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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소설 빛나는 아침 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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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강산
댓글 1건 조회 7,291회 작성일 20-07-06 2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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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시범은 붕대를 감은 팔을 부자연스럽게 놀리면서 침대에서 일어나 선풍기를 좀 더 머리맡가까이로 끌어다놓고 다시 자리에 누웠다. 한참동안 기염을 토한뒤라 온몸이 홧홧 달아올라 안절부절 못하고있다. 넓다란 마루방에는 일여덟명의 동료들이 병문안을 하기 위해 찾아왔었다. 밤이고 낮이고 방문객이 그치지 않았다. 한동안 절당처럼 비여있었던것인데 지난해 설명절을 하루 앞두고 북에 갔던 원시범이 문득 나타난후로부터 이렇게 된것이다. 원시범은 자리가 편안치 않아 다시 일어나 등의자로 옮겨앉으며 좀전부터 하던 말을 계속하였다.

《당신네들은 공산주의리념에 대해서 아니 당신네들이라는 노예는 저 박선생만은 제외돼있습니다.》 그는 오른쪽벽에 기대앉아 자기보다 나이들이 10년가까이 아래인 젊은이들의 노는양을 재미있게 쳐다보고있는 목이 기름한 력사학자 박문에게 량해를 구하였다. 《소인은 공산주의리념을 그 무슨 범접할수 없는 뻬스트균처럼 대해서는 안된다는거요. 왜그런가. 그것은 이른바 지식을 가졌다는 우리들이 맹목성에 빠질 위험이 있기때문이요. 그건 그렇고 내가 목격한 북조선은 당장 공산주의를 하자는것도 아니드란말이요.》

《여보 여보, 원군, 그건 론리도 아니고 서정시도 아닌 궤변이고 자가당착이요. 군은 그렇게까지 저지능이 아니였는데 어떻게 몇달어간에 그렇게 바보가 되였나. 북에서 공산주의를 하지 않는다면 그곳 공산당은 도대체 무얼 하자는건가. 설사 각자의 기호에 따라 리념을 나누어주는 구락부도 아닐것이고 더구나 희랍 아테네에 있던 쏘피스트처럼 론리의 경연을 하자는데도 아닐텐데…》

원시범의 턱밑에 바투 들어앉아 흘러내린 안경을 손끝으로 밀어올리며 달려드는것은 생물학박사 김원학이다. 그는 와세다출신으로서 30살을 갓 넘겨 학위를 받아 학계에서 수재로 이름을 떨쳤었다.

《선생님! 그렇지 않습니까. 그리고 저명한 제씨들 그렇지 않소?…》

김원학은 방금 원시범이 년장자인 박문을 존대한것처럼 엄연히 계칭을 갈라놓고 동료들에게 동의해줄것을 요청하였다.

그렇게 되자 원시범을 중심해서 쭉 둘러앉았던 친구들이 모두 고개를 끄덕이거나 한마디씩의 대답으로써 김원학을 지지해나섰다. 사실 까놓고보면 올해초부터 지금까지 반년이 넘도록 이 집에 지식인들이 모여들고 왈시왈비 밤낮 론쟁을 벌리는것은 김원학의 입심좋은 론리와 그만 못지 않게 검질긴 원시범의 정열때문이라고 할수 있었다. 8. 15해방이 되여 한돐이 되는 지금까지 그들모두는 할일이 없게 되였다. 그들을 찾는데도 없거니와 그들자신이 아무것도 하려고 하지 않았다. 학술연구요 실험이요 취재요 답사요 하는것은 전혀 불필요하게 되였고 그렇다고 해서 신바닥에서 불이 일만치 드바삐 뛰는 정치인이나 운동자들의 본을 딸 필요가 없다고 보았다. 그러나 고급한 지식인인 그들은 정신생활의 공백을 채우는것도 필요하겠지만 이렇게 모여서 론의하느라면 자연히 앞이 트일것이라는 막연한 기대도 없지 않았다. 그들의 화제가 결코 따분하지 않을뿐더러 몇달이 계속되여도 끝을 볼수 없을만치 지속성을 가지는것은 그 무엇인가를 상대로 해서 규탄저주하는 반항의식이 깔려있기때문이였다. 그중에서도 두개의 대상이 뚜렷한 선을 이루고있었는데 하나는 남조선을 강점한 미군과 그의 나라 미합중국에 대한 비난과 저주이며 또 다른 하나는 북에 생겨났다는 공산주의에 대한 공포와 그에 대한 규탄이였다. 량으로 보나 농도의 세기로 보나 월등 우위에 있는것은 양키들에 대한 악담이였다. 신문이나 방송 또는 연설들에서 홍수처럼 쏟아지는 주장들은 《미군은 해방군이다.》, 《아메리카는 문명국이다.》라는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할수록 이 방안에 둘러앉은 사람들은 자기가 목격하고 체험한 생동한 생활세부들과 그것을 종합추리하고 지식으로 얻어낸 견해를 가지고 걸찍하게 욕설을 퍼붓고있다. 그중에는 아놀드군정장관이나 동경에 있다는 맥아더련합군총사령관 같은 거물들도 미친개 몰아주듯 한다.

《콜롬브스의 공로가 대단하긴 한데 그대신 아메리카합중국과 같은 야만국가가 생겨날수 있는 조건을 마련해놓았다는 점에서는 하느님앞에서 속죄해야지.》

《도대체 미군이 무슨 권리로 우리 조선을 강점하고 전패국취급을 하려드는가.》

《이런 식으로 10년만 더 끌면 조선에 혼혈종이 약차하게 생길수 있어. 신성한 조선의 피를 어지럽히려드는 야만들.》

이런 식으로 대상을 축구공굴리듯 하고있지만 오직 하나 서글픈것은 그것이 단 한걸음도 행동에 옮겨지는것은 없고 빈입만 가동시키고있는 점이다. 그러다가 마침내 그들의 분노는 절정에 이르렀다.

원시범은 서울에 다시 돌아와서 한겨울동안 줄곧 방안에 붙박혀있었다. 38°선을 넘어 평양으로, 평양에서 다시 흥남으로, 거기서 또다시 평양, 38°선 이렇게 한바퀴 도는 어간에 매우 피로를 느끼였다. 무엇보다도 정신적피로가 몸을 가눌수 없게 하였다. 환경에 쉽게 적응될수 있는 성격으로 보이였던 그였는데도 이질적인 환경과 사색때문에 지칠대로 지치였다. 그래 동료들에게 그가 말한것처럼 《동면》하기로 했던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그가 노상 《공백》으로 있은것은 아니고 추억을 되살려 교또시절을 자주 그려보군 하였다. 그러면 곧 하바드대학이 떠오르고 노벨상시상대에 오른 자기자신을 보게 되였다. 환상으로도 나타나고 꿈에도 자주 보이였다. 날씨가 따뜻해지자 가만있을수 없게 되였다. 지난 5월초였다. 백추화의 성화에 못이겨 새로 지은 연회색춘추복으로 갈아입고 원시범은 경성제국대학공학부청사로 시적시적 걸어나갔다. 언제나 참새새끼처럼 불안해있기마련인 백추화가 뒤따랐다. 정문을 지나 맨뒤 자그마한 방에서 햄스를 만났다.

매부리코에 등이 구불써한 아리아족 햄스는 원시범을 반갑게 맞아주었다. 처음부터 의도를 로출시킬수 없었고 또 만약의 경우를 념두에 두고 건성 몇마디 말을 나누고 돌아왔었다. 대화가운데는 북조선에 갔다왔다는것과 둘중 어느 하나에도 마음을 질정하지 않았다고 명백히 말해주었다. 며칠후에 다시 만나자고 하고 그날은 헤여졌다. 그로부터 사흘만에 까무러칠만한 사건이 생겼다. 원시범이 아직 자리에서 일지도 않았는데 초인종이 요란하게 울리였다. 동생이 나갔다 들어오는데 박문이 《이게 도대체 어찌된 일인가?》하고 신문지장을 휘두르며 고아대였다. 잠옷바람으로 뛰쳐일어나 방바닥에 《동아일보》를 펼치니 제2면 상단에 《북조선에 갔다온 한 지성인 미국에 갈것을 청원, 교또대학출신 원시범의 고백》이라는 표제를 달고 원시범이 기자와 한 인터뷰가 실렸다.

《이건 거짓말이요! 난 이런 일이 없소. 날조요 날조!》

원시범은 성이 나서 펄쩍 뛰였다. 《동아일보》 사회부에 전화를 거니 《당신이 만난 모계통에서 보내온 원고를 우리는 활자로 옮겼을뿐이요.》라고 하였다.

그 길로 원시범은 햄스를 찾아갔다.

《내 이름을 기자로 고쳤을뿐 내용이야 사실 그대로가 아닌가요.》

《이 원시범이 언제 북조선은 붉은 지옥이라고 했소? 또 내가 언제 미국에 류학갈것을 청원했소? 이건 날조요, 거짓이요! 나는 신문에 공개적으로 항의하겠소!》

《원선생! 신문에 난 그대로 해서 나쁠것이 없겠는데요. 잘 생각 해보시오.》

《아니요, 다 폭로하겠소.》

그는 문을 후려닫고 나와버렸다. 골목을 하나 돌아서는데 청년 둘이 나타나더니 원시범을 둘러메치고 《동아일보》에 난 기사가 사실이라는것을 인정하는 지장을 찍으라고 하였다.

《난 죽어도 그걸 인정 못한다!》

고래고래 소리를 쳤다. 뒤에 붙어섰던 백추화도 째지는듯한 비명을 지르며 어데론가 끌려갔다. 그가 의식을 회복해서 자동차길까지 기여나간것은 그로부터 2시간후였다.

한달동안 입원치료를 받고 창피해서 집에 나와 누워있는데 아직 그때에 받은 심신의 어혈이 풀리지 않았다.

《북의 공산주의자들이 아무리 조폭해도 양키들만행에 비하면 그건 아무것도 아니요.》

원시범은 자주 이렇게 말하군 하였다.

《북조선에도 악당들이 있기야 하지. 가령 내가 본 공산당본부에 있다는 오기섭이란 위인은 한심했네. 온몸에서 류행식 맑스주의 자세가 물컥물컥 풍기였어. 인정이 없고 정서는 목석이구 그러나 그 모든것은 중요하지 않단말이요. 오직 우리는 김일성장군님만 알고있으면 되네김일성장군님은 사상과 리론이 위대할뿐아니라 인간으로서도 위대하고 특출하시네. 우리들이 알고있는 야금기술자 양춘만이라고 있잖나. 그건 친일분자지. 그런데 그의 아이를 급병에서 구원해주시였소. 그 집을 방문했다가 앓는 아이를 보고 데려다 고쳐주시였네. 그러니 지금 남북 3 000만 겨레가 그이를 령도자로 모시는거야 응당한것이네.》

이 대목에서 박문이 끼여들었다. 그는 년장자라는 체면도 있었지만 력사학자로서 언제나 자기 립장을 투철하게 밝히는 대바른점이 있었다.

《내 생각에는 공산주의자들의 인격이나 호상의리에 대해서는 론할 필요 없다고 보네. 왜그런가 하면 공산주의에 대한 계보를 캐면 한세기가 넘지만 어쨌든 그어간의 대표인물로야 맑스나 엥겔스를 꼽아야 한다는것은 만인주지의 사실이 아니겠나. 그런데 맑스는 어떤 사람인가. <자본론>이라는 그 희세의 대작을 써서 자기 친우인 윌헬름 월프에게 드린다고 맨 첫 장에 써넣었거든. 또 엥겔스는 어떤 사람인가. 맑스의 유고를 보충정리해서 세상에 내놓으면서 자기 명예와는 전혀 관계시키지 않았단말일세. 이런것을 미루어보건데 공산주의라는 그 리념자체는 각자 자기의 리해관계나 세계관에 의해 자유롭게 대할수 있겠지만 그들의 인간됨됨이나 의리에서는 흠잡을데가 없지 않은가 하는거요. 그러면 이런 질문이 제기될수 있겠지. 원시범군이 목격했다는 오기섭이나 그와 류사한 인물은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 또 북조선이 아니라 여기 서울에도 눈꼴사납게 노는 공산주의자들이 한둘이 아니지 않나. 그런건 나는 이 생물학박사인 김원학선생이 대답할수 있을것이라 보네.》

《내가요? 하하하.》 김원학은 손을 내흔들며 한길이나 뛰였다 떨어진다. 《생물학은 주의와 관계가 없습니다. 생물은 열과 빛과 수분이 있기만 하면 된다는것을 아시면서도. 하하하.》

《아, 저런 억지가 어데 있나. 자기 론문에 유전학은 환경에서 오는 변이를 배제하지 않으며 기형도 인정한다고 하구선.》

방안이 들썽하게 웃음이 터졌다. 그통에 어깨를 싸매고 끙끙 신음하던 원시범이도 흐드러지게 웃었다.

그때 대문쪽에서 초인종이 요란하게 울리였다. 사랑방에서 누가 나가는것 같더니 어멈이 쪽지 한장을 들고 들어왔다. 쪽지를 받아 든 원시범이 《양춘만!》하고 소리쳤다. 그통에 모두 눈이 둥그래져서 한마디씩 하였다.

《강선제강에 있던 야금기사가 아니요?》

《그 친구가 아인슈타인을 놀래웠다면서?》

《북에서 와서 붙잡아갔다고 했는데…》

원시범이 급히 마루로 나서는데 양춘만은 벌써 마당에 들어서서 맥고모를 벗어든다.

《아! 춘만군, 죽었는가 했는데 어떻게 이렇게 도깨비처럼 나타났는가. 이게 정말 양춘만이 옳긴 옳은가?》

안경쟁이 김원학이 목을 그러안는다.

솜무명으로 풍더분하게 여름옷을 지어입은 양춘만은 깍듯이 인사를 차리고 자리에 앉자 방안시선은 일시에 그에게로 쏠리였다. 이미부터 알고있었던것은 김원학이뿐이였지만 원시범은 물론이고 박문이나 그밖의 학자들도 모두가 그에 대한 여론을 듣고 잘 알고있었다. 물리학자인 송상도도 그렇고 언어학자인 윤시홍도 그러하였다. 이 이야기판에 이미 양춘만이 화제로 된것이 한두번이 아니였다. 강선제강소에서 친일분자를 타도할 때 용케 몸을 피했다는 이야기, 서울 친척집에 붙박혀 두문불출하고 무슨 인생설계를 짰다는 이야기, 틀림없이 미국이나 영국으로 건너가 그의 재능이 꽃피게 될것이라는 예측… 그랬었는데 문득 북에서 험상스럽게 생긴 사나이들이 나타나 모가지에 권총을 들이대서 끌어갔다는 등등이 론의되면서 그의 뒤생활과 전후련결에 대해서는 환상과 허구가 가미되여 그럴듯한 하나의 비극적인 줄거리가 만들어져있었다. 양춘만이 상의를 벗어놓고 부채질을 하면서 해방이 된지도 벌써 한해가 되였는데 그새 어떻게들 지내고있는가고 물었다.

그러자 원시범은 얼음에 재웠던 수박접시를 밀어주면서 여기 이야기는 차츰 들을셈치고 북의 소식이나 빨리 펼쳐놓으라고 하였다.

《그래 흥남에 있는 강병철이 어떻게 되였나요. 사형했겠지요?》 원시범이 첫째 알고싶던것을 물었다. 로시험에서 실패한것을 고의적암해행동이라고 보았으니까 살아남지 못했을것은 뻔한 일이다.

《사형?》

《그렇습니다.》

《지금 청진제강소 기사장으로 일하고있습니다. 며칠전에 특수강생산에서 성공했단 말이 있었습니다.》

《기사장이요?》 원시범은 도저히 믿을수 없었다. 《기사장이라면 공장주 다음가는 자리가 아닙니까?》

《그렇습니다. 나도 강선에서 그러쯤되는 자리에 있습니다만.》

《허어? 그래 최준걸이라는 산업국에 있었던 안경을 낀 그 사람은 어떻게 됐나요?》

《최준걸? 알만합니다. 북조선림시인민위원회가 나오면서 산업을 담당한것은 김책이구 그밑에서 책임적인 일을 보고있습니다.》

《광산에 목이 떨어져 내려가지 않구요?》

《그런 소린 듣지 못했습니다.》

《일제때 기술자를 다 없애치운다고 했는데 달라졌구만.》

《달라진게 없지요. 북조선에서 인테리를 어떻게 처리하는가 하는것은 이 양춘만을 보면 잘 알수 있습니다. 나는 며칠동안 여기서 일을 보고 다시 강선으로 돌아가겠습니다. 이쯤하면 무엇을 어떻게 하고있다는것이 명백하지 않습니까?》

방안사람들은 모두 아연해졌다. 여태 원시범이 말하던것과는 정 반대였다.


 

4

 

정작 이야기를 시작하고보니 끝이 없었다. 양춘만은 이마의 땀을 연방 훔쳐가며 8. 15를 맞아 대동강갈숲에 몸을 숨긴 그때로부터 박원식의 분묘앞에 엎드려 울던 그때까지를 조리있게 설명하였다. 계속해서 그는 장군님의 부르심을 받고 그이를 만나뵙던 이야기를 하면서 눈물을 흘리였다.

양춘만은 약간 게면쩍은 낯을 지었다가 그것을 인차 지워버리더니 어느 정도 당돌하면서도 도고한 기색을 보이며 다시 입을 열었다.

《기왕 말이 난김에 나자신에 대해서 똑똑히 말해두어야겠습니다. 그래야 여러분들이 가지고있는 의문이 완전히 풀릴것 같습니다. 나 양춘만이로 말하면 아버지가 지주인데다가 남달리 일제에게 충실히 복무했습니다. 그렇게 하는것이 나자신을 위한것이고 기술을 가진 내가 할 마땅한 행위로 보았던것입니다. 이것은 아마 여러분들이 어느 정도 알고있으리라고 봅니다. 그러나 누구보다도 내가 나자신을 잘 알고있기때문에 해방이 되자 나는 강선에서 이 서울로 도망쳐왔었습니다. 공산주의자들은 나를 절대로 용납하지 않을것이다, 또 나자신이 공산주의와 융합될수 없다, 이렇게 단정하고 나는 죽는 한이 있어도 공산치하에 끌려들어가지 않기로 결심했던것입니다. 처자까지 버리고말입니다.

그런데 박원식이라는 사람이 문득 나타나 북으로 가자고 하였습니다. 솔직히 말하면 나는 목숨이 아까워 그를 따라섰던것입니다. 그때 내가 북으로 가기를 거절하면 군대출신이라고 자기를 서슴없이 밝힌 그가 단방에 내 머리에 권총을 들이댈것으로 짐작했던것입니다. 그래서 나는 끌려가다가 기차에서 뛰여내려 도망쳤던것입니다. 그러나 나는 김일성장군님의 손길이 미친 내 가정사정을 알게 되고 또 내가 직접 장군님을 만나뵈옵고 눈을 뜨게 되였습니다. 진실을 알게 되였습니다. 그 진실에 의해 나의 신념이 생겼고 튼튼히 굳어졌습니다.

이만하겠습니다. 내가 체험한것을 말하자면 며칠을 두고 말해도 다 말할수 없습니다. 요는 뭐냐 하면 여러분들도 장군님을 한번 만나보라는것입니다. 그것이 불가능하면 장군님께서 정사를 펴시는 북조선땅을 한번 밟아보시오. 그러면 다 알게 될것입니다.》

처음에는 몇마디로 속심을 다 털어놓을수 있으리라고 생각했었는데 정작 시작하니 그렇게 되지 않고 흥분이 앞섰다. 그래 그는 끝을 잘 맺지도 못하고말았다.

《장군님을 만나보십시오. 꼭 만나보십시오. 나는 이 이상 권고할것이 없습니다. 사상과 인품이 위대하고 숭고할뿐아니라 인간으로서도 최대의 매력을 지니신분입니다.》

방안은 숨소리마저 들리지 않았다. 하나를 말하면 열, 스물을 헤아릴수 있는 그들이였기에 양춘만의 과정이자 곧 자기들의 행로로 될수 있다고 보기때문에 어느 말 한마디, 어느 세부 하나도 무심히 들어넘기지 못하였다. 건넌방 벽시계는 벌써 밤 2시를 알리였다.

원시범이 래일 다시 만나 이야기를 듣자고 해서야 모두 흩어지게 되였다.

양춘만은 원시범에게 량해를 구하고 박문이와 김원학을 불러세웠다.

《잠간 좀 실례하겠습니다. 저와 같이 온 사람이 선생님들을 조용히 만나고싶다는데 그에 응하실수 있겠습니까?》

그들은 쾌히 승낙하였다. 양춘만은 밖으로 나가 얼마간 있다가 키가 크고 점잖게 생긴 중년사나이를 데리고 들어왔다. 그는 소개를 하였다.

《이분은 이제 평양에 나오게 되는 김일성종합대학의 창립준비위원회에서 일을 보는 리용한선생입니다.》

《아! 그렇습니까?》 박문이 놀라움을 보이면서 손을 움켜잡으며 자기 소개를 하였다. 《저는 력사학을 전공하는 박문이올시다. 수고스럽게 오셨습니다. 신문에 난것을 보고 이미 알고는 있었습니다만 장군님의 존함으로 불리는 대학선생을 이렇게 직접 대면하게 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습니다. 이 서울에서는 대학교사에 미국군대가 들었는데 북에서는 없던 대학을 새로 내온다니 대조가 명백합니다.》

뒤이어 김원학이와 원시범이 인사를 하였다. 좌석은 정중하였다. 얼마간 인사말을 더 나눈 후에 리용한은 들고온 가방을 열고 눈부시게 흰 종이봉투를 하나 꺼내였다. 그 봉투안에는 그보다 작은 봉투가 또 들어있었다. 여러장의 봉투가운데서 이름을 골라잡더니 먼저 박문앞으로 내밀었다. 두손으로 정중히 받쳐 내든 봉투를 박문이 받아 속지를 꺼내들었다. 속지에는 활달한 필체로 몇줄 적혀있었다. 박문은 읽어내려갔다.

 

《위촉장, 박문선생귀하,

귀하에게 평양에 창립되는 김일성종합대학 교원을 위촉함.》

 

잠간 사이를 두었다가 그는 큰소리로 웨치였다.

《아! 김일성장군님께서 친히 서명하시였군요!》 봉투와 속지를 겹쳐든 박문의 손이 떨리기 시작하였다. 그는 눈을 내리감으면서 위촉장을 가슴에다 꽉 눌러대였다.

《제가 무엇이기에 이렇게 장군님께서 친히 불러주십니까. 장군님!》 감격에 목이 매여 끅끅 숨을 몰아쉬며 옆에서도 알아들을수 없는 혼자소리로 뭐라고 부르짖고있다.

뒤이어 김원학이도 같은 위촉장을 받아들었다. 김원학은 박문이 보다 나이도 젊었고 성미가 급한축이였다. 그는 위촉장을 받아쥐고 두번세번 거듭 읽고나서 묵묵히 지켜보고있는 리용한을 와락 그러안으며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어떻게 하면 우리가 장군님 품에 빨리 안길수 있습니까?》 하고 물었다.

리용한은 만족한 웃음을 지으며 《안내해드리겠습니다. 그것이 저의 임무입니다.》하고 눈물이 글썽해서 대답하였다.

처음부터 줄곧 양춘만이와 금시 나타난 리용한의 움직임을 지켜보고있던 원시범은 갑자기 머리를 푹 떨구었다. 그의 가슴속에서는 회오리바람이 일었다.

첫번째는 아니다 하더래도 두번째이거나 아니면 세번째쯤은 자기에게도 위촉장이 차례질것으로 믿고있었다. 그러나 약간 동안을 두었다가 《절커덕!》 소리가 나게 리용한은 가방을 접어 돌려놓는다. 기대를 가지고 그쪽의 손길을 뒤따르고있던 원시범은 가슴이 섬찍해났다. 물론 그는 북으로 가고싶은 마음으로 위촉장을 기다린것은 아니였다. 아직은 그쪽으로 인생의 발길을 다시 돌릴 결심은 서있지 않았다. 그러나 인젠 설사 북으로 가고싶어도 그렇게 할만한 자격마저 잃어버린 인간으로 되였다는 절망감이 온 넋을 사로잡았다. 그러자 부상당한 상처의 아픔이 되살아나면서 온몸을 쑤시였다. 그는 붕대를 동인 팔을 부둥키면서 신음소리를 내였다.

리용한은 실례했노라고 인사를 남기고 밖으로 나갔다. 원시범은 대문밖까지 따라나가 바래주면서 마지막순간에나마 자기에 대한 어떤 조언이 있을가 기대하였다. 그러나 리용한은 이쪽 마음을 전혀 아는것 같지 않게 무심히 떠나가버렸다. 원시범은 눈에 시뻘겋게 피가 져서 양춘만의 팔을 잡고 방안에 되돌아들어왔다. 박문이와 김원학은 각각 자기 집으로 돌아가고 단둘이 마주앉았다.

《양춘만씨! 나는 어쩌랍니까. 나는 어떻게 해야 되는가말입니다?》

원시범은 양춘만의 팔을 흔들며 부르짖고있다.

《어떨것이 있습니까. 본궁화학에서 당신을 기다리고있는데.》

《기다리고있다? 그게 사실인가요?》

《사실입니다!》

《아니, 그럴수 없습니다. 당신은 내 일을 너무나 단순하게 보고있는것 같습니다.》

《단순하게? 그러면 나보다 더 복잡한가요? 아니면 지금 청진제강소 기사장으로 가있는 강병철이보다 더 복잡한가요? 친일한것으로 말하면 조선의 지식인중에서 내가 첫자리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지요. 배반한것으로 말해도 최대의 죄악을 범했구요. 내가 자세히 말했지만 나때문에 항일투사 박원식동지가 희생되였어요. 뒤늦게나마 잘못을 깨닫고 무덤을 안고 울었지만 그게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한생 씻을수 없는 후회를 남기였습니다. 원씨, 당신도 더 큰 후회를 남기지 않겠거든 나와 함께 갑시다. 이번주 금요일 저녁차로 경성역에서 떠나겠습니다.》

양춘만이도 떠나갔다. 원시범은 앉지도 서지도 눕지도 못하고 날이 샐 때까지 방안과 마당에서 서성거리였다.

어느덧 닷새가 지나 양춘만이 떠나간다는 시각이 왔다.

원시범은 택시에 앉아 경성역으로 가고있었다.

승용차는 번화한 거리를 빠져서 경쾌하게 달리고있다. 원시범은 망막에 비쳐오는 모든것이 자극으로 되여 눈을 감고앉았다.

(나와 강병철은 어떻게 되여 이렇게 먼거리에 놓이게 되였는가?)하고 그는 생각하였다. 작년 이맘때에는 이 거리를 같이 걸었었다. 38°선을 함께 넘었다. 평양역에서 떠나는 북행렬차에 같이 올랐다. 그런데 무슨 차이가 이토록 합치기 어려운 각도와 거리를 만들어놓았는가? 양춘만이 말한것처럼 후회를 남기지 않기 위해 같이가자. 그렇다. 같이 갈수 있다. 그러나 내 마음은 어디에 깃들인단말인가. 어디에… 어디에… 무엇을 붙잡고 무엇에 지탱해서…

《다 왔습니다. 손님!》

택시가 멎었는데도 잠자코있는 손님을 운전수는 깨우는것이다. 대합실에 들어가니 박문이와 김원학이 그밖의 한 10여명의 학자들, 기술자들이 나와있었다. 그들은 모두 먼길차비들을 하였다. 수수한 작업복에 가방을 들기도 하고 배낭을 메기도 하였다. 어데도 양춘만은 보이지 않았다. 그는 이미부터 안면이 있는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면서 줄곧 사위를 살피였다. 확성기에서 북행렬차개찰이 시작된다고 알리였다. 기차손님들이 개찰구로 쏠리였다. 10여명 일행은 경찰의 눈을 피하기 위해 각각 흩어져나갔다.

그때 양춘만이 나들문쪽에서 뛰여왔다.

《나는 혹시나 해서 집에 들렸댔습니다.》하고 첫마디를 뗀 양춘만은 얼결에 《안가겠는가요?》하고 물으려다 말았다. 그앞에 서있는 원시범은 와이샤쯔바람이였고 손에 든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길차비가 아니였다. 길떠날 사람이라면 백추화를 데리고 왔을텐데 홀몸으로 나온것이다. 양춘만은 서둘러서 개찰구로 빠지는 줄에 들어섰다. 그런후에 그는 처량한 눈길로 멍청히 서있는 원시범을 쳐다보고있었다. 말로는 데려가주었으면 하는 은근한 눈치를 보이고있었지만 실지행동에서는 반대라는것이 알리였다. 비교해보면 양춘만 자기자신이 어둠이 내려덮인 캄캄한 평산벌을 내닫던 때와 비슷한 처지라고 볼수 있었다. 아직도 더 뼈아픈 심리적모대김을 겪어야 하고 쓰라린 고초를 맛보아야 할 사람이다.

원시범은 이 순간 불이 이는 마음을 누르며 쓸쓸한 눈길로 동료들을 바라보고있었다.

(이렇게 다들 떠나버리면 이 험지에서 혼자 어떻게 살아간단말인가!)

생각할수록 가슴이 막막하였다.

그래도 이남땅에 와서 말동무라도 되여주던 사람들이란 이들뿐이였다. 이제 이들마저 훌쩍 떠나버리면 누구와 더불어 울적한 심정을 나누며 간단치 않은 인생의 앞날을 함께 론할것인가. 단 몇달 체험한바이지만 남조선세상이란 인젠 불을 보듯 뻔하다. 바다물을 다 마셔야 바다물이 짜다는것을 알겠는가. 이제 이놈의 땅에선 일제시대의 현대판이 부활되여 일본놈 대신 햄스 같은자들에게 굽신거리며 사는 굴종과 치욕의 길밖에 차례질것이 없을것이다. 그런데 그 굴욕마저 인젠 외롭게 홀로 남은 연약한 몸으로 지탱해야 한단말인가. 북에도 정신적으로 의탁할데가 없다면 과연 이곳에는 그러한 지탱점이 어데 있단말인가! 남북조선의 넓으나넓은 땅에 이 자그마한 인테리의 넋이 깃들일 한쪼박의 보금자리조차 없단말인가. 북에도 못붙고 이남에도 못붙고 인젠 동료들과도 헤여져 고독하게 살아야 하니 왜 유독 나만이 이런 눈물겨운 운명의 희롱을 당해야 하며 유독 나만이 세상의 이런 쓰디쓴 배척을 받아야 하는가. 아니야. 이렇게는 못살아. 이제라도 같이 가자고 해본다? 아마 나만 결심하고 같이 가자고 말하면 양춘만이도 선뜻 동의해나설것이다. 그가 받은 임무가 그런것이 아닌가. 까짓거 강병철이도 최준걸이도 그리고 저 양춘만이도 다시 생각하고 택한 길인데 나라고 그렇게 못한단 법이야 없지 않는가…

《빽!》

기적소리가 울리자 홈은 갑자기 부산스럽게 설레이기 시작하였다. 호각소리, 고함소리, 울음소리… 양춘만이도 차에 오르려고 한다.

원시범의 가슴은 널뛰듯 한다. 이 순간을 놓치면 모든것이 끝장이다. 그는 와락 달려들어 양춘만의 손목을 끌어당기였다.

《나는 나는 어떻게 하랍니까? 이렇게 다 데리고 가면 미군이 살판치는 남조선땅에서 어떻게 혼자 살랍니까!》

설음에 겨워 온몸이 사시나무 떨듯 한다. 그는 양춘만의 손목을 놓칠가봐 으스러지게 거머쥐고 흔들었다. 이제 이 손목마저 놓치는 날에는 영영 모든것과 헤여져 천길나락으로 굴러떨어질것 같았다.

《양춘만씨, 나도 데려다주시오. 나도!》

양춘만은 측은하고 동정이 어린 눈길로 그를 바라보았다.

《당신의 마음만은 알고 가겠습니다. 그러나 당신의 육신은 끌고가지 못하겠습니다. 당신한테는 자기 몸을 옮겨놓을만한 의지가 아직 보이지 않습니다. 그 의지는 김일성장군님을 믿고 따르는 신념에서 생기는것이지요. 나도 한때 그것이 없었기때문에 육신은 끌려가면서도 마음만은 되돌아서서 배신과 치욕의 길로 줄달음쳤던것입니다. 늦어져도 좋으니 꼭 그 의지를 찾아가지고 우리에게로 다시 오시오. 기다리겠습니다.》

양춘만은 사람들틈에 끼워 객차칸으로 올라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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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산님의 댓글

강산 작성일

(위에서 계속)

기적소리가 다시 울리였다. 덜커덕 하고 차바퀴 드티는 소리가 나는가 했는데 어느새 렬차의 꼬리가 시야에서 사라지고말았다. 가슴이 찢어지는것 같아 플래트홈의 기둥을 붙잡고 모지름을 쓰던 원시범은 아스레하게 들리던 기적소리가 저 멀리 공간에 잦아드는것과 함께 자기 의식도 차차 그속에 묻히고만다는것을 깨달았다. 다음 순간 그는 맥없이 딱딱한 콩크리트바닥에 털썩 쓰러지고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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