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편소설 전장의 행운아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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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4 장
신념의 산마루
2
대오는 몹시 더디게 전진해갔다. 앞 못 보는 부상병을 데리고가자니 도무지 길이 축나지 않았다. 처음에는 담가에 눕히고 교대로 들고갔으나 산세가 점점 험해지고 게다가 식량난도 심각해져서 허기가 지니 그것도 쉽지 않아졌다. 가파로운 산길로 담가를 들고가느니보다는 담가를 버리고 부상병을 량쪽에서 부축하며 오르는것이 나았다. 굼뜬 행군속도를 두고 누구보다 괴로와하는것은 부상병 하사와 간호원 심초향이였다.
지금도 초향이는 안창항에게 의지하여 걸어가는 하사를 뒤따르며 미안해서 어쩔바를 몰라한다.
《이젠 제가, 제가 부축하겠습니다.》
《그만두라우, 내 걱정은 말구… 힘을 내라구.》
그러다가 내리막길에서 하사가 나무뿌리에 걸채여 넘어지면서 부축하던 사람만이 아니라 뒤따르던 초향이까지 한동아리가 되여 나동그라졌다. 그럴 때도 제일 죄스러워하는것은 하사다. 의지해주는 사람이 더 힘들것 같으나 실은 의지해가는 사람이 주력으로나 심리적으로 더 힘들고 괴로운것이였다.
가장 난문제는 식량이 떨어진것이였다. 특무장이 비상용으로 배낭속 깊숙이 간수했던 좁쌀과 통강냉이를 약처럼 조금씩 끓여서 끼니를 에워왔는데 이제는 그나마도 동나버렸다. 구복만 좀 채워도 걷기가 한결 헐해지련만 누구나 맥이 진해버려서 몇갑절 더 힘이 들었다. 지금 톺아오르고있는 산길은 모두의 의지를 가늠해보게 하는듯싶었다. 한걸음한걸음을 대원들은 이를 악물고 필사의 힘을 다해 내딛고있었다.
《특무장, 무슨 수가 없을가?》
《당장은… 저도 안타깝습니다.》
대렬에서 얼마간 떨어져 걸으며 학문이 묻는 말에 김기전은 한숨을 지었다. 하긴 특무장이라고 끝없는 잠재력을 가진 사람은 아닌것이다.
《알겠소. 당분간은 참고 견딥시다. 부상병동무가 더 힘들거요. 그러니 식량이 떨어졌다는 내색은 하지 말구 비상용으로 먹을만한것을 더 찾아보고 아무것이건 간호원동무한테 다 모아주도록 하시오.》
《알았습니다.》
우연히 그 말을 귀동냥해 듣게 된 허찬은 침울한 기색을 지었다. 행군이 시작된 때부터 그는 늘 대오의 맨 꼬리를 따르고있었다. 직급상으로 보면 그가 대렬을 인솔해야겠지만 며칠전 그 밤나무아래에서 있은 일로 면구스러움을 이길수 없는지라 말동무도 없이 지금도 외톨로 터벅터벅 걸었다.
생각해보면 운명이란 이상야릇한것이였다. 지휘부의 검토를 받은 후 아무러한 실권도 없는 상태에서 지내다가 겨우 처벌해제를 받았지만 신형포진지습격에 나갔다가 그냥 돌아온것때문에 또 비판을 받고있던 상태에서 후퇴에 들어간것은 그의 의식과 행동에 큰 영향을 주었다. 그렇게 떳떳치 못한 처지로 사단지휘부를 따라가는것은 매우 괴로운 일이였다. 궁리끝에 병을 핑게로 야전병원과 함께 행동하기로 승인받았는데 이번에는 정찰중대와 맞다들어 따분한 모서리에 서게 되였다.
군의장이라는 녀석이 괘씸했다. 먼저 떠나보낸 자동차를 되돌려가지고 오라는 요구에 시쁘둥해하더니 떠나가서는 함흥차사가 되여버리고말았다.
정찰대를 찾아 적후에 들여보낸 전대장과 무선수가 없고보니 윌리스무선차는 사단의 문건마대들을 이송하는 수송차로 회수되여버렸는데 허찬에게는 무척 아수한 일이였다. 난다긴다 하며 윌리스무선차를 타고다니던 그, 세계전쟁사를 헤집으며 남들을 자기 의사대로 부리던 사단급의 과장이 앞을 못 보는 하사와 햇내기간호원처녀가 동행자의 전부인 보잘것없는 졸병신세에 굴러떨어지고보니 생각이 많았었다. 허나 그 덕분에 그 누구의 통제를 받지 않게 된것은 다행한 일이였다. 하루이틀 더 군의장을 기다려보다가 오지 않으면 큰길에 내려가 아무 자동차라도 얻어타고 후퇴할 생각이였다. 적들의 땅크와 포차들이 북으로 달리고있다는 객관적인 현실을 무시한 결심이였다. 헌데 이번에는 저 리학문이네가 나타나서 이렇게 자유를 구속하는것이다. 그들은 그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무작정 험산오지로 끌고가고있다. 가면 갈수록 푸주간으로 가는 길처럼 끔찍한 산길이였다.
웬간한 야산지대라면 남아있는 밤이나 찔광이 같은거라도 따먹겠는데 어찌된 셈판인지 이 깊은 산악지대에는 산골에 흔한 도토리조차 구경할수가 없다. 그런데도 대렬은 부디부디 더 깊고 험한 산악지대로 찾아들어가고있다. 사단이 꼭 그리로 후퇴했을것이라고 하지만 리치에 닿지 않는 소리다. 경무장한 정찰대와 달리 숱한 무장장비와 인원들, 방대한 참모부서들을 가진 사단이 기동에 유리한 평야를 옆에 두고 이런 길을 택한단 말인가. 설혹 벌방의 큰길들은 각종 기동수단을 가진 적들때문에 차지할수 없다손쳐도 야산구릉지대에 뻗어간 소로길은 얼마든지 따라갈수 있을게 아닌가. 인가가 있고 산열매도 얻을수 있는 야산지대로 행군하면 이런 식량난은 겪지 않게 될것이다.
도무지 현실적인 타산을 세울줄 모르는 리학문과 같은 사람을 따라가다가는 심산유곡의 막다른 골목에 빠져들게 되리라는 우려가 차츰 짙어갔다. 빠른 기동수단을 가진 적들이 이제 서울과 원산, 평양과 함흥… 오리걸음을 하고있는 우리를 썩 앞지르면 느렁뱅이들인 우리가 자연히 포위의 함정에 들게 될것은 너무나 자명한 일이다.
(안된다. 안돼! 그렇게 무맥하게 죽을수는 없어. 살아야 한다. 우선 살아서 그다음의 타산을 세워야 하지 않겠는가. 사단을 찾아가자는것도, 아군이 후퇴하는것도 궁극은 위험에서 빠져 살아나자는데 목적이 있는것이 아닌가.)
현실적인 조건에서 아무리 타산을 세워보아도 야산지대로 빠져나가야 한다는 결론밖에 더 다른 선택이 없었다. 그러면 정찰대의 행로를 돌리는것이 그의 힘으로 가능한가?
(아니야, 이미 거듭되는 처벌로 권위를 손상당한데다가 그 밤나무사건으로 발언권을 완전히 잃은 지금의 내 처지에서 완고한 부과장의 고집을 꺾어낼 가능성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면 혼자 결심대로 한다?! 그건 도망치는거나 같지. 명색이 과장인데 그렇게야 어떻게…)
그의 머리속에는 사단을 만나기는커녕 사방이 절벽에 둘러막힌 심심산골에서 방황하다가 적의 사면포위속에 빠지는 정찰병들의 모습이 그려졌다. 추격해오는 적과 이미 북쪽지대를 점령하고 남하해오던 적들이 산고지를 먼저 차지하고 기관총사격을 퍼붓고있다. 거기에다가 동해안에서 날아오는 함포탄과 적비행대가 내리떨구는 폭탄이 불행한 운명의 사나이들에게 죽음을 강요하고있다. 그속에 허찬 그자신의 모습도 있다.
순간 그는 앗! 소리를 치며 꽤 깊은 웅뎅이에 빠져 어푸러졌다. 참나무와 자작나무가 빽빽한 릉선에서 가랑잎무지를 밟다가 미끄러진것이였다.
《제길헐!》
잔등에 마른땀이 흘렀다. 웅뎅이에는 빠졌어도 괴멸의 악몽에서 깨여난것이 다행스러웠다. 그러나 몸을 일으킬 용기가 나지 않아서 뒤로 벌렁 누워버렸다. 하늘을 가리운 우중충한 나무우듬지를 쳐다보느라니 방황하는 상념에 빠져들었다.
(참, 방금 지나온게 죽령부근일텐데… 가만 가만, 거기서 소도로를 타면 인차 철길과 큰길을 만날수 있지 않겠는가. 그렇지. 옳다, 렬차이든 자동차이든 잡아타기만 하면… 만사는 해결된다. 여차하면 서울 명동구에 있는 우리 집에 가 숨어서 때를 기다릴수도 있지. 한데 나 혼자 가겠다고 하면… 그건 안돼. 호락호락 넘어갈 리학문이가 아니니까.… 참, 부상병을 데리고가겠다고 하면 어떨가?! 옳다, 당장 식량이 말짱 떨어진 판에 부상병을 끌고 산악지대를 헤쳐간다는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그래 그래, 명분이 선다, 서!)
갑자기 머리우에서 말소리가 들리는 바람에 상념은 깨여졌다.
《이걸 잡으십시오.》
특무장 김기전이 지팽이삼아 짚고가던 나무막대기를 드리워주며 맥빠진 소리로 불렀다.
《고, 고맙소.》
《한참이나 찾았습니다, 보이지 않길래.》
《그만 발을 헛디뎌서… 미안하게 됐소.》
《어서 갑시다. 모두들 기다립니다.》
웅뎅이에서 기여나온 허찬은 손을 허리에 얹고 절룩거리며 비탈길을 톺아올라갔다. 김기전이 부축해주었는데도 자꾸만 허청거리며 발을 헛디뎠다. 씨근거리는 숨소리가 불안스럽게 들렸다.
그럭저럭 산마루에 올랐다. 사방 십리아근이 손바닥처럼 바라보일만한 고지였지만 무성한 수림에 뒤덮여있어서 동서남북조차 분간하기 어려웠다.
일행은 모두들 여기저기 나무밑둥에 기대앉아서 한숨 돌리며 허찬을 기다리고있었다. 그들앞에 이른 그는 한손으로 사스레나무를 잡고서서 새삼스럽게 여러 사람들을 휘둘러보았다.
《동무들, 짐스럽게 굴어서 참 미안하오. 부과장동무 그리고 동무들! 내 말을 듣소. 난 방금까지 우리들의 출로에 대해 생각해봤소. 우리가 방금전에 지나온 저 죽령밑으로 내려가면 철길과 큰길이 뻗어있을거요. 그 길을 따라가면 단양을 거쳐 제천으로, 제천을 거쳐 원주, 서울로 갈수 있지. 그 길로 가는게 어떻겠소?》
아닌밤중에 홍두깨 내밀듯 하는 주장에 모두가 어안이 벙벙하여 허찬과 학문을 번갈아 바라볼뿐이였다.
군화끈을 끙끙 조이고있던 리학문도 일순 그의 말뜻을 알아차릴수가 없었다.
《그럼? 사단으로는 안 가고?!》
《부과장동무는 사단을 만날수 있다고 보오?》
어이없다는듯 픽 웃으며 오히려 허찬이 되물었다. 의아한 기색을 지으면서도 학문은 마디마디에 힘을 주어 또박또박 말했다.
《만날수 있구말구요. 아니, 꼭 만나야 합니다.》
《허! 그렇게 생각한다면 더 말할게 없구만. 하지만 말해야겠소. 부상병을 그냥 산속으로 끌고가는것은 무모한 행위라고 난 생각하오. 가슴아픈 일이지만 적들의 대공격에 사단은 이미 적지 않은 피해를 당했소. 그러나 아직 남아있는 전투기술기재들과 인원들이 적지 않은만큼 이런 험한 산악지대로는 행동하지 않을거요. 사단이 꼭 산악지대로 들어갔다고 보는것은 사단이 괴멸되였거나 괴멸되지는 않았다손쳐도 온전히 존재하지 못한다고 보는 패배주의요. 안 그렇소?》
《그런 말을 어떻게 감히…》
학문은 몸서리를 쳤다. 그래도 허찬은 꺼리낌없이 뇌까렸다.
《왜? 내가 못할 말을 했소? 사실이 그렇지 않소. 나도 그런 견해를 무작정 부정하는것이 아니요. 가고가도 사단의 행적이 없고 무선망도 잠잠하지.… 군적을 가진 군인으로서 나 역시 사단이 무사하기를 바라오. 사단이 무사하다면 꼭 이런 산악지대로가 아니라 야산구릉지대로 행군해갔을거라고 주장할뿐이요. 물론 뜻밖의 정황으로 부대들이 흩어져 산재했던가 멀리 후방으로 긴급수송됐을수 있지만 말이요. 그러니 난 힘겨운 산발을 타고갈것이 아니라 렬차나 자동차신세를 져서라도 안전한 후방으로 한시바삐 들어가자는거요. 그게 사단과 만나는 가장 합리적인 출로가 아니겠는가.》
《그럼… 서울로 가자는거요?》
학문은 말을 더듬었다. 섶에 불달리듯 격분이 치솟는것이였다. 그래도 허찬은 조금도 개의치 않고 당당하게 나왔다. 그의 사고력은 이미 수습할수 없을만큼 이지러져있었다.
《정 막부득이한 경우엔 그렇게 할수도 있는거요!》
《아니, 그렇겐 못하오. 당장은 사단을 찾아야 하지 않겠소. 서울은 벌써 미국놈들이 타고앉았을수 있소.》
《못하는 소리가 없군. 그래 우리 군대가 서울을 그렇게 호락호락 내줄것 같소? 인천상륙에 성공했다는 적들의 개수작을 믿는가? 엄중하오, 엄중해. 지휘관이란 사람이…》
허찬은 두손을 허리춤에 올려짚고 씩씩거렸다. 자기의 목적을 위해서는 모든것을 구애없이 활용하군 하는 기질이 다시 발동된것이였다. 그것이 궤변에 가까운것일지라도 때에 따라 그의 입에서는 너무도 당연한 진리처럼 리용되군 했다.
(허찬, 이 사람은 과연 어떤 사람인가?!)
학문은 아연해서 입을 딱 벌렸다. 원체 사람을 의심해본적이 없는 그였으나 허찬은 의문스러운 인물이였다.
그의 뇌리속에 굳어져온 허찬에 대한 인식은 좋은것이 못되였다. 깊이 사귀여볼 계기는 그리 없었어도 전쟁 초기부터 지금껏 이러저러한 기회에 알게 된 허찬은 겉과 속이 같지 않았다. 더우기 탄알을 랑비하는 행동을 목격한 뒤부터는 그의 군인적인 품성까지 의심하게 되였다.
지금 이 사람이 정말 아군에 대한 믿음이 있어서 하는 소리인가?! 버선목처럼 뒤집어볼수 없는것이 사람의 속이여서 뭐라 꼬집을 말이 없었다.
(어쨌든 안된다. 분명 적들은 우리보다 먼저 서울에 가닿을것이다. 이건 객관적인 현실이다. 현대적인 기동수단을 가진 적들이 아닌가. 이런 조건에서 사단은 틀림없이 소백산줄기를 타고 북으로의 행군중에 있을것이다.)
《어떻게 하겠소? 동무들도 행군로를 바꿔야지?》
그만하면 납득이 되리라고 여겼던지 허찬은 모두를 둘러보며 득의만면해했다.
《안되오!》
리학문이 완강히 부르짖었다.
《좋소.》 허찬은 으드득 어금이를 갈았다. 《그럼 난 부상병동무만이래도 데리고가겠소. 동무도 돌심장이야 아닐테지? 저 부상자와 간호원동무를 기약없는 산속길로 굳이 이끌어가자고 한다면 난 과장으로서 동무를 용납하지 못하겠소!》
진저리나는 혐오감에 학문은 몸을 떨었다.
《그런 소위 인정으로 나약한 자신을 가리우려고 하지 말기를 바라오. 언제 보나 과장동무의 론리는 지나친 주관에 빠져있구만. 어디서 그런 쓸개빠진 론리를 배웠소? 좋소, 정 갈테면 가시오. 그러나 우린 어떤 일이 있더래도 사단을 찾아가야겠고 새로운 전투임무를 받아야겠소.》
《고맙소. 그럼 중대장은 어떻게 하겠소?》
허찬의 날카로운 눈길이 그때까지 덤덤히 서있는 라동수에게로 홱 돌아갔다. 그 눈길에는 어때, 당신이야 내 뜻을 따르겠지? 하는 거의 장담에 가까운 기대가 서려있었다. 했으나 동수는 받는 소처럼 고개를 짓숙이였다.
《그럴수 없습니다. 과장동무, 사단을 찾아가자는데… 그래선 안됩니다.》
《누군 뭐 사단을 찾아가지 말자오?》
《하지만 그쪽으로 가는 길은… 안됩니다.》
《좋소. 그럼 간호원동무는? 방금전에도 말했지만 부상병을 끌고 무인지경의 산악지대로 행군하는건 자멸행위요. 큰 도로에서 차량을 만나면 쉽게 후퇴할수 있단 말이요. 물론 내 혼자 가면 홀가분하리란걸 모르는바가 아니요. 그러나 량심껏 권고하건데 가망없는 길을 가는 동무들을 그냥 내버리고 갈수가 없어서 하는 말이요. 이건 나의 량심이고 헌신이란 말이요. 어서 결심을 세우시오.》
심초향은 한동안 입술을 짓씹으며 망설이는듯 했다. 답답해날만큼 오래동안 침묵하고있더니 이윽고 두손을 가슴앞에 모두어쥔채 두눈에 눈물이 가랑가랑해서 입을 열었다.
《아직까지 생사를 같이해오다가… 이런 결심을 하게 되여 정말 미안합니다. 부상병동무때문에…》
《간호원동무!》
리학문은 저도 모르게 격한 목소리로 불렀다. 그러나 허찬에게 말허리를 끊기워 더 말을 이을수 없었다.
《여러말 할게 없소. 지금은 전시가 아니요? 순간에 모든것이 결정되는 전시란 말이요. 결심을 세웠으면 행동해야지. 자, 모두들 다시 만납시다.》
처녀의 마음이 변할가봐 저어하는듯 서둘러 독촉의 말마디들을 소금처럼 뿌리고난 허찬은 부상병의 옆구리를 끼고 와락와락 수풀을 헤치며 걸음을 떼였다. 주밋거리며 리학문과 정찰병들을 돌아보던 심초향은 나부시 허리숙여 절을 하고 그들의 뒤를 따라갔다. 그 모습은 부상병을 떠나서는 간호원의 존재가 없다는것을 모두에게 상기시켜주는것만 같았다.
하사는 차마 발길이 떨어지지 않는듯 보지 못하는 눈으로 자꾸만 뒤를 돌아보았으나 끝내 발길을 멈추지는 못했다. 고마운 정찰병들에게 부담스러운 존재로 되는것이 미안해서인지 아니면 험산지대가 아닌 야산지대로 내려가면 후방으로 속히 가닿을수 있다는 허찬이의 말을 진정으로 믿어서인지 그 까닭은 알수 없었다.
학문은 당장 권총을 꺼내들고싶은 충동을 겨우 억눌렀다.
반드시 산악지대로 가야만 한다는 근거를 지금 당장 이 자리에서 어떻게 세운단 말인가. 사단이 건재해있으며 산악지대로 행군해야만 사단을 만나게 되리라는것이 그의 량심이고 신념일뿐이였다. 아무리 가증스럽대도 확정적인 타당성이 없는 조건에서 다른 사람들에게 그것을 강요할 권리는 그에게 없었다.
산마루를 내려가는 세사람의 뒤모습이 나무나무사이로 얼씬거리더니 아예 사라져버리고말았다. 서글픈 작별을 묵묵히 감수할수밖에 없는것이 분했다.
부지중 리학문은 마음속에서 절로 울려나오는 비장한 노래의 선률을 들었다.
《비겁한자야 갈라면 가라 우리들은 붉은기를 지키리라.》
항일전의 나날에 투사들이 부른 그 노래가 이 순간 그의 심신에 불을 달아주는것 같았다.
(그렇다, 마음먹고 떠난 길은 항일투사들처럼 끝까지 가야 한다. 우린 반드시 사단을 만나게 될것이고 사단과 함께 최고사령부로 기어이 갈것이다.)
그는 힘과 마음을 가다듬고 아무말없이 첫 발걸음을 떼였다. 그의 뒤를 따라 정찰병들은 무거운 발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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