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편소설 계승자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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림원국이 서문거리의 장대재둔덕에 자리잡은 사로청중앙위원회청사, 폭이 좁고 길죽한 창문들이 동남방향으로 나있는 벽체 두꺼운 석조건물의 3층에서 위원장사업을 시작한지도 벌써 한달이 넘었다.
인계를 마친 장주천이 그의 잔등을 도량있게 두드려주며 잘해보라고 한마디 던지고 청사를 떠나갔을 때 그는 넓다란 위원장사무실 복판에 있는 긴 앞상곁에 굳어져있었다.
갈매기머리를 단정히 빗어넘긴 그처럼 나이젊은 서기가 몇번이나 들어왔으나 원국은 닥쳐온 엄청난 사업의 중하와 현실감을 의식한데서 오는 흥분과 착잡한 심리에 휩싸여 무엇부터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 몰라 어리둥절해 서있기만 하는것이였다.
그는 네개의 색갈이 다른 전화기가 주런이 놓이고 옥돌장식의 탁상등과 사무용품이 그쯘히 갖추어진 밤빛 옻칠이 번쩍거리는 량수책상에 다가갔으나 팔걸이걸상에 앉아 볼념조차 내지 못했다.
그는 깔개에 모직천을 씌운 딱딱한 걸상을 앞상에 당겨다놓고 새 사업노트의 첫 페지를 펼쳤다.
지나온 사로청중앙위원회사업의 우점과 성과, 오유, 침체상태를 료해하고 분석해보는것으로부터 첫 걸음을 뗐다.
태반이 새로 임명된 부위원장들과 부장, 부부장, 책임지도원들의 낯을 익히고 그들의 사업수준과 성품을 파악하는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였다. 조직부, 선전선동부, 국제부, 대학생부, 학생소년부, 체육부… 나라의 600만 청소년들의 정치적생명, 사상교양사업을 책임지고 그들을 지덕체를 갖춘 혁명의 후비대로 이끄는 정치조직의 상부구조를 이루는 기둥들인 중앙사로청의 그 모든 부서들은 인체를 이루는 장기들과 같이 그 어느것 하나 중요치 않은것이 없었으며 따라서 위원장은 매 부서들과의 사업에 모를 박고 착실히, 심도있게 벌려나가야 하는것이다. 사업계획서비준, 과업수행을 위한 협의회, 분공, 활동정형료해, 총화…
림원국은 자기의 팔다리와도 같은 중앙사로청위원회 각 부서들과의 사업에 많은 시간을 바쳤다. 설익고 생소하고 어설핀 구석들이 적지 않았으나 그러한 사업과정자체가 그를 배우게 하였고 한걸음씩 경험을 쌓아나가게 하는것이였다.…
청사의 복도로 청년일군들의 분주한 발걸음소리가 들리고 사무실들에서 사업을 토론하는 열정적인 목소리가 높았다.
원국은 자기의 사고와 의지와 지혜로 중앙사로청이라는 커다란 정치기관이 활기있게 움직이고 당중앙위원회 청년사업부와 토론한 지시와 결정들이 도사로청들에 그대로 내려가 토의되고 집행되는것이 기뻤다.
그는 가슴뿌듯한 긍지와 자부심을 느꼈으나 아울러 자기로 하여 무엇이 잘못되지나 않나 하는 위구심, 걱정이 불쑥 들기도 하는것이였다.
탐구와 신심, 열정, 불안과 번민, 초조감, 기쁨이 뒤섞인 종잡을수 없는 나날들이였지만 그는 차츰 사업에 익숙하였고 전에는 그렇게 까마득히 높이 보이던 중앙사로청위원장으로서의 자기 위치와 존재, 자신감을 현실적으로 무게있게 체득해나가는것이였다.
그한테는 낮과 밤이 따로 없었다.
중앙사로청합숙에서 저녁밥을 날라다 먹었고 사무실형광등은 그의 열정과도 같이 밤깊도록 꺼질줄 몰랐다. 그 한달사이에 볼이 통통하던 서기도 그처럼 훌쭉하게 여위였다.
창밖에서는 진눈까비가 흩날리고있었다. 하늘에는 형체없는 구름이 짙게 드리워 벌써 재빛 음영이 창문에 휘장을 치는것 같았다.
전화종소리와 청년일군들의 크고작은 말소리, 들락거리는 사람들의 조심성없는 발소리… 사업으로 충만된 분주한 하루시간에서 좀처럼 얻어지기 어려운 고요가 깃들었다.
원국은 서기를 찾아 신호종을 누르려다 말고 사이출입문을 열어보았다.
서기는 전화기옆의 사업노트에 코를 박고 졸고있었다.
원국은 사이문을 조용히 닫고 앞상옆을 거닐었다.
오래된 널마루가 조금씩 삐걱거렸다. 그는 창문옆에 가 섰다.
바깥창턱에 눈꽃이 성글게 쌓이고있었다. 진눈까비는 서문거리의 키낮은 집지붕들과 가로수와 포장길을 하얗게 덮어갔다.
대동강너머 멀리 재빛하늘공간에 가득한 눈발속을 더듬느라니 바다가도시의 교외마을… 파도소리 간간히 들려오는 집, 홀로 계시는 어머니가 그리워진다. 차성규가 그더러 림시주택에 빨리 어머니를 모셔오라고 일렀건만 그는 사업을 료해하고 파악하고… 발을 붙인 다음 한가한 시간이 나지면 이사를 하겠다고 고집을 세웠다. 그러나 일단 중앙사로청이라는 큰 배의 타륜을 잡고 항해를 시작하니 자기의 사생활을 위해 좀처럼 틈을 낼수 없었고 그러다가 아주 뒤로 미뤄버린것이였다.
저녁무렵, 아들이 돌아올 시간이면 어머니는 마당가 울바자문을 나서 해변의 오솔길에까지 와 기다리군 하였다. 누런 북슬개마저 지쳐 끙끙거리면 어머니는 해당화덤불옆의 모래불에 쭈그리고앉아 개의 잔등털을 쓰다듬어주며 공장사로청회의를 마치고 밤늦은 걸음을 재촉해오는 아들을 끝내 마중하고야마는것이였다.
청상과부로 늙어온 마음고생 많으신 어머니였다. 전쟁이 끝난 후의 평화와 안정, 재더미와 희생의 아픔우에 새 생활의 행복과 즐거움이 도시들과 거리와 집들에 깃들었건만 어머니의 생활에서는 변화가 없었다.
후리후리한 키와 쌍까풀진 큰눈, 타고난 미모로 하여 어머니한테는 괴로울 정도로 청혼이 잦았다. 그러나 30대초의 젊은 어머니는 남편이 남기고간 어린 아들을 그지없이 소중히 여겼고 수절하는것을 피살된 남편에 대한 의리로 여기였다. 어머니한테는 어린아들의 눈과 마음속에 그늘이 지지 않고 천진스레 자라는것이 기쁨이였고 행복이였다. 생활의 가지가지 어려움, 궁핍을 락으로 삼아 헤쳐왔고 힘든 로동의 짠 땀맛과 근로하는 사람의 평범한 처지를 숙명으로 알고있는 어머니는 시련을 겪던 아들에게 뜻밖에 차례진 영광을… 공장이 아니라 온 나라의 사로청사업을 책임져야 하는 그 엄엄한 지위를 현실로 받아들이지 못하였다. 렬차를 타고 평양으로 떠나는 아들이 마치도 공장에서의 잘못이 더 커져 엄한 추궁을 받으러 가는것만 같아 가슴한구석에 저며드는 불안을 감추지 못하는것이였다.
아마도 어머니는 지금 과일구럭이나 맛나는 음식을 들고 이 눈발속을 헤쳐 웅수가 입원해있는 도병원으로 갈것이다.
아들의 잘못을 조금이라도 보상하고싶은 심정에서, 아들과 우정을 나누는 친구로서만이 아니라 형제처럼 각근한 사이인 웅수를 하루빨리 완치시키기 위해 어머니는 거의 날마다 병원으로 다니는것이였다.
박웅수, 쾌활하면서도 순박한 나의 귀중한 벗… 짜릿한 그리움이 죄스러운 아픔의 물결우에 떠실려온다. 너는 온 얼굴에 붕대를 싸매고서도 천성적인 쾌활성을 잃지 않고 평양으로 떠나는 나를 위로해주고 축하해주었지.
《원국이. 친구야, 평양에 가거들랑… 네가 중앙사로청위원장이니… 친애하는 지도자동지를 뵈올수 있겠는데 그땐… 꼭 이 열처리직장 초급단체위원장의… 감사의 인사를 드려주어. 아니, 이건 겉치레구 형식같구나. 말이 아니라… 내 생명을 구원해주신 그분께 네가 내대신 엎드려 절을 드려달라. 응?! 부탁해!》
침대에서 몸을 일으켜앉은 웅수의 목메인 소리가 귀전에 들리는듯싶다. 인제는 수술자리도 거의 아물어간다니 얼마나 다행스런 일인가.
친애하는 지도자동지의 세심한 관심이 없었더라면… 이름없는 공장의 한 평범한 로동청년, 사로청원에 대한 그분의 크나큰 사랑의 손길이 없었더라면 웅수 너의 생명은 어떻게 될번했는가? 그리고 나의 운명은?!…
오직 그분께서만이 번민하는 내 심정을 리해해주셨고 나의 공장사로청사업의 과실과 성품의 약점을 너그러이 포옹해주시였다.
그분께서 나를 청년일군의 재목이라고 믿고 신뢰하고 기대가 크시여 이 자리에 앉혔는데 중앙사로청을 책임진 청년일군으로서의 나의 충실성과 사업의 열정과 실무능력은 어떠한가?…
원국은 앞상곁의 걸상에 앉아 이제까지 해온 사업들을 돌이켜보고 중앙사로청이 앞으로 해야 할 일들을 다시금 새겨보기 시작했다.
사무탁우의 전화종이 울렸다.
당중앙위원회에서 차성규가 걸어온 전화였다.
《중앙사로청위원장동무, 도사로청위원장동무들이 아직 오지 못했지요?》
《예, 함북도와 함남도, 강원도사로청위원장동무들은 래일 아침차로 도착하고 나머지 도위원장동무들은 오늘 저녁과 밤차로 오게 됩니다.》
《그 동무들이 다 도착하면 내게 알려주시오. 그리고 중앙사로청책임지도원이상 일군들과 도사로청위원장들은 어데 떠나지 말고 청사에서 대기하고 있어야겠습니다. 몸차림을 단정히 깨끗이 하고… 사로청일군의 정치실무적자질과 관련한 여러가지 공부도 하면서말입니다.》
《알았습니다.》
원국은 궁금증을 애써 참고 송수화기를 그냥 쥐고 서있는데 차성규의 약간 흥분한 공식적인 티를 벗어난 친절한 목소리가 다시 울려왔다.
《원국동무, 무슨 일인가 알고싶겠지?… 좋은 일이요. 영광스러운 일이… 친애하는 지도자동지께서 동무들 새로 임명된 사로청일군들이 위대한 수령님을 만나뵙도록 해주시였소.》
《야! 그게 정말입니까?!》
원국은 너무 기뻐 어린애처럼 소리를 질렀다.
그의 웨침소리에 놀란 서기가 황급히 문을 열고 들어왔다가 기쁨에 넘친 위원장의 얼굴을 보고는 빙긋이 웃으며 도로 나갔다.
《그리고 위원장동무는 합숙에 퇴근할 때도 그렇고 보통 나다닐 때도 승용차를 거의나 타지 않는다는데 그래선 안됩니다. 친애하는 지도자동지께서는 동무의 그러한 겸손성이 젊은 중앙사로청위원장의 인품과 사업권위에 손상을 주는 문제로 된다고 말씀을 하시였습니다.》
차성규의 나직하나 견책어린 말소리는 원국의 가슴을 뜨겁게 울려주었다.
《그래서말이요. 중앙사로청위원장동무, 오늘은 회의같은걸 소집한것도 없겠는데 잔일은 서기한테 맡기고 일찌감치 승용차를 타고 퇴근하시오.》
《전 이제 저녁시간에 학생소년담당 부위원장동무를 만나 토론할 문제가 있습니다.》
《무슨 문제입니까?》
《청년학생들속에서 담배 피우는 현상이 근절되지 않아서 대책을…》
《중요한 문제구만. 그래 그걸 학생소년담당 부위원장과 토론하려 합니까?》
《예.》
《둘이서… 두사람이 해도 되겠지. 그렇지만 일부 청소년들속에서 담배 피우는 현상이 그들이 어른들의 흉내를 따른다거나 멋을 부린다거나 담배의 해독성을 몰라서라든가 하는것 같은 형식적인 측면에서 분석되지 말아야 합니다. 불량청소년들의 시초가 담배 피우고 술 마시는것으로부터 시작된다는걸 동무도 공장사로청사업을 해봐서 알겁니다. 그래서 내 생각엔 이 문제를 보통교육부 해당 일군들도 참가시키고 해서 범위를 넓혀 협의를 진지하게 했으며 좋겠습니다. 래일 나도 중학생아들을 둔 아버지로서 몇가지 대책을 내놓겠습니다.》
《알겠습니다. 그런데 전 밤시간에 사상사업담당 부위원장동무와 부서내 과장들과 협의를…》
《포치했습니까?》
《이제 서기동무한테 과업을 주려고 합니다.》
《중요한 문제가 아닌것 같은데 래일 진행하는게 좋겠습니다. 중앙사로청위원장동무를 일찌감치 집으로 가라고 하는건 내 개인의 권고가 아니라 친애하는 지도동지의 배려입니다. 며칠전에 지도자동지께서는 동무가 아직 어머니를 데려오지 못하면서 밤낮을 가리지 않고 사로청사업에 파묻혀있다는걸 아시고 나를 책망하시였습니다.》
차성규는 자책감에 싸여있는지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지도자동지께서는 동무를 빨리 중성동의 좋은 집에 이사시키라고 말씀하시였습니다. 위원장동무, 어서 퇴근하시오. 새 집에서 어머니가 기다릴거요.》
차성규가 전화를 끊었으나 감동에 휩싸여 굳어진 원국은 웅웅거리는 송수화기를 붙잡고 그냥 서있었다.
서기가 들어와서야 그는 송수화기를 놓고 아무런 부끄러움없이 손으로 볼언저리로 흘러내리는 눈물을 닦았다.
서기한테 몇가지 사업지시를 주고난 원국은 청사마당에서 승용차를 탔다.
승용차는 눈이 하얀 솜이불처럼 깔린 마당을 벗어나 조용히 달렸다.
원국은 뒤좌석등받이에 편안히 몸을 기대였다. 중앙사로청위원장으로 부임해와서 서너번은 이 승용차를 탔으나 어쩐지 오늘 처음 타보는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처음 승용차를 타고 당중앙위원회 부서에 갈 때 그는 당황해서 거의나 자기 승용차를 탄다는 느낌이 없었다. 아무리 그렇게 생각해보아도 일상생활이나 공적인 일에서 뻐스나 자동차밖에 몰랐던 평범한 공장사로청위원장의 타성에 잡힌 관념은 이런 기적같은 변화에 도저히 순응되지 못하는것이였다. 그래 그는 마치 남의 승용차에 억지로 끌려 탄것 같은 옹색함을 풀지 못하고 두번째로 당중앙위원회에 갈 때는 슬그머니 청사를 빠져나와 걸어서 가기까지 했다.
그러나 오늘은 퍼그나 자연스러운 거동으로 승용차문을 열고 푹신한 좌석에 들어앉았고 차의 주인다운 의젓한 자세로 차창밖을 내다보았다.
그는 스스로도 자신의 태연하고 평온스러운 마음을 지니게 된것이 놀라왔다. 그러나 그는 이것이 승용차를 여러번 타는데서 생긴 어떤 습관적인 자신심이 아니라 자기에게 그토록 크나큰 정치적신임과 육친적사랑을 기울이시는 친애하는 김정일동지에 대한 절대적인 믿음과 충성스런 마음으로 하여, 사로청사업을 본때있게 해보려는 의지로 하여 생겨난 자신심임을 의식하고있었다. 친애하는 지도자동지께서 믿어주고 보살펴주신다고 생각하니 사로청사업이 조금도 두렵거나 어렵게 여겨지지 않는것이였다.
승용차는 퍼붓는 눈발속을 헤치며 버드나무거리를 달리고있었다.
눈은 버드나무의 가지들과 절기가 지난지 오랜데도 떨어지지 않는 누런 잎사귀들에 쌓였다.
수도의 번화한 길이건만 아직 퇴근시간전이여서 포석에 쌓인 생눈길을 걷는 사람들이 그다지 많지 않았다.
차창에서 눈길을 돌리던 그는 불현듯 포석길가녁으로 깊은 생각에 잠겨 걷는 낯익은 처녀를 보았다.
목에 감은 털수건과 머리에 흰눈이 수북이 덮인 그 처녀는 분명 진수옥이였다.
원국의 잔잔한 호수같던 가슴은 단번에 큰 바위가 떨어진듯 뒤설렜다.
처녀는 승용차쪽에 눈길조차 돌리지 않았건만 원국은 소용돌이치는 반가움과 기쁨을 억제하지 못했다.
《운전사동무, 차를 좀 세워주오. 난 내려야겠소.》
덤벼치는 그를 보고 운전사는 영문을 몰라했다.
《큰길옆에 차를 세우지 못합니다.》
운전사는 오십m쯤 더 가서 승용차를 사이길에 들여세웠다.
림원국은 처녀가 어데 사라질것만 같아 차문 웃턱에 머리를 부딪치며 급히 내렸다.
눈발속을 보니 진수옥은 다행히 다른데로 가지 않고 곧바로 포석을 따라 걸어오고있었다.
원국은 처녀를 향해 마주 달려가고싶은것을 간신히 참고 서있었다.
안개낀것처럼 희뿌연 눈발속으로 사람들에게 가리워졌다 나타났다 하며 오는 처녀의 걸음이 안타깝도록 더디였다.
박웅수를 수술한 그날저녁에 헤여진 후 이 두어달동안 얼마나 보고싶고 기다리던 처녀인가! 싸락눈이 흩날리는 해변의 솔밭길에서 그렇게도 소원하던 처녀의 진정에 넘친 확고한 사랑을 물리쳤을 때 그의 가슴은 얼마나 고통스러웠던가.
공장사로청위원장에서 떨어지고 동무를 불상사에 처하게 하고… 헤여날길 없는 번민, 침침한 구름이 드리운 총각의 운명을 두려워하거나 타산하지 않고 처녀는 사랑을 고백했다. 그러나 그렇게도 고상하고 진실한 처녀를 어찌 실패한 남자의 인생, 앞길이 막힌 운명속에 같이 부대끼는 가혹한 희생을 치르게 할수 있단말인가.
진수옥은 그때의 나의 괴로움과 고통으로 얽힌 복잡한 심정, 사랑이 너무도 뜨거워 자기의 고백을 밀어버렸음을 알고있을가? 내 마음을 어떻게 리해했을가?
원국은 본의아닌 어찌할수 없는 결별을 선언한 자기의 랭혹한 표현속에서 타오르는 심장의 불길을 그 처녀는 알지 못했으리라고 생각했다. 그는 진수옥이 오해하고 모욕으로 받아들였을것 같은 괴로움에 잠을 이루지 못했다. 처녀에게 편지나 전화로라도 내심의 고독과 불같은 마음을 호소하고 설명하고싶었지만 남자의 자존심과 존엄은 그런 변명을 허락하지 않는것이였다.
그러나 날이 갈수록 진수옥에 대한 사랑의 불길은 꺼지지 않고 더 뜨겁게 타올랐으며 저버린 사랑의 애수, 후회를 억제할수 없었다.
중앙사로청위원장이 되여 평양에 왔을 때 원국은 로동청년신문사에 전화를 걸려고 몇번이나 마음먹었지만 종내 번호판을 누르지 못했다. 자기의 운명의 전환, 기쁨, 눈부신 존재를 처녀에게 희떱게 자랑하는것만 같아 참았다. 이제 사업에 여유가 생기고 시간이 나는대로 찾아 가려던참에 이렇게 자연스럽게 만나게 된것이다.
그는 어제날의 항구도시 교외마을의 한칸짜리 단층집에 살던 로동청년, 남의 양복과 샤쯔를 입고 구두를 빌려 신고 처녀앞에 섰던 평범한 청년이 아니였다.
연푸른빛바탕의 샤쯔에 흰점박힌 자주빛넥타이, 줄간 곤색양복우에 입은 모직반외투, 날이 선 바지주름, 눈속에 바닥이 묻힌 번쩍거리는 구두… 그는 젊은 중앙사로청위원장으로서의 자신감과 기품있는 얼굴로 반외투주머니에 손을 찌르고 승용차옆에 서있었다.
처녀는 사이길에 선 승용차도 사람도 관심을 두지 않고 고개를 다소곳이 숙인채 무슨 상념엔가 골몰하며 걸어왔다.
《수옥동무…》
원국은 처녀가 곁눈조차 팔지 않고 지나치는 순간에 나직이 불렀다.
걸음을 멈춘 진수옥은 꿈속에서 깨여나지 못한 사람마냥 멍하니 섰더니 이어 눈시울을 쪼프렸다. 긴 속눈섭에 내려앉은 눈송이가 방해되는지 몇번 깜박였으나 눈송이는 동안이 지나서야 물기로 변했다.
첫순간 처녀는 웬 점잖치 못한 청년이 길가에서 실없이 찾는거라고 여긴것 같았다. 그러나 자기를 멈춰세운 청년이 분명 림원국임을 알아보자 진수옥은 흠칫 몸을 떨었다. 처녀의 어둡고 당황스런 얼굴에 반가움과 기쁨의 불꽃이 타올랐다.
《원국동무!…》
진수옥은 거의나 알아듣기 어려운 신음소리같은 목소리로 부르짖었다. 처녀는 가슴속에서 파도치는 그리움의 충동에 끌려 저도모르게 몇걸음 다가왔으나 곧 멈춰섰다. 그리고 내심에 분출하는 격앙된 감정을 부정하고 억누르려고 애쓰는듯 천천히 고개를 흔들었다. 머리우에 쌓인 눈이 푸실푸실 흩어져내렸다.
《수옥동무, 잘있었습니까?》
원국은 반외투주머니에서 손을 뽑고 경황없이 처녀한테 다가갔으나 차마 진수옥의 손을 잡지 못하고 엉거주춤 섰다. 그는 처녀의 얼굴에서 기미가 붙은 눈섭이 파르르 떨고 눈가에 이슬이 맺히는것을 보았다. 행복감에서가 아닌 서글픔의 눈물같았다.
《건강하셨어요?》
《보다싶이 이렇게…》
《어머니는 무고하시겠지요?》
《예, 새 집에 이사올라왔습니다.》
원국은 어디 조용한 곳이 없는가 하고 주위를 살폈다.
《우리 저쪽에 가서 좀 이야기합시다.》
원국은 사람들이 다니지 않는 길가녁에서 멀찌감치 떨어져있는 줄기가 아름벌게 큰 버드나무곁으로 걸음을 옮겼다.
황이 들다 만 버드나무잎사귀들이 떨어지지 않고 가느다란 메마른 가지끝에 매달려 눈을 맞고있었다.
《수옥동무, 정말이지… 만나고싶었습니다.》
원국은 진수옥이 다소곳이 버드나무곁에 오기 바쁘게 성급한 목소리로 속을 열었다.
《난 수옥동무를 찾아 신문사에 가려고 했습니다.》
《절… 무엇때문에… 만나겠는가요?》
《지난 일을 사죄하고싶었습니다.》
진수옥은 침묵끝에 싸늘한 기운이 서린 담담한 어조로 말했다.
《그럴 필요가 없잖아요? 전 그때 괴로왔지만… 역에 나오지 않은 동무를 리해했어요. 그리고 용서했지요.》
원국은 고마운 눈길로 진수옥의 차거운 얼굴을 건너다보았다.
《난… 달리는 처신할수 없어 그런 편지를 썼습니다.》
《남을 희생시켜 자기 행복을 추구하지 않는 원국동무의 고상한 마음에 감동했어요.》
《수옥동무는… 어딘가 날 … 비웃는것 같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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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목록
강산님의 댓글
강산 작성일
(위에서 계속)
《수옥동무는… 어딘가 날 … 비웃는것 같군요.》
진수옥은 서글픈 웃음을 지었다.
《비웃지는 않아요. 하지만 경멸의 감정은 남아있어요.》
《어째서요?》
원국은 다우쳐 물었다.
《대답하긴… 어렵군요. 우린… 만나지 않는 편이 나을것 같아요.》
《어떻게 그럴수가…》
《우리의 관계는… 그때 편지에 씌여진대로 끝났어요.》
《끝나다니요? 난 자신을 억제하느라 우정 랭혹히 썼을뿐입니다. 사랑은 시작은 있어도 끝은 없습니다.》
진수옥은 눈길을 쳐들었다. 못 마땅한듯 한 날카로움이 풍기는 매력적인 눈빛이였다.
《원국동무는 사랑을 몰라요. 진실로 사랑을 아는 남자는 처녀의 고백을… 사랑을 그렇게 론리적으로 대하지 않아요. 무엇때문에 동무는 그 불같은 본연의 감정대로 행동하지 않고 제 가슴에 찬물을 끼얹었어요?… 난 평양에서 내려가는걸 희생으로, 고생으로 생각한적이 없어요. 동무가 절 받아주었다면 불행한 웅수동무도 기뻐했을거예요. 고통스레 량심을 지킨 동무의 행동은 아름다운게 아니라 위선이예요.》
원국은 심장이 터질것 같아 가슴을 부둥켜쥐였다.
《그렇다면… 그때 수옥동무의… 고백은 어떤것이였소?》
《전 그때 동무의 거절을 리해하면서도 심한 모욕을 느꼈어요. 렬차를 타고오면서 그 고통을 이겨내고나니 사랑은 죽어버렸어요. 원국동무, 저를 잊어주세요. 저는 잊어야 할 녀자예요.》
《아니 그럴수 없소! 동무는 내 일생에 영원히 잊을수 없는 사람이요. 난 결코 수옥동무와 헤여질수 없소!》
《단념해주세요. 심장이 하나인것처럼 사랑도 하나예요. 다시 태여나지 못할거예요.》
《아니, 밤이 지나면 또다시 해가 떠오르는거요. 난 파도치는 바다기슭이 아니지만 여기 평양에서… 수옥동무의 마음기슭에 다시 섰소. 파도는 땅과 바다를 만나게 하고 결합시켜주는거요.》
원국은 절절히 부르짖었으나 진수옥은 눈물젖은 얼굴을 가로저었다.
《그럴수 없어요. 어쩐지 동무는 리기적인것 같군요. 여전히 자기 감정만을 앞세우면서 처녀를 론리적으로 대하는군요. 원국동무가 중앙사로청위원장이 아니고 그때처럼 평범한 로동자였다면… 저도 동무의 진정을 리해하고 받아들일수 있을지 몰라요. 처녀의 사랑은 결코 남자의 관직이나 가문에… 생활수준에 팔리는것이 아니예요.》
《오해하지 마오. 난 직무를 떠난 보통청년, 인간으로 동무를 사랑했습니다. 사랑에 어떤 신분상 우렬이 있다고 생각해본적은 없습니다.》
처녀의 표정에는 변화가 없었다.
《미안해요. 전 가겠어요.》
원국은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진수옥은 눈덮인 포석길을 걸어갔다.
림원국은 눈우에 찍힌 그 녀자의 발자국을 묵묵히 지켜보았다.
그가 얼굴을 들었을 때는 처녀가 사람들속에 가리워져 잘 보이지 않았다.
그는 눈발속에 얼른거리는 진수옥의 털수건을 시야에서 놓치지 않으려고 애쓰다가 그마저 영 보이지 않자 소리나도록 한숨을 톺아내였다. 온몸이 그자리에 얼어붙은듯 걸음을 떼지 못했다.
마음속에서 끓어오르는 자존심은 인제는 기필코 진수옥을 아주 잊어버려야 한다고 부르짖고있었으나 그의 넋은 처녀에게 매여 끌려가기만 하는것이였다.
원국은 련정에 매이지 않은 자신을 되찾으려고 입술을 사려물었다. 진수옥이와 다시는 만나지 않는다. 어디 처녀가 없다고 한가닥 힘겨운 애정에 포로되여있단말인가. 중앙사로청위원장이 되였으면 체면도 위신도 차려야 할게 아닌가. 이따위 사랑의 감정에 전념해있는것은 죄악이다. 사로청사업을 두어깨에 떠메고있는 청년일군이 이런 개인적감정에 사로잡혀있어가지고 어떻게 사로청원들을 교양해낼것인가.
림원국은 자신을 경멸해서 쓰겁게 웃고 버드나무곁을 떠났다.
그는 반외투어깨의 앞섶에 쌓인 눈을 와락와락 털고 승용차안에 들어앉았다.
차는 눈길우를 소리없이 미끄러져 나갔다.
《위원장동지, 처녀가 차림새는 수수한데 보기 드문 미인입니다.》
운전사가 어딘가 동정어린 말투로 건넸으나 원국은 아무 대꾸도 하지 않고 성이 난 얼굴로 뻣뻣이 앉아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