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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소설 계승자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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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강산
댓글 1건 조회 5,019회 작성일 20-07-13 2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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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어스름이 깃든 아치형의 공장정문앞에서 누구인가 그를 향해 급히 손짓하고있었다.

《위원장동무!- 빨리 오라요-》

림원국은 초점이 흐릿한 눈으로도 어깨가 쩍 버그러진 몸짓과 귀에 익은 유쾌한 목소리로써 그 청년이 열처리직장초급단체위원장 박웅수임을 알아보았다.

원국은 다급해하는 웅수를 보자 부지불식간에 플라즈마시험로가 잘못된것만 같아 허둥지둥 달려갔다.

《야 참, 뭘 그리 꾸물대요. 위원장동무는 도사로청에만 가문 반나절이군요.》

그들은 공장사로청회의나 사업상관계때를 내놓고는 친구삼아 너나들이로 허물없이 말하는것을 더 좋아했다.

《웅수, 무슨 일이야? 시험로가 어떻게 됐나?》

《어떻게 되긴요. 아직 점화해보지도 않았는데…》

《푸- 그럼 됐구나.》

원국이 시름을 놓자 웅수는 얼굴을 찡그렸다.

《술을 마셨군요. 괜찮은데요. 도사로청에 갔다 올 때마다 문건들이나 강연, 회의자료를 한아름씩 가져오더니.》

《그래. 오늘은 술만 얻어먹었어. 중앙사로청위원장동지가 한고뿌 부어주지 않겠나. 칭찬과 욕설두 먹구.》

《됐어요. 자랑은 후에 듣기로 하구 저기 좀 가자요.》

웅수는 원국의 팔소매를 잡아끌고 접수실옆방으로 들어갔다.

전등불을 켜고 보자기를 풀었다.

《취하진 않았지요?》

《일없어.》

《그럼 어서 그 옷을 벗고 이걸 입으라요. 가만 와이샤쯔를 먼저 입어야지.》

웅수는 회색줄이 간 와이샤쯔와 연곤색양복을 꺼내들었다.

원국은 얼떠름해서 다림발이 선 샤쯔와 양복을 보다가 흥분해서 서두르는 웅수에게 눈길을 돌렸다.

《무슨 일이야? 이건 어데서 났어?》

《야 참, 입으라면 입지. 시간이 없다니까. 내가 좀 빌려왔어요.》

웅수는 앞섶에서 어물대는 원국의 손을 치워버리고 단추를 재빨리 벗겨 기계기름내 풍기는 낡은 혼방직옷을 걸상에 집어던졌다.

원국은 정신을 못차리고 버벙해서 친구가 하라는대로 새 양복을 갈아입었다. 넥타이까지 척 매니 아주 멋쟁이청년이 되였다.

웅수는 주머니에서 머리기름통을 꺼내더니 찐득한 머리기름을 손바닥에 발라가지고 바람에 헝클어진 원국의 머리에 걸싸게 비벼주었다. 그 다음에는 다른쪽주머니에서 빗을 꺼내 기름이 먹어 차분해진 머리칼을 빗어넘겼다.

《됐어요. 이젠 그 운동화를 벗으라요.》

웅수는 탁상밑에서 윤기도는 가죽구두를 내놓았다. 원국이 신으니 구두가 발에 꼭 맞았다. 이번에는 요술사처럼 웅수의 손에서 조그만 병이 나졌다. 웅수는 병마개를 열고 원국의 머리와 옷자락안에까지 향수를 뿌렸다.

원국은 코를 싸쥐였다.

《이건 무슨 짓이야, 날 어리광대로 만드는게 아니야?!》

《공장사로청위원장이 일만 하다나니 문화생활이란걸 모르는구만요. 어서 가자요.》

그러자 원국은 두다리를 떡 뻗치고 섰다.

《웅수, 날 어디로 끌구 가는거야? 대본두 모르고 배우가 연기를 할수 있어?》

《아무 대본두 필요없어요. 진수옥기자동무에게 자기의 가슴에서 끓는 진실한 사랑의 감정을 그대로 표현하면 돼요.》

《뭐라구?》

원국이 놀래서 눈을 흡뜨자 웅수는 정색해서 말했다.

《위원장동무, 저번에 왔던 기자동무가 공장에 왔어요. 벌써 두어시간나마 기다려요.》

《진수옥동무가? 어데 있어? 왜 이제야 말해?!》

원국은 웅수의 어깨를 붙잡고 흔들었다. 그는 짝사랑하는 자기의 인격을 돋궈주려는 사려깊은 이 친구의 뜨거운 호의를 치사해야 한다는것을 잊었다. 그저 한시바삐 진수옥을 만나보고싶어 덤벼쳤다.

《내가 기자동무에게 시험로를 보여주고 위원장동무사무실에 데려다…》

원국은 웅수의 말을 채 듣지 않고 그를 밀쳐버리고 문으로 뛰여나갔다. 그는 현장의 채광창들에서 흘러나오는 불빛에 나무그림자들이 길다랗게 누운 컴컴한 구내길을 헤염치듯 다우쳐걸었다. 공장관리부건물의 3층 자기방 창문에도 불이 켜있었다.

원국은 진수옥이 그냥 기다리고있다는 생각에 가슴이 메이게 기쁨이 부풀어오르고 흥분으로 두근거렸다. 진수옥이 어떻게 왔을가? 어쩌면 운명이 상처를 입은 이런 날에 도착했는가? 나의 번민과 사랑을 구원하려고 왔는가?!

원국은 진수옥의 출현을 우연적이고 공교로운 일치가 아니라 자기 앞날에 행운을 예언해주는 신비한 어떤 사변처럼 감수하였다. 그것은 미신적관념이 아니라 번민끝에 차례진 사랑과 희망의 성취에 대한 현실적예감과 충동이 현훈증을 일으켰기때문일것이다.

원국은 관리부건물의 현관벽에 걸린 커다란 거울앞에서 저도모르게 멈춰섰다.

그는 흥분과 행복감으로 달아오른 얼굴, 뽀마도를 발라 멋지게 빗어넘긴 머리, 다림발이 선 새 양복과 구두를 놀라움과 당황속에 비쳐보았다. 자기 아닌 다른 사람 같았다. 치장하고 분장한것 같이 몸에 익숙하지도 어울리지도 않는 차림새였지만 이 순간 그는 기뻤다. 그리고 친구 웅수에 대해 무한한 고마움을 느꼈다.

기자처녀가 왔다간 다음부터 짝사랑의 고민으로 침울해서 공장사로청사업과 공구강시험로연구에서 맥을 잃고 다니는 자기를 위로해주려고 웅수는 얼마나 세심히 마음 써왔던가. 자기보다 나이는 비록 한살 아래지만 동창생처녀와 일찍 사랑을 체험하고 풍파를 겪어본 웅수는 애정문제에서는 선험자로서의 자기 식 지론이 있었다. 사랑은 소원이 아니라 쟁취다. 내적인것에서부터 외적인것으로 나타나는것이다. 심리적인것으로부터 행동적인것으로 넘어가는것이 남자의 사랑이다. 그런데로부터 멀리 평양에 있는 기자처녀를 쟁취하자면 공장사로청위원장이 속을 앓지 말고 무슨 일거리를 만들어가지고서라도 신문사에 가야 한다. 그래서 처녀에게 사랑을 고백해야 한다. 그렇게 할 용기가 모자라면 절절한 련애편지를 쓰던가, 전화를 하던가… 하여튼 적극적인 행동을 해야겠는데 원국은 그중에서 어느 한가지도 선택하지 못했다. 사로청사업과 공구강연구에서는 그토록 정열적이고 완강하고 실천적인 원국이였지만 처녀와의 사랑에서는 행동이 무맥하고 움츠러들었으며 우유부단과 소심성으로 하여 사랑의 정열이 표현되지 못하고 불길은 내부에서 가슴만 고통스레 태워 재를 만들고있었다. 재는 아무짝에도 쓸모없이 바람에 날려가 뒤늦은 후회심만 낳는다. 제때에 자기 심장에서 타는 사랑의 불길을 내뿜어 처녀의 심장을 활활 태워야 한다.… 그런데 바로 그 처녀가 왔다! 그래서 웅수는 자기를 이렇게 가꿔놓은것이다. 그런데 어떻게?

림원국은 벌써부터 두려움 비슷한 정신적중압감에 눌려 계단을 힘겹게 올라갔다. 그리고 한동안 마음을 정돈하고서야 자기방 출입문을 열었다.

《안녕하세요?》

진수옥은 창턱의 화분에 물을 준 고뿌를 내려놓으며 상긋 웃었다. 바른쪽눈섭속에 감추어진 기미가 눈에 띄였다.

《주인없는 방에 들어와 미안해요.》

《괜찮습니다.》

원국은 자기쪽에서 망설였지만 진수옥이 선뜻 손을 내미는 바람에 잡았다. 부드럽고 따스한 손이였다. 례의를 차려 얼핏 잡았다놓았는데도 투박한 손바닥안이 따스하도록 처녀의 온기가 남았다.

원국은 자기 차림새를 유심히 지켜보는 진수옥의 눈길을 거북스레 받으며 책상에 가지 않고 앞탁의 맞은켠 걸상에 가앉았다.

그는 자기 차림새가 진수옥에게 아무런 호감도 주지 못했음을 즉시에 깨달았다. 오히려 친구가 바라는것과는 정 반대되는 효과를 빚어낸것 같았다. 자기를 뜯어보는 진수옥의 눈길에서는 얼마간 비꼈던 상냥한 반가움이나 친절감마저 인차 사라지고 조화롭지 못하게 거칠게 자란 꽃나무를 대하는 원예사의 눈빛과도 같은 야릇하고 신중한 표정이 어렸다.

가위를 들어 꽃나무에서 불필요하게 자라 제멋대로 치장된것을 잘라내고싶어하는것 같은 아량의 눈길에 원국은 저으기 몸이 달아올랐고 모욕감 비슷한 감정이 가슴을 꿰지르고 지나갔다. 사랑의 고백따위의 결심과 의지는 지난 봄의 우뢰처럼 아득히 사라져버렸다.

그러나 이 순간 원국은 본래의 수수한 혼방직옷을 입지 않은걸 후회하지 않았고 자기를 이렇게 분장시킨 웅수를 조금도 원망하지 않았다. 그는 처녀의 비웃는듯 한 회의적인 표정보다도 친구의 진정을 소중히 여기고싶은 후더운 마음이 고여올랐다.

그는 평소에 하지 않던 손동작으로 뽀마도 바른 머리를 어루쓸고 앞가슴의 넥타이를 바로잡아놓고서 양복자락을 활 헤쳐놓았다. 사로청협의회때면 집행석에 앉아있는 도사로청위원장이 자주 하군 하던 몸짓이였다. 원래 위신을 빼고 틀을 차리기 좋아하는 도사로청위원장이지만 보다는 몸이 여위여 샤쯔앞섶과 양복자락이 움푹 패여들어가군 해서 보잘것 없는 체구를 살려보이려는 몸짓이였다.

원국은 경멸하던 그런 몸짓을 닮아보고는 이상스레 쾌감을 느꼈다. 그러나 그것은 순간에 불과했다. 그는 처녀앞에서 반발심을 나타내고 자존심을 세우려고 이런 습관되지도 어울리지도 않는 허위적인 몸짓을 하는 자신이 경망스럽고 가련해보이기까지 하였다.

원국은 복잡스레 뒤번져지는 혼란된 감정을 억제하고 침착해지려고 애썼다.

《기자동무, 그새 건강히 지냈습니까?》

그는 우정 무뚝뚝하게 물었으나 그동안 진심으로 진수옥의 신상에 대해 생각해왔으며 지금도 처녀의 얼굴에서 먼 려행길의 피로를 찾아보고있는 억제할수 없는 사나이의 진정을 내심으로 통감했다.

《위원장동무는 예전같지 않습니다.… 도사로청에 가셨다고 하던데…》

《예, 갔댔습니다. 생각지 않은 대접을 받았지요. 량해하십시오. 술을 마시고 이렇게 마주 앉아서.》

《전 그래서가 아니라 얼굴이 피로하고 상심해보이기에…》

원국은 진수옥이 자기 속감정을 정확히 들여다보는것 같아 대답을 피했다.

누군가 복도에서 문고리를 살그머니 다치는것 같은 기척이 들렸으나 그다음은 조용하였다.

《어머니는 건강하신가요?》

진수옥은 부드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처녀의 얼굴에서 《왜 그런 어울리지 않는 차림을 했어요.》하는것 같은 힐난의 표정은 사라지고 바다가에서 작별할 때 보았던 서늘하면서도 무언가 경원하는 애달픈 표정이 어렸다.

처녀의 그런 다감한 낯색이 원국에게 밖에서부터 품고 들어왔던 결심과 의지를 되살려주었다.

《어머니는 기자동무가 혹시 또 내려오면 집에 데려오라고 말했습니다. 그런걸 내가 그 동무는 다시 오지 않을거라고 했습니다.》

《그건 어째서요?》

진수옥은 눈섭을 치켜올렸다.

《동문 공장에 전화조차 걸어주지 않았지요. 일이 바빴겠지만 그보다는 우리 공장청년들이 인상에 남지 않았던게지요?》

진수옥은 원국의 투정기 밴 심술스런 말마디를 리해하는듯 살눈섭을 내리깔고 입가에 미소를 지은채 잠자코 있었다. 한동안 지나서야 나직한 목소리로 침묵을 깨뜨렸다.

《전… 공장에 오고싶었어요. 동무의 어머니도 다시 만나고싶었구요… 그래요. 전화를 할수 있었지요. 그렇지만 전화로는 어쩐지 감정이 없는 말을 주고받을것 같아서 그만두었어요.》

《아, 됐습니다. 지나가는 말로 한건데 그렇게 심각히 대답할건 없습니다.》

원국은 마음이 푸근해나고 어찌하면 날카로우면서도 정이 넘치게 많은 이 평양처녀에게 용솟음치는 진정을 터놓을수 있으리라는 생각에 기뻤다.

전화종이 울렸다. 원국은 송수화기를 들었다. 박웅수가 열처리직장에서 걸어온 전화였다. 속삭이는 낮은 목소리가 수화구 진동판을 울렸다.

《…위원장동무, 그래 일이 잘돼나가요? 기회를 놓치지 말고 용감하게 돌진하라요. 처녀들은 우물쭈물하는 졸장부가 아니라 대담한 남자를 좋아한다니까요. 평양처녀라구 주눅들지 말라요. 총각으로서 위원장동무 인품도 간단치 않아요. 자부심을 가지라요. 기자동무가 왜 온줄 알아요. 우리 공구강시험로때문에요? 신문기사를 쓰려구요? 아니예요. 위원장동무를 보고싶어 왔단말이예요…》

《됐어. 걱정말라구.》

원국은 웃으며 송수화기를 놓고말았다. 웅수의 말을 듣고나니 속박된 긴장감이 풀리고 이제껏 사랑놀음에 열중하고있는 자신을 새삼스레 돌이켜보게 되였다. 그는 옹졸하고 좁은 애정울타리에서 벗어나 공장사로청일군으로서의 랭정하고 경우바른 처신을 해야 하리라고 생각했다.

《그래, 이번엔 어떻게 오셨습니까? 정말 우리 공장에 찾아오고싶었습니까?》

원국은 취기가 사라져가는 얼굴을 쓰다듬고 선선히 물었다.

《녀자의 심중을 그런 식으로 파고드는건 좋지 않아요.》

진수옥은 너그럽게 힐책하고나서 걸상에 놓았던 보자기를 끌어 도면과 연구자료뭉테기를 꺼내 앞상에 놓았다.

《저의 아버지가 공구강을 연구해온 기술자료들이예요.》

《?!…》

원국은 감동보다도 놀라움이 더 컸다.

《아버지가 은퇴한 자기한테는 필요없다고… 이 공장 열처리직장청년들에게 꼭 필요할것이라고 했습니다.》

《고맙습니다. 진원삼선생은 정말 다심하고 친절한분입니다.》

《전 사실 저의 아버지견해가 불필요한지 원국동무네가 옳은지 잘 몰라요. 그저 사고날가봐…》

《걱정마십시오. 우린 기자동무가 간 다음에 두번에 걸쳐 아무런 사고없이 시험로를 가동해보았습니다.》

《성과가 있었는가요?》

《물론이지요. 우린 성공의 봉우리를 향해 꾸준히 전진하고있습니다. 아무튼 고맙습니다. 진원삼선생도 그렇고 기자동무도… 참 훌륭한 미덕을 지녔습니다. 남을 위해서 연구자료를 넘겨주고 수백리 먼 길을 이렇게 다닌다는게 어디 보통일입니까.》

《저도 그렇고 아버지도 사로청위원장동무한테서 그런 칭찬을 듣고싶어하지는 않아요. 어떤 미덕이 중요한게 아니라 열처리직장청년들의 공구강연구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길 바랄뿐이예요. 전 그만 돌아가겠어요.》

진수옥은 표연히 일어섰다.

림원국은 예상치 못한 처녀의 결심에 놀라 어정쩡히 따라일어났다.

《가다니요?! 내 말이 노여웠습니까?》

원국은 가책을 느꼈다. 후회스러웠다. 새로운 공구강연구에서 자기의 기술적신념과 자부심이 아무리 강하더라도 그렇게 로골적으로 경박스레 표현하지는 말았어야 했다. 참고할 가치가 없어도 연구자료를 고맙게 받아두면 되는것이지 무엇때문에 자존심을 앞세우며 비꼬았는가. 겸손하게 처신하지 못하고 어떻게 처녀의 마음을 사로잡겠는가. 누구한테도 좀처럼 굽어들거나 머리숙이지 않으려는 자기의 고집스런 성미가 또 일을 치는것 같았다. 이 기자처녀가 이제 가면 다시 오겠는가? 영영 헤여질수 있다는 위구심에 몸이 굳어졌다. 그러면서도 그와 같은 두려움, 처녀에 대한 강렬한 사랑은 직업과 생활에서 다져진 천성적인 자존심을 아주 밀어제치지는 못하였다.

《간다니 정말 유감입니다. 내가 친절하지 못해서… 이렇게 됐군요.》

《괜찮아요. 돌아갈 시간이 된걸요. 전 원래 녀자의 비위를 맞추는 사람을 싫어합니다.》

진수옥은 출입문으로 다가가 손잡이를 잡아당겼다. 그런데 웬일인지 문이 열리지 않았다. 처녀는 당황해서 원국을 돌아보았다.

원국은 급히 다가가 출입문손잡이를 당겼지만 열리지 않았다.

누군가 문을 밖에서 걸어놓은것이다.

원국은 즉시에 박웅수가 한 짓임을 알아차리고 송수화기를 들었다. 그러나 아무리 신호를 해도 열처리직장에서 받아주지 않았다. 그는 난처해서 송수화기를 놓았다. 그리고 자기의 엉큼한 속마음을 꿰뚫어보려고 문가에 잠자코 서있는 진수옥의 날카로운 눈길을 마주치지 않으면서 조용히 말했다.

《기자동무, 미안합니다. 거기 앉아 좀 기다려주시오.》

진수옥은 걸상에 앉지 않았다. 처녀는 무척 괴로운듯 눈시울을 내리깔았다. 다시 눈을 떴을 때는 이 공장사로청위원장이 분명 짜고 한 짓이라고 속단했는지 경멸에 찬 빛이 흘러나오는것이였다.

원국은 처녀의 그런 눈길을 고통스레 느끼면서도 다른 곳에 전화하지도 소리치지도 못하고 속수무책으로 앉아있었다. 그는 속으로 웅수를 욕질했다. 박웅수가 자기더러 주저하지 말고 그 어떤 결정적인 사랑의 고백을 하도록 기회를 만들려고 한 짓이 틀림없겠지만 오히려 분위기를 긴장시키고 처녀한테서 경멸과 반감만 사게 만든것이였다.

진수옥은 걸상에 앉았다.

《솔직히 말씀해주세요. 위원장동무가 이런 과업을 주었는가요, 아니면 사로청원들의 교양이 이렇게 나쁜가요?》

《내가… 시켰습니다.》

《너절하군요.》

《그렇습니다.》

《어째서 그랬는가요?》

《기자동무를… 사랑하기때문입니다.》

원국은 사형장에라도 나가는것 같은 결연한 용기를 내여 대답했다.

《사랑이…》

진수옥은 수집음과 당황으로 얼굴이 붉어지고 목이 메여 인차 다른 말을 잇지 못했다. 어째선지 처녀의 얼굴에는 경멸의 표정은 사라지고 쓸쓸하고도 부드러운 힐책의 낯빛이 짙었다.

《사랑을 이런 식으로 표현해야 되는가요? 동무의 지성도에 어울리지 않는 처사군요.》

전화종이 요란스레 울렸다.

원국이 송수화기를 들자 박웅수의 숨가쁜 소리가 귀청을 울렸다.

《위원장동무! 큰일났어요. 도사로청위원장동지가 공장에 왔어요. 성이 나서 방금 위원장동무방으로 갔어요. 숨으라요. 문을 열어주지 말구.》

《난 숨을 필요가 없어. 당장 와서 문을 벗기라구.》

원국은 송수화기를 내동댕이치듯 놓았다.

벌써 복도쪽에서 도사로청위원장의 거쿨진 목소리와 공장당위원회 지도원의 의혹에 차하는 목소리가 가까와오고있었다.

원국은 손으로 뽀마도 바른 머리칼을 꽉 움켜잡았다.

도사로청위원장이 파탄된 약혼식 분풀이를 하려고 장주천이 간 다음 공장에 달려온 모양이였다.

일이 더럽게 꼬여 처녀를 망신시킨다는 생각에 가슴이 찌르는듯이 아팠다.

그는 절망에 싸여 진수옥을 건너다보았다.

뜻밖에 처녀는 침착해서 앉아있었다. 당황이나 원망의 표정은 조금도 없고 이 모든 일을 자기가 저질러놓고 기다리는듯 이제껏 보지 못한 평온스런 얼굴이였다.

도사로청위원장은 다짜고짜로 문을 두드렸다.

《여, 위원장. 원국이! 왜 대답이 없어? 창문에 비친걸 봤는데. 문을 열라!》

《가만. 기다려주십시오. 이제 문을 열겝니다.》

《오라, 밖으로 걸어놨군. 그렇다구 내 손에서 벗어날줄 알아?》

박웅수가 헐떡거리며 계단을 뛰여올라와 공장당위원회 지도원한테서 욕을 먹으며 쇠를 열었다. 문짝이 떨어져나가게 문이 열렸다.

도사로청위원장은 걸상에서 조용히 일어나는 진수옥을 보자 놀래고 다음에는 성이 나 이그러진 얼굴에 비양조의 웃음을 띠였다.

《으흠, 일인즉 이렇게 됐구만. 약혼식장에서 곧바로 처녀 만나러왔다? 괜찮아. 도덕이, 공장사로청원들한테 꽤 모범이 되겠어.》

《위원장동지는 사람을 어느만큼 모욕해야 성이 차겠습니까? 난 그런 강제적인 혼약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원국은 진수옥이 방에서 나가주었으면 하고 괴롭게 쳐다보았으나 처녀는 조각상처럼 까딱않고 서서 자기와 관련된 이 불행을 감수하고있었다.

《동무는 제가 당한 모욕만 크지? 이 나이많은 도사로청위원장을 망신시키구 장주천위원장동지의 특별한 선의에 침을 뱉은건 어떻게 하구, 용서받을 일인가?》

진수옥은 견디기 어려운듯 걸상에 주저앉았다.

《위협하지 마십시오. 위원장동지도 술을 마시고 저도 마셨는데 오늘은 이만하는게 어떻습니까. 제가 래일 도사로청에 찾아가겠습니다.》

《아침 첫시간에 올라오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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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산님의 댓글

강산 작성일

(위에서 계속)

도사로청위원장은 문을 후려닫고 나가버렸다.

방안에 무덤속같은 정적이 깃들었다.

원국은 온몸에 불을 뒤집어쓴것 같았다.

그는 여전히 옴짝하지 않고있는 진수옥앞에서 수치감으로 땅속에라도 숨고싶은 심정이였다.

너무도 오랜 침묵을 이겨낼수 없어 원국은 용서를 비는 심정으로 말했다.

《려관에 바래드릴가요?》

《원하지 않아요. 난 동통이 와서… 앉아있었어요.》

진수옥은 싸늘히 뇌이고서 창백한 낯으로 일어나 조용히 문을 열고 나갔다.

원국은 배웅해줄 용기조차 내지 못했다.

그 녀자가 가버리자 원국은 소중한 모든것을 잃어버리고 다시는 되찾을수 없으리라는 좌절감에 속으로 울었다.

비애와 절망의 끝없는 나락에 정신도 육체도 깊이깊이 빠져드는것이였다.

허탈상태에 빠진 그는 박웅수가 죄진 얼굴로 들어와 잘못을 루루히 이야기할 때도 한마디도 알아듣지 못하고 멍하니 앉아있었다.

《기자동무가 이걸 잊었다면서 나더러 전달해달라고 했어요.》

원국은 박웅수가 내주는 얄팍한 종이꾸레미를 헤쳤다. 진갈색의 연한 격자무늬바탕에 국화꽃문양이 점잖게 박힌 봄가을 머리수건이였다.

《어머니한테 드리는거랍니다.》

친구의 나직한 설명은 원국의 심장을 비수처럼 날카롭게 찌르며 지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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