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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소설 전장의 행운아 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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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강산
댓글 0건 조회 3,576회 작성일 20-09-29 17: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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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7 장

금별의 바다

5

 

평양의 거리는 결코 한적하지 않았다. 미국놈들이 공화국북반부의 크고작은 도시와 마을들을 지도상에서 완전히 없애버리겠다고 떠벌이면서 련일 야만적인 공습을 들이대였으나 폭격속에서, 포연속에서 평양은 꿋꿋이 살아숨쉬고있었다. 살아있을뿐아니라 싸우고있었다.

《모든것을 전쟁의 승리를 위하여!》

만수대언덕아래로 뻗어간 도로옆에는 큼직한 구호판과 선전화들이 내걸리고 그앞으로는 삽이며 곡괭이를 어깨에 둘러멘 남녀들의 대렬이 물결치듯 지나갔다. 채 허물어지지 않은 건물벽들에도 힘있는 구호들이 새겨져있다.

적재함에 탄약상자를 실었거나 병사들을 태운 자동차들이 경적을 울리며 어디론가 바삐 달려가는데 장대재아래 학교에서는 아이들의 노래소리가 울려왔다.

모란봉지하극장에서 밀려나온 군무자축전참가자들을 해방산쪽에 있는 숙소에 안내하고 난 권녕신은 돌아오는 길에 품속에 간수했던 편지를 꺼내들었다. 전선에서 리학문이 보낸것이였다. 일부인을 보니 석달전에 부친 편지다. 의주에 있는 집으로 보내온것을 어머니가 딸에게 되부쳐주어서 기일이 퍽 오래 걸려서야 그의 손에 들어온것이였다.

이제는 10여차례나 편지가 오갔어도 매번 이렇게 가슴이 두근거리군 하는것을 처녀는 달콤한 전률속에 체험하게 되는것이였다.

누가 볼세라 사람들의 인적이 뜨음한 대동문쪽 대동강기슭으로 반달음쳐나갔다. 폭격에 허리중둥이 잘려나간 버드나무아래 홀로 자리잡고 앉아서 봉투를 뜯고 속지를 꺼내드는데 어딘가 멀지 않은 곳에서 처녀들이 부르는 노래소리가 들려왔다.

 

그렇게 알길 없던 정든 님 소식

집에 들은 군대동무 전해주었네

 

(아이참!)

폭격에 무너져 흩어진 대동문의 화강석들을 모으던 처녀들이 하루일을 끝낸 참인듯 강변쪽의 공지에 모여앉아 겨끔내기로 부르기 시작한 노래였다. 어쩌면 그들이 그자신의 일을 알고 일부러 부르는 노래가 아닐가싶어 귀뿌리가 확 달아올랐다.

인차 석양이 질텐데 어둠이 찾아오는것도 아랑곳없는 모양이다. 밤에까지 작업을 계속하자고 약속했는지도 모른다.

그들이 자기의 일과는 아무 상관도 없다는것을 확인한 후에야 녕신의 눈길은 활달한 글씨가 마라손선수처럼 내달려간 종이장우를 부지런히 훑어내려갔다.

총각군관은 적후투쟁의 나날에 있은 가지가지 사실에 대해 그리고 앞으로의 희망과 계획에 대해 투박하기는 하지만 진심이 비낀 글체로 써보냈다.

먼저번 편지에는 적후정찰투쟁과정에 희생된 전우들의 무훈에 대해 이야기하더니 이번에는 정찰대전우들의 꿈과 희망에 대해 자랑스럽게 펼쳐놓는다.

(어쩜 매번마다 자기에 대한것보담 전우들에 대한 얘길 더 많이 쓸가?!)

그것이 아수하면서도 싫지는 않았다. 자신에 대한 자랑보다 전우들에 대한 자랑을 좋아하는 성품에 공감이 가는것이였다. 갈수록 다감해지고 열렬해지는 그의 모습을 편지지우에서 직접 보는것만 같았다.

해와 달을 넘으며 날개없이도 날아오고 날아가는 편지들이 견우직녀의 오작교마냥 끓는 정을 이어주었다. 그래서 성칼스러운 수리개와 도고한 갈매기처럼 서로 어울릴것 같지 않던 청춘남녀의 심장은 불타기 시작했다. 사랑한다는 말을 부디 하지 않아도 이제는 한시도 잊고서는 못살만큼 불타는 그리움으로 자기의 심장이 가득찬것을 이 순간 처녀는 부지불식간에 깨닫게 되는것이였다.

돌이켜보면 지난해 의주에서 만났을 때 왜 그리도 매몰스럽게 대해주었던지 이제는 후회마저 들었다.

편지를 단숨에 다 읽고난 그는 저도 모르는 새에 방금 처녀들이 부르던 노래를 흥얼거렸다.

 

미국놈 백놈이나 쓸어눕히고

불탄 고지 지켰으니 영웅 되셨네

나라의 자랑인 우리의 영웅을

그대로야 점직해 어찌 만나나

 

그리고는 《어마나!》 외마디소리를 지르며 편지지로 화끈해진 얼굴을 가리웠다. 무한한 행복감이 가슴속에 밀물쳐들었다. 이런것을 두고 처녀들의 변덕이라고 하겠지 하는 생각에 저혼자 쑥스럽게 웃었다.

그때였다. 적기들의 맹폭격을 받았어도 유독 용케도 무너지지 않은 백과부네 집쪽에서 걸어오던 한 군관이 걸음을 뚝 멈춘채 이쪽을 유심히 지켜보고있는것을 녕신은 띠여보았다.

(내 노래소리를 들은게 아닐가?!)

부끄러운 생각에 냉큼 뛰쳐일어나 멀리 도망이라도 치고싶었다. 그러나 다음순간 사뭇 분수쳐오르는 격분에 사로잡혔다.

(대체 어떤 사람이길래 남을, 그것도 처녀를 도적질해본담!)

가시처럼 돋친 반발심이 눈길을 바로 쳐들고 상대를 꺼리낌없이 마주볼수 있게 해주었다.

억세인 체구, 머리에는 군관모자, 멋스럽게 번들거리는 가죽장화… 그 군관은 한걸음한걸음 이쪽으로 다가오고있었다.

도전하는듯 한 시선으로 그를 지켜보던 처녀는 갑자기 가벼운 탄성을 지르며 주먹을 입에 물었다. 그는 리학문이였던것이다.

먼저 소리친것은 리학문이였다.

《녕신동무!》

《아이, 학문동무!》

처녀는 앉은 자리에서 튀여일어났다.

성큼성큼 달려온 학문은 몇걸음앞에서 뚝 멈춰서버렸다. 그의 앞가슴에 나란히 매달린 두개의 영웅메달이 석양을 받아 번쩍 섬광을 뿌렸다.

녕신은 황홀한 신비경에 맞다든듯 넋을 잃고 그의 가슴팍을 들여다보았다. 기이한 상봉의 놀라움도 컸지만 두개의 영웅메달이 처녀에게 준 감정의 파문은 더 큰것이였다. 웃을 때면 입가에 옴폭 패이던 보조개도 간곳이 없고 수집게 피워올리던 홍조도 찾아볼수 없었다. 마치 자석에 끌린 쇠붙이처럼 발볌발볌 다가가 두손으로 영웅메달을 쓸어만져보았다.

그 순간 권녕신도 리학문도 자기들이 서로 얼마나 열렬하게 사랑했는가를 말없이 절감하게 되는것이였다.

《2중영웅이 되였군요.》

《그렇소.》

《정말 어쩌면…》

한순간의 파동이 지나간 뒤에야 그들은 자신들이 다름아닌 처녀이고 총각이라는것을 깨달은듯 서로 한발작 물러서며 얼굴을 붉히였다. 권녕신은 수집음을 이기지 못하여 머리를 다소곳이 숙였다. 높아진 숨소리를 억지로 낮추느라 애쓰며 처녀가 물었다.

《그런데 여길 어떻게?!》

리학문은 폭탄파편이 군데군데 박인 버드나무밑둥의 터실터실한 껍질을 손톱으로 허비며 말했다.

《음, 이제 며칠후에 있게 될 행사대표로 왔소. 평양에 오니 수도의 거리를 죄다 밟아보고싶겠지. 미국놈들이 야만적으로 파괴했어도 평양은 언제나 영원한 우리의 수도이고 심장인게 아니요. 저기 외성쪽에서부터 동성쪽으로 해서 모란봉까지 걸어보았지. 이제는 숙소로 돌아가자하구 이앞을 지나가는데 여기에 혼자 앉아있는 처녀가 꼭 동무같더란 말이요. 엥이, 그 동무가 여기에 있을게 뭐람! 하구 지나치려고 해도 이상하게두 발목이 묶이운것처럼 걸음을 못 떼겠더라니까. 허허…》

학문은 자기의 말수단이 그처럼 훌륭한것을 그때야 알았다. 말수더구 많은 사람을 제일 질색하는 성미에 어떻게 그것도 처녀앞에서 스스럼없이 장광설을 쏟아놓을수 있었는지 스스로도 놀라울 지경이였다. 사랑은 사람을 변모시킨다더니 정말 그런가부다 하는 생각에 씩 웃었다.

권녕신도 무척 행복한 표정이였다. 마음속에 그리던 사람을 이렇게 뜻밖에 만날줄을 꿈에도 생각지 못했던 그였기에 불시에 찾아든 이 상봉은 두사람을 무한한 행복감에 젖어들게 해주었다.

《우리 좀 걷지 않겠소?》

그들은 나란히 대동강기슭을 거닐었다. 대동교까지 내려갔다가 종로거리쪽으로 되돌아오며 남산재기슭을 지났다.

화신백화점자리에는 폭격에 재더미만 남았다. 집 한채 성한것이 없는 거리에 백과부네 집 화강석건물만이 쓸쓸하게 서있다.

처참한 그 모습을 바라보던 학문은 군복안섶을 뒤지더니 그 무슨 소중한 보물인듯 조심스럽게 네모진 종이접이를 꺼내들었다. 남진의 길에 하동에서 썼던 그 편지였다.

《이걸 한번 보오.》

이제는 보풀이 일어서 글자를 알아보기 어려웠다. 그러나 녕신은 그 편지를 오래도록 들여다보았다.

《이렇게 나는 할바를 다하지 못했소. 그런데… 그런데도 우리의 경애하는 최고사령관동지께서는 별로 크게 세운 위훈도 없는 나에게 또다시 영웅칭호를 수여해주셨소. 이 영웅메달을 수여받으며 난 녕신동무의 편지를 생각했소. 조국에 우리가 바란것은 과연 무엇이였는가. 아무것도 없었소. 그런데 이렇게 큰 영광을 누리게 되니…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난 그저 한마디밖에 못하겠소. 이런 어버이, 이런 령도자, 이런 최고사령관을 모신 그것이 우리의 제일가는 영광이고 행복이며 영예이고 승리이라고 말이요.》

이제는 석양도 지고 거리에는 어둠이 깃들었다. 그래도 그들은 끝없이, 끝없이 걸었다. 미래의 승리거리를, 머지않아 전승의 열병대오가 굽이쳐갈 그 길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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