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편소설 계승자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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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술장에서 집도를 했던 외과과장이 당직실에 들어왔다.
그는 흰 위생모를 벗어 탁상에 놓고 피로한듯 눈을 문지르고서 안경을 다시 꼈다.
《아니?! 동문 아직 집에 가지 않았소?》
외과과장은 창문쪽 구석의 나무걸상에 쪼그리고 앉아있는 림원국을 발견하고 약간 질책하는 어조로 물었다.
《선생님, 방해되지 않으면 오늘밤 여기 있게 해주십시오.》
원국은 부자연스레 몸을 움직거리며 힘들게 부탁했다.
《안되오.》
외과과장의 안경이 형광등빛에 수술칼날처럼 번뜩였다.
《방해되오. 의사나 간호원 아닌 사람이 당직실에 있을수 없소. 이제 적십자병원의 박사선생이 저녁식사를 하고 나오실텐데 어서 가보오.》
《선생님…》
《병원은 사정하는 곳이 아니요. 동무가 여기서 밤을 샌들 환자한테 무슨 도움을 주겠소. 맘놓소. 환자는 수술도 잘되고 혈압도 맥박도 다 정상수치에 이르고있소. 괜히 친구라든가 가까운 사람이 있어가지고 환자의 안정을 깨뜨리기라도 하면 좋지 않은 결과를 빚어내오.》
림원국은 하는수없이 걸상에서 몸을 일으켰다.
마음속으로라도 웅수를 위로해주고싶고 함께 병원에 있는것으로 상처의 아픔과 고통을 나눠가지고싶어하는 자기의 심정을 몰라주는 외과과장이 야속스러웠다. 그러면서도 수술시에 특별히 두사람분의 피부를 자기 어깨에서 떼내준 의사를 존경하는 마음에서 고개를 숙여보이고 당직실출입문을 열고 나왔다.
층계쪽에 사기등피를 씌운 전등이 하나 매달린 병원복도는 어스름하고 고요했다.
원국은 침침한 고요를 깨칠듯싶어 운동화신은 발을 저겨디디며 조심스레 걸었다.
병원마당에 나서자 차거운 밤추위와 어둠이 그를 휩쌌다. 당직실창문에서 흘러나오는 불빛을 올려다보니 웅수에 대한 걱정과 죄스러움 그리고 자신의 처지에 대한 무참한 인식이 걸어갈 기운을 뺏았다.
좌절당하고 희망이 없는 운명이지만 육체는 너무도 젊었다. 청춘은 인생의 고비에서 물러서는것이 아니라 전진해나가야 한다. 어디로?
그는 캄캄한 밤의 장막이 드리운, 꾸둑꾸둑 언 길로 걸음을 옮겼다. 앞으로만 걸어나가던 그는 려관쪽으로 걷고있는 자신을 발견하였다. 슬픔과 고통에 시달리면서도 심장은 사랑을 위해서 줄기차게 뛰고있는것이다.
수옥이!… 처녀는 지금 려관에 있을것이다. 잠자리에 들었을가? 만나지는 못해도 그가 있는 려관에 가보기라도 해야 한다. 이밤이 지새고 날이 밝으면 수옥이는 영영 이 바다가 낯선 고장을 떠나버릴것이다. 그리고 한때 처녀의 마음에 혼란과 동요를 일으킨 남자를 아주 잊어버릴것이다. 참 얼마나 날카롭고 다감하고 솔직한 처녀인가. 그리고 얼마나 헌신적이고 인정미깊은 처녀인가. 그런 처녀의 사랑을 받았다는것만으로도 진정 행복한것이다.
원국은 려관이 가까와지자 저도모르게 마음이 설레고 걸음이 빨라졌다.
억제된 정열을 터치고 사랑을 고백하고싶은 욕망에 가슴이 끓었다.
그러나 적막이 깃든 려관마당을 지나 불꺼진 접수실을 보는 순간 그는 못박힌듯 서버렸다. 그리고 자기가 부질없는 욕망의 상상에 사로잡혀있었다는것을 고통스레 의식했다. 수옥이를 만날수 없으며 또 만나서도 안된다는 생각에 그의 심장은 울었다.
문득 려관마당 저쪽에서 인기척이 났다. 줄기가 굵은 느티나무옆에 서있던 검스레한 형체의 사람이 조심스레 이쪽으로 다가왔다.
원국은 어둠속에서 진수옥을 알아보자 놀라움과 반가움에 경련을 일으키듯 몸을 부르르 떨었다.
처녀는 려관의 호실이 아니라 자기처럼 번민속에 시달리며 추운 마당가에 서있은것이였다.
《원국동무… 왔군요.》
처녀의 괴로움이 억제된 침착하고 부드러운 목소리를 다시 듣는것으로도 그리고 절망을 떨어버릴수 없어 모지름을 쓰는 이 밤중에 그를 다시 만날수 있게 된것만으로도 원국은 미칠듯이 기뻤다. 그러나 무엇인가 걷잡을수 없이 강렬한 리성의 충동이 그를 뒤걸음치게 했다.
《밤이 깊은데… 왜 쉬지 않습니까?》
원국은 딱딱하고 불필요한 인사말을 건늬는 자신을 스스로 경멸하였다. 하지만 서로의 사랑의 번민이 가져온 이 상봉을 기쁘게 여기면서도 그렇게 겉치레의 말을 던지지 않을수 없는것이였다.
《파도소리가 듣기 좋군요. 려관을 해변가에… 좋은 곳에 지었어요.》
진수옥은 둘사이에 저녁에 있었던 충돌을 잊은듯 서느러운 상념속에 다정하게 말하였다.
원국은 괴로움을 뒤전에 미뤄놓은 처녀의 부드러운 인간미에 끌려 걸음을 옮겼다.
두사람은 려관마당을 나섰다. 형체없는 어둠이 길을 덮고 바다바람이 쌀쌀히 불어와 달아오른 얼굴에 랭기를 끼얹었다.
원국은 곁에서 걷는 처녀의 코트자락에 자기 옷자락이 슬치지 않으려고 약간 떨어져서 걸었다.
그는 어둠속에서 고요히 들려오는 파도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진수옥의 순결한 마음속을 가늠하려고 애썼다. 녀자에게 한번 쏟은 정열을 책임질줄 모른다고 비난하던 진수옥의 목소리가 귀전을 울리며 무언가 불안스럽고 투명치 않은 기쁨을 떨어버릴수 없는것이였다. 처녀가 불행에 처한 자기를 진정 사랑한다는 확신이 들수록 청춘의 행운을 다시금 바라서 찾아온것만 같아 어깨가 처지였다.
《원국동무가 려관에 오리라군 생각 못했어요.》
《…》
《제게 대해 마음을 고쳐먹었겠지요?》
《아니 난… 그래서 찾아온게 아닙니다.》
원국은 당황해서 얼버무렸다. 그는 자기가 무엇때문에 이 밤중에 처녀를 찾아왔는지 분명 의식하지 못하고있었다. 애석하게 잃게 되는 사랑의 고통, 마음의 혼란만이 있을뿐이였다.
《소심하군요.》
진수옥은 조용히 뇌이였다.
노여움과 설음이 응축된 처녀의 아름다운 눈이 어둠속에서 날카롭게 번뜩이며 나약하고 용기없이 허둥대는 남자의 순정을 사정없이 베였다.
《원국동문 정치적견해나 사로청사업에서 자기 주장과 정열을 삼가한적이 없었지요. 설사 그것이 도덕에 저촉되는 한이 있어도 물러서지 않았어요. 남자의 얼을 가지고 사는 동무를 난 존경했고… 반했어요.》
원국은 그저 진수옥의 부끄럼없는 솔직성과 대담성에 놀랄따름이였다.
《량해하세요. 처녀가 몰래 품고있어야 할 귀중한 감정을 이렇게 함부로 쏟아놓아서… 하지만 이건 동무와 일생을 같이할려는 저의 결심이예요.》
원국은 환희에 찬 기쁨, 형언하기 어려운 행복감에 눈물이 쑥 나왔다.
《정말 나한테 시집오겠습니까?》
진수옥은 비로도처럼 검고 정기도는 눈을 조용히 내리깔았다.
《진정을 말로 증명하기는 어려운거예요.》
《수옥동무!》
원국은 용암과도 같은 뜨거운 충동의 분출을 억제하지 못하고 처녀의 어깨를 와락 끌어안았다. 얼마나 절절히 바라고 애타게 기다리던 사랑의 성취인가! 믿어지지 않는구나. 꿈은 아닐것이다. 꿈이면 깨지 말아야 할텐데.
처녀는 물러서지 않고 그렇다고 같이 포옹을 하지는 못하고 고개를 옆으로 돌린채 조용히 서서 그의 열정의 폭발에 몸을 맡기고있었다.
원국은 처녀의 어깨를 끌어안은 손에 숱많은 부드러운 머리칼이 잡히고 자기의 입술에 처녀의 매끈하고 따스한 목언저리의 살결이 감촉되였을 때에야 정신을 차렸다. 그는 처녀의 얼굴과 머리칼에서 풍기는 찔레꽃향기에 취했으나 자기 몸이 처녀의 봉긋한 웃가슴을 무엄하게 누르고있다는것을 깨닫고 황급히 물러섰다.
진수옥은 말없이 이마와 목언저리의 흐트러진 머리를 쓰다듬었다.
《수옥동무는 이 불운한 총각을 동정해서 그러는것이 아니겠지요?》
《남자를 동정해서 사랑하는 처녀들이 있다고들 해요. 하지만 전 동무를 조금도 불운한 사람으로 보지 않아요.》
《내 처지가 어려워진건… 사실이 아닙니까.》
《그래요. 처지가 어려워졌지만 사람은 달라지지 않았겠지요?》
《정말 고맙습니다. 곡절을 겪는 나와 함께 있겠다니!… 그러나 잘 생각해보십시오. 나와 일생을 같이 한다는건… 평양에서 기자를 그만두고 지방에… 보통로동자한테 시집온다는것인데… 어쩌면 그런 희생을 할수 있겠습니까.》
《그럼 동문 지난 기간 날 그렇게 <희생>시키려고 머리에 기름을 바르고 문을 걸었댔어요?》
《무모하고 어리석은 행동이였지요.》
《사랑하면 무모할수 있는거지요. 전 직위가 아니라 당에 충실한 대바른 남자를 원해요. 그래서 동무에게 일생을 의탁하려고 결심한거예요. 받아주겠어요?》
《모르겠습니다. 정말이지 내겐 아름찬 일입니다.》
《전 래일 아침차로 가야 해요.》
《수옥동무, 려관에서 좀 쉬십시오. 아침에 역에 나가겠습니다.》
원국은 진수옥을 려관에 바래다주고 집에 돌아와 어머니가 차려놓은 밥을 먹지 않고 잠자리에 누워버렸다. 어머니는 아들의 심사가 편안치 않은것을 알고 인차 불을 끄고 누웠다.
어둠과 정적이 깃든 방구석 어디선가 귀뚜라미가 서글피 울어대다가 잠잠해진다. 토방에서 북슬개가 잠자리가 불편한지 부스럭거리다가 끙- 하고 숨을 톺는다.
멀리서 들려오는 밤파도소리가 잠을 이루지 못하는 그를 자장가소리마냥 어루만진다. 아무리 생각해도 닥쳐든 행복이 믿어지지 않고 처녀의 강렬한 사랑에 순응하기 어렵다. 어떤 사람은 행복과 불행이 종이장 앞뒤면처럼 가깝다고 했는데 난 왜 이리도 격차가 심한가. 불행의 나락에서 행복의 절정이 너무 높아 손저어 부르는데도 올라갈수 없구나. 오르기에는 너무도 지치고 기운이 빠졌다. 청춘과 정열이 불타 재로 돼버렸는가? 아니, 그렇지 않다. 이것은 청춘의 기백이나 정열에 관한 문제가 아니다. 사랑과 량심에 관한 문제이다.
친구 웅수가 지금처럼 불행을 당하지 않았더라면 달리 결심할수도 있을것이다. 그러나 수술을 받고 사경에서 헤매이는 친구의 불행우에서 자기 행복을 추구할수 없다. 진수옥의 완강한 결심, 사랑을 받아들이지 않는것이 진정 처녀를 사랑하는것이 아니겠는가. 그렇게 하는것이 나의 뜨거운 사랑이다. 래일아침 역에 가서 진수옥이한테 이 결심을 말해주어야 한다. 아니… 말해서는 안될것이다. 처녀에게 이런 고통스런 결심을 토로하고 설명하는것은 극심한 나약성을 드러내는것으로 될수 있다. 그리고 처녀의 견결한 행동에 의해 나의 결심과 의지가 물러지고 굽어들기를 은근히 바라는것으로 되지 않겠는가.
원국은 일어나 탁상등을 조심스레 켜놓고 편지를 썼다.
수옥동무!
나를 잊고 떠나가주십시오. 깊이 생각해보았지만 이런 불운한 처지에서 장래의 행복을 결정한
다는건 도의에 맞지 않습니다.
나는 량심우에 사랑을 올려놓을수 없습니다.
그런 아름답지 못한 사랑의 성취는 고통을 자아내고 오래 갈수 없을것입니다.
부디 행복하기를 바랍니다.
림원국으로부터
아침이 되자 어머니는 아들이 오래동안 열병을 앓고난 사람처럼 얼굴이 핼쓱하게 여위고 쌍까풀진 크고 검은 눈이 뿌옇게 정기를 잃은것을 보고 가슴아파했다.
원국은 자기에게서 줄곧 걱정어린 눈길을 떼지 못하는 이머니에게 봉투를 넣은 편지를 내밀었다.
《어머니, 수옥동무가… 기자처녀가 아침차로 떠나요. 역에 나가 이걸 전해주세요.》
어머니는 아들의 얼굴에서 무언가 굳센 뜻을 읽고는 불안해서 말했다.
《네가… 직접 가려무나.》
《난 웅수한테 가봐야 해요.》
《처녀가 섭섭해하지 않겠니?》
《어머니… 날… 리해해주세요.》
원국은 어머니손에 편지를 떠맡기고 황황히 밖으로 뛰쳐나갔다. 처녀가 당장이라도 달려와 무엇때문에, 어째서 사랑할수 없는가고 따져물을가봐 겁이 났다. 그때는 감추었던 본래의 감정을 이겨내지 못하고 눈물을 쏟으며 살을 저미는 번민을 처녀한테 깡그리 터놓을수 있는것이다.
원국은 흰 모래불과 푸른 바다물이 보이는 솔밭언덕에 이르자 더 걷지 못하고 주저않았다.
언젠가 진수옥이와 헤여지던 따뜻하고 청신한 여름날 아침이 못견디게 그리웠다. 그때처럼 깨끗한 모래불은 여전히 해변을 따라 도래굽이 저쪽 멀리까지 펼쳐졌다. 엷은 안개가 퍼진 희푸른 수평선은 고요히 잠든것 같으면서도 아침해빛에 소리없이 일렁이며 길고긴 댕기오리같은 하얀 잔파도의 거품띠를 끊임없이 몰아다가는 모래불에 두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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