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벽예감 401] 믿을 수 없는 개전전황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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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벽예감 401] 믿을 수 없는 개전전황보고
<차례>
1. 군사정보를 독점통제한 미국군사고문단
2. 믿을 수 없는 개전전황보고
3. 원동군사령부 군사정보단의 정보보고서
4. 북진공격으로 일어난 국지적 내전
5. ‘서울해방작전’과 3일 간의 평온
6. 대남군사행동계획은 확대회의에서 비준된다
1. 군사정보를 독점통제한 미국군사고문단
사람들의 기억에 남아있지 않지만, 2020년 7월 1일은 미국군사고문단이 창설된 때로부터 71주년이 되는 날이다. 미국 육군성은 주한미국군철수를 완료한 이튿날인 1949년 7월 1일 약 500명으로 이루어진 군사고문단을 서울에 설치했다. 군사고문단의 정식명칭은 ‘대한민국 주재 미국군사고문단(United States Military Advisory Group to the Republic of Korea)'이다. 이 글에서는 미국군사고문단이라는 약칭을 쓴다.
미국군사고문단이 한국군을 어떻게 지휘통제하였는가 하는 문제는 한국군의 경험을 통해 파악할 수 있다. 이를테면, 1950년 당시 개성지구에 주둔한 한국군 제1보병사단은 미국군 제1군단에 배속되었다. 당시 제1보병사단만 미국군 밑에 들어간 것이 아니라, 한국군 전체가 미국군 밑에 들어갔다. 당시 한국군에는 합동참모본부가 없었기 때문에 미국군 밑에 들어가는 수밖에 없었다.
한국군 합동참모본부는 1990년 10월 1일에 창설되었다. 그러므로 1948년에 창군된 이래 1990년까지 42년 동안 한국군은 주한미국군사령관의 직접적인 지휘통제를 받아온 것이다. 1990년 10월 1일 한국군 합동참모본부가 창설되었지만, 지금도 한국군 작전통제권은 여전히 주한미국군사령관이 장악, 행사한다.
1950년 6월 당시 미국군 제1군단장 프랭크 밀번(육군 소장)은 자기 군단에 배속된 한국군 제1보병사단을 공식적으로 지휘통제하고 있었지만, 그 사단을 현지에서 사실상 지휘통제한 지휘관은 미국 육군 중령 로이드 로크웰이었다. 1950년 당시 한국군 제1보병사단 사단장이었던 백선엽이 2010년에 남긴 회고록을 보면, 로크웰은 수석고문이라는 군직을 가지고 한국군 제1보병사단을 사실상 지휘통제했음을 알 수 있다. 당시 미국군사고문단은 수석고문 밑에 작전고문, 정보고문, 통신고문, 군수고문, 군단연락장교, 공지(空地)연락장교, 연대고문 등 10명을 두고 한국군을 지휘통제했다.
그런데 충격적인 것은, 어깨에 별을 단 한국군 사단장들이 미국군 중령의 지휘통제를 받는 치욕을 당연한 일로 여기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인간으로서 지켜야 할 존엄과 자존심마저 내던지고 미국군에게 매달린 것이야말로 한국군이 겪은 불행과 비극이었다.
70년 전에만 그런 게 아니었다. 미국군사고문단이 창설된 때로부터 오늘까지 71년 동안 한국군 작전통제권은 변함없이 주한미국군사령관의 손아귀에 있다. 몇 해 전부터 미국이 한국군 작전통제권을 돌려주겠다고 하는데도, 한국군은 아직 돌려받을 준비가 되지 않았다느니 또는 ‘철통같은 혈맹’은 영원하다느니 뭐니 하면서 미국군의 작전통제를 계속 받으려고 한다. 미국의 발밑에서, 미국에게 머리를 조아리며 사는 한, 이 땅에서는 진정한 민주주의도 실현될 수 없고, 조국통일도 실현될 수 없다.
돌이켜보면, 미국군사고문단은 1949년 7월 1일부터 군사정보를 독점통제했다. 당시 한국군 전투부대에 파견된 미국군사고문단 정보고문이 수집한 군사정보는 수석고문을 통해 미국군사고문단 본부에 직보되었다. 이런 사정은 미국군사고문단이 6.25전쟁과 관련된 모든 군사정보를 독점통제하였음을 말해준다.
1950년 6월 25일 오전 4시 조선인민군이 38도선 전역에서 한국군에게 총공격을 개시했다는 개전전황보고는 미국군사고문단이 작성한 것이다. 미국군사고문단은 당일 오전 4시 조선인민군이 38도선 전역에서 한국군에게 총공격을 개시했다는 짤막한 전황보고를 당시 주한미국대사 존 무초에게 통보했다. 무초는 자기가 받은 전황보고를 워싱턴으로 급히 타전했다. 미국군사고문단이 작성한, 6.25전쟁 개전전황보고는 사람들이 전혀 의심하지 않는, 아니 의심해서는 안 되는 역사적 사실로 굳어졌다.
그러나 사람들이 역사적 사실로 믿고 있는 6.25전쟁 개전전황보고는 객관적으로 입증된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미국군사고문단은 1950년 6월 25일 오전 8시까지만 해도 그날 새벽에 38도선 어느 지역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알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조선인민군이 1950년 6월 25일 오전 4시에 38도선 전역에서 한국군에게 총공격을 개시했다는 역사기록은 미국군사고문단이 적당히 가공처리한 개전전황보고가 역사적 사실로 굳어진 것이다.
미국과 남측의 정치권과 학계, 언론계 등에서 활동하는 우익학자들과 우익선동가들은 미국군사고문단이 가공처리한 개전전황보고에 의거하여 6.25전쟁 개전상황을 왜곡했다. 6.25전쟁 70주년을 맞이한 오늘 그 전쟁의 개전상황을 새로운 시각에서 재검토하려는 까닭이 거기에 있다. <사진 1>
2. 믿을 수 없는 개전전황보고
1950년 6월 25일에 펼쳐진 급박한 상황으로 돌아가 보자. 백선엽의 회고록에 따르면, 1950년 6월 25일 당시 서울 신당동 자택에 있었던 그는 38도선 무력충돌이 일어났다고 알려주는 전화를 당일 오전 7시경에 받았다고 한다. 누가 백선엽에게 그런 중대한 정보를 알려주었는가 하는 문제는 6.25전쟁 개전상황을 파악하는 데서 결정적으로 중요한데, 백선엽은 누가 자기에게 그런 정보를 전해주었는지 밝히지 않았다.
백선엽은 1950년 6월 25일 이른 아침 자신이 겪었던 다음과 같은 경험담을 회고록에 서술했다. 신원이 알려지지 않은 사람으로부터 다급한 전화를 받은 백선엽이 서울 용산에 있는 한국군 육군본부에 가려고 자기 집을 나선 시각은 오전 7시 10분경이었다. 백선엽이 육군본부 청사 2층에 있는 육군참모총장실로 올라갔더니 육군참모총장 채병덕과 장교 7~8명이 방안에서 “서성대고 있었다.” 회의를 하고 있었던 것이 아니라 방안에서 서성대고 있었다는 것은, 당시 한국군 지휘부가 38도선 무력충돌상황을 정확히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음을 말해준다. 모든 군사정보를 미국군사고문단이 독점통제하고 있었으므로, 한국군 지휘부는 미국군사고문단으로부터 군사정보를 제공받기 전에는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모르는 까막눈 신세였다.
전선으로 급히 돌아가라는 채병덕의 호통을 듣고 밖으로 나온 백선엽은 한국군 제1보병사단 수석고문 로이드 로크웰부터 찾았다. 왜냐하면 백선엽은 사단장이라는 군직만 가지고 있었고, 사단을 지휘통제하는 진짜 지휘관은 로크웰이었기 때문이다.
일요일이었던 1950년 6월 25일 이른 아침, 로크웰은 한국군 육군본부 인근에 있는 미국군사고문단 사택에서 아직 잠을 자고 있었다. 백선엽이 로크웰의 집으로 달려가 문을 두드렸더니, 잠에서 깨어난 부스스한 얼굴로 문을 열어준 그는 “전쟁이 터졌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백선엽과 로크웰이 군용차를 타고 서울 서대문구 수색에 있는 한국군 제1보병사단 사령부에 도착한 시각은 오전 9시경이었다.
위와 같은 정황을 보면, 1950년 6월 25일 오전 9시까지 미국군사고문단은 군사고문들에게 개전상황에 관한 정보를 알려주지 못하고 있었고, 개전상황에 대처할 긴급명령도 내리지 못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당시 로크웰은 한국군 제1보병사단 수석고문으로서 개성-문산-파주-고양-서울로 이어지는 제1축선에서 전략임무를 수행하는 한국군 제1보병사단을 지휘통제하였는데, 그처럼 중요한 군직에 있는 그가 당일 오전 9시까지 개전상황을 몰랐으므로, 미국군사고문단도 개전상황을 파악하지 못한 것이 분명하다.
미국군사고문단은 한국군 사단, 여단, 연대마다 군사고문을 10명씩 파견하여 한국군을 지휘통제했는데, 백선엽의 회고록에 따르면, 당시 개성지구에 주둔한 한국군 제1보병사단 제12연대의 작전고문은 미국 육군 대위 조섭 대리고였다. 서울 서대문구 수색을 떠난 백선엽과 로크웰이 경기도 파주군 파주국민학교에 있는 한국군 제1보병사단 전방지휘소에 도착한 때는 1950년 6월 25일 오전 10시경이었다. 백선엽은 회고록에서 자신과 로크웰이 오전 9시경에 수색에 있는 한국군 제1보병사단 사령부에 도착했고, 오전 9시 30분경 파주에 있는 한국군 제1보병사단 정부지휘소에 도착했다고 썼지만, 오전 9시경 수색에 있는 사단 사령부에 도착하여 잠시 머문 뒤에 그곳을 출발하여 오전 9시 30경에 파주에 있는 사단 전방지휘부에 도착하는 것은 물리적으로 불가능하였다. 백선엽과 로크웰은 오전 10시가 거의 다 되어서야 파주에 있는 사단 전방지휘부에 도착한 것으로 보인다.
백선엽과 로크웰은 개성쪽에서 포성이 들리고 검은 연기가 자욱하게 피어오르는 광경을 바라보면서 한국군 제1보병사단 다른 지휘관들과 함께 임진강 철교 남단까지 나가보았다. 그런데 바로 그때 한국군 제1보병사단 제12연대 작전고문 조섭 대리고가 신발조차 신지 못한 맨발로 자기 군용차를 몰고 “뭔가 겁에 잔뜩 질린 표정”으로 허겁지겁 패주해왔다. 황망히 패주하다가 임진강 철교 남단에서 뜻밖에 로크웰 일행과 마주친 대리고는 “숨이 넘어갈 듯 말을 제대로 잇지도 못”하면서 “큰일났다. 적들이 이미 기차로 개성역에 도착했다”고 말했다.
포성이 차츰 가깝게 들려오는 긴박한 상황에서 백선엽과 로크웰은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엉거주춤하고 있었는데, 바로 그때 미국군사고문단 최고지휘관 월리엄 로벗츠(육군 준장)의 첫 명령이 작전현장에 하달되었다. 백선엽의 회고록에 따르면, 윌리엄 로벗츠는 최전방 한국군 전투부대들에 파견된 미국군사고문들에게 “모두 철수하라는 명령”을 내렸다고 한다. 철수명령을 받은 로크웰은 백선엽과 작별인사를 나누고 서울로 발길을 돌렸는데, 자기들을 버리고 떠나는 로크웰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억장이 무너진 백선엽은 “눈물을 흘리고 말았다.”
위에 서술한 정황을 보면, 미국군사고문단은 1950년 6월 25일 개전상황을 정확히 파악하지 못한 것이 분명하다. 그러므로 1950년 6월 25일 오전 4시 조선인민군이 38도선 전역에서 한국군에게 총공격을 개시했다는 미국군사고문단의 전황보고는 전혀 믿을 수 없는 것이다. 조선인민군이 공격을 개시했다는 공격주체에 관한 보고도 믿을 수 없고, 오전 4시에 공격이 개시되었다는 공격시각에 관한 보고도 믿을 수 없으며, 38도선 전역에서 총공격이 개시되었다는 공격범위에 관한 보고도 믿을 수 없다. <사진 2>
3. 원동군사령부 군사정보단의 정보보고서
1950년 6월 25일 개전상황을 좀 더 정확하게 서술한 전황보고는 그로부터 2년이 지나서야 나왔다. 미국 원동군사령부 군사정보단이 1952년 7월에 작성한 정보보고서는 조선인민군 포병부대가 38도선 남쪽으로 포사격을 개시한 시각이 1950년 6월 25일 오전 4시 40분이었고, 그로부터 약 20분 동안 포사격이 계속되다가 오전 5시경부터 조선인민군 보병부대가 38도선을 넘어 한국군을 공격했다고 기록했다.
그런데 미국국립문서기록관리청에서 역사자료를 조사한 한국군사연구소 소속 연구원은 미국 원동군사령부 군사정보단이 1952년 7월에 작성한 정보보고서에서 6.25전쟁 개전상황에 관한 다음과 같은 새로운 사실들을 더 알아냈다.
1) 오전 6시경 서울의 미국군사고문단은 일본 도꾜의 원동군사령부에게 무선통신을 통해 38도선 전황을 처음 보고했다. (당시 미국군사고문단은 38도선 전투현장에서 올라오는 보고를 통해 전황을 확인하지 못했기 때문에, 첫 전황보고는 38도선 개전상황에 관한 정확한 보고가 아니었고, 38도선에서 무력충돌이 일어났다는 정도의 간략한 보고였다.)
2) 오전 7시경 미국군사고문단 참모회의가 소집되었다. 참모회의에서는 1950년 6월 25일 새벽 조선인민군이 “대규모 수색정찰”을 하던 중 한국군과 무력충돌을 벌인 것으로 판단했다. (조선인민군이 대규모 수색정찰을 하던 중에 우발적인 무력충돌이 일어났다는 미국군사고문단의 최초 판단은 그로부터 약 3시간 뒤에 조선인민군이 38도선 전역에서 총공격을 개시했다는 전황보고로 둔갑했다.)
3) 오전 9시경 미국군사고문단은 황해남도 옹진지구에 주둔한 한국군 제17독립보병연대로부터 옹진이 조선인민군에게 점령당했다는 보고를 받았다. (옹진이 함락되었다는 보고를 받은 미국군사고문단 최고지휘관 월리엄 로벗츠는 최전방 한국군 전투부대들에 파견된 군사고문들의 신변위험을 직감하고, 그들에게 전원 철수하라는 긴급명령을 내렸다. 위에 서술한 것처럼, 로크웰도 로벗츠의 철수명령을 받았는데, 그 때는 오전 10시가 지난 시각이었다.)
4) 오전 10시경 미국군사고문단은 서울에 주재하는 당시 주한미국대사 존 무쵸에게 38도선 전황을 통보했다.
미국군사고문단으로부터 38도선 전황을 통보받은 무쵸는 미국 육군성에 긴급히 전문을 보냈는데, 그 전문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들어있었다. “(전략) 오전 4시경 옹진에서 북조선군의 포사격으로 행동이 개시되었다. 오전 6시경 북조선 보병부대가 옹진지구, 개성지구, 춘천지구에서 38도선을 넘어오기 시작했고, 동해안 강릉 남쪽에서 (조선인민군의) 해안상륙이 있었다는 보고도 있다. (중략) 공격의 성격과 방식을 보면, 전면적인 공격으로 보인다.” 위에서 지적한 것처럼, 미국군사고문단은 당일 오전 7시경 조선인민군이 대규모 수색정찰을 하던 중에 우발적인 무력충돌이 일어났다고 판단했는데, 그로부터 약 3시간 뒤에 그들은 조선인민군이 전면공격으로 보이는 공격을 개시했다는 전혀 다른 전황보고를 무초에게 통보한 것이다.
무초의 전문에서 주목되는 것은 1950년 6월 25일 새벽 38도선 전역에서 동시다발적인 무력충돌이 일어난 것이 아니라 옹진지구에서 시작된 무력충돌이 시차를 두고 개성지구와 춘천지구로 차츰 확대되었다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6.25전쟁 개전상황을 파악하려면, 당일 새벽 옹진지구에서 무력충돌이 어떻게 시작되었는지를 알아야 한다.
그런데 미국군사고문단은 당일 새벽 옹진지구에서 무력충돌이 어떻게 시작되었는지를 알 수 없었다. 왜냐하면 옹진지구에 주둔한 한국군 제17독립보병여단 미국군사고문들은 1950년 6월 25일 당시 옹진에서 멀리 떨어진 서울에 있었기 때문이다. 백선엽이 회고록에 서술한 것처럼, 한국군 제1보병사단 수석고문 로크웰도 1950년 6월 25일 당시 개성에서 멀리 떨어진 서울에 있었다.
미국군사고문들은 왜 서로 약속이나 한 것처럼 6월 25일 아침 서울에 모여 있었을까? 한국군 최전방부대들에 배치된 미국군사고문들은 주말마다 최전방을 떠나 서울에 가서 휴일을 즐겼다. 토요일이었던 1950년 6월 24일 밤 서울에서는 한국군 장교구락부 개설을 축하하는 연회가 열렸는데, 미국군사고문들은 그 연회에서 술과 춤을 마음껏 즐기다가 곯아떨어진 상태에서 6월 25일 새벽을 맞았던 것이다. 그래서 미국의 역사학자 브루스 커밍스는 1997년 미국 뉴욕에서 출판된 자신의 책 ‘코리아의 양지바른 곳(Korea's Place in the Sun)’에서 개전당일 38도선 최전방에 미국군사고문이 없었다고 서술했다.
하지만 예외가 있었다. 개성지구에 주둔한 한국군 제1보병사단 제12연대에 작전고문 조섭 대리고가 1950년 6월 25일 최전방에 남아있었다. 그가 왜 서울에 가지 주말을 즐기지 않고, 개성에 남아있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는 개전당일 최전방에 남아있었던 유일한 미국군사고문이었다. 그렇지만 개전당일 개성에 있었던 대리고는 옹진에서 무력충돌이 어떻게 시작되었는지 알 수 없었다. <사진 3>
4. 북진공격으로 일어난 국지적 내전
그러면 1950년 6월 25일 새벽 옹진지구 무력충돌은 어떻게 일어났을까? 이 중요한 물음에 대한 해답은 브루스 커밍스의 책 ‘코리아의 양지바른 곳’과 최태환의 책 ‘젊은 혁명가의 초상’에서 찾아볼 수 있다. 1950년 6월 25일 개전당일 최태환은 조선인민군 제6보병사단 제13연대 정치보위부 책임장교로 개성전투에 참가했는데, 그는 자기의 전쟁경험을 1989년 서울에서 출판된 책 ‘젊은 혁명가의 초상’에 남겼다.
1) 1950년 6월 23일 밤 한국군 제17독립보병연대의 은파산 공격
ㄱ. 최태환의 회고담에 따르면, “숨막히는 긴장감이 계속되는 가운데 (조선인민군) 15연대가 주둔하는 옹진반도로부터 백인엽이 이끄는 국방군 17연대 맹호부대 병력이 은파산을 폭격(포격을 폭격으로 오기했음-옮긴이)하기 시작했으며, 곡사포와 박격포가 동원된 소규모의 전투가 벌어졌다는 속보가 날아왔다.” 최태환은 은파산 전황속보를 1950년 6월 24일에 수신한 것으로 기억했다.
ㄴ. 평양라디오방송의 6월 26일 전황보도를 인용한 커밍스의 서술에 따르면, 1950년 6월 23일 오후 10시 옹진에 주둔하는 한국군 제17독립보병연대가 곡사포와 박격포로 옹진지구 은파산에 있는 조선인민군 진지를 공격했고, 전투는 6월 24일 오전 4시까지 계속되었다.
2) 1950년 6월 25일 새벽 한국군 제17독립보병연대의 두락산 공격
ㄱ. 평양라디오방송의 6월 26일 전황보도를 인용한 커밍스의 서술에 따르면, 6월 25일 오전 2시 또는 3시경 한국군 제17독립보병연대 맹호부대가 옹진지구 두락산에 있는 조선인민군 진지를 공격했다.
ㄴ. 최태환의 회고담에 따르면, 한국군 제17독립보병연대가 은파산을 공격했다는 전황속보가 있었고, “이어서 옹진반도의 두락산이 공격당하고 있다는 정보로 이어졌다”고 한다. (그는 은파산 전황속보를 수신한 시각과 두락산 전황속보를 수신한 시각을 명확히 구분하지 않고, “이어서”라는 말로 뭉뚱그려놓았는데, 한국군 제17독립보병연대의 은파산 공격과 두락산 공격은 약 20시간의 시차를 두고 일어났다.)
3) 1950년 6월 25일 오후 한국군 제17독립보병연대의 해주 점령
ㄱ. 평양라디오방송의 6월 26일 전황보도를 인용한 커밍스의 서술에 따르면, 6월 25일 오후 2시 30분 한국군 제17독립보병연대는 38도선을 넘어 수동으로 진격했다. (한국군 제17독립보병연대 맹호부대가 38도선을 넘어 수동으로 북진하여 해주를 점령했으나, 평양라디오방송은 해주가 점령당했다는 사실을 보도하지 않았다.)
ㄴ. 커밍스의 서술에 따르면, 1950년 6월 26일 <뉴욕타임스>, <워싱턴포스트>, <뉴욕헤럴드트리뷴>은 한국군 2개 대대가 6월 25일 38도선 이북에 있는 해주를 점령했다고 각각 보도했다.
ㄷ. 커밍스의 서술에 따르면, 주일영국대사관 소속 무관이 1950년 6월 27일 본국에 보낸 전문은 한국군 대대가 6월 25일 38도선 이북에 있는 해주를 점령했다는 사실을 기록했다. (6.25전쟁이 일어나기 전, ‘실지회복’이라는 전략목표를 내건 이승만 친미파쇼정권과 한국군 지휘부는 “아침은 해주에서, 점심은 평양에서, 저녁은 신의주에서 먹겠다”는 북진공격구호를 외치고 있었다. 그러므로 한국군 제17독립보병연대가 6월 25일 38도선을 넘어가 해주를 점령한 것은 우발적인 군사행동이 아니라 작전계획에 의거한 북진공격이었다.)
2020년 6월 22일 <자주시보>에 실린 나의 글 ‘군사상황은 매우 엄중하다’에서 서술한 것처럼, 은파산, 두락산, 국사봉, 해주를 포괄하는 옹진지구는 1949년 4월 29일부터 11월 15일까지 38도선 무력충돌이 치렬하게 벌어진 격전지였다. 당시 한국군 육군본부는 38도선 무력충돌이 언제나 조선인민군의 공격으로 일어난 것처럼 발표했지만, 그것은 사실이 아니다. 브루스 커밍스의 분석에 따르면, 조선인민군의 공격으로 일어난 무력충돌보다 한국군의 공격으로 일어난 무력충돌이 더 많았다.
옹진지구에서 한국군이 북진공격을 할 수 있었던 것은, 당시 옹진지구에 주둔한 한국군 제17독립보병연대가 육군본부 직할부대로서 무장력이 강했기 때문이다. 로씨야 군사역사학자들인 볼꼬브스끼와 뻬뜨로바가 공동으로 집필하여 2000년 쌍끄뜨 뻬쩨르부르그에서 발표한 논문 ‘조선에서의 전쟁에 대한 쏘비엣 관점(Soviet View of the War in Korea)'에 따르면, 1950년 6월 25일 당시 옹진지구에 주둔한 한국군 제17독립보병연대는 병력과 화력에서 그 지구에 주둔한 조선인민군 보병대대보다 더 강했다. 옹진지구에 주둔한 쌍방의 무장력을 비교하면 다음과 같다.
| 한국군 | 조선인민군 |
대대
| 4개 대대 | 1개 대대 |
전차와 자행포
| 없음 | 5대 |
견인포와 박격포
| 5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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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목록
강산님의 댓글
강산 작성일
(위에서 계속)
27문
위의 비교표가 말해주는 것처럼, 당시 한국군 제17독립보병연대는 비록 전차와 자행포를 갖지는 못했지만, 다른 무장력은 압도적으로 강했다. 당시 조선인민군 전투부대는 소련에서 생산된 T-34 중형 전차와 76mm 포를 탑재한 SU-76 자행포를 운용하였는데, 옹진지구에는 5대만 배치되었다.
한국군 제17독립연대는 1950년 6월 23일 오후 10시 은파산에 있는 조선인민군 진지에 포사격을 개시했고, 6월 25일 오전 2시 또는 3시경에는 두락산에 있는 조선인민군 진지에 포사격을 개시했고, 38도선을 넘어 수동으로 진격하여 해주를 점령했다. 그들의 옹진지구 북진공격은 1950년 6월 25일 전쟁을 일으킨 결정적인 요인이다.
그러면 옹진지구 북진공격은 어떻게 국지전으로 확대되었을까? 한국군의 공격을 받은 조선인민군은 옹진지구에서 반격전을 벌인 것은 물론, 개성지구에서도 전투에 돌입했다. 개성 북쪽에 주둔한 조선인민군 제6사단 제13연대와 제15연대는 개성 남쪽에 주둔한 한국군 제1보병사단 제12연대를 향해 포사격을 개시했다. 브루스 커밍스가 자신의 책 ‘코리아의 양지바른 곳’에 서술한 바에 따르면, 한국군 제1보병여단 제12연대 작전고문 조섭 대리고가 포성에 놀라 잠이 깬 시각은 6월 25일 오전 5시 30분경이었고, 조선인민군 제6사단 제13연대와 제15연대가 개성을 점령한 시각은 오전 9시 30분경이었다. 개성전투는 약 4시간 동안 계속되었다. 약 4시간 만에 한국군 방어선이 무너지고 조선인민군 보병부대가 개성 시내로 진격해오자, 대리고는 너무 급해서 신발도 신지 못한 채 자기 군용차를 몰고 개성 남쪽에 있는 한국군 제1보병사단 제12연대 본부로 피신했다.
1950년 6월 25일 한국군 제17독립보병연대가 옹진지구에서 38도선을 넘어 해주를 점령한 것에 대한 보복으로, 같은 날 조선인민군 제6사단 제13연대와 제15연대는 개성지구에서 38도선을 넘어 개성을 점령했다. 옹진지구에서 벌어진 소규모 무력충돌은 그렇게 동쪽으로 옮아가면서 전쟁으로 확대된 것이다.
주목되는 것은, 1950년 6월 25일 새벽 옹진지구에서 시작되어 개성지구와 춘천지구로 확대된 38도선 무력충돌이 국지전이었다는 사실이다. 1950년 6월 25일 국지전이 일어났다는 사실을 입증하는 자료를 제시한 사람은 미국 육군 군사연구소 실장이었던 로이 애플먼이다. 그는 1961년 미국 워싱턴에서 발행된 책 ‘남으로 낙동강, 북으로 압록강(South to the Nakdong, North to the Yalu)’에서 1950년 6월 25일 38도선 무력충돌에 투입된 조선인민군 병력이 38,000명이었다는 사실을 밝혔다. 당시 38도선에 배치된 한국군 병력은 약 50,000명이었는데, 조선인민군은 6월 25일에 38,000명밖에 동원하지 않았으므로, 전면전이 아니라 국지전이었다. 또한 당시 조선인민군 육군 병력은 175,000명이었는데, 그 중에서 6월 25일에 38,000명밖에 동원하지 않았으므로, 전면전이 아니라 국지전이었다. 또한 당시 조선인민군은 지상공격기 일류신-10 93대를 실전배치했는데, 6월 25일에 지상공격기가 단 한 대도 전투에 참가하지 않았으므로, 전면전이 아니라 국지전이었다. 일류신-10은 23mm 기관포 2문이 장착되었고, 무유도 로켓탄 4발과 100kg짜리 폭탄 4발을 탑재하고, 시속 310km의 속도로 날아가는 지상공격기인데, T-34 전차보다 훨씬 더 강한 공격력을 가졌다.
위에 열거한 사실들을 보면, 조선인민군은 1950년 6월 25일에 전면전계획에 따라 개전한 것이 아니라, 옹진지구 무력충돌이 확대된 것에 따라 국지전을 개시한 것이었음을 알 수 있다. <사진 4>
▲ <사진 4> 1950년 7월 초 인천 방어전에 참가한 한국군 전투원들을 촬영한 사진이다.카빈총을 들고 달려가는 전투원들 옆에 한자로 쓴 치과의원 간판이 보인다. 6.25전쟁은 황해남도 옹진지구에서 6월 23일 밤부터 6월 25일 새벽까지 계속된 한국군 제17독립보병연대의 북진공격이 해주점령으로 이어지면서 38도선 다른 지역들에서 조선인민군의 반격전을 촉발시켰고, 그렇게 되어 격화된 국지적 내전으로 시작되었다. 6월25일 한국군 제17독립보병연대가 해주를 점령한 것에 대한 보복으로 조선인민군 제6사단 제13연대와 제15연대는 개성을 점령했다. 옹진지구에서 벌어진 소규모 무력충돌은 그렇게 동쪽으로 옮아가면서 국지적 내전으로 확대되었다.
5. ‘서울해방작전’과 3일 간의 평온
1950년 6월 25일 새벽 옹진지구에서 한국군의 북진공격으로 일어난 소규모 무력충돌이 다른 지역으로 확대되면서 일어난 국지전에 참가한 조선인민군 전투부대들은 작전계획에 따라 한국군 방어선을 돌파하고 서울을 향해 진격했다. 당시 조선인민군의 작전계획은 38도선 이남 전역을 점령하는 것이 아니라 서울을 점령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6.25전쟁은 국지전으로 일어난 것이었다.
북의 공식용어를 빌리면, 1950년 6월 25일에 일어난 국지전은 ‘서울해방작전’이다. 만일 1950년 6월 25일에 일어난 전쟁이 서울을 ‘해방’하는 국지전이 아니라 38도선 이남 전역을 ‘해방’하는 전면전이었다면, 북에서는 그 전쟁을 ‘남조선해방작전’이라고 불렀을 것이다.
1948년 9월 8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최고인민회의 제1기 제1차 회의에서 채택된 헌법 제103조에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수부는 서울시”라고 명기되었다. 북이 자기의 수도를 서울에서 평양으로 변경한 날은 1972년 12월 27일이다. 그날 최고인민회의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수도를 서울에서 평양으로 변경한 사회주의헌법을 채택했다. 그러므로 북의 시각에서 보면, 1950년 6월 25일 당시 자기의 수도인 서울이 반란세력에게 점령되어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반란세력이 점령한 수도를 탈환하는 ‘서울해방작전’은 북에게 더 이상 뒤로 미룰 수 없는 중대과업이었다. 이런 맥락을 이해하면, 1950년 6월 25일에 일어난 국지전은, 북의 표현을 빌리면, “이승만 괴뢰도당이 점령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수도 서울을 해방하는” 제한적 해방전쟁이었음을 알 수 있다.
1950년 6월 25일 개성전투에 참가한 조선인민군 제6보병사단 제13연대 지휘관들 중에는 정치보위부 책임장교였던 최태환도 있었다. 그는 자신의 책 ‘젊은 혁명가의 초상’에서 6월 25일을 전후하여 자신이 겪었던 경험을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1950년 6월 23일 조선인민군 제6보병사단 소속 대대장급 이상 군관들은 송악산 골짜기에 임시로 만든 천막회의장에 모였다. 그 회의에서 최태환은 당시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정치국원이었던 김두봉의 연설을 들었다. 김두봉은 연설에서 북조선 최고인민회의 상임간부회가 남조선 당국에 평화통일을 여러 차례 제안했건만, 번번이 거부당했다는 사실을 밝히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전략) 이제는 더 이상 앉아서 기다릴 수 없습니다. 우리 동포를 해방시켜야 합니다. 이제 부득이 해방전쟁을 개시하게 되는데, 일주일 동안만 서울을 해방시킬 것입니다. 서울은 남조선의 심장입니다. 그러므로 심장을 장악하게 되면 전체를 장악하는 것이나 다를 바 없습니다. (후략)”
위와 같은 사정을 파악하면, 한국군은 ‘서울해방작전’을 준비한 조선인민군을 옹진지구에서 먼저 공격하는 바람에 ‘서울해방작전’이 시작된 것이었음을 알 수 있다. 최태환의 회고담에 따르면, 1950년 6월 25일 개성전투에 참가한 조선인민군 제6사단 지휘관들은 서울 이남 지역이 표시되지 않고, 경기도 평택까지만 표시된 5만 분의 1 축적의 군사지도를 가지고 전투를 했다고 한다. 또한 당시 조선인민군 제6사단 사단장이었던 방호산은 조선인민군이 서울로 진격하는 도중 한국군과 맞닥뜨리면 교전은 하되 결전은 피하라는 명령을 내렸다고 한다. 38도선 이남 전역을 ‘해방’하는 전면전이 아니라 서울을 ‘해방’하는 국지전이었기에 그처럼 특이한 명령을 내린 것이다. 최태환의 회고담에 따르면, 조선인민군 제6사단은 개성을 ‘해방’하고 곧바로 서울로 진격하는 도중에 붙잡은 한국군 포로들에게 ‘서울해방작전’의 정치군사적 의의를 해설하고 즉각 풀어주었는데, 석방된 포로들 가운데 몇 사람은 즉석에서 조선인민군 전투대오에 합류했다고 한다.
파죽지세로 서울을 향해 진격하던 조선인민군 전투부대들은 1950년 6월 27일 오후 5시경 서울 북쪽 경기도 고양군 미아리(현재 서울 성북구 미아동) 인근까지 진출했고, 한국군은 미아리고개에 최후의 방어선을 구축하고 서울방어전에 돌입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미아리 인근까지 진출한 조선인민군 전투부대들이 더 이상 진격을 하지 않았다. <로동신문> 2016년 6월 28일 보도기사에 따르면, 조선인민군 전투부대들이 1950년 6월 27일 밤에 서울 시내로 진격하지 않은 까닭은, 서울시민들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고 서울에 있는 문화유적들을 손상시키지 않기 위해 날이 밝기를 기다렸다가 6월 25일 오전 5시에 공격을 하되 포사격은 하지 말고 ‘서울해방전투’를 개시하라는 작전명령이 하달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되어 조선인민군 전투부대들은 6월 28일 오전 ‘서울해방작전’을 완료했다. <사진 5>
▲ <사진 5> 이 사진은 1950년 6월 28일 '서울해방작전'에서 승리한 조선인민군 전투부대들이 서울 시내로 진입하던 때, 조선인민군 제105땅크려단 소속 T-34 전차가 서울시내를 지나는 장면이다. 많은 청년학생들이 땅크를 따라 걸어가고 있는 모습이 보인다. 그날 오전 5시 '서울해방작전'에 돌입한 조선인민군 전투부대들은 한국군이 구축한 미아리방어선을 돌파하고 서울을 '해방'했다. 조선인민군 제107련대 제1대대장 김영 소좌가 중앙청 꼭대기에 공화국기를 게양했다. 류경수 려단장이 지휘한 조선인민군 제105땅크려단은 1950년 7월 오산전투에서 역사상 처음으로 맞붙은 미국군을 격파하고, '대전해방전투'를 승리적으로 결속했다. 제105땅크려단은 1950년 7월 27일근위서울제105땅크사단으로 승격되었고, 2001년 5월 23일 사단명칭을 근위서울류경수제105땅크사단으로 바꿨다. 정전 이후 긴 세월이 흘렀건만, 북에서는 6.25전쟁 시기땅크전 지휘관으로 활약한 류경수 려단장의 전공을 기억하고 있는 것이다. 류경수 려단장은 조선인민혁명군 지휘관으로 항일전쟁에 참가한 항일혁명투사였다.
1950년 6월 28일 오전 서울을 점령한 조선인민군은 공격을 중지했다. ‘서울해방작전’이 완료되었으므로, 공격을 중지한 것은 당연한 일이다. 최태환은 자기 회고록에 이렇게 썼다. “그때부터 우리들은 별다른 교전이 없는 가운데 대기상태로 돌입했다. 대기상태란 김포전투가 사실상 끝난 6월 30일에서 7월 2일까지 주둔지에서 중앙의 명령을 기다리며 휴식, 정비, 정찰을 하는 것이었다. 당시 주둔지는 현재 새마을본부 자리 근방(서울 종로구 삼청동-옮긴이)이었다.”
‘서울해방작전’이 완료되자 되찾은 서울의 평온은 너무 짧았다. 1950년 6월 29일 미국 합동참모본부는 원동군사령관 더글러스 맥아더에게 해군력과 공군력을 동원하여 조선인민군을 공격하라는 작전명령을 하달했다. 작전명령을 받은 주일미공군기지의 B-29 폭격기들은 6월 29일 오후부터 한반도 상공으로 건너와 조선인민군 주둔지를 폭격하기 시작했다. 미국의 한반도 공습은 코리언들끼리 싸운 국지전에 외국군대가 불법적으로 개입하여 전쟁의 성격을 내전에서 국제전으로 바꿔놓은 중대사건이었다.
오늘의 군사분계선과 마찬가지로, 당시 38도선도 두 개의 나라를 갈라놓은 국경선이 아니라 하나의 나라 안에 그어진 군사경계선이었으므로, 미국의 무력개입이 시작되기 전 6.25전쟁 초기의 국지적 내전에는 침략이나 침공이라는 개념이 사용될 수 없으며, 남침이니 북침이니 하는 말 자체가 성립되지 않는다. 그런데도 미국과 남측의 우익학자들과 우익선동가들은 “북의 남침으로 6.25전쟁이 일어났다”는 궤변을 70년 동안 붙들고 있다.
북의 시각에서 보면, 전혀 다른 상황이 펼쳐진다. 전혀 다른 상황은, 미국이 조선인민군에 대한 공습을 시작하자, 1950년 7월 1일부터 국지적 내전에 불법개입한 ‘미제침략군’을 상대로 조선인민군이 반침략전쟁에 나섰다는 것이다. 최태환의 회고록에 따르면, 1950년 6월 28일 국지적 내전에서 승리하고 종로구 삼청동에 주둔한, 자신이 배속된 조선인민군 제6사단 보병부대에게 한강 남쪽에 있는 영등포와 인천을 ‘해방’하는 전투를 재개하라는 새로운 작전명령이 하달된 때는 7월 3일 새벽이었다.
6. 대남군사행동계획은 확대회의에서 비준된다
1950년 6월 25일 조선인민군이 ‘서울해방작전’을 개시했던 때로부터 70년 세월이 흘렀다. 세월은 그렇게 멀리 흘러갔건만, 한국군과 조선인민군은 군사분계선에서 여전히 대치하고 있다. 1950년 6월 25일 새벽 옹진지구에서 한국군의 북진공격으로 일어난 소규모 무력충돌이 조선인민군의 ‘서울해방작전’으로 확전된 국지적 내전은 70년 간극을 뛰어넘어 오늘 군사분계선 무력충돌위험으로 또 다시 고조시켰다.
6.25전쟁 70주년을 이틀 앞둔 2020년 6월 23일 평양에서 조선로동당 중앙군사위원회 제7기 제5차 회의 예비회의가 진행되었다. 조선로동당 중앙군사위원회 김정은 위원장의 사회로 진행된 화상회의다. 군사분계선에서 무력충돌위험이 고조된 시점에 진행된 회의인 것으로 하여 세계의 이목이 평양에 집중되었다. 조선의 언론매체들이 예비회의에 관해 보도한 내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은 사실을 알 수 있다.
1) 조선로동당 중앙군사위원회 제7기 제5차 회의 예비회의가 진행되었으므로, 앞으로 머지않아 제7기 제5차 확대회의가 진행될 것이다. 제7기 제4차 확대회의는 2020년 5월 23일에 진행되었었다. 과거기록을 보면, 당중앙군사위원회 확대회의는 2013년에 한 차례, 2014년에 한 차례, 2015년에 두 차례, 2018년에 한 차례, 2019년에 두 차례 진행되었다. 당중앙군사위원회 확대회의가 두 차례씩 진행된 2015년과 2019년은 군사분계선 무력충돌위험이 고조된 시기였다. <사진 6>
▲ <사진 6>이 사진은 2020년 5월 23일 김정은 조선로동당 중앙군사위원회 위원장이 당중앙군사위원회 제7기 제4차 확대회의를 지도하는 장면이다. 과거사례를 보면, 군사분계선 무력충돌위험이 고조되었던 2015년과 2019년에 당중앙군사위원회 확대회의가 각각 두 차례씩 진행되었음을 알 수 있다. 올해 2020년에도 당중앙군사위원회 확대회의가 두 차례 진행될 것이 확실하다. 이런 상황은 군사분계선 무력충돌위험이 또 다시 고조되었음을 말해준다. 머지않아 당중앙군사위원회 제7기 제5차 확대회의가 열리면, 조선인민군 총참모부가 제출한 대남군사행동계획이 비준될 것으로 예견된다.
2) 조선의 언론보도에 따르면, 이번 예비회의에는 “당중앙군사위원회 부위원장 리병철 동지와 당중앙군사위원회 일부 위원들이 참가하였다”고 한다. 당중앙군사위원회 위원 13명 중에서 일부 위원들만 예비회의에 참석한 것이다. 이런 정황은 이번 예비회의가 중대안건을 의결하는 회의가 아니었음을 말해준다. 그런 까닭에 예비회의에서는 앞으로 진행될 확대회의에 상정할 “주요군사정책토의안들을 심의하였고”, 본회의에 제출할 보고서들와 결정서들, 그리고 “나라의 전쟁억제력을 더욱 강화하기 위한 국가적 대책들을 반영한 여러 문건들을 연구하였다.”
3) 예비회의에서는 “조성된 최근 정세를 평가하고 조선인민군 총참모부가 제기한 “대남군사행동계획들을 보류하였다.”
머지않아 당중앙군사위원회 확대회의가 소집되면, 당중앙군사위원회 위원들 이외에 중요한 직무를 수행하는 당과 국가의 고위간부들도 참석할 것이다. 하지만 이번 예비회의에는 당중앙군사위원회 일부 위원들만 참석했으므로, 상정된 안건들과 제출된 보고서들 및 결정서들을 비준하지 않고, 심의하거나 검토하거나 보류했다. 조선인민군 총참모부가 제출한 대남군사행동계획을 이번 예비회의에서 심의만 하고 비준하지 않은 까닭은, 머지않아 소집될 당중앙군사위원회 확대회의에서 비준해야 하기 때문이다.
누구나 알 수 있는 것처럼, 조선인민군 총참모부가 조선로동당 중앙군사위원회에 제출한 대남군사행동계획은 매우 중대한 사안이므로 예비회의가 아니라 확대회의에서 비준되어야 마땅하다. 대남군사행동계획에 대한 비준이 이번 예비회의에서 보류된 까닭이 거기에 있다.
사정이 그런데도, 뭐가 뭔지 모르는 사람들은 대남군사행동계획을 실행할 준비가 아직 되지 않았기 때문에 대남군사행동계획 비준을 보류했을 것이라느니, 또는 김여정 당중앙위원회 제1부부장은 대남군사행동계획을 추진했으나 김정은 당중앙위원회 위원장이 그 계획 비준을 보류한 것은 양면전술이라느니, 또는 대남군사행동계획 비준을 보류한 것은 문재인 정부에게 대화요청신호를 보낸 것이라느니, 또는 대남군사행동계획을 비준할 경우 미국이 무력으로 위협할 것을 우려해서 보류했을 것이라느니 하는 말이 되지 않는 억측과 궤변을 늘어놓았다.
그러나 그런 가지각색 억측과 궤변을 뒤엎고, 당중앙군사위원회 제7기 제5차 확대회의가 머지않아 소집되면 조선인민군 총참모부의 대남군사행동계획은 비준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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