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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소설 계승자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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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강산
댓글 0건 조회 8,086회 작성일 20-07-27 21: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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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해저물녘에 통근렬차에서 내린 진수옥은 시내를 벗어나 교외로 뻗은 포장하지 않은 좁은 길에 들어섰다.

과학촌이 자리잡은 큰길로 가면 걷기도 좋고 그다지 에도는 길이 아니건만 진수옥은 아버지가 기계공학연구소에서 나온 후에는 집에 갈 때마다 늘 이 좁은 길에 들어서군 했다.

환갑나이가 되자마자 아버지를 연구사업에서 부진이라고 퇴직시켜버린 연구소일군들에 대한 경원의 감정이 과학촌을 멀리하게 하였다.

해가 떨어지기 바쁘게 늦가을의 대기는 싸늘해졌다. 철이 지나 곤충들이 자취를 감춘 들판은 김장남새마저 수확해서인지 휑뎅그렁하였다. 그래도 습지에는 창포와 골풀이 채 시들지 않았고 군데군데 몰켜있는 마른 풀덤불에서는 보라빛 들국화가 계절에 도전하는듯 생기를 잃지 않고있었다.

진수옥은 어깨를 파고드는 가방끈을 다른쪽에 메였다. 가방안에는 아버지가 좋아하는 효모빵을 비롯해서 온통 부식물로 가득차있었다. 그는 한달에 한번정도 평양의 독신자합숙을 떠나 집에 갈 때면 다른것은 몰라도 식료품만은 한가방 마련해가지고 갔다. 아버지가 연구소에서 나와 집살림형편이 그닥 넉넉치 못했다.

진수옥은 길섶에서 들국화 한송이를 꺾어 마른잎을 떼버리고 코에 가져다대였다. 쌉쌀한 향기가 가냘피 풍겼다.

집이 가까와올수록 평양역을 떠날 때부터 괴롭히던 걱정이 다시금 머리를 추켜들었다. 자기한테 애인이 있다고… 다름아닌 항구기계공장 림원국이라고 하면 아버지는 얼마나 놀라와할것인가.

공구강기술로 늙은 자기를 배척한 청년인데 골라골라 그런 청년을 사위로 삼겠는가고 섭섭해할것이다. 하지만 진수옥은 이미 마음의 결정을 내렸다.

배우자문제에서는 도고하고 《눈섭꼭대기에 눈이 붙은 처녀》로 비난을 받던 그에게 어떻게 되여 이런 변화가 생기게 되였는가.

이른아침 바다가모래불에서 작별한 그때부터 진수옥의 가슴속에는 쌍까풀진 큰 눈을 가진 순박하면서도 대바르고 굳센 청년, 림원국이 자리를 잡았다.

공장사로청사업과 공구강기술문제에 대해 열정적으로 피력하던 청년, 림원국의 정치사상수준과 지적준비정도는 취재다니며 숱한 사람들을 만나본 진수옥을 놀라게 했고 마음 끌리게 했다. 밤이 깊어 고요한 독신자합숙침대에 누워 책을 보거나 명상에 잠기다가도 불현듯 바람이 불고 세찬 비가 쏟아지던 해변가마을의 불안스럽던 밤이 생각나며 처녀의 가슴을 짜릿하게 만들었다.

된장국냄새 떠돌던 단칸짜리 방안, 우산을 집어들고 비바람 불어치는 밖으로 나가던 청년… 큰 눈이 쌍까풀지고 젊은 시절에는 미인이였을 마음이 푸수한 어머니, 김경화라고 했지… 어머니는 14살에 사리원제사공장에 들어가 왜놈감독의 채찍밑에서 하루 12시간이상씩 고치를 끓이는 물에 손이 데면서 고역을 치르었다. 너무도 힘들어 달밤에 도망치려고 제사공장담을 넘다가 떨어져 허리를 다쳤다.…

그날밤 진수옥은 어딘가 자기 어머니를 련상시키는 원국의 어머니한테서 전후의 어려운 시기를 살아온 이야기를 들었다. 그리고 잠자리에 들어서도 줄곧 원국을 생각했다. 동무네 집에 가서 밤을 보낼수 없으면 어쩔가, 그럼 어데서 잘가? 하고 걱정하고 불안해하다가 새벽녘에 잠들었다. 아침에 떠날 때 진수옥은 집마당에서 누런 북슬개가 끙끙거리며 헛간을 들락거리는것을 보고 이상스레 여겼지만 차마 헛간을 들여다보지 못하였다.

진수옥은 바다가모래불에 경황없이 달려온 림원국의 머리와 어깨에 붙은 짚검불오리를 보자 자기의 예감이 맞음을 느끼고 가슴이 뭉클해졌다. 죄를 지은것만 같아 황황히 작별하고 떠나왔다.

진수옥은 그날 있은 일을 공장사로청에 찾아온 손님을 대하는 림원국의 평소의 순박하고도 례의깊은 친절성이라고 애써 잊으려고 했지만 좀처럼 그렇게 되지 않았다. 분별력을 잃은 어떤 강렬한 애정의 고민이 번뜩이던 청년의 눈을 잊을수 없었다. 사랑의 애끊는 갈망이 자존심과 리성으로 억눌리고 태연스러움과 서운한 겉표정에 감추어진, 남자의 크고 쌍까풀진 검은 눈을 처녀는 처음 보았다.

취재갈 때에도 책상에 마주앉아 기사를 쓸 때에도 합숙호실에 있을 때에도 그 눈은 줄곧 자기를 지켜보는것 같았다. 두렵고 기쁘고 불안했다. 무언가 어떤 물리치지 못할 호소를 받을것만 같아 그 청년한테 전화를 걸지 못했다. 기사를 쓰지 못하고 우정 미뤄버리고 다른 기사들에 전념했으나 심한 가책을 느꼈다. 누구도 들여다보지 못한 처녀의 마음속 깊은 곳에 떨어진 불씨는 서서히 타오르며 그를 떠밀었다. 그리하여 진수옥은 공구강기술문제로 우정 아버지한테 들렸고 기술문건을 가지고 다시금 림원국을 찾아간것이다.

공구강기술을 도와주자는것은 자기 변명이고 지방의 이름없는 공장사로청위원장이 어쩌면 이리도 처녀의 마음을 괴롭히는지 다시한번 만나 알아보고 다시는 그런 번민에 시달리지 않도록 본래의 도고하고 안정된 심정을 되찾고싶었다.

무엄하게 처녀의 가슴에 불을 지른 공장사로청위원장을 경멸하고 방관시할수 있는 까닭은 그 청년쪽에서 스스로 빚어냈다. 머리에 뽀마도를 바르고 빌려입은것 같은 양복자락을 제치고앉은 림원국의 위선적이고 겉치레가 풍기는 행동은 진수옥을 놀라게 하고 과연 이전의 혼방직옷을 입은 순박하고 솔직한 공장사로청위원장이 맞던가 하는 의혹을 자아냈다.

아버지의 기술문건을 홀시하고 문을 걸고… 술냄새나는 이 청년을 찾아온것을 후회하고 한시바삐 가려고 했던 그 순간에 진수옥은 주저앉고말았다.

도사로청위원장의 출현으로 알게 된 기막힌 사연은 진수옥의 가슴을 얼구던 경멸과 비웃음의 싸늘한 감정을 삽시에 불질러버렸다.

처녀는 황황히 그 자리를 물러나왔으나 마음은 폭풍에 뒤설레는 나무처럼 혼란되였다. 그 폭풍이 자고 고요가 찾아들었을 때 처녀는 자기가 바다바람이 세찬 낯선 지방의 이곳 땅에 뿌리박고 서있는듯 한 환각을 느꼈다.

렬차로 항구도시를 떠나면서 처녀는 기필코 이곳에 다시 오게 되리라는것을 생각했으며 그런 운명에 순종하고 기꺼이 맞받아나가려는 자기의 의지를 놀랍게 감수했다.

그리하여 진수옥은 림원국에 대한 불같은 사랑, 처녀의 순진한 가슴에 품어온 용단을 실현하려고 떠난것이다.

아버지가 거절할것 같은 위구심만이 남았다. 그러나 자기의 탐구와 열정의 산물인 기술자료를 서슴없이 내주는 선량하고 지성과 도의심이 높은 아버지이니 딸의 마음을 리해해줄것이다.

진수옥은 해묵은 버드나무가지사이로 보이는 낯익은 집의 벽돌빛지붕을 띄여보았다.

큰 뿔을 인 염소와 여러마리의 크고작은 염소들이 집부근의 도랑뚝에서 마르지 않은 풀을 뜯고있었다.

시력이 나쁜 아버지는 뚝길로 걸어오는 딸을 알아보지 못했다.

어깨의 풀단을 메쳐놓고앉아 주머니에서 담배쌈지를 꺼내였다.

진수옥은 손가락을 우물거리며 담배를 마는 아버지의 볕에 끄슬고 주름살이 파고든 여윈 얼굴을 련민의 정을 안고 바라보았다.

머리에 얹은 낡은 밀짚모자와 꽁무니에 삐죽이 보이는 낫은 허름한 작업복에 어울려 어느모로 보나 농사일이 몸에 밴 늙은이이지 과학연구사업을 하던 학식가진 사람이라는 인상은 조금도 찾아볼수 없었다.

《아버지…》

진수옥이 나직이 소리쳐부르자 진원삼은 무릎에서 담배쌈지를 떨구며 반가이 일어났다.

《왔냐.》

진수옥은 가방을 받아주는 아버지팔을 잡고 함께 마른풀이 깔린 도랑뚝에 주저앉았다.

《어머닌 계셔요?》

진수옥은 언제나와 같이 자기의 맏언니벌이 되는 이붓어머니에 대한 인사를 차렸다.

젊은 녀자를 후실로 맞아 딸앞에서 늘쌍 거북해하는 아버지의 맘을 편안하게 해주고싶었고 말년에 이른 아버지를 가식없이 그리고 생활의 불편을 탓하지 않고 성심껏 보살펴주는 이붓어머니에 대한 진실한 존경의 감정이 우러나와서였다.

《시내에 일보러갔다. 이제 올게다.》

진원삼은 담배를 한모금 빨고 자기의 어깨에 몸을 붙이고 잠자코 앉아있는 딸을 쳐다보았다.

《저번때 항구기계공장에 갔다오면서 들리겠다더니…》

《기다렸어요?》

《그러지 않구.》

《신문사에서 빨리 오라고 해서… 지나쳤어요.》

진수옥은 아버지가 공구강기술자료에 대해 묻지 않는것이 고마왔지만 그대로 침묵을 지킬수는 없었다.

젊은 청년기술자들한테 자기 연구자료를 아낌없이 주고 고맙다는 인사말이면 만족할 아버지였다.

《박웅수동무랑 아버지의 기술자료를… 참고하겠다구… 했어요.》

《그래?! 그럼 됐구나. 어떻든 그러다 무슨 사고를 치지 말아야겠는데.》

《일없을거예요.》

염소가 이따금 울어댈뿐 사위는 고요하였다.

구름이 없는 차거운 늦가을대기는 어스름이 깃들어 점점 투명성을 잃고 재빛을 띠였다.

《수옥아, 춥지? 집에 갈가?》

《좀 더 있자요. 아버지, 어머니가 오겠지요.》

진수옥은 소녀시절마냥 아버지의 어깨에 따뜻이 머리를 기대고앉아 들판너머 멀리 어두워가는 하늘을 바라보았다.

정작 마음속결심을 아버지에게 말하자니 애달픈 기쁨과 서글픔의 복잡한 심정에 휩싸이게 되고 거북스러웠다. 이런 때 친어머니가 있었으면 응석삼아 부끄럼없이 말할수 있을텐데… 진수옥은 망설였다.

《너 오늘은 왜 그러니. 무슨 일이 있었니?》

진수옥은 자기 눈을 유심히 들여다보는 아버지한테 애써 태연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너 나한테 할 말이 있는것 같구나.》

진수옥은 더 피하지 못하고 아버지의 거칠어진 손을 다정히 끌어잡고 머리를 끄덕였다.

《아버지… 나 독신생활을 그만둘려고 해요.》

《그래? 반가운 일이구나! 우리 수옥이한테 총각이 생기다니, 어떤 사람이냐?》

《아버지가 다니시던 항구기계공장에 있어요.》

《뭐라구? 그럼 평양총각이 아니란말이냐?》

《지방이문 뭐래요?》

《글쎄 건 네 맘대루. 헌데 넌 눈이 높은것 같더니 어째서 평양에서 선택하지 못하냐?》

《사랑하게 된걸요.》

《참, 항구기계에 누구라구?》

《림원국동무예요.》

《그 공장사로청위원장?》

진수옥은 가냘픈 웃음을 짓고 머리를 끄덕였다.

《지금은 사로청위원장이 아니예요.》

《그럼?》

《얼마전에 해임됐어요.》

《왜?》

《공장사로청사업을 잘하지 못한가봐요.》

진수옥은 아버지가 더 말을 않고 부스럭거리며 쌈지를 헤쳐 신문지에 만 담배를 피울동안 침묵을 지켰다.

딸의 사랑의 열정, 불행에 처한 사람에 대한 뜨거운 동정이 아버지한테는 어느정도 공감되겠는지… 자식의 행복한 장래를 바라는 아버지의 심정은 타산적이고 차거울수밖에 없지 않을가.

《승낙하지요?》

《그러니 원국이 그 사람이 보통로동자가 됐니?》

《그렇다고 해요.》

《넌 만나보지 않았냐?》

《해임된 다음엔… 이제 가서 만나야죠.》

《이건 네 일생문젠데… 깊이 생각해봤냐?》

진수옥은 어떤 말로도 자기 속마음의 확고한 결심을 대신할것 같지 못해 정색한 낯빛으로 머리만 끄덕였다.

《내 승낙보다 그 청년의 허락이 중요할것 같구나.》

《그 동문… 날 사랑해요.》

《너희들이 좋다면… 네가 마음을 굳혔으니 네 성미를 잘 아는 아버지가 무슨 반대를 하겠니. 원국이… 사람이야 똑똑하고 대바르지. 헌데 공장사로청위원장자리에서 떨어졌다니 섭섭하구나.》

《아버진 공구강기술문제를 놓고 원국동무를 노엽게 생각지 않죠?》

《원, 애두. 내가 옹졸한 사람인줄 아냐. 원국이와 웅수네들의 방법이 더 좋을수도 있는거다.》

《그럼 맘 시원히 승낙하지요?》

《직업이나 생활수준이나 가정형편따위를 보지 않고 사람을 보는건 옳은 일이다. 공감되는구나.》

《아버지, 고마와요!》

진수옥은 풀물이 오른 아버지손을 끌어다 자기 볼에 꼭 대였다. 눈가장자리에 맺힌 눈물이 방울져 아버지의 손등에 떨어졌다.

《기쁜 날인데 울긴?》

《모르겠어요. 그저 눈물이 나와요.》

눈물에 젖은 처녀의 얼굴은 행복해보이고 아름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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