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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소설 빛나는 아침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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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강산
댓글 0건 조회 4,472회 작성일 20-06-15 13: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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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키가 늘씬한 양춘만은 등산용 배낭을 걸머지고 리화녀전이 저쪽에 바라보이는 정동 33번지 객주집을 떠나 서울역으로 나가고있었다. 8. 15직전에 해입었던 줄무늬의 등색 제낀옷은 볼모양이 없이 꼬깃꼬깃해졌고 에나메르트구두도 이제는 코가 허옇게 벗겨졌다. 발을 옮겨짚을 때마다 늦추 달린 배낭이 엉뎅이를 털썩털썩 때렸다. 고르롭지 못한 보도를 물끄러미 내려다보고있는 크지 않은 눈은 한껏 음울한 빛을 띠였다. 이따금씩 고개를 들어 앞을 가려보고는 황급히 목을 움츠리군 하였다. 그의 눈앞에는 석비레땅이 나타났다가는 콩크리트포장으로 바뀌기도 하고 그것이 지나면 다시 아스팔트를 다진 반반한 길이 나타나기도 하였다. 시야에 비친 그것들은 마치 얼룩진 그의 심리와 대칭을 이루고있는것 같아 어데를 디디든 불안하고 초조하였다.

밤새 그렇게도 깊이 궁냥하고 떠난 길이지만 정작 북으로 향하고보니 오금이 저려나기 시작하였다. 원래 그가 강선제강소를 뒤에 두고, 아니 제강소가 아니라 아릿다운 안해와 금덩이같이 귀한 첫아들 일웅이를 남겨두고 서울에 와서 첫번째 짜낸 안은 운명에 순종하여야겠다는 무저항적인 안이였다. 그러나 그것은 몇번 이리저리 사회라는 면판우에서 굴려보니 아무리 체념이라 하더라도 한생 그렇게 살수는 없는것이며 더구나 그 순종이 공산주의자들의 치하에서 이루어져야 한다고 생각하니 온몸에 서리가 내돋았다. 그는 공산주의에 대한 환상적인 공포도 있었지만 몇권의 책과 그 리념을 해석할만한 친구와 하루밤 론쟁을 벌린끝에 공산주의는 범접해서는 안될 페스트지구로 인정해버리고말았던것이다. 공산주의자들은 자기 리념때문에 부모나 자식과 절연하기를 서슴지 않으며 지어 살륙을 벌리는 경우도 있다 한다. 그토록 인간성, 인도주의와 담을 쌓은 싸늘한 인간들이 그 무슨 인간이 용납할만한 체제나 제도를 만들어낼수 있겠는가. 그래서 죽어도 북으로는 안간다고 벼르던 자기가 지금은 어디를 향해 걸어가고있는가. 그렇다고 이제 돌아서야 한단말인가.

《아!…》

그는 비명에 가까운 신음소리가 터져나오는것을 가까스로 참으며 터덜터덜 기계적으로 발을 내짚었다.

《가자, 가자, 이래도 막히고 저래도 막힌 신세에 이제 주저한들 살길이 열릴소냐. 내친 걸음이니 가놓고보자. 나도 모르겠다.》

입속으로 이렇게 내처 중얼거리며 걷느라니 어느덧 기운과 정신이 회복된듯싶었다.

어느사이에 《사리원려관》쪽으로 나가는 전차정류소에 이르렀다. 색날은 회색캡을 푹 눌러쓴 그는 경계하는 시선으로 몇명 안되는 정류소승객들을 훑어본후 다시 앞뒤를 살피였다. 웬일인지 이런 때에 민기환이 불쑥 나타날것 같은 위구심이 생겼기때문이다.

(북으로 돌아가는 나를 본다면 민기환이 뭐라고 할가.) 생각만 해도 오싹해진다.

양춘만이 민기환을 만난것은 서울에 도착해서 한달만이였다. 어느때를 막론하고 성급한것때문에 랑패본 일이 한번도 없었던 양춘만은 하루 한번씩 그것도 정확히 타산해서 선택한 대상인물들만을 잠간씩 만나보고는 노상 집에 들어앉아있었다. 그러던 어느날 비가 부실부실 내리는 저녁때 대문앞까지 대형포드가 바싹 붙어서더니 위풍이 당당한 신사가 하나 내렸다. 창경으로 내다보고있던 양춘만이 누가 온것 같다고 조카를 내보냈더니 인차 명함 1장을 들고 들어왔다.

《민기환 서울영어강습소 부소장. 전화번호 01423.》

양춘만은 마치 불타는 숯덩이라도 집어든것처럼 명함장을 이쪽저쪽으로 옮겨잡으며 어쩔줄을 몰라하였다. 도꾜에 가서 고학생들의 하숙을 경영한다더니 어찌된 일인가 하고 생각하는데 《양군 있나?》하고 이미전부터 귀에 익은 전형적인 남성저음이 울리였다.

미닫이를 열고 마루에 나서며 양춘만은 《민군이 어떻게…》하고 말꼬리를 흐리였다.

《그쯤 알아두게.》

민기환은 마당에 들어선 운전수에게 시간이 걸릴테니까 밤 11시부터 12시어간에 와보라고 하면서 짐칸에 실은 지함을 내놓으라고 하였다. 양춘만은 친구의 손을 놓지 않은채 방안으로 끌어들이였다. 그리고나서 그는 민감하게 친구의 아래우를 쭉 훑어 체취를 간취하려 했고 겸해 그 무게를 짐작해보았다. 원래 허풍기가 좀 있었는데 지금은 전혀 그런것을 느낄수 없고 오직 지나칠사한 틀차림이 다소 엿보일뿐이였다.

《여보게, 내가 양춘만때문에 얼마나 고심했는지 아나? 강선에 두번이나 사람을 띄웠고 또 이 서울장안에 있을만한데를 샅샅이 뒤졌네. 역시 자네는 령리할뿐더러 운수가 좋아. 하느님은 자네한테 변함없이 계속 자비와 은총을 베풀고있거든…》

민기환은 옷을 벗고 넥타이를 풀더니 잇대서 지함을 터치였다. 지함에는 여러가지의 술병과 통졸임이 들어있었다. 번쩍번쩍 윤이 나는 상표들에 무슨 샴팡 무슨 꼬냐크 등 꼬부랑글이 찍혀있었다.

《어찌된 일인가?》

양춘만이도 위압을 밀어제끼기 위해 태연해지려고 노력하면서 서재에 등을 대고 제빠듬히 앉았다.

《어째서라는것이 있는가. 민기환이 양춘만을 축하해서 한잔 마시자는거지.》

《축하?》

《그렇네. 축하네. 자네가 여기 서울에 왔다는 그자체가 축하를 받을만한 거사였네. 내 말의 뜻은 차츰 알게 될걸세. 자! 자네는 독한것부터 마시기를 좋아했지.》

민기환은 희고 포동포동한 손으로 단지형 꼬냐크병마개를 따더니 유리잔에 부었다.

《자!》

잔을 내들고 쳐다본다. 양춘만이도 잔을 내대는데 민기환은 점잖게 턱을 들면서 빙그레 웃었다. 어쨌든간에 얼마간의 번민을 가질수도 있고 요행수를 바랄수도 있어서 단숨에 잔을 쭉 비웠다. 연거퍼 잔이 오고갔다. 도수높은것을 자꾸 마시지만 양춘만은 전혀 정신이 흐려지는것을 느낄수 없었다. 오히려 더 초롱초롱해진다. 그 까닭은 전과는 딴판으로 된 민기환을 목전에 보기때문이였다. 원래 민기환은 다재다능하였고 언변도 좋았다. 대체로 면담을 시작해서 10분정도면 자기도 다 드러내놓고 남의것도 그만 못지 않게 뽑아내는 수완을 가진 그였다. 한데 1시간이 지나고 2시간이 지나는데도 명함에 적힌 직분외 아무것도 알수 없었다. 이따금 약간씩 내비친다는것은 《저쪽에서 좋아할것이네》라든가 《내가 그쪽 의사를 알아보지》하는 등인데 그것은 분명히 미군정계통의 모 대상을 념두에 둔다는것을 알수 있었다.

사실 그러하였다. 민기환의 모든것, 즉 사고, 행동, 목적, 수단은 전부 거기에 귀착되여있었다. 첫 대상은 서울대학 2호교사 구석방을 차지한 미군중좌 햄스이며 그것을 거쳐 그다음에는 미군정장관 아놀드소장이였다. 또 아놀드를 거쳐서는 동경에 주둔한 맥아더원수와 펜타곤이라는것이 명백하였다. 왜정때 동경에 있던 민기환은 일본군부의 정탐이였는데 서울에 건너와서 3일만인 9월 13일에 미군의 정보계통과 접선하게 되였다. 햄스와 관계를 가져서 한달이 되는 어느날 그는 교외로 실려나갔다. 가보니 제낀옷신사차림인 장신자가 손을 내밀었는데 그가 아놀드라고 하였다. 그는 한끼 식사나 같이하면서 얼굴이나 보아두자고 불렀다고 하였다. 주탁에 앉았을 때 아놀드는 며칠전에 만난 맥아더에 대한 인상을 많이 말하였다. 점령국 일본에 대한 일체 권한을 독차지한 맥아더는 다 망한가운데서 옹근 3일동안 자기, 군정장관을 위해 바쳤다고 하였다. 정치여담은 도간도간 끼였는데 맥아더의 관심사는 1주일동안 대일전쟁을 한 쏘련이 해수로 5년이나 희생을 무릅쓴 미국보다 몇배나 더 많은 령토를 차지했다는것을 거듭 상기시켰다고 한다. 군사에서는 미군이 승리했지만 외교에서는 쏘련이 승리했다. 때문에 이제 그것을 만회하자면 정보와 정탐전을 하는외 방법이 없다고 했다는것이다. 맥아더는 자주 자기를 쓰딸린과 대비하면서 자기가 애용하는 상아파이프는 500년전 아프리카 코끼리뼈인데 크레믈리것은 우랄산의 목제품이라고 했었다. 맥아더는 한잔 들고나서 《전쟁의 목적은 승리하는데 있다. 승리의 대용품은 없다》고 선자리에서 3번이나 되풀이하고나서 노래를 불렀는데 《로병은 죽지 않고 사라진다》라고 하는 웨스트포인트(륙군사관학교) 교가를 부르더라고 하였다. 맥아더는 아놀드를 문앞까지 바래주면서 조선이라는 한개 나라가 당신의 손안에 있소, 머리를 붙잡아 오오, 머리를, 오펜하이워나 아인슈타인과 같은 그런걸 말이요, 서울대학에 안무어라는 물리교수가 하나 있고 일본서 건너간 화학박사가 또 하나 있다는데 그걸 붙잡아 오오, 그걸 내앞에 가져오란말이요, 알겠소, 그와 함께 북측으로 쏠리는것은 무자비하게 없애치우시오, 그것만이 우리한테 혜택을 주니까 했다면서 아놀드는 맥아더를 로골적으로 숭배하였다. 그렇게 함으로써 민기환이 정신을 차릴수 없을만치 현혹시켰다. 그날밤부터 민기환은 아놀드의 지시를 받아물고 곧 행동에로 옮기기로 하였다.

민기환이 떠나올 때 아놀드는 현관에 세운 《포드》를 가리키면서 《이것은 당신거요. 서로 알게 된 기념으로 주겠소. 영예는 후하게 차례지오. 우리는 제사람한테는 린색하지 않소.》하고 어깨를 떠밀었었다.

어느덧 통금싸이렌이 울리였다. 양춘만이 벽시계를 쳐다보자 《이봐, 양군! 우리가 서로 만났는데 시간을 재서 뭘하나. 밤새워 이야기나 하세. 지금이 어느땐가. 지금 각도를 정하는데 따라 영영 사귀지 못하는 편차가 생길수 있어. 그러나 난 믿네. 양군이 38°선을 넘어 여기 서울에 제발로 왔다는 그자체가 영원한 평행을 그을수 있다는걸 의미하고도 남으니까. 그런 의미에서 또 한잔!》

양춘만은 점점 더 환상세계에 끌려들어가는것 같아 약간 불안한 감정이 솟아나기까지 하였다. 그렇지만 그 어떤 위험이나 공포를 자아낼만한것을 전혀 느낄수 없어서 그는 어중간한 기분에 계속 잠겨있었다. 얼마간 시간이 또 갔을 때 대문밖에서 자동차경적소리가 울리였다. 이미 예정했던 그 차가 온것 같았다.

《이쯤하고 난 가겠네.》

민기환은 옷을 집어들었다.

《못가네. 통금시간이 2시간이나 초과됐네.》

《통금? 난 그런데 구속받지 않는 사람이네. 알겠나.》

그는 2~3번이나 발을 헛짚고서야 겨우 구두를 찾아신었다.

《이사람 양춘만! 인생이란 참말 공교롭지. 이런 중요한 때 내가 양춘만을 생각해냈거든. 내 대상명단에 양춘만을 적어넣지.》

《명단이라는건 뭔가?》

《그런것이 있네. 첫 대상은 평양에 있는 서울대학 교수 안동권선생과 교포대학 리영기박사네. 차츰 자네도 그런 급에 끼우도록 내가 힘써보지. 다시 오겠네, 그래서 우리 인생행로의 각도를 확고히 정해보세.》 그는 비척거리며 마당을 걸어가다가 다시 돌아서서 고개를 끄덕이며 말하였다.

《양군, 우리 전도는 양양해. 자, 안녕히!》

역한 냄새를 확 풍기며 열려있는 포드안으로 그가 들어가자 빨간 꼬리등이 잠시동안에 골목으로 사라졌다.

양춘만은 그후에도 두번이나 그를 만났다. 의사소통이 거듭될수록 양춘만은 처음 만났을 때 엄청난 발언을 듣게 된것이 민기환의 그 어떤 조작이거나 정도이상 사실을 과장한것이 아니였다는것을 확신하게 되였다. 민기환의 출현은 크게 실망했던 양춘만에게 재생의 길을 틔워주었고 열정을 불어넣어주었다. 그런데 오늘은 그의 충고를 배반하고 북행의 길에 오른것이다.

《사리원려관》에 찾아가니 기다리고있던 박원식과 리만석이 환성을 지르며 달려나온다. 그중에서도 리만석의 얼굴을 보기가 매우 민망스러웠다. 아무때고 기회만 있으면 둘러메치고 밟아주고말겠다는 적의가 항시 로골적으로 어려있던 시꺼멓고 큰 그 눈이 지금에 와서는 대단히 선량하게 웃고있다.

(저것이 참말 지금현재의 속심그대로의 표정일가.)

하고 양춘만은 생각하였다. 사실이 그렇다면 무슨 리해관계에 기초한것인가. 기술에 대한 리용인가?

그러는 사이에 박원식은 친절하게 배낭을 벗기며 한대씩 피우고 역으로 나가보자고 하였다. 양춘만은 시키는대로 마루에 걸터앉아 담배를 피웠다. 리만석이 후하게 숙박비를 치르는 모양인지 려관주인은 다음에 와서도 꼭 들리라고 한다.

《우리 집에 들려 판을 벌리면 손해는 없습넨다. 잘하면 장땅도 나오디요.》

뚱뚱한 녀주인의 평안도사투리를 건성 들어넘기면서 양춘만은 둥글둥글 구름처럼 덩어리가 져서 멀어져가는 담배연기를 시름에 겨워 쳐다보고있다. 그 연기를 거쳐 저기 서울역으로 뻗은 저 길에 내가 들어설것이다. 거기에 일단 발을 들여놓으면 숙명이 어데로 끌고갈지 알수 없는것이다.

일행 셋은 경성역 대합실로 들어갔다. 밤을 거기서 밝히고 해가 뜰무렵에 그들은 북으로 달리는 차에 앉아있게 되였다.

양춘만은 《야미장사군》들속에 끼워 차창옆에 겨우 비집고 들어앉았다. 잡채에 잡채를 들버무려 휘저은듯한 서울거리, 그의 한가락을 뜯어가지고 렬차는 가는껏 가다보자는 식으로 개성을 향해 달리고있다. 서울이 차츰 멀어지고있다. 양춘만에게 있어서 서울은 매우 인상이 깊은곳이다. 룡강아버지는 항상 입버릇처럼 도시로 나가야 한다고 하였다. 평양보다 서울이 좋다고 하였다. 그래 재산을 점차 전환시켜 룡강땅을 서울거리의 점포로 바꾸었으며 몇해안으로 거처도 옮긴다고 했었다. 그러나 양춘만의 이번 걸음은 그런 보라색꿈에 취해있을수 없었으며 두달동안을 어떻게 흘러보냈는지 알수 없을만치 번민속에서 보냈다. 그렇기때문에 언젠가는 한번 서울구경을 톡톡히 하리라던 어렵지 않은 소망마저도 이룩할수 없었다. 때문에 그가 책에서 본 서울의 인상들은 그대로 하나의 지식으로 그냥 남아있게 되였다. 서울의 세가지 자랑, 삼각산의 절경, 한강의 장류, 세종대왕과 충무 리순신의 출생 그리고 세가지 치욕 유교편중의 한양조 500년, 비린내나는 500년간의 쇄국, 수십만의 피땀으로 이룩된 40리 둘레의 서울성곽 여기서 단 1대의 화살도 날려본적이 없는 무용지물 이런것들, 얼마간의 타당성이 있는지 어떤지 알수 없는 지식들이 독한 마음을 먹고 떠나가는 양춘만의 사색을 한동안 어지럽혀놓았다.

차창에 이마를 대고 번민하고있는 양춘만의 눈앞에는 착잡하게 얽힌 갖가지 생활들과 그 새짬으로 뻗은 무수한 길들이 내다보이였다. 그것은 인차 싫증이 나고 역겹기까지 하였다. 그러나 그를 항상 붙잡고 따라다니는 하나의 환영이 있었는데 그것은 안해와 아들의 얼굴이였다. 그것은 밤이고 낮이고 따라다니면서 자기의 일거일동을 지켜보고있었고 눈물이 가랑가랑한 눈길로 애무를 조르고있다. 사주팔자에 무자식일수도 있다는 점패를 보기좋게 반박이라도 하는것처럼 결혼후 5년간 꿈쩍 소식이 없던 안해가 덜컥 메주덩이같은 아들을 낳은것이 이제 잴잴 말을 번지게 된 아들 일웅이였다.

《일웅아. 너는 지금 어데 있느냐? 》

초들초들 마른 입술을 터치고 이런 혼자소리마저 내였다. 부르죠아인테리피줄이라고 어떤 처참한 지경에 몰아넣었을것이다. 틀림없이 살아남지 못했을것이다. 급성대장염에 걸려 머리가 불덩이같고 활활 설사를 하는것을 보고 떠났었다. 차라리 이것저것 앞날을 타산하지 말고 그대로 눌러앉아 숨지는 아이를 지켜 안해앞에서, 어린 넋앞에서 인간성을 저버리지 않은 아버지로나 남아있을걸 그랬다.

양춘만일행은 차에서 내린 그이튿날 자기와 비슷하게 차린 《야미장사군》과 한짝이 되여 38°선을 넘기로 하였다. 같은 양가라고 해서 말붙이기가 한결 수월했던 순천에 산다는 그는 천알들이 다이야찡 열병과 미군군복상의 10벌을 걸머졌는데 달밤을 리용해서 례성강물을 건너자고 했다. 그러자면 개성에서 서북방으로 올라가 려현에서 10리 상거한 례성강 여울을 건너야 했다. 별도 없는 캄캄한 밤길을 걸었다. 논밭을 꿰지르기도 하고 버들밭을 뭉개면서 나가기도 했다. 온몸이 사시나무 떨리듯했다. 춥기도 하지만 어느 순간에 어느쪽 탄알이 날아와 가냘픈 한목숨을 앗아갈지 모를 일이다.

양춘만은 물버들이 우거진 개장변에 엎드리여 뜨물속처럼 뿌연 앞을 내다보았다. 한 10m가량 앞서나가던 박원식이 별일 없다고 손짓을 한다. 먼저 순천장사군이 기여나가고 다음에 양춘만이 그리고 맨뒤가 리만석이였다. 물에 들어서니 칼로 에이는듯 물이 찼다. 잠시동안에 이가 떡떡 마주쳤다. 하지만 양춘만은 입술을 짓씹으면서 배허벅까지 올라오는 물을 건늬였다. 참으로 그것은 기적적이였다. 어떻게 되여 물속에 잠기지 않고 콩나물처럼 해말쑥한 다리가 몸체를 지탱했는지 부정맥이 심해서 항상 안나까의 도움에 의해서만 유지되였던 심장이 견디여냈는지 알수 없었다. 그가 압착을 느낀것은 불리한 자연이나 육체만이 아니고 앞에서 뒤에서 분명히 자기를 감시하고있는 두 인간의 시선이였다. 리만석은 언제나 그림자처럼 따라오며 배낭을 들어주기도 하고 엉치를 떠밀어주기도 하였다.

쑥대가 우거진 최뚝을 벌벌 기여 한 서너마장 나가니 야산밑에 오막살이집이 한채 있었다. 날이 샐녘인데 마당에서는 숱한 사람들이 웅성거렸다. 사람들의 말에 의하면 여기가 38°선이북의 첫 인가라고 하였다. 남으로 나가는 사람, 북으로 들어오는 사람들이 들리는 곳이였다.

양춘만은 허청간앞에 널린 벼짚을 깔고 털썩 누워버렸다. 온몸이 물에 젖고 손발이 까들어들어서 서있을수도 앉아있을수도 없었다. 이곳 사람들이 말하는 《38°선학질》이 온것이다. 사지가 떨리고 머리가 뗑하였다. 몇달전까지만 해도 아무런 거침도 없이 오가던곳인데 얄따요 포츠담이요 하는 어간에 문득 환상으로 생겨난 그 무슨 계선에 의해서 이렇게 죽음을 무릅써야 하는것이다. 양춘만은 극동에서 남으로 내리뻗은 하나의 크지 않은 반도가 둘로 갈라져서 이 모양이 되고 또한 그와 류사하게 토막이 난 자기 신세를 비웃기 위해 허허 하고 공간에 대고 입김을 내불었다.

오막살이 한채를 놓고 샘구멍에 송사리 모이듯한 여기서 하루 쉬고 이튿날 배천쪽으로 나가다가 방향을 꺾어 꼿꼿이 북쪽으로 올라갔다. 평산에서 차를 타자는것이다. 옹근 사흘동안 줄곧 걸어서 평산에 오니 거기도 역시 이때 어데서나 흔히 볼수 있는 그런 광경이 벌어지고있었다. 정거장근방에는 차손님이 한벌 널리였다. 려인숙에 들려 이틀을 묵고있는데 개천서 왔다는 장사군이 조용히 좀 만나자고 하였다. 그래 변소모퉁이에 따라갔더니 서울서 민기환이 보내서 왔다면서 50대의 령감이 양춘만이 옳은가고 물었다.

《그렇소. 내가 양춘만이요.》하고 그는 무뚝뚝하게 대답하였다.

《민선생이 왜 자기와 의논도 없이 그렇게 훌쩍 떠나는가고 나무람합디다. 끝까지 따라가서 직접 말을 전하라는거지요. 평산에서 만날수 없으면 평양까지라도 갔다오라는겁니다.》

《그래 용건은 뭡니까?》

가슴이 섬찍해나는 순간 신경질적으로 내쏘았다.

《민선생의 말이 가지 말아야 할 길을 간다는거지요. 이제라도 늦지 않았으니 돌아오라고 합니다. 공산주의자들은 당신을 붙잡아다가 재판을 해서 목을 달아매자고 한다는겁니다. 당신의 아들 일웅이는 당신을 잡아오기 위한 인질로 지금 평양에 가있다는것을 알고있는가 합디다.》

장사군차림의 령감은 능청스럽게 말을 뜨직뜨직 하면서 양춘만을 쳐다보고있었다. 양춘만은 눈앞이 아찔해져서 널바자를 붙잡고야 겨우 몸의 균형을 유지하였다. 몇초후에 그는 적의에 찬 시선으로 흉물스럽게 웃고있는 령감을 쏘아보면서 내대였다.

《내가 어쨌다구 목을 매달아. 내가 도대체 무엇을 어쨌느냐말이야.》

《내가 어쨌는가구? 제가 한 노릇을 그렇게도 모르겠소. 당신은 대일본제국에 복무하지 않았소. 천황페하께 충성한것으로 해서 표창장까지 받았구 그만하면 친일분자로서 자격이 넉넉하잖소? 공산주의자들은 일본제국에 복무한 인테리들이 어떤자들인가를 보여주기 위해 견본품으로 당신과 같은 사람이 필요하단말이요, 알겠소?》

《우리 일웅이가 인질로 잡혀가있다구? 그건 거짓말이다.》

《거짓말? 민선생이 말하는데 당신의 뒤를 따르고있는 리만석이란자가 당신의 아들을 평양에 있는 공산당본부에 가져갔다고 했소. 그만하고 난 가겠소. 이제는 당신이 자기 할바를 생각해내야 할테니까.》

양춘만이 정신을 가다듬었을 때는 벌써 령감은 어데론가 사라지고말았다. 유령처럼 나타났다 유령처럼 사라졌다.

려인숙에 있던 차손님들이 우르르 역전으로 몰려나가고있었다. 역에 나갔던 박원식은 급히 떠나야겠다면서 서둘러대였다. 양춘만은 변함없이 그들이 하는대로 따라갔다.

기차는 인차 떠났다. 푸른 달빛이 차창으로 흘러들고 멀리 내다보이는 산과 들이 천천히 뒤로 흘러가고있었다.

양춘만은 하얀 얼굴을 내대고 창밖을 한동안 바라보고있다가 슬며시 일어났다. 휘청거리는 다리를 끌고 승강계단이 있는쪽으로 나갔다. 《고스란히 무덤을 향해 내 발로 들어갈수야 없지.》 덕지가 앉은 입술에서 혼자소리가 새나왔다. 논판을 지나가고 다음에는 등성이가 나졌다. 고르롭지도 못하고 몹시 얼룩진것들이 눈앞에 얼찐얼찐 지나가면서 운명에 대한 환영을 그려놓고있다. 그는 눈을 딱 감고 바로 그 어둠이 소용돌고있는 철뚝을 향해 몸을 날리였다.

양춘만이 자리를 뜨자 인차 박원식이 옆에 앉았던 사나이가 뒤따라 일어서 나갔다. 평산에서부터 기분나쁘게 보았던 그 사나이와 양춘만이의 움직임을 예민하게 련결시키게 된 박원식은 자리를 차고 일어나 승강대쪽으로 나갔다. 위생실에도 승강대에도 양춘만은 보이지 않았다. 이상하다는 생각이 번개처럼 떠오른 박원식은 리만석을 불러내면서 사위를 살펴보았다. 그때 그는 밭뚝으로 내달리고있는 검은 그림자를 발견하게 되였다.

《양춘만이다!》

순간 그는 승강대발판을 차면서 어둠속으로 뛰여내렸다. 몇번 딩굴고나서 그는 양춘만이쪽으로 달려갔다. 밭가운데를 꿰지르고 나가면서 소리쳤다.

《양춘만이 서라! 서라!!》

박원식의 고함소리가 들판을 울리였다. 뒤에서 자기를 따르고있다는것을 알게 된 양춘만은 필사적으로 내뛰고있다. 넘어졌다가는 일어나고 일어서서 내뛰다가는 또 넘어지면서 달리고있다. 그러나 박원식은 산에서 단련된 완강한 체력으로 점점 더 간격을 좁혀나갔다. 《서라! 서라! 가지 말라!》 박원식의 부르는 소리를 듣게 된 양춘만은 오금이 저리고 숨이 차서 걸음을 내뜰수 없게 되였다. 이제 몇분만 더 따르면 붙잡을만한 거리가 되였다. 그런데 난데없는 총소리가 들리였다. 개천장사군이 쏜것이다. 그런데 《땅! 땅!》하는 순간 박원식은 다리가 휘청하며 앞으로 푹 꼬꾸라졌다. 일어서서 몇걸음 나아가다가 다시 모로 쓰러졌다. 넙적다리에 불이 달린것처럼 뜨거워났다. 박원식은 일어서서 손을 내흔들며 고함을 쳤다.

《양춘만이 가지 말라. 우리와 같이 가자! 양춘만이 돌아서라. 우리와 같이 가자!》

처절한 웨침소리가 거듭거듭 야음을 흔들면서 멀리까지 울려갔다. 뒤따라온 리만석이 그를 부축하였다. 다리에 관통상을 입었다. 박원식은 리만석이더러 양춘만을 끝까지 따라가 붙잡으라고 하였다. 그러나 리만석은 추격하는것을 단념하고 박원식을 들어업고 마을로 찾아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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