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편소설 전장의 행운아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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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3 장
우리를 당할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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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전부터 사단과의 무선교신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차용대와 룡조가 무선기에 달라붙어 열심히 찾고찾았지만 사단에서는 아무런 응대도 없었다.
《차페작용때문이 아니요?》
하도 답답해서 학문이 물었다.
《아닙니다. 북쪽으로는 전파를 막을만 한게 없지 않습니까.》
구슬알같은 땀방울이 송골송골한 이마를 문대며 차용대가 입귀를 실룩거렸다.
지금껏 이런 일은 한번도 없었다. 허찬이 끌고다니던 무선차가 늘 이동하군 해서 불리한 지대에 들어가면 잠시잠시 교신이 끊어진적은 있었어도 이렇게 온종일 무선련계를 가지지 못해 고생한 일은 없었다.
(무슨 일때문일가?!)
《뻐꾹 뻐꾹…》
의문과 불길한 예감이 갈마드는 때 머리우에서 뻐꾹새소리가 났다. 떡갈나무에 기여올라가 전방감시근무를 수행하는 덕천의 적정신호였다.
잠시후 나무줄기를 타고 덕천이가 주르르 미끄러져내려왔다.
《부과장동지, 적들입니다. 전파탐지기차를 앞세우고 옵니다.》
포진지가 습격당한 후부터 수색대놈들은 온 산림지대를 참빗처럼 훑으며 돌아치고있다. 정찰대의 전파를 포착하고 추적해오는 모양이였다.
잠시후엔 산마루의 감시초에서 후위를 경계하던 김윤도가 헐레벌떡 달려내려왔다.
《부과장동지, 고지뒤면에 적입니다. 산을 포위합니다.》
수림이 깊지 못한 이곳에서 적의 포위속에 든다는것은 매우 위험한 일이다. 적들이 포위환을 형성하기 전에 빠져야 했다.
학문은 전투가방을 거둬넣으며 일어섰다.
《빨리 이곳을 빠집시다.》
그들은 자리를 떴다.
넓은잎나무숲이 울창한 좌측릉선을 타고나가던 학문은 이미 때가 늦은것을 알아차렸다. 그곳에도 적이 있었다. 놈들은 벌써 포위를 결속하고 좁혀들고있었다.
《불당골로 들어가기요!》
아근에서 제일 깊은 골짜기인 불당골 막바지에는 자그마한 절간이 있다. 지형정찰과정에 발견한 그 절간은 백제시기에 세웠다는것인데 바위절벽의 묘한 곳에 자리잡고있어 거기에만 들어가면 놈들의 공격을 피할수 있었다.
정찰병들은 길없는 길을 헤치며 달렸다. 그런데 또 한걸음 늦었다. 절간 가까이에 이르렀을 때 학문은 얼른 무릎을 꿇어 자세를 낮추었다. 단청한 절간기둥아래 철갑모를 눌러쓴 사병 한놈이 엠완총을 거꾸로 메고 서성거리는것이 보였다. 보초병 같았다. 절간은 벌써 적들이 차지한것이였다.
(이놈들이 단단히 악심을 먹고 접어들었구나.)
이대로 시간을 끌다가는 갈데올데 없이 함정에 빠질수 있었다. 앞에도 뒤에도 사면에 적이다. 어떻게 할것인가?!
난처한 정황이였다.
《부과장동지! 내가 저쪽으로 적들을 유인해갈테니 모두 빠지십시오.》
김동호가 산아래를 손짓하며 나섰다. 그가 수풀속에서 일어서려는것을 학문이 팔소매를 잡아 와락 꿇어앉혔다.
《죽자고 그래?》
《피값이라도 할테니 걱정마십시오. 출로가 없지 않습니까. 완전포위인데…》
《왜 출로가 없다는거요!》
숱많은 그의 눈섭이 곤두서고 눈동자에서는 시퍼런 불이 일었다. 그것은 자기자신에 대한 반발이기도 했다.
《부과장동지, 맞받아나갑시다. 늦잡다가는 다 죽습니다.》
《이대로만 있겠습니까? 놈들을 다 쏴제낍시다. 피값이라도 해야지요.》
《명령을 주십시오.》
안창항과 차용대도 모두가 펄펄 뛰였다. 극히 불리한 정황이여서 누구나 극단한 감정에 사로잡혀있는것이다. 죽음을 각오하지 않을수 없는 정황이였다. 정말 여기서 결사전을 해야만 하겠는가?
(아니다, 이럴 때일수록 지휘관인 내가 침착해야 한다. 모두가 안전하게 감쪽같이 빠져나가면서 적들을 골탕먹일 방법이 없을가?!)
아직 정찰병들의 정확한 행처를 찾지 못한 적들은 쑥밭에서 바늘찾는 격으로 뚜렷한 방향도 없이 수림속을 헤매고있다. 상대가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는 상태에서 사병놈들은 겁에 잔뜩 질려있을것이다. 이런 때는 주동적으로 적을 쥐고 흔들어야 했다.
순간 묘한 생각이 떠올랐다. 학교때 배웠던 항일빨찌산의 전법이 생각났던것이다.
(그래, 놈들끼리 싸우게 만들자. 항일빨찌산들이 왜놈들과 싸울 때 써먹었다는 망원전술을 리용하자. 여기저기서 제멋대로 행동하는 적들은 적아를 구분하기 어려울것이다. 이런 때에는 주동적으로 적을 유도해야 한다.)
그는 나직한 목소리로 지시했다.
《놈들을 한바탕 타격하고 우측으로 빠져나가기요!》
명령에 따라 정찰병들모두가 일시에 떨쳐일어서며 절간을 향해 몰사격을 들이대였다.
땅! 땅! 뚜루룩!
한바탕 강타를 들이대고는 다시 수풀속에 숨어버렸다.
놀란 적들이 사색이 되여 날뛰였다. 그러나 정찰병들이 보이지 않았다. 놈들은 어디서 총알이 날아왔는지조차 알수 없어 총을 꼬나들고 두리번거렸다.
그 순간 리학문이 벌떡 일어서며 소리쳤다.
《인민군대가 나온다! 돌격하라!》
절간에서 뛰여나온 놈들은 그제야 이쪽에 대고 총을 쏘아대기 시작했다. 정찰병들은 수류탄을 던지고 련발사격을 들이대며 와― 밀고올라갔다.
《저 절간에 인민군대가 있다! 돌격 앞으로!》
《인민군정찰병을 죽이지 말고 생포하라!》
학문은 연방 소리소리질렀다. 그 광경은 정말 절간을 차지한 인민군정찰병들과 절간을 포위한 수색대가 맞붙은것 같았다. 산아래쪽에서 올라오던 놈들은 《제편》을 응원하려고 절간을 향해 와당탕! 퉁탕! 총을 쏘아댔다.
련발사격을 퍼부으며 달려올라가던 정찰병들은 그 속도로 절간을 슬쩍 에돌아 적들이 눈치챌수 없을만큼 날쌔게 수림속으로 빠졌다.
그다음부터의 총격전은 절간안에 쫓겨들어간 놈들과 아래쪽에서 허겁지겁 달려올라오는 수색대놈들사이에 벌어졌다. 총소리가 더 요란해지고 수류탄소리가 잦아졌다. 절간안에 있는 놈들은 더 빠져나갈 길이 없으므로 필사적으로 저항하고 산아래쪽에서 달려드는 놈들은 머리수가 많은것을 믿고 기세등등 접어들었다. 그사이에 정찰대는 우측릉선을 타고 멀찍이 빠져나갔다. 놈들이 마구 쏘아대는 총알들이 피융― 피융― 아츠러운 소리를 지르며 머리우로 날아갔다.
《앗!》
차용대가 풀썩 주저앉았다.
《맞았어?》
라동수가 급히 부축하며 물었다. 용대는 대답대신 등에 진 무선기를 벗어안고 들여다보았다. 적탄이 무선기를 꿰뚫고 지나갔다. 험상하게 쭈그러들어 펑 뚫어진 철제함속의 진공관이며 납땜한 부속품들이 들여다보였다.
《이걸 어쩌면 좋습니까?》
릉선을 내려 안전한 참대숲에 들어가 휴식할 때 세세히 살펴보니 무선기는 수리할 형편이 못되였다. 차용대를 도와 룡조가 파손된 부속들을 교체하며 살려보려고 무진 애를 썼으나 허사였다.
《이건 버려야지 안되겠습니다.》
룡조는 한숨을 쉬였다.
못쓰게 된 무선기를 수림속에 파묻으며 차용대는 귀중한 혈육과 작별하는듯 눈굽을 훔치기까지 했다.
그날부터 부대와의 련계가 완전히 끊어졌다. 피가 타는 일이였다. 사단의 작전기도를 모르고서는 한걸음도 움직일수 없었다. 시급히 무선기를 해결해야만 했다.
《적의 무선기를 빼앗아내기요.》
적의 포지휘소나 수색대본부를 습격하면 무선기를 로획할수 있다. 더 좋기는 이 근방에 돌아치는 적의 무선차를 들이치는것이다.
학문은 정찰병들을 여러곳에 파견하여 무선차들의 움직임을 감시하도록 하였다. 그중 빈번히 나타나는 지점은 두곳인데 진동―함안간도로에 제일 자주 지나다녔다. 무선차는 아침 9시경에 한번, 저녁 5시경에 한번씩 주기적으로 고정된 로정을 따라 순회하면서 전파를 탐지하군 했다.
(저녁에 습격하는게 맞춤하겠군.)
외따른 산기슭을 에돌아가는 차길에 습격장소를 정한 학문은 오후시간에 맞추어 세명의 정찰병을 보내여 길옆의 아름드리나무를 찍어넘기게 하였다.
룡조와 동호, 덕천이가 아름드리 참나무를 골라서 텅텅 도끼로 찍었다. 밑둥을 찍히운 나무는 차길을 비스듬히 가로막으며 와당탕 군드러졌다. 그들은 나무를 타고앉아 잔가지를 치는척 하면서 시간을 끌었다. 그 모습은 영낙없이 잡역에 동원된 괴뢰군사병들이였다.
다른 정찰병들은 주변의 숲속에 매복했다.
이제는 무선차가 지나갈 시간이 다 되였다.
학문은 차가 나타날쪽을 주시하고있었다. 5시가 썩 지나도록 무선차는 나타나지 않았다. 한시간을 더 기다렸어도 기다리는 무선차는 나타날줄 몰랐다.
(어제도 제시간에 지나갔는데 오늘은 어떻게 된 일일가?!)
어슬어슬해질 때에야 붕붕 차소리가 들렸다. 그런데 불쑥 나타난것은 유개우에 방향안테나를 설치한 무선차가 아니라 풍을 벗겨버린 찌프차였다. 차우에는 괴뢰군장교놈이 부관과 함께 앉아있었다.
(제길! 랑패로군.)
급하게 질주해오던 찌프차는 도끼질하는 세명의 정찰병들앞에서 멎었다. 장교놈은 성미가 여간 급한 놈이 아닌지 덮어놓고 펄펄 뛰며 권총을 뽑아들었다.
《갈길이 바쁜데 재수없이 길을 가로막은 네놈들을 몽땅 쏘아죽이겠다.》
룡조가 귀머거리시늉을 하며 동호를 돌아보았다.
《야, 돌팔아! 뭐씨라꾸 하노?》
동호는 나무에서 뛰여내리며 경례를 붙였다.
《대위님, 이러지 마십쇼. 임무가 그렁하는거니꺼니 우린들 어칼 도리가 없었십니더.》
《정말입니더. 인차 치워드리죠.》
룡조와 덕천이도 능글거리며 차에 접근했다.
《개놈의 새끼들! 당장 길을 열라!》
그놈이 권총을 쑤셔넣고 담배불을 붙여무는 순간 세명의 정찰병들이 벼락같이 달려들었다. 부관과 운전사는 룡조와 덕천이의 주먹타격에 쓰러지고 장교놈은 벌써 동호의 어깨우에 얹혀서 발버둥쳤다. 매복했던 정찰병들이 달려나가 찌프차를 홈타기에 처박고 그우에 나무가지들을 덮어씌워서 흔적을 없애버렸다. 거사가 순식간에 끝나버린 후 도로는 아무일도 없었던듯 다시 조용해졌다.
학문은 아쉬운대로 오늘은 그만하고 래일 다시 노려서 무선차를 붙잡기로 마음먹고 정찰병들을 철수시켜 수림속으로 들어갔다.
성성이처럼 하관이 길쑴한 장교놈은 병기장교였는데 전선으로 긴급히 포탄을 전진공급할 명령을 받고 이 가까운 곳에 있는 포탄창고로 가던 길이라고 했다.
(놈들이 또 새로운 음모를 꾸민것은 아닌가?!)
버럭 의심이 들었다.
《대위, 포탄을 급급하게 전진공급하는 목적은 무엇인가?》
주제넘게도 장교놈이 픽 코웃음쳤다.
《그런것도 묻소?》
너무나 당돌한 포로의 태도에 리학문은 좀 어리둥절해졌다. 지금까지 많은 혀를 다루어봤어도 이렇게 겁도 없이 맞대들이하는 놈은 처음이였다.
저으기 화가 돋았다.
《뭐야? 건방지게 굴지 말고 묻는 말에 대답이나 해. 목적이 뭐야?》
그다음에 오히려 어리둥절해진것은 대위놈이였다.
《정말 당신들은 모르고있소?》
《뭘 말하는거야?》
《유엔군은 인민군대를 족치며 추격전으로 넘어갔소. 전선은 벌써 멀리 북쪽으로 이동했고 그때문에 포탄소요량이 급증한데다가 전선이 너무 멀어졌으니까 전진공급이 난문제일수밖에 없지요.》
《뭣이?!》
학문은 분격이 치밀었다. 가슴이 막 활랑거렸다. 아무리 거짓말을 한다고 해도 그런 엄청난 거짓말을 이렇게 태연스레 할수가 있는가? 자신을 다잡지 못한 그는 어쩔새없이 그놈의 귀쌈을 불이 번쩍나게 후려갈겼다.
《이놈이 죽고싶어 안달이 난 모양이구나. 누구한테 허튼 소릴 줴치는거야.》
맵짠 손맛을 본 장교놈은 서뿔리 상대의 기분에 거슬리게 놀아대다가는 무슨 봉변을 당할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던지 정색해졌다.
《나는 거짓말하는게 아닙니다. 지금 인민군대는 유엔군에게 쫓기고있지요. 이건 사실입니다. 며칠전에는 지리산쪽에서 전투가 있었는데 래일 아침 당장 함양으로 포탄긴급수송을 조직하라는 킨사단장의 명령이요. 그런걸 봐선…》
론박할 여지가 없었다. 그렇다고 포로의 진술을 그대로 믿기도 어려웠다. 아니, 믿을수가 없었다.
(감정에 포로되지 말고 랭철하게 생각해보자. 무선기가 살아있을 때에도 교신이 이루어지지 않았었지. 요즘 가끔 듣군 하던 포성도 들을수 없다. 그것이 정말 전선이 멀리 옮겨갔다는 증거가 아닐가. 사단이 북쪽으로 옮겨앉았단 말인가?! 사실이 그렇다면 어떤 명령이라도 있었을텐데…)
하여튼 비정상적인 일이였다. 사태를 정확히 알자면 시급히 무선기를 해결하여 사단과의 련계를 회복해야 했다.
(오늘은 왜 적들의 무선차가 나타나지 않았을가? 그것도 포로가 제공한 정보와 관련되지 않을가?! 오늘 나타나지 않은 무선차가 래일에는 나타나리라고 기대할수 있겠는가? 가만, 근방에 적의 포탄창고가 있다고 했지. 포탄창고에 무선기는 없을가?)
《포탄창고에 포통신기재들은 없는가?》
포로는 순순히 대답했다.
《그런것들도 있습니다. 포탄과 함께 공급하게 되여있지요.》
학문은 결심을 내렸다. 포탄창고를 습격하면 무선기도 얻어낼수 있다는 확신이 생겼다.
(쳐야 한다! 적들이 포탄을 전선으로 공급하지 못하게 할뿐더러 무선기를 로획하여 사단과의 련계를 한시바삐 회복해야 한다. 우물거릴 때가 아니다.)
일단 결심을 세운 이상 가장 합리적인 방법을 택해야 했다.
《좋소. 당신은 그만하면 성근하게 우리 일을 도왔소. 앞으로도 우리 일을 잘 도와야겠소.》
《그것은 물론 생명안전을 담보한다는 말이겠지요?》
장교놈은 자못 진중한 얼굴로 학문을 쳐다보았다.
《물론이요.》
《뭐가 더 필요됩니까? 나는 알고있는 자료를 다 말했는데요.》
《당신은 포탄창고에 있는 경비성원들을 다른데로 빼돌려야겠소.》
《그건?!…》
《별로 힘들것은 없소. 그저 우리가 하라는대로 하면 간단히 해결되오. 우선 포탄창고로 가기요. 공연한 잔꾀를 쓰다가는 정말 재미없는 일이 생길수 있다는걸 명심하시오.》
정찰대는 포로의 안내를 받으며 포탄창고를 찾아 즉시 떠났다.
《부과장동지, 부대가 멀리 뒤쪽으로 옮겨갔다는걸 믿습니까?》
뒤따르던 라동수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글쎄, 그럴수도 있겠지. 필요에 따라 잠시 물러설수도 있는거니까.》
가뜩이나 큰 동수의 눈이 더 커졌다. 네모진 얼굴에 눈만 남은것 같았다.
《그렇다면 후퇴한다는건데… 그럼 우리도 당장 사단을 따라가야 하지 않을가요?》
《무슨 소릴 하는거요. 부대가 이동해갔다고 해도 적들의 포탄이 전선에 공급되지 못하게 해야 하지 않겠소. 그리고 무선기를 로획하면 사단과 직접 련계할수 있지. 사단의 지시를 받고봅시다.》
학문은 손을 홱 내리그었다.
해가 떨어진 뒤여서 벌써 어둠의 장막이 드리우기 시작했다. 포탄창고가 자리잡은 부근에 도착한것은 한밤중이였다. 차단봉이 설치되여있는 창고정문에는 보초병만 서성거리고있을뿐 사위는 괴괴한 어둠속에 묻혀있었다.
룡조와 덕천이가 포탄창고에서 뻗어나온 통신선을 찾아냈다. 룡조가 배낭속에 간수해가지고 다니던 송수화기를 련결하고 도청해보니 뭐라고 수설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학문은 포로에게 자기 의도를 짤막하게 설명한 다음 송수화기를 내밀었다.
《정말 목숨을 담보하겠지요?》
아무래도 안심치 않은 모양 그놈은 재삼 다짐을 두고서야 그것을 받아들었다.
《누구야? 오, 보급장인가? 나 사단병기과 마병만이야. 뭐라구? 응, 이봐! 급한 일이니 명심해들어. 아, 군소리 말라니까.… 늦장부리지 말구 이제 당장 경비성원들을 비상동원시켜서 자동차에 태우구 마산창고로 떠나라구.… 거기에 상차인원이 모자라서 그래. 여러말말구 빨리 떠나란 말이야, 돌아올 때 걱정은 말래두… 포탄실은 차를 나눠타고 오문 돼.… 킨사단장님의 명령이야. 정 구실을 대겠으면 모가질 내놔. 응, 수고하라.》
그다음의 일은 계획대로 되여갔다. 포탄창고정문이 분잡해지더니 자동차 한대가 부르릉거리며 떠나갔다. 보초병이 홀로 서있는 정문우에 외롭게 매달린 벌건 외등만이 어둠과 다투며 파들파들 떨고있다.
즘즛해질 때를 기다리던 학문은 다른 정찰병들을 주변에 숨겨두고 안창항이만 데리고 뻐젓이 정문으로 다가갔다.
《정지. 누구야?》
보초병이 왝 소리질렀다.
학문은 저벅저벅 다가가며 거친 목소리로 된욕설을 퍼부었다.
《이 개놈의 새끼야, 간 떨어지겠다. 소리는 왜 그렇게 질러?》
《서라! 누군가 묻지 않아!》
보초병은 더 기승스럽게 소리소리 고아대며 격발기를 절컥거렸다.
정말 성이 오른 학문은 상욕설을 해대며 재빨리 접근해갔다.
《이 쌍놈의 새끼는 말귀까지 처먹었나? 무턱대고 총부터 내드는 이런 겁쟁이들은 늘 제편을 잡기가 일쑤야. 네놈의 눈깔엔 사단검열관두 원쑤로 보여? 그래 다들 포탄 실으러 떠났는가?》
그제서야 보초병은 안심하는 태도였다. 포탄 실으러 간 사실까지 따지는걸 보니 상급이 분명하다고 제꺽 믿어버린것이였다.
《예, 반시간쯤 됐십니더.》
허리를 짚고선 리학문은 영낙없이 졸병놈들을 드세게 다룰줄 아는 《국군》장교였다.
《떨어진 인원은 누가 책임지고있어? 갸를 불러내라.》
《막사안에… 아니, 저… 이자 방금 아래마을에…》
당황해난 보초병은 손을 자신없이 허공중에 쳐들고 향방없이 앞뒤를 가리켰다.
《이놈의 새끼들, 상관이 없는 틈에 나쁜짓을 하지?》
《아닙니더. 저기에 다들 있는뎁쇼.》
완전히 주눅이 들어버린 놈은 어둠속에 서있는 작은 건물을 가리켰다.
《어디 가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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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목록
강산님의 댓글
강산 작성일
(위에서 계속)
리학문은 성큼 한걸음 내짚는척 하다가 보초병의 옆머리를 왼손등으로 호되게 후려갈겼다. 놈은 끽소리없이 꺼꾸러졌다. 안창항이가 보초병자리에 제꺽 들어섰다. 때를 기다려 숨어있던 정찰병들이 달려왔다.
모든 일이 순조로왔다.
보초병이 가리킨 건물의 나들문을 벌컥 열고 들어서자 되들이술병을 가운데놓고 모여앉아있던 여러명의 사병들이 황급해서 뛰쳐일어섰다. 장교들이 없는 기회에 마음놓고 모여들어 술추렴하고있는데 때없이 낯선 소령이 불쑥 들어서는 바람에 도적질하다가 들킨 놈들처럼 당황해서 쩔쩔매였다.
정찰병들은 무작정 몰사격을 퍼부어 놈들을 소멸해치웠다.
《무선기가 있는가 잘 살펴보시오.》
무선기는 어렵지 않게 찾아냈다. 창고까지 뒤지지 않고서도 통신실에 있는 무선기를 김룡조가 발견했던것이다. 그는 흥분해서 무선기를 안고 껑충껑충 리학문에게 뛰여왔다.
《부과장동지, 이거, 이걸 보십시오. 새겁니다, 출력도 굉장히 높구요.》
동그스름한 그의 얼굴에서 두눈이 영채롭게 반짝거렸다. 좁은 이마에는 땀방울이 송골송골 내맺혔다. 더없이 기뻐하는 그를 보니 마음이 별스러워서 학문은 한손을 그의 어깨에 얹었다.
《그럼 됐소. 포탄창고를 제꺽 날려버리고 철수하자구.》
산더미처럼 쌓인 포탄무지들은 여섯개나 되였다. 정찰병들은 거기에 도화선을 늘이고 불을 달았다. 그다음엔 한초라도 빨리 멀리 피해야 하였다. 위험계선을 급히 벗어나야 하는것이다.
《철수!》
모두 정문을 벗어나 단거리달리기선수들처럼 죽기내기로 달렸다. 숨이 턱에 닿아 내달렸다. 하나, 둘, 셋, 넷… 삼백까지 세고는 길가의 깊은 웅뎅이에 몸을 던졌다. 두손으로 귀구멍을 막고 팔굽과 발끝으로 땅을 짚어 배가 땅에 닿지 않게 하였다.
그 순간 드디여 요란한 굉음이 울리며 땅이 흠씰흠씰 흔들렸다.
쾅! 쾅! 콰과광!
밤하늘을 시뻘겋게 달구는 어마어마한 불길! 천지를 발칵 뒤집는 굉음! 흙부스레기, 돌쪼각들이 파편이 되여 윙윙 날아와 그들의 잔등에도 잔돌의 소나기, 흙사태가 쏟아져내렸다.
《히야! 장관이구나!》
무선기가 상할가봐 가슴에 그러안고있던 김룡조가 제일먼저 머리들고 환성을 올렸다.
하늘땅이 통채로 용광로가 된듯 붉은 화광이 가득 차넘치고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