주시곤 하셨습니다.
당시 종편방송에서 시리즈로 선생님의 뭣을 깐다는 TV를 보고 너무나 소름끼치는 언사와 막말에 대해 제가 너무 분개하여 ‘이렇게 끔찍한 막말을 하는데도 선생님은 화가 나지 않아요?’ 라고 여쭈어 보니 너털웃음을 지으셨지요. 수십년간 빨갱이 마녀사냥 매도에 이골이 나셨고 이젠 그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식이었습니다.
나는 그 매국노들의 그행태를 보고 너무 소름이 돋아 참을 수 없는 분노로 글을 쓴적이 있었어요.
또한, 그 당시 태극기 부대가 선생님 집앞까지 모여와서 “빨갱이”라며 성토를 할때, 선생님은 시끄럽게 떠드는 것은 괜찮은데 이층에 있는 딸과 와이프가 들을까봐 그것이 두렵다 하셨지요. 사랑하는 사람들이 상처를 받는 것이 가장 마음 아프다 하셨습니다.
하루는 한밤이 되어 노선생님이 전화를 하시어 “축하합니다” 라고 해서 “왜요?” 라고 하니, 종편방송에서 신은미씨가 한국에서 이곳으로 귀국하는날 매국노들의 태러를 걱정해서 내가 LA 공항에 나갔었는데, 종편방송이 “친북”인 나를 포착했다면서 빨간색의 핀포인트로 동그라미 까지 그려가며 나의 이름을 말하는 방송했다고 말씀하셨지요.
엉뚱한 사람을 나로 착각해 동그라미까지 그리는 것도 우습지만 형편없는 나를 그렇게 높여주니 고맙다고 말씀드렸더니, 노선생님은 내가 놀랄까바 전화를 하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선생님의 정열과 열정을 따라갈 사람은 아마 이 세상에 드물것입니다. 저희부부는 동에 번쩍 서에 번쩍 행동하시는 선생님의 에너지와 그 열정에 대해 여러차례 ‘저런 힘이 어디서 나오지?‘ 라며 찬사를 한적이 있습니다. 노선생님은 통일에 대한 열정뿐아니라 주위 분들이 어려움에 처해있을때에도 발벗고 나서서 혼심을 다하여 돕거나 문제들을 해결해주시곤 했지요.
노선생님은 또한 민족통신을 이어갈 젊은이들을 양성하기 위해 참으로 많은 노력을 기울이셨습니다.
정치적 견해차이로 제가 여러차례 선생님께 언성을 높여 언쟁했었고, 또 다른 요인으로 민족통신 20 주년 기념식때 참석하지 못했는데, 기념식이 끝난 다음날인가 그 다음날인가 갤러리아 마켓 빵가게에서 우연히 노선생님과 마주쳐 서로가 놀랐습니다. 노선생님은 다른 주에서 온 몇분의 동지들과 함께 기념식을 마친후 떠나기전 갤러리아 음식백화점에서 식사를 하러 오셨다가 그들이 기다리는 동안 빵집에 커피를 사러 오셨던 것입니다. 저를 보시고 반가워 하시면서 “내가 이제 우버 택시를 해서 돈을 많이 벌으니까, 이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고급음식을 살께” 라고 하셨지요. 선생님의 따뜻한 말씀에 기념식에 참석하지 못한 나의 죄송한 마음까지 다 녹여주셨습니다.
취재차 조선에 다녀오실때 마다 제가 술을 좋아한다고 각종 술을 비롯하여 여러가지 선물을 구해와서 주시곤 하셨습니다. 지금도 조그마한 액자에 담은 김정일 위원장님과 김대중 전대통령과 악수하는 우편사진, 그리고 김정일 위원장과 노무현 전대통령이 악수하는 우편사진들이 있는 두 액자가 지금도 저의 책장에 나란히 놓여있습니다.
트럼프가 조선방문을 뚜두려 막았어도 요행을 바라고 중국에 가셨지만 결국 조선에 들어갈 수 없어 대신 중국의 항일혁명지를 답사하시면서 중국에서 사오신 차를 아직도 제가 간직하고 있답니다.
노선생님께서 생일을 누가 물으면 '광주민주항쟁이 있던 5월 18일'이라고 하신 말씀이 저에게 더 동질감을 가지게 했습니다. 저도 5.18 이 새롭게 태어난 날이거든요.
남녘동포들에게 조선에 대한 진실을 알리기 위해 북녘을 75번이나 가셔서 수많은 취재를 해오신 업적들은 후세에 길이 길이 간직될 것입니다.
70년이 넘는 분단의 조국에서 남녘은 지금도 빨갱이 사냥이 한창인데, 이전의 더우더 살벌하고 험란하고 어려운 고난의 시절때부터 남들이 감히 할 수 없는 통일의 기초를 이미 마련해 주셨습니다. 조선을 바로 알리기 위해 제작한 수많은 동영상들과 글들은 후세대들에게 영원히 값진 보석으로 빛을 발할 것입니다.
선생님과의 쌓여진 추억거리가 너무 방대하기에 이 지면의 한장으로 일일히 다 말할 수 없지요.
통일의 일꾼인 선생님을 잃은 것이 우리민족에게 크나큰 손실이지만 그동안의 이루신 선생님의 헌신과 땀, 공헌, 업적들은 어마어마 합니다.
노선생님,
자신보다 더 사랑하시는 손세영 선생님, 김백호 선생님, 강산 선생님, 리동백 선생님이 계시니,
이제 그 고통의 멍에 다 내려 놓으시고 편히 쉬십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