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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승 칼럼] 과거를 회고한다 18. 우리 가족과 이웃집 가족들의 재입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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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강산
댓글 0건 조회 6,268회 작성일 20-12-16 02: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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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승 선생은 이번 글에서 그와 이웃집 가족들을 9.28 후퇴 이후에 재입산 시키지 않을 수 없었던 미군을 비롯한 유엔군이 진격해온 당시의 삶과 죽음이 오가는 처절한 상황을 설명하고 있다. [민족통신 편집실]

[김영승 칼럼] 과거를 회고한다 18.

우리 가족과 이웃집 가족들의 재입산

김영승 선생 (비전향 장기수, 통일운동가)


1950년 7월 23일 인민군대에 의해서 해방세상이 되었다.

큰형은 리 민청위원장을 했고 둘째형은 의용군 제 1기 모집에 들어갔고 둘째 형수는 리 여맹위원장을 했다.

손위 누나는 면 여맹 선전부장을 하다 9.28후퇴 후 면당 연락과장을 했다. 불갑산으로 이동해 와서는 면 여맹위원장으로 활동하다가 불갑산 2월 20일 작전을 맞이했다.

우리 묘량면 삼학리 자위대는 후퇴 후에도 얼마동안 리에 남아 이 마을 저 마을 이동하면서 숨어 있다가 자기 세상인양 날뛰는 반동들을 잡아들이고 있었다.

유엔 16개 침략군들이 진격해 들어올 때는 살인 강간 방화 약탈을 하면서 들어오기 때문에 그들의 망에 걸린 자는 하나도 살아남는 자가 없다시피 하고 있었다.

특히 우리 유가족이나 협력한 자는 숨어 있다가 살아나온 자들의 밀고에 의해서 즉결처분 당하는 학살만행이 자행되고 있었다.

공중에는 미제의 쌕쌕이들이 맹폭격을 하는데 특히 기독교 목사 선교사들이 숨어 있다가 광주에서 영광으로 걸어서 들어오는 것도 목격했으며 그들은 밤에는 비행기가 떴다하면 라이타불을 켜서 반짝이면 폭격이 자행되어 민간인이 피해를 입고 있었다.

그리고 우리 마을 건너 내촌마을에 강씨들이 집단으로 살고 있는데 일제 말기부터 50년 전쟁이 일어날 때까지 밀대질을 많이 해서 민간인들은 그들의 위압에 눌려 쥐죽은 듯 살아야 했다.

그런데 그 강씨 집안에 경찰 한명이 있었는데 합법 때 잡으려고 애를 썼으나 잡지 못하고 후퇴했는데 살아 돌아와서 우리 마을 청년들을 남김없이 살륙하는 만행을 자행했다. 이러한 환경 속에서 입산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하여 우리 마을 사람들은 장성 태청산으로 피신했던 것이다.

유엔 침략군들이 들어와 자리를 잡고는 토벌작전에 배길 수 없어서 당시 면당부에서는 메가폰으로 다시 고향마을로 돌아가라고 선전하면서 설득작업을 해서 우리 마을 사람들은 마을로 돌아와 사는데 다시 진주해온 삼학출장소 경찰대들은 피난갔다 돌아온 마을 사람들을 자수하면 살려준다고 해놓고 자수한 사람들을 고문하여 빨갱이로 몰아 죽이고는 상부에는 도주해서 사살했다고 허위보고를 했다 (이는 당시 출장소 소사로 있다 영광경찰서 사찰계 형사까지 하다가 정년퇴직한 강대인씨의 증언).

여기에서 우리 유가족과 협력한 사람을 고문으로 강제 자백을 받은 자들 30여명을 우리 마을 밑에 있는 포천마을에서 불갑면으로 넘어가는 시산재에 끌고가 구덩이도 파지 않고 산비탈 노상에 잔인하게 학살했다 (이는 포천마을 이이천이란 사람이 당시 의경으로 있어서 자기가족은 무사했고 학살의 실상을 증언함).

그리고 당시는 제2국민병을 강제로 동원시켜 동절에 끌고 가다 굶기고 동사시키는 만행을 자행하고 있는 때라 가족을 다시 불갑산으로 입산시키기 위에서 두 번이나 설득작업 끝에 재 입산시켰던 것이다.

당시 필자는 불갑지구당부에 있을 때 한차례 내려가 집에 들렸는데 아버지 혼자 계셨다.

나를 얼싸안고 살아 내려왔다하며 아무개도 무사히 중학을 다니고 있으니 올라가지 말고 함께 살면서 학교에 다니라고 설득시키는 것이었다.

당시는 불갑산 유격대와 영광유격대, 전북 유격대가 합동작전을 하여 영광을 재 해방시킨다고 할 때였다. 그래서 지금 제2국민병을 모집해 끌고 가니 조금만 더 피신하면 해방세상이 오니 입산해야한다고 권고하고 며칠 날 다시 올 것이니 준비하고 있으라고 한 후, 이웃집에 무명실을 뽑는 물레 품앗이 가셨던 어머니를 뵙기 위해 갔었다.

인기척을 하고 문을 열고 들어가 인사를 하니 깜짝 놀라며 어떻게 된 일이냐고 하신다. 이웃 어머님들 5명이 한 방에서 일을 하고 있었다. 영광해방작전계획을 하고 있을 때라 얼마만 참고 기다리면 해방세상이 온다고 선전하면서 입산해야 한다고 말을 남기고 어머니를 모시고 집으로 와서 입산준비를 하고 있으라는 말만 남기고 불갑산 지도부에 도달하니 날이 부옇게 새고 있었다.

그후 며칠 지나서 다시 내려가 집을 찾아 갔는데 텅텅 비어 있었다.

그래 이웃집 할머니와 손자들과 같이 불갑산으로 오는 길에 용천사 뒤 능선 길에서 우리 부모님과 여동생 둘, 이웃집 신대양반 부부와 손자들이 이불짐을 짊어지고 오는 것을 반갑게 만났다.

이리하여 오도치 마을의 타버린 집터 위 구들방에 가운데를 칸막이해서 두 집이 살다가 1950년 2월 20일 작전을 맞이하게 되었다.

설명한대로, 입산 유가족들이라 당시 미제의 점령하에 비참하게 죽지 않고 살아남기 위한 불가피한 상황에서 우리 동네 세 가족을 재입산 시키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2020. 12/15일 필자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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