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편소설 전장의 행운아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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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2 장
명 령
4
려명전야였다. 자정부터 내리기 시작한 비는 새벽녘까지 부슬부슬 내리고있었다. 전방의 산야는 전쟁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는듯 내리는 비발에 몸을 내맡긴채 고즈넉한 안식에 묻혀있었다. 밤새도록 간단없이 들려오던 적들의 총소리도 즘즛해지고 밤새들의 울음소리마저 그쳤다.
《차렷!》
횡대로 늘어선 정찰병들은 나직하나 엄숙한 리학문의 구령소리에 절도있는 자세를 취했다. 그들앞에는 김일성장군님의 초상화가 모셔져있었다. 리학문이 호창하는 선서를 정렬한 정찰병들이 밖에 들리지 않도록 소리를 낮추어 복창했다.
선서의 구절구절에 비장함이 흘렀다.
《조국과 수령을 위하여!》
《조국과 수령을 위하여!》
…
《목숨걸고 임무를 수행할것을 맹세한다.》
《…맹세한다!》
《맹세한다!》
…
적후로 들어가는 길은 언제나 쉽지 않은 법이다. 적의 방어선만 돌파하면 되는것이 아니라 아군의 방어선도 남몰래 통과해야 한다. 정찰병들이 적후로 침투하는것은 그 누구에게도 비밀로 되는것이다. 그래서 정찰병들은 쥐도 새도 잠든 이른새벽에 아군이 차지한 서북산고지에 진출해야 했고 거기서 침투로정을 확정하고 밤을 기다려 적후로 들어가야 했다.
서북산고지는 아직 어둠속에 잠겨있었다. 보병친구들의 말에 의하면 해발 700m인 그 산에 오르면 진동과 함안, 마산만이 아니라 맑은 날에는 진해와 부산까지도 바라볼수 있다. 남해안의 벌방지대에 우뚝 솟아있는 산이여서 매우 중요한 전술적의의를 가지는 까닭에 적아간에 치렬한 쟁탈전이 벌어졌던 고지는 지금 캄캄한 어둠의 장막속에서 침묵을 지키고있었다.
구질구질 내린 비에 땅이 푹 젖었는데 음침한 하늘은 성차지 않는지 이른새벽부터 억수로 쏟아붓기 시작했다.
《넨장, 밤새 내린 비는 새벽에 멎는다는데 이 미친놈의 하늘은 때도 모르구 갈겨대누만.》
《하늘도 우릴 돕자는거야. 흔적을 말끔히 지워주지 않나.》
《글쎄 그건 고맙지만 옷이 젖으니 칙칙해서 그러지.》
《조금만 참으라우, 낮쯤엔 해가 떠서 말리워줄테니까. 그래두 땡볕속에 행군할 때보담이야 신선놀음이지 뭘. 흐흐…》
비발속에서도 정찰병들은 웃어댔다.
괴뢰군복장을 한 정찰병들을 맞아준 공병중대장은 호기심을 감추지 못했다. 정찰대의 활동을 도울데 대한 사단의 명령을 받은것은 그 한사람뿐이여서 다른 병사들의 눈에 뜨이지 않게 조심하며 고지돌출부에 은페된 감시소를 내주었다.
《저것이 바루 놈들이 차지한 고지입니다. 고지중턱엔 교통호를 세줄씩이나 파놓았는데 저―어기 큰 무덤처럼 둥싯하구 유개가 두드러진건 화점들이지요.》
《음, 꽤 높은 고지인걸. 소리없이 극복하기가 아주 힘들겠소.》
《예, 고지두 고지이지만 저 쏘구역이 문젭니다.》
학문은 공병중대장이 가리키는 곳을 살펴보았다. 아군이 차지한 서북산고지에서 놈들이 있는 곳까지는 500m정도 되는 개활지대가 누워있는데 날이 채 밝지 않아서 군데군데 서있는 철조망말뚝만 몇개 보일뿐 허허벌판같았다.
《저긴 성성한 나무가 한대도 없고 몸을 숨길만 한 홈타기나 언덕도 없지요.》
《저 아래쪽 철조망은 뭐요?》
《그건 놈들이 쳐놓은건데 지뢰원입니다.》
《음.》
아침이 밝기 시작하였다. 산야는 점점 자기의 륜곽을 선명히 드러내기 시작하였다. 비는 이미 멎었다. 푹 젖은 산천은 간밤의 악몽같은 시달림에 지쳐버린듯 처량하게 누워있었다.
전쟁전까지 마을이 자리잡고있었던 개활지대는 무너져앉은 집들과 담장, 나딩구는 달구지바퀴, 깨여진 독따위들이 널려있어 스산했다. 개울가의 오리나무도 파편에 허리가 부러졌고 외통달구지길은 포탄에 형체를 알아보기 어렵게 파뒤집혔다.
(저 개활지대를 극복하는게 제일 어려운 일이겠군.)
쌍안경으로 살펴보니 적들이 차지한 고지우에서는 이따금 적병들이 얼씬거렸다. 적의 방어진지가 예상보다 훨씬 더 견고하게 축성되여있었다.
주먹밥으로 점심을 대충 넘기며 감시했으나 전선을 뚫고넘어갈 통로와 방법을 신통히 찾을수 없었다.
(아무튼 지뢰원과 화점들을 확인했으니 그 짬으로 스며들어갈수 있다. 오늘밤에 침투하자.)
다시 해가 지고 어둠이 깃들었다. 멀리 바라보이는 산림의 륜곽이 우중충하고 어디나 괴괴한 정적만이 흘렀다. 도섭스러운 하늘은 매지구름을 서북쪽으로 산산이 몰아가더니 다시 남쪽에서 무거운 구름발들을 날려보내기 시작했다. 사위는 더 침침해졌다.
그때 갑자기 적진 멀리에서 우르릉우르릉 포성이 울더니 놈들이 쏘아대는 포탄이 날아오기 시작하였다. 포탄들은 아군진지에까지는 미치지 않고 모두 개활지대에서 터졌다.
《제길, 또 시작되는군.》
공병중대장이 두덜거렸다.
《그러니 매일 이 지랄이라는거요?》
《예, 날만 어슬어슬해지면 숱한 조명탄을 걸고도 마음 놓이지 않는지 탐조등으로 개활지대를 훑고 지금처럼 조명탄이 꺼지면 포사격을 퍼붓지요. 포탄이 남아서 몸살이 났는지.》
리학문의 머리속에는 한가지 생각이 번개처럼 떠올랐다.
(적들이 포사격을 퍼붓는 그 시각에 개활지대를 극복하여 전선을 통과하자. 되게 위험한 일이여도 전선을 소리없이 돌파하자면 그 길밖에 다른 방도가 없다.)
작렬하는 포탄의 화광이 번쩍하면서 천하지상은 온통 검붉은빛으로 가득찼다. 탐조등이 개활지대를 샅샅이 훑었다. 거기에 조명탄이 합세하자 사위는 대낮같이 환해졌다. 밤이 이슥해질 때까지 적들의 포사격이 계속되였다. 포탄은 개활지대를 몽땅 짓이겨버릴듯 맹렬하게 쏟아졌다.
드디여 리학문이 벌떡 자리를 차고 일어섰다. 정찰병들에게 이러니저러니 설명할것은 없었다. 지휘관의 행동언어를 말없이 받아들이는 그들이였다.
개활지대로 달리기 시작했다.
쾅! 스무나문걸음앞에서 포탄이 터지며 흙덩이들을 휘뿌렸다. 학문은 힘껏 내달아 그 포탄구뎅이에 뛰여들었다. 화약내가 페부를 찔렀다. 파편에 맞지 않도록 자세를 낮추고 화광에 드러나는 다음번 포탄의 파렬구역을 살피다가 재빨리 목표를 정하고 내달렸다. 그의 본새를 따라 모두가 여기저기 포탄구뎅이를 골라 은페해가며 필사적으로 달렸다.
갓 생겨난 포탄구뎅이에 뛰여들면 다음번 포탄에 맞지 않는다. 한번 사격한 포는 조준각이 조금이라도 변동되기때문에 설혹 다시 정확한 조준을 한다 해도 먼저번 포탄자리에 포탄이 다시 떨어질수 있는 확률이 거의 령에 가깝다. 포탄구뎅이에서 포탄구뎅이에로 모두들 단거리달리기선수처럼 내달렸다. 숨이 턱에 닿았다. 그래도 줄곧 뛰였다.
적들이 차지한 고지턱밑까지 2~3분이나 걸렸을가?
《지뢰!》
릉선이 시작되는 곳에 달려가 어푸러지며 학문이 나직이 주의를 주었다.
산기슭을 뱀처럼 감돌아지나간 철조망이 포탄의 화광에 드러났다.
김룡조가 말없이 앞서나가며 익숙한 동작으로 지뢰를 탐색했다. 탐색봉도 없이 총창으로 땅을 뚜지며 한치한치 기여나갔다. 지뢰의 인발선을 찾아쥐면 실토리를 감듯 슬근슬근 뭉그려서 한옆으로 밀어놓았다.
(저 친구 재간둥이란 말야. 못하는 노릇이 없거던.)
학문은 침착하게 손을 놀리는 룡조의 구부린 등어리를 보며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그가 정찰조에 인입된 후부터 덕을 보는것이 한두가지가 아니였다. 차용대가 못하는 무선기수리도 식은죽먹기로 해주고 고장난 자동차를 제꺽제꺽 수리해내군 하는 솜씨에 모두들 혀를 내두르군 했다.
날랜 동작으로 마지막철조망을 끊어버리고 지뢰를 해제한 룡조는 반고수머리칼이 비죽이 내밀려진 이마를 쓱 훔치며 학문의 귀전에 속살거렸다.
《다 됐습니다.》
《수고했소. 자 빨리!》
정찰병들은 포복전진해나갔다.
학문은 적들의 감시가 덜 미칠만큼 우묵진 홈타기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엉겅퀴며 가막사리 같은것들을 뭉개며 어둠속을 뚫고나갔다. 포사격구역에서 벗어나자마자 지척을 분간할수 없이 캄캄해졌다. 좀더 가면 적들의 화점들이 있을것이다. 그 화점들사이로 빠져나가야 했다.
학문은 낮에 새겨둔 기억과 륙감으로 화점들의 위치를 가늠해보며 한치한치 기여나갔다.
포사격이 한창일 때와 달리 어둠속에 정적이 흐르는 이때에 사소한 실수도 없도록 특별히 조심해야 했다. 사소한 실수로 약간한 소리라도 내는 때에는 놈들의 집중사격을 받을 념려가 충분했다. 스르륵 스르륵 맨땅에 쓸리는 옷자락소리조차 팽팽한 긴장감을 불러일으켰다.
학문은 손으로 앞을 더듬질해보며 인내성있게 기여나갔다. 갑자기 뭔가 손에 거칫거리는것이 있었다.
(이건 뭐야?!)
만져보니 껄껄한것이 멍석같았다.
(이런 산판에 무슨 멍석이 있을가?!)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했다. 인가도 없는 이런 곳에 멍석이 있을리 만무했다. 모포나 천막천 같은것이라면 놈들의 경계초를 의심하겠지만…
(혹시?!)
장교놈들 몰래 조용한 곳에서 도적잠을 자려고 어떤 사병놈이 깔아놓은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저 아래 개활지대에 마을이 있었으니 거기서 주어올수 있었을것이다.
그찰나 《아이쿠!》하는 비명소리가 바로 옆에서 터졌다. 뒤따라오던 김룡조가 멍석우에 누워자는 적 경계병놈을 짓밟은것이였다.
《누구얏?》
잠결에 덴겁해서 깨여난 적병은 겁에 질려 소리치면서 무작정 총을 쏘았다.
땅!
포탄이 터지는 소리래도 그렇게까지 놀라지 않을것 같았다. 총성은 벼락소리처럼 산울림을 길게 끄을며 어둠속의 정적을 깨바수었다.
《뭐야?》
장교인듯 한 놈의 쇠비린내나는 목소리에 뒤이어 시퍼런 전지불줄기가 휘익― 뻗어왔다.
학문은 룡조를 한손으로 더듬어잡아 수풀속으로 휘뿌리고 자기도 날쌔게 굴러내렸다. 그리고는 납작 엎드렸다. 다행히도 놈들의 눈에는 띠우지 않은것 같았다.
놀라서 모여든 놈들이 무슨 영문인지 모르고 왁작 떠들어댔다.
《야! 왜 함부로 총질이야?》
《공산군 안야?》
《글쎄요?!》
《임마! 남 잠도 못 자게시리, 눈깔은 어따 두고 총질해?》
《글쎄… 누가 내 정갱이를 콱 밟는 바람에…》
《히히… 쨔―식, 밟긴 누가 밟아? 가위눌렸던기로.》
놈들은 저들끼리 고아대며 수풀속을 여기저기 뒤져보다가 아무것도 발견되지 않자 두덜거리며 흩어져갔다.
《야, 이 쌍눔의 새끼야. 왜 네 혼자 뿔빠지면서 그래.》
《화점안에 물이 고여서…》
《그렇다구 저혼자 숨어서 씩씩 자? 뒈져두 화점안에서 뒈지랬지 않았어?》
《예, 가겠십니더.》
장교놈이 엉치를 걷어찬 모양인지 사병놈이 아부재기를 치며 언덕쪽으로 올라가버리자 주위는 인츰 조용해졌다.
학문은 안도의 숨을 내쉬였다. 다시 전진해갔다. 긴장한 신경전을 한탕 겪었더니 방향감각이 얼떠름해졌다. 하늘에 별이라도 있었으면 좋으련만 하늘은 심연같았다.
(야광지북침이 있었으면…)
불쑥 이런 욕심이 들었다.
전진해온 뒤쪽과 방금 놈들이 걸어가는 소리가 들려온 포진지방향을 가늠해보며 방향을 어림짐작으로 정하고 동남쪽이라고 여겨지는 곳을 향해 기여나갔다. 반시간쯤 그렇게 전진한것 같았다.
(이쯤되면 놈들의 화력선은 지나왔을텐데…)
학문은 룡조의 귀전에 입을 가져다대고 물었다.
《한 삼십분 됐지? 떠난지가…》
《뭘요, 세시간도 넘었습니다.》
아군진지에서 출발한 시간을 묻는줄로 아는 모양이였다. 어이없어서 입을 다실수밖에 없었다.
(괜히 물었지. 삼십분은 넘었을거야. 그만한 시간이면 놈들의 방어계선을 넘었을것이고…)
화점들이 배치된 계선을 지나왔다면 이제는 허리펴고 내달려도 된다. 그러나 아직 방어구역을 벗어나지 못했다면 적들에게 발견될수 있다. 어떻게 그것을 확인할수 있을가.
마음속에 시간의 흐름은 언제나 일정하지 않은 법이다. 어느때는 순간이 천추같고 어느때는 하루가 순간처럼 느껴지는것이다.
(이런 때 야광시계가 있었으면 참 좋겠군.)
코를 베여가도 모를 어둠속에서 륜곽도 알아볼수 없는 손목시계를 볼에 비벼보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전지불을 켜보면 좋겠건만 그럴수도 없다. 창황중에 그런 호사스러운 생각을 한것이 어처구니없었다.
(그렇지. 저놈들 편한 잠을 못 자게 할겸…)
잠시 생각을 굴려보다가 손으로 땅을 더듬어 닭알만 한 돌멩이를 찾아냈다. 그것을 지나온 뒤쪽, 놈들이 있으리라고 짐작되는 곳을 향해 힘껏 던졌다. 면바로 화점이나 바위에 맞았는지 딱! 하는 소리가 들리고 바랐던대로 그쪽에서 왁작 소동이 일었다.
《누구얏?》
잔뜩 겁에 질린 고함소리와 함께 총소리가 몰방으로 터졌다. 그때를 타고 학문은 벌떡 몸을 솟구고 앞으로 내달렸다. 적들이 뒤에 있다는것이 확실한 이상 방향을 삭갈릴것이 없었다. 가둑나무며 댕댕이덩굴이며 마구 걷어차며 달렸다. 총소리와 고함소리에 웬간한 소음은 묻혀버리기때문에 마음놓고 달릴수 있었다.
이런 때 대오의 성원들은 거리간격을 늦추지 말고 앞사람의 뒤를 성실하게 따라야 한다. 경험이 어린 대원들은 자기가 북으로 가는지 남쪽으로 가는지 미처 구분하지 못한다. 산 하나를 놓고 온밤 빙빙 도는것 같기도 하고 북쪽을 남쪽으로 착각하는 경우도 있다. 그럴 때 대원들은 오직 지휘관을 믿고 앞사람을 따라간다. 그래서 앞장에 선 지휘관에게는 남달리 독특한 감각과 예민한 촉각이 있어야 하는것이다.
정찰병들은 훈련과정에 익힌대로 장구류를 제대로 착용하여 일체 소리를 내지 않으면서도 일단 정황이 생기면 즉시 사격할수 있게 총구를 앞세우고 뛰였다. 모두가 대오에서 떨어지지 않고 열심히 따랐다. 학문의 의도는 말없는 행동으로 전달되는데 칠흑같은 어둠도 정찰병들 특유의 수감력을 마비시키지 못했다. 마치 비둘기가 자기 둥지를 찾아가듯 정찰병들은 어두운 험산속에서도 목적한 지점을 향해 정확히 달려갔다.
이제는 전선을 넘어섰다. 한숨 돌리며 길을 찾아 행군할수도 있었으나 학문은 시간을 최대한 쟁취하고 은밀성을 보장하기 위해 길없는 험한 산발을 타고넘으며 정찰조를 이끌어갔다.
인적없는 산발이 끝없이 흘러갔다. 려명을 차비하는 산천은 더욱 짙은 어둠속에 잠겼다.
경사급한 내리막길에서는 가시나무가 얼굴을 찔렀다. 봉우리 하나를 넘어서면 높은 산봉우리가 또 막아서고 거기에 올라가면 까마득한 벼랑이 앞길을 가로막는다. 가도가도 끝없이 다가서는 봉우리와 봉우리, 깊은 골짜기들과 깎아지른 벼랑들…
에돌 시간이 없어 톺아오르기도 하고 날아내리기도 한 칠칠야밤의 간고한 행군, 이 세상천지가 온통 산과 벼랑으로 덮여있는것만 같았다.
길이 얼마나 축났고 이제 얼마나 남았는지 그것조차 정확히 가늠할수가 없었다. 헉헉 단김을 뿜으며 모두들 묵묵히 달렸다. 행군중의 말은 일체 금지되여있지만 설사 말을 하재도 숨이 차서 누구도 입을 벌릴수 없었다. 나무가지에 걸채여 꼬꾸라지는 복남이를 학문의 드센 손이 나꿔채세웠다.
문득 대오가 멎었다. 마침 동쪽하늘이 희붐히 들리우는 때여서 막아선 칼벼랑을 가늠해볼수 있었다. 고개를 한껏 제쳐야 벼랑끝이 보였다. 김동호가 갈구리 달린 바줄머리를 휘휘 내두르다가 힘껏 던져올렸다. 바줄은 벼랑중턱에 뿌리박은 소나무에 칭칭 감겼다. 그 바줄을 타고 날랜 김룡조가 다른 바줄끝을 허리에 감고 바라올라갔다. 담배 한대 피울 사이도 안되여 벼랑끝까지 바줄이 늘여졌다. 학문의 눈짓구령에 따라 한사람한사람 벼랑을 톺아올랐다. 그다음엔 또 구보행군… 두개의 골짜기는 바줄을 늘이고 건넜다. 그리하여 아침이 밝으려면 아직도 이른 때 정찰대는 목적지에 이를수 있었다.
《됐소. 여기가 삼곡리요!》
목적지에 왔다는것을 알자 모두가 그 자리에 풀썩풀썩 쓰러졌다. 김동호는 땅에 어푸러져 황소숨을 씩씩거렸다.
학문은 주변지형부터 살펴보았다. 높은 산을 등지고 앞쪽엔 넓은 들판이 펼쳐져있었다. 지도를 펴놓고 손전지를 비쳐가며 목적지에 정확히 도착했는가를 재삼 확인했다. 그러는 동안 한숨 돌리고나서야 정찰병들은 서로 얼굴을 마주볼 여유가 생겨 한사람한사람 일어나앉았다.
《엉? 이게 누구요? 덕천이가 맞긴 맞아?》
김동호가 덕천의 어깨를 두드리며 떠들었다.
《내가 어쨌게요?》
《보동보동하던 볼은 어델가구 광대뼈만 남았어?》
제 볼을 손으로 쓸어보던 덕천이도 어마지두 놀란 소리를 질렀다.
《에게나! 정말?!》
정찰병들은 하루밤사이에 몰라보게 훌쭉해진 얼굴을 서로 마주보며 손가락질하며 웃었다.
《이번에 돌아가면 고향에 보낼 기념사진을 찍자 했는데 글렀는데.》
《찍으면 찍었지 못 찍을건 뭐게요?》
《그렁하면 고향사람들이 걱정하지 않겠나.》
《그건 걱정말라구요. 사진이 아니라 그림을 보내면 돼요. 내가 멋쟁이뚱뚱보로 그려주지요.》
시들해진 동호를 달래는 덕천의 익살이였다.
지도를 접은 학문도 꺼칠해진 볼을 한손으로 쓸어보며 느긋이 웃었다.
《모두들 힘들지? 우린 하루밤사이에 거의 200리를 달려온셈이요.》
《그렇습니까? 군대에 나와서 도보로 그렇게 달려보긴 첨인데요.》 라동수가 자못 긍지롭게 응수했다. 《우리가 이렇게 깊숙이 들어올줄 적들은 예상도 못할겁니다.》
《그럴테지. 그러나 힘든 고비는 이제부터요. 이밑에 자동차길이 있소. 오늘은 여기서 좀 쉬면서 감시정찰을 해보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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