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편소설 전장의 행운아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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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 장
고향길
4
방금 인천항을 빠져나온 《화랑》호는 남쪽으로 항로를 꺾더니 부지런히 남하하였다. 부랴부랴 출항하느라 설비들에 최대부하를 건 때문인지 선실들은 망쳐버린 콩나물시루속처럼 화끈화끈한데 일등선실도 숨막힐 정도로 무더웠다.
타래쳐오르는 룡의 험상궂은 모습을 란붓질로 그려놓은 휘장이 치렁치렁 드리워진 선실의 길둥그런 창문가에 다가선 배달환중령은 공포에 질린 눈으로 멀어져가는 륙지를 바라보고있었다.
불과 이삼일째 겪은 일들이 무서운 악몽처럼 여겨졌다. 처음 38°선에서 북침전쟁도발의 선두에 섰을 때는 압록강으로 천렵을 떠난 기분이였다. 아침은 해주에서, 점심은 평양에서, 저녁은 압록강에서 먹게 되리라고 입버릇처럼 말하던 제임스고문관에 대한 믿음이 철석같았기때문이였다. 귀맛당기는 그 《명구》는 반공《맹장》으로 불리우는 《국군》 1사단장 김석원이가 뇌까린것이였지만 실은 미군어른들이 그에게 배워준것임을 달환은 제임스를 통해서 알았다.
제임스의 확언에 의하면 인민군대는 전쟁이 일어날줄 모르고 무방비상태라는것이였다. 증빙할수 있는 사실은 인민군대의 주력이 38°선에서 퍼그나 멀리 떨어진 종심에 그냥 남아있는것이라고 했다. 여러 경로를 통해 확인해본데 의하면 그것은 사실이였다. 6월 25일을 바로 앞둔 때까지도 북조선은 남북총선거를 통해서 나라를 평화적으로 통일하자는 제안을 내놓고있었다.
(흥, 평화통일이라니, 되지도 않을 소리!)
제반 실태로 보아 분명한것은 북조선이 전쟁에 준비되여있지 않다는것이였다. 이런 절호의 기회를 때맞추 타서 막강한 미국과 함께 면밀한 준비를 갖추고 전쟁에 진입한 《국군》을 청소한 북조선이 어떻게 막아낸단 말인가.
배달환은 제임스의 호언장담에 한수 더 떠서 전쟁만 시작되면 《국군》은 코노래를 부르며 평양성에 입성할수 있을것이라고 사병들을 훈계했었다.
그런데 일은 어떻게 번졌던가. 일요일에 늦잠을 자고있을게라고 생각했던 인민군대는 건드리자마자 그날 아침으로 성난 파도와 같이 반격에로 나왔고 상상도 할수 없을 속도로 《국군》을 압박하여 38°선 멀리로 쳐내깔렸다. 지금 그들은 서울을 타고앉았을것이고 수원으로, 대전으로 끝없이 쫓아내려올것이다. 일단 성난 호랑이가 그 무엇을 가릴것인가.
공화국경비대와 인민군 선두부대의 맹타격에 련대의 과반수를 졸지에 잃어버린 판에도 하느님의 덕분으로 건재한 중화력중대들을 제임스의 지시에 따라 판문과 장풍린접의 자그마한 릉선에 배치했었다. 포와 중기관총으로 장비한 중화력중대들만 제구실을 해도 련대의 방어임무를 꽤 감당할만 했었다. 헌데 하늘에서 떨어졌는지 땅속에서 솟아났는지 돌연히 나타난 인민군대한테 쫄딱 녹아났다.
정향나무가 서글프게 피여웃던 그 운명의 언덕에서 뜻밖에 맞다들었던 《국군》장교복차림을 한 그 사나이의 얼굴이 무섭게 확대되여왔다.
기억력은 달환을 배신한적이 없었다. 그는 분명 왕년의 꼴머슴군 리학문이였다.
(창황중에 잘못 보지 않았을가?! 아니, 아니야, 분명해! 분명 어릴 때 모색이 있거덩. 그자가 날 알아봤을가? 알아보지 못했을수도 있지, 날래게 달아뺐으니까. 그러니까 그놈이 인민군대 군관이란 말이지.…)
인천항까지 다쫓아오던 인민군부대도 바로 그자들일수 있다는 생각에 몸서리쳐졌다. 그 머슴놈한테 덜미를 잡히웠더라면 어떻게 될번 했는가. 제임스고문관과 함께 죽을 기를 써가며 배란간에 매달려오른 덕분에 지옥행을 면하고 이렇게 살아난것이였다.
다도해속의 남해도! 거기서 어린시절을 보내던 추억이 가슴을 애잔하게 지져댔다. 고래등같은 기와집, 문전에 펼쳐진 푸른 바다, 학교에 갔다올 때면 공손히 마중나와 업어다주던 머슴아이 리학문…
질풍쳐나오는 인민군대의 기세를 봐선 반도의 최남단인 남해도라고 해도 안전담보는 있을것 같지 않았다.
속았다. 제임스고문! 허세부리기를 기생춤추듯 하는 저 작자한테 속히웠다.
배달환은 해면침대우에 걸터앉아 샴팡을 마시며 주걱처럼 긴 턱을 흔들어대는 제임스를 흘겨보았다.
피빛샴팡술병이 놓인 참대탁자우에는 제임스가 호신부로 늘 목에 걸고다니는 황금십자가가 팽개친듯 내던져져있었다. 수난을 겪으면서 고통에 몸을 뒤트는 예수의 형상을 내려다보느라니 제 몸건사조차 못해서 하느님한테 행운을 비럭질하는 제임스같은것의 장단에 놀아나며 감히 38°선을 넘어섰던것이 후회되였다.
운명의 그 릉선에서 어떻게 하나 인민군대의 공격을 막아보려 했건만 배달환의 사병들은 몰살당했고 련대장인 그와 고문관인 제임스만이 간신히 살아서 도망칠수 있었다.
이제 남쪽 어디에서 뭍에 오르면 군법회의가 그를 기다릴것이고 자칫하면 총살을 당할수도 있을것이다. 인천에서 남해도에 있는 아비한테 긴급전보를 보내기는 했으나 안심할수가 없었다. 이 란리판에 전보가 제대로 가닿겠는지도 문제거리이지만 아무리 거부라 해도 늘그막에 쇄진해버린 가세인데다가 원체 린색한인 아비가 아들을 위해 집가산을 굴우물에 말똥 쓸어넣듯 하겠다고 하겠는지 확신이 가지 않는것이였다.
《미스터 배! 고민하지 마시오. 우린 이렇게 살아있지 않삽네까. 이리 와서 샴팡이나 마십세다.》
파랑눈에 코마루가 날카로운 전형적인 유럽인모색인 제임스는 큰 손을 허공에 쳐들어 기지개를 켜고나서 씨벌였다.
《우리가 살아있으면 18련대도 살아있는거나 한가지입네다. 사병들은 얼마든지 생길테니까. 장송곡은 아직 울리지 않았삽네다.》
《그럼?!》
《미국이 있지 않삽네까. 이제 막강한 미국이 용을 쓸것입네다. 미국을 믿으시오, 미국을!》
제 손으로 따른 샴팡을 거퍼 마셔대며 으시대는 제임스앞에 국민학교 생도처럼 공손히 다가선 배달환은 신기한 현훈증에 포로되여 그를 바라보았다. 그처럼 쓰거운 패배를 당하고서도 조금도 주눅들지 않는 그가 신화속에서 불굴하는 전쟁의 신 포세이돈처럼 여겨졌다. 사람이라면 꿈속에서도 몸서리칠 괴멸의 참상을 이 사나이는 한갖 도락을 논것만치나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것이였다.
(과시 서양인들은 속통이 크다더니… 동양인들과는 근본 다르거덩.)
배달환은 자기의 몸에도 동양인의 피가 흐르고있다는데 생각이 미치자 수치감이 들어 얼굴을 붉혔다. 방금전까지 잔뜩 뻗쳐오르던 원망의 서슬이 사그라들면서 제임스의 눈치를 살피게 되였다. 제임스는 흠흠 코김을 내불었다.
《덩께르크라는데서도 미군이 일시 내쫓기웠지만 끝내는 이겼삽네다. 전쟁도 유희의 일종입네다.》
그 한마디에 달환은 감탄을 금치 못했다.
《과시… 저, 고문관님, 그러니 미군이 곧 참전한다는 그 말이겠지요?》
《그야 물론! 당신은 그래 우리 미국이 〈국군〉을 믿고 팔짱만 끼고있을줄 알았삽네까? 흥! 〈국군〉은 미군이 이 전쟁판에 내든 가장물에 불과한거라니까 그럽네다.》
달환은 눈거죽을 치떠올렸다. 아무리 숭상하는 미군이래도 《국방군》을 맞대놓고 모욕하는데는 밸머리가 꿈틀거리는것이였다. 중령인 자신이 대위에 불과한 햇내기 미국인앞에서 굽신거리지 않으면 안되는 굴욕감까지 겹쳐들어 오강뚜껑으로 랭수를 마신듯 속이 다 메슥메슥해났다. 허나 다음순간 그 모든것이 부정할수 없는 운명인것을 깨닫고는 렬세감에 사로잡혀 뱁새눈을 내리깔았다.
《자, 무료한데 라지오나 들어봅세다. 중령, 라지오를 켜시오.》
발끝걸음으로 창문옆에 놓인 탁자앞으로 다가간 그는 라지오스위치를 꾹 눌렀다. 파장을 조절하는데 이외에도 평양방송이 걸렸다. 고의적인 조작이라고 걸고들면 어쩌나 하여 제임스를 돌아보았더니 그는 한다리를 흔들적거리며 머리를 끄덕거렸다. 그냥 두어도 무방하다는 신호였다.
귀에 익은 녀방송원의 힘있는 목소리가 선실에 울려퍼졌다.
《미제와 리승만괴뢰도당의 불의적인 침공을 물리치고 즉시적인 반공격으로 넘어갈데 대한 경애하는 김일성장군님의 명령을 받아안은 영용한 조선인민군부대들은 27일 현재 옹진, 연안, 개성, 의정부 등 남조선의 넓은 지역을 해방하고 서울방향으로 육박하였습니다.》
배달환은 혼비백산하여 저도 모르게 라지오스위치를 눌러버렸다. 무서운 공포가 엄습하며 등골로 서늘한것이 쭈르르 흘러내렸다. 이 모든것이 부인할 여지가 없는 사실이라는것을 그는 너무나도 잘 알고있었다.
제임스는 공포에 질린 달환을 조롱기어린 눈으로 구경하면서 미묘한 미소를 지었다.
《왜 그럽네까? 무섭삽네까? 그러면 서울방송을 켜시오.》
달환은 떨리는 손으로 라지오돌리개를 돌렸다. 애교짙은 녀방송원의 목소리가 귀간지럽게 흘러나왔다.
《서울 그리스도교방송입니다. 지금 전선형세는 시간이 갈수록 아군에게 유리하게 전변되고있습니다. 리승만대통령은 중앙청에서 국방군의 형세가 더욱더 강화되고있다고 언명하면서 전쟁상황에 대해 락관을 표시했다고 합니다. 26일 국방부는 국방군 제17련대가 일거에 해주를 점령했다고 발표하면서 조만간에 영용한 국군장병들은 평양으로 진공해나갈것이라고 확언했습니다. 같은 날 채병덕참모총장은 국회에 출두하여…》
방송소리가 뚝 끊어졌다. 제임스가 벌떡 일어나 꺼버린것이였다. 무엇때문에 갑자기 흥분한것인지 알수 없었다. 그는 위세를 부리기 좋아하는 성미답게 권총처럼 펴든 두손가락으로 허공을 찌르며 성급하게 오락가락하기 시작했다.
《보란 말입네다. 전탕 이판이란 말입네다. 거짓말쟁이, 비겁쟁이들! 리승만은 수원으로 도망치고 국군이 한강너머로 밀려났는데도 이런 허튼소리만 합네다. 너무나도 뻔드름한걸 숨기려들거던. 우리 미국이 바란것은 국군이 3일간만 버텨내는것이였삽네다. 인제는 우리 미군의 전격적인 작전이 시작될 차례인데… 이제 세상은 보게 될것입네다. 미군 한개 사단, 아니, 둬개 련대만 개입해도 조선전쟁의 형세가 싹 달라질텐데 당신네 고루한 량반님들은 동에도 닿지 않는 그런 너절한 거짓말만 늘어놓고있으니… 환멸스럽삽네다. 이제 뭍에 오르면 상륙한 미군의 선두에서 본때를 뵈서 쓸개빠진 비겁쟁이들의 버릇을 떼주겠삽네다!》
호언장담하는 그 기세는 《대통령》이나 국방장관에게나 어울릴만큼 멋들어진것이였다. 제임스는 자기의 객기가 스스로도 흡족해났던지 너털웃음을 웃어댔다.
제임스의 호기에 비하면 배달환은 역시 소인이였다. 그는 머리를 주억거리다가 전쟁전반을 휘젓는 고문관앞에서 미거하게도 자기의 신상걱정에만 골몰해있었음을 드러내고야말았다.
《헌데 이제 뭍에 오르면 저의 상급들이 가만있지 않을텐데요. 더우기 횡포무도한 백참모장은… 아무래도 제임스고문관님이 노력해주셔야 할가봅니다.》
사단장은 황천으로 갔으나 금강계선에서 방어진을 구축하고있다는 무지막지한 참모장은 한개 련대를 한강물에 소금녹이듯 해버린 배달환을 결코 가만놔두려 하지 않을것이다.
저승은 결코 먼곳에 있지 않다. 이런 때 제임스가 함께 있다는것은 얼마나 다행한 일인가. 속통이 바다같은 이 양키사나이는 순순히 저승길을 밟으려 하지 않을것이다. 그의 옷자락만 꼭 붙들고있으면 나도…
한창 기세가 올랐던 제임스는 맥이 진했는지 골살을 찌프리며 탁자앞에 되돌아가 해면침대에 털썩 주저앉으며 샴팡주가 절반쯤 고인 술잔을 거머쥐였다. 턱밑에까지 쳐들었지만 마시지는 않고 백열등이 흔들거리는 선실천정을 쳐다보며 다시 조폭한 웃음을 터쳤다.
《그까짓 국군 한개 련대가 뭐이라구… 제물을 바친것으로 생각하면 됩네다. 걱정하지 말라는데 그럽네다. 더우기 이게 불룩한 당신네 춘부장이 있지 않삽네까.》
제임스는 갈퀴같은 손으로 제 옆주머니를 툭툭 쳐보였다.
남해안의 일등갑부로 소문난 배덕구를 그는 짬만 있으면 입에 올리군 했다. 전쟁이 종결되고 본국으로 돌아가는 날 남해도에 꼭 들려가겠다고 벼르는 그였다. 그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모를 배달환이 아니다.
능청스러운 웃음을 짓고 제임스는 장담했다.
《난 우리 미군사령부에 당신의 영용한 무훈을 보고하겠삽네다. 사선을 넘어본 용사로서 당신은 되려 승급하게 될는지도 모릅네다. 이히히, 아하하…》
그 웃음뒤에 스며있는 뜻을 어렵지 않게 알아차릴수 있었다. 제임스의 말은 곧 윌리암 킨사단장의 말이나 같은것이다. 킨사단장의 말 한마디면 《국군》의 그 누구도 감히 론리를 따지지 못할것이였다.
《고맙습니다, 정말 고맙습니다.》
배달환은 두손을 모아쥐고 고개를 갑삭갑삭 숙여보였다.
바로 이 제임스는 윌리암 킨사단장의 외조카이다. 쉬쉬하는 말에는 외조카가 아니라 정부가 낳은 사생아라고도 했다. 외조카이든 사생아이든 그따위것이 문제가 아니다. 제임스고문관과 윌리암 킨사단장이 범상치 않은 사이라는것만 적실하면 그만인것이다.
(음, 죽을수에 빠지면 살수가 나진다더니.…)
패전의 쓴맛을 보고 쫓겨가는 길이라는것을 감감 잊은듯 희희락락하며 술잔을 거듭 기울이고있는 제임스를 배달환은 경탄에 넘친 눈매로 쳐다보게 되는것이였다.
(과시 미국인들은 속통이 크다더니… 한국인들과는 근본 다르거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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