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련의 패망에 대한 개략적 정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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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남녘의 재야인사 리모 선생이 소련의 패망에 관한 책 '영웅적 투쟁, 쓰라린 패배'를 읽고 쓴 독후감이다. 진보적인 운동가들 가운데서도 소련의 패망 원인에 대하여 왜곡된 정보로 인하여 잘못 알고 있거나 잘 알지 못하는 경우가 많은데 소련의 패망원인을 올바로 이해하는 것은 꼭 필요하다. 이는 곧 지금의 사회주의 북부조국이 나아가고 있는 길을 바로 이해하면서 또한 우리가 바라는 통일조국이 나아갈 미래는 어떠해야 하는지를 보여주기 때문이기도 하다. [민족통신 편집부]
소련의 패망에 대한 개략적 정리
'영웅적 투쟁, 쓰라린 패배'를 읽고 (바만 아자드 지음, 채만수 옮김. 노사과연 출판.)
혁명의 시작은 장대하고 감동적이고 영웅적이었으나 그 패배는 급속했고 너무도 허무, 무력하였다. 그 허무한 패배로 인해 오늘날 인류가 감내해야 할 고통스런 후과는 이루 말할 수 없다. 일차적 원인은 생산력 발달 수준 매우 낮은 후진 사회주의 국가 러시아에 가해진 제국주의 국가들의 무자비한 해체 공작이었다. 그리고 사회주의 종주국으로서 감당해야 했던 무거운 군비(軍備)의 하중이었다. 그 정황이야 이해는 된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련의 노동계급이 제국주의들과의 힘겨운 대치관계로 인해, 내부로부터 발생, 오랜 세월 커져 온 사상적, 계급적 암종(癌腫)들을 적절히 처리했더라면, 인류의 삶이 지금과는 사뭇 다를 거라는 아쉬움마저 없을 수는 없는 일이다.
당 지도부의 핵심에서, 혁명의 수행이라는 이름으로 행해지는 관료화, 부패화, 탈계급화....그것이 사회주의 운동에서는 가장 무서운 독소다. 반혁명이 당 지도부가 주체가 되어 혁명의 이름으로 행해지므로 그 정체를 알 수 없고 저항할 수 없기 때문이다. 소련이 그렇게 망했다. 이루고 건설했던 그 장대하고 위대했던 혁명 역사를 고려하면....너무나도 간단하고 손쉽게....그렇게 망했다. 특히 고르바초프를 대표로 하는 세력들의 위로부터의 불법적 정치적 쿠데타에 의해 전 인민들의 재산이 극소수 관료들의 수중으로 넘겨지고, 정치와 경제가 자본주의로 타락, 후퇴하는 장면은 실로 아픈 탄식을 금치 못하게 한다.
다음은 이 책의 요약이다. 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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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17년, 생산력 발달수준이 매우 낮은 상태에서 사회주의 혁명 성공. 국내의 반혁명세력과 주위 제국주의 나라들의 혁명 전복 의도를 인민들의 자발적인 참여로 영웅적으로 이겨냄.
- 1930년대 독일의 노골적인 침략 의도, 극동에서 일본제국주의의 침략 의도를 급속한 공업화를 통해 극복해내고자 함. 이 과정에서 이 노선에 합의하지 않거나 독일, 일본과 내통 혐의 있는 당내분자들을 불가피하게 숙청 혹은 축출. 이때 축적된 생산력의 힘으로 결국은 독일의 침략을 성공적으로 막아내고 2차 대전을 승리로 결속. 인류의 위기에서 구해냄.
- 혁명 후 내전과 제국주의 국가들의 반혁명 기도 개입에 전시 공산주의 운영하고 독일 침략 대비 급속한 생산력 발달을 도모하는 과정에서 관료들, 테크노크라트들의 당내 영향력이 불가피하게 증대됨. 국가 운영하고 당 활동하는데 관료화 싹이 보이기 시작.
- 혁명 후 내전, 2차 세계 대전 중에 발생된 전 국토의 황폐화, 2000만 인민의 죽음, 그리고 무엇보다 미국, 영국, 프랑스, 일본, 독일....등 제국주의 세력들의 적대적 공작, 엄청난 군비경쟁의 하중을 이겨내면서도 소련은 급속한 생산력 발달을 성공적으로 이루어 내고 인민들의 생활 수준도 급속하게 끌어올림. 경이적인 성과. 그러나 불가피하게 ‘당의 관료화’, ‘인민 대중들로부터의 유리’가 자리 잡히기 시작. 이에 대한 당 지도부의 문제의식은 꾸준히 있어왔음.
- 흐루스초프 집권 후 문제를 오로지 ‘스탈린 개인숭배’ 정도로 좁혀 스탈린 격하 운동에만 몰두. 관료, 테크노크라트 들에 의한 ‘당 관료화’라는 구조적 문제 해결을 방치함. 그리고 결정적으로 소련이 이미 ‘공산주의 사회’단계로 진입했다고 선언. 그러면서 임금의 평등화 경향을 강화하여 노동자들 개인들 사이에 현실적으로 존재하는 숙련도 차이를 무시함 --> 생산성 저하 초래.
- (공산주의 단계로 들어섰으니) 소련 내 계급투쟁이 종식되었음 선언하고 소련을 ‘프롤레타리아 독재국가’ 아니라 ‘전체 인민국가’로, 당을 ‘프롤레타리아 계급의 당’이 아니라 ‘전체 인민의 당’으로 규정하게 됨.
- 이로 인해 노동계급에 근거한 계급노선이 방기되면서 출세지향의 관료 혹은 테크노크라트 들이 대거 당내로 유입, 당내 영향력을 점차 확대시켜 나감.
- 다른 사회주의 국가들과의 관계도 ‘당 대 당’의 관계가 아니라 ‘국가 대 국가’관계로 되면서 대국주의 경향 등장. 프롤레타리아 국제적 계급적 연대 약화. 사회주의 정당 사이의 동지적 관계 약화. 중국과의 분쟁으로 사회주의 국가들 사이의 연대 파괴. 그러나 소련이 지니는 절대적 권위로 인해 사회주의 형제국들 중 그 어느 누구도 이에 대해 문제 제기를 못 함.
- 브레즈네프, 안드로포프 등이 이어 집권하면서 당의 관료화 경향에 대해 정당하게 문제 제기 했음에도 불구하고 관료화, 부패화와 그로 인한 산업생산 성장률 저하...등의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지 못함. 당의 관료화, 당파성의 변질 경향 지속.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구 자본주의의 경제성장률을 상회하는 성과 지속됨.
- 고르바초프 초기의 정책은 안드로포프의 것을 계승해서 산업생산 증가율 등을 성공적으로 달성함. 하지만 그와 함께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고 사회주의 말살에서 이익을 찾는 관료층이 당내에서 악성종양처럼 비대화 됨.
- 1986년 27회 당대회 후 관료, 테크노크라트 등이 당 지도부의 관건적 지배적 지위 점하고 당 기구에서 조직적인 지배권 장악. 이들의 대리인인 고르바초프와 그 동반자 집단이 계급 권력의 최고사령부 즉 공산당 지도부에 침입하여 실권 장악하고 사회주의를 파괴하기 시작. 이들은 신사고(新思考)라는 구실 하에 소비에트 사회에 부르주아 민주주의와 자유시장경제를 강제하는 방향으로 상황을 몰고 가려 함. 당 한편에서는 이에 저항하여 사회주의의 비효율성을 시정하고 성장을 가속화 하려 함.
- 고르바초프 정파는 충실한 지지자들을 당 지도부에 포진시키면서 한편으로 충실한 공산당원들을 허위와 중상모략을 통해 광범하게 숙청하기 시작. 제국주의는 고르바초프 정파를 적극적으로 지원.
- 나라 운영과 관련된 중요한 사안 결정이 당 중앙위원회로부터 국가 관료조직으로 넘겨지고 당의 역할이 감축됨과 동시에 중앙계획 체제도 빠르게 해체. 보수파에 대한 이념적 공격 격렬해짐. 중앙계획과 사회주의 체제가 경제 정체의 주된 원인이라 비난(그럼에도 불구하고 실제로는 소비에트 인민들의 실제 소득 평균 성장률은 서방을 훨씬 추월).
- 고르바초프, 계획경제 포기하고 위로부터의 정치개혁을 통해 서방형의 민주주의를 확립해야 한다는 주장 유포. 그러면서도 이를 사회주의의 본질을 옹호하는 조치라며 기만. 신사고가 공공연하게 자본주의적 관계를 부활시키기 위한 부적으로 활용. 마르크스의 잉여가치설 부정, 레닌의 제국주의론 부정. 계급투쟁 부정. 대신에 사회주의 국가와 자본주의 국가 사이의 脫이데올로기화가 지속적으로 요구됨. 매스컴에는 서방측 자본가들에 의한 경제, 정치적 개혁 처방전이 범람. 하버드의 학자들이 근대경제학 가르치기 위해 소련으로 초빙. 이런 반공선전 활동이 소련 공산당 지도부의 이름으로 행해짐!!!!
- 사회주의 옹호하던 7개 신문 모두 침묵 강요당하고 대중 매체는 세계의 모든 반사회주의 단체에 개방. 미국의 우익 TV설교자들이 소련의 대도시 방송에 등장. 이 모두를 미국의 CIA가 지원. 미국의 학자, 정부고문이 자본주의 경제와 부르주아 민주주의 설교. 서방의 포르노 개방. 해외 공산주의 신문 구독 모두 해약.
- 1990년 고르바초프가 생산수단의 공적 소유와 계획경제, 기타 소련의 사회주의적인 규정들 포기한다고 공식 선언. 1990년 말, 공적기업의 사유화와 주식거래소 설립을 위한 법률 공식적으로 통과. 이들 기업의 소유권을 서둘러 그것들을 경영하던 관료층에게 양도. 마피아적 신흥 자본가층이 독버섯처럼 성장. 이로 인해 생산수준 급격히 하락. 인민들의 생활필수품 심각한 부족 야기 --> 소비물자 수입. 경제 문호 개방. 서방의 물자 쇄도. 경이적인 대외채무. 국제적인 자본주의, 금융기관에 대한 종속 야기. 1990년 처음으로 국민 총생산, 국민소득, 노동생산성 하강. 산업 생산의 파국적 감소. 민족적 적대감이 고개를 처들기 시작. 제국주의 세력들이 육성한 지도자들에 의한 민족 간 다양한 분쟁과 군사적 충돌. 소련의 해체 위기 등장. 발트국가 소련 탈퇴, 옐친에 의한 러시아 탈퇴, 우크라이나, 벨로루시, 카자흐스탄 탈퇴
- 1991년 8월 사건(군부의 쿠데타 시도)이후 옐친은 소련 공산당을 불법화 하고 당의 자산 몰수하고 전국에서 당원들을 박해하고 체포하기 시작함. 1992년 소련을 궁극적으로 해체.
- 이 모든 과정은 위로부터의 친자본주의적인 쿠데타였는데 이는 1,900만 당원증을 가진 당원들의 의사를 반영한 것이 아니었고 소비에트 전 인민의 76%가 소련의 존속에 찬성했으므로 불법적인 것이었다. 이 모든 것은 국내의 관료, 테크노크라트 층에 의한 당 장악의 직접적 귀결이었다.
- 소련이 붕괴된 것은 사회주의 체제 내부에서 적대적이고 화해 불가의 모순이 전개된 탓이 아니었다. 이는 당 지도부 내부의 어떤 분파- 그들의 협소한 이해관계가 자본가 및 제국주의들의 이해와 일치하고 소련에서 사회주의를 파괴하는 활동에 대한 제국주의 국가들로부터의 무조건적인 지지로부터 거대한 이익을 누린 분파- 가 저지른 파괴활동의 결과였다. 이를 막을 수도 있었다. 그런데 당시의 노동계급은 왜 그리 무력하게 굴복했는가.
- 그 ‘신사고’가 당 지도부 자체에 의해서 표명되고 있었기 때문에 단호하게 그 본질을 알 수 없었다. 사상적으로 무장 해제된 것이다. 이에는 당 지도부에 대한 전통적인 절대적 존경과 신뢰에 기인한다. 그래서 재앙이 닥친 후에야 변화의 진정한 의미를 깨달았던 것이다. 고르바초프와 그 일당들은 그 신사고를 통해서 더 많은 사회주의를 약속했던 것이다.
- 이 모든 파멸적인 변화가 당의 이름으로 진행되었기 때문에 근로 인민들은 악화되는 자신들의 처지가 당과 사회주의 국가 탓이라고 비난하기 시작했다.
- 왜 노동계급은 이 변화에 단호하게 대응하지 못했을까. 1. 사회주의 건설과정이 돌이킬 수 없는 단계까지 도달했다고 보아서 2. ‘전체 인민의 당’이라는 개념이 당 내부의 非프롤레타리아적 경향에 대항하는 공산당원들의 힘을 상대적으로 약화시킴. 3 사회주의적 성장을 가속하도록 발전을 지도하는 임무가 당의 지식인과 전문가그룹으로 넘어가면서 노동계급의 참여가 배제됨. 4. 공산당이나 사회주의 국가에 대한 공개적인 비판이 금기시되던 세계 공산주의 내부의 정치적 현실주의.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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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독후감을 읽은 남녘의 통일운동가 정모 선생의 댓글은 위의 책에서 거론하지 않은 가장 핵심적인 소련패망의 원인을 짚어주기에 여기 함께 소개한다.>
"소련 패망의 가장 중요한 원인을 꼽으라면 능력을 가진 올바른 후계자 양성에 실패한 스탈린때문이죠. 레닌은 스탈린이라는 뛰어난 후계자를 두었으나, 정작 스탈린은 수십년 최고지위에 있으면서 후계자양성에 관심이 없었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령도핵심은 어려서부터 교양되어야하고 선대들의 혁명과업을 충분히 뼈에 새겨서 혁명계승과 발전을 해야합니다
조선은 혁명계승에 성공하여 세계으뜸국가를 만들었습니다.
령도핵심(최고지도자)=지도골간(당)=인민이 일치되게한
김일성주석과 항일혁명동지들이 혁명을 계승발전시킨 것이 조선의 오늘입니다.
러시아 푸틴은 대통령이 된후 가장먼저 찾은 나라가 조선이라고 합니다. 그는 소비에트연방국가들이나 유고연방, 동독등이 모두 자본주의체제로 분화되었는데 오직 조선 한곳만 조선식 사회주의체제가 굳건한 것에 주목하고 조선을 배우러 간것입니다.
지금의 러시아인들은 푸틴(뿌친)에 대하여 최고라고 여기며 다행스럽게 여기고있습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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