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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소설 빛나는 아침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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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강산
댓글 0건 조회 4,618회 작성일 20-06-22 06: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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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저는 여기 기사로 있는 원시범이라고 합니다.》

《오! 당신이였군그래.》 오기섭은 손을 잡아흔들며 원시범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평양서 잠간 만난적이 있었지. 거리바닥에서 탁상공론을 하는것보다 이렇게 기름내가 풍기는데서 만나니 얼마나 좋소. 하하하, 반갑소.》

오기섭은 10년가까이나 나이가 우이라는 점도 있었지만 그보다는 로동자풍으로 너나들이의 반말투가 더 친근감을 준다고 생각한 모양이다.

방 한복판에 놓인 작업대에는 각종 설계도면이 한벌 널려있었다. 도면이 널린 작업대 한쪽옆에는 밥먹던 그릇을 거두지 못하고 그대로 밀어놓았다.

방안을 두릿두릿 살피고있던 오기섭은 뒤짐을 진채 밥그릇 있는데로 다가가더니 고개를 끄덕끄덕하였다.

《고생하누만 기사선생! 당신네야 우리와 달라서 이렇게 현장에서 김치만 씹으면서 일을 해야 할 처지가 아닌데.》

그는 한쪽눈을 슬쩍 감으면서 능청스럽게 원시범을 쳐다보았다. 원시범이 게면쩍은 웃음을 짓는것을 보자 오기섭은 다시 《이런 생활에 익숙될수 있을가? 하루이틀도 아니고 우리 프로레타리아는 굶지만 않으면 고작이라고 생각하는데말이요. 어쨌거나 감동이 되오. 참고 견딥시다. 우린 당신들을 믿소.》라고 하였다.

의자를 권했지만 거기에는 앉지 않고 오기섭은 창가로 다가가더니 《여보, 기사선생!》하고 연기가 나지 않는 카바이드굴뚝을 가리키면서 롱담을 하였다. 《당신이 여기 있는데 왜 굴뚝에서는 연기 한고치 볼수 없소? 마치 어느 절당에라도 온것 같군 그래.》

《지금 복구공사를 설계하는중입니다.》

원시범은 역시 어색하게 웃어보이며 현재 공장실태를 설명하기 위해 한쪽벽에 붙인 공장전경도로 가까이 다가갔다.

하지만 오기섭은 그쪽은 거들떠보지도 않고 자기 하던 말만 계속하였다.

《방금 우리는 도당에서 이곳 흥남지구 공장실태를 어떻게 수습하겠는가 토의를 하고 내려오는중이요.》

《그러면 공장에 대한 설명을 들으시고…》

오기섭은 손을 흔들어 원시범의 말을 중단시켰다.

《여보, 백문이 불여일견이란 말이 있지 않소. 나갑시다.》

일행은 공장구내를 걷게 되였다. 원시범은 앞질러나가면서 생산공정을 하나하나 설명하였다.

그는 현대공업에서 화학공업이 차지하는 위치라든가 또는 여기에 어떤 설비와 공정들이 준비되여있어야 하는데 현 실태는 어떠하고 부족점은 무엇이며 앞으로의 전망은 어떠한가에 대해서 요령있고 간결하게 리해시키였다.

염산직장에 이르렀다. 탕크가 무너져 류산이 흩어지고 냄새가 코를 베가는것 같았다.

다음은 소다직장쪽으로 건너갔다. 오기섭은 뜻밖에도 소다생산공정에 관심을 많이 가지고있었다. 같이 온 박동무의 귀띔에 의하면 원시범이라는 기사가 와서 다른것은 뒤로 미루고 가성소다만은 인차 생산에 들어갈수 있도록 힘을 넣고있다는것이다.

결국 그것을 통해 원시범은 자기 능력을 시위해볼 속심이 있는것 같다고 했다. 그러나 소다직장의 복구상태는 아직 말이 아니였다. 탕크들을 해체해놓고 부분품이 없어 조립하지 못한채 버려두었으며 여기저기 배관들도 한심하게 이그러진채로 있었다.

《음! 그렇소.》 오기섭은 원시범의 연설을 듣고나서 침울한 낯을 지었다. 《배관이 누더기라! 왜놈들이 만신창을 만들었다. 그럼직하오. 그럴수 있겠지.》

그의 기분은 완전히 달라졌다. 억지로라도 호의를 가지고 대해보려던 최초의 의도는 자취없이 무너지기 시작하였다.

《이쯤하면 언제 제품을 보게 되오.》

《3개월은 걸립니다. 그것도 련관된 공정들에서 특별한 사고가 없는 조건에서말입니다.》

《3개월! 그것도 조건부라.》

입에 수건을 댄채 말하면서 도리머리를 저었다. 밖으로 나온 오기섭은 두팔을 쩍 벌리며 원시범을 향해 소리쳤다.

《완전히 페허요. 수라장을 방불케 하오.》

수건으로 입을 막았지만 인차 재채기가 났다. 다음은 카바이드로쪽으로 발길을 돌리였다. 한참동안이나 기침을 하고난 오기섭은 제풀에 화를 내며 그만하자고 하였다.

《이러다간 심장이 멎겠소. 동무들, 보시오. 일제란 바로 이렇소. 자본주의는 이런데서 조선로동자를 부려먹었소. 말그대로 마소와 같이, 그런후에 이 모양으로 파괴하고 도망쳤소. 처참하오. 누가 이렇게 했는가. 어느놈이! 우리는 이 실태를 가지고 로동자들을 불러일으켜야 한단말이요. 다시는 제국주의노예가 되여서는 안된다고 말이요. 바로 이렇기때문에 우리는 <공장은 로동자에게로!>라는 슬로간을 제기하는거요.》

오기섭은 눈물이 글썽해서 숨을 죽인 공장들을 이윽토록 바라보고있었다. 가슴을 움켜쥔 그는 몸을 와들와들 떨었다. 일제에 대한 증오가 온몸에 굽이쳐흘렀던것이다.

원시범은 온몸이 싸늘하게 식어드는것을 가까스로 참았다.

《누가 이렇게 했는가!》고 웨칠 때 오기섭은 원시범을 쳐다보았는데 그 비수같은 눈길에는 《당신도 여기에 가담했소!》하는 기색이 력력했다.

《기사선생!》하고 오기섭은 약간 음울한 시선으로 원시범을 쳐다보면서 물었다. 《언제면 이것을 다 복구해낼수 있소?》

《그건 해봐야 압니다. 지금부터 본격적으로 추진해서 완전히 정상조업을 하자면 한 3년 걸릴수 있습니다.》

《뭐요, 3년》 시선을 곤두세우면서 손을 내흔들었다. 《그건 칠성판에 오른 다음에 약을 주겠다는 소리와 같지 않소. 당신은 프로레타리아적으로 사고하는 방식을 배워야겠소. 고타강령비판에서 마르크스가 어떻게 말했는지 아오. 공산주의는 각자는 능력에 따라 일하고 각자는 수요에 따라 소비하게 된다고 했소. 그러자면 공업이 고도로 발전해서 물질적부가 폭포처럼 쏟아져야 한다고 했소. 그런데 당신 말대로 하면 언제 머리를 들겠는가. 하늘을 봐야 별을 딸거 아니요.》

원시범은 대답이 없었다. 굳어진 원시범의 표정은 긍정도 아니고 부정도 아닌 랭랭한것이였다. 역시 오기섭은 감각이 예민했기때문에 원시범의 그런 속심을 능히 간파할수 있었다. 평양에서 첫 대면을 했을 때 한껏 비꼬아붙였던 원시범의 대답이 얼핏 떠올랐다. 그렇게 되자 온몸에 사품치던 일제에 대한 반감이 원시범에게 쏠리게 되였다. 결국 이런자들이 흥남에서처럼 로를 폭파하는데로까지 미쳐갈수 있을것이라고 생각하였다.

《기사선생! 잘 들으시오. 우리 프로레타리아는 그렇게 완만한것을 좋아하지 않을거요. 동시에 우리 당도 그것을 허용하지 않을것이고. 언젠가 당신이 말한대로 우리는 위를 비워두고 살아가는 방식을 아직 습득하지 못했소.》

참을성을 가지고 온화하게 하는 말이였지만 원시범에게는 대단히 위압적으로 느껴졌다. 그러나 원시범은 침묵을 지킬뿐 말이 없었다. 공산당본부의 요직에 있다는 오기섭의 말이고보면 그 배경에는 어떤 보루가 준비되여있겠는가를 알기 어렵지 않은것이다.

《그런데 당신은 어느 줄이요?》

《네?》

원시범은 당황하였다. 기습해오는 시선에 질린것이다.

《평양에 있는 최준걸의 줄이 옳지?》

《최준걸의 줄이요?》

원시범은 얼떠름해졌다.

《모르는척하지 마오. 성대를 나온 최준걸을 당신네는 만나지 않았소. 여기 온것두 최준걸의 주선이 있은거구. 하긴 뭐 그자체야 나쁠것이 없지. 그러나 어째서 한결같이 당신네들은 우리 일을 망치려드는가말이요. 철도에 있다는 한 무엇인가 하는 사람두 쓸모가 없구 흥남에 간 강병철이는 더 한심하구. 강선의 양춘만은 오다가 도망치구. 이것들이 과연 우연한 일치겠는가. 가만 보면 원시범선생두 우리를 곱게 보지 않거든. 당신이 여기 와서 해놓은게 도대체 뭐가 있소. 난 그래두 단 한개 공정이라도 돌아가는것을 보는가 했댔소. 그런데 가슴이 찢긴단말이요. 솔직히 말하면 우리 프로레타리아에게는 아직 순진성이 많소. 당신네들같은 사람들에게서 무엇인가를 기대하고 요행수를 바라는것이 있거든. 그러나 일단 그것이 우롱당하고있다는것을 알게 되면 분노한단말이요, 알겠소? 언제까지나 관용만 가지고 대하지 않아.》

고개를 떨군채 땅바닥만 들여다보고있던 원시범은 등골에서 랭수가 쭉 흐르는것을 감각하였다. 그와 함께 목구멍으로 올리뻗치는 몇마디 말이 있었다. 《정 그렇다면 그만둡시다. 우리는 먹을것이 없거나 누울 자리가 없어 직업을 구하자는것이 아니요. 결국 당신네는 우리를 친일분자의 딱지를 붙여 내몰자는거지요. 아니 내모는것이기는 한데 우리 스스로 물러가는것으로 하자는거지요.》

그러나 그는 혀를 깨물면서 참았다.

원시범이로서는 이때 자기자신에 대해서는 어떤 험구도 견디여낼수 있었다. 그러나 《강병철은 더 한심하구.》하는 표현에 그는 커다란 충격을 일으켰던것이다. 그에게 과연 어떤 일이 생겼단말인가. 강병철은 자기 몸을 부서뜨려서라도 5대공장을 조업해보려고 뛰여다니고있지 않는가.

한편 오기섭은 맥이 빠졌다. 그쯤하면 원시범이 자기 속심을 드러내는 변명이나 반발이 있을것 같은데 전혀 그렇지 않다. 그렇게 되고보니 인간으로서는 매우 선량해보이기까지 하였다.

《원시범선생! 피차 정신을 차립시다. 가만보면 당신네는 참말 사람들은 좋은데…》

계속해서 그는 《사람들은 좋은데 그의 계급적처지와 일제에게 복무한 죄악때문에 어차피 저쪽으로 따라가기 마련이요.》라는 말이 목구멍에까지 올라왔지만 끝내 그것은 내뱉지 않았다. 다만 그는 고개를 들어 연기가 나지 않는 카바이드로굴뚝을 막연하게 쳐다볼뿐이였다.

(현실은 이렇다. 우리가 인테리를 아무리 귀히 여기고 아량있게 포섭하자고 해도 그들은 우리에게 주는것이 아무것도 없지 않은가. 반대로 그들은 우리 발판을 쓸면서 미소를 짓고 조롱하고있다. 3년… 그것은 우리더러 포기하라는 말이다. 강병철, 그도 역시 리연수의 말이 옳을것이다. 여기를 놓고 미루어보건대…)



6

 

원시범은 백추화를 겨우 얼려내였다. 그리하여 낮차로 평양으로 올려보내고 잠간 공장에 들렸다가 인차 흥남쪽으로 나가는 차를 타기 위해 다시 역으로 나왔다. 백추화의 발걸음을 돌려세우기 위해 그간 원시범은 많은 속을 썩이였다.

백추화가 도착하는 날 원시범은 《왜 왔소?》하고 물었다. 처음에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더니 그다음번에는 《내가 곁에 있으면 안돼요?》하고 반문하더니 후에는 《애정은 거리에 비례한다》고 어느책에서 읽은것을 내대였다. 원시범은 백추화의 심정에 리해를 보내면서도 아직 안정되지 못한 생활파도속에 그를 끌어들여 자기 무게를 배로 불구고싶지 않았던것이다. 더구나 오기섭을 만나고나니 한시바삐 짐을 덜어야겠다고 생각하였다. 대양을 건느려던 배는 뭍을 떠나자마자 폭풍우의 징조를 보게 된것이다. 서둘러서 짐을 덜어야 했다. 그는 지금 강병철을 만나기 위해 가는 길이였다. 제낀옷에 밤색잠바를 덧입은 그는 홈을 왔다갔다하면서 강병철이 행처를 여러모로 생각해보았다.

비료공장 기술연구과에 전화를 걸면 제련소에 나가있을것이라고 하였고 제련소에 전화를 하면 무뚝뚝한 공장장이 그런 사람을 자기는 알지 못한다고 쓰겁게 대답하였다. 틀림없이 무슨 연고가 있는것 같았다. 원시범은 층계에 올라 사람들틈에 끼워섰다. 차창에 얼굴을 내대고 이제 만나게 될 강병철에 대해서 줄곧 생각하였다. 그가 알고있는 강병철은 전기와 강철에 미친 사람으로서 너무 고지식하고 림기응변이 없는 말그대로 《말뚝》같은 인간이였다. 때문에 그는 항상 옆에 누가 있어서 키를 잡아주거나 간섭을 해서야 약간씩 좌우에 주의를 돌리게 되는 일면적인 결함을 갖고있었다. 원시범이 지금 가고있는 이 걸음도 《강병철은 더 한심하구》를 해명하기 위해서였다. 특히는 며칠사이에 본궁에서 자기가 체험하고있는 시답지 않은, 지어 위험하기까지 한 현실을 놓고 의논도 해보아야 하였다.

돌이켜보면 얼마전에 강병철과 헤여진후 원시범은 동시에 두개의 고민거리를 안게 되였었다. 첫째는 공장의 설비상태가 한심하다 할 정도로 파괴되고 공칭수명이 초과된것이며 따라서 조업을 시작한다해도 사고만 련발하고 생산을 정상적으로 해낼수 없는것이였다. 둘째로는 백추화가 나타나 이제는 운명을 같이하자고 떼를 쓰는것이였다. 그런대로 원시범은 이 두개의 골치거리를 부둥켜안고 하루하루 시간을 보내였다. 매일 공장에서 밥을 날라다먹으면서 설비복구사업에 열중하였다. 강병철이와 토론한것도 있어서 조업이 가능한 공정부터 먼저 돌려가면서 점차 전반적공정이 움직이도록 하여야 하였다.

그러나 공장의 기술상태는 예상했던것보다 더 막연하였다. 특히는 염산계통의 배관들이 거의나 성한데가 없이 구멍이 뚫어졌거나 이제 곧 뚫어질 상태에 있었다. 카바이드계통은 더 한심하였다. 전쟁기간에 한번도 보수작업을 하지 않은 후과였다. 이미 패망을 예견한 기업주는 일전 한푼 투자를 하지 않고 생산만 강행적으로 내밀었던것이다. 원시범은 곧 기술조사대를 무어가지고 실태를 료해하는 한편 급한 공정부터 수리작업에 착수하였다. 그럭저럭 복구작업이 진척되고있는데 어제 문득 오기섭이 나타나 원시범의 가슴을 휘저어놓은것이였다.

그는 창밖을 내다보면서 오기섭의 인상을 되새겨보았다. 매우 세련되고 원칙적이며 견결한것 같긴한데 총체적인 인상은 회의적인 느낌밖에 자아내는것이 없었다. 원시범은 목덜미에 달라붙은 징그러운것을 털어버리듯 몸서리를 치고나서 차창에서 고개를 돌리였다.

흥남지구인민공장 사무실에 찾아들어가니 강병철은 며칠째 특수합금강을 생산하는 제련소에 나가 붙어있다고 하였다.

그는 합금로직장으로 찾아들어갔다.

페허처럼 스산하고 고요하였다. 당직자령감의 불평조의 말에 의하면 사람은 무척 좋은것 같은데 그 속심이 고약해서 자기 신세를 제손으로 망치고있다고 하였다.

《귀통을 쳐도 정신이 들지 않는 바보요.》

하고 최한덕은 어느 하나도 불을 지피는데가 없는 로들을 서글픈 눈으로 쳐다보면서 정 만나고싶으면 공장울타리밖에 있는 보안서에 가보라고 하였다. 청천벽력이였다. 강병철에게 과연 무슨 일이 있었는가?

원시범은 떨리는 다리를 가까스로 옮겨짚어 마침내 보안서에 찾아들어갔다.

몇분후에 강병철이 보안서원의 안내로 원시범이 있는 방으로 들어왔다. 강병철은 몰라보리만큼 수척해졌고 벽을 짚고야 겨우 발을 옮겨놓는 형편이였다. 서로 놀랍게 마주볼뿐 손도 마주잡지 못한다.

《서로 친한 사이같은데 천천히 이야기를 나누시오.》하고나서 보안서원은 방에서 나갔다.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인가?》

원시범이 처량한 목소리로 첫마디를 떼였다.

《왜 뭐가 어쨌는가? 난 뭐 그저 그렇네. 보는바와 같이 운명은 정확하게 제 궤도를 굴러가고있는거니까.》

순간 원시범의 가슴속에서는 피가 뿌지지 끓어올랐다. 너무나 태연해하는것이 더 가슴을 죄였다. 이런 경우에는 땅이 꺼지게 한탄이나 후회를 하든지 그 누구를 저주하면서 눈물이라도 보여야 하는것이 아닌가. 8. 15후 이날까지 줄곧 내 나라의 공업을 일궈세우는데 한몫 끼워보았으면 죽어도 원이 없겠다던 불덩이같은 소망은 어데로 가고 지금 이런 못난 꼴이 되였단말인가.

《그래 로를 고의적으로 폭파시켰다는것이 사실인가?》

《사실이네.》

《야하다에서 했다는것도 사실이구?》

《물론 사실이네.》

《그렇다면 자넨 어떤 인간인가?》

《어떤 인간인가구? 그거야 자네가 보고있는 바로 그런거지 다른것이 또 있는가?》

너무나 신중하고 운명적인것이 그렇게도 헐하게 사색을 거치지 않고 훌훌 던져지는데는 아연해지지 않을수 없었다. 당직자령감이 말하던 바보가 아니면 극악한 반동일것이라고 하던 말이 떠올랐다. 그렇다면 나는 여직 어떤 강병철을 보아왔고 서로 친우로 사귀여왔는가. 38°선, 운명의 갈림길이라고 할수 있는 지점에서 말없이 손을 잡고 북쪽으로 첫걸음을 내뗄 때 그것이 진심이 아니였단말인가. 순박하고 고집이 있고 한번 결심하면 그것을 꺾거나 휘여낼수 없던 그 지조, 그것들은 모두 어떤 처세술에 의해 위장된것이였던가. 오만가지 의문이 원시범의 뇌리에 떠돌아치면서 사람을 미쳐나게 할 지경으로 휘둘러놓았다. 걸상 하나를 사이에 두고 마주앉은 강병철에게 묻고싶은것이 하도 많아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하지만 담배만 게걸스럽게 빨고있는 강병철은 그 모든것을 알려고 하지도 말며 알 필요도 없다는 기분으로 완전히 체념에 빠져있었다.

《그것들이 모두 사실이라고 한다면 강병철은 과연 어떤 인간인가 생각해봤나?》

《생각? 강병철이 어떤 인간인가. 그건 알아 뭘하나. 모두다 운명의 섭리에 의해 처리될것인데.》

담배를 3대째 붙여물고 창밖을 망연하게 내다보고있던 강병철의 눈굽에서 송진같이 진득한 눈물이 솟아올랐다.

그는 이 보안서에 닷새동안 갇혀있으면서 자기 한생을 수십번 더듬어보았다. 죄악도 있었고 선한것도 있었다. 인간이 가질수 있는, 인간이 저지를수 있는 온갖것을 다 체험했었다. 그러나 이제는 그 모든것이 허무하고 부질없는것이였다.

인간의 불행은 자기 앞날을 한치도 내다볼수 없는것이며 특히는 희망을 못가졌거나 잃어버린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그보다 더 처참하고 절망적인것은 인간이 살아가는데 있어서 자기의 정신적지탱점을 못가지는것이라고 그는 생각하고있었다. 이제 와보면 그는 여직 그것이 없었다. 지탱점이 없이 살려고 무모하게 허덕인 자기를 비로소 이때에 발견했던것이다. 이렇게 되자 마치 그는 줄이 끊어진 연처럼 허허공간에 떠서 너풀거리는 자기자신을 볼수 있었고 무엇으로써도 그 운명을 구원해낼수 없다는것을 깨달았다. 때문에 그는 사리를 캐고 진실을 밝히기전에 우선 이 리성의 공간을 메워낼 재간이 없었다. 그래 모든것을 포기하고 체념해버리고말았었다.

《시범이! 날 찾아준건 참말 감사하네. 매우 반갑네. 이런 때 만나다니. 그러나 후날에 가서 이 상봉이 더 추억에 남을수 있을지도 몰라. 부탁이 있네. 뭐냐하면 나때문에 걱정을 하지 말라는거네. 이제 모든것이 순조롭게 될테니까. 걱정할 필요가 없네. 그곳 일은 어떤가. 앞이 좀 내다보이나?》

이렇게 되자 원시범의 팽팽해졌던 감정도 어느 정도 누그러져서 천연히 대화를 하게 되였다.

《앞이 보이는가구? 바늘구멍만한것이 보인다고나 할가.》

강병철은 덕지가 앉은 입술을 혀끝으로 추기면서 담배끝에서 연기가 몰몰 피여오르는것을 물끄러미 바라보고있다. 그러다가 그는 고개를 들더니 우정 이마주름을 펴면서 쳐다본다.

《다행이구만. 그래도 앞이 보인다는것이 얼마나 좋은가. 든든히 붙잡게.》

《난 자네를 보면서 지금 나의 래일을 보는것 같네. 지내 비관한다고 할테지만 감정은 그렇게 호소하고있네. 자네가 평양본정에서 장군님을 만나뵙고 토론했다는 그 내용이 이러루한것이였다고 한것같은데 그걸 가지고 해명할 방도는 없겠는가.》

강병철은 흠칫 몸을 일으키며 낯을 다시 찡그리였다. 아픈데를 헤집는것 같은 고통이 있는 모양이다.

《자네 참 기억력도 좋구만.》 그러고는 어이없이 웃고있다. 그러나 원시범의 가슴에서는 성에가 녹을만한 온기마저 느낄수 없었다. 강병철은 안경을 벗어 탁자우에 놓고나서 침착하게 자기 론거를 세웠다.

《해명할수가 있네. 그때 내가 그에 대해서 물었댔으니까. 실컷 써먹다가 앞으로 무슨 언질을 걸어 인테리를 숙청하지 않겠는가고 말이지. 한데 시범이! 내 말 좀 들어보라구. 그때 그것은 옳은것이였고 사실상 나는 거기서 힘을 얻었댔네. 내가 장군님한테 매혹되였고 힘을 얻어 여기로 뛰여온걸 자네도 알지 않나. 하지만 그것은 아득히 올려다보이는 리론이고 현실은 눈앞에서 벌어지네. 모든것을 건건마다 그렇게 송사하고야 어떻게 사람이 살아갈수가 있겠나. 솔직히 말하면 야하다에서 나의 행위는 권력앞에서 굴종한것이였네. 그러면서도 나는 량심을 간직하고있었네. 조선사람이기때문에 그런 굴욕을 당해야 했단말일세. 그래 나는 죽으면 같이 죽자고 나섰던것이네. 내 이 잔등에 난 상처는 그것을 말해주고있네. 그러나 내가 왜 왜놈들에게 항거하고 목숨을 빼앗길지언정 거부하지 못했는가. 그것은 나의 죄악일세. 난 그렇게는 못했어. 난 혁명가가 아니였고 순전히 일본놈들이 써먹기에 안성맞춤한 기술자였으니까. 그런데 이것보라구. 이번에는 사정이 다르네. 이번에는 권력에 순종한것이 아니라 나의 량심과 의무에 순종한것이네. 그렇기때문에 눈물이 나는거야. 내 심정을 알만한가?》

무슨 말을 더 하려는것 같아 기다렸지만 그는 끝내 뒤를 이어대지 않았다.

《그런걸 왜 기탄없이 말하지 않는가!》

원시범은 우들우들 몸을 떨며 항의해나선다.

《시범이, 그건 더 못할 일이야. 량심을 받아주지 않는 운명, 그것에 항의해서 무슨 소용이 있는가. 또 오늘은 그렇게 해명을 한다쳐도 앞날에는 어떻게 하는가. 과학은 단 한번밖에 로가 폭발하지 않는다고 담보하지 않는것이 아닌가. 때문에 나는 누구를 원망하지도 않고 그 어떤 오해나 몰리해를 설명하고도싶지 않네. 오직 내가 갈 길은 운명에 순종하는 그 길밖에 없어. 나는 믿을데가 없으니까. 생을 어디에 의존하는가말일세.》

원시범은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마치 몽유병환자처럼 모든것이 불명료하고 환각속에 있는듯싶었다. 그러면서 가슴 한구석에 차디찬 얼음덩이가 자리잡는것을 의식하였다. 결국 이렇게 되는구나. 그렇다면 우리가 희망하였고 락관적으로 보았던것은 여기에 아무것도 없지 않는가. 이제 강병철은 부유한 가정출신이라는 사실이 드러날것이며 그렇게 되면 부유한 가정 그것이 친일적 행동과 쉽사리 융합되고 련결시켜낼수 있을것이며 그로 해서 《오, 케, 에스》가 말한것처럼 프로레타리아의 무자비한 처리가 뒤따를것이다. 결국 강병철은 내앞에서마저 이 진실을 말하기 두려워 지금 저렇게 운명에 대한 순종이요 뭐요 하고 모호한 표현으로 자기자신과 나를 속이고있는것이다. 이렇게까지 사색이 뻗어나가자 원시범은 더욱더 절박하게 목전의 사태를 자신의 문제로 받아안게 되였다. 그렇지만 그는 아직 실망하지 않았다. 이제 급히 평양에 올라가 최준걸을 만나 실태를 알려주고 또 그들을 통해서 김책을 만날것이다. 그러면 해결될 길이 전혀 없지는 않을것이다.

《걱정 말게. 우리가 빠져나갈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으니까. 거듭 말하지만 우선 첫째로는 사건에 대한 기술적해명을 하면 자네한테 그닥 큰 죄가 없다는것을 쉽게 알수 있단말일세. 야하다의 폭발도 그렇고 이번의 폭발도 큰 문제는 없을건 뻔하네. 그다음 또 하나 우리에게는 그렇게 구차하게 직업의 노예가 되지 않고도 살아갈만한 수단이 있다는거네. 무엇때문에 우리가 고통을 겪으면서까지도 강철이요 비료요 건국이요 하고 들떠 돌아가겠나. 백추화가 말한것처럼 일단 좀 물러나앉았다가 차츰 정세를 봐가며 행동할수도 있잖은가. 그리구 자네 거 내보기에는 지내 고민하는것 같은데 그러지 말아야겠네. 건강도 생각해야지. 우리가 여기 온것이 뭐 먹을것이 없거나 갈데가 없어 온게 아니지 않나. 무엇때문에 우리가 일변도로만 나가겠나. 지금은 <말뚝>이 아니라 바다에 뜬 배란말일세. 임의의 항로를 자유롭게 선택할수 있는 배말이네. 세상에야 목적에 도달하는 길이 하나뿐인가. 열갈래 백갈래 얼마든지 있지.》

태연하게 듣고만있던 강병철이 홱 고개를 돌리는데 그의 눈에서는 푸른 불이 번쩍하였다. 이쪽에서는 운명을 걸고 심각해있는데 너무나 소홀하게 대하기때문에 분격하지 않을수 없는것이다.

《내 이제 끝까지 해명하겠네. 자네한테 죄가 없다는것을 반드시 증명하고야말겠네!》

《그만둬. 난 누구의 도움이 필요없어!》

원시범은 그 길로 합숙에서 가방을 가져다준 다음 공장자치위원회 사무실로 찾아갔다. 평양에서 왔다는 파견원을 만나자면 한참동안 기다려야 하였다. 그는 마당 한켠에 무져놓은 벽돌장을 깔고앉아 담배를 피웠다. 연기가 뿌옇게 떠가고있는 벗나무사이로 몇해전까지 희망에 한껏 부풀어 나들던 교또대학 정문이 우렷이 떠올랐다. 고색이 창연한 옛일본의 수도중심인데 왼쪽에 치우쳤다고 해서 좌경구라고 부르는 거리에 대학이 자리잡고있었다. 벗나무와 참대, 소나무와 동백이 온 거리를 둘러싼 이 거리가 원시범의 희망을 끝없이 키워주었다. 여기서 세계최초의 합성섬유가 조선사람에 의해 발명되였다. 앞으로는 역시 화학의 시대가 도래할것만은 틀림없었다. 그는 전쟁이 아니였던들 하바드대학에 갔을것이였다. 거기서 세상사람들을 깜짝 놀래우는 고도도약을 할 결심이였다. 서울에 있던 아버지는 아들의 장래를 위해 포목상으로부터 염료염색계통으로 투자를 전환시켰으며 온 가문이 원시범을 지켜보게 되였을 때 공교롭게도 전쟁이 터졌다. 앞길에 장벽이 가로막히고 희망이 동강이 나자 그는 당분간 집에서 정세를 관망하고 재출발을 하자던것인데 어느새 4∼5년세월이 휘딱 지나가 해방이 되고 이제는 소다요 카바이드요 하는 화학제품을 내쏘는 배출구를 지켜보는 직업인이 되고만것이다. 그거나마 혼란된 정세속에서 주패장을 내대는것과 같은 운명도박을 하게 된것이였다.

원시범은 이런 식으로 보라빛후광에 조명되였던 지난날과 파고가 이만저만이 아닌 물결을 타고 올라선 지금의 처지를 대조하면서 담배 한갑을 다 태웠다. 그러다가 마침내 오기섭이와 파견원이 흥분된 얼굴로 들어오는 앞길을 막아서며 겸손하게 우선 머리를 깊숙이 숙여 인사부터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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