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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소설 푸른산악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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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강산
댓글 0건 조회 5,283회 작성일 20-05-13 2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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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

 

밤이건 낮이건 떠날줄 모르는 길손, 속사리부터 1211고지일대의 상공까지 뒤덮은 검회색초연은 영원의 자태를 뽐내고있다.

석화된듯 싶은 그 두터운 구름층앞에서는 복더위에서 풀려난 산바람도 맥을 추지 못하고 정오의 밝은 해빛도 그 장막을 풀지 못한다.

침침한 골숲속에서 부리긴 갈가마귀 한마리가 검회색 연기발에 도전하여 하늘로 치켜오르다가 숨막히는 초연내에 질식한채 까욱소리 한마디 못지르고 찢기고 훑어진 숲속으로 꼬꾸라지듯 떨어져내린다. 그러나 찾아든 숲도 안식처가 못된다. 두드린 북어토막처럼 허벅허벅한 나무통에서 행여나 먹이를 찾을가 하고 부리를 대보다가는 번쩍 하는 섬광과 함께 터져오르는 포탄폭발에 새된 비명을 지르며 날아오르다가 누렇게 타고 그슬린 땅바닥에 구겨박히고만다. 그러면 숲은 무시무시한 슬픔과 공포속에 몸부림치고는 불가항력의 힘앞에 순종하듯 묵묵한 정적속에 가드러든다.

허나 삶의 호흡은 여전히 이어져가고있다.

잘라져나간 나무우듬지들에서는 생명의 즙액이 맑은 이슬방울로 솟아오르고 새롭게 뻗어자라는 나무아지에서는 대지의 자양과 해볕에 기운을 머금은 애릿한 잎사귀들이 검푸른 광채를 띠며 번쩍이고 마구 엉키며 쓰러진 관목더미밑에서는 심산의 이름모를 꽃들이 빨갛고 노란 화판을 벌리고 초연속의 공기를 걸탐스레 들이마신다.

이런 꽃들과 맞부딪칠제면 제아무리 무쇠심장의 사나이라 하여도 한동안 환희와 애달픔속에 젖어 거기서 시선을 떼지 못한다.

생명이여! 이 가혹한 싸움터에서 누가 자기 삶의 영구함을 장담할수 있단 말인가. 허나 꽃은 행운을, 삶의 영원성을 속삭여주는것이 아닌가. 전화선을 이으러 배밀이로 내려오는 통신병도 탄약상자와 쌀배낭을 짊어지고 고지로 오르는 전사들도 잠시나마 전쟁의 온갖 소음과 살풍경을 잊은채 애리애리한 꽃의 끈질긴 생명력을 놓고 다감한 정회의 미소를 머금는다.

《소대장동무, 어서 가자구요. 여기두 쏘구역이라고들 하던데. 괜스레 화를 당할순 없지 않습니까.》

《난 나비탄이 있지 않는가 해서 헛눈을 팔았댔소.》

철규는 아침녘가지 현인석이네 전호속에 있었다.

그만 아니라 중대전체가 고지정점에 올랐다. 이것은 포병사격규칙을 어기는것이였다. 지금까지는 1211고지 뒤경사면의 은페지에서 중대장의 유도사격구령에 따라 포사격을 하였다. 그런데 어제 있은 전투에 고지정점의 지휘감시소에서 포사격유도를 하던 중대장과 그의 구령을 되받던 두명의 포병정찰수가 희생되였다. 전화선이 끊어져나가고 지휘감시소가 직탄을 맞는 통에 중대장과 포병정찰수가 밖에 나와 수기신호와 육성으로 포사격지휘를 하다가 잘못되였던것이다.

어느 포가 고지로 먼저 올랐는지 모른다. 철규가 포신을 둘러메자 모두가 뒤따랐고 그의 소대와 중대의 모든 포들이 고지에 올라 적들을 때렸던것이다. 전투가 끝나자 보병대대장은 본래의 위치로 되돌아 갈것을 말했으나 전사들은 움직일념을 하지 않았다.

적을 직접 보며 쏘는것과 간접사격을 하는것과는 차이가 있다.

여기에는 죽음과 맞서 죽음을 초월한다는 비장함이 있는것이다.

전사들은 중대장과 전사들의 희생으로 독이 오를대로 올라있었다.

때마침 대대부에 나와있던 황영학련대장이 그들을 편들어주었다.

그런데 오늘 아침 철규를 찾은 황영학은 뜻밖에도 《2일간의 휴가》명령을 주며 아버지와 《처》를 만나라는것이였다. 거기에는 현인석이 와있었다.

《동무도 알겠지만 이 현인석동무의 아주머니가 얼마전에 생남했다고 하오. 그러니 동문 이 현인석동무와 함께 가서 련대의 명의로 축하도 해주고 거기에 와계시는 동무의 아버님과 처를 만나시오.

이건 군단장동지의 지시이기도 하오. 동무의 아버님과 처는 인민대표로 먼 후방에서 왔으니만치 동문 가족으로서만 아니라 화선전투원 전체를 대표한다는 자세로 잘 맞아줘야겠소. 귀대시간을 래일 밤까지로 합시다.》

그와 현인석의 휴가는 온 대대를 떠들썩하게 했다. 축하의 말들에 이어 《처》와의 하루밤을 두고 걸죽한 롱담들도 있었다. 《미용전문가》로 자처하는 걸작들이 나타나 면도를 해준다, 모표를 닦아준다 하며 법석을 피웠고 현인석에게는 귀여운 아드님에게 보내는 선물이라고 하며 탄피로 만든 《하모니카》와 무엇때문에 건사해 두었는지 모를 떡돌버섯까지 주었다. 리수복은 로획품반납시에도 바치지 않았던 니켈도금을 한 소형브로닝권총까지 현인석에게 주며 새로 태여난 아들은 미래의 대장감이라고 력설했다.

현인석의 《휴가》에 대한 전사들의 기쁨에 대해 철규는 충분히 그럴만 하다고 생각했다.

열흘전인가 속사리에서 보내온 원호품중에는 류달리 큰 태엿꾸레미가 있었는데 그속에 현인석의 아버지가 쓴 편지가 있었다.

한자한자 연필로 못박아쓴 그 편지에는 미국놈들을 모조리 쓸어눕혀 달라는 부탁과 함께 《조선인민군 야전우편함 ××××(ㄷ)에서 복무하는 우리 아들 현인석을 만나게 되면 8월 열엿새날에 아들애가 태여났음을 알려주십시오. 아이어미와 우리 로친네의 간절한 소청이오니 두루 하정을 베풀어주기를 바라마지 않습니다.》라는 글발이 적혀있었다. 그 편지가 든 엿꾸레미는 원호품배정때마다 박격포중대의 우선권을 떠드는 철규네 특무장이 가져왔는데 현인석의 중대에 보내지 않을수 없었다. 그 사연은 잠간사이에 온 대대의 즐거운 화제거리로 되였던것이고 이때문에 현인석의 《휴가》가 전사들에게 더 한층 반가움을 불러일으켰을것이다.

그렇지만 자기는?… 만나본지 한달도 채 안되는 때에 찾아온 아버지와 《처》의 맹랑스러운 처사를 어떻게 리해해야 할지 알수 없었다. 전사들앞에서 미안스럽기 그지없었다.

물론 아버지나 미순은 전선원호대로 왔을것만은 틀림없다. 하지만 전방지구로 된 제1제대계선의 속사리까지 왔다는것은 정상을 벗어난 일인것이고 더군다나 군단장까지 《면회》용건을 알게 되였다는것은 아버지가 망녕된 고집을 부린 결과일것이다.

부지런히 걷는데만 전심해있던 현인석이 커다란 포탄구뎅이를 에돌다가 털이 거푸수수 일떠선 까마귀를 집어들었다.

《그건 뭣하자고 그러오?》

《까마귀열은 비삼이라고 합니다.》

《변하지 않았겠소?》

《이놈의 날짐승은 쉽게 썩지 않아요.》

《그런즉 산모님한테 드린다 그거구만.》

《뭘요.》

현인석은 비주룩이 웃으며 까마귀를 배낭에다 쓸어넣었다.

불당골에 있은 현인석의 집에 들어섰을 때는 어슬녘이였다. 이곳 집들이 거의다 그러하듯 솔가지를 콱 씌워 연기발을 흐트러지게 한 굴뚝에서 뜬김같은 연기가 피여오르고 구수한 된장국냄새가 진하게 풍겼다.

철규는 고삭은 지게문앞에서 어물거리는 현인석의 잔등을 밀며 마당가로 들어섰다. 토방돌우에서 담배를 피우고있던 두 로인이 벌떡 일어섰다.

철규는 첫눈에 아버지를 알아보았다.

아버지는 거들진 자세로 철규의 인사에 고개를 끄덕이고는 가족들의 포위속에 든 현인석에게 다가가 손도 쥐여보고 어깨도 만져보며 인사말을 건네다가 철규의 말쑥한 군복차림을 보고는 못마땅한듯 눈살을 찌프렸다.

《넌 군관이라서 뒤전에 서있은게 아니냐?》

《아버님, 그런것이 아닙니다.》

어머니의 손에 팔목을 잡혀있던 현인석이 급급히 변호를 해서야 만산의 얼굴이 저으기 풀려졌다.

《내 미순이를 데리러 가마.》

《어데 있게요?》

《여기 군의소에 가서 일을 돕는다. 빨래랑 하면서… 나두 낮동안에 거기 가서 장작이랑 패주고 일을 도왔다.》

《그럼 제가 가서 데려오지요.》

철규가 닁큼 일어서자 현인석의 아버지가 대신 간다고 하고 뒤미처 안방에 들어갔던 현인석이까지 뛰여나왔다.

말씨름끝에 좀 더 기다려보기로 하였다.

철규는 현인석이와 함께 갓난애가 있는 방으로 들어갔다.

《방이 루추해놔서.》하며 보란듯이 아이를 추켜안은 녀인의 행복스러운 얼굴로부터 웬 사람들인가 하는 식으로 빠금히 쳐다보는 아이를 보게 되자 보슴털이 보르르한 볼을 조심스레 쓸어만져보았다. 순간 조그마한 목체에서 어쩌면 그런 소리가 나올가 할 정도의 요란스러운 울음이 터져나왔다.

《얘, 넌 아직 그런 아이를 다룰 위인이 못된다.》

아버지의 호통치듯 하는 말에 방에서 나왔다.

그때까지 토방에 앉아있던 만산은 웃방을 눈짓하고는 제 집이런듯 문을 열었다.

대진내가 물씬 나는 방에는 두개의 뒤주가 있고 그앞에는 한번도 써보지 않은듯 한 꽃이불 한채가 개여있었다.

《그래 공을 좀 세웠느냐?》

아버지는 자리에 앉기 바쁘게 물었다.

《별반 공이라 할것은 없습니다. 한데 어떻게 되여 여기까지 오셨습니까?》

《왜? 우리가 예 온것이 무슨 잘못된 일이냐?》

아버지의 눈에 게면쩍어하면서도 노여워하는 빛이 번쩍였다.

철규는 안됐다는 생각이 들면서도 꼭지를 뗀 이상 잠자코 있을수 없었다.

《전 아버지때문에 이틀동안 싸움에서 빠지게 되지 않았습니까. 지금 전선에 한명이 새롭습니다.》

《안다. 그때문에 예 온것이구. 그래 난 무슨 귀머거리구 청맹과닌줄 아니? 지금 이곳 싸움을 두고 굉장하다. 네 에미랑 나랑은 네 이름이 나오는가 해서 눈이 빠지게 신문도 보고 리에 가서 방송도 듣는다.》

만산은 후들후들 떠는 손으로 담배쌈지를 들추더니 고불통에 써레기담배를 채워넣었다. 철규는 로획품 라이타로 불을 켜드렸다.

그런데도 아버지는 분이 채 삭지 않은지 세과게 담배를 들이빨다가 어른인 내가 참는다 하는 식으로 어조를 낮춰 말을 이었다.

《네 하는 말뜻을 알겠다. 과히 틀린 소리도 아니다. 하지만 늙은것까지 사선길을 헤쳐왔다면 반갑게 대할지언정 그게 무슨 소리냐. 우에 어른들도 다 생각이 있어서 널 이리로 와 만나게 한것이구… 미순이한텐 이런 내색 아예 하지 말거라.

나두 그렇구 미순이두 그렇구 이제부턴 정식 군대다.》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그렇게 됐다. 군단장어른의 명령이라면서 나한테 통과증을 써준 군관은 앞으로두 여기까진 올수 있다고 했으니 그리 알아라.

그리고 미순인 군의소에 입대하기로 약조를 했다.》

《아니, 누가 승인했다는겁니까?》

철규의 놀란 소리에 만산은 흐뭇해 웃었다.

《오늘 군의소장어른한테도 말하구 그곳 간호병들과도 얘기를 했는데 미순의 입대는 문제가 없다고 했다. 오늘 보니 부상병들때문에 손이 딸려 쩔쩔매더구나. 미순이가 우격으로 군의소에 떨어지겠다구 했다.》

《헛참, 군대일이 제 마음대로 되는줄 압니까. 그리구 미순이 오면 그 집 농사일은 어쩌구 또 미순이 어머니 혼자 계시는데…》

《흥, 네가 생각한다는게 그게 고작이냐? 농사일은 나도 있고 네 에민 근력도 좋으니 근심할게 없다. 가만 보니 네가 영 시라소니구나.

그리구 네 말대로 미순이 군대입대가 여의치 않다면 군단장어른까지 만날 차비다.》

《아버지, 제발 그 일만은 말아주십시오. 군단장동지가 무슨 리위원장 같은줄 아십니까. 지금 우리 전선을 잃느냐 고수하느냐 하는 중임을 떠안고있단 말입니다.》

《그만 두거라. 오면서 말들을 들을라니 범같다는 그분이 우리같은 백성들한테는 이만저만 찰찰하지 않다더라. 나를 만나면 힘을 얻으면 얻었지 해는 보지 않을거다.

그리구 이번에 포탄짐을 지고 오다가 한 장령을 만났는데그도 너를 잘 안다더구나. 장군님을 만나 뵈온 군대라는것으로 말이다. 그런즉은 네 위치가 이만저만하지 않다. 네가 제 구실을 못하여 애비낯이 깎이는것은 그렇다치더라두 장군님의 위망에 루를 입힐수 있거든.

한즉 남들보다 열갑절, 백갑절 잘 싸우라는거다. 내 말을 알겠느냐?》

《네.》

철규는 혹을 떼려다가 덧붙인격으로 시무룩해졌다. 아버지의 말이 그른데가 없다고 생각되였다.

그가 집안소식으로부터 여기까지 오던 이야기를 이것저것 물으며 지금까지의 전투과정을 말할 때 타박거리는 발걸음과 함께 집주인내외의 반기는 목소리가 울렸다.

《온것 같구나.》

아버지의 말이 떨어지기 바쁘게 문을 열자 젖은 붕대를 백포에 한아름 싸안은 미순이가 굳어붙은듯 서있다가 《아이》소리를 쳤다.

《오셨군요.》

미순은 어제그제 만났던 사람처럼 상긋 웃어보이고는 백포짐을 마루에 올려놓았다. 물젖은 손으로 머리를 비다듬고는 불쑥 손을 내밀었다.

철규로서는 어안이 벙벙할 지경이였다. 전번 고향집에 들렸을 때 어색스럽게 헤여졌던 미순이가 이렇게 먼저 악수를 청하리라고는 생각 못했던것이다.

군의소에 가있는 몇시간동안에 《개명》을 했는가?

전방군의소란 신음과 웃음, 욕설과 익살로 떠들썩한 곳이고 상하남녀 구분없이 한집안사람처럼 되는 곳이다.

철규는 아버지의 눈치를 힐끗 보고 《군의소에 있었다며-》하는 자기로서도 부실하기 짝이 없는 인사를 하며 얼결에 하는 식으로 그의 손을 잡았다. 굳은 살이 박힌 손에서는 힘과 정열이 느껴졌다.

철규가 현인석을 소개하자 미순은 삽시에 얼굴을 붉히며 얌전스레 고개를 숙여보였다.

《여긴 정말 굉장해요.》

미순은 철규도 현인석한테도 아닌 말을 하고는 제풀에 웃음을 웃었다.

약간 들떠있는것이 알렸다. 철규로서는 다행이다싶었다. 범바위골밑에서 헤여질 때의 그늘이 사라진 모습이였기때문이였다.

집주인내외의 청에 따라 아래방에 다들 모였다.

철규는 떡 벌어지게 차린 음식에 눈이 딩그래졌다.

두개의 상을 맞붙인 우에는 송기떡이며 둥굴레찜 같은 이곳 특산음식에 이즈음 전방에서는 구경조차 못하는 흘레브토막이 놓여있고 푸주박이 떠있는 술항아리까지 있었다.

만산은 마치나 자기가 주인인듯 여기 앉아라 저기 앉아라 하며 삿대질을 하였다. 철규와 미순이를 나란히 앉게 하고 한달전 집에 갔을 때처럼 《축배사》를 하였다.

《전방에서 싸우는 군대들의 승리를 위해서 한잔씩들 합시다.》

철규와 미순에게는 물론 아이엄마한테까지 술을 부었다.

현인석의 아버지와 어머니는 철규의 아버지가 마치 집안좌상어른이나 되는듯 공경하는 태도를 보였다.

술이 한순배 돌자 만산은 철규의 눈길이 흘레브에 자주 가닿는것을 보고 호걸스런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왜, 저 빵을 어디서 훔쳐온걸로 아니? 통과증을 써주던 군대어른이 줘보낸거다. 나두 식량이 바른 때에 저 빵덩이가 몇섬의 쌀과 맞먹는다는걸 안다. 하지만 걱정할거 없다. 이 애비가 쌀짐을 계속 지고 오겠다. 이 집 술도 공짜가 아니다. 다음번에 보렴.

내가 통돼지까지 옆에 메고 오지 않는가.》

《그곳 농사형편은 어떻습니까?》

철규는 아버지의 주정기를 눅잦히려 했다. 만산은 기다렸던 물음이라는듯 모두들 둘러보며 청높이 말했다.

《이번 장마비에 비탈밭들은 좀 해를 봤다만 대풍이다.

민심이 천심이라고 늬들 싸움을 도우라고 곡식도 성의를 보인거다.

이번엔 포탄을 날랐지만 다음엔 쌀을 지고 올테다.

우리 고장 남정네들은 원체 힘이 장사가 아니냐. 내 이번 가면 이삼십명 휘동해서 한짐씩들을 지고 오게 할테다. 헛장담이 아니다.》

만산은 밥을 국사발에 죄 쏟아놓고는 한사발 가득 술을 들이부어 단숨에 들이켰다.

그리고는 현인석의 아버지에게 곰살궂은 어조로 말했다.

《이보시우 적은이, 나를 떠벌이군으로만 생각하지 마시우. 사실 난 이 속사리지경에 들어설 때부터 여기 사람들앞에선 무릎걸음을 해야겠다고 생각했수다. 아, 글쎄 내굴이 새까맣게 뒤덮고 포탄소리가 쾅쾅하는 속에서 싸움을 돕고 있으니 보는 사람모두가 영웅이구나 하고 우러러보게 되였지요. 적은인 나보다 뚝심은 약하겠는데 매일 건너 포탄짐이며 량식짐을 지구 저 직동령너머까지 간다니 그 아니 장한 일입네까.》

《형님, 그런 소릴랑 아예 마시오. 예 살면야 누구나 다 그렇게 됩네다. 더구나 로인장은 그 수백리길을 왔으니 하루 80리 행보를 하는 우리에 비하겠습니까.

형님, 오늘 우리 이 자리에서 사지동고를 맺읍시다.》

《아하, 정말 좋은 궁냥을 했수다.》

사지동고는 처음처럼 술을 한잔씩 돌리는것으로 끝났다.

그런데 철규로서는 물론 미순이까지 깜짝 놀랄 일이 벌어졌다.

사지동고식이 끝나 자리에 앉는가싶던 만산이 헛기침을 몇번 하더니 철규와 미순이더러 일어나라고 했다.

《내가 이 집 댁네들과는 이미 말이 있었다만 오늘 이 자리에서 술상까지 벌려놓은건 다름 아닌 너희들의 성례를 치르기 위한때문이다.

후에 따루 또 한다쳐도 오늘 밤 이것으로 너희들은 정식 부부로 되는거다. 그러니 자, 그만들 잡시다.》

철규는 아버지가 취중인가 했는데 전혀 그렇지 않았다.

그를 좀 보자고 한 아버지는 밖으로 나가더니 첫날밤의 신랑노릇이 어쩌구저쩌구 말하는데 웃음기란 조금도 없고 자칫 몇마디 했다간 한주먹 안길 엄엄한 자세였다.

(허허, 세상 별일이라구야.)

속으로 웃는중에 불시에 얼굴이 화끈해졌다.

초연이 얼어붙은 하늘이라지만 한밤중이 되자 자름자름한 별들이 돋아났다.

전쟁은 전쟁이지만 자기들의 일과는 변함없다는듯이 귀뚜라미가 귀뚤귀뚤 울어대는 속에서 물것들때문에 방에서 잘수 없다고 나온 만산은 허청간앞에 깔아놓은 멍석우에 모로 누운채 하루저녁새에 사지동고의 연분으로 맺어 진 주인집로인의 이야기를 귀가 말박만 해 듣고있었다. 주인장의 말소리가 높아 질 때면 능청스럽게 웃방쪽을 곁눈질해 보이며.

그때마다 현인석의 아버지는 눈이 맞붙어 웃었다.

《이제 두고 보시라요. 영낙없습네다. 전년 12월 그믐께였지요.

눈이 강산같은 때 그 녀석이 불쑥 나타나더란 말입니다. 동상에 쓸 기름을 얻으러 온것이지요. 난 우선 그것부터 생각했단 말입니다. 한데 눈치코치 없는 에미란건 애녀석한테 딱 붙어 적후투쟁이 어쨌냐 뭐냐 하며 밤을 그냥 새울 잡도리우. 이런데선 녀편네들이란것이 까막귀신이지요. 그래도 며느리란건 언제 단둘이 있게 될가 하며 부엌으로 방으로 들락날락하는데…

차, 이거야 속이 썩는노릇이 아니겠습니까. 새벽에는 떠난다는데 이제 가면 다시 못올수 있는것이고, 그렇게 되면 집안대가 아예 끊기는 일이 아닙니까.

그러면서도 전쟁전에 성례를 치르어 다섯달씩이나 살았는데도 씨를 만들지 못한 주제에 하루밤 잔다고 일을 치르겠는가 하고 도리머리를 저어보기두 하구. 하지만 아들녀석을 찬찬히 보니 저 락동강까지 갔다오구 또 적후투쟁을 하느라 여간만 고생을 하지 않았겠는데도 그간 기골이 더 커지고 눈빛도 번쩍번쩍하는것이 꼭 일을 성사시킬상이더란 말이우다.

그래서 어미한테 소리쳤수다. 그만하고 잠이나 자자구. 그때야 에미란것도 뭔가 깨도가 되였는지 부랴부랴 이부자리를 펴고 며느리한테 나가 뭔가 말하더니 그 애와 아들녀석을 웃방에 몰아넣었수다. 그런데두 난 마음이 놓이질 않아서 형님이 방금전에 했다는 식으로 녀석을 불러내여 단단히 으름장을 놓았수다. 미국이라는 나라는 큰 나라이기때문에 그 씨알머리가 있는 한 앞으로두 그냥 싸워야겠는데 전장에 가서 살아오면 다행이지만 못 돌아오면 네 뒤를 이을 싸움군이 없지 않겠느냐,

그러니 재미루가 아니라 미국놈을 칠 병정을 만들어낸다 하구 열성을 기울여라 하구 말을 해줬지요. 그 녀석은 원래 나와 달리 말이 적은지라 씨물씨물 웃더니 군대가 그런 생각하면 안된다고 하고는 씽 하고 물러나는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난 네 씨가 없으면 며느리도 내보낼테다 하고 을러멨지요.

그 말이 은을 낸셈인지… 오늘의 일이 있지 않았겠습니까. 하긴 군대밥이 남정의것을 착실하게 만든것 같기고 하고. 글쎄 몇달씩 살면서도 못만든것을 하루밤새에 만들지 않았겠습니까.…

그래서 내가 너무 기쁜김에 1211고지루 보내는 지원물자보퉁이에다가 편지를 써넣어두었댔는데… 참 고마운 어른들이지요. 사실 우리 애녀석이란게 순해 먹어서 지금까진 크게 위훈을 못세웠지만 제 피덩이를 보고 가면 범처럼 싸울겝니다. 형님두 산골에서 살아서 잘 알겠지만 짐승들도 제 새끼가 생기면 영악해지질 않습네까.

원래 우리 집은 대대루 독자가문인데 매번 제 혈붙이가 생기면 사사목숨과 집안일은 죄 동댕이치구 의루 목숨을 바쳤습지요.

제 조부로 말하면 갑오란때 철원군수를 조리돌림시킨것으로 후날 참형을 당하셨구 선친으로 보면 제가 여덟살때 안무의 의병대를 쫓아 북간도에까지 가서 순국을 했지요. 나두 불여귀가 아니면 총을 메는것인데 그저 군대들 뒤바라지로 겨우 백성구실을 하는셈이지요.

이젠 그만하고 눈을 붙입시다.

저 방에서도 자리에 든것 같습니다.》

현인석의 아버지는 만산의 눈이 자주 가닿는 방쪽을 눈짓해 보이고는 팔굽에 대고있던 목침을 멍석끝에 옮겨놓았다.

그러나 만산은 잠들 생각은 꼬물만큼도 없었다. 철규한테는 이 집 로인이 한것처럼 신칙도 하고 으르기도 하였다.

사람이 사는것은 제 하나 인간된 도리를 지켜 참답게 사는것도 중하지만 후대를 남기는것도 한생의 중대사이고 인륜이라고 설복도 하였다.

《형님, 너무 마음을 쓰면 될 일도 안됩니다. 내가 볼라니 아들과 며느리의 눈정기가 펄펄하고 피가 끓는것이 알리던데 꼭 될겁니다.》

《허허, 그러면 오죽 좋겠습니까. 한데 우리 아들녀석은 나와 달리 꽁보리단지여서… 도제 가망이 보이질 않는군요.》

《원 형님도, 꽁보리단지건 팔삭둥이건 그와 같은 색시앞에서야 다 대장군이 되는걸요.》

인석이 아버지는 길게 하품을 하고 돌아누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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