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편소설 전장의 행운아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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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3 장
우리를 당할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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락동강을 사이에 두고 근 한달넘어 계속된 공방전은 점점 더 치렬한 양상을 띠여갔다. 우리 나라의 5%도 안되는 협소한 지역에 몰켜든 적들은 필사적으로 저항해나섰다. 놈들은 대구와 포항방향으로 진격하는 인민군대의 공격에 대처하는 급한 속에서도 《킨지대》에 력량을 집중하여 《킨작전》을 성공시킴으로써 출로를 열려고 하였다.
워커의 명령에 따라 상주남쪽에서 방어하던 미25보병사단이 급히 마산정면에 전개된 후에도 하와이로부터 끌어들인 미군 독립5련대와 땅크대대가 증강되여왔고 8월 2일 부산에 상륙한 림시1해병려단이 미8군의 예비대로서 창원에 진을 쳤다. 하여 락동강좌안의 좁은 지역에 미군 4개 사단과 1개의 독립려단, 2개의 독립련대외에도 괴뢰군의 방대한 병력이 집중배치되였는데 워커는 미국의 전쟁력사에 그만큼 무력배치가 조밀한 전구가 없었다고 전화통을 들고 떠들어댔다.
《그래서 나는 윌리암, 귀관의 작전을 〈철의 물동작전〉이라고 부르는거요. 미5공군의 〈B―29〉편대들도 아낌없이 띄워주겠소. 냅다 미시오. 인민군대를 서북산에서 구축하고 방어선을 무조건 진주고개―사천계선에 내다놓아야 하오.》
서북산과 오봉산에서 치렬한 전투가 있은 후에도 끊임없이 밀려든 미군부대들로 하여 남해안일대의 전선은 역조를 만난 바다처럼 뒤끓었다. 그러한 전선정황은 정찰대가 전선을 넘어 아군구역으로 갈수 없게 만들었다. 전선을 넘어간다 해도 다시 침투해들어와야 할 판이여서 사단에서는 정찰대가 적후에 그냥 남아 행동할것을 지시했다. 그러다나니 정찰대는 물자를 전혀 보급받지 못하는 조건에서 싸워야 했다. 그들은 벌써 며칠째나 달려드는 수색대놈들과 치렬한 싸움을 벌리고있다. 오늘도 검질기게 덤벼드는 놈들을 따돌리느라 산발을 타고 백여리를 에돌아 창녕에서 가까운 소나무가 우거진 무명고지에 돌아앉았다.
이미 여러날째 아무것도 먹지 못했다. 부대와의 접촉가능성이 사라지고 적후에 들어와 너무 오래 있다보니 먹을것이 떨어진것이다. 탄약은 놈들을 치고 빼앗는다쳐도 식량이 문제였다.
정찰병들의 맹활동에 악이 받친 적들은 민가들을 샅샅이 뒤져내여 먹을만 한것은 깡그리 긁어가버렸다. 심지어 마을에 있는 감나무와 대추나무들에도 감시를 붙였다. 감 한알, 대추 몇알이 없어져도 곧 수색대가 추격해왔다.
제일 바빠난것은 특무장 김기전이였다. 저물녘에 마을을 찾아 룡조와 함께 내려갔던 그는 밤이 퍽 깊은 때에야 빈 배낭을 메고 돌아왔다.
《적들이 아근의 부락들을 몽땅 철수시키고 주민들을 마산으로 말짱 끌어가놔서 어디가나 인민들의 그림자도 볼수 없습니다.》
그는 죄지은 사람처럼 머리를 들지 못했다.
학문은 한숨을 내쉬였다. 방도가 없겠는가? 적을 찾아가서 칠가? 그것도 방도로는 못된다. 간교한 놈들은 사병들에게 전투정량의 탄약외에는 아무것도 휴대시키지 않았다. 인민군정찰병들을 굶겨죽이자는것이다. 전투를 해도 탄약은 로획할수 있으되 먹을것은 기대할수 없다.
밤, 굶주림에 지친 정찰병들은 숲속에 누워 잠들었다. 잠들었다고 하기보다는 허기져 쓰러졌다고 해야 옳을것이다.
달이 무척 밝았다. 은장같은 달빛은 소나무가지들사이로 명주오리처럼 흘러내렸다.
학문은 지도를 펼쳐놓고 손으로 짚어가며 지형을 익히고있었다. 하지만 지도우의 기호들이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부대에 있을 때 먹던 하얀 쌀밥이 눈앞에 빙글빙글 돌아간다. 특무장 김기전이 사단공급장을 구슬려 우대물자로 받아왔던 염고등어가 얼마나 입맛을 돋구었던가. 군산에서 경찰서를 털어먹던 때는 또 어땠고… 구례가까운 고장의 참외는… 달콤한 몽상에 잠겼던 자신을 깨닫고 머리를 흔들었다. 생뚱같이 무슨 잡념을!
래일의 전투는 더 치렬해질것이다.
(식량을 해결할 방도가 정말 없겠는가?!)
조심조심 풀잎밟는 소리가 들렸다. 발뒤축이 땅에 닿지 않는 발소리, 누구더라? 그렇지, 룡조다.
돌아보니 정말 김룡조였다.
《왜? 좀 쉬지.》
《어디 잠이 와야지요.》
룡조는 조금도 지친 기색이 없이 다가오더니 옆에 쭈그리고앉았다.
《피곤하겠는데 부과장동진 주무시지 않고 무슨 생각을 합니까? 고향생각입니까? 부과장동지의 고향이 여기서 멀지 않다는데 한번 가보든지 련락을 띄우지 않겠습니까?》
학문은 코허리가 찡해왔다.
(사람두, 때아닌 때 그런 생각을…)
힘들어도 그런 티를 보이지 않으려고 애쓰는것이 고마왔다. 그가 우는소리를 하는것을 아직 본적이 없다.
《고맙소. 하지만 난 지금 우리가 어떻게 하면 적후투쟁을 더 잘해볼가 하는 생각을 하는중이요. 동문 무슨 생각을 하오?》
《물론 나도 그런 생각입니다.》
룡조는 가쯘한 이발이 달빛에 드러나도록 웃었다. 그럴 때면 미간이 좁은 얼굴이 별로 귀엽게 보인다.
《참, 동무네 집이 함흥에 있다고 했지? 집에 처와 갓난애가 있다고 들은것 같은데.》
《예, 그렇습니다.》
《아들인가?》
《예.》
《이름은?》
《아직 지어주지 못했습니다.》
《그것 참 섭섭한 일이군.》
룡조는 눈섭우에까지 내리드리운 굽실굽실한 머리카락을 슬쩍 손빗질해올리며 가볍게 한숨을 쉬였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학문은 (이 친구, 끔찍이도 이마가 좁구나. 눈섭가까이 머리칼이 붙은게… 아들도 이 친구를 닮았겠지.) 하는 속생각에 혼자 빙그레 웃었다.
그런 낌새를 채지 못한듯 룡조는 조금 갈리기는 했어도 명랑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하지만 난 부과장동지를 이렇게 만나 세상에 다시없을 행운을 지니지 않았습니까. 난 내 일이 아주 잘됐다고 생각합니다.》
《행운이라니?!》
학문은 김룡조의 두눈이 번뜩이는것을 보았다.
《우리야 김일성장군님의 정찰병이 아닙니까. 이건 누구나 받아안을수 없는, 말하자면 특출한 행운이지요.》
학문은 마음속에 그들먹이 차오르는 격정을 누르며 그의 거친 손을 꾹 잡았다.
(그래! 우리는 누구나 지닐수 없는 행운을 지닌 사람들이지!)
대상할수록 정이 드는 친구였다. 이런 보배덩이가 어떻게 우리 정찰대에 스스로 굴러들었을가. 북쪽지방에서 여러해를 보냈다면서도 남도사투리를 고치지 못한것이 이상스럽게 생각됐더랬는데 이곳에 와서 적후활동을 하려니 그 말씨조차 큰 도움이 된다.
(일거삼득이라더니…)
제 손을 슬그머니 뽑아낸 룡조는 학문의 손을 다시 펴들더니 무엇인지 동글동글한것을 쥐여주는것이였다.
《이건 뭔데?》
학문은 의아한 눈길을 들었다. 달빛에 번들거리는것은 밤알보다 좀 클가말가한데 채 자라지도 않은 다섯알의 감알이였다. 보기만 해도 떫은 맛이 돌고 신물이 났다.
《땡감입니다. 아까 빈 부락에 내려갔을 때 몇알 건사했지요 뭐.》
룡조가 변명조로 한 말이였다.
학문은 군침을 꿀꺽 삼켰다.
《감이 벌써 이렇게 컸구만. 우리가 적후에 들어올 때만 해도 눈에 띄지 않던것인데… 헌데 이것밖에 없나?》
《땡감이 몇알 더 있기는 한데… 에―이, 부과장동지나 어서 드십시오. 얼마 되지도 않는걸 가지구…》
《허허… 그러면 되나, 콩알 반쪽이래도 나눠먹어야지. 어서 다 내놓소. 모두 함께 먹기요.》
룡조는 여라문알되는 감알들을 꺼내놓으며 볼부은 소리를 했다.
《그렇긴 한데 노상 그럴것도 아닌것 같십니다. 김동호동무를 보니 오늘 낮에 숲속에서 무얼 얻은듯 한데 배낭속에 잔뜩 꿍져넣고선 모르쇠를 합니다. 제살궁리는 다 있는가봅니다.》
학문의 눈섭이 대뜸 치켜올라갔다.
《무슨 소릴 하는거요? 혁명동지를 의심부터 하면 되오? 동호동문 그럴 동무가 아니요!》
《아, 그저 해본 소립니다.》
룡조는 당혹하여 나앉아버렸다.
학문은 일부러 목소리를 돋구며 대원들을 깨웠다.
《자, 모두 일어들 나시오. 먹을게 생겼소. 늦장부리다가 후회하지 말라구.》
때아닌 때의 우스개소리에 모두들 벌떡벌떡 일어났다. 달빛에 눈동자들이 반짝거렸다. 잠들었던 사람은 한사람도 없는것 같았다. 배고픔에 시달리며 어이 편히 잠들수 있었으랴. 늦장꾸러기 김동호마저 비상소집때보다도 훨씬 날렵하게 일어났다.
땡감알은 겨우 한알씩 돌아갔다.
정말 먹을것을 공급하려는줄 알고 덩실해서 바라보던 눈들이 실눈이 되여버렸다. 보기만 해도 시큼털털한지 김동호는 아예 다시 벌렁 나가누웠다.
《자자, 다 없어지기 전에 제 몫을 받소.》하며 손에 쥐여주어서야 마지못해 받아들었다.
학문은 제 먼저 감알을 입안에 던져넣고 우적우적 씹었다. 떫어서 선듯 삼킬수가 없었다. 신물이 났으나 억지로 참았다. 몇번 더 씹다가 턱을 쳐들며 꿀꺽 삼켜버렸다. 그러자니 얼굴을 찡그리지 않을수 없었다.
《먹을만 하구만 뭐.》
그리고는 하하 웃었다. 그제야 정찰병들도 감알을 입에 넣고 우물우물 씹었다. 그래도 그렇게 먹고나니 빈속보다는 나았다.
학문은 위가 꿈틀거리는것을 느끼며 정찰병들을 둘러보았다.
《어― 위주머니가 꽤나 반가와하는군.》
《정말 배가 부릅니다. 아마 설익은 감이 위에 들어가면 마저 익는 모양이지요?》
텁텁한것을 참고 트직한 소리를 내는 안창항의 옆에서 복남이가 골살을 찌프린다. 그를 보는 순간 가슴을 뭉클하게 하는것이 있었다. 8. 15광복절 다음다음날이 자기 생일이라고 자랑하던 생각이 났다.
(참, 래일이 복남이 생일이 아니던가?!)
학문은 급히 주머니의 수첩을 꺼내서 달빛에 비쳐보았다. 수첩장에는 대원들의 생일이 적혀있었다.
맞았다.
돌덩이가 내려앉은듯 마음이 무거워졌다.
(집에 있었더라면 어머니의 정성어린 생일상을 받았겠는데. 적후라고 해서 생일날에 굶길수야 없지 않은가. 이 어린 꼬마한테 쌀밥은 고사하고 설익은 감알조차 배불리 먹여주지 못할판이니 내가 무슨 지휘관이고 맏형이란 말인가.)
때아닌 밤중에 뜻밖의 요기를 한 대원들은 한동안 입씨름을 벌리다가 다시 누워버렸다.
리학문도 마른풀을 골라 깔고 누웠으나 잠이 오지 않았다.
(식량을 구해야 한다. 며칠이나 굶은 대원들을 데리고 래일 또 어떻게 전투를 벌린단 말인가. 더우기 복남이의 생일인데…)
둬시간이 지나도록 궁싯거리던 그는 더 참지 못하고 슬그머니 일어나 룡조를 깨웠다.
《룡조, 마을에 내려갔다 오겠으니 모두 내가 올 때까지 기다리도록 하라구. 절대로 따라오지 말구.》
《부과장동지!》
《쉿! 인차 다녀온대두.》
《그럼 저도 함께 가겠습니다.》
《필요없어!》
그가 두말을 못하게 눌러버린 학문은 씨엉씨엉 산을 내려갔다. 어떤 신통한 수가 생각나서도 아니였다. 단순한 생각, 무슨 수를 써서라도 먹을것을 구해야만 한다는 강렬한 욕구가 마음을 사로잡고있었다. 지휘관의 이런 행동이 옳은가 그른가를 생각할 경황이 못되였다. 이 지방 주민들의 생활습성을 잘 아는 자신만이 식량을 구해낼수 있다는 막연하나 확고한 자신감이 그를 사정없이 떠밀었다.
남해안에 사는 사람들은 집부엌바닥이나 창고의 바닥에 독을 파묻고 그안에 보리쌀과 강냉이, 수수 같은것을 감춰두군 한다. 그런데 그 솜씨가 아주 묘해서 좀해서는 숨겨진 독을 찾아내기가 어렵다.
(빈 부락이래도 내가 내려가면 다문 얼마간의 식량을 찾아낼수 있겠지.)
하늘에 깜박이던 별들이 훤한 새벽빛속에 자취를 감추고 시꺼멓게 죽은듯싶던 수림도 우중충 푸른빛을 되찾았다. 먼동이 트기 시작한것이다.
걸음발이 허청거렸다.
오동나무숲을 꿰지르고 참대숲을 헤치며 내처 걸어서 마을근방에 이른것은 해가 솟는 때였다. 주변의 수풀속에 몸을 숨기고 동정을 살폈다. 사위는 쥐죽은듯 고요했다. 스무나문쯤 되여보이는 초가집들이 고삭은 이영을 맞붙이고 서있는데 마을복판에 자리잡은 한집의 굴뚝에서 연기가 모락모락 오른다. 허줄한 담장을 두른 뜨락에는 배나무가 한그루 서있었다. 사람이 있는것은 분명한데 집주인이겠는지 적들이겠는지 알수 없었다.
(개 한마리 얼씬하지 않는군. 이렇든저렇든 불을 땐다는건 먹을것이 있다는걸 의미하지.)
김이 문문 나는 보리밥이 눈앞에 선히 보이며 군침까지 스르르 돌았다. 정찰병들을 데리고 다시 올가 하다가 굶주려 맥이 진한 그들을 데려온다는것이 마음싸지 않아서 그만두기로 했다.
한시간쯤 감시했으나 여전히 인기척이 없었다.
(대담하게 들어가서 알아보자.)
주위를 살펴보고난 그는 태연한 걸음으로 담장을 끼고 에돌아 슬금슬금 대문앞에 다가갔다. 그래도 별다른 기미가 느껴지지 않자 집뜨락에 성큼 들어섰다. 배나무아래 낡은 군화짝들과 패다 남긴 나무토막들이 널려있었다. 뜨락의 반대편 구석에는 벼짚나래를 덮씌운 김치움이 있었다. 얼른 그리로 몸을 숨겼다. 움안에는 삿자리를 깔았는데 사람이 거처했던 모양 누비이불이 있었다. 이불을 들추니 자그마한 항아리가 보였다. 쑥 손을 밀어넣어보았다. 절반쯤 들어있는 보드라운 가루가 만져졌다.
(밀가루 같은데…)
한웅큼 쥐여 입에 넣어보니 옳았다. 어찌나 반가운지 움켜쥐였던 밀가루를 입에 넣고 씹어삼켰다. 며칠만에 처음 먹는 음식이라 날가루여도 참깨고물처럼 고소하고 달았다. 또 한웅큼 쥐여들었다. 그 찰나 수림속에 남아있는 대원들의 모습이 떠올랐다.
며칠째 굶은 정찰병들… 복남이는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있을가?! 안돼, 혼자 먹다니. 가지고가서 같이 먹어야 해!
쥐여들었던 밀가루를 끝내 입에 넣지 못하고 다시 항아리안에 털어넣었다. 그리고는 항아리채 들고 움속에서 기여나왔다. 누비이불을 봐선 이 움안에서 누가 잠을 잔다는것을 알수 있다. 누구인지 나타나기전에 빨리 사라지는것이 제일일것이다. 하지만 부엌에서 풍겨오는 구수한 음식냄새가 발목을 놓아주지 않았다.
(무슨 냄샐가? 보리밥따위는 아닌데… 건빵인가? 아니면…)
부엌문은 활 열려있는데 그안은 조용했다. 기웃이 들여다보니 텅 비여있다. 더 깊이 생각해볼새도 없이 성큼 부엌에 들어섰다. 부뚜막에 걸려있는 소여물가마처럼 큼직한 무쇠솥의 뚜껑을 열어보니 쪄먹으려고 넣은 베개통만 한 빵덩이들이 한가득 들어있었다.
(이게 웬거야, 좋구나! 다 가져가자, 보자기가 있어야겠는데…)
거미줄이 건너간 당반우를 손으로 훑어보는 때 갑자기 밖에서 떠드는 소리가 들려왔다. 피뜩 내다보니 세놈의 괴뢰군장교가 뜰안에 들어서고있었다. 날래게 권총부터 빼들고 솥뚜껑을 소리 안 나게 덮어놓은 다음 방안으로 피해들어갔다. 항아리는 당반밑에 슬쩍 밀어넣었다.
(까짓놈들, 제껴버릴가?)
불쑥 치미는 욕망을 눌러앉혔다. 장교놈들이 있다는것은 아근에 사병놈들도 있다는것을 의미한다. 총소리가 나면 그놈들이 모여들것이고 추격을 받게 되면 요행 맞다든 음식을 가져가지 못할수도 있다.
방안에는 뒤문이 없어서 놈들이 방안에까지 들어오면 더 피할 곳이 없었다. 그런데 놈들은 방에 들어오려고 낑낑거리며 군화끈을 한참 풀고있었다.
어떻게 할것인가?
웃목에 놓여있는 두개의 헌 농짝이 눈에 띄였다. 지체없이 농짝문을 열었다. 그안에는 입지 못할 누더기옷들이 반쯤 들어있었다. 그것을 한쪽농에 재빠르게 옮겨놓고 그속에 긴 다리와 허리를 가까스로 밀어넣었다. 좁은 농짝안에 무릎을 꿇고 모로 비스듬히 쪼그리고 앉은채 소리없이 농짝문을 당겼다.
곧 방문이 열리며 장교놈들이 방에 들어왔다. 농짝문틈으로 놈들의 일거일동이 빤히 내다보였다.
소령계급장을 단 놈이 아래목에 상체를 돋구고 앉아서 상급행세를 하는데 대위놈과 중위놈이 그앞에 마주앉았다.
《여, 백구! 여직 안됐나?》
중위가 밖에 대고 되알지게 소리치자 사병 하나가 문가에 나타났다.
《범둥이 그 자식이 닭 튀러갔는데 여태 안와서 그럽니더.》
《야, 이 새끼야, 안주감 잘 해놓으라구 한지가 언젠데… 당장 흰망아지든 흰갈매기든 가져와!》
《알았습니더.》
사병이 사라지자 소령이 턱을 내둘렀다.
《거 너무 서둘지 말구 준비하라구 해. 시간두 많은데… 헌데 이자 기자식은 이름이 백구야?》
《그런건 아니구, 치흥이라는 본이름은 있는데 사병놈들이 그렇게들 부르지요. 헵뜬 망아지 같아선지 죽은 해연 같아선지는 모르겠지만 … 헤헤…》
횡설수설하는 중위를 마뜩지 않게 흘겨보고난 대위가 손을 내흔들었다.
《아아, 무슨 그런 상스러운 사병놈들얘길 참모장님앞에서… 저 홍참모장님, 돌아가는 시국얘기나 좀 해주십시오. 전쟁이 과연 어떻게 될것 같은가요? 승산 있을가요?》
소령은 입을 쩝쩝 다시고나서 머리를 가로 흔들었다.
《아직은… 기러나 믿어야지. 제임스고문관이 기러던데 미군사령부에서 다 생각이 있다더군. 헌데 문제야. 전번에 호수에서 인민군정찰병을 놓쳐버린담부터 내레 뒤골이 아파 죽을 지경이야. 또 미군 작전장교가 행불된데다가 방금 미국에서 들여온 신형땅크까지 녹아났으니… 잡아먹을건 돼지라구 고문관두 그래 배련대장 기자식두 그래 덮어놓고 이 홍성구만 못살게 구는데 혈압이 튀겠어. 긴데 늬들은 뭘 하는기야? 왜 인민군정찰병 그림자도 못잡는가 말야?》
《어휴, 말두 마십시오. 매일처럼 수색전을 들이대는데 귀신이 곡할노릇 아닙니까. 인민군정찰병들이 이 지대에서 움직이는건 분명한데 어디 그림자나 보입니까? 미군 작전장교가 없어지던 날만 해도 그렇지요, 수색작전을 펴볼라니까 미군어른들이 와― 쫓아오면서 우리한테 사격하는 바람에 두개 소대가 억울하게 황천으로 갔습니다.》
장광설을 늘어놓던 대위가 툭탁툭탁 손벽을 쳤다.
《아아, 미군은 거들지 말라구. 어― 어서 있는대루 시작하지.》
눈썰미있는 중위가 밖으로 나갔다가 술 세병과 삶은 통닭이 담긴 다반을 받쳐든 사병을 앞세우고 들어왔다.
《기래두 이번에 기 어른들이 수고를 해. 신형땅크는 용도 못써보고 저승길을 갔지만 새로 들여온 미군부대의 신형포들이 일을 칠 차부야.》
《예에? 신형포라구요?!》
《기쯤 알아둬. 아는게 많으면 황천길이 지척이 돼.》
지지한 술판은 오래도록 끝날줄 몰랐다. 눈앞에서 부어라 마셔라 하는 놈들의 작태를 지켜보느라니 며칠동안 굶은 위장이 막 뒤집히는것 같았다. 시장기를 참기 어려웠다. 한시간쯤 지나서부터는 딱 구부린 무릎이 쏘기 시작하더니 온몸이 지긋지긋해났다. 점심때가 가까와오자 머리가 얼얼하고 목이 뻣뻣해왔다.
《홍성구참모장님, 오셨던 김에 통돼지구이를 하구 가십시오. 사병놈들을 내보냈으니 인츰 올겝니다.》
《좋아, 좋아! 기럼 한판 하면서 기다리지.》
소령놈이 가방에서 화투목을 꺼내들더니 손바닥에 탁탁 쳤다. 화투질로 오후시간을 보낼 잡도리인것 같았다.
오후 늦어서야 사병놈들이 돌아왔는지 대위놈이 법석 떠들기 시작했다.
《밥통같은 자식들! 온 하루 쏘다니다가 빈손으루 돌아와? 네놈들은 모주리 처벌근무다!》
아마 돼지 잡으러 갔던 놈들이 허탕치고 돌아온 모양이였다.
실망한 소령놈은 작전가방끈을 감아쥐고 일어섰다.
《중대장, 내레 가겠다.》
《아니, 참, 참모장님! 이러시면 저희들이 죄송하지 않습니까. 우리 수색중대의 체면도 있사온데…》
《아 아, 너무 늦으면 안된다지 않아.》
《늦으면 뭬랍니까. 주무시고 래일 가시면 되지요. 그래두 〈서북청년단〉의 옛정이 있지 않습니까. 여긴 절대 안전합니다. 마을주민놈들을 몽땅 마산으로 쫓아버리구 텅 비워놨으니깐요. 비록 통돼지는 못 가져왔어도 통통 살진 검정개가 있습니더. 꿩대신 닭이라구…》
《하긴 검정개가 몸보신에 제격이지. 꿩대신 닭이 아니라 꿩대신 병아리라구 해야겠지만… 까짓거, 내레 한번 걸음한김에 저녁까지 먹고간다?!》
《예, 응당 그래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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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산님의 댓글
강산 작성일
(위에서 계속)
《예, 응당 그래야지요. 우리 성의를 아시구…》
또 술상이 차려지고 혀꼬부라진 소리들이 오가기 시작했다.
(이놈들은 전쟁판에 싸울 생각은 안하고 술놀이뿐이야?)
화가 살아올랐다. 하루종일 까딱 않고있으려니 진저리가 나다못해 실신해버릴 지경이였다. 팔다리가 과다들어 농짝문을 열 힘도 없을것 같았다.
저녁어스름이 깃들어 방안이 어둑해지자 놈들은 모두 밖으로 몰려나갔다. 뜨락에서 혀꼬부라진 소리로 주절거리는 소리가 한동안 들리더니 자정무렵이 되여서야 잠에 들었는지 조용해졌다.
이제는 행동할수 있었다. 학문은 전신의 힘을 깡그리 모아 농짝문을 열었다. 큰 바위를 밀어내는것만치나 힘들었다. 다리힘살을 주물러 긴장을 푼 다음에 발부터 내밀고 간신히 기여나왔다.
밖은 어둑컴컴했다. 풀벌레소리만이 청승맞게 씨르륵거리는 괴괴한 밤이였다. 술에 잔뜩 취한 장교놈들은 배나무아래 모포를 깔고 자고있었다. 보초병이 분명한 사병놈마저 총을 배나무에 기대세워놓고 웅크려 앉은채 잠들었다.
부엌당반아래 숨겨둔 밀가루항아리는 제자리에 있었다. 솥뚜껑을 열어보니 아침에 있던 빵덩이들은 다 없어지고 썰어먹던 빵쪼각들이 얼마간 남아있었다.
(개자식들, 다 처먹었군. 이거라도 가져가야지. 헌데 이걸 어디다 담아갈가?)
부뚜막 한켠에 보이지 않던 배낭이 있었다. 배낭안을 뒤져보니 통졸임통이 세개나 들어있었다. 아마 사병놈들이 먹으려고 따로 남겨둔 모양이였다. 빵과 통졸임을 배낭에 넣어 둘러멘 다음 밀가루항아리를 들고 부엌문을 나서려니 불쑥 생밀가루를 아예 익혀가지고 가면 좋겠다는 욕심이 들었다.
(생밀가루를 가지고 간대야 어떻게 생일을 쇠겠나. 놈들이 방금 잠들었으니 얼마든지 시간이 있다. 삶아서 가져가자.)
항아리의 밀가루를 솥에 쏟아넣은 다음 짐작으로 물을 쏟아붓고 주먹떡을 빚었다. 부엌문을 살그머니 닫고 아궁의 재무지를 헤쳐 후후 불어보니 불땀이 있었다. 구석쪽에 쌓여있는 땔나무를 밀어넣으니 인차 확 불길이 당겼다.
잠간새에 밀떡익는 냄새가 구수하게 풍기기 시작했다. 그 냄새를 맡으니 배에서 연신 쪼르륵소리가 났다. 다 익었는가 보려고 밀떡 하나를 꺼내서 씹어보니 꽤 먹을만 했다.
(됐어!)
먹을것을 가득 채워넣은 배낭을 메고 태연히 뜨락으로 나섰다.
배나무아래 누운 장교놈들은 굳잠에 들어서 드렁드렁 코를 골았다. 문득 소령놈이 베고있는 작전가방에 눈길이 갔다. 아까 말하던 신형포에 대한 정보가 그 가방에 들어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부쩍 욕심이 들었다.
(저놈의 작전가방까지 뺏아가지고 가자. 먹을것도 귀하지만 적정자료는 더 귀하거던.)
단검을 빼들고 배나무밑으로 살금살금 다가갔다.
드르릉― 크르릉 푸―
소령놈이 코를 요란하게 골아대는 바람에 옆에 꼬부리고누운 대위와 중위도 코고는 경쟁이라도 하듯 겨끔내기로 코소리를 높였다.
살그머니 꿇어앉아서 작전가방을 약간 당겨보았다. 만취된 소령놈은 입을 쩝쩝 다시더니 낑 하고 돌아누웠다. 그결에 머리가 툴렁 떨어졌다. 그놈은 눈도 뜨지 않고 가방을 두손으로 끄당겨다가 다시 벤다.
(어이없는 놈이로군.)
또 가방을 슬슬 잡아당겼더니 마침내 이상한 감촉을 받았는지 소령놈의 눈이 번쩍 떠졌다. 그리고는 하늘을 배경으로 두억시니처럼 보이는 그림자를 멀거니 올려보았다.
그 순간 서슬푸른 단검이 번뜩이며 놈의 목줄을 끊었다. 찍소리도 없이 늘어진 몸뚱이를 남겨두고 작전가방끈을 탈아쥔채 집뜨락을 빠져나왔다. 담장을 끼고 걸어가느라니 씨륵씨륵 풀벌레소리와 함께 드렁 드러렁 코고는 소리가 천연덕스럽게 그냥 들려왔다.
뜨끈뜨끈한 밀떡이 등에 닿아 견디기 바쁠 정도로 뜨거워났다.
(이게 식기 전에 동무들한테 가닿아야겠는데…)
진주에서 다친 허리가 아직도 불편한데 하루종일 농짝속에서 신고를 겪었더니 걸음이 제대로 되지 않는다. 비청비청 길을 더듬으며 얼마쯤 가노라니 오솔길이 별빛에 희미하게 드러났다. 한참 그 길을 따라가다가 수림속으로 방향을 꺾어들었다.
정신이 가물거렸다. 며칠을 굶은데다가 아직까지도 입에 넣은것이 별로 없어 기운이 진했다는것을 알아차렸다.
(밀떡 하나만 먹을가? 그럼 힘이 나겠는데.)
꼬부리고앉은 그는 배낭아구리를 헤쳐 밀떡을 꺼내들었다. 뜨끈하고 말큰말큰한 그것이 얼마나 탐스러운지 한입에 삼켜버리고싶었다. 허나 다음순간 복남이의 얼굴이 보였다.
그는 인차 도리머리를 했다.
(안돼. 동무들하구 같이 먹어야 해. 얼마나 날 기다리겠나.)
마음을 고쳐먹고 밀떡을 도로 배낭안에 넣었다. 그리고는 집요한 유혹을 목조르듯 배낭끈을 끙끙 졸라매고 힝 둘러메였다. 우중충한 참대숲을 헤치며 비척비척 산비탈을 톺아올라갔다.
휘영청 달도 밝다. 이제부터는 오동나무숲이다. 내려올 때 봐두었던 너럭바위를 지나고 후미진 산언덕을 넘었다. 이제 조금만 더 가면 새벽에 떠났던 소나무숲속에 이를수 있을것이다. 이제는 적의 추격을 받거나 길을 헛들 념려가 없어졌다.
후― 안도의 숨을 쉬는 순간 졸지에 다리맥이 쑥 빠지며 풀썩 주저앉고말았다. 손으로 무릎을 짚고 일어서려고 힘을 모았으나 도무지 마음대로 되여주지 않았다. 기력이 너무도 쇠진했다. 아픈 허리가 여전히 말썽이다. 에라, 기여가자. 하나 둘! 하나 둘!
팔굽을 기껏 내짚고 몸을 끌어당겼다. 등에 진 배낭이 허리를 내리눌렀다. 모로 기였다. 부근부근한 락엽이 덮인 땅이여서 한결 편했다. 한번더! 한번만 더!
안깐힘을 다 써가며 동무들이 기다릴 감시호 가까운 곳에 이르렀다.
《동무들!》
힘껏 웨쳤어도 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돌멩이를 찾아들고 나무통을 두드렸다.
떵! 떵! 떵!
귀를 기울이고 기다렸어도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모두 다른 곳으로 갔는가?! 혹시 수색대놈들의 습격을?!)
머리칼이 쭈빗 일어섰다. 무서운 예감이 예리한 칼날로 심장을 찌르는듯 가슴속에 스며들었다. 지휘관을 부르며 산속을 뒤지는 정찰병들, 산마루에서 그들을 지켜보며 음흉한 웃음을 머금는 수색대놈들, 기회를 노리던 놈들이 기관총을 쏘아댄다. 두팔로 허공을 그러안고 쓰러지는 정찰병들…
학문은 두손으로 머리를 감싸쥐였다.
(내가 무슨 실책을 또 범했는가! 아, 이 일을 어쩌면 좋단 말인가!)
다음순간 완강히 머리를 흔들었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호락호락할 사람들이 아니야. 아니야!)
그는 있는 힘을 다하여 다시 기고 또 기였다. 새벽에 숙영했던 위치에까지 이르렀다. 복남이며 김동호며 안창항이네들이 누웠던 자리에는 락엽이 두텁게 덮여있다. 흔적을 없애느라고 꺾어진 나무가지 하나 짓밟힌 락엽 하나 그냥 놔두지 않은것이였다.
(모두 어디 갔어? 모두들…)
그때였다.
《부과장동지!》
숲속에서 차용대의 여무진 목소리가 들리더니 김기전과 안창항이가 달려내려왔다.
《부과장동지!》
《부과장동지!》
그다음엔 모두가 달려나왔다. 모두가 맥이 없어 엎어지고 기며 달리며 다가와서는 마구 매달리며 소리쳤다.
《살아오셨군요!》
《어디 갔다가 이제야 오십니까?》
입술이 초들초들 말라터진 대원들의 모습들이 아프게 안겨들었다.
《우린 어떻게 하라고 버리고 가셨습니까?》
《이야― 우리가 그렇게 못미덥습니까? 말 한마디 하고가면 안됩니까?》
가슴을 파고드는 복남이의 머리를 두손으로 싸쥔채 학문은 어허허― 웃음소리를 내였다. 모두가 한덩어리가 되여 부둥켜안고 돌아갔다.
《동무들! 부과장동지가 힘들겠소. 그만 물러들나라구.》
라동수가 만류해서야 모두들 앉은자리에서 물러났다. 물러나서는 학문의 곁에 빙 둘러앉았다.
학문은 배낭을 턱으로 가리키며 김기전에게 말했다.
《특무장, 빨리 꺼내서 나눠주라구. 몹시 배들이 고프겠는데.》
배낭을 안아들던 김기전이 놀란 소리를 질렀다.
《이렇게 무거운걸 그 몸으로 메고왔단 말입니까?》
《뭘, 그쯤이야. 내 손으로 빚은건데 맛이 있겠는지 모르겠구만. 먹어보구 내 음식솜씨를 평가해보라우. 어허허…》
김기전은 두눈을 슴벅이며 빵과 밀떡을 나눠주었다. 학문은 자기 몫으로 차례진 빵쪼각 한개와 통졸임 한통을 복남이에게 주고 두개의 통졸임통과 밀떡 절반은 비상용으로 건사하라고 김기전에게 일렀다.
정찰병들은 밀떡 세개와 빵쪼각 두개씩 손에 들고 너무 좋아서 싱글벙글거렸다. 자기한테만 특별히 통졸임통이 차례지자 복남이는 무슨 영문인지 몰라서 방울눈을 깜빡거리며 학문을 바라보았다.
《복남이, 오늘이 동무의 생일이야. 집에서라면 어머니가 맛있는걸 푸짐히 차려주었겠는데… 용서하라구. 적후에 있으니 이게 다야. 전승의 날 생일상을 잘 차려주지.》
그때에야 리학문의 진정을 깨달은 정찰병들은 목이 메여 굳어졌다. 복남이의 눈가에는 맑은것이 맺혔다.
《고맙습니다, 부과장동지. 나 같은것의 생일이 뭐라구 목숨까지 걸고…》
채 말을 못 맺고 안장코를 쭝깃거리며 울먹거리는 복남이의 어깨에 한손을 얹으며 학문은 무한한 행복감을 느끼였다.
《부과장동지, 함께 듭시다.》
《어서들 먹으라구. 자, 그리고 내가 또 무슨 선물을 가져왔는가 다들 보라구.》
그제서야 정찰병들은 학문이가 그때까지도 메고있는 작전가방을 알아보았다. 학문은 가방을 벗어들고 시큰둥하게 물었다.
《어디 복남이가 알아맞춰보라우. 여게 뭐가 들어있을것 같애?》
《뭡니까?》
복남이는 호기심에 차서 무릎걸음으로 다가앉으며 되물었다.
《글쎄, 나두 몰라. 어디 같이 보자구.》
덧옷을 벗어 가리우고 손전지를 비쳐가며 모두 함께 작전가방을 열어보았다. 가방안에서는 한장의 지도가 나왔다.
지도를 살펴보던 학문은 깜짝 놀랐다. 그것은 마산―창녕―함안지대 미군부대들의 배치도였던것이다. 미군 포부대들의 전개지역이 각종 기호들로 표시되여있었다.
《히야! 이건 앉은자리에서 적들의 작전문건을 빼낸셈이군요.》
정찰병들은 환성을 올렸다.
(그러니 이 포부대들속에 참모장이라는 소령놈이 말하던 신형포가 배비되였다는게 아닌가? 신형포, 신형포라… 그게 어떤것일가?!)
의문이 꼬리를 물었다.
새벽녘에야 정찰병들은 쪽잠에 들었다.
학문은 로획한 지도를 펴놓고 라동수와 마주앉았다.
《중대장동무, 이 지도에 표시된 미군 포부대들속엔 분명 놈들의 무서운 음모가 숨어있다는 예감이 드누만. 놈들이 하는 말을 엿들은게 있는데 그 무슨 신형포를 새로 들여왔다는거요. 그게 어떤건지… 부대에선 아직 그에 대해 전혀 모르고있소.》
동수도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니 분명 이 미군포진지들속에 그 신형포라는것이 있다는게 아닙니까?》
《그렇소. 우선 그걸 알아내야겠소. 이건 우리 정찰병들의 의무가 아니겠소. 명령을 따로 받은것은 없지만 말이요. 우리의 좌표는 언제나 조국을 위한 전투장에 있어야 하지 않겠소.》
《알았습니다. 그런데 부과장동지, 한가지 의견을 이야기해도 좋겠습니까?》
뜻밖의 질문에 학문은 지도우에서 눈길을 들었다.
《뭔데? 뭐 제기된 문제가 있소?》
《있지요. 있어도 큰 문제가요!》
《어떤 문젠데?!》
《그건 부과장동지문젭니다.》
《응?!》
학문은 어망결에 눈을 크게 떴다.
라동수는 무릎옆의 가둑잎을 하나 뚝 따들어 휴지처럼 와락 움켜쥐더니 웅글은 소리로 말했다.
《부과장동지는 엄한것 같애도 때론 너무 인정이 무른게 탈입니다. 전번에 있은 일두 그렇구 이번 일두 같지요. 정찰병들한텐 엄격한 요구성을 제기하면서 왜 자신한테는 그러지 못합니까. 복남이의 생일을 쇠여주겠다고 사선에 몸을 마구 내대구… 그러다 일이 생기면… 부과장동지가 잘못되기라도 하면 우리 정찰대가 어떻게 되겠습니까?》
학문은 머리를 끄덕이였다.
《비판을 접수하오.》
《부과장동지, 대원들이 부과장동지를 얼마나 귀중히 여기는지 이걸 알아야 합니다. 사실 저도 막내의 생일을 알면서도 그런 모험까지 할 생각은 못했는데… 하지만 우리한테 이야기라도 할수 있지 않겠습니까. 모든걸 혼자몸으루 맡아안고 나서니… 정찰병들이 걱정합니다. 앞으론 제발 그러지 마십시오.》
말로 표현할수 없는 그 무엇이 학문의 마음을 지지고 지나갔다. 그는 뜨거움에 잠겨 라동수의 손을 꾹 쥐였다.
《약속하오. 내 꼭… 다신 그러지 않겠소.》
그리고는 무릎을 탁 치며 일어섰다.
《남은 시간에 눈을 좀 붙이고 래일 아침엔 조별로 쭉 빠집시다. 놈들이 포위환을 형성하기 전에 이곳을 빠져서 이 지도에 표시된 미군놈들의 포진지들을 하나하나 정찰합시다.》
《알았습니다.》
학문을 쳐다보던 동수는 류별나게 큰 두눈을 슴벅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