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편소설 계승자 3 > 통일게시판

본문 바로가기
사이트 내 전체검색

통일게시판

장편소설 계승자 3

페이지 정보

profile_image
작성자 강산
댓글 1건 조회 8,582회 작성일 20-07-12 10:51

본문

01.jpg

3

 

짙은 담배연기와 술냄새, 음식내가 꽉 찬 집안공기에서 벗어나 찬바람을 맞으니 정신이 번쩍 드는것 같았다. 날은 벌써 어둑시근해졌다.

원국은 공장으로 가야 한다는 조급한 생각에 해변길쪽으로 향했다. 공구직장초급단체위원장인 박웅수가 새 공구강열처리시험을 어떻게 하고있는지 걱정스러웠다.

자기도 아까 공장에서 박웅수랑 같이 한창 그 열처리시험로를 완비하다가 장주천위원장에게 불려간터였다.

멀리 바다쪽에서 먹장구름과 파도를 안고 불어온 바람이 백사장에 들이닥쳐서는 모래불 곳곳에 오종종 모여앉은 키낮은 소나무들과 잎떨어져가는 해당화덤불을 잡아흔들었다.

원국은 바람에 휘날린 잔모래알들이 얼굴에 따끔따끔 부딪쳐와 눈을 쪼프렸다. 그는 고통스레 술기가 밴 숨을 톺았다. 마치도 어떤 불의와 강권에 굴복하지 않고 존엄을 지켜낸것 같던 긍지와 자부심은 사그러들고 불안과 두려움이 가슴 한구석에 연추처럼 매달렸다. 따져놓고보면 도사로청위원장이나 장주천에게 잘못은 없다. 그들은 자기를 대견히 여긴 나머지 알아보지 않고 그런 벼락혼사를 빚어내려 한것이다. 다 자신을 위해 한 일이였는데 《망아지 뒤발로 어미배를 찬것》같이 되였다. 그러나 이미 엎지른 물그릇이였다. 쓸데없는 후회를 말고 그런 결단적인 행동을 한데로부터 차례질 후과를 생각해야지 않겠는가… 제길 될대로 되라지.

원국은 뒤일을 걱정하는 자신을 저주했다. 출세의 앞날을 위해서 가슴속에 뿌리내린 사랑을 뽑아던질수는 없는것이다. 사랑을 하면 사랑을 지켜낼줄 알아야 한다. 그는 사랑의 힘이 불의에 머리숙이지 않는 천성적인 배짱에는 비할바없이 세다는것을 뚜렷이 의식했다. 진수옥에 대한 강렬한 사랑이 없었더라면 그렇게 주저와 동요가 없이 위구심이나 타산을 모르고 중앙사로청위원장의 호의를 저버릴수 없었을것이다.

그런데… 내가 진수옥을 사랑해서 차례진 행운을 차버렸다는것을 그 처녀가 안다면 어떨것인가? 부질없는 짓이라고 비난하지 않을가? 동정이라도 할가?… 그러고보면 나는 진수옥의 내심을 조금도 모르면서 그 처녀의 녀성적존엄과 권리에 대해 얼마나 독선적인 감정을 품고있는가. 그것을 사랑이라고 말할수 있겠는가?

…선기가 나기 시작한 8월말의 일요일 오후무렵.

로동청년신문사 기자 진수옥은 공장사로청위원장의 방에 들어왔다. 쑥빛갈의 아사직양복을 입은 처녀기자는 인사를 마치고 림원국이 권하는 딱딱한 나무걸상에 앉았다.

방금까지 열처리직장초급단체 사로청원들과 같이 플라즈마실험로와 씨름질하다가 온 원국은 책상아래서랍에서 걸레를 꺼내여 손에 묻은 기름때를 대충 닦았다. 그는 가방에서 푸른 뚜껑의 취재수첩을 꺼내는 처녀의 미모가 류달리 매력적인데 약간 어리둥절해졌다. 쌍까풀진 눈은 온순해보이는것이 아니라 어딘가 못마땅한 기색을 띠고 날카롭게 번쩍였다. 오른쪽눈섭끝에 달린 녹두알기미는 선이 곧은 눈섭속에 숨어있지 않고 장난군애가 찬 공마냥 밖으로 튕겨나려고 애쓰는것이였다.

원국의 눈길이 자기의 눈섭기미에 쏠리는것을 감촉한 처녀는 화가 나는듯 기미가 보이지 않게 얼굴을 바른쪽으로 돌려 창턱의 제라늄화분을 쳐다보았다.

처녀의 관찰력있는 눈길은 가꾸지 않아 꽃이 시들고 잎이 때이르게 누래진 그 제라늄화분에서 이 방주인의 흠부터 찾아쥐려는것 같았다.

바다쪽으로 밀려가는 구름장을 헤집고 방안에 길게 비쳐든 해빛은 처녀의 얼굴에서 창백하고도 랭정한 낯색을 차츰 지워버리였다. 심신을 정돈함에 따라 윤기나는 대리석같이 차거운 표정을 띤 처녀의 얼굴에 엷은 장미빛 홍조가 떠오르면서 건강미와 녀성속성의 부드러움이 내비치였다.

《위원장동무가 도내사로청일군들중에서 제일 나이가 적다고 하더군요.》

처녀의 인사말에는 공감과 함께 일종의 경의심이 슴배여있었으나 원국은 기분이 거슬려 씁쓸히 말했다.

《도사로청위원장동무는 날 어린애처럼 돌봐줄 대상으로 여기지요.》

《호, 그런게 아니예요. 도사로청에서는 원국동무가 나이많은 일군들이 지도하는 초급사로청위원회들보다 사업성과가 아주 크다는거예요. 청년들이 기술혁신에서도 앞장서고있구요.》

《난 평가를 좋아하지 않습니다. 취재용건이 뭡니까?》

《오래 붙들지 않겠어요. 편집부에서는 이번에 3대기술혁명과업수행에 청년들을 조직동원하고있는 공장사로청위원장에 대한 기사를 내려고 합니다. 제가 알건대 위원장동무는 기술도 높구… 그래서 자신이 직접 강철가공, 기계제작분야에서 혁명으로 될수 있는 공구강의 새로운 열처리기술을 연구한다지요?》

《내가 연구하는것이 아니고 열처리작업반의 박웅수동무와 사로청원들의 집체적지혜를 모아 하는 일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어떻게 성공하겠는지, 강철가공이나 기계제작공업에서 혁명으로 되겠는지는 알수 없습니다.》

《겸손하시군요. 신심이 없는 기술혁신을 하는것처럼 리해돼요. 어떻습니까. 위원장동무네가 연구하는 그 플라즈마기술에 의한 공구강열처리가 가능합니까?》

림원국은 진수옥의 얼굴을 면바로 보았다. 처녀의 물음이 이 분야의 기술지식을 시위하기 위한것처럼 느껴지기도 했고 학술적인 호기심같이도 느껴졌다.

《그런 기술적측면이 기자동무한테 무슨 필요가 있습니까. <로동청년>신문에 내는 교양기사겠는데 사로청원들의 투쟁과 생활내용을 취급하면 되지 않는가요?》

원국의 반문에 진수옥의 눈이 약간 당황한 빛을 띠였으나 인차 본래의 날카로운 표정으로 되돌아갔다.

《물론 그래요. 그러나 신문에는 앞으로 성공을 못하거나 생산에 도입을 못하는 청년들의 기술혁신투쟁이야기를 실을수는 없습니다.》

《그렇다면 기자동무, 너무 일찍 왔습니다. 래달쯤 오십시오. 그때면 우리 공장 강철가공에서 변혁으로 되는 새 공구강을 내놓을수 있습니다.》

《위원장동무가 가능성여부를 그렇게 확신한다면 먼저 취재를 하고 올라가겠어요. 성공하면 전화로 알려주십시오.》

원국은 기자처녀한테서 빠질수 없음을 깨달았다. 어쩐지 매력있는 이 처녀가 걸상에 태연히 앉아 아직 완성을 보지 못한 창조물의 내막을 들추려 하는것 같아 처녀를 방안에서 내보내야 종잡을수 없는 언짢은 마음을 진정할수 있을것 같았다.

《그럼 현장에… 열처리직장에 내려가보십시오. 거기 가면 나의 친구 박웅수동무랑 만날수 있을텐데… 아주 재능있는 청년입니다.》

진수옥은 표정변화가 없이 단정히 앉았다가 흰목덜미에 슬쳐내린 파마머리를 한번의 세련된 손짓으로 어깨너머에 번져놓았다. 그리고는 원국을 못마땅한 눈길로 쳐다보았다.

《왜 저를 피하려 하는가요. 겸손인가요? 불필요한 겸손은 위선으로 되는거예요. <로동청년>신문은 사로청중앙위원회의 기관지입니다. 공장사로청위원장동무가 기자의 취재에 응하는것은 의무입니다. 현장에도 내려가 박웅수동무를 만나겠어요.》

그 녀자의 단호한 태도에 림원국은 면구한 웃음을 지었다.

《무엇부터 이야기할가요?》

《새 공구강연구를 하는데 난관이 많았을텐데 그걸 뚫고나간 공장사로청위원장동무의 사업을 들었으면 합니다.》

원국은 진수옥의 날카로운 눈에서 부드럽고 서글픈 빛을 보았다. 취재대상에 대한 호기심과 동경심같은것이면서도 까닭모를 회오의 짙은 관심의 눈길이였다. 처녀의 그런 이상스런 표정이 공구강기술을 지나치게 파고드는 진지한 태도와 어울려 의혹을 자아냈지만 스쳐지나버렸다.

원국은 김일성종합대학을 졸업하고 자원하여 공장에 왔을 때 청년일군이 되려는 희망은 없었다. 열처리직장초급단체위원장이면서도 사로청사업보다 어떻게 하면 가공직장사람들이 늘 애를 먹는 공구의 질을 혁신할수 없을가 하는 생각에 더 옴해있었다. 강철소재를 무우깎듯 하면서도 무디지 않는 특수한 경질합금재료로 된 공구를 만들어내고싶었다. 발명가의 꿈은 경험많은 기능공들한테서 허황한것으로 치부되여 모래성처럼 무너지기도 하였다. 그러나 청춘의 자존심과 희망은 굽혀지지 않고 일어났다. 중학시절의 동창생인 열처리직장의 박웅수와 같이 공구강기술지식을 습득했고 기계공학연구소를 비롯해서 강쇠의 질과 관계되는 연구를 하는 기관들과 공장들을 찾아가 경험과 기술을 섭취했다. 박웅수와 열처리공청년들의 힘과 지혜를 모으니 새 공구강탐구는 큰 걸음을 내디딜수 있었다. 종래의 공구강열처리기술을 벗어나 새로운 플라즈마열처리기술을 착상해낸것이다. 작은 시험로에서 초보적으로 만들어낸 공구들은 질이 괜찮았다. 성공할수 있다는 신심이 확고해졌다.

림원국은 기술혁신에서 사로청원들의 사상과 재능을 발동하면 어려운 탐구의 고비도 헤쳐나갈수 있고 성과를 거둘수 있다는것을 체험했다.…

《그래서 위원장동무는 기술혁신에서 공명심이나 명예심 그리고 물질적보수 같은 개인적욕망따위를 경멸했군요.》

진수옥은 듣고나서 조용히 긍정했다.

《도사로청열성자회의때 중앙사로청위원장동지한테 강한 반발을 했다더군요.》

원국은 처녀기자가 지켜보는것을 개의치 않고 기름때가 채 씻겨지지 않은 거뭇한 손으로 무랍없이 머리를 쓸어넘겼다.

《장주천위원장동지는 기술혁신하는 재간있는 사로청원들을 조금이라도 물질적으로 도와주자고 한거지요.》

《위원장동무는 지금 새 공구강발명에서 어떤 위치에 있는가요?》

《맨 뒤자리입니다. 뒤에서 정치사업이나 좀 하고 기술적으로는 별로 도와주지 못합니다. 열처리직장의 박웅수 초급단체위원장과 사로청원들이 이 기술혁신에서 주인들입니다. 앞으로 완전히 성공하면 발명가의 칭호는 그들이 받을것입니다.》

《위원장동무한테도 발명가의 꿈이 있지 않습니까?》

원국은 처녀가 바투 들이대는 바람에 난처해서 얼굴이 붉어졌다.

《있지요. 솔직히 말해서 새 공구강기술이 성공해가니 나도 부럽습니다. 공장사로청위원장이라고 명예심이 왜 없겠습니까. 그렇지만 난 사로청원들이 당의 기술혁명방침을 관철하는 사업에 떨쳐나서도록 이끌었다는것을 긍지로 생각합니다. 개인적명예심이나 감정에서 벗어나 청년들을 위하는 헌신적인 사로청일군이 된다는것은 참 어려운 일인것 같습니다.》

원국은 낯선 기자처녀앞에서 속생각을 열어보인것이 쑥스러워 공연히 책상우의 몇권 되지 않은 책들을 언손질로 정돈했다. 인제는 이야기를 끝냈으면 했으나 진수옥은 취재수첩에서 원주필을 멈추고 주저하더니 말을 꺼냈다.

《위원장동무, 한가지… 더 물어보고싶은데… 일전에 기계공학연구소에서 나이많은 연구사가 공장에 내려왔댔지요?》

《진원삼박사선생말입니까?》

《예, 옳습니다. 그분이 공장에서 시험적으로 몇개 만든 공구강과 열처리로를 보았다지요?》

《기자동무가 어떻게 그걸 알고있습니까?》

원국은 의혹에 싸여 처녀를 유심히 쳐다보았다. 처녀는 그의 눈길을 피했다. 정채롭게 빛나던 눈동자가 생기를 잃고 어덴지 딴 곳을 보았다. 바른쪽눈섭속의 기미는 숨을 곳을 찾는듯 파르르 떨고있었다. 그러나 처녀는 잠시후에 당황한 기색에서 벗어나 본래의 단아한 표정을 되찾았다.

《진원삼연구사는 제가 존경하는 사람이예요. 개인적으로는 그렇지만 취재내용과 관계되는 일인것만큼 기탄없이 말씀해주세요.》

원국은 기자처녀가 별다른 관계는 아니라는듯 여유있는 미소를 지어보이는 바람에 캐묻지 않고 스쳐버렸다. 진원삼연구사에 대한 화재는 은연중 그를 흥분시켰다.

《나도 역시 그 연구사를 인간적으로 존경합니다. 우리 공장에 여러날 있었는데 젊은 로동자들앞에서 깍듯이 례절을 지키는 어질고 순박한 사람이였습니다. 우린 그의 성품을 존경했지만 새로운 공구강연구에서는 그저 동정하는 정도입니다.》

《동정이라구요?!》

처녀는 목덜미에 그닥 흘러내리지 않은 머리를 화가 나는듯 어깨너머로 추슬렀다.

《그렇습니다. 진원삼선생은 오랜 세월 공구강을 전문적으로 연구해왔고 성과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말년에 연구한 공구들은 다른 나라 공구강기술에 많이 의존한 보수적인 기술성과들이였습니다. 생산에 도입했지만 질도 보통이고 원가도 비싸서 강철가공에서 은을 내지 못했습니다. 절삭기계공들의 호평을 받지 못하고 낡은 공구들속에 뒤섞여 존재를 마쳐버렸습니다. 기자동무가 존경하는 사람을 내가 허무적으로 말해서 안됐습니다.》

《괜찮아요.》

《공장기술부기사장동지가 공구강연구에 고심하는 우릴 도와주려고 우정 초빙해왔지만 사실… 우린 별로 그 연구사한테서 도움을 받지 못했습니다. 저주파유도로를 개조한 그의 시험로가 기술적으로 낡았거든요. 그런데도 진원삼연구사는 박웅수동무랑 우리 열처리직장동무들이 연구하는 플라즈마시험로가 위험하고 성공하기 힘들다는거지요. 기술부기사장에게 자기 주장을 너무 력설하는 바람에 정말 방해가 되였습니다. 우리 청년들이 자기 말을 듣지 않으니까 나중엔 성이 나서 손을 내젓고 다시는 공장에 오지 않겠다면서 떠나가버렸습니다. 사람도 늙고 기술도 낡았지요. 공구혁명은 말그대로 낡고 뒤떨어진 공구강제작기술을 일소하고 새로운 기술원리에 토대해서 때벗이를 해야만 이루어질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난 이걸 우리 공장의 청년기술자, 기능공들의 집체적힘과 재능으로 성공하려고 합니다.》

진수옥은 까딱 않고 앉아서 야릇한 미소를 지었다. 공감을 표시하지 않는 그 싸늘한 웃음이 대번에 원국의 열정을 식혀버리고 기분을 거슬리게 하였다.

《내 말이 허황해보입니까?》

《량해하세요. 어쩐지 그렇게 생각되여요. 목표를 높이 세우는건 좋지만… 자부심이 지내 크고 빗나가서 공명심과 우월감으로 떨어질가 우려돼요. 아무 성과도 없이.》

《어덴지 진원삼선생의 말투와 비슷한데가 있구만요. 론쟁은 하지 않겠습니다. 시간이… 시간만이 기자동무의 위구가 부질없는것이였음을 증명해줄것입니다.》

원국은 치미는 화를 가까스로 참고 걸상에서 일어났다. 그는 자기의 이런 거치른 행동이 처녀손님에게 그만 돌아가라는 암시를 하는 례의없는 처사임을 뒤늦게야 깨달았다.

그러나 처녀는 아무런 불만스런 낯빛도 짓지 않고 조용히 취재수첩과 원주필을 가방에 넣고 일어섰다. 자리를 뜨지 못하고 아래입술을 잘근잘근 깨물었다. 원망에 가까운 참기 어려워하는 괴로움이 처녀의 그늘진 날카로운 눈빛속에 흘러넘치고있었다.

《위원장동무가 불쾌해하지만 하려던 말을 마저 하겠어요.》

《…》

《제가 여기로 떠나올 때… 진원삼연구사는 저더러… 그 공장에 가거들랑 림원국이라는 공장사로청위원장동무를 만나보라고 당부했어요. 저의 취재임무는 모르고서 공장사로청위원장동무에게 플라즈마열처리시험로에서 새 공구강을 만드는것은 무모한 일이라고, 사람이 다치던가, 무슨 돌발적인 큰 사고를 저지를수 있다고 말해주라고 했습니다.》

원국은 진수옥의 사려와 인내력에 감화되여 솟구치는 불만을 억제하고 침착히 응대했다.

《고맙습니다. 귀중한 조언을 전해주어서… 하지만 그것은 연구사선생이 공장에 와서 루차 말한것입니다. 만약 나와 우리 공장청년들이 연구사의 낡은 견해와 위구에 포로되였더라면 공구강질개선에서 현재와 같은 성과는 거두지 못했을것이고 시험로를 갱신하지도 못했을것입니다. 진원삼선생은 허심하고 진지한 사람입니다. 반면에 자기의 조언이 청년들의 연구에 방해가 된다는것을 깨닫지 못하는 고집스런 연구사지요. 오랜 세대와 새 세대간의 변증법적차이라고 할지… 우린 그래서 진원삼선생의 공구강기술을 별로 참고하지 않습니다.》

진수옥은 괴로이 한숨을 톺았다.

《고마와요. 바쁜 시간을 내주셔서.》

처녀는 출입문으로 향했다.

《열처리직장에 가보셔야지요?》

원국은 구태여 가보겠느냐는 시답지 않은 투로 말했으나 처녀는 수긍하는 빛이였다.

관리부청사의 층계를 내려 바깥현관에 나섰을 때에야 원국은 날이 저물었음을 알았다.

습한 바다바람이 불어왔다. 구내길에 늘어서있는 버드나무가 부러질듯 뒤설레며 궂은 날씨를 예고해주고있었다.

일요일 저녁이여서 공장안은 조용하였다. 원국이가 박웅수네더러 일찌기 들어가 쉬라고 말한터여서 열처리공청년들은 다 퇴근하고 없었다.

원국은 플라즈마시험로를 별반 설명하지 않았고 진수옥이도 묻지 않았다. 그러나 처녀는 호기심을 가지고 시험로를 자세히 살펴보았다. 그러느라 시간이 퍼그나 흘렀다.

림원국은 진수옥이와 같이 공장정문을 나섰으나 선뜻 처녀와 헤여지지 못하였다. 공장사로청사업을 취재하러온 기자인데 저녁 한끼라도 대접하는것이 례의였지만 망설이게 되는것이였다. 그는 이런 경우에 여느 사로청손님들은 집에 데리고가군 했었다. 그러나 날이 어두웠는데 처녀손님보고 집에 가자고 할수는 없었다. 공장뒤마을에 있는 식당에라도 가는것이 옳은 처사일것 같았다.

그가 발걸음을 돌리자 진수옥이 시계를 보고 물었다.

《어데로 가시나요?》

《같이 갑시다. 저기 가면… 식당이 있습니다. 수수지짐을 하는데 맛이 괜찮습니다.》

《고마와요. 난 려관에 가겠어요. 아침차로 떠나자면 취재내용을 정리도 해야 하니까요.》

《려관은 멉니다.》

《위원장동무의 집은 어느쪽인가요?》

《려관은 우리 집에서도 썩 가야 합니다.》

《한방향이군요. 다른 일이 없으면 같이 가시자요.》

공장울타리옆길을 벗어난 두사람은 얼마후 바람이 울부짖는 해변길에 나섰다.

먹장구름이 수평선을 캄캄하게 뒤덮었다. 층층이 흰거품을 몰아세운 성난 파도가 넓다란 모래불을 아주 밀어버릴것처럼 기승스레 내달려와서는 그들의 발부리에 못 미쳐서 스러졌다. 그래도 파도는 주저앉지 않고 뒤로 물러가서 힘을 축적해가지고는 다시금 내달아오군 하였다. 파도의 비말이 뜬 누기찬 대기가 얼굴에 부딪쳤다.

언덕길의 다박솔들은 바람을 피해 옹송그렸고 시들어가는 분홍빛꽃송이들이 점점이 박힌 해당화덤불은 잎새를 가냘피 떨었다. 비가 쏟아질것 같았다.

《파도가 세차군요. 저녁에는 바다날씨가 늘 이런가요?》

진수옥이 침묵을 깨뜨렸다. 궂은 날씨를 탓하지 않는 부드럽고도 사색적인 목소리였다.

《착한 어린애처럼 얌전한 바다였는데… 오늘따라 투정을 부립니다.》

진수옥에게서 반걸음 뒤져선 원국은 엷은 우유빛운무가 서리고 잔 파도가 모래불에서 어리광부리는 온화하고 아늑한 저녁바다를 처녀에게 보여주지 못하는것을 아쉬워하였다.

《제가 불청객인가보죠?》

《어째서 말인가요?》

《신문에 내려고 하면서도 공구강기술연구를 우려하니까요.》

진수옥은 웃음지었으나 어두운 심정이 확연히 느껴졌다.

원국은 처녀의 그런 복잡한 괴로움이 리해되지 않았으나 다치고싶지는 않았다.

《기자동문 어떤 바다를 좋아합니까?》

《모르겠어요. 바다가에서 자라지 않았으니까요. 바다라면 무턱대고 좋은걸요. 어수선한 마음이 정화되는것 같애요. 위원장동무는 어떤 바다를 좋아하세요?》

《난 잔잔한 바다보다 파도세찬 이런 바다를 좋아합니다.》

《그럴것 같애요. 주견을 굽히지 않고 자존심을 세워 용맹스레 기슭에 달려드는 파도가 어덴지 사로청위원장동무성격과 비슷한데가 있어요.》

림원국은 처녀의 날카로운 비유가 거슬렸지만 주저없는 솔직성에 공감이 갔다.

《파도가 분별이 없고 무서운 재난을 가져오지만 결코 그런 부정적특징만을 가진것은 아닙니다. 파도는 바다생물이 살아가는 원동력입니다. 파도가 없으면 바다는 썩습니다. 잔잔한데서가 아니라 파도와 같은 격동속에서 생물이 태여나고 자랄수 있는것입니다.》

귀를 기울이고 듣고있던 진수옥은 고개를 쳐들었으나 선뜻 반론하지는 않고 파도가 밀려오는 바다를 묵묵히 지켜보았다.

《위원장동무, 새것은 파도처럼 모든것을 쓸어버린 곳에서만 창조되는게 아니지 않을가요? 꽃이 시들어 죽어도 씨를 남기는것과 같이 허슬히 살아온 인간의 생도 존재를 마칠 때는 자그마한 경험이든 교훈이든 남긴다고 생각해요.》

《진원삼연구사를 두고 하는 말입니까?》

《그래요.…》

진수옥은 발부리에서 파도가 밀어다버린 해초줄기를 집어들고 엉킨 가지를 풀어주었다.

바람은 잠시 숙어들었으나 바다는 여전히 술렁거리며 쉬임없이 파도를 몰아왔다.

처녀는 걸음을 멈추고 돌아서서 경원시하는 눈길로 원국을 쳐다보았다.

《그분은 저의 아버지예요.》

《?!…》

원국의 머리속에 쌓였던 의혹이 한꺼번에 풀렸다. 다음순간에는 미안한 생각이 뻐근히 들었다.

《그런줄 모르고… 연구사아바이 평가를 막 했습니다. 정말 안됐습니다.》

그의 진심으로 되는 사과의 말을 듣자 처녀는 놀라와하였고 사뭇 힐난하는 기색이였다.

《괜찮아요. 그런 후회는 동정심으로밖에 여겨지지 않아요. 난 오히려 저의 아버지에 대한 원국동무의 객관적평가를 시원히 들었어요. 괴롭고 가슴이 아팠지만 성공하지 못한 연구사의 운명이니 순응해야지요.》

《진원삼선생은 연구소에 그냥 계십니까?》

《은퇴했습니다. 평성시의 교외에서 어머니와 같이 삽니다.》

두사람은 해변길에서 벗어나 다박솔이 우거진 둔덕에 올라섰다.

어둠이 드리운 사택마을로 뻗은 오솔길에 희끄무레한 차림새로 서있던 녀인이 이쪽으로 다가왔다.

《원국이냐?》

어머니의 다정한 목소리였다. 아들이 멀리 공장에서 저녁늦게 오기라도 하면 늘 이 둔덕길까지 마중을 나오는 어머니였다.

《일요일인데 좀 일찍 오지.》

부드럽게 탓하는 어머니앞에서 원국은 진수옥을 어줍게 소개했다.

《어머니, 평양에서 온 신문기자동무예요.》

《처음 뵙겠습니다.》

진수옥은 다소곳이 허리를 굽혀 인사했다. 재가하지 않고 평생 아들하나를 기둥처럼 믿고 살아온 어머니는 아들과 같이 나타난 처녀를 저으기 놀라운 눈길로 뜯어보았다.

댓글목록

profile_image

강산님의 댓글

강산 작성일

(위에서 계속)

《객지에서 수고가 많겠수다. 어서 집으로 가십시다.》

《괜찮아요. 전 려관에 가면 됩니다.》

《원참, 넌 기자선생을 집에 데리고오는게 아니냐?》

어머니는 섭섭한 얼굴로 쭈밋거리는 아들을 돌아보고나서 말을 이었다.

《기자선생, 이 시간에 려관에 가선 식사를 못합니다. 우리 집으로 갑시다. 공장에 내려오는 사로청손님들은 쩍하문 우리 집에 온다오. 녀자손님이면 뭐라오.》

《기자동무, 우리 어머니 료리솜씨가 괜찮습니다. 식사를 하고 려관에 가도 늦지는 않을겁니다.》

원국의 약간 주눅이 든 진지한 호의에 진수옥은 미안쩍은 웃음을 지었다.

어머니는 아들이 기자처녀와 같이 자기를 따라서자 바삐 오솔길을 앞서갔다.

단층집들의 굴뚝에서 나오는 연기가 바람에 흩날렸다. 매캐하면서도 구수한 냄새가 풍겼다.

원국이가 집마당에 들어서자 헛간쪽에 엎디여있던 누런 개가 움쭉 일어나 허리가 늘어지게 기지개를 하더니 부르르 몸을 털고 마중나왔다. 개는 주인을 뒤따라 담장문으로 들어오는 낯선 녀자손님을 보자 본능적으로 으르릉거리더니 인츰 태도를 고치고 가까이 다가와 주둥이로 냄새를 맡았다. 그리고 주인의 친절한 거동까지 참작하여 환대할 손님이라고 여겼는지 털이 푹신한 꼬리로 처녀의 다리를 슬치며 지나갔다.

어머니는 양복을 잘 차려입고 거동이 세련된 어덴지 아들보다 퍽 우월해보이는 기자처녀를 부러움을 가지고 어렵게 대하였다. 그리고 가산이 단출한 방안을 구애하지 않고 집이 깨끗하고 아늑하다고 말하는 기자처녀를 고맙게 생각하였다.

어머니는 버섯꾸미와 대합조개 볶은것을 진수옥의 국수그릇에 푹푹 놓아주었다.

《기자선생, 많이 잡수시오. 어려워말구.》

《어머니, 옥류관국수보다 못하지 않습니다.》

《그렇소?! 하긴 집에 오는 사로청젊은이들도 이 늙은 식모의 음식솜씨를 칭찬한다오.》

어머니는 웃으며 오늘따라 손님을 데려오고도 말이 적고 몸가짐이 어색한 아들을 대신해서 활기를 피웠다.

저녁식사를 끝내고 한담을 나누는데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비줄기가 헛간의 양철지붕을 두드리는 소리가 집안에 들렸다. 바람에 날린 비발이 뒤창문을 후드득 적시였다. 인차 멎을 비가 아니였다.

진수옥은 걱정스러이 앉아있었다.

림원국은 기자처녀가 이 비속에 먼 려관으로 가는 고생은 시키고싶지 않았다. 그는 일어나 우산을 찾아들었다.

《어머니, 난 웅수동무네 집에 가야 해요. 도면이랑 보고 토론하느라면 밤을 새워야 할것 같아요.》

《어서 그러려무나.》

어머니는 아들의 눈치를 제꺽 알아차렸다. 그리고 가방을 들고 일어나는 진수옥을 황급히 만류했다.

《기자선생, 이 비에 어델 간다고 그러시오. 집이 루추하지만 여기서 쉬시오.》

《그렇게 하십시오. 우리 어머니와 밤동무랑 하면서…》

원국은 진수옥이 거절할 사이없이 방문을 열고 나갔다.

캄캄한 어둠과 비발이 그를 휩쌌다. 바람이 세차서 우산도 별로 도움이 되지 못해 바지가랭이와 신발이 젖어들었다.

박웅수네 집은 가깝지 않았다. 도면을 같이 토론하자고 약속한것도 없었다. 그리고 박웅수네는 동생들이 셋이나 돼서 집이 늘 비좁았다.

원국은 한참 걷다가 언덕길에 뿌리박은 굵은 미루나무밑에서 비를 피했다. 아무래도 웅수네 집에 가는것이 마땅할것 같지 않았다. 불편한것은 말할것도 없고 무어라 설명하겠는가.

그는 자기가 불만스러웠다. 이래저래 구차스런 일만 저지르는것이였다. 무슨 넋이 나가서 기자처녀와 장시간 이야기를 나누었는가, 일찌감치 공장합숙식당에서 식사를 시키고 려관에 데려다주었더라면 이런 난처한 일이 생기지 않았을것이 아닌가.

그런 불만속에서도 어째선지 비바람을 맞으며 헤매는 고생이 달갑게 여겨지였다.

그러나 그것은 평시에 사로청원청년들을 위해 헌신하면서 느끼던 즐거우면서도 고상한 감정과는 좀 달랐다. 어쩐지 자기가 기자처녀에게서 호감을 사고싶어하는 인위적이고 리기적인 목적을 추구하는것 같은게 께름하였다.

그것은 공장사로청위원회사업을 《로동청년》신문에 내고싶은 목적외에도 어떤 개인적인 의도가 있는것만 같아 자신이 불쾌하고 가엾게 여겨지기도 하였다.

그러나 기자처녀를 밤새 편안히 쉬게 해주고싶은 깨끗하고 순진한 남성의 열망은 그 모든 개인적이고 인위적인 감정과 편견들을 무찌르고 그를 긍정하는것이였다.

원국은 집쪽으로 돌아섰다. 그는 어둠속에서 가까스로 길을 찾아 걸음을 옮겼다. 후려치는 비에 옷은 거의나 젖었지만 그는 우산날개를 바람쪽으로 기울이거나 걸음을 빨리하지 않았다. 자연의 광란은 그에게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 그는 이제껏 한번도 있어보지 못한 자기 마음의 내부에서 일어나는 혼란과 파도치는 정열에 귀를 기울이는것이였다. 그는 바다처럼 뒤설레는 가슴을 느꼈다.

개가 주인이 오는 기척을 알아채고 소리없이 달려나왔다.

원국은 개가 기특해서 쭈그리고앉아 코잔등을 쓸어주고 살근살근 두들겨주었다.

방안은 아직 불빛이 환하고 말소리가 도간도간 들렸다.

원국은 발끝걸음으로 소리안나게 마당을 가로질러 헛간으로 갔다. 헛간문이 삐거덕소리를 냈으나 비바람소리에 삼키워버렸다.

그는 벼짚북데기를 고르어놓고 거기에 드러누웠다. 어느새 따라들어왔는지 개가 비에 젖은 털비린내를 풍기며 그의 곁에 옹크리고앉아 귀를 쫑긋거리며 밖의 동정을 살피고있었다. 원국이가 잔등을 쓸어주자 개는 주인의 손을 핥더니 안심되는지 또아리를 틀고 그속에 주둥이를 박았다.

원국은 벼짚북데기를 끌어당겨 덮었다. 잠을 이룰수 없었다. 젖은 옷의 누기가 스며들어 끈끈해나고 비방울이 헛간의 녹쓴 양철지붕을 두드리는 소리가 잠시도 그치지 않았다. 그러나 한참 누워있으려니 어느덧 그 소란스러운 소리에도 익숙되여갔다.

원국은 눈을 감았으나 커다란 인상을 남긴 진수옥에 대한 생각이 넝쿨지어 걷잡을수 없이 뻗어갔다. 취재하러온 처녀기자의 아버지가 진원삼연구사라니… 참, 얼마나 공교로운 일인가. 원국은 지금에 와서야 지난날 그 연구사를 더 친절히 대해주지 못한것이 후회되였다. 자기네와 공구강기술은 달라도 말년에 그나름으로 어떤 자그마한 성과라도 거두도록 도와줄수는 없을가?

원국은 잠결에도 그런 생각이 진수옥이와 그의 아버지에 대한 동정심이며 번거로운 자기 마음의 위로에 불과하다는것을 느꼈다.

그는 밤새 몰아치는 바람질에 끝내 못이 떨어진 헛간지붕의 양철판이 가르랑거리며 야릇한 소리를 내여 자주 깨여났다.

그러다가 새벽녘에야 겨우 깊은 잠에 들었다.

어머니는 아들이 웅수네 집에서 자다가 늦게 오는줄 알고 아침밥을 지으며 다심스레 진수옥을 보살폈다. 도중식사까지 정성스레 싸서 처녀의 가방에 넣어주었다.

기차시간이 되여오는데도 원국이가 나타나지 않아 진수옥은 어머니에게 작별인사를 하고 떠나갔다.

그것도 모르고 헛간 짚더미속에서 꿈속을 헤매던 원국은 개가 비린내를 풍기는 주둥이로 그의 얼굴을 문대며 부산스레 낑낑 거려서야 깨여났다.

아침해가 헛간문틈으로 비쳐들었다.

황급히 짚검불을 털고 마당으로 뛰쳐나간 그는 진수옥을 바래주고 들어오는 어머니와 맞다들었다.

《에그- 헛간에서 잤구나…》

어머니는 혀를 찼다. 그리고 황황히 방안을 엿보는 아들에게 일렀다.

《찾지 말아. 기자선생은 갔다.… 시간이 있는데 좀 기다리라구 하니까… 빨리 가야 한다면서 서두르더구나.》

원국은 무작정 동구길로 달려갔다. 주인의 의도를 알아차린 개가 그를 앞질러 뛰였다. 간밤의 비에 젖은 사택마을길을 지나 숨이 턱에 닿아 다박솔이 우거진 언덕에 올라섰다.

그는 해빛을 받아 눈부시게 출렁이는 푸른 바다물을 배경으로 하얀 모래불에 서있는 진수옥을 보자 이름할수 없는 기쁨이 가슴속에서 용솟음쳐오름을 느꼈다.

처녀는 옆에서 맴돌며 꼬리를 젖는 개를 쓸어주고있었다.

원국은 쿵쿵 뛰는 심장을 가까스로 억제하며 진수옥을 향해 걸어갔다. 심장의 세찬 박동은 언덕길을 올리뛰여서만이 아니라 내부의 뜨거운 정열의 분출로 해서 좀처럼 진정되지 않는것이였다.

진수옥은 해빛에 눈이 부셔 손채양을 하고서 례사롭게 원국을 맞이하였다.

공장사무실에서 론쟁을 할 때와 다름없는 날카롭고 단정한 기품을 지닌 처녀를 대하자 원국은 가슴속에서 분별없이 끓어오르던 정열이 서서히 사그러짐을 느꼈다. 그는 자기가 무엇때문에 허둥지둥 달려왔는가를 고통스럽게 의식하였다. 그리고 자기와 이 처녀사이에 아무런 관계도 맺어질수 없으며 이 시각에는 사업상의 실무적작별만이 있을수 있다는것을 랭정히 깨달았다.

《인사를 못하고 떠나왔어요.》

진수옥이쪽에서 먼저 미안한 말을 꺼냈다.

《렬차시간이 늦겠는데… 해변길은 멉니다.》

《폭풍이 잔 뒤의 아침바다를 보고싶었어요.》

진수옥은 갈매기들이 한가로이 날아예는 고요한 수평선을 이윽히 바라보았다.

《바다는 정말 거인이예요. 온밤 울부짖고 성을 내더니 아침엔 이렇게 다정하군요.》

《바다를 보고싶으면… 자주 내려오십시오.》

《그러겠어요.》

진수옥은 가방끈을 추슬르더니 뜻밖에도 대담하게 두어걸음 바투 다가와 원국의 머리와 어깨에 붙은 짚검불오리를 손으로 집어내였다. 남동생이나 그보다 더 가까운 사람에게나 할수 있는 처녀의 그런 배려심은 원국을 놀라게 하고 눈뿌리가 뜨끈해지게 만들었다.

《사로청위원장동지가 장난군애들처럼 검불을 달고다니는군요.》

처녀의 살뜰한 정이 풍기는 유모아에 그는 목이 메였다. 간밤의 일을 처녀가 알아챈것만 같아서 당황해졌다.

그러나 진수옥은 아무것도 모르는듯 손을 내밀었다.

《부디 공구강연구에서 성공하길 바래요. 플라즈마로가 위험하니 주의하세요.》

《걱정마십시오. 기사는 그때 쓰겠습니까?》

《아니. 지금의 성과만 가지고 쓰지요. 다만 위원장동무와 공장열처리직장사로청원들의 열의를 제가 진실로 공감하지 못해서… 기사가 잘되지 못할가 걱정이거든요.》

《솔직히 말해주어 고맙습니다. 부탁하건대 우리 공장청년들의 견해와 감정을… 기술혁신과정을 미화하거나 과장하진 말아주십시오. 신문에 나는것이 중요한게 아니라 실지로 성능좋은 공구강이 태여나 강철가공에 쓰이는것이 중요하지 않겠습니까.》

《그럼 안녕히 계세요.》

진수옥은 서느러운 웃음을 짓고는 몸을 돌려 빠른 걸음으로 걸어갔다. 모래불에 그 녀자의 뒤축높은 구두자국이 점점이 멀어져갔다.

그 녀자는 해당화덤불이 우거진 언덕에 이르러 한번 뒤를 돌아보고는 해변길의 소나무들속에 아주 사라지고말았다.…

 

림원국은 반쯤 취한 상태에서도 길을 곧바로 찾아 진수옥이와 헤여진 그 모래불언덕에 이르렀다. 공장과 집이 있는 사택지구로 가는 두갈래의 갈림길이 이 모래불언덕에서 시작된다.

그는 반나마 잎이 떨어져 앙상해진 해당화덤불옆에 주저앉았다. 도사로청위원장의 집에서 결김에 마실줄 모르면서 큰잔으로 강술을 들이킨것이 화근이였다. 아까는 몰랐는데 점점 골이 지끈거리며 아파났고 속이 메슥메슥해왔다. 몽롱한 의식속에서도 자기가 이 모래불에서 진수옥이와 헤여졌다는 생각이 들었다. 짜릿한 기쁨과 서글픔이 동시에 겹쳐들었다.

그러나 그날의 기쁘고 즐거운 추억의 감정은 잠시동안뿐이고 고독감이 온몸을 휩쌌다. 자기는 도사로청에서도 배척을 당하게 될것이고 진수옥의 마음구석에도 들지 못한 외로운 처지임을 아프게 의식하였다. 그는 진수옥이 신문사에 가서 플라즈마시험로개발이 어떻게 되였는지 공장에 전화라도 걸어오지 않겠는가 하고 은근히 기대를 품었다. 그러나 진수옥은 아무런 기별도 없었다. 그런데도 원국은 자기에게 약속한 처녀가 있다고 당당히 말했다.

자기는 분명 그런 강요하는 혼약에 자존심이 상해서 응할 마음이 없은것보다도 정녕 진수옥을 마음에 두고있은것이다.

얼마나 어리석고 허황한 소망인가. 평양의 기자처녀가 무엇때문에 지방에 이름도 없는 공장의 일개 사로청위원장에게 시집을 오겠는가. 사로청위원장이라는 간판만 없으면 나라는 청년에게 평양처녀를 끌만 한 무슨 장점이 있겠는가.

원국은 진수옥이와 걷던 그날밤처럼 물마루 높은 파도를 몰아오는 컴컴한 바다를 오래도록 바라보았다.

그는 무겁게 한숨을 쉬고 모래불에서 일어났다. 술은 좀처럼 깨지 않았다. 생각은 뻔한데 팔다리는 곧바로 움직여주지 않았고 머리는 흐리멍텅했다. 그는 본래의 랭정한 리성을 찾느라 애썼고 번민을 채찍질하며 언덕길을 내려갔다. 공장으로 가야 했다.

박웅수와 열처리직장사로청원들이 플라즈마시험로 점화를 준비해놓고 자기를 기다릴것이였다. 시간이 너무 늦었다. 하긴 자기가 오지 않아도 박웅수네들이 점화를 할지도 모른다. 열처리할 공구강들을 라선식으로 배렬해놓았으니 이번엔 성공할것이다.

공장사로청원동무들과 열처리시험로를 생각하니 어느결에 괴로움이나 위구심따위의 잡스런 감정들이 가셔지고 마음이 안정되여갔다. 그까짓 처녀고 혼사문제고 될대로 되라지! 중앙사로청위원장의 눈밖에 나면 뭐래?! 공장사로청위원장을 그만두면 될게 아닌가!

그는 머리우에서 바람에 잔가지를 설레이며 진한 솔잎냄새를 풍기는 소나무우듬지를 올려다보았다. 그리고는 입김을 푸- 하고 여전히 배속을 뒤번져지게 하는 술독을 내뿜었다.

원국은 일종의 자부심에 가까운 배심을 가지고 공장으로 가는 지름길을 비청거리며 걸었다.


서비스이용약관 모바일 버전으로 보기 상단으로


Copyright © 2010 - 2023 www.hanseattle1.com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