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편소설 전장의 행운아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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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4 장
신념의 산마루
1
울긋불긋한 단풍이 마산일대의 산발을 아름답게 물들였다. 전화의 불길도, 사정을 모르는 파편도 계절의 신묘한 재간앞에서만은 무기력한 모양이다. 빨갛고 노오란 꽃단풍은 하늘선녀의 항라수건마냥 산허리를 휘감았다. 남해안지대의 특이한 자연풍치다. 맨 아래 산기슭에는 사철 푸른 대숲이 우거지고 산마루엔 소나무나 삼송처럼 겨울에도 푸른빛을 떨치는 바늘잎나무들이 자라고있으나 단풍나무처럼 잎지는 수목들은 산중턱에 뿌리내렸다.
쏟아져내리는 폭포수만 있다면 유람객들의 흥취를 돋굴만도 하지만 싸움이 한창인 지금 정찰병들은 그처럼 아름다운 자연풍경의 유혹에 관심할 계제가 못되였다.
단풍이 불타는 산중턱에 앉아서 건너편산을 바라보면서도 그들은 전선너머 부대를 생각하면서 사뭇 착잡한 제나름의 추리를 더듬고있었다.
부대와의 련계는 아직 이어지지 않았다. 새 무선기에 전원까지 새것을 련결했어도 쓸데없는 잡파장들만 걸려들뿐 부대의 전파는 끝내 잡히지 않았다.
(혹시 부대에 다른 정황이 생긴것이 아닐가? 포로했던 장교놈의 말이 사실일수도 있지 않은가.)
이상한 예감에 가슴이 시서늘했다.
산아래의 차길로는 이 며칠째 적들의 화물차들과 땅크들, 포를 꽁무니에 단 포차들이 북을 향해 길이 메이게 달리고 적 보병놈들의 대렬도 먼지를 뽀얗게 일구며 북으로만 움직였다.
경험있는 정찰병들은 적후에서 포착되는 적들의 행동과 전투기술기재들의 움직임을 보고도 전선정황을 분석하고 판단하는 독특한 감각을 가지고있다.
학문은 전선에서 중대한 변화가 일어나고있는것을 감촉했다. 하지만 그것을 입밖에 내여 말할 용기가 없었다. 그것은 대원들에게 말하기 두려워서도 아니였고 부디 숨기고싶어서도 아니였다. 관찰되는 사실이 분명한 판단을 내리게 하는것임에도 그 자신이 너무도 자명한 현실을 믿을수가 없었기때문이였다.
이럴 때일수록 지휘부와의 련계가 중요한것이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벌써 며칠째나 무선련계가 이루어지지 않는다.
어떻게 해야 하는가. 배심있게 적후에 눌러앉아 활동을 계속할것인가 아니면 부대를 찾아 떠날것인가?!
날이 채 어둡기 전인데도 동쪽하늘에는 동이처럼 둥근 보름달이 두둥실 떠올랐다. 한잔술에 거나하게 취한듯 벌깃해서 동쪽의 나무우듬지들우에 걸터앉은 달은 점점 놋양푼처럼 환해지더니 숲속을 대낮처럼 밝히며 이상한 감회를 불러일으켰다.
날자를 꼽아보던 학문은 문득 가슴이 뭉클해졌다.
(아, 오늘이 추석이구나.)
추석날의 둥근달은 사람들에게 무척 많은 추억을 불러일으키는 법이다. 달밝은 이런 밤이면 아이들이 뜀박질하며 뛰놀고 늙은이들은 막걸리를 마시며 흥취를 돋구군 했지.
《우리 고장에선 말야, 추석날엔 무덤우에 꽃이 핀다구들 하지.》
외따른 곳에 복남이와 나란히 반쯤 누운 김동호가 실눈을 짓고 말머리를 떼는데 복남이가 아는체하며 반색한다.
《가을에 꽃이요?! 아, 들국화가 핀다는거겠지요?》
동호가 복남이의 안장코를 꾹 눌러준다.
《잠자코 듣고만 있으라구, 꼬마! 그건 말이야, 자손들이 번성해서 그 가문의 일이 잘된다는 소리야. 이담에 내가 나이들어 죽거들랑 이런 추석날엔 내 자손들이 조상이라고 내 무덤을 찾게 되겠지.》
《에이, 끔찍한 소리! 듣기 싫어요.》
손으로 두귀를 틀어막는 복남이를 능청스레 건너다보며 동호는 능글능글 웃는다.
《원, 별소릴! 사람이 한번 났다가 한번 죽는거야 당연한 세상리친데 뭘 그래. 헌데 문제는 날 찾아올 손자손녀들이 이 김동호를 어떻게 생각하겠는가 그게란 말야. 이렇게 말들 할거야. 우리 할아버지 또는 우리 몇대 조상은 흔치 않은 영웅이라구, 나라를 통일시키는 싸움에 정찰병으로 참가해서 용맹을 떨쳤다구 말이야.》
《하하… 영웅이요?》
이발이 다 드러나도록 웃어대는 복남이를 흘기며 동호는 주먹을 쳐들었다.
《왜 못될것 같아?》
《누가 못된댔나요 뭐. 그저 죽었다는걸 생각하니까 우스워서 그러지.》
그때 갑자기 근처의 풀숲이 와슬렁거렸다.
《누구얏?》
김동호가 소리쳤다. 은빛같은 달빛에 맨머리바람의 사나이가 드러났다.
《참매… 참매가 아니요?》
풀숲우에 머리를 솟군 그 사람은 겨우 신음 비슷한 한마디를 던지고는 다시 풀숲에 잦아들어 기척이 없었다.
《당신은 누구요?》
대답이 없었다.
이상한 생각이 든 정찰병들이 달려갔을 때 그 사나이는 풀포기를 그러쥐고 의식을 잃은 상태였다. 인민군대 소위였다. 인민군대 복장을 하고 어떻게 이처럼 깊은 적후에 들어왔는지 이상한 일이였다.
급히 군복을 헤집고 살펴보니 가슴에 총상이 있고 오른쪽다리에는 피가 질벅하니 흐르고있었다. 이런 몸으로 산길을 기여왔다는것이 잘 믿어지지 않았다.
응급처치를 받고서야 정신을 차린 그는 학문이를 알아보고 몸을 뒤틀었다. 경례하려고 손을 쳐들었으나 맥없이 다시 내리였다.
《정찰부과장동지, 사단통신과 전대장 소위 강승일…》
《됐소, 됐어. 누워서 말하오.》 학문은 그의 손을 잡아 눕혀주며 쏠리는 기대감을 참지 못해 조급하게 물었다.
《대체 어떻게 된 일이요?》
승일은 동통이 오는지 괴롭게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제가 떠날 때 사단은… 진촌일대에서 힘겨운 전투를 벌리고있었습니다. 사단은 지리산으로…》
《뭐요?! 지금위치는?…》
《모르겠습니다.…》
《헌데 어떻게 동무 혼자서 왔소?》
무겁게 두 눈을 감았다가 뜬 승일은 터갈린 입술을 혀로 감빨더니 혼신의 힘을 모은듯 꽤 선명하게 말을 이었다.
《사단에서는 허찬과장동지한테 정찰대를 소환하라는 지시를 주고 떠났습니다. 그런데… 무선련계가 안되고 사단은 떠났는데… 허과장은 위병이 도져 먼길을 못 걷겠다면서… 군의소대렬과 같이 떠나갔는데… 가면서 나한테… 위임했습니다. 그래서 무선수동무와 둘이서 떠났는데… 무선수는 전선을 넘다가 희생되구… 나 혼자 이렇게… 사단의 지시가 와닿지 못하면… 어떡하겠습니까. 정말 혼… 났습니다. 적후엔 첨 들어와보는데다가 정찰대가… 있는 곳도 딱히 모르겠구… 무섭기도 하구… 이틀전에 이곳의 포탄창고가 녹아났다는걸… 주민들한테서 듣고… 바로 그게 정찰대가 한… 일일게라구 짐작했습니다. 그러니 분명 이 근방에 있을거라구… 내 짐작이 옳았군요.》
《그만, 그만 말하오.》
손목을 쥐고 맥박을 가늠해보던 학문은 점점 해쓱해지는 그의 얼굴을 들여다보며 급급히 만류했다. 기력이 진해가는 속에서도 무엇인가 자꾸만 말하려는 강승일의 호흡이 점점 빨라졌다.
《일… 없습니다. 부과장동지, 부디…》
끝내 그는 말끝을 맺지 못한채 머리를 옆으로 떨구었다.
《동지! 소위동지!》 김동호가 헉 숨을 들이긋고 학문을 쳐다보았다.
《부과장동지!…》
《음―》
학문은 신음비슷한 소리를 흘리며 떨리는 손으로 강승일의 두눈을 감겼다.
허찬의 동그스름한 얼굴이 확대되여 보여왔다. 얼마나 대조적인가. 애젊은 이 소위는 전우들을 위해 목숨까지 내대고 적후에 들어와 끝끝내 련계를 맺어주었다. 그런데… 정찰대를 버리고 군의소대렬과 함께 떠났다는 사실이 가슴을 아프게 저며댔다. 전쟁이 일어나던 그때에도 병원에 가있던 그였다. 치밀어오르는 분격과 환멸심에 구역질이 나는것을 어쩔수 없었다. 앞에 그가 있다면 당장 권총을 뽑아들 심정이였다.
양지바른 산언덕 단풍나무숲속에 전대장을 정히 안장한 정찰병들은 곧 사단을 찾아 떠났다. 누구도 말이 없었다. 정찰임무를 수행하고 부대로 돌아갈적마다 기뻐서 들썩이던 그들이였다. 저마다 깊은 생각에 잠겨 묵묵히 걷고걸었다.
적 비행기편대가 우르릉거리며 북쪽을 향해 날아갔다. 그중의 한대가 거밋한 물체를 내리떨구었다. 돌멩이처럼 날아내리던 그것은 인차 확 터져버렸다. 그러자 모래를 쥐여뿌린듯 무수한 물건들이 날아내리더니 점차 눈송이가 흩날리는듯 숲의 정수리우에 너풀너풀 날렸다. 삐라였다.
《유엔군 인천상륙에 성공!》
《인민군정찰병들이여! 유엔군의 대부대들이 인천에 상륙하여 서울탈환작전에 진입했다. 인민군대는 완전포위에 들었다. 멸망의 운명은 당신들에게 차례졌다. 헛된 고생 하지 말고 투항하라!》
벌거덕거리는 종이장들에는 인천부두에 상륙하는 《유엔군》부대들과 서울을 포격하는 미군포부대의 사진이 찍혀있었다.
김동호가 삐라장을 들여다보다가 홱 쥐여뿌렸다. 정찰병들은 말없이 삐라장들을 짓밟으며 걸어갔다. 걸죽한 욕설을 퍼붓는 사람도 없었고 빈정거리며 익살을 부리는 사람도 없었다. 믿느냐 마느냐 하는것은 그들에게 아무런 소용에도 닿지 않는것이였다. 사단을 찾아가면 모든것이 석연해질것이고 그에 따라 차후 행동방향이 정해질것이다. 이 싸움에서 인민군대의 승리는 믿어 의심할것이 아닌것이다. 승리에로 가는 과정이 문제일뿐이다. 그 길에 시련과 난관이 있을수는 있겠지만 즉 전략적일시적인 후퇴도 있고 가슴아픈 희생도 있을수 있겠지만 김일성장군님께서 계시는 한 원쑤들을 종국적으로 쳐눕히고 조국을 통일할 승리의 날은 분명 약속되여있는것이다.
그러나 부산까지의 단 하루길을 앞에 두고 북쪽으로 행군해가자니 모두들 마음이 무거웠다. 그러면서도 후퇴의 그 길이 그처럼 머나먼 북쪽으로까지 이어질줄은 누구도 짐작하지 못했다. 어디쯤이겠는지는 알수 없어도 의정부나 개성쯤에서 인차 반격으로 이행하게 될것이라 생각했다.
학문의 머리속에는 킨작전을 파탄시키며 종횡무진하던 남해안의 낯익은 지명들이 되새겨졌다. 후두두 떨리는 손으로 안주머니에 들어있는 편지를 더듬어보았다.
(고향을 눈앞에 두고 정말 물러서야 하는가?)
뼈저린 통분감이 가슴을 쳤다. 승승장구하며 남진해온 길을 되짚어 들어가자니 한걸음한걸음이 천근만근으로 무거웠다.
《에이, 난 더 못 가겠어요.》
가래나무뿌리가 얼기설기 드러난 홈타기를 훌쩍 건너뛰다가 어푸러진 복남이가 배낭까지 내동댕이치며 신경질을 부렸다.
《일어서! 힘들어도 가야 돼.》
엄하게 말하는 김동호의 독촉에 픽 돌아앉았다.
《어떻게 나온 길이길래 훌쩍 되돌아간단 말이야요?》
《누군 뭐 가고싶어서 가는줄 알어? 우린 지금 최고사령부의 새 전투명령을 받으러 가는 길이야. 새로운 전투명령을 받고 새로운 승리를 위해서…》
《그걸 누가 모르나요? 너무 힘들어서 그러지.》
《철딱서니 없는것 같으니…》
드디여 사단이 집결했던 진촌에 이르렀다.
부대지휘부의 엄페호는 포탄에 무너져내리고 군의소가 자리잡았던 곳에는 빈 링게르병들이 굴러다녔다.
전선 넘어 돌아오면 고향집처럼 정다웁던 부대, 전선넘어 떠날 때면 마음속에 따스한 보금자리로 안고가던 부대의 모습은 황량하고 쓸쓸한 모습으로 바뀌였다.
《부과장동무가 아니요?》
산기슭에 통나무로 조그마하게 쌓아올린 엄페호에서 상좌견장을 단 한사람이 뛰여나오며 소리쳤다. 한태설련대장이였다. 걱실걱실 다가온 그는 말없이 학문의 거칠어진 손을 잡았다.
학문은 멀거니 그를 바라보기만 했다.
여느때와 딴판으로 서글픈 미소를 머금은 태설은 한눈을 끔쩍하더니 나직이 뇌이였다.
《부대는 썩 뒤로 들어갔소. 마음을 굳게 먹으라구. 우리는 일시적인 전략적후퇴를 하게 되우. 이것은 결코 패전을 의미하는것이 아니우. 전쟁의 종국적인 승리를 위해서, 적을 최종적으로 타승하기 위해서 일시적으로 후퇴를 하게 되는것이우.》
그의 말에 여직껏 지탱하고있던 마음의 긴장이 탁 풀리며 풀썩 주저앉을것 같았다. 온몸의 기운이 발밑으로 빠져나간듯 다리가 휘청거렸다.
(어쩌면 그런 말을 할수 있단 말인가. 얼마나 많은 피와 땀을 바치며, 얼마나 많은 목숨을 바치며 내달려온 길인데 물러선단 말인가.)
태설은 주의를 주듯 오른손을 학문의 어깨우에 얹으며 속삭였다.
《그러지 말라구. 이럴 때일수록 대원들이 지휘관의 얼굴을 보우. 곧 5호지점으로 출발하라구. 거기서 사단지휘부를 만나게 될것이우. 신심을 가지라구. 우리의 최후승리는 확정적인것이기에 최고사령부에서는 적들을 포위소멸하면서 조직적으로 후퇴할것을 명령하였소. 잘 가우.》
《그럼 련대장동지는?!》
《우린 사단의 후퇴를 엄호하고 인차 따라가게 되우. 기동방어로 적들의 진공을 최대한 지연시키고 사단의 손실을 최대한 줄이는것이 우리의 임무니까. 적의 공격을 눌러놓고 인차 뒤따라갈테니 안심하고 떠나우.》
《우리도 련대와 함께 싸우겠습니다.》
《아니우. 정찰대는 시급히 사단지휘부를 따라잡고 정찰척후임무를 수행해야 하우. 인천에 상륙한 적들이 아군의 전선과 후방을 갈라놓고 아군주력을 포위섬멸하려구 하니 후퇴하는 사단의 후위를 엄호하는것도 중요하지만 포위를 기도하는 적을 꿰질러 사단의 후퇴로를 개척하는것이 보다 더 중요하우. 어서 떠나우.》
한태설의 이야기를 통해 학문은 구체적인 전선정황을 확인할수 있었다.
적들의 인천상륙으로 인하여 전선과 후방이 차단되고 주력부대가 포위될 위험이 생긴 조건에서 인민군대는 일시적인 전략적후퇴를 하게 되였다. 락동강계선에서 적들은 9월 15일 현재의 접촉선을 공격개시선으로 삼아 16일 9시공격으로 이전하였다. 미9군단의 2, 25보병사단과 5독립련대는 남해안의 진동으로부터 현풍계선에서 함안―진주, 창녕―합천방향으로 공격해왔다. 아군은 미8군관하 미 1, 9군단과 괴뢰 1, 2군단의 공격을 물리치면서 시간을 쟁취하기 위한 적극적인 방어전을 벌렸다. 16일부터 20일사이에 사단은 제83모터찌클련대와 함께 진동―함안지역에서 미 25사와 5독립련대를 강력한 화력과 과감한 야간습격전으로 타격하고 신속히 물러섰다. 25일까지의 방어작전을 성과적으로 끝마친 사단은 진촌일대에 집결하여 후퇴의 길에 올랐던것이다.
정찰대는 소백산줄기를 타고 북으로 행군하였다. 빤히 내려다보이는 큰길로는 적들의 행군서렬이 흘러갔다. 적땅크와 포차들이 으르릉거리며 지나갔다.
《이제부터는 주야행군이요. 못해도 매일 150리정도는 축내야겠소.》
고된 행군길이였다. 하루에 기껏해야 두세시간밖에 잠을 자지 못했다. 하루에 200리이상을 걸을 때도 있었다. 가끔 맞다드는 숙영지자리에 이르면 숯덩이로 바위벽에 쓴 글발들이 눈에 띄였다.
《002호지점으로!》
《소백산으로 오라.》
행여나 하는 기대를 품고있던 대원들의 걸음이 점점 떠졌다. 사단지휘부가 머물렀던 곳에 이를 때마다 떡심이 풀리군 했다.
이제는 참대숲이 점점 성글어지고 소나무와 넓은잎나무가 뒤섞인 혼성림에 맞다들었다. 수림속은 어디라없이 무겁게 짓누르는 정적과 습한 대기에 숨이 막혔다. 락엽무지에 발이 푹푹 빠지는가 하면 이끼가 더덕더덕한 절벽이 앞을 가로막았다.
점점 추워지는 기후는 시름을 덧쌓아주었다. 낮에는 등골을 적시며 비지땀이 흐르지만 밤에는 잔등이 시리도록 추워서 쪽잠마저 제대로 잘수 없었다. 이른아침이 되면 밤새 내린 이슬에 신발과 바지가랭이가 흠뻑 젖었다. 며칠 지나지 않아 먹을것도 떨어졌다. 처음에는 야산에서 밤을 주어먹거나 다래나 머루, 아가위열매로 근근히 끼니를 대신하군 했지만 그나마도 늘 차례지는 혜택이 아니였다. 소백산줄기를 타면서부터 앞서간 부대들이 지나간 길을 따라가느라니 그런 자연의 선사품조차 기대할수 없었다. 그러나 우는 소리를 하는 사람은 없었다.
정찰병들의 옷과 신발은 가시덤불에 긁히고 찢겨 형체도 알아보기 어렵게 되여버렸다.
아직도 사단의 정확한 위치를 알수 없었다.
뜨거운 한낮이 벌써 다 지나가고 서쪽하늘을 붉게 물들이며 해가 지고있었다.
《부과장동지, 좀 천천히 걷지 않겠습니까. 부과장동지걸음이 너무 빨라서… 대원들이 무척 힘들어하는군요.》
라동수가 말했다.
《좀 쉬여가기요. 힘들구만. 뭘 좀 먹을것도 구해봐야지.》
적정도 다시 알아보고 식량도 해결해야 했다. 먼길에 지치기도 했지만 며칠째 제대로 먹지 못한때문에 더 맥이 진했다. 아무런 대책이 없이 계속 행군하다가 깊은 산악지대에 들어설 때까지도 사단을 인차 만나지 못하면 더 야단이다.
《경계를 조직하고 여기서 휴식하도록 하오. 기전동무와 복남동무만 날 따랏!》
《어쩌자는겁니까? 누구보다도 부과장동지가 힘들텐데… 차라리 내가 갔다오겠습니다.》
라동수는 펄쩍 뛰였다.
《고집부리지 말라구. 가까운 마을에 들려보고는 곧 돌아설테니 걱정할것은 없소.》
모두를 눌러앉혀놓고 산을 내렸다.
산골짜기를 따라 내려갔다. 지도상에서 보면 시오리쯤 더 내려가야 인가를 만날수 있었다. 그런데 노루도 발붙이기 어려울만큼 가파로운 산탁에 조나 밀을 심었던 밭뙈기들이 있었다. 그렇게 먼데서 이런 산골짜기까지 부대기농사를 지으러 들어온단 말인가?
한발 앞서 내려가던 복남이가 몸을 홱 돌리며 손가락을 입에 가져갔다.
《쉿! 부과장동지, 저기 웬 집이…》
그가 가리키는쪽을 내려다보니 산기슭을 깎아낸 평토에 속새이영을 얹어 지은 작은 초가집 한채가 보였다. 이런 외진곳에 인가가 있다는것이 놀랍기도 했고 반갑기도 했다.
적들의 함정은 아닌지? 산속에 널려있는 밭뙈기들을 보면 마음은 놓을수 있었다. 초가집이 어제오늘사이에 생겨난것이 아님을 알수 있는것이다.
학문은 복남이를 엄호수로 떨궈놓고 외딴 그 집으로 접근해갔다. 앞마당은 좁았으나 토방을 돌로 쌓은 솜씨로 보아 이 집 주인이 몹시 알뜰하다는것이 알렸다. 울옆에는 두그루의 작은 감나무가 있는데 아직도 높은 아지사이에 몇알의 감이 매달려있고 마당구석 창고앞에는 통나무를 일매지게 잘라 팬 장작이 가려있었다. 뒤울안에는 밤나무들이 여윈 가지를 들고 서있다.
살그머니 사립문을 열고 마당에 들어섰다. 김기전이 토방에 올라서서 방안동정을 살폈다. 한동안 기다려봤어도 아무런 인기척이 없었다.
학문은 부엌문가에 다가서며 낮은 목소리로 주인을 찾았다.
대답이 없었다. 창가에 다가붙은 두눈이 밖을 내다보며 디룩거리더니 한참만에야 부엌문이 빠끔히 열렸다. 흰 머리칼이 풀숭구리처럼 뒤엉킨 머리가 문틈으로 삐여져나왔다. 거무스름한 얼굴은 온통 주름투성이였다.
《뉘기요?》
환갑고개쯤 되여보이는 로인이였다. 의아한 눈으로 괴뢰군복장의 사람들을 찬찬히 올리내리 훑어보더니 대뜸 이마살부터 찌프렸다.
《무슨 일이외까, 장교님?》
《로인님, 밤중에 죄송합니다. 지나가는 길에 신세를 좀 지려구 들렸는데 괜찮겠습니까? 페를 끼치는것으로 된다면 그냥 가렵니다.》
학문이 공손한 어투로 대답하자 로인의 태도가 제꺽 달라졌다.
《어서 들어들 오시우. 고생깨나 하는 길손들인가본데…》
두사람은 방안 웃목에 들어가앉았다. 로인은 잠자리를 거두며 부드러운 말투로 물었다.
《대관절 어디로 가는 길손들이시우?》
《우린 북으로 갑니다.》
《그럼 인민군대어른들이 아니우?》
《로인님, 용케 알아보셨습니다. 우린 인민군대입니다. 이 지방의 형편도 알고 미국놈들의 움직임도 알아볼겸 해서 들렸습니다.》
로인은 반갑게 학문의 손을 잡아흔들었다.
《반갑수다, 인민군대어른! 보아하니 군관같은데… 난 벌써 짐작했수다.》
지어먹은 마음으로는 열번 죽었다 살아난대도 드러내보일수 없는 진정이 로인의 얼굴에 비껴있었다.
《그래 그사이 놈들의 행패질은 없었습니까?》
학문의 손을 부여잡은채 아래목에 이끌어앉히며 로인은 수선을 떨었다.
《왜 없었겠수. 요 아래에 마을이 있는데 인민군대가 떠나면서 리인민위원회 일군들도 따라갔고 마을 젊은이들도 죄다 따라갔수다. 우리 아들도… 읍거리에 있는 〈치안대〉놈들이 와서 빨갱이집이라구 막 때리고… 그 바람에 마누라까지 저세상 사람이 됐지요. 마을에 피해를 당하지 않은 집이 없다우. 그걸 다 말하자면…》
말끝을 가무리며 로인은 팔소매로 눈굽을 훔쳤다.
《예, 그렇게 됐군요. 할아버님, 우리가 그놈들을 복수하겠습니다. 믿으십시오. 인민군대는 꼭 미국놈들한테서 피값을 받아내고 남녘땅을 다시 해방합니다.》
불상사를 겪은 로인에게 페를 끼치고싶은 생각이 싹 사라진 그들은 서둘러 일어섰다. 그러자 로인이 학문의 무릎을 사납게 잡아눌렀다.
《이러지들 말라구. 내 아무리 늙었기로서니 그만한 눈치도 없겠소. 산길을 타자니 제바른 식사나 했겠수. 뻔하고 빤한노릇인데… 내 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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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목록
강산님의 댓글
강산 작성일
(위에서 계속)
《로인님, 됐습니다. 우린 빨리 가야 합니다.》
《그럼 찬밥이라두 휘딱 들여오지.》
부잡을 피우며 부엌에 내려갔던 로인은 옹배기에 골숨하게 들어있는 보리밥을 들고 들어왔다. 그리고는 물에 적신 참지에 그것을 쌌다. 밥찬은 해묵어 검스레해진 메주장뿐이였다. 로인은 놋바리의 그것을 보리밥틈에 쑤셔넣었다.
《하도 궁색한 살림이다보니 이렇게 변변한 찬거리도 없구먼. 욕들하라구.》
《아닙니다, 로인님. 정말 큰 신세를 지고갑니다. 우리가 다시 나올 때 꼭 이 신세를 갚겠습니다.》
《원, 신세는 무슨 신세라고 그러시우. 그저 꼭 다시 돌아와주시우. 돌아와서 저 미국놈들을 몽땅 쳐없애주시우. 그래야 마누라두 눈을 감을게 아니우. 내 눈에 흙이 들어갈 때까지 기다리겠수다.》
여윈 두손으로 학문과 김기전의 손을 부여잡은 로인의 볼에 두줄기 물줄기가 흘러내렸다.
《알겠습니다, 로인님. 참, 이 마을이름은 어떻게 부릅니까?》
《충청도 보은군 갈령 가까운 마을인데 이름도 없다우. 저기 앞쪽령을 넘어 좀 가면 갈령이고 그 령을 넘으면 속리산이라우. 인민군대어른들이 그 속리산쪽으로 많이들 들어갔다우.》
찬 보리밥덩이로 요기한 정찰병들은 밤에도 행군을 계속했다. 언제 적들과 맞다들지 모르는 조건에서 속리산쪽의 깊은 수림지대로 들어가야 했다.
《멸악산, 멸악산! 나 참매. 응답하라! 응답하라!》
차용대와 김룡조는 교대로 무선기를 메고 걸으며 끊임없이 사단을 찾고있었다. 사단은 여전히 침묵이였다.
정찰대는 큰길을 옆에 끼고 산발을 따라 가고 또 갔다. 힘겨운 행군이였다.
지금껏 힘에 부친 행군을 한두번만 겪어온 리학문이 아니건만 이렇게 고립무원하고 괴로운 길은 난생처음 걸어보는것 같았다. 아니, 아니였다. 그때도 얼마나 고되고 외로왔던가. 해방전 왜놈들의 병영에서 도망쳐 정처없이 헤매이던 그때의 고생은 지금의 행군에 비할바가 아니였다.
…
아버지와 헤여진 후 리학문이 왜놈들에게 끌려간 곳은 산설고 물설은 이국땅의 남방 남경이였다. 왜놈들은 조선청년들을 상해와 소주를 거쳐 호남성의 술양현에까지 끌고다니면서 총알받이로 내몰았다.
(왜놈들이 강요하는대로 소처럼 순순히 끌려다닐수는 없다. 그러다가는 수치스러운 개죽음을 당하게 된다. 도망쳐야 한다. 아버지가 말씀하신대로 기어이 김일성장군님부대를 찾아가야 한다! 백두산으로 가자!)
기회를 노렸으나 도망칠 틈새가 없었다. 여가시간이 생기면 장교들이 트집을 만들어 줄기합을 넣었고 그러다가 싫증나서 사라지면 왜놈하사관들이 따벌처럼 붙어서 교련을 시키느라 못살게 굴었다. 도망칠 기회를 얻자면 놈들의 시야에서 벗어날 구실을 만들어야 했다. 생각끝에 머저리노릇을 하기 시작했다. 장교나 하사관놈들이 오른쪽으로 돌라면 왼쪽으로 돌고 왼쪽으로 돌라면 오른쪽으로 돌았다.
그날도 일본오장놈이 조선청년들을 교련시킨답시고 못살게 굴었다.
《히다리 오무께!》
좌로 돌라는 구령이였다. 학문은 일부러 오른쪽으로 픽 돌아서면서 벌씬거렸다.
《칙쇼! 히다리 오무께! 히다리 오무께!》
앙바틈한 오장놈은 오소리눈을 부라리며 꽥꽥거렸다. 그래도 멀뚱거리며 서있기만 하는 학문을 본 그놈은 단박 성이 꼭뒤까지 치밀어 달려왔다. 다짜고짜 군화발로 걷어차고 귀뺨을 후려갈겼다. 하지만 원체 뼈대가 굵고 체격이 좋은 학문은 끄덕도 않고 히물거리기만 하였다.
《빠가야로! 마에이 스스메!(개자식! 앞으로 갓!)》
오장놈이 연방 구령을 질렀어도 아무 소용에 닿지 않았다. 학문은 여전히 그 모양, 그 본새였다. 제풀에 싱거움을 느낀 오장은 장교에게 보고했다. 한주일나마 그 노릇을 계속하다보니 왜놈들은 그를 천부적인 바보로 인정하고 마사부로 돌려놓았다. 군마를 먹이는 마사원노릇을 하려니 자연 혼자 돌아다닐 기회가 많아지게 되였다. 그것이 바로 그가 바랐던것이였다.
기회를 노리던 끝에 뜻이 맞는 동료들과 함께 왜놈병영을 탈출하는데 성공했다. 곡초를 베기 위해 산너머 밀밭에 나가는 기회를 타고 겹겹이 배치된 보초선을 빠져나와 벌판을 가로질러 내뛰였다. 때늦게 알아차린 왜놈들이 추격해오며 쏘아대는 총소리가 들려왔다.
지형지물이 낯설은데다가 어데로 가야 할는지 뚜렷한 로정도 정하지 못하고 떠난 길이여서 자칫하면 붙잡힐수 있어 무작정 깊은 수림속으로 들어갔다. 숨이 턱에 닿도록 내달리면서 여러패로 갈라지다보니 깊은 숲속에 이르렀을 때는 네명의 동료들만이 남았다.
《이젠 어디로 가야 하나?》
길주가 고향이라는 버짐투성이 상문이가 단김을 내뿜으며 중얼거렸다.
《어디긴, 백두산으로 가야지.》
《백두산?!》
《백두산에 가면 김일성장군님부대가 있대.》
《그걸 누가 모르나, 어떻게 거길 갈수 있겠는지를 몰라서 그러지.》
《동북쪽으로만 가면 되지. 날 따라오라구.》
그렇게 시작된 행군이였다. 허술한 왜놈의 군복을 걸친 그들은 그 누구의 도움도 바랄수 없었다. 드물게 만나는 중국사람들은 그들을 멀리서 보기만 해도 적의를 보였고 게다가 말까지 통하지 않으니 처지를 설명할수도 없었다.
남방의 지독한 무더위, 우글거리는 뱀과 맹수들, 먹을것도 구할 길이 없었다. 밤이 되면 모기때문에 쪽잠조차 제대로 잘수 없었다. 그곳의 모기는 쉬파리만 한데 한번 쏘이기만 하면 장티브스나 콜레라와 같은 무서운 전염병에 걸려 목숨까지 잃게 되는것이였다.
묵묵히 걷고 또 걸었다. 가도가도 끝이 없는 행군길이였다.
《뻬―둥!(서라!)》
다부산자에 어울리지 않는 장총을 든 놈팽이 두놈이 숲속에서 문뜩 뛰쳐나왔다. 가만 보니 왜놈의 개로 전락된 토비들이였다. 그놈들에게 붙잡히는 날에는 왜놈들에게 당하던것에 못지 않은 고초를 겪을수 있었다. 미욱한 그놈들이 포로를 잡으면 학대와 략탈로 저들의 직성을 풀고나서도 왜놈들에게 섬겨바쳐 돈을 타내군 한다는것을 학문은 알고있었다.
《뛰자!》
다섯사람은 사방으로 제각기 달아나기 시작했다. 마구 쏘아대는 총성이 울리고 뭐라고 하는지 알아들을수 없게 고래고래 질러대는 중국말소리가 등뒤를 따라왔다. 산고개를 두개나 넘어서 돌아보니 따라오는것은 길주내기뿐이였다. 다른 세명의 동료는 어디로 갔는지 행방을 알수 없었다. 토비들한테 붙잡히지 않았는지…
계속 뛰였다. 광활한 대륙에서 그들의 두다리는 너무도 짧았다. 끝없이 펼쳐진 밀림속에서 방향조차 잡을수 없었다.
《이보게 학문이, 난 더 못 가겠네. 백두산까지 아직 얼마나 더 가야 하나?》
대답할수 없었다. 그 자신도 백두산까지 얼마나 먼길인지 알지 못했다. 욕망과 현실간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는 법이다. 가고싶다는 욕망만으로는 백두산으로 갈수가 없었다. 이름도 모를 풀뿌리를 씹으며 태양을 길라잡이삼아 걷고 또 걸었다.
어느날 배고픔을 못이겨 소택지에 자라는 미나리 비슷한 풀을 뜯어먹은 길주내기가 중풍을 일으켰다. 무서운 독초였다. 온몸이 가드라들더니 한나절도 못되여 말 한마디 온전히 남기지 못한채 수림속의 고혼이 되여버렸다.
빈사지경에 이르렀던 학문은 팔로군의 기마정찰대를 만나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건졌다.
이국사람의 처참한 행색을 그들은 놀라운 눈길로 지켜보았다.
《니 스 쉐이?(당신은 누구요?)》
알아들을수 없었다. 말이 아니라 눈빛을 보고 학문은 그들의 말뜻을 알아차렸다. 그는 나무꼬챙이를 찾아들고 땅바닥에 한문자를 그려보였다. 아는 한문지식을 총발동해서 《백두산》, 《김일성장군》, 《조선독립》이라고 써나갔다.
《아 퉁즈! 퉁즈!(동무!)》
그들은 학문의 손을 막 잡아흔들었다.
이렇게 되여 리학문은 팔로군부대에 들어갔고 정찰병이 되였다.
《김일성빨찌산에 대한 얘기는 우리도 많이 들었지만 백두산까지 갈려면 쉽게 마음먹어 될 일이 아닐세. 지난해부터는 항일련군의 행적이 묘연해졌다고들 하더구만. 게다가 이 산서성에서 그곳까지의 거리가 얼마인지 아나? 자그만치 만리길일세. 아무데서나 왜놈 치기는 매일반이지. 안 그런가?》
동북태생인 정찰조장이 마마자국이 얽힌 얼굴에 련민의 빛을 띠우고 해준 말이였다.
두번째의 고된 행군은 해방직후에 있었다.
일제의 무조건항복선언이 있은 후 장개석의 국민당군은 미국의 후원하에 동북을 먼저 차지하기 위해 날뛰였다. 공백지대로 된 동북을 장악하는 문제는 국민당과 중국공산당간의 대결에서 관건적인 성격을 띠였다. 중국공산당중앙은 팔로군과 신사군의 백개 련대를 긴급히 동북으로 파견하였다. 리학문이 속한 부대도 그속에 들어있었다.
미국의 군함과 비행기를 타고 동북으로 진공하는 국민당군대에 비해볼 때 팔로군의 전진은 매우 굼떴다. 하늘소를 타거나 도보로 걸어서 동북을 먼저 타고앉는다는것은 현실성이 없어보였다. 그래도 대렬은 북으로, 북으로 흘러갔다. 그 대오속에 선 리학문은 국민당군과의 대결에서 이길수 있다는 승산보다도 조국 가까운 곳에 간다는 일루의 위안으로 힘겨움을 이겨나갔다.
국민당군비행대의 폭격, 미군군함들의 포격, 산해관일대에 먼저 상륙한 국민당군보병들의 매복공격… 코코에 길을 가로막는것은 철화의 장막만이 아니였다. 굶주림, 전염병, 렬세에 처한 아군의 형편에 대한 허탈감…
그때의 체험을 한생토록 잊을것 같지 않았다. 료녕성에 들어섰을 때 김일성장군님께서 파견하신 조선인민혁명군지휘관들과 대원들이 강력한 동북근거지를 창설하여 중국공산당의 전략적우세를 담보해준 사실을 알고 신심을 가다듬었고 또 중국인민의 해방전쟁을 피로써 도울데 대한 조국의 명령지시에 따라 무어진 민주련군 조선인부대인 리홍광지대에 편입되여 용기백배하여 국민당군을 반대하는 수년간의 전투들에서 소공 아홉에 대공 셋을 기록하여 특공을 세울수 있었지만 만리장성을 넘어 동북땅에 들어설 때만 하여도 마음을 떠받쳐주는 기둥이 없었던 까닭에 한걸음을 내여짚기도 여간만 힘들지 않았고 가는 길은 아득히 멀어보이기만 했었다.
그러나 지금은?…
지금은 그렇지 않다. 뜻밖의 전략적인 일시적후퇴를 한다고 하여도 그 길은 최고사령부로 가는 길이다. 김일성장군님께서 우리를 믿고 기다리신다. 새로운 임무를 주시기 위해 우리를 부르셨다!
사람에게 마음의 기둥이 있고 그에 대한 믿음만 있으면 힘겨울것도 두려울것도 없는 법이다. 고되고 외롭다는 생각은 믿을데가 없거나 있어도 굳게 믿지 못하는데서 생겨나는 나약성의 부패물일뿐이다. 가자, 힘을 가다듬자!
학문은 저벅저벅 보폭을 크게 내짚었다.
그때였다.
땅! 아주 가까운 곳에서 총성이 터졌다.
(?!)
뒤따라 울린 또 한방의 총소리가 긴 메아리를 끄을며 산발을 뒤흔들었다.
(적인가?!)
총소리가 울린 이상 적정을 예견하여 빨리 피해야 했다. 후퇴의 길에 오른 지금은 적과의 접전을 삼가해야 하는것이다. 하지만 정찰병의 사명은 다르다. 적정을 알아내야 하고 필요하다면 적의 기도를 파탄시켜야 한다. 아군의 개별적인 병사들이 적들과 조우한것일수도 있다. 그럴 때는 위험속에 든 그들을 구출해야 한다.
학문은 정찰병들을 산개시켜 총소리가 울린 건너편 산기슭쪽으로 전진해갔다. 나무들사이로 앞을 살피던 그는 놀랐다. 산탁의 후미진 곳에 서있는 큰 밤나무아래 공지에 두명의 사나이가 마주앉아서 밤을 까먹고있는것이였다. 한명은 군관이였고 다른 한명은 붕대로 머리를 칭칭 동인 하사관이였다. 군관이 밤나무우듬지를 쳐다보며 권총을 꺼내들더니 허공에 겨누었다.
땅! 총소리가 울리며 밤나무가지에서 밤송이가 투두둑 떨어져내렸다.
군관은 권총을 허리춤에 쑤셔넣고 밤송이를 찾느라 풀숲을 뒤지며 돌아갔다. 구붓한 잔등만 보였으나 어딘가 무척 눈에 익은 모습이였다. 그 군관이 허리를 펴며 돌아서는 순간 학문은 다시한번 놀랐다. 허찬이였다.
위병이 도졌다고 군의소와 함께 행동했다던 강승일전대장의 목소리가 귀전에 들리는듯싶었다. 그러니 이들은 군의소일행일것이다.
정찰병들은 숲속에서 나와 그들에게로 달려갔다. 다가오는 정찰병들을 알아본 허찬도 꿈틀 놀라는듯 하더니 인차 상급다운 체면을 세울 차비로 자신을 다잡고 태연한 기색을 지었다.
《아, 무사히들 빠져나왔구만. 이거 반갑소.》
붕대를 감은 사람은 두눈을 잃은 부상자인데 하사였다.
모두가 낯익은 사람들인것을 알고 안심한 허찬은 다시 모젤권총을 꺼내들었다. 밤나무가지끝에는 검붉은 밤알이 드러나보이는 밤송이들이 여라문개 매달려있었다. 그것을 겨누는것이였다.
그 광경을 눈앞에서 지켜보는 학문의 얼굴이 무섭게 일그러졌다. 관자노리에 바줄처럼 일어선 피줄이 툭툭 튀고 억센 턱이 가볍게 떨었다. 온몸의 피가 몰린듯 얼굴이 검붉어졌다. 순간 그는 비호처럼 몸을 날리며 쳐들린 허찬의 손에 쥐여진 모젤권총을 나꿔챘다.
《이건 뭐요, 대체?》
뜻밖의 봉변에 놀라 들창눈을 까뒤집고 뒤를 돌아보던 허찬은 온몸을 흠칠했다. 호랑이의 눈처럼 황황 불타는 리학문의 두눈이 그의 작은 몸체를 태워버릴듯 노려보고있었다. 하지만 학문의 목소리는 표정과는 달리 무척 낮았다.
《과장동무! 총알을 아끼시오.》
낮으나 저력있는 음성이였다.
허찬의 얼굴에서 급격한 변화가 일어났다. 도도하던 표정은 급기야 사라져버리고 아량과 리해를 바라는 비굴에 가까운 헤식은 미소가 피여나면서 의외로 처량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나도 알고있소. 그러나 량해하시오. 부상자를 위해선 어쩔수가 없었소. 저 사람은 벌써 사흘째나 굶었소.》
《굶는다 한들… 굶어죽는다 한들… 어떻게 적을 잡아야 할 총알을 가지고… 밤을 따먹는단 말이요. 피와 목숨으로 결산되는 총탄값을… 그래 모른단 말인가!》
뼈속까지 시려들게 하는 절규여서 간간이 끊기면서도 누구나를 전률케 하는 무서운 우뢰소리처럼 들렸다.
침묵, 무서운 침묵이 흘렀다. 한순간이 천추같은, 말없이도 감정의 불이 튀는 시간이 한동안 지난 후에야 학문은 안전장치가 풀린 모젤권총이 자기 손에 틀어쥐여져있는것을 알았다. 방아쇠에 저절로 힘이 가해지기 시작했다. 그때 숲속에서 애어린 간호원처녀가 소리치며 달려나오지 않았더라면 무슨 일이 터졌을는지 몰랐다.
《동지들!》
할딱거리며 달려온 처녀의 손에는 반쯤 여문 다섯개의 강냉이이삭이 들려있었다. 열일곱 아니면 열여덟쯤 되여보이는 애어린 처녀였다. 정찰병들을 알아보고 어찌나 반가왔는지 얼굴에 홍조를 한가득 피워올리더니 리학문에게 다가와 깍듯이 경례를 붙이였다. 그리고는 고개를 떨구고 흐느껴울었다.
《어떻게 된 일이요? 빨리 말하오.》
《흑… 글쎄 우리 군의장과 간호장이 급히 떠나면서 날더러 자동차를 가지고 인차 데리러오겠으니 여기서 아무데도 가지 말고 꼭 기다리라구 당부하고갔는데 닷새가 되도록 소식이 없습니다. 의약품이 떨어졌지. 게다가 이젠 식량마저 떨어져서 이렇게… 흑, 흑…》
그 다음말은 들어보나마나였다. 속을 태우던 나어린 간호원처녀는 혼자서 가을걷이한 강냉이밭에 내려가 이삭주이를 해온것이였다.
《덜돼먹은 그 군의장을 총살해버려야 합니다.》
《옳습니다. 간호장이라는것두 같구같지요. 저만 살겠다구 이런 산속에 부상병과 어린 체넬 내버려두고 떠나다니… 원, 세상에… 생각두 못할 일이지.》
《언제 적들이 덮쳐들지 모를 이런 곳에 저 어린 처녀를 혼자 떨구다니…》
김동호가 욱 해서 주먹을 내흔들자 모두들 윽윽했다.
학문은 억이 막혀 땅만 내려다보다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담가를 만드시오.》
안창항과 김동호가 칡을 끊어다 탐탁한 담가를 만들었다. 하사는 펄쩍 뛰였다.
《괜찮습니다. 난 조금 부축해주기만 하면 천리라도 갈수 있습니다. 눈이 안보여서 그러지 두다리는 성성하다니까요.》
《여보게, 하사, 가마두 태워주겠달 때 타보는게 좋다네. 그렇게 우기다간 여드레에 팔십리걸음을 하게 된다니까.》
김동호가 시까스르는 소리에 하사는 손을 홰홰 내저었다.
《거 어떻게 불러야 할지 모르겠으나 목소리만 들어두 형님벌에 형님정이 흐릅니다만 내가 공연한 수고를 끼쳐서야 되겠습니까. 그렇잖아도 죄스러운데…》
《그럼 정찰형님이라 부르게. 어서 가마에 오르라구.》
김동호가 그를 담가우에 눕혔다. 담가에서 내리겠다고 발버둥치는것을 간호원처녀가 겨우 달래였다. 하사의 붕대밑으로 맑은 물 같은것이 주르르 흘러내리는것을 본 동호는 슬며시 외면해버렸다.
간호원처녀는 너무 좋아 이 사람, 저 사람에게로 뛰여다니며 같은 말을 곱씹었다.
《동무들! 고마와요. 동무들! 정말 미안해요.》
행군을 시작한 다음에는 너무 미안해서 앞뒤로 뛰여다니며 또 같은 말을 거듭했다.
《아바이! 미안해요. 힘들지요?》
변변히 먹지도 못하고 지친 상태에서 무거운 담가채를 들고가자니 여간 힘들지 않았지만 김동호는 기꺼이 웃어보였다.
《날 보구 아바이라구? 동무가 바로 보았어. 내게두 동무와 같은 딸이 있다니까. 거짓말이 아니야. 하지만 미안해할것은 조금도 없어. 동무나 내나 그리구 이 하사동무나 다 같은 혁명전우들이 아닌가.》
그 말에 처녀는 또 눈굽을 훔쳤다. 나중에는 리학문에게로 뛰여왔다.
《소좌동지, 정말 고맙습니다. 사실 이건 제가 받은 명령인데…》
학문은 시쁜 미소를 지었다. 무슨 말이든 해주고싶었다. 그러나 대원들이 이미 다 말한 뒤여서 더 할말이 있을것 같지 않았다. 그래도 무슨 말이든 해주지 않으면 안될것 같았다. 궁리끝에 한 말이 한마디뿐이였다.
《알겠소.》
그 어떤 살뜰한 말이라도 바랐던것인지 애어린 처녀는 시무룩해서 따라왔다. 처녀가 애처로와서 무슨 말이든지 더 해주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물었다.
《이름은 어떻게 부르오?》
처녀는 마치 오빠의 물음에 대답하듯 반기며 다가들었다.
《초향입니다, 심초향!》
《헌데 동무네 군의장은 어떤 사람인데 동무만 떨궈놨소? 혹 동무가 부주의한건 아니요?》
《아닙니다. 실은 저, 허찬중좌동지가 그렇게 요구했습니다. 자동차를 구해보내라구. 우리 군의장동진 하는수없이 떠난겁니다.》
《그렇소? 알겠소.》
리학문의 표정이 무척 사나왔던것 같았다. 그가 더 말을 않고 씨엉씨엉 대렬앞으로 가버리자 처녀는 얼굴이 새파랗게 질려서 사람좋은 김동호에게 달려갔다.
《아바이, 소좌동지가 꽤나 무섭군요.》
김동호는 껄껄거리며 웃었다.
《무섭기는… 알아두라구. 겉으로는 뚝뚝한것처럼 보여두 실은 인정이 많은분이야. 그저 못돼먹은짓을 증오할뿐이지.》
《그래요?》
그러는 말소리가 리학문의 귀에까지 들려왔다. 듣고보니 처녀에게 미안한 생각이 들어 일부러 선선한 표정을 짓고 앞뒤에 대고 번갈아 소리쳤다.
《동무들, 힘을 냅시다. 사단이 바로 가까운 저 산너머에서 행군하고있습니다.》
거짓말이라면 십리를 뛰는 성미에 어떻게 자기자신도 믿을수 없는 그런 말을 꺼리낌없이 할수 있었는지 그자신조차 도무지 알수 없었다. 애어린 간호원처녀와 담가에 실려 미안해하는 부상병에게 어떻게든 위안을 주고싶었는지 모른다.
정말로 초향이는 두손을 가슴앞에 모두어쥐고 콩콩 뛰기까지 했다.
《소좌동지, 정말 우리 사단이 가까이 있을가요?》
천진한 처녀를 바로 볼 용기가 나지 않아 슬며시 외면하는 학문을 민망스레 바라보던 김동호가 급한 목을 넘겨주었다.
《그럼! 우리 부과장동지의 말은 백번 믿어도 랑패가 없다니. 정찰병들은 거짓말 할줄 몰라.》
초향이는 어린애처럼 또 짝자꿍을 했다.
《아이, 좋아라.》
왜 그런지 그 모습이 학문의 마음을 알찌근하게 해주는것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